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회수 |
입 학 ~ 졸 업 |
졸 업 생 수 |
누 계 | |||||||||
계 |
남 |
여 |
남 |
여 |
총누계 | |||||||
1 |
1947.09.01 ~ 1951.07.18 |
28 |
19 |
9 |
19 |
9 |
28 | |||||
2 |
1947.09.01 ~ 1952.03.27 |
42 |
36 |
6 |
55 |
15 |
70 | |||||
3 |
1947.09.01 ~ 1953.03.21 |
36 |
24 |
12 |
79 |
27 |
106 | |||||
4 |
1948.09.01 ~ 1954.03.18 |
27 |
23 |
4 |
102 |
31 |
133 | |||||
5 |
1949.09.01 ~ 1955.03.29 |
31 |
23 |
8 |
125 |
39 |
164 | |||||
6 |
1950.09.01 ~ 1956.03.17 |
17 |
9 |
8 |
134 |
47 |
181 | |||||
7 |
1951.09.01 ~ 1957.03.02 |
23 |
17 |
6 |
151 |
53 |
204 | |||||
8 |
1952.04.01 ~ 1958.03.25 |
22 |
15 |
7 |
166 |
60 |
226 | |||||
9 |
1953.04.01 ~ 1959.03.18 |
27 |
16 |
11 |
182 |
71 |
253 | |||||
10 |
1954.04.01 ~ 1960.03.19 |
32 |
20 |
12 |
202 |
83 |
285 | |||||
11 |
1955.04.01 ~ 1961.03.08 |
43 |
29 |
14 |
231 |
97 |
328 | |||||
12 |
1956.04.01 ~ 1962.02.14 |
39 |
26 |
13 |
257 |
110 |
367 | |||||
13 |
1957.04.01 ~ 1963.02.22 |
71 |
40 |
31 |
297 |
141 |
438 | |||||
14 |
1958.04.01 ~ 1964.02.17 |
46 |
22 |
24 |
319 |
165 |
484 | |||||
15 |
1959.04.01 ~ 1965.02.20 |
55 |
30 |
25 |
349 |
190 |
539 | |||||
16 |
1960.04.01 ~ 1966.02.18 |
54 |
21 |
28 |
375 |
218 |
593 | |||||
17 |
1961.04.01 ~ 1967.02.18 |
45 |
24 |
21 |
399 |
239 |
638 | |||||
18 |
1962.03.02 ~ 1968.02.22 |
64 |
33 |
31 |
432 |
270 |
702 | |||||
19 |
1963.03.02 ~ 1969.02.11 |
55 |
28 |
27 |
460 |
297 |
757 | |||||
20 |
1964.03.02 ~ 1970.02.14 |
55 |
31 |
24 |
491 |
321 |
812 | |||||
21 |
1965.03.02 ~ 1971.02.01 |
49 |
24 |
25 |
575 |
346 |
861 | |||||
22 |
1966.03.02 ~ 1972.02.10 |
51 |
30 |
21 |
545 |
367 |
912 | |||||
23 |
1967.03.02 ~ 1973.02.16 |
61 |
37 |
24 |
582 |
391 |
973 | |||||
24 |
1968.03.05 ~ 1974.02.12 |
49 |
27 |
22 |
609 |
413 |
1,022 | |||||
25 |
1969.03.04 ~ 1975.02.08 |
45 |
23 |
22 |
632 |
435 |
1,067 | |||||
26 |
1970.03.05 ~ 1976.02.16 |
59 |
30 |
29 |
662 |
464 |
1,126 | |||||
27 |
1971.03.05 ~ 1977.02.15 |
67 |
38 |
29 |
700 |
493 |
1,193 | |||||
28 |
1972.03.02 ~ 1978.02.16 |
50 |
28 |
22 |
728 |
515 |
1,243 | |||||
29 |
1973.03.05 ~ 1979.02.19 |
50 |
34 |
16 |
762 |
531 |
1,293 | |||||
30 |
1974.03.05 ~ 1980.02.19 |
39 |
17 |
22 |
779 |
553 |
1,332 | |||||
31 |
1975.03.03 ~ 1981.02.19 |
42 |
22 |
20 |
801 |
573 |
1,374 | |||||
32 |
1976.03.03 ~ 1982.02.18 |
28 |
16 |
12 |
817 |
585 |
1,402 | |||||
33 |
1977.03.03 ~ 1983.02.16 |
34 |
23 |
11 |
840 |
596 |
1,436 | |||||
34 |
1978.03.04 ~ 1984.02.21 |
26 |
13 |
13 |
853 |
609 |
1,462 | |||||
35 |
1979.03.03 ~ 1985.02.15 |
20 |
7 |
13 |
860 |
622 |
1,482 | |||||
36 |
1980.03.05 ~ 1986.02.15 |
19 |
13 |
6 |
873 |
628 |
1,501 | |||||
37 |
1981.03.04 ~ 1987.02.17 |
20 |
14 |
6 |
887 |
634 |
1,521 | |||||
38 |
1982.03.03 ~ 1988.02.16 |
14 |
7 |
7 |
894 |
641 |
1,535 | |||||
39 |
1983.03.03 ~ 1989.02.16 |
12 |
9 |
3 |
903 |
644 |
1,547 | |||||
계 |
1,547 |
903 |
644 |
903 |
644 |
1,547 | ||||||
산서초 입학 ⇨ 산서분교 격하 ⇨ 장기초 졸업 |
산서분교 입학 ⇨ 장기초 졸업 | |||||||||||
졸업회수 |
입학 ~ 졸업 |
졸업생수 (남여) |
총누계 |
졸업회수 |
입학 ~ 졸업 |
졸업생수 (남여) |
총누계 | |||||
40(장기78회) |
84.3.5~90.2.16 |
16 |
1563 |
45(장기83회) |
89.3.3~95.2.21 |
4 |
1599 | |||||
46(장기84회) |
90.3.5~96.2.16 |
3 |
1602 | |||||||||
41(장기79회) |
85.3.4~91.2.12 |
8 |
1571 | |||||||||
47(장기85회) |
91.3.4~97.2.20 |
6 |
1608 | |||||||||
42(장기80회) |
86.3.3~92.2.19 |
10 |
1581 | |||||||||
48(장기86회) |
92.3.5~98.2.20 |
4 |
1612 | |||||||||
49(장기87회) |
93.3.5~99.2.11 |
1 |
1613 | |||||||||
43(장기81회) |
87.3.3~93.2.18 |
5 |
1586 | |||||||||
50(장기88회) |
94.3.5~00.2.18 |
2 |
1615 | |||||||||
44(장기82회) |
88.3.3~94.2.22 |
9 |
1595 | |||||||||
51(장기89회) |
95.3.5~01.2.20 |
0 |
1615 | |||||||||
계 |
48 |
|
계 |
20 |
|
8. 역대 교장 및 교감
역대 교장 및 교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교 장 |
교 감 | ||||
대순 |
성 명 |
취 임 |
전출및퇴임 |
기간 |
성 명 및 기 간 |
1 |
오용상 |
1948.08.01. |
50.11.29. |
2.3 |
김수환 (48.03.01. ~ ) 이동진 ( ) 이동석 (63.04.25. ~ ) 성상주 ( ) 김천득 (72.03.05. ~ 74.04.14.) 홍성학 (74.03.01. ~ 75.08.31.) 김상태 (75.09.01. ~ 78.02.28.) 정원주 (78.08.01. ~ 79.02.28.) 오영상 (79.03.01. ~ 80.11.15.) 오연상 (80.11.15. ~ 86.02.28.) 손영도 (86.03.01. ~ 89.02.28.) |
2 |
이상택 |
50.11.30. |
53.03.31. |
2.4 | |
3 |
정동수 |
53.04.01. |
54.05.14. |
1.1 | |
4 |
오상우 |
54.03.01 |
54.04.30 |
0.2 | |
5 |
김수길 |
54.05.15. |
55.11.29. |
1.6 | |
6 |
황해수 |
55.11.30. |
59.12.15. |
4.0 | |
7 |
김낙곤 |
89.12.16. |
61.03.31. |
2.8 | |
8 |
이동진 |
61.04.01. |
63.03.31. |
2.0 | |
9 |
최실경 |
63.04.01. |
66.03.31. |
3.0 | |
10 |
서성대 |
66.04.01. |
69.02.28. |
2.11 | |
11 |
이종식 |
69.03.01. |
70.11.14. |
0.8 | |
12 |
최준석 |
70.11.15. |
72.08.31. |
1.9 | |
13 |
이순우 |
72.09.01. |
76.12.14. |
4.3 | |
14 |
최복걸 |
76.12.15. |
81.07.24. |
4.7 | |
15 |
정세용 |
81.7.25. |
86.08.31. |
5.1 | |
16 |
김상선 |
86.09.01. |
89.02.28. |
2.6 |
9. 산서초 동기회별 담임 명단
동기회별로 담임선생을 소개하여 잊혀가는 기억을 더듬어 선생님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느끼기 바라면서 담임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회 수 |
입학~졸업년월일 |
1학년 |
2학년 |
3학년 |
4학년 |
5학년 |
6학년 |
1회 |
1947.9.1~51.7.18 |
|
김수환 |
손효종 |
김수식 |
김수식 |
김술이 |
2회 |
47.9.1~52.3.27 |
김수환 |
김수환 |
박훈도 |
박훈도 |
이경율 |
김수식 |
3회 |
47.9.1~53.3.21 |
임주동 |
오용상 |
김술이 |
조봉식 |
김술이 |
김술이 |
4회 |
48.9.1~54.3.18 |
손효종 |
이경율 |
엄대섭,최동수 |
이상택,오염복 |
김병관 |
오영상 |
5회 |
49.9.1~55.3.23 |
김수식 |
김수식 |
임정애 |
오영상 |
오염복 |
김병호 |
6회 |
50.9.1~56.3.17 |
이상택 |
김술이 |
이상택 |
김병호 |
김삼덕 |
김병호 |
7회 |
51.9.1~57.3.20 |
|
|
|
이달용 |
김병길 |
김태경 |
8회 |
52.4.1~58.3.28 |
오영상 |
김병호 |
김병길 |
|
김계춘 |
김계춘 |
9회 |
53.4.1~59.3.18 |
오영상 |
김수길 |
|
신병선 |
조상래 |
김영효 |
10회 |
54.4.1~60.3.19 |
|
|
신병선 |
조상래 |
송의준 |
석영석 |
11회 |
55.4.1~61.3.08 |
김수길 |
임영숙 |
황해수 |
이원표 |
석영석 |
남동완 |
12회 |
56.4.1~62.2.14 |
김병길 |
김병길 |
김달우 |
이달용 |
이항섭 |
이달용 |
13회 |
57.4.1~63.2.22 |
송의준 |
채홍섭 |
김낙곤 |
조호환 |
장인채 |
서상석 |
14회 |
58.4.1~64.2.17 |
김시우 |
이원표 |
김낙곤 |
서상석 |
이문보 |
서상석 |
15회 |
59.4.1~61.2.20 |
김달우 |
전우진 |
조만길 |
조만길 |
황정대 |
황정대 |
16회 |
60.4.1~66.2.18 |
이달용 |
이동진 |
한석출 |
김효중 |
김효중 |
서상석 |
17회 |
61.4.1~67.2.18 |
서상석 |
이동진 |
석영석 |
은말분 |
공윤선 |
서상석 |
18회 |
62.3.2~68.2.22 |
김효종 |
최병만 |
석영석 |
|
|
|
19회 |
63.3.2~69.2.11 |
김동석 |
|
은말분 |
오근상 |
김동훈 |
오근상 |
20회 |
64.3.2~70.2.14 |
서상석 |
정예적 |
공윤선 |
김순란 |
최상태 |
오근상 |
21회 |
65.3.2~71.2.13 |
|
은말분 |
수봉 |
문환 |
박영철 |
박영철 |
22회 |
66.3.2~72.2.10 |
|
|
|
|
박기순 |
최연철 |
23회 |
67.3.2~73.2.16 |
정진영 |
손익조 |
서일임 |
김일우 |
박영철 |
최연철 |
24회 |
68. ~74.2.14 |
서일임 |
손천득 |
오근상 |
권영대 |
뱍재철 |
박재철 |
25회 |
69.3.4~75.2.08 |
|
|
김일우 |
박영철 |
박영철 |
김윤현 |
26회 |
70.3.5~75.2.16 |
|
박재철 |
|
|
김광우 |
김광우 |
27회 |
71.3.5~77.2.15 |
|
|
|
박재철 |
김인구 |
김광우 |
28회 |
72.3.2~78.2.18 |
이미선 |
|
김일우 |
이선주 |
권오상 |
권오상 |
29회 |
73.3.5~79.2.16 |
|
|
|
|
김영도 |
염석일 |
30회 |
74.3.5~80.2.19 |
|
|
|
김광수 |
신동칠 |
신동칠 |
31회 |
75.3.3~81.2.16 |
박재철 |
김상태 |
김일우 |
손진석 |
김선완 |
김선완 |
32회 |
76.3.3~83.2.18 |
이선주 |
김상태 |
김광수 |
염석일 |
염석일 |
이상철 |
33회 |
77.3.3~83.2.16 |
김광우 |
정원주 |
김광수 |
이상철 |
조용락 |
조용락 |
34회 |
78.3.4~84.2.21 |
노재익 |
오열상 |
김병호 |
이상근 |
이상철 |
조용락 |
35회 |
76.3.3~85.2.15 |
노재일 |
오연상 |
김병호 |
이상근 |
최종구 |
정수암 |
36회 |
80.3.5~86.2.16 |
신동칠 |
오연상 |
황경순 |
정진영 |
최종구 |
정수암 |
37회 |
81.3.4~87.2.17 |
염석일 |
오연상 |
황경순 |
황경순 |
천정화 |
천정화 |
38회 |
82.3.3~88.2.16 |
김병호 |
오연상 |
김용권 |
윤영희 |
윤영희 |
천정화 |
39회 |
83.3.3~89.2.16 |
김병호 |
정진영 |
김용권 |
정수암 |
김용권 |
천정화 |
산서초 입학 ⇨ 산서분교 격하 ⇨ 장기초 졸업 | |||||||
40회 |
84.3.5~90.2.16 |
김병호 |
정진영 |
김웅권 |
정수영 |
정찬두 |
정승욱 |
41회 |
85.3.4~91.2.12 |
우정숙 |
김충희 |
김혜자 |
조증정 |
최홍열 |
오근상 |
42회 |
86.3.3~92.2.19 |
이송우 |
정진영 |
이송우 |
오근상 |
오근상 |
안성곤 |
43회 |
87.3.3~93.2.18 |
이송우 |
이송우 |
오근상 |
정찬두 |
오근상 |
안성곤 |
44회 |
88.3.3~94.2.22 |
김용천 |
정찬두 |
정승욱 |
송미정 |
김진석 |
김진석 |
산서분교장 입학 ⇨ 장기초 졸업 ⇨ 폐교(96.3.1) | |||||||
45회 |
89.3.3~95.2.21 |
정찬두 |
정찬두 |
오근상 |
송미정 |
김병희 |
김태형,김갑수 |
46회 |
90.3.5~96.2.16 |
정승욱,황미자 |
안성호,정진명 |
김진석 |
이도분,이분희 |
박영호 |
김성태 |
47회 |
91.3.4~97.2.20 |
송미정 |
안성곤 |
김병희 |
김병희 |
윤미정 |
황보옹 |
48회 |
92.3.5~98.2.20 |
송미정 |
이도부 |
이도부 |
김병희 |
김진혁 |
주궐돌 |
49회 |
93.3.5~99.2.11 |
김진석 |
이도부 |
이도부 |
정석숙 |
이병진 |
이재구 |
50회 |
94.3.5~00.2.18 |
김광숙,김태숙 |
조미정,이도부 |
박영호 |
최진희 |
최진희 |
이승목 |
51회 |
95.3.5~01.2.20 |
1995년 3월 5일 신입생없음 1996년 3월 1일 폐교됨 |
10.산서초등학교 총동문회
산서초등학교 총동문회는 1967년에 조직하여 (초대회장 서영만[1회], 2대회장 김영환[1회], 3대회장 한규인[2회]) 1978년까지 지속되었으나 흐지부지 되었다. 모교인 산서초등학교는 1989년 3월 1일 분교로 격하되고, 1996년에는 페교됨으로 모교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동문들 간의 소원함을 느껴 경향 각지에서 총동문회 재결성의 소리가 높아갔다. 2004년 5월 28일 서울에서 재경산서초등학교동문회(회장 엄기찬[7회])를 결성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면서 총동문회의 결성도 함께 촉구하게 되었다.
이에 뜻을 모아 포항시를 중심으로 2005년 8월 20일 산서초등학교총동문회 재 창립을 위해 기별대표 2~3명을 초청하여 회칙초안과 재 창립 총회에 대한 제반 사항을 결정하는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으며, 준비위원장에 김달우[1회], 간사에 금락두[4회]를 선정하여 준비에 착수하였다. 총회는 2005년 11월 26일 호후 4시 포항시 우현동 소재 중앙고등학교 대강당 향산관에서 성대히 거행하였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많은 동문들이 모여 총동문회의 앞날을 축복하면서 새로운 임원진을 구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11월 마지막 토요일에 정기총회를 개최하며, 춘계체육대회 및 합동산행 등을 실시하여 동문간의 친목을 돈독히 하며, 각기별동문회와 지역별동문회의 활성화에 힘쓰고 있다.
역대 회장단 명단은 다음과 같다.
년 도 |
회 장 |
부 회 장 |
감사 |
1967 |
서영만(1) |
김연우(1), 김상기(1) |
|
1970 |
서영만(1) |
김영환(1), 금락두(4) |
|
1972 |
김영환(1) |
이영곤(2), 금락두(4) |
|
1974 |
한규인(2) |
이영곤(2), 금락두(4) |
|
1976 |
한규인(2) |
이영곤(2), 금락두(4) |
|
2005.11.26(재창립) 2007.12.31 |
김달우(1) |
김정옥(1), 엄기준(2), 김진우(3) 김정자(4), 정영달(6), 엄기찬(7-재경회장) |
엄기홍(6) 김학선(21) |
2008.01.01 2009.12.31 |
금락두(4) |
김정자(4), 김태우(7), 김병채(8) 금진자(10), 최두식(10), 이기환(10-재경회장) |
고종식(16) 김유수(32) |
2010.01.01 2010.12.31 |
최두식(10) |
금형도(10), 김득우(11), 김대원(11), 한용대(12) 황보경선(14), 금화준(16), 이기환(10-재경회장) |
김운대(15) 김윤자(16) |
2011.01.01 2011.12.31 |
김만봉(11) |
이외준(13), 박영래(14), 김운대(15) 이순자(17), 최복희(18), 김창영(11-재경회장) |
최해득(13) 김윤자(16) |
11. 후원회
1981년부터 1988년까지 여러 가지 후원을 해주신 후원회 임원들은 다음과 같다.
년 도 |
회 장 |
부 회 장 | |
1981~82 |
김병식 |
황보수일 |
장두천 |
1983~85 |
김병식 |
장두천 |
|
1986~88 |
한금식 |
장두천 |
이외준 |
12. 어머니회
어머니회는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수고한 임원은 다음과 같다.
년 도 |
회 장 |
부 회 장 |
1980 |
최정자 |
이분출 |
1981 |
이 선 |
이청자 |
1983 |
서영란 |
박향숙 |
1984 |
박향순 |
박화선 |
1985 |
박화선 |
서영란 |
1986 |
김일자 |
박정화 |
1987 |
이청자 |
김종희 |
1988 |
이영자 |
오순금 |
13. 학교발전 유공자
항상 학교의 발전을 위하여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신 유공자들은 다음과 같다.
년도 |
성명 |
직업 |
업적 |
1951 |
서종원 |
세무서장 |
학교자료실 자료함 |
1953 |
금인석 |
실업가 |
국기게양대, 카비넷 5개 |
1954 |
강동철 |
실업가 |
교기 1점 |
1973 |
김대호 |
재일교포 |
TV, 이발기구, 식장막 |
1975 |
김병관 |
극동석유 |
75년부터 83년까지 5회에 걸처 수학여행관광버스 제공 |
1981 |
서상하 |
소아과원 |
방송시설 일체 |
1982 |
김동우 |
타자학원장 |
도서실용 서장 2개 |
1982 |
강유득 |
대구JC회장 |
5학년생 28명 대구 견학 |
1983 |
김병원 |
대원상사 |
교장, 교무실 칸막이 커텐 일체 |
14. 학교 방송 및 방영
농촌의 조그마한 학교였지만 선생님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방송 및
방영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년. 월. 일 |
방 송 국 명 |
제 목 |
비 고 |
1981. 02. 19. |
포항문화방송 |
학교자랑 우리자랑 |
라디오 |
1985. 03. 18. |
KBS대구방송국 |
서예 특색 교육 |
경북지역 TV방영 |
1985. 03. 20. |
“ |
“ |
전국 TV방영 |
15. 모교를 빛낸 졸업생
회수 |
성 명 |
주 요 경 력 |
출신지 |
1 |
김달우 |
초등학교 교감, 국민훈장 동백장 |
산서 |
2 |
박병택 |
경북대 농대졸, 부산학산여자중・여자고・교장, 녹조근정훈장 |
방산 |
2 |
김만주 |
서울 중곡동 새마을금고 이사장 |
방산 |
3 |
엄환섭 |
연세대 행정대학원졸, 청와대사정담당비서, 김천시장, 문경시장, 경상북도농림수산국장, 녹조근정훈장 |
산서 |
3 |
김진우 |
장기면장, 오천읍장, 포항시산림조합장(현) |
산서 |
3 |
서석표 |
구룡포읍장, 포항시과장, 포항시의정회사무국장(현) |
방산 |
4 |
금락두 |
고려대학교교육대학원졸,교육학석사,장기중학교장,영일군,포항시사집필위원,영일군향토사가회장, 포항교육상, 문교부장관상, 홍조근정훈장, |
방산 |
6 |
이경만 |
강원일보신춘문예단편소설당선(77년, 흑토지대) 소설 작가 신라문학소설부분대상, 서울대학교신문논픽션당선, 경상북도미술대전, 신라미술대전, 포항시서예대전, 영일만서예대전, 초대작가, 저서:<우혼제> |
산서 |
7 |
장두만 |
공군 중령, 보국훈장 |
방산 |
9 |
김태영 |
방송통신대학범학과졸, 정보통신부산하우체국장, 대한민국서예협회특선 |
방산 |
10 |
금명조 |
감사원 과장, (주)한화손해보보험상임감사, 홍조근정훈장 |
방산 |
10 |
이기해 |
농수산부 부이사관, 농협중앙회부장, 홍조근정훈장 |
방산 |
10 |
금락윤 |
경주시천북면장,경주시청과장,경주시립도서관장, 녹조근정훈장, 대한민국 미술대상전초대작가,대한민국새하얀미술대상전초대작가, |
방산 |
10 |
이기환 |
한국해양대학교졸, (주)KSS해운부사장, (주)KSS해운상임감사(현) |
방산 |
10 |
금형도 |
(사)한국서화작가협회초대작가 |
방산 |
10 |
엄기홍 |
한국해양대학전수과졸, 교통부해운항만청선박검사관, 해양환경관리공단특사업본부장(현), 국무총리우수공원상 |
산서 |
11 |
김대원 |
성균관대학교 전기공학과졸, 포스코부장, (주)태경시스탬 사장(현) |
방산 |
11 |
이기준 |
창원시 중앙동새마을금고 이사장(현) |
방산 |
13 |
이외준 |
포항시축산농협조합장(현), 대한민국새농민상(93년) |
산서 |
13 |
김병원 |
영남대학교환경보건대학원졸, 풍수지리학석사, (주)금보령대표이사(현) 법무부장관표창 |
산서 |
14 |
박영래 |
포항시청과장, (주)덕보건설 대표이사(현), 옥조근정훈장 |
방산 |
16 |
서종철 |
국민은행삼본지점장 |
방산 |
19 |
김헌우 |
한양대학교대학원 토목공학과졸, 공학석사, 육군 중령, (주)대우엔지니어링 상무(현), 국방부장관표창 |
산서 |
22 |
이기권 |
경북대학교 행정대학원 수료, 포항시청과장(현) |
방산 |
23 |
이상준 |
영남대학교대학원졸, 한국학석사, 법무부 검찰사무관(현), 등단(수필), 포항시사집필위원, 저서:“장기고을 장기사람 이야기” |
방산 |
25 |
이강덕 |
경찰대학1기졸, 청와대치안비서관, 부산경찰청장, 경기도경찰청장(현) 홍조근정훈장 |
방산 |
27 |
김치용 |
인제대학교대학원 전산물리학과 이학박사, 동의대학 교수(현) |
방산 |
29 |
김금주 |
시인, 아동문학가, 상화문화제 시인협회상 수상, 월간한비문학등단(2008년) |
방산 |
31 |
서순옥 |
시인, 아동문학가,한국육필문학 신인상(현대시), 문학일보신춘문예(시조) 울산 문인협회, 시인협회, 아동문학회 회원, 저서:“묻어야 할 그리움” |
방산 |
16. 【조모교】장기초등학교의 개교 100주년 축하와
【모교】산서초등학교의 추억을 남기면서.....
1) 장기초등하교 개교 100주년을 축하하며
산서초등총동문회장/김만봉(산서초 11회)
장기초등학교가 개교 이래 100년 동안 지역의 인재를 양성하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온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시점에 장기초등 개교 100년사 발간을 위시하여 다채로운 행사를 하게 된 것을 매우 뜻 깊게 생각합니다. 이 100년사는 장기지역 교육계의 역사로서 영원한 우리지역의 문화유산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한편으로는 저의 모교인 산서초등학교가 폐교된 현 시점에서 마치 실향민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처럼 쓸쓸한 마음을 감출수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도시생활의 풍요 속에서 어릴 적 기초지식을 깨우쳤던 모교에 대한 소중함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태가 변하고 달라진다 해도 우리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모교, 특히 초등학교에 대한 기억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나의 초등학교에 대한 기억은 도시락입니다. 누런 알루미늄 도시락도 없는 애들은 밥그릇에다가 점심을 싸 오는 아이들도 있었지요. 밥그릇에 밥을 담고, 작은 장종지에다가 반찬을 담아 밥 속에 그 것을 꾹 눌러 보자기에 싸 들고 학교에 오는 애들이 있었다는 것을 요즘 애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따뜻한 보리밥에다 김치반찬을 종지에 담아두면 도시락밥은 금방 김치국물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지요. 그것도 싸 오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었으니 정말 가난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소 풀을 베고, 나무를 하고, 보리를 베고 타작을 하고..., 그렇게 질경이처럼 모질게 자란 아이들이 지금은 거의 대처로 나가 포항, 대구, 부산, 서울 등지에서 나름대로 성공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그 시절 이야기를 즐겁게 하며 여생을 활기차게 보내고 있습니다.
또 하나 기억나는 게 있다면 고석사에 대한 소풍입니다. 초등학교 봄 가을소풍은 고석사로 늘 정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산서에서 방산 고석사까지 걸어서 가던 그 길이 우리들에겐 꽤 먼 길이었습니다. 고석사 옆 큰 묘지 공터에서 보물찾기도 하고, 노래자랑도 하고, 둘레둘레 둘러앉아 삶은 밤과 고구마며 도시락을 먹든 날들이 기억납니다.
그런 어린 시절의 시린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산서초등학교는 1936년 5월 1일 산서학술강습소 개설에 이어 1946년 장기공립초등학교 산서분교로 출발하여 1948년 3월 1일 산서공립국민하교로 승격되어 한때는 전교생이 400명 가까이 될 때도 있었습니다. 농촌인구가 격감하는 시대조류에 따라 1989년 산서분교장이 되어 장기초등학교에 편입되었고, 1996년 3월 1일 이 학교는 결국 폐교되었습니다.
그동안 번번한 동문회조차 없이 잊혀 가다가 2005년 12월경 김달우, 엄기준, 금낙두, 이상준 등이 중심이 되어 산서초등학교 총동문회가 조직되었고, 저가 현재 총동문회장을 맞고 있습니다.
이 한권의 책을 발간하기 위해서 각계 각층에서 여러분들이 자료수집 및 각종행사에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폐교된 산서초등학교에 지면을 할애하여 주신데 대하여 졸업생 전체의 뜻을 모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다시 한번 개교 100주년을 축하하며, 앞으로도 많은 발전과 영광이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2) 장기초개교100주년기념 축하 휘호
초대작가 / 금형도 (산서초 10회)
(敎學不倦교학불권-가르치고 배움에는 게으러지 않아야 한다)
3) 선생님전상서
산서초등학교총동문회 역대회장 / 금락두 (산서초 4회)
#손효종(1학년 담임) 선생님께!
선생님 안녕하셨지요?
아무것도 모르던 코흘리개들을 보살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교문 앞의 피서지란 늙은 소나무그늘 아래서 “학교종이 땡 땡 땡”, “산토끼” 등을 배울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일정한 교실도 없이 이리 저리 다니면서 공부하였지요. 엊그제 같은 기억인데 벌써 60년이라 세월이 흘렀습니다. 시간으로 따져보니 참으로 긴 세월입니다. 종종 전화 드리겠습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오.
#이경율(2학년 담임) 선생님께!
선생님께서는 커다란 키에 항상 밝은 웃음을 띠시고는 저희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2학년인 저희들은 서산서원에 배정되었지요. 학교에서 학생전체 운동장 조회가 없을 때는 바로 서원으로 등교했고요.
서원으로 바로 갈려면 박달골(朴德谷)재 정상 두 갈래 길에서 왼쪽으로 가면 학교로 가는 길, 오른쪽으로 가는 길은 서산서원 가는 길이였지요. 집에서 늦게 출발하는 날이나 놀면서 가던 날은 어김없이 종종 지각을 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 너머 오는 저희들을 기다리시며 싫은 내색도 안하시고 저희들을 향해 손을 흔들러 맞이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저 높은 하늘에서도 저희들에게 저희들을 향하여 손을 흔드시고 계실 것입니다. 그곳에서도 잘 계시죠? 선생님!
#엄대섭(3학년담임) 선생님께!
선생님께서는 기억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만 1950년 3학년! 그 해 실습시간에 사택 옆에 있는 텃밭에 일년감, 토마토를 심었는데 작황이 좋아 우리 모두는 매우 기뻐하였지요, 수학 할 무렵에 6.25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우리는 학교에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요. 전황이 불리하여 남으로 밀려 내려오고 포항 오천쪽에서 들려오는 포성이 멎지 않았지요. 학교는 못 갔지만 토마토가 생각이 나서 어느 날 부모님의 만류도 뿌리치고 달려가 보았더니 토마토 밭이 엉망이 되어 있었지요. 섭섭하고 원망스럽고 돌아오는 길이 서럽기 그지없었지요.
지금도 어느 밭에선가 빨갛게 익는 토마토를 보면 그때 아쉬웠던 기억을 떠올리곤 합니다. 선생님께서 집으로 저희들을 부르시어 맛있는 과자랑, 점심을 잘 먹고 돌아온 기억도 생생합니다. 선생님! 너무 너무 보고 싶습니다. 찾아뵙고 옛날 예기 하겠습니다.
#오염복(4학년 담임)선생님께!
선생님! 선생님! 너무나 무서우셨던 호랑이선생님! 고양이 앞의 쥐라는 말도 있지만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에 우리 반 뿐만 아니라 전교생이 벌벌 떨었던 기억이 납니다. 운동장 조회가 있는 날은 선생님께서 구령대위에서 “앞으로 나란히! 바로! 열중 쉬엇! 차렷!” 등 구령을 하실 때. 줄이 바르지 못하거나, 앞으로 두 팔을 올리지 않고, 잡담을 하는 학생이 발견될 시는 구령대에서 그냥 뛰어 내리시어 해당 학생 앞에 떡 버티고 서시면 무서운 호랑이가 뛰어 내려온 듯 간담이 서늘해지곤 했습니다.
포항 고속 터미널 앞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 하셨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운동 신경이 좋아 달리기도 곧잘 하시곤 했는데 뭐가 그리 바빠서 저 하늘을 달려가셨는지요. 지상에서 천국으로 이 제자가 선생님의 명복을 빌어드립니다.
#김병관(5학년 담임) 선생님께!
김병관 선생님!
선생님은 저에게 특별한 분이시며, 지금도 고향에서 만나는 처지이고 보니 편지가 오히려 쑥스럽습니다. 초가을의 햇볕이 따갑게 내려 쬐든 어느 날 청소시간에 일어난 일이 잊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흑판에 욕된 말을 써놓고 종례를 맞이하게 되었지요. 확실한 내용은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선생님께서는 “누가 이 낙서를 썼느냐?” 하시면서 모두 눈을 감으라 하시고 “낙서한 사람은 손을 들라!” 하셨지요.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자 나올 때까지 집에 보내지 않겠다하시고는 교무실로 가셨고, 우리들은 누가 셨는냐고 서로를 의심하며 물었으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슬그머니 교실을 빠져나가 교무실로 선생님을 찾아갔지요.
“선생님 제가 낙서를 하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는 “응 그래 알았다.” 하시면서 교실로 오셔서 종례를 하셨지요.
선생님! 이제 와서 말씀 드리기는 좀 뭐하지만 저는 아직도 그 낙서의 범인을 알지 못합니다.
저는 그저 너그럽게 용서해주신 그 마음에 감사했습니다.
그 사건뿐만 아니라 뼈에 사무치는 사건 하나가 또 있었지요.
6학년이 되던 4월 28일이였습니다.(이날은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이라 정확히 기억합니다) 저의 생애에 아주 큰일을 저질렀던 날이지요.
그 날도 오후 청소 시간에 화장실 옆에서 한 친구의 입에다 휘발유를 머금케하고 약 1.5메터 앞에 종이에 불을 켜 놓고, 입에 머금은 휘발유를 확 불게 하였지요. 그랬더니 별안간 휘발유에 불이 붙어 얼굴로 몸으로 번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라 정신이 없었지요. 겨우 불을 끄고 나니 친구의 온 얼굴에 화상을 입고 몸부림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교장선생님 이하 여러 선생님께서 뛰어오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불에 탄 얼굴을 보더니 그냥 등에 없고 읍내 병원으로 한걸음에 뛰었지요.
읍내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하고 며칠은 학교에도 오지 못했습니다. 휘발유와 성냥을 준비한 것이 저였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 친구를 보면 평생 잘못을 빌어도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이 클 때는 잘못을 저지르며 큰다고 하시면서 용기를 잃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저를 이렇게 아껴주시니 너무나 감사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금도 장기에서 함께 생활하면서도 그 고마움을 갚지 못하고 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늘 존경하옵고 존경하옵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오영상(6학년담임)선생님께!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은 영원한 저의 선생님이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조상에 대한 숭조의 정신과 성현을 찾아 그 길을 실천하려고 하셨습니다. 추운 겨울눈이 내리는 어느 날 마현리 명장골에서 망매의 겨울 칼바람을 해치고 학교에 오신 일이 있었습니다.
어깨에 눈을 채 털어내기도 전에 교실에 오셔서 “내가 오늘 눈을 밟고 오는데 발 밑에서 눈이 다져지는 소리가 뽀도독, 뽀도독 소리가 마치 개구리가 우는 소리와 같았다” 고 하시면서 “문득 뒤를 되돌아보았더니 내 발자국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더라. 여러분도 작은 행동을 바르게 하여 뒤가 깨끗하고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들을 때는 별로 감흥이 없었습니다만 나이를 먹으면서 참으로 훌륭하신 말씀이며, 큰 교훈임을 깨달았습니다.
선생님!
6학년 초에 일어난 사고와 크고 작은 잘못이 일어나는 어린 시절이 이었지만 너그러이 용서를 하시면서 항상 격려하여 주셨습니다. 중학교 입학시험 날짜가 변경 되었을 때 함박눈이 쏟아지는데도 불구하고 저희 집까지 직접 오셔서 알려주신 일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너무나 고맙습니다.
1964년 이후 모교 장기중학교에 근무할 때도 저를 격려하여 주시고, 고향의 옛일이나 역사적 기록을 조사하여 저에게 제공하여 주셨습니다. “송우암선생장기적거기” 필사본도 선생님께서 알려주시니 너무나 고맙고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 하늘나라에서도 보살펴주십시오. 선생님께는 저는 항상 산서국민학교 6학년 철부지 학동이일 따름입니다. 삼가 명복을 기원합니다.
4) 장기초 개교 100주년을 기리며.....
/允峰 최남식 (최 식, 산서초 7회)
우리민족의 혼이 서린 백두대간,
그 대간 속에 태백은 우리의 영산(靈山)
그 줄기 벋어
영일만 장기에 우뚝 솟은 우리의 산 -동악,
푸른 물결 넘실거리는 동해바다,
신라천년의 꿈이 서린 장기읍성,
조용하고 아름다운 충효의 고장.
여기 !!
양지 바른 곳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장기 초등"
100년의 전통과 역사를 고이 담고서
100년을 하루 같이
성성 장구하였도다.
수많은 석학을 배출(輩出)하고
더 발전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오늘도, 내일도
희망의 끈을 바짝 부여 잡고,
또 다시 100년을 기약하며,
우리 모두 힘차게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며
새 장기를 이어 갈 때
자자 손손 억만대 누리며
찬란했던 신라의 문화로 승화 (昇華) 시키자.
오 ~ 장하다 !
"장기 초등 만만세"
100년의 세월 속에 담긴 화려한 "장기 초등"
우리 장기 모두는
형제의 이름으로 "장기초등, 장기 사랑"
높이 더 높이 오르세.
5) 교실보다도 더 정다운 피서지
초대작가 / 금락윤(산서초 10회)
(산서초 교문 앞에 있었으나 1959년 사라호태풍에 없어짐)
6) 추억의 동방사이다.
장기중총동문회장 / 김부우 (산서초 16회)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몇 시쯤에 눈이 뜨였을까? 매일 마침 잠이 부족해 어머니가 깨워야 했던 내가 저절로 눈을 번쩍 뜨고 주변을 둘러보니, 어머니는 이미 고구마와 팥 ․ 울콩이 섞여 있는 찰밥에다 삶은 밤과 삶은 고구마를 함께 보자기에 싸 놓으셨다.
깜깜한 호롱불 밑에서 나물 반찬에 찰밥을 몇 숟가락 후다닥 들고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고무신을 꿰차고는 500m 쯤 되는 초등학교까지 냅다 뛰었다.
정말 기분 좋은 날, 오늘은 산서초등학교에서 수학여행 가는 날이다.
보리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친구가 많던 가난하던 시절이라 수학여행도 지금처럼 며칠씩 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꼭두새벽에 출발했다가 한밤중에 돌아오는 당일치기 코스였다. 이 여행마저도 전원 참석이 어려워 학급 친구 50여 명 중에서 몇몇은 빠진 채로 수학여행을 가기로 한 것이다.
학교에 도착하니 운동장에 버스 한 대가 시동을 켠 채 부르릉거리며 기다리고 있다. 얼른 자리에 앉았다.
날이 점점 희부옇게 밝으면서 나머지 친구들도 하나 둘 모이고 선생님도 오셔서 드디어 버스는 출발하였다.
행선지는 경주 일원의 불국사 ․ 석굴암 ․ 오능 ․ 반월성 등등이다. 버스는 꼬리에 뿌연 먼지를 매단 채로 버드나무가 줄지어 있는 금오 신작로를 지나 끝없이 먼 길을 털털거리며 달린 끝에 경주에 도착했다.
고향에서 150여리 떨어진 그곳에는 눈길 닿는 모든 게 신기하고 새로운 세상이었다.
오능인가 반월성인가 하도 오래전의 일이라 이제는 기억도 헛갈리지만, 하여튼 그곳에는 때마침 여러 학교에서 소풍인지 수학여행인지를 온 아이들이 바글거렸다. 단체사진을 찍고 놀고 있을 때 거기서 작은아버님을 만난 게 아닌가?
작은 아버님께서는 장기초등학교 학생들을 인솔해서 오셨는데, 돈이랑 과자 몇 가지와 동방사이다 한 병을 내게 주셨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달콤하고 목이 탁 트이는 동방사이다를 받아들었을 때, 정말 하늘로 날아오르는 나는 기분이었다.
돈은 주머니에 넣고 사이다와 과자를 받아서 보자기에 쌌다. 먹고 싶었지만 집에 계시는 할머니께 갖다드리고 싶었다.
모든 집들이 손자를 귀여워했지만 유독 우리 할머님께서는 맏손자인 나에게 많은 사랑을 주셨다. 우리 집 형제는 3남 2녀다. 열 명이 태어나서 겨우 5명이 생존했는데 위로 누나가 있고, 바로 밑에 여동생, 그리고 남동생은 나와 띠 동갑이다. 막내와는 14살 차이가 난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외동이었다. 마을에 잔치나 제사가 있으면 할머니께서는 언제나 맏손자인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데리고 가지 않을 때는 과자랑 떡이랑 손수건에 싸서 가져다 주셨다. 할머니가 가져오신 손수건을 풀어보면, 떡과 과자가 달라붙어서 손수건도 떡도 노랗고 빨갛게 물이 들어 있었다. 그래도 참 맛이 있었다.
경주에서 작은아버지께 동방사이다를 한 병 얻고 나자 할머니께 맛있는 것을 드리고 싶어서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래도 해는 중천에 있어서 몇 군데를 더 들른 끝에 경주 구경을 다 마치고 집에 도착한 것은 캄캄한 한밤중이었다.
하루 종일 나돌아 다닌 끝에 비포장길을 털털거리며 두 시간도 넘게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눈까풀이 내리 덮였지만, 집에 도착하니 이상하게도 기운이 솟았다.
나는 신이 나서 수학 여행담을 떠들어대며, 작은아버지에게 얻은 과자랑 동방사이다를 할머니께 내 놓았다.
할머니께서는 “왜 먹지 않고 가져왔냐.” 면서 막 나무라셨다.
내가 “할매 생각이 나서 같이 먹으려고 가져왔다.”고 대답했더니, 할머니께서는 “아이고 내 새끼.” 하며 엉덩이를 두드려주셨다.
호롱불 밑에서 할머니와 같이 사기대접에 따를 때, 화르르 부풀었다가는 쏴르르 거품이 꺼지던 그놈, 코끝을 팍 쏘아 눈물이 핑 돌게 하던 짜릿하고 달콤한 동방사이다!
1965년 어느 가을날의 이야기이다.
이제 고향의 먼지 폴폴 일던 비포장도로는 매끈한 아스팔트로 포장되고, 도시는 화려하고 풍족한 딴 세상으로 변했다. 그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이미 할머니는 내 곁에 계시지 않고, 내 머리에도 희끗희끗한 서리가 내렸으니…….
어쩌다 대형 마트를 들르면, 환한 조명 아래 매끈한 몸매, 화려한 치장을 한 채로 눈길을 유혹하는 갖가지 기능성 음료와 건강 음료가 진열대에 가득하다. 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문득 저 깊은 내장까지 찌르르 흔들던 그날의 동방사이다와 할머니의 흰 머리카락이 떠오른다.
그리고는 난데없이 코끝이 찡해진다.
(1965년 10월20일 산서국교 16회 수학여행 기념)
7) 잃어버린 교가(校歌)
작가(수필) / 이상준 (산서초 23회)
졸업앨범이란 게 없는 산간벽지의 학교가 있었다. 50명 남짓한 코흘리개 졸업생들이 나무걸상을 운동장에 들어내어 선생님들을 모셔 앉히고 자신들은 그 뒤쪽에 줄지어 서면, 십리 자갈밭 길을
숨차게 달려온 읍내 사진관 아저씨가 까만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사진 한판을 찰칵 찍었다. 한 장에 10원인가 하는 흑백사진. 부평초처럼 객지로 떠도는 동안 그것마저 분실하고 없는 내게는 같이 졸업한 동창생들이 누구였는지, 담임선생님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도 가물가물하다.
그런데도 등․하교 길에 박달골재를 넘으며 꽥꽥 불러댔던 그 교가만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입가에서 뱅뱅 돌고 있으니 참 희한한 일이다.
「동대봉 우뚝 솟아 정기 서린 곳
우렁찬 고동소리 울려 퍼진다.
우리 모두 다 같이 횃불을 들고
내 고장 내나라 밝게 비추기를
마음에 맹세하는 우리 배움터
그 이름 영원 하리 산서 산서교」
‘동대봉산’은 경주와 포항 장기를 연결하는 산맥의 시발점이라고 한다. 그 동쪽으로 기림사를 품고 있는 함월산을 지나고 동해가 한눈에 트이는 만리성재를 거치면 장기면 산서리란 곳에 이르게 된다. 이 일대는 산과 골이 깊어 몸을 숨기기에 좋고, 능선을 잘만 이용하면 사통팔달의 요지이기도 하다. 때문에 신라 때는 동해 쪽에서 서라벌로 쳐들어오는 왜구를 막기 위해 재 마루에 ‘만리산성’을 쌓았고, 임진왜란 때나 구한말에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모여든 숱한 의병들이 이곳에서 적과 맞서 싸웠다고 한다. 한말 산남의진의 제 3대 의병대장 최세윤 공이 마지막에 장기로 와서 왜적과 대적하여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감골’에서 일군(日軍)에게 체포되었다는 사실과 의병장 장헌문 공이 의병 300여명을 조직하여 이 산 일대에서 맹활약 한 전공(戰功)에 대한 기록은 의병사(義兵史)를 다루는 책자마다 동쪽하늘의 샛별처럼 빛나기도 한다.
이런 동대봉산의 정기를 이어 받았다고 한 산서초등학교는 1936년 5월 1일 지역 몇몇 유지들이 주동이 되어 백성들을 깨우치게 하여 항일정신을 고취시킨다는 소박한 사명아래 개교하였다. 각 학년마다 1개 반(班) 이상을 넘길 때가 한 번도 없었던 어설프고도 작은 학교였지만, 교가 가사에는 한민족의 원대한 역사정신이 살아있다. 이곳에서 최후까지 격전한 영남지역 의병들의 꿋꿋한 정신과 기개가 그대로 이 산간벽지 학교의 교가에 오롯이 반영되어 있음도 알 수가 있다.
농촌인구가 격감하는 시대조류에 따라 1996년 3월 1일 이 학교는 아쉽게도 폐교되었다. ‘그 이름이 영원 하리’란 학동들의 외침도 이제 다시는 들을 수 없는 아련한 추억속의 메아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 학교를 거쳐 간 그때의 학동들은 지금도 사회 요소요소에서 훌륭한 톱니바퀴가 되어 그 시절을 기억하며 꿋꿋이 살아가고 있다.
8) ‘경재’ 이야기
작가(수필) / 이상준 (산서초 23회)
살다보면 남자들이라고 해서 울고 싶은 순간이 왜 없겠는가? 남들은 비싼 과외를 받는데 내 아이들에게 그런 과외 한번 시켜주지 못할 때도, 변변찮은 병원 한번 가보지 못하고 저승으로 먼저 보낸 어머니 생각이 날 때도, 신발이 터져 바느질 실로 듬성듬성 꿰맨 운동화를 신고 공무원고시학원 다니던 누이동생 생각이 날 때도 울고 싶었다. 그렇지만 남자들은 한 번도 소리 내어 울 수가 없는 가련한 존재이다. 어디 사내대장부가 눈물을 질질 짜느냐고 흉볼 것이 뻔 하기 때문일 것이다.
30여년 만에 초등학교 동기들을 만났다. 같이 졸업한 학동 전부가 50명 정도 되는 산골의 학교였다. 지금은 폐교되고 어떤 노인복지시설이 들어 있다만, 십 수 년 전만해도 고만고만한 코흘리개들이 재를 넘고 하천을 건너 모여들었던 보금자리였다. 더듬고 더듬어 그때 그 시절 정들었던 친구들이 처음으로 만난 것이다. 남들 다 하는 ‘동기회’를 우리도 한번 하자고 누군가가 제안했던 결과였는데, 대구와 부산 등지에서 까지 모인 친구래야 고작 열 명 이 전부였다.
저녁을 먹으며 수다를 떨 때 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그냥 헤어질 수 없다며 2차로 간 노래방에서 나는 처음으로 ‘경재’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걔 죽었어, 딸 하나와 마누라까지 데리고 동반자살 했다 카더구만!”
갑자기 내 가슴속이 찢어져 내렸다. 그 애의 어릴 적 그 순진무구한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보다도 10 리 정도 더 떨어진 산골에 그 애는 살았다. 그 애가 시간에 늦지 않게 학교에 오려면 새벽 일찍 집에서 출발을 해야 했다. 중간에 우리 집이 있어 등하교 길에 같이 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정도들만큼 들었다. 중학교에 갈 형편도 안 되었는지 그 애는 재건학교란 데를 갔다. 중학교 교복을 입은 내 곁에 오기가 거북했든지 그때부터는 등하교 길에서 나를 보면 재빨리 논두렁 밑에 숨기도 하던 어릴 적 모습이 선하다.
재건학교 졸업 후 ‘대구 하양’ 어딘가로 가서 방직공장에 취직을 했다는 소리를 들은 게 마지막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간답시고 대처로 돌아다니다 고향에 오니 그의 가족들은 모두 이사를 가버리고 없었다. 텅 빈 산골짝 그 아이의 집엔 허물어진 돌담과 깨진 옹기 짝들이 팍팍했던 그 집 살림살이의 모습들을 대변하고 있었다.
꽁보리밥에 무장아찌 반찬 도시락 외엔 본 기억이 없다. 친구들이 괴롭혀도 항상 얼굴에는 해맑은 웃음을 품고 다녔던, 마치 산 사슴처럼 여린 아이였는데, 그 애가 가족들과 같이 가스통을 폭발시켜 동반자살 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얼마나 사는 것이 고달팠으면 어린 자식과 마누라까지 데리고 저승으로 갔을까. 이 순간도 내 가슴속에는 들풀처럼 살다간 그 애 생각이 가득하다.
9) 나의 모교
시인,아동문학가 / 김금주 (산서초 29회)
하얀 서리가 내려도
장대비가 쏟아 부어도
재 너머 학교 가는 길은 마냥 따뜻했다.
흑흑 뛰어 모퉁이 돌아가면
화단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붉은 베롱나무
꿈을 담아주던 그 교정이
진달래꽃을 따고 함께 난로를 피던 그때의 친구들이 그립다.
그곳을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엔 파도가 인다.
도회지의 지친마음들을 금새 감싸버리는,
어느새 유년의 추억을 달리고 있다.
산골 소녀에게 꿈을 심어준 은사님
운동장에서 놀다 맘껏 마시던 달디 달던 수돗물
비오는 날이면 비료포대를 들고 재 너머 오시던 어머니...
가슴을 데웠던 그날들을 사랑합니다.
10) 고향 어귀에서 (등단시 )
시인, 아동문학가 / 김금주 (산서초 29회 )
고향 어귀 들어서면 들풀 먼저 반겨준다.
흔한 개망초 꽃도 고향 것이라면
내겐 그리움인 것을
유년의 푸른 언덕
와락 내안으로 들어와 눈을 뜨겁게 한다.
논두렁을 뛰어 다니던 8살 개구쟁이
영영으로 자라게 해 준 나의 모태
일상 속에서 너를 잊은 적도 많았지만
너는 한번도 나를 외면하지 않았구나
다가가면 말없이 안아주고
저 신작로를 통째로 건네주며
한없는 사랑 채워주는
이곳이 나의 고향인 것을,
11) 소꿉친구
시인/ 서순옥(산서초 31회)
소풀 먹이던 뒷동산은
떡갈나무가 무성하고
피라미 잡던 앞개울은
여운만 흐르고 있다
수줍어 말 못하고
살며시 홍시 건네주던
붉은 너의 얼굴이
감나무마다 익어 가는데
강산을 세 번 넘기고
이제야 추억을 더듬어보니
옛동무 오간데 없고
그리움만 무덤으로 봉해져 있다
병정놀이하면 언제나
나의 포로가 되어주었고
소꿉놀이하면 바삭 붙어 앉아
신랑이 되어주던 친구야!
보리밥도 잘도 먹고
소풀도 잘 베던 머슴 같은 친구야!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 포로가 되어
뉘 신랑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니?
* 시집 "묻어야 할 그리움"에서
12) 그리운 얼굴들(* 故엄상옥 故김무숙을 생각하며 )
시인, 아동문학가 / 서순옥 (산서초 31회)
졸업 사진을 보다가
나도 몰래 내뱉는 한마디
나쁜 기지배들!
사진은 저렇듯 생생한데
뭐가 그리 바빠서
뒤도 안돌아 보고 갔는지
비 맞은 땡중마냥
혼자 중얼중얼하는 사이
두 볼에 타고 흐르는 그리움
신의 질투를 살만큼
한 늠은 너무 씩씩하고
또 한 늠은 너무 예쁘고
누구보다 마음은 따뜻하나
모질지 못하여
세상을 이기지 못했던
여리고 잔정이 넘치는 친구
혈혈단신(孑孑單身) 훌쩍 떠났지만
너의 영혼 우정 사리는
우리들 마음속 깊이
그리움으로 박혀버린 것을 …….
첫댓글 선생님께서 또 긴긴 시간 애 쓰신 보람이 보이십니다.
저희 17회 1학년 담임선생님은 서상석 스승님이십니다.
저희 기수들에게는 특별한 스승님이신데요.
입학의 시작과 졸업의 마무리까지 해 주셨던 스승님이십니다.
한번 찾아 뵈려 했더니 이미 가시고 안계신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내내 건강하십시요.
수복에게! 담임선생님 이름을 알려주어서 고마와요. 학적부에도 적혀있지 않았으요. 수정 할께요............
락두 형님 ~~~
참으로 애써시고 노고가 많어시네요. 우리 산서초교뿐이 아니라 고향 장기의 전체발전에 너무나 큰공을 세우십니다.
그 열정 본 받고 싶습니다.
정말로 고생과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끝까지 읽너라 시간 가는줄 몰랐습니다. 형님이 앞장 써시어 산서초교의 역사를 알려 주심에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기억도 너무 좋으시고, 이렇게 많은 자료를 수집하시너라 얼마나 머리 아팠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 7회 담임 선생님 1~2학년때 "조 봉식" 선생님으로 기억 납니다. 키도 크시고 정말로, 너무 너무 좋은 선생님으로
기억 됩니다. 참말로 좋은 선생님, 진정한 사랑의 교육자 이었슴을 어린 그 시절의 기억을 ....
윤봉!
우리 산서초교의 많은 글을 올려주어 감사하고, 조봉식 담임 선생님을 알려주어서 고마와요. 조봉식 선생님은 저도 잘 알지요. 멋쟁이셨구요. 청림출신이지요. 보완할께요...........그리고 7회 3학년담임 알려주세요...
선배님! 이많은 자료를 다 어떻게...
역사에 뒤안길로 사라진 모교의 의 전모를 꼼꼼이 적나라 하게 여미시어 자취를 남겨주신 선배님 에게
깊은 감사를 들입니다,엄환섭님은 경북도 식상국장으로 알고요 문경이 아닌 점촌시장,성주군수로 알고 있습니다,
선배님 건강 하십시요.
답글 고맙고요. 여러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실타레처럼 풀어냈지요. 엄환섭선배의 경력도 애매모호 고생 좀 했지요. 알려주어서 너무 고마와요................ 수정하겠읍니다.
산서초등의 역사자료를
한꺼번에 다 볼수있게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기초등100년사에 기록될
기초자료로 알고 있습니다만
선생님의 노고가 매우크십니다.
원님 덕분에 장기학당에 올려서 여러가지 새로운 자료로 수정이 가능하게 되니 더욱 고맙군요. 장기학당이란 공간이 있는 것이 얼마나 유용하고 편리한지 몰으겠으요. 원님! 고마와요..............
선생님께서 애 쓰신 결과물을 앉아서 편안하게 읽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김부우회장의 소풍날 추억엔 당시의 정서를 충분히 만끽할 수 있고 그때와 같은 감흥을 느낍니다.
우리는 이런 기회로 옛날의 추억을 되씹을 수 있어 마음이 한결 즐겁지요. 고마와요...........
비록 저의 모교는 아니지만 겨울이면 소달구지 몰고 월산에 나무하러가는 길목이라 수없이 지나친 곳이며
정감이 가는 우리 고향의 유일한 산간벽지의 학교 졸업생 모두가 타학교에 비해 더더욱 경제적 어려움속에 자라왔으니
선생님과 같이 본받아야하고 역경을 딛고 자수성가한 큰인물이 많이 배출된 학교인것 같습니다
금선생님의 정성스런 선생님 전상서속의 오영상선생님(정골의 오정희 부친과는 다른 선생님?)은 제가 장기초 4학년(65년)때 담임하셨든 분이 아닌지 궁금합니다
매번 단벌 밤색 골덴 양복을 즐겨착용하셨으며 인자하시고 온화한 성품을 가지셨던 분이었는데 그만 이세상에 안계신다니 선생님 명전에 삼가 명복을 빕니다
바쁘다는 핑개로 답글을 올리지 못하여 송구하네요. 선진씨가 기억하는 오정희 부친님은 오연상 선생님입니다. 조금의 오차일 것입니다. 이해바랍니다. 건투를 기원하면서..........
선생님께서 긴시간 동안 애써신 보람이 훗날 역사속에 길이길이 빛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항상 고향을 위하여 고군분투하시는 선생님의 열의에 깊이 감사드리며 늘 축복속에 건강하시길 빕니다
나의 고생이 아니라 장기초등학교 동문회에서 산서부분을 할애해 주신데 대하여 무한한 감사를 느끼지요. 학교도 없어졌는데 이러한 기회가 없었드라면 영영 역사속으로 살아졌을 것이에요. 천만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했어요.................. 격려주어 고마와요........
고향을 찾는 마음으로 이곳을 찾습니다.
선생님! 선배님!
뿌듯하시겠습니다. 좋은 일들이 많이도 있네요.
발전이 있는 분, 건강하게 열심히 살고계신 모든분께 축하드립니다.
산서24회 졸업생입니다.
그 당시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1학년: 서일임 선생님
2학년: 손천득 선생님
3학년: 오근상 선생님
4학년: 권영태 선생님
5학년: 박재철 선생님
6학년: 박재철 선생님
혹 잘못이 있다면 6년간 같이 뒹굴었던 다른 친구들의 기억으로 정정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김흥수님 고마와요. 24회는 몽땅 다 빠져서 마음이 아팠는데 매꾸게 되어서 반가와요. 그러나 너무 늦어서 삽입이 가능할 지 최선의 노력을 해보곘습니다. 아무튼 고마와요................
금락두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산서초교 4회이셨습니다. 자료 수집에 정말로 찬사를 보냅니다. 저는 모포초교 3년간(1973-75) 담임한 이영백입니다. 참고 자료를 스크랩해 갑니다. 건강하십시오. 푸른 숲.
이영백선생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모포초교에 근무하실때 아마 만났겠지요?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ㅗ간심 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장기오실 기회가 있으면 찾아주세요.........016-382-9103으로 전화주세요.
산서초등의 역사자료를
한꺼번에 다 볼수있게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기초등100년사에 기록될
기초자료로 알고 있습니다만
선생님의 노고가 매우크십니다
수고했습니다
고맙다는 인사가 늦어서 죄송해요. 선후배님들의 격려속에 마무리가 잘 되어서 다행이라 생각되요. 더위에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