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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 선비, 왕도를 말하다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43 14.12.20 09: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선비, 왕도를 말하다 -

류성룡, 신하였지만 왕을 이끈 진정한 리더

 

박종평 역사비평가, 이순신 연구가

 

피란지 논쟁에서 국토 밖을 나서는 건 나라를 잃는 행위라며 선조의 명나라행에 제동… ‘공업(功業)을 이룬 뒤엔 권력에서 조용히 물러난다(功成則退)’는 선비의 전형을 실천하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의 서애 류성룡 종가 고택.

 

 

장자방은 중국 최고의 전략가로 한(漢) 고조 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를 연 장량(張良, ?~BC 186)을 이른다. 조선은 1392년 개국해 왜란과 호란, 다양한 반란을 겪으면서도 1910년까지 518년 동안 유지됐던 세계 역사상 전례가 드문 장수 왕조다. 그런 조선에서 장자방 같은 인물이 없다면 이상한 일이다.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창업했던 천재지략가 정도전(鄭道傳, 1342~1398)도 ‘조선의 장자방’이란 평가를 얻지는 못했다.

 

조선의 장자방은 세종 이후 최고의 학자 군주로 꼽힌 정조(正祖)가 “신기(神機)와 원려(遠慮)는 참으로 우리나라의 유후(留侯, 장자방)”라고 평가했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다.

정조는 그 근거로 류성룡이 임진왜란 때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창설한 것, 둔전(屯田)을 설치해 군사와 백성을 기른 것, 방납의 폐단을 제거하고 백성의 세금 부과를 합리화한 작미법(作米法, 훗날의 대동법)을 사례로 들었다.

 

개국 후 200년이 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조선은 왕조는 물론이고 나라 자체가 망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에 직면했다. 장기간의 평화 속에서 새 왕조를 만든 창업 군주의 열정은 소진됐다. 엘리트들은 내부의 권력투쟁에 갇혀 세상 밖의 변화에 둔감했다. 문신들은 탁상공론에 빠졌고, 평화가 지속되면서 천대받던 무신들의 칼은 녹슬었다.

 

세계사적인 변화의 폭풍이 조선을 덮쳤다.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을 다시 세웠다’는 뜻의 ‘재조(再造)’라는 표현을 쓸 정도의 전대미문의 위기였다. 그 한가운데에서 류성룡은 장량이 유방의 막사에서 왕조 창업을 위한 온갖 계략과 계획을 세운 것처럼 활약하며 조선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 이유로 정조는 류성룡을 조선의 장자방으로 평가한 것이다.

 

 

서애의 영정. 안동 풍천면 병산서원에 류성룡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퇴계, 젊은 류성룡 보고 “그는 하늘이 낸 사람”

 

고(故) 이수건(李樹健) 영남대 역사학과 교수는 조선시대 사대부를 전문성에 따라 문장력이 뛰어난 사람(文), 병법의 전술과 전략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武), 성리학과 예학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學), 행정 실무에 능한 사람(吏)의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그리고는 다시 문(文)만 능한 사람, 무(武)만 능한 사람, 문무(文武)를 겸비한 사람, 문(文)·학(學)·이(吏)를 겸한 사람, 문(文)과 학(學)을 겸비한 사람, 학(學)도 이(吏)도 갖추지 못하고 단순한 시문을 지을 정도인 사람, 문(文)과 학(學)은 갖췄지만 이(吏)는 갖추지 못한 사람으로 세분화했다. 그런 그가 류성룡에 대해서는 “문(文)·무(武)·학(學)·이(吏)를 겸비한 학자적 관료”라고 평가했다. 한마디로 조선 사대부의 장점을 모두 갖춘 인물로 본 것이다.

 

정조나 이수건 교수의 평가는 그의 업적에 대한 뒷날의 평가지만, 퇴계 이황은 21세의 류성룡을 만나본 뒤 일찍이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헤아렸다. 그와 함께 퇴계의 4대 수제자 중 한 명인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도 “서애는 나의 스승”이라며 류성룡 앞에 자신을 낮추기도 했다.

 

퇴계의 극찬을 받았던 류성룡은 그 기대처럼 1566년 25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나이 어린 선조(宣祖)가 다음해인 1567년 왕위에 오르자, 선조의 스승 겸 최측근 비서로서 선조에게 왕도(王道)를 가르치며 1598년 11월 파직될 때까지 30년을 함께했다. 선조의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는 1582년 41세에 대사헌, 43세 예조판서, 47세 형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 48세 대사헌 겸 병조판서, 이조판서, 49세 우의정 겸 이조판서, 50세 좌의정 겸 이조판서라는 수직선과 같은 출세의 길을 달렸다.

 

그의 삶을 연구했거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언급하는 그의 대표적인 공적은 정조의 지적과 같다. 그중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것이 권율(權慄)·이순신(李舜臣)·신충원(辛忠元)으로 대표되는 인재 발탁이다.

공자(孔子)는 50세를 하늘의 뜻을 알게 되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라고 했지만, 50세의 좌의정 겸 이조판서 류성룡은 사람의 능력을 알아보는 ‘지인지감(知人之鑑)’에 탁월했다.

 

정5품 형조 정랑 권율을 4단계 뛰어넘은 정3품 의주목사, 종6품 정읍현감 이순신을 6단계 뛰어넘은 정3품 전라좌수사로 발탁했다. 류성룡의 안목은 불과 1~2년이 채 안돼 입증됐다.

권율은 행주대첩으로, 이순신은 한산대첩·명량대첩으로 조선을 재조(再造)하는데 기여했다. 그래서 <홍길동전>을 쓴 허균(許筠, 1569~1618)은 “그가 이순신을 등용한 한 건(件)이 바로 나라를 중흥시킨 큰 기틀”이었다고 평가했다.

 

류성룡이 그런 인재를 발탁할 수 있었던 것은 삶의 자세와 정치관에서 비롯한다. 그는 사람을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으로 구분했다. “소인은 고집된 마음과 사적인 꾀로서 남을 시기하면서 누르려고 하고, 군자는 마음 쓰는 것과 일을 처리하는 것이 공정해 남을 시기하거나 이기려는 마음이 없다. 군자는 여러 사람이 좋아하는 착한 일을 모아서 하는 한편 충실하고 유익한 일을 널리 시행하므로 행동에 잘못을 범하지 않으며 남들이 그를 위해 충고하기를 즐긴다.” 그 스스로 군자로 행동하고자 했기에, 밝은 눈으로 군자와 같은 권율과 이순신 등을 찾아낼 수 있었다.

 

행정가 류성룡이 항상 주목한 것도 국가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인사(人事) 문제였다. 그에게 인재의 기준은 덕망(德望)과 재질(才質)의 유무였다. 덕(德)이 있는 사람은 사람들을 아우르는 리더십을 갖은 사람이고, 한 분야라도 재능이 있는 사람은 실용적인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덕(德)을 강조한 실제 이유는 그 스스로 선조의 스승 역할을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최고 권력자인 왕이 수신(修身)을 하지 않아 덕(德)이 없다면, 잘못된 인사(人事)를 하기 쉽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다.

 

반면에 재능은 철저하게 당면한 현실적 목적 때문이다. 그는 무명의 장수였던 정기룡(鄭起龍)을 발탁해 불패의 장수로 만들었고, 천민 출신의 신충원을 발탁해 조령 방어에 수훈을 세울 수 있게 했다.

그는 양반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발탁했다. 양반들의 비판에 그는 “반드시 문벌을 미리 논하지만, 문벌이 과연 적을 칠 수 있겠는가”라며 실용에 적합한 능력을 강조했다.

 

 

 

 

1 안동 하회마을 내 류성룡 유물전시관인 영모각(詠慕閣)에 소장된 류성룡 가죽신과 조복(朝服) 허리띠.

2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압록강에서 류성룡과 병사를 논하다 감격해 선사했다는 석죽화시선.

 

 

공공의 이치로 보자면, 노비만이 백성!

 

‘널리 인재를 얻는 방법(廣取人才)’이라는 제안은 더욱 구체적이다.

그는 “재주와 지혜, 지식과 사고력이 있으며 병법을 통해 장수의 임무를 감당할 만한 사람.

담력과 역량이 있고 언변이 좋아 외국 사신으로 나가 임무를 할 수 있고, 적진에 출입하여 그 동정을 정탐할 만한 사람. 문장이 특이해 문서를 잘 쓰는 사람.

용기와 힘이 있어 활을 잘 쏘거나, 혹은 칼과 창을 잘 쓰거나, 무거운 짐을 지고 빨리 달릴 수 있는 사람.

농사를 잘 알아 마르고 젖은 땅을 분별해 황무지를 개간해 둔전(屯田)을 할 수 있는 사람.

이재에 밝고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만들거나 혹은 산에서 광석을 캐어 쇠를 만들어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판매해 이익을 내는 사람. 계산에 능해 회계를 잘하고 군량 출납을 정확하게 할 사람.

기술이 있어 창과 칼을 잘 만들거나 화약을 만들 줄 아는 사람” 등으로 사람들의 능력을 세세히 구분했다.

 

또 노비의 발탁을 부정하는 양반들에 대해, 심지어 “천하(天下) 공공(公共)의 이치로 말하자면, 즉 노비만이 홀로 우리나라 백성 아닌가!”라며, 노비도 국민이기에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분보다는 사람과 사람의 능력을 더 중요하게 보았다.

 

류성룡은 약 25년간의 다양한 행정경험을 거치는 동안 당파나 탁상공론에 몰두하기보다, 다양한 인재의 적재적소 활용이 행정의 기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결과가 권율과 이순신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발탁해 꽃을 피웠다. 그에게 리더란 인재를 찾아 키우는 사람이었고, 왕도(王道)의 시작은 인재를 찾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1592년 4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98)의 명령을 받은 일본군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를 중심으로 한 9개 전투 부대 약 16만 명, 후방지원군 10개 부대 약 1만 명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군과 일본군의 첫 전투가 시작된 것은 4월 14일이었다. 수군첨절제사 정발(鄭撥) 지휘 하의 1천여 명이 지키던 부산진성은 10시간의 사투 끝에 대군과 신무기인 조총에 밀려 함락당했다.

15일에는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비켜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는 일본군의 항복 요구에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비키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며 방어하다 전사했다. 이후 김해·양산·울산·언양·밀양이 연이어 함락되었다.

 

급보를 받은 선조와 조정에서는 여진족 토벌에서 용맹을 떨쳤던 맹장인 이일(李鎰)과 신립(申砬)을 각각 경상순변사(巡邊使)와 삼도순변사로 임명해 출전시켰다. 그러나 이일은 일본군이 상주 인근까지 진출했다는 백성의 제보를 무시하고 척후병도 내보내지 않은 상태에서 4월 24일 기습당해 패했다.

 

“대가(大駕)가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는다”

 

간신히 탈출한 이일은 한편으로는 패전을 보고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충주에 도착해 있던 신립에게 합류했다. 신립은 종사관 김여물과 경상순변사 이일의 조령 방어전략 제안을 무시한 채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가 28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에게 전멸당했다. 조선 최고의 명장이라고 인정받았던 이일과 신립의 연이은 패배는 선조와 조정 대신에게 공포심을 일으켰고, 민심을 뒤흔들었다.

 

4월 30일 새벽, 선조는 빗길을 뚫고 서울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란길을 떠났다. 피란 직전, 선조와 신하들은 주전론과 피란론으로 논쟁했지만, 결국 선조의 뜻에 따라 피란을 결정했다. 그러나 날개가 달린 듯 북상해 오는 일본군을 피해 어디로 가야 할지도 난처한 문제였다. 5월 1일, 개성에 도착한 선조와 신하들은 다시 대책을 논의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5월 1일자, ‘상이 동파관을 출발하다’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선조는 영의정 이산해와 좌의정 류성룡 등을 불러 말했다.

“이모(李某)야 유모(柳某)야!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신하들이 엎드려 눈물만 흘리고 대답하지 않자, 도승지(都承旨) 이항복에게도 물었다. 이항복은 말했다.

“거가가 의주(義州)에 머물 만합니다. 만약 형세와 힘이 궁하여 팔도가 모두 함락된다면 바로 명나라에 가서 호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윤두수가 의주행을 반대하며 함경도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주행과 함경도행이라는 두 가지 의견이 나오자 선조는 다시 물었다. 그때 류성룡이 말했다.

 

“안 됩니다. 대가(大駕)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朝鮮)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大駕離東土一步, 則朝鮮非我有也).”

 

류성룡의 단호하고 거침없는 주장이 나오자, 선조는 말했다.

“내부(內附)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

선조는 궁궐을 나선 뒤 장예원과 형조를 불태웠고, 자신에게 돌을 던진 백성과 연패를 당하는 조선의 장수와 군사를 믿지 못하고 일본군에 대한 공포에 질려 아예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로 망명하고자 했다.

 

논쟁 후 류성룡은 선조의 비서 역할을 하던 이항복에게 말했다.

“나라를 버리자는 주장을 어떻게 경솔히 내놓는가. 자네의 충성심은 비록 길가에서 임금을 따라 죽더라도 궁녀나 내시의 충성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류성룡의 주장은 리더라면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조직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선조는 결국 류성룡의 송곳 같은 반대로 평양으로 피란길을 떠났다. 선조 일행이 평양에 도착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다가왔다. 다시 피란 논쟁이 불붙었다. 대부분의 신하는 함경도행을 주장했다. 그러나 류성룡이 다시 반대했다.

 

“여기로 피란한 것은 명나라 구원병을 기다려 나라를 수복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병을 요청해놓고도 저 깊은 골짜기로 들어간다면, 적이 길을 끊어 명나라와 연락도 어렵게 됩니다. 게다가 지금 온 나라가 침략당하고 있는데 그곳이라고 적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곳에서 적을 만나면 북쪽 오랑캐 땅(여진)밖에 갈 곳이 없습니다. 그때는 어디에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선조는 류성룡의 주장을 따라 결국 의주행을 택했다. 류성룡의 판단은 역사가 증명한 것처럼 정확했다. 당시 선조와 류성룡은 물론 다른 신하들도 알지 못했지만, 일본군이 이미 함경도까지 진출해 있었다. 선조가 함경도로 갔다면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고, 조선은 멸망했을 것이다.

 

피란지 논쟁에서 류성룡의 주장은 조직을 책임진 리더는 조직과 운명을 같이해야 하고, 리더 자신의 생명이 아니라 조직을 살릴 최선의 방법을 먼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의 전황을 기술한 류성룡의 <징비록>. 국보 132호로 지정돼 있다.

 

 

전시 아닌 평시엔 조정자의 역할

 

임진왜란 당시의 위와 같은 모습과 달리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 각각 기록된 ‘류성룡의 졸기’에는 유약한 사람으로 혹평했다.

“규모가 약간 좁고 마음이 굳세지 못해 이해가 눈앞에 닥치면 흔들림을 면치 못했다. 임금의 신임을 오래 얻었지만, 직간했다는 말을 들을 수 없었다.”(<선조실록>)

혹은 “임금이 득실을 거론하면 또한 감히 대항해 바른대로 고하지 못해 대신(大臣)다운 풍절(風節)이 없었다.” (<선조수정실록>)

 

물론 평상시의 그의 모습에는 <졸기>처럼 비칠 수 있는 모습도 있다. 그 한 사례가 경연(經筵) 때의 모습이다. 정언(正言) 정이주(鄭以周)가 선조에 대해 “요임금, 순임금과 같다”고 하자, 정언(正言) 김성일(金誠一)이 “요임금이나 순임금도 될 수 있고, 폭군인 걸왕(桀王)이나 주왕(紂王)도 될 수 있다”고 했다.

선조가 김성일의 주장에 놀라 당황하자, 류성룡은 “두 사람의 말이 다 옳습니다. 정이주의 말은 임금을 인도하는 말이고, 김성일의 말은 임금이 경계해야 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라며, 황희(黃喜)와 같이 “모두 옳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그 시기의 류성룡은 율곡 이이와 같이 당시 격화되고 있는 당쟁을 완화시키고, 조정하는 역할을 자임했기에 우유부단한 모습, 혹은 관점에 따라 양다리를 걸친 듯한 모습일 뿐이다.

 

류성룡은 한편으로 선조를 조선 땅에 붙잡아두고, 다른 한편으로는 명나라의 파병을 적극 유도했다. 또한 신하들의 충성심을 의심하며 우왕좌왕하는 왕과 사분오열된 조정 신하들을 다독였고, 일본군의 칼날에 죽고 굶주림에 죽어가는 백성을 추슬렀다. 때로는 영의정으로, 때로는 야전의 최고사령관과 같았던 도체찰사로 활약하며 전방과 후방 할 것 없이 국가 재건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양반과 천민의 구분 없이 인재를 발탁했고, 군사를 양성했다. 공납을 쌀로 대신하게 하여 백성의 조세부담을 완화시키려 했던 작미법(作米法)을 실시했다. 중국의 값싼 쌀을 들여와 굶주림을 해결하게 하면서도 쇄국에서 개국의 징검다리가 될 수 있었던 중강진 국제무역시장도 열었다.

 

민생고 해결방안이면서도 농업국가 조선을 상공업 국가로 바꿀 수 있었던 소금 제조와 광산 개발을 추진했다. 양반과 천민 모두 군역에 복무하게 해 강병(强兵)의 틀을 만들 속오법(束伍法)도 추진했다. 그 자신은 학질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자신이 천거했던 권율과 이순신과 수시로 소통하면서 승리의 비책들을 만들었다. 게다가 그는 미국의 역사학자 호머 헐버어트(Homer B. Hulbert)가 꼽은 한국의 4대 발명품인 금속활자·거북선·부교(浮橋)·한글 중의 하나인 부교를 창안했다.

 

그러나 길고 지루한 전쟁이 끝나가던 1598년 가을부터 류성룡에 대한 선조의 불편함과 다른 당파의 집요한 견제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11월 19일, 7년 동안 남해 바다에서 조선을 지키며, 바다의 만리장성(水路長城) 역할을 했던 이순신이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와도 같았던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 바로 그날, 그를 천거했던 류성룡도 파직됐다.

 

마치 하늘이 조선을 구한 두 영웅인 류성룡과 이순신이 그들의 소명을 다했다고 생각해 그들의 운(運)을 거둔 것처럼. 몇 십 년 동안 서로의 장점을 알아보고, 단점을 보완해줬던 류성룡과 이순신은 그렇게 한날에 사라졌다. 류성룡은 12월 6일에는 삭탈관직까지 당했고, 1599년 초 고향인 안동 하회로 완전히 낙향했다.

 

25세에 처음 관직에 진출해 24년 만인 49세에 재상에 올랐고, 평시가 아닌 전시에 10년 동안 재상직에 머물렀다. 선조는 류성룡이 낙향한 뒤로 그가 죽기 직전까지 온갖 직위와 다양한 사람을 통해 회유를 하며 그의 복직을 꾀했다. 하지만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단 한 차례도 상경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의 전황을 기술한 류성룡의 <징비록>. 국보 132호로 지정돼 있다.

 

 

왕의 스승이자 백성에겐 부모 같은 리더

 

조선 왕조 500년을 통틀어 최고의 재상으로 평가받는 류성룡의 은퇴는 현실도피나 선조 혹은 권력투쟁에 대한 미움과 증오 때문이 아니다. 한 시대의 리더였지만, ‘공업(功業)을 이룬 뒤에는 권력에서 조용히 물러난다(功成則退)’는 선비 정치가의 왕도(王道)를 실천한 결과다.

 

그의 물러남은 다른 한편으로 그 자신의 평상시 소신인 공론(公論) 중심의 정치관과 대신론(大臣論)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다수 사람의 공론(公論), 즉 오늘날의 여론(與論)을 정치의 기초로 보았다. 스스로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했고, 전쟁이 끝난 상황에서 조정의 중론은 그를 원치 않았다.

 

그런 가운데 조정에 등장한다는 것은 류성룡 자신이 주장해왔던 공론정치에도 위배된 행동이었다. 한편으론 자신의 제자였고 자신이 충성을 다했던 리더로 애증이 교차했던 선조의 마음도 알았지만, “대신은 나라를 지탱할 기둥과 대들보이기에 모든 관리의 모범”이 돼야 한다는 자신의 ‘대신론’을 몸소 실천하고자 했다.

 

류성룡은 전쟁에 대한 책임감과 자신을 원치 않는 조정의 공론, 육체적인 한계에 직면해 과감히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한 시대의 리더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한 그의 열정과 열망마저 식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철두철미한 책임감은 저서 <징비록(懲毖錄)>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시경(詩經)>에서 ‘나의 지난 일을 징계하고, 뒷날의 환난을 삼가케 한다(予其懲而毖後患)’고 했다.” 징비록은 평화에 빠져 전쟁의 무서움을 잊은 자신을 비롯한 선조들의 과오를 징계(懲)하고, 후손들이 선조들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경계(毖)하기 위해 쓴 글이었다.

 

류성룡은 고향에서 약 9년 동안 은둔하며 저술 생활을 하던 1607년 66세에 “편안하고 조용하게 조화(造化)로 돌아가련다”라는 말을 남기고 이승과도 이별했다. 스스로 ‘공성즉퇴(功成則退)’했고, 또 영원히 이 땅을 떠나갔지만, 백성들은 그를 잊지 않았다. 선비들은 류성룡의 옛 집터에 신위를 마련하고 친척이 죽은 것처럼 통곡했고, 백성들은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잃은 것과 같다”며 울부짖었다.

 

류성룡은 권력에 있을 때는 철저하게 헌신했고, 여론이 원하지 않자 미련 없이 권력을 등졌으며, 여생을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면서 그동안 얻은 교훈을 후세에 남기고자 했다. 그는 왕의 신하였지만, 거꾸로 왕을 이끄는 스승이었고, 백성에게는 부모와 같은 후덕한 리더였다.

 

류성룡은 평생 동안 자신을 아는 데 집중했고, 자신의 장점에 상대의 단점을 더하려 했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당쟁과 전쟁터의 한복판에서도 흔들림 없이 조정과 조화를 추진할 수 있었고, 결국 승리를 일굴 수 있었다.

 

 

/ 월간조선

 

 

 

...................

 

 

 

 

조선통신사

 

1589년 의정부 사인으로 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보낸 겐소(玄蘇)·소 요시토시(宗義智-혹은平義智라고도 불림) 등과 일본과의 통호문제를 의논하였고, 1589년 11월 18일 일본 사정을 탐지하려고 파견된 조선통신사 행에서 부사(副使)로 임명되었다.

1590년 3월 일본에 들어간 직후부터 정사 황윤길(黃允吉) 등과 관백(關伯)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놓고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는데,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국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동인 김성일, 전쟁의 움직임을 당파를 위해 거짓 보고해 나라를 위기에 빠트리다

 

1590년 일본에 갔던 통신사 일행이 이듬해 돌아와 한 보고는 서로 상반된 것이었다.[1]

각처에서 활약하던 일본의 무사들을 정리하고 중앙집권화를 이루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선조가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고 정탐을 위해 사람을 보냈는데, 조선에서 정탐꾼이 파견된다는 보고를 듣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경계와 검문을 강화하자 선조는 공식적인 사절단을 파견한 것이었다.

 

이때 통신사 중 정사는 서인인 황윤길이었고 부사는 동인인 김성일이었다.[1] 1591년 음력 2월 부산에 돌아와 각기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김성일은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또 풍신수길의 인상을 묻는 선조의 질문에, 황윤길은 '눈 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하였고, 김성일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그의 눈은 쥐와 같아 마땅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류성룡이 김성일에게 "그대가 황윤길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후일 병화가 있다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김성일은 다음과 같은 말로 무마하였다.

 

"나도 어찌 왜적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불안에 휩싸일까봐 그런 것입니다."

 

이와 같은 김성일의 보고에 서인 황윤길을 비롯해, 조헌 등이 기필코 왜적이 침입할 것리고 주장하였지만, "서인(西人)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요란시키는 것이다"라고 매도하여 배척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볼 때 당시 김성주 등의 동인이 정국을 주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2]

 

후일 안방준(安邦俊) 등에 의해 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지적되었고, 왜란 초에 파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이 일본이 틀림없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장담한 황윤길의 발언으로 인하여 민심이 혼란해지는 것을 완화하려는 의도였다고 변명하였다.

 

실제 황윤길의 발언이 있은 직후 조정은 각지에 성을 쌓고 장정들을 징집하는 등 급작스런 대비책을 강구하였는데, 이는 당시 민심을 상당히 동요시켰다. 이에 상소를 올려 오늘날 두려운 것은 섬나라 도적이 아니라 민심의 향배이니, 민심을 잃으면 견고한 성과 무기가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여 내치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임진왜란 직후

 

1592년 임진왜란 직후의 음력 6월 28일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김성일을 비꼬며, 그 정도(징후 운운) 이상의 말을 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김성일은 통신사로서 일본에 갔다가 막 돌아와서,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지혜가 미치지 못한 바가 있어서 그러했던 것인가.

동시에 사신으로 갔던 황윤길(黃允吉) · 허성(許筬) 같은 사람은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왜적들이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보장하기 어렵다고 하기도 하였는데, 김성일만이 유독 왜적들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괴이하다."[3]

 

일본에서의 통신사 이야기도 여기에서는 자세히 쓰고 있지 않으나,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기 전 몇개월 동안이나 기다리면서도 정사인 황윤길과 서장관 허성이 두려움이 앞서 말을 꺼내지 못할 때도 부사 김성일 만이 만남을 독촉하였고, 최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만한 답서에 대해서는 부사 김성일 만이 이의를 제기했다 한다. 지금도 통신사가 묵었던 곳에 부사를 기리는 비석이 남아있다.

 

 

1.이덕일,《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7) 112페이지

2.통신사 황윤길 등이 왜 사신 평조신 등과 돌아오다. 조선왕조실록 (1591년 3월 1일). 2009년 2월 14일에 확인.

3.조대곤이 고령에서 왜적을 무찌른 일을 아뢰다. 조선왕조실록 (1592년 6월 28일). 2009년 2월 14일에 확인.

 

 

2.

선수 25권, 24년(1591 신묘 / 명 만력(萬曆) 19년) 3월 1일(정유) 3번째기사

통신사 황윤길 등이 왜 사신 평조신 등과 돌아오다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는데 왜사(倭使) 평조신(平調信) 등과 함께 왔다.

 

당초 윤길 등이 지난 해 4월 바다를 건너 대마도에 도착하였는데, 일본은 당연히 영접사를 파견해서 사신 일행을 인도하여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에 김성일(金誠一)은 그들의 거만함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의논하고 1개월을 지체한 뒤에야 출발하였다. 일기도(一岐島)와 박다주(博多州)·장문주(長門州)·낭고야(郞古耶)를 거쳐 계빈주(界濱州)에 당도했을 때에야 도왜(導倭)의 영접을 받았다. 왜인은 일부러 길을 돌아 몇 달을 지체하고서야 국도(國都)에 도착하였다.

 

사신 일행이 대마도에 있을 때 도주(島主) 평의지(平義智)가 국본사(國本寺)에서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고자 하였는데, 국본사는 산 위에 있었다. 사신들이 먼저 가 있는데 의지가 가마를 탄 채 문을 들어와 뜰 아래에까지 와서 내리자 성일이 그의 무례함에 노하여 즉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니, 허성(許筬) 이하도 따라서 일어났으나 윤길은 그대로 앉아서 잔치에 임하였다. 성일이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자 다음날 의지가 그 까닭을 듣고서 미리 알리지 않았다고 하여 시중을 든 왜인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와서 사죄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이후로 왜인들이 성일을 경탄(敬憚)하여 보이기만 하면 말에서 내려 더욱 더 깍듯이 예를 지켜 대접하였다.

 

그들의 국도 대판성(大阪城)에 도착해서는 큰 절에 숙소를 정하였는데, 마침 평수길(平秀吉)이 산동(山東)으로 출병하였다가 몇달 만에 돌아온데다 또 궁실(宮室)을 수리한다는 핑계로 즉시 국서(國書)를 받지 않아 5개월을 지체한 뒤에야 명을 전하였다.

 

그들 나라에서는 천황(天皇)이 제일 높아 수길 이하가 모두 신하로 섬기지만, 국사는 모두 관백(關白)이 통괄하였고 천황은 형식적인 지위만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깍듯한 예절로 받들고 의장(儀章)도 특별하여 부처를 받들 듯이 하였다. 관백이라고 한 것은 곽광전(?光傳)에 ‘모든 일을 먼저 보고받는다[凡事階先關白]’고 한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때문에 수길를 대장군이라 부르고 왕(王)이라 부르지 못하는데,【후일 대군(大君)이라 칭하였다.】 이는 본래 천황을 국왕전(國王殿)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신을 접대함에 있어서 가마를 타고 궁문을 들어가도록 허락하고 가각(?角)을 울려 선도하였으며 당(堂) 위에 올라가 예를 행하도록 하였다.

 

수길의 용모는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얼굴은 검고 주름져 원숭이 형상이었다. 눈은 쑥 들어갔으나 동자가 빛나 사람을 쏘아보았는데, 사모(紗帽)와 흑포(黑袍) 차림으로 방석을 포개어 앉고 신하 몇 명이 배열해 모시었다. 사신이 좌석으로 나아가니, 연회의 도구는 배설하지 않고 앞에다 탁자 하나를 놓고 그 위에 떡 한 접시를 놓았으며 옹기사발로 술을 치는데 술도 탁주였다. 세 순배를 돌리고 끝내었는데 수작(酬酢)하고 읍배(揖拜)하는 예는 없었다. 얼마 후 수길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자리에 있는 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편복(便服)차림으로 어린 아기를 안고 나와서 당상(堂上)에서 서성거리더니 밖으로 나가 우리 나라의 악공을 불러서 여러 음악을 성대하게 연주하도록 하여 듣는데, 어린 아이가 옷에다 오줌을 누었다. 수길이 웃으면서 시자(侍者)를 부르니 왜녀(倭女) 한 명이 대답하며 나와 그 아이를 받았고 수길은 다른 옷으로 갈아 입는데, 모두 태연자약하여 방약무인한 행동이었으며, 사신 일행이 사례하고 나온 뒤에는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상사(上使)와 부사(副使)에게 각기 은 4백 냥을 주고 서장관 이하는 차등을 두어 주었다. 사신이 돌아가게 해줄 것을 재촉하자 수길은 답서(答書)를 즉시 재결하지 않고 먼저 가도록 요구하였다. 이에 성일(誠一)이 ‘우리는 사신으로서 국서를 받들고 왔는데 만일 답서가 없다면 이는 왕명을 천하게 버린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고, 물러나오려 하지 않자 윤길(允吉) 등이 붙들려 있게 될까 두려워하여서 마침내 나와 계빈(界濱)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비로소 답서가 왔다. 그런데 말투가 거칠고 거만해서 우리 측에서 바라는 내용이 아니었다.

성일은 그 답서를 받지 않고 여러 차례 고치도록 요구한 뒤에야 받았다. 지나오는 길목의 여러 왜진(倭陣)에서 왜장(倭將)들이 주는 물건들을 성일만은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부산으로 돌아와 정박하자 윤길은 그간의 실정과 형세를 치계(馳啓)하면서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복명(復命)한 뒤에 상이 인견(引見)하고 하문하니, 윤길은, 전일의 치계 내용과 같은 의견을 아뢰었고, 성일은 아뢰기를,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

하니, 윤길은 아뢰기를,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하고, 성일은 아뢰기를,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하였는데, 이는 성일이, 일본에 갔을 때 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하여 말마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한 것이었다.

당시 조헌(趙憲)이 화의(和議)를 극력 공격하면서 왜적이 기필코 나올 것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대체로 윤길의 말을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 모두가 ‘서인(西人)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요란시키는 것이다.’고 하면서 구별하여 배척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유성룡이 성일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황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하니, 성일이 말하기를,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

하였다.

 

...

 

 

만약에 북한이 전쟁을 일으켜 나라가 전란에 덮힌다면 지금 정치하는 놈들은 뭐라할까?

 

한쪽은 "퍼줘서 전쟁이 났다"고 할테고

다른쪽은 "안 퍼줘서 전쟁이 났다"고 할테고

 

만약 통일이 되고 그동안 북한에 붙어 간첩질한 놈들이 밝혀지면  3족을 멸해야한다.

미리 법 만들면 어떨까?  법 좋아하고 잘 만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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