광풍무(164)
[다시 강호로!]
사람이 이렇게도 바뀔 수가 있을까.
유몽과 광치는 잘못 보았나 싶어 연신 눈을 비비고 귀를 후벼 팠다.
살수나 맨발로 부르는 호칭은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부르는 어감은 온몸에서 닭살이 돋을 정도였다. 새벽 일찍 밥을 먹었다면 토했을지도 모른다고 두 사람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출병을 시작한다 이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형님. 불도각과 광마각 무인들이 오늘부터 광풍성을 떠난다고 들었습니다.”
보고를 하는 유몽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차라리 실기를 머금던 말이 훨씬 듣기 좋았다.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나 싶어 섯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혹시?”
일순 유몽은 깜짝 놀란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그가 순한 양처럼 변한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한 가지밖에 없다. 더구나 까칠한 얼굴과 눈 밑의 검은 그늘은 첫날밤을 치른 신랑에게서나 발견될 수 있는 증상이었다.
“축하드립니다, 형님! 드디어 해내셨군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유몽은 직각으로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됐어, 임마! 그럼 오늘 출정식이 있는 거냐?”
섯다는 연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별도의 출정식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바로 떠난다고 합니다.”
“그래...... 드디어 시작인가.”
고개를 끄덕인 섯다는 방을 나섰다.
잠시 후 섯다 일행이 도착한 곳은 혈뇌각 백산 거처였다.
백산 일행은 떠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광풍성이 성공한다는 조짐을 보았소. 그러니 걱정 마시오.”
“녀석, 그럼 자식을 볼 수 있는 거냐?”
“당연하지, 많이도 말고 열 명만 낳을 거요. 그런데 누굴 데라갈 거요?”
걱정스런 얼굴로 섯다는 물었다. 전쟁을 치르는데 누구 한 명 위험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터이지만, 아무래도 임신을 한 주하연이 마음에 걸렸다.
“살수, 저 녀석들과 광치 일행, 그리고 구양중을 데리고 가야지. 혈뇌문 문도들도 뒤를 따를 테고.”
“그 정도로 되겠소?”
“별 걱정을 다한다. 내 걱정은 접어두고 너희들이나 잘해. 나가자!”
준비를 마친 일행은 밖으로 나왔다.
맨 먼저 백산 일가 세 사람이 나섰고, 철웅을 비롯한 혈뇌문 무인들이 뒤를 따랐다.
“살수야! 맨발아!”
“네, 형님!”
“잘 모셔라! 만일 형수님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너는 그날로 제삿날이 된다는 걸 명심하고.”
백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섯다는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가 걱정하는 사람은 백산이 아니었다. 백산의 삶을 지탱해 주는 두 여인이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백산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가족이다.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형님. 두 분 주모님을 지키는 데 목을 걸겠습니다.”
유몽은 확신하듯 말했다.
“그래야지, 그만 따라가 봐라!”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유몽의 신형이 천천히 허공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를 따라 월영은둔술을 시전한 잠영오살은 은밀히 백산 주변으로 다가갔다. 지금부터는 허공에서 먹고 허공에서 잠을 자야 하리라.
전 수하들의 환송을 받으며 백산 일행은 광풍성을 나섰다.
광풍성을 떠난 일행이 도착한 곳은 장강하구인 장포였다. 운남으로 가는 길 역시 선박을 이용할 참이었다. 뱃길로 사천까지 간 다음 그곳에서 남행하여 운남으로 갈 것이다.
“하연아, 놈들도 보고 있겠지?”
선실로 들어가 짐을 푼 백산은 낮은 목소리로 주하연을 불렀다.
“그럴 거예요. 특히 통천연맹은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겠지요.”
“겁 안 나?”
“킥! 오빠도, 우리 둘만 있을 때도 이겼잖아요.”
주하연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때와 비하면 지금은 놀러간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천붕회 문파와 남천벌 북황련, 전 무림의 공격을 뚫고 소림사로 가지 않았던가. 몇 번씩 쓰러지면서.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백산이 쓰러지는 일도, 쓰러진 그를 보며 눈물짓는 일도.
가로막는 자들을 전부 없애고, 황실보다 더 강한 문파를 세우고 말 것이다, 강호 무림에.
“그랬지. 지금은 우리주변에만 해도 이백 명이나 있지. 살수도 있고, 광치가 있고, 철웅이 있지. 이제는 이기는 것만 남았구나.”
“맞아요. 이길 수밖에 없어요. 질 수가 없는 전쟁이라고요. 더구나 그들은 두 문파를 하나로 합치고 있는 상황이죠. 단순히 수뇌 둘이서 우리 하나라 합치자 한다고 되는 건 아니라는 말이에요.”
대연무장에서 했던 말이고, 광풍성의 소속 무인들을 나눌 때도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이다. 북황련 무인들과 남천벌 무인들을 얼마나 잘 조화시키느냐에 따라 통천연맹의 강함은 결정될 것이다.
그들이 내부로부터 제대로 된 통합을 이뤘다면 광풍성은 힘든 싸움을 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빠른 시간 안에 강호 무림을 정복하게 될 것이다.
“개방과 연락은 어떻게 취할 거지?”
백산은 설련을 향해 물었다.
“경공에 능한 자들을 오백 명 뽑았어요. 앞으로 모든 정보 전달은 그들이 맡아서 할 거예요.”
대와선전이라 명명한 이번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은 다름 아닌 개방 무인들이다. 적과 아군의 위치를 동시에 파악하여 전달해야 하는 임무를 그들이 맡은 것이다.
“이번에는 통천연맹도 숨겨둔 모든 전력을 도해 내야 할 거예요. 불사삼요나, 불사삼살까지도.”
살기를 머금은 설련의 목소리가 실내를 타고 울렸다. 가문을 멸문시킨 자들, 원수가 뻔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백산과 같이 은거를 택하려 했다. 그들을 치기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힘이 생겼다.
복수할 수 있는 힘이.
두 문파를 하나로 합치는 작업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흡수 병합이 아닌 일대일 합병은 특히 복잡했다. 맹의 이름은 정했지만 이것저것 걸리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조직 구성은 어떤 형태로 만들 것인가부터 시작하여, 만들어진 조직의 수뇌는 북황련 무인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남천벌 무인으로 앉힐 것인가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협의를 해야 했다.
“빌어먹을.......”
통천연맹 공동 맹주실로 향하는 제갈승후는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섬서성으로 옮긴 뒤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만여 명에 달하는 대병력이다. 그들에 대한 자료만 해도 산더미처럼 많았다. 지난 한 달간 그것들을 전부 검토해야 했다.
새롭게 들어선 통천연맹은 과거 북황련 시절과는 전혀 다른 체계였다. 중원 전역을 아우르기 위한 배치로 총단보다는 주변에 있는 지부에 더 중점을 두었다. 그 때문에 일이 더욱 복잡해진 것이다.
“토론할 시간이 있으면 건물이나 좀 빨리 짓도록 할 일이지.”
주변을 둘러보자 다시 짜증이 밀려왔다. 갑자기 결정된 통합의 부실함은 여기저기 드러나고 있다. 오히려 총단으로 들어온 자들보다 지금은 지부로 변해 버린 산서성이나 북황련 건물에 남아 있는 자들이 훨씬 편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 또한 부하들에게는 은연중에 불만 사항으로 작용하고 있는 듯했다.
정비되지 않아 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연무장을 가로질러 통천연맹의 맹주전 건물에 도착한 제갈승후는 우뚝 멈춰 섰다.
맹주전 정문 앞에서 한 인물을 발견했던 탓이었다.
검은 장포로 온몸을 감싼 인물.
“제군?”
몸을 으스스 떨던 제갈승후는 낮게 중얼거렸다. 햇빛을 극도로 싫어하여 머리까지 온통 검은 천으로 감싸고 있는 인물. 그는 남천벌의 불사삼요를 조정하는 제군이었다.
무공으로 보면 제군은 그다지 강한 자가 아니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 풍기는 기이한 기운은 왠지 모를 섬뜩함을 자아낸다.
제갈승후가 몸을 떨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요왕(妖王)이 탄생했네.”
고개를 숙이는 제갈승후의 귓전으로 거북한 소리가 흘러들었다. 제갈승후는 흠칫 놀랐다.
요왕. 말로는 불사삼요를 지배하는 권능을 가진 자라 하였다. 하지만 그보다 그가 더욱 놀란 것은 제군이 요왕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의도였다. 그것도 기다리면서까지.
제군의 의도를 생각하느라 머리를 굴리고 있으려니 거북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전설로 알려진 불사삼괴의 시작은 이천 년 전이었네. 파멸안을 막기 위해 제강된 강시들이었지. 그런데 지저사령계는 불사삼괴를 지배할 요왕이 탄생하기도 전에 파멸안에 의해 유린을 당했네. 그래서 불사삼괴는 세 개로 나뉘어 찢어졌어. 그런데 그 요왕이 이번에 탄생했지. 반인반마의 완전힌 신체로 말이네. 원래 요왕의 재목은 우리 가문에서 나올 예정이었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고개를 든 제갈승후는 제군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냥 알려주는 걸세. 통천연맹에서 요왕보다 강자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라고 말이네. 설사 반신육천역의 힘을 얻어 신가의 무공을 익혔다고 해도 마찬가지네.”
‘헉!’
제갈승후는 놀란 신음을 삼켰다. 전혀 엉뚱한 장소에서 변수가 돌출한 것이다. 통천연맹의 최강자인 두 맹주들보다 더한 강자가 나타나다니. 더구나 제군의 말이 맞다면 그는 불사삼괴의 실질적인 주인이라 할 수 있다.
“그 말 사실입니까?”
믿을 수가 없었다. 불사삼괴가 별도가 아닌 하나였고, 그들을 지배할 자가 요왕이었다니. 위지천악은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우리 가문에만 내려온 비밀일세.”
“어떤 가문이오?”
하지만 제갈승후는 제군의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내달 보름에 깨어날 걸세.”
“으음!”
망연한 눈으로 제군을 쳐다보던 제갈승후는 급기야 신음을 뱉어냈다. 통천연맹의 최강자인 요왕의 출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아니 제군의 행동으로 보건대 상관인 남효운에게는 보고하지 않은 게 분명하다.
“나에게 원하는 게 있다는 말인데....... 두고 보면 알겠지.”
멀어지는 제군에게 시선을 주던 제갈승후는 맹주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원수조차 없는 황량한 정원을 질러 곧장 회의실로 들어갔다.
“어서 오게, 총사!”
아직은 완전힌 자리를 잡지 못한 탓에 회의실에는 위지천악과 남효운 두 사람만 앉아 있었다. 이번에 통합맹을 만들면서 생긴 변화가 바로 중간 단계를 없애는 것이었다.
섬서성을 기준으로 동서남북 네 곳에 만들어진 지부에 직접 명령을 내리겠다는 의도로 추진된 일이었다. 그런 조직 구조에 대해서는 제갈승후도 반대하지 않았다.
중간 단계를 거치지 않는다 함은 그만큼 전장의 상황 전달이 빠르고 대처하기가 쉬워진다. 더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 모든 정보가 자신에게 먼저 들어온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놈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위지천악이었다.
“그곳에 풀어놓았던 밀정들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급하게 맹주전을 찾았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하루에 한 번 꼴로 올라오던 보고가 삼 일 전부터 뚝 끊겼다. 그들에게 문제가 발생했다는 의미이리라.
“진으로 내부는 보이지 않게 하고, 밀정들은 전부 없앴다면 뭔가 하고 있다고 봐야 하는 건가?”
“그들에게 그럴 여력이 있을까요? 아니 설사 여력이 있다 하더라도 기껏 사천의 병력이지 않습니까?”
두 사람을 쳐다보며 말을 꺼낸 사람은 남효운이었다. 천붕십일천마와 광풍성,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곳임에는 분명하지만 병력은 사천에 불과하여 통천연맹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광풍성의 입장에서는 통천연맹이나 사령계를 도발하기보다는 전쟁을 위해 세를 확장해야한다는 게 남효운의 생각이었다.
“저도 맹주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립니다. 광풍성주가 사령계 개파대전에 참석한다면 성을 비우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고.......”
제갈승후는 말끝을 흐렸다. 오늘 보고할 내용 중 가장 중요한 사항이 바로 귀광두의 출타다. 수하들을 모집하여 광풍성을 키워야 할 중요한 시점에서 개파대전에 참석하기 위해 성을 비우다니.
상식 밖의 행동인 것이다. 분명 무엇인가 있는 것 같은데 알 수가 없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까 총사 말은 귀광두가 운남으로 향했단 말인가?”
위지천악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귀광두, 북황련과 남천벌을 통합할 수밖에 없게 만든 제일 원흉. 놈이 없었더라면 북황련이 지금처럼 약해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남효운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게 바로 귀광두 때문인 것이다.
“그렇습니다, 맹주님. 그런데 그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의도는 무슨. 병력을 모집하기 위해서겠지.”
위지천악은 비릿한 조소를 흘렸다. 아는 바로는 귀광두에게는 초대장이 발부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사령계를 찾아간다는 것은 그곳을 찾는 무인들 때문이라 봐야 한다.
자신이라 해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준비를 해 두어라, 우리도 가야겠다.”
“맹주님!”
제갈승후는 깜짝 놀라 위지천악을 쳐다보았다. 지금껏 사령계 개파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그다. 그런데 사령계를 찾아가겠다고 하다니.
“광풍성주도 참여하는 곳이다.”
“으음!”
제갈승후는 나직한 신음을 뱉어냈다. 위지천악의 말이 틀리지 않았던 까닭이다. 사천의 병력을 가진 광풍성주마저 참석하는 곳에 불참한다면 강호 무인들은 통천연맹을 우습게 볼 터이고, 귀광두가 무서워 참석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생길 것이다.
위지천악이 직접 참여하겠다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광풍성의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상대가 다름 아닌 봉선군주 주하연이었기에 더욱 마음에 걸렸는지 모른다. 북황련과 남천벌의 추격을 뿌리치고 도망친 그녀가 아닌가. 도망치던 와중에 그녀는 귀광두를 만났고, 그와의 악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누굴 대동하실 겁니까?”
“청발광자를 불러라!”
“혈루광소인(血淚狂笑人)을 데리고 가시겠습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제갈승후는 재차 물었다.
청발광자(靑髮狂者) 적조황(狄鳥荒).
그는 북천지옥대 서열 일 위 인물이자 혈루광소인을 이끌고 있는 자다. 북천지옥대 무인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그 또한 한 번도 강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반시웅의 경지를 보았을 때 위지천악보다 약자가 아니라는 사실만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정도는 돼야지. 남 맹주도 같이 가도록 합시다.”
고개를 끄덕인 위지천악은 남효운을 쳐다보며 말했다.
“글쎄요, 생각 좀 해 봐야겠습니다.”
그다지 내키지 않는 듯 남효운은 어색한 미소를 물었다. 북황련 무인들로만 구성된 사절단에 끼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탓이다. 아니 위지천악을 완전하게 신뢰할 수 없다고 봐야 옳을지도.
“편할 대로 하십시오.”
위지천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사리는 남효운이 이해가 됐다. 자신 또한 그와 같은 경우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적보다 아군을 더 신경 써야 할 시기인 것이다.
“지부에서 올라온 소식은?”
위지천악은 제갈승후를 향해 물었다.
“별다른 소식은 없습니다. 내실을 다지고, 강호 정세를 파악하는 데 온 힘을 다하라고 해 두었습니다.”
“좋아, 우선 사령계 개파대전에 참석해 그들의 실력을 눈으로 확인한 다음 전쟁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
“알겠습니다, 적조황에게 연락하여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맹주에게 고개를 숙인 후, 제갈승후는 밖으로 나왔다.
“재미없군.”
뿌옇게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제갈승후는 숨을 토해 내듯 중얼거렸다. 재미없다. 요즘 들어 부쩍 그런 생각이 든다. 언제나 이인자 자리만 고집했고, 지금껏 그렇게 해 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의사결정이 없는 이인자 자리가 못마땅했다. 위지천악에 대해 그다지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짜증이 난다.
노심초사 강호를 살피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자신에 비해 두 맹주는 너무 안일한 생활을 하는 듯 보였다.
더구나 사령계에 이어 무극계라는 단체까지 등장하지 않았던가. 변황사패천이 주 세력이라 하였지만 그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두 맹주는 통천연맹이 최고인 양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면 때문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달 보름이라 했던가?”
문득 대문 앞에서 만났던 제군이 떠올랐다.
새롭게 태동한 무극계만큼이나 신비스러운 자. 그가 무슨 이유로 자신을 기다렸는지, 그의 말처럼 요왕이라는 자가 통천연맹 최강자일지 여전히 의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요왕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지금은 요왕보다 무극계에 더 구미가 당겨. 변황사패천 뒤에 숨어있는 진실한 정체가 더 궁금하다고.”
제갈승후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무극계 또한 중원에 욕심을 가졌다면, 이번 사령계 개파대전은 무극계를 강호 무림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할 수 있다.
제갈승후가 그들이 나타날 거라 확신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변황사패천의 주인으로 등극한 무극계에서도 운남을 향해 떠나는 행렬이 있었다. 느긋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이들. 용황신가의 소가주인 순우창천 일행이었다.
“대환, 난 저곳을 볼 때마다 짜증이 나. 이 황량한 곳을 계속 지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기련산 꼭대기에서 반짝이는 광채를 가리키며 순우창천은 말했다. 일 년 내내 얼어붙어 있는 빙하였다. 일 년에 한두 번 본다면 빙하를 예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을 뜨면 보이는 빙하는, 황량한 곳에 살고 있는 자신의 처지만 상기시켜 줄 뿐이다.
“내년부터는 저 빙하를 보지 않으셔도 될 겁........”
기련산을 쳐다보던 공손대환이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왼팔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무의식중에 기련산을 가리키려 했었던 것이다.
“아직도 불편한가.”
“아닙니다, 소가주님!”
공손대환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천괄과 이루어진 두 번째 대결은 이십년 전과는 달랐다. 자신은 왼팔을 잃고, 둘째인 담대만우(澹臺滿雨)는 오른쪽 눈을, 셋째인 단목철령(端木哲令)은 단전에 부상을 입어 내공의 태반을 잃었다. 넷째인 장손광우(長孫廣宇)는 죽임을 당했다.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든 놈들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서 넷을 척살했지만, 너무 큰 대가를 지불하고 말았다.
“참! 북경에서 들어온 소식은 더 없는가?”
공손대환의 호흡이 다소 거칠어진 듯하자 순우창천은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은 빨리 잊는 게 상책이란 생각에서였다.
“여전히 미궁 속입니다. 하후 가주를 없앴던 자들이 사령계 인물이란 사실만 알아냈을 뿐 그 이상은 없습니다.”
“그런가?”
이번엔 순우창천이 인상을 찌푸렸다. 네 가신 중 두 명이 당한 것보다 더욱 큰 타격은 하후장설의 죽음이었다. 아니 이십 년의 세월에 걸쳐 마련했던 정계 거점이 무너졌다는 사실이 더 큰 손실이었다.
자연스럽게 중원으로 진출하고자 했던 계획을 전면 수정하고, 전쟁을 준비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만 것이다.
“사풍대란 조직의 대주라고 했던가?”
“그 또한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확인된 사실은 귀광두뿐인가?”
“그렇습니다, 소가주님. 그 또한 부하들을 데리고 사령계로 가는 중이랍니다.”
“좋군! 이번 기회에 지옥군도가 당한 빚을 받을 수 있겠어. 악마군단(惡魔軍團)은 어디쯤 따라오고 있나?
싱긋 미소를 문 채 순우창천은 물었다.
악마군단, 천룡천가(天龍天家)가 장악하고 있는 신강 악마사원의 주력으로, 이번 중원행에 오백 명을 동원했다.
중원 정복을 위한 선발대였다.
“하루거리를 두고 뒤따르고 있습니다.”
“운남에 도착하면 동쪽으로 포진시켜 광풍성으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게.”
“알겠습니다, 소가주님!”
“서둘러 가야겠구먼.”
다시 한 번 가련산 쪽으로 힐끔 시선을 준 순우창천은 빠르게 몸을 날렸다.
“어서 오십시오!”
남궁미령을 맞이하는 남궁무는 병자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검게 그림자 드리운 눈두덩과 움푹 파인 볼은 아사 직전의 몰골과 흡사했다. 실상 남궁무는 그동안 거의 음식을 입에 대지 못했다. 아니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전쟁은 임박해 오는데 남궁세가는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외톨이였다. 백 년 전에도, 오십 년 전에도 남궁세가는 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완전하게 고립된 적은 없었다. 나름대로 준비를 했고, 할아버지와 오대가신이라는 튼튼한 버팀목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가문을 지탱해 줄 육대신마는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것도 남궁세가와 하나라 여겼던 천붕십일천마를 공격하다가.
“심려가 많았구나.”
남궁미령은 안쓰러운 얼굴로 남궁무를 쳐다보았다. 조금만 더 생각이 깊었더라면 지금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 터이다. 다른 가문들과 마찬가지로 광풍성 일원이 되어 어깨를 펴고 다녀야 할 녀석이 죄인처럼 살고 있다.
자업자득이라지만 친정집이기에 가슴은 더욱 쓰라렸다.
“제 스스로 자초한 일인데요, 뭘. 그런데 어딜 가십니까?”
그녀의 복장이 평소와 달라서 묻는 말이었다. 팔십이 가까운 노인네가 무복을 걸친 채 검을 차고 있다. 광풍성에 변화가 생겼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출병했다!”
“네?”
그래도 아직은 정신이 남아 있었던 걸까. 힘없이 누워 있던 남궁무는 벌떡 일어났다. 출병이라니, 천붕십일천마가 있지만 강호 세력 중 가장 약한 곳이 광풍성이다.
인원을 뽑아 세를 불려야 할 입장에 있는 곳이 아닌가.
“그런 사람들이라는 걸 몰랐냐?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글쎄요. 뾰족한 수가 없지 않습니까. 적이 오면 목숨을 걸고 막아내야지요.”
놀람도 잠시 남궁무는 고개를 푹 숙였다. 문득 전쟁이 임박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남궁세가가 살아남을지 그것도 의문이지만, 세가를 보존한다고 해도 갈 곳이 없다. 답답한 마음뿐이었다.
“광풍성으로 가라. 이왕 죽을 거라면 그곳에서 죽어라!”
“누님?”
남궁무는 질겁한 얼굴로 남궁미령을 쳐다보았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님과 매형이 없었다면 남궁세가는 이미 멸문 당했을 터이다. 그런데 광풍성을 지켜 달라니.
“지금 광풍성은 무공이 없는 사람만 남아 있다.”
“그럼 아까 했던 말이 일부가 아닌 전부란 말입니까?”
남궁무는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하니 가까스로 세운 광풍성을 비워 버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진으로 내부를 보지 못하게 했을 뿐 광풍성은 텅 비었다. 이제 네가 해야 할 일을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누님!”
남궁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남궁세가를 살려 낼 마지막 기회였다.
“제 목을 걸겠습니다.”
“그래, 여기 광풍군림대진의 해진도다. 그곳까지 이동은 네가 알아서 해라.”
“걱정 마십시오.”
“그래, 수고해라! 난 가야겠다.”
“벌써 가시려고요?”
“내가 제일 늦었다.”
고개를 끄덕인 남궁미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됐다는 생각뿐이었다. 광풍성만 잘 지켜준다면 살우 도련님이나 형님의 화를 풀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누님.....! 고맙습니다.”
“어쩌겠냐. 미우나 고우나 형제인 걸.”
희미한 미소를 나기며 남궁미령은 밖으로 나왔다.
“하여간 같이 들어가서 얼굴 좀 보면 어디가 덧나요?”
기다리고 있던 석두를 향해 눈을 흘겼다. 남궁세가 앞에까지 따라왔지만 그는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절했다. 광풍성을 맡기긴 하지만 여전히 용서하지 않았다는 의미인 것이다.
“굳이 나까지 들어갈 필요가 있나. 그런데 한다고 했소?”
“고맙다고 전해 달랍디다.”
“쿡! 진작 말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걸.”
석두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까짓 이름이 뭐라고, 그렇게 집착해야 했는지 과거나 지금이나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그들의 속내를 알지 못할 것이다. 자라 온 환경이 다르고, 정립된 가치관이 다르기에.
“갑시다!”
“고마워요.”
앞서가는 석두를 향해 남궁미령은 흘리듯 말했다.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것처럼 했지만, 형님인 주하연이 남궁세가를 용서한건 남편의 도움이 가장 컸다.
“부부간에 새삼스럽게....... 빨리 갑시다. 가다가 객잔에 들러 밥도 먹고, 시장에서 당신 옷도 좀 사고.”
“킥! 창피하지 않겠어요?”
남궁미령은 피식 웃었다. 지금 하는 말은 반노환동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이 객잔에서 늘어놓았던 불평이었다. 그 말을 그가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마누라하고 같이 가는데 뭐가 창피해. 녀석들 말처럼 할 수 있다면 늦둥이라도 갖고 싶은 시정이구먼.”
“노망났어요? 우리 나이를 생각해야죠.”
하지만 말과는 달리 싫지 않는 듯, 남궁미령의 얼굴이 발그스름 달아올랐다.
“우리 나이가 뭐 어때서. 아직 팔팔한데. 아직은 젊은 놈들 못지않다고.”
남궁미령의 손을 덥석 틀어쥔 석두는 전면을 향해 몸을 날렸다. 목적지인 감숙성은 상당히 멀지만, 조금 서두른다면 둘만의 호젓한 시간을 가질 여유는 충분할 것 같았다.
“무공을 쓰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얼굴을 스치는 바람처럼 남궁미령은 상기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전쟁을 치르러가는 것 같지가 않았다. 남편과 같이 유람을 가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등을 긁어 줄 남편이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다고!”
급기야 남궁미령을 품 안으로 끌어들인 석두는 서쪽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몸을 날렸다. 이내 두 사람의 신형은 까마득한 점이 되어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남궁미령과 석두가 서쪽으로 몸을 날리는 그 시각.
먼저 출발했던 백산 일행은 사천성에 도착하여 그동안 쌓인 여독을 풀기 위해 객잔에 들었다.
이백여 명이나 되는 무인들이 한꺼번에 몰려다닐 수가 없어, 대여섯 명씩 조를 짠 일행은 운남에서 만나기로 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해서 백산을 따르는 이들은 유몽과 잠영오살, 광치 그리고 구양중과 철웅이 전부였다.
“야 곰! 그 혈묘 말이다, 너무 표 나는데 웬만하면 다른 녀석에게 맡기지.”
촉루(蜀樓)란 간판이 걸린 객잔 앞에서 광치가 철웅이 등에 메고 다니는 닻을 가리키며 말했다. 워낙 특이한 무기였던 탓에 길 가던 모든 사람들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한 번씩 돌아보았던 것이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이걸 들고 다닐만한 녀석들이 없습니다.”
철웅이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그가 생각해도 혈묘는 그 크기가 너무 컸다. 처음 만들 때만 해도 혈묘와 함께 중원을 일주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한 번 쓰고 버릴 생각이었는데, 그동안 정이라도 들었는지 고향에 두고 오지를 못했다.
“하여간 문주나 부하나 특이해.”
광치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철웅의 말처럼 몇 백 근이나 나가는 닻을 딱히 맡길 사람도 없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혈묘는 철웅의 무기가 아닌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일행은 촉루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옵쇼!”
일행을 향해 고개를 숙이던 점소이 운두는 화들짝 놀랐다. 오랜 세월은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특이한 일행은 처음 보았던 탓이다.
눈이 확 뜨일 정도의 미녀 셋에 냉막한 인상을 지닌 일곱 명은 그런대로 봐 줄만했다. 운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던 것은 그들 곁에 있는 세 명의 남자 때문이었다.
거은 가사를 걸친 중과, 맨발의 사내, 그리고 바다에서나 쓰일 법한 엄청난 크기의 닻을 등에 걸친 그들은, 경극단의 광대 같았다.
“아야! 우리 그냥 갈까?”
“아이고, 죄송합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백산의 물음에 운두는 호들갑을 떨며 그들을 안내했다. 운두가 백산 일행을 안내한 곳은 촉루 이 층 창가였다. 점심때가 지나서인지 객잔 안은 한산했다.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다섯 명이 유일한 손님이었다.
그들에게 시선을 주고 있던 백산은 점소이가 다가오자 바로 주문을 했다.
“주방장에게 북경요리 잘하는 것 있으면 만들어 오라고 해.”
“북경요리요?”
운두는 뜨악한 얼굴로 일행을 쳐다보았다.
생긴 것처럼 음식을 시킨다는 생각을 하면서.
“모른대?”
“아, 아닙니다. 당장 가서 말하겠습니다.”
운두눈 찻잔과 주담자를 내려놓고 황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양중아!”
“아, 네 주공!”
백산의 부름에 구양중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아까부터 뭘 그리 넋을 놓고 쳐다보는 거냐? 설마 바람피우고 싶어서........응?”
구양중의 시선을 좇던 백산은 덩달아 놀랐다. 한쪽 구석 자리에 방갓을 쓴 다섯 명의 인물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 왜소한 체격의 방갓인 한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네 명에게서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강시......? 아닌데 저 정도면 활신데?”
깜짝 놀란 백산은 구양중을 쳐다보았다. 일반 강시라면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네 구의 강시는 왜소한 인형을 호위하듯 의자에 둘러앉아 있다. 유연성을 유지하고 있는 강시는 활시부터라고 했던 구양중의 말이 떠올랐다.
활시란 말에 상대도 놀랐는지 이편을 쳐다보았다.
“오라버니!”
고개를 돌린 상대의 입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후?”
구양중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오빠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밖에 없다. 칠 년 전, 마교를 떠나올 때 같이 도망쳤던 여동생 구양미후, 그녀의 목소리였다.
“맞구나!”
방갓을 벗어 던진 구양미후가 백산 일행이 있는 탁자로 다가오며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에 뿌연 물막이 어렸다.
지금껏 오빠가 살아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 있었다. 과거보다 훨씬 강한 무인이 되어 눈앞에서 웃고 있다.
한동안 서로를 응시하던 둘은 와락 껴안았다.
“미후야!”
“오라버니!”
얼싸안은 둘은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살아남기 위해 보냈던 칠 년의 세월. 그 세월이 서러워서다. 악착같이 살아남아 준 서로에게 고마워서다.
한동안 껴안고 눈물을 흘리던 둘은 천천히 팔을 풀었다.
“참! 인사해라, 이분이 날 구해 주신 분이다.”
어느 정도 흥분이 가시자 구양중은 일행을 차례차례 소개했다.
“오리버니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눈물을 훔친 구양미후는 백산을 비롯한 일행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드디어 두 사람이 만났구먼. 그런데 저들은 누구냐?”
구양미후의 인사를 받은 백산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네 명을 가리켰다.
“네?”
느닷없는 물음보다, 반말에 더 놀란 모양이었다. 의아한 얼굴로 구양미후는 백산을 쳐다보았다.
“여기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녀석은 없으니까 신경 꺼도 된다.”
눈이 휘둥그레진 구양미후는 곁눈질로 구양중을 쳐다보았다.
[맞다, 나중에 얘기해 주마.]
“저 녀석들 강시 아냐?”
“아, 알겠습니다.”
구양미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북하더라도 참아 주십시오.”
일행을 향해 양해를 구한 구양미후는 눈을 감았다. 일순 그녀의 몸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흘러나와 전신을 감쌌다.
“사신(死神), 이쪽으로 오너라!”
“어이구, 이건 또 뭔 소리래.”
고막을 찢을 듯한 거북스런 소리에 백산은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전 맑았던 목소리와는 달리 사신이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유부에서 흘러나오는 바람 소리처럼 으스스했다.
“우리 상문에서는 강시를 부릴 때 방울이 아닌 목소리를 사용합니다, 주군. 귀령음(鬼靈音)이라 부릅니다.”
“그래도 이건 좀 심하다, 그렇지?”
백산은 주하연을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는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구양미후를 만나기 전 구양중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네 구의 강시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관우 할아버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주하연은 부르짖었다. 방갓 아래로 드러난 얼굴. 검게 변해 있지만 그는 분명 관우 할아버지라 불렸던 천괄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지를 잃은 듯 초점 없는 눈, 그들은 남경왕부의 수신사위로 불렸던 이들이었다.
“어떻게?”
그들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주하연은 구양미호를 쳐다보았다.
“혹시........ 봉선군주님이십니까?”
깜짝 놀란 구양미후는 주춤주춤 물었다.
“맞아요, 내가 주하연이에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주하연은 침착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분들의 유언이었습니다. 강시가 되어서라도 군주님을 지켜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안타까운 얼굴로 주하연을 쳐다보던 구양미후는 변황사신을 만나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마교의 추적을 피해 그녀가 은신한 곳은 북경 외곽의 무령산(舞靈山)이었다. 그곳에서 죽어가던 천괄일행을 만났다.
“숨이 넘어가기 전에 잠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네 사람의 신분을 알게 된 그녀는 그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강시로 살아남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
천괄은 흔쾌히 수락했다. 아니 반드시 강시로 되살려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봉선군주를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숨을 거뒀다.
“이분들을 이용해서 오라버니의 복수를 하고 싶었습니다.”
구양미후는 고개를 숙였다. 아마 네 사람의 무공이 강하지 않았더라면 무덤을 만들어 주는 걸로 끝냈을 것이다.
하지만 네 사람이 변황사신이란 사실을 알고 나자 욕심이 생겼다. 거의 금강불괴지신에 육박한 신체에, 무공은 사황에 버금갈 정도로 강한 자들이고 막 죽은 시체들이다. 최고의 활시로 탄생할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관우 할아버지!”
천괄 앞으로 다가간 주하연은 눈물을 쏟아 냈다. 죽어서까지 자신을 지켜주려 하였던 그들의 충정이 고마웠다. 변황사패천의 지존이었던 그들이 아닌가. 아버지마저 북경으로 돌아왔는데 그들은 껍데기만 돌아왔다. 영혼은 이미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 버렸다.
“누굽니까?”
네 사람의 몸을 차례차례 쓰다듬던 주하연은 차갑게 물었다.
“용황사천가의 가주들이라 하였습니다.”
“무극계!”
주하연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폭풍처럼 쏟아져 나왔다. 지저사령계에 대해 물었던 그놈들이다.
“하연아!”
백산은 주하연을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괜찮아요, 오빠. 이 정도로는 끄떡없어요. 할아버지들에게 보여줄 거예요. 무극계를 어떻게 없애는지, 강호 무림을 어떻게 정복해 가는지 말이에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천괄 일행을 쳐다보며 주하연은 확고하게 말했다.
“그래, 그만하고. 음식 식겠다. 뱃속의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진정해라. 일단 아이에게 밥부터 먹이자. 가져와라!”
주하연의 등을 토닥거리며 백산은 계단 아래서 이편을 흘끔거리는 점소이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잠시 후, 탁자 위에는 음식이 푸짐하게 차려졌다. 하지만 일행 누구도 쉽사리 음식에 손을 대지 못했다.
변황사신의 죽음은 그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겪어 왔던 일이지만, 앞으로도 우린 많은 동료와 친구를 잃게 된다. 그럴 때마다 실의에 빠진다면 우린 강호를 정복할 수 없다. 죽음과 친해져야 한다. 죽어 가는 형제를 보고 웃어야 한다. 그래야만, 강호 무림을 정벌할 수 있다.”
일행을 흘끔 쳐다본 백산은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인 주하연은 백산을 따라 젓가락을 들었다. 그의 말처럼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형제들의 죽음에, 가족들의 죽음에 슬퍼하기보다는 그들의 복수를 맹세해야 한다.
강호 무림을 정복할 때까지는 그렇게 살아야 하리라.
죽은 이들에 대한 추무는 그 뒤로 미뤄야 하리라.
말없이 식사에 열중하던 일행이 고개를 들어 올린 건 계단을 타고 들려온 점소이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위층은 거의 비어 조용합니다.”
뒤이어 계단을 올라오는 요란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십여 명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쿡!”
위로 올라온 인물을 발견한 백산은 나직한 웃음을 토해냈다. 십여 명의 무인을 대동하고 나타난 자는 눈이 익은 얼굴이었다. 아니 결코 잊을 수 없는 자라 해야 했다.
그는 북천황이란 별호로 불리고 있는 위지천악이었다.
“너는?”
백산을 알아본 위지천악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세상이 좁긴 좁은가 보구나! 위지천악! 네놈을 여기서 만나다니.”
[오빠! 위지천악은 살려 둬야 해요.]
점차 강한 살기를 드러내는 백산을 보며 주하연은 다급하게 말했다.
“나도 그렇다, 귀광두. 도망쳤으면 숨어 살 것이지 왜 강호라 기어 나왔느냐?”
위지천악은 태연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하지만 마음은 편치 않은 듯 밟고 있던 바닥이 쑥 꺼졌다. 재빨리 내공을 풀지 않았더라면 이 층 바닥엔 커다란 구멍이 뚫렸으리라.
태어나 처음 들은 놈이란 말 때문이었다. 북천위지세가의 가주로, 북황련의 련주로, 단 한 번도 욕을 들어먹지 않았다. 그런데 새파랗게 젊은 녀석에게 그 말을 들은 것이다.
“내가 박살낸 강호 무림을 제 것이 줄 착각하는 쥐새끼들 때문에 도저히 은거할 수가 없더구나. 그래서, 전부 없애버리려고 나왔다. 개 잡것들을 죽여서 강호 전역에 뿌려 버리려고. 위지천악, 너도 개 잡것들 중 한 놈이다.”
“건방진 놈! 감히 누구 앞에서!”
분노의 고함은 위지천악 곁에서 먼저 터져 나왔다. 두 사람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서 있던 적조황이 진득한 살기와 함께 전면으로 나섰다.
“적조황, 물러서라!”
“가주님!”
“우린 사령계 개파대전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중이다. 여긴 밥을 먹으러 왔고.”
“으음! 알겠습니다, 가주님!”
죽일 듯한 눈으로 백산을 노려보던 적조황은 위지천악의 오른쪽으로 물러났다.
“궁금하구나, 귀광두. 어떻게 강호 무림을 없앨 거냐. 광혈지옥비만으로는 강호 무림을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천붕십일천마 전원이 살아 있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란 말이다.”
“그럴까? 그럼 여기서 너를 죽이면 어떻게 할 거냐. 네가 데려온 저 새끼부터 시작해서 갈가리 찌어 사바에 널어 버리면 말이야.”
곧바로 공격을 가할 듯 백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청발광자 적조황을 비롯한 십여 명 무인들이 앞으로 나서며 무기를 뽑아들었다.
“아냐, 방금 생각을 바꿨어. 그러니까 밥 먹어라. 시간 날 때마다 많이 먹어 둬라.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슬쩍 미소를 머금은 백산은 위지천악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며 말했다. 생천비(生天匕)에서 격한 반응이 왔다. 과거 천신가의 무공이었던 천검무극류(天劍無極流)를 위지천악이 익히고 있었다. 악연의 시작이었던 담운천의 무공을.
[가주님!]
적조황은 위지천악에게 전음을 보냈다.
[지금을 싸울 때가 아니다, 적조황. 참아라!]
백산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위지천악은 적조황에게 심어를 보냈다. 싸움을 걸어온다면 피하진 않을 테지만, 굳이 싸움을 걸 필요도 없다.
“나도 같은 말을 하고 싶다. 귀광두, 많이 먹어라.”
태연한 얼굴로 말을 한 위지천악은 한편으로 자리를 잡았다.
“도망 안 치네?”
“역적을 피해 도망칠 필요가 없지.”
“맞아, 우린 아직 무림공적이고 역적이었지. 우릴 잡아라, 위지천악! 네가 거느린 작은 쥐새끼를 전부 동원하고, 사천에 남아 있는 남천벌까지 동원해서 우릴 잡아가란 말이다. 제발 부탁이다, 응!”
[기다려라, 놈! 내가 죽여주겠다. 네놈을 죽여주겠단 말이다.]
적조황은 부들부들 떨며 전음을 날렸다.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놈은 끊임없이 쥐새끼라고 말한다. 가주인 위지천악은 큰 쥐, 자신들은 작은 쥐란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놈의 목을 뜯어내 버렸으면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가주가 원하지 않고,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잔뜩 얼굴이 붉어진 적조황은 극한의 자제심을 발휘하여 참고 또 참았다.
적조황을 전음을 들은 백산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희미한 미소와 함께 전음을 보냈다.
[너, 쥐약 먹었구나. 가능하면 빨리 의원에게 가 봐라.]
푸스스!
저도 모르게 틀어쥔 탁자가 가루로 부서져 내렸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머리칼이 칼처럼 뻣뻣하게 섰다. 그만큼 분노했다는 말이었다.
바로 그때 위지천악의 전음이 들려왔다.
[적조황! 놈의 도발에 대응하면 네가 진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마음을 가라앉혀라.]
[알겠습니다.]
가까스로 노화를 억누른 적조황은 끌어올렸던 내공을 풀었다.
가주의 말대로였다. 굳이 놈의 도발에 넘어가 흥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룻밤은 이곳에서 묵어갈 테니 시간은 충분했다. 반시웅의 복수를 할 시간이.
“살아날 자신이 있느냐?”
적조황이 내기를 가라앉히자 위지천악은 느긋한 얼굴로 물었다.
“일단 공격해 봐라, 위지천악. 그럼 알게 된다. 이 백산이 어떤 인물이지, 묵안혈마의 공포가 무엇인지 말이다.”
음식을 입 안으로 밀어 넣으며 백산은 말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위지천악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태연한 얼굴로,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응시하는 적조황을 조발적인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도 본인을 묵안혈마라 생각하는 모양이군.”
“쿡! 미치겠네.”
백산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피식 웃고 말았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도대체 내가 묵안혈마라고 하는데 왜 믿지 않는 거냐?”
광혈지옥비를 휘두르고, 광혈지안까지 선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안혈마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 놈들은 무슨 심보인지. 그들이 머리통을 뜯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려워서 그런 거예요. 묵안할마 백산은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스스로도 마음이 편하고, 부하들의 사기도 올릴 수 있으니까요.”
백산의 물음에 대답한 사람은 열심히 젓가락질을 하고 있던 주하연이었다.
“그런 거였어? 난 정말로 안 믿는 줄 알았네. 그럼 지금부터는 밥이나 열심히 먹어야겠네.”
다시 한 번 적조황에게 시선을 준 백산은 고개를 돌려 식사에 열중했다. 촉루 이 층에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죽고 죽이는 적이 되어야 할 사람들. 식사에 열중한 듯 보이면서도 실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런 현상은 밤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위지천악은 끝내 객잔을 옮기지 않았다. 결국 광풍성 무인들과 통천연맹 무인들은 같은 객잔에서 밤을 보내게 된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독 입니다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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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즐독 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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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하고 감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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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었습니다
즐독.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0^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