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엔당 900원 붕괴 수출업계 영향은…
대일 수출기업·일본 경합업종 경쟁력 약화 우려
엔화예금 몰리고 일본여행 수요 급증… 당분간 엔화 약세 지속될 듯
원/엔 재정환율이 최근 800원대로 내려가는 등 8년 만에 가장 심한 엔저 현상이 나타남에 따라 대일 수출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 자동차 등 세계시장에서 일본과 경합 관계에 있는 분야의 수출 기업들은 일본 제품에 대한 경쟁력 약화를 우려하고 있다.
▲원-엔화 환율이 900원대를 기록하고 있는 6월 20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에서 딜러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서울=뉴시스] |
●엔화 약세에 우는 수출기업들 = 지난 6월 19일 오전 8시 23분 원/엔 재정환율은 100엔당 897.49원을 기록해 800원대에 진입했다. 이후 100엔당 900원 대 초반으로 복귀했지만 엔화 약세는 현재진행형이다. 원/엔 환율이 900원대 밑으로 내려간 것은 지난 2015년 6월 이후 약 8년 만이다.
엔화는 달러화에 대해서도 ‘바닥’ 수준을 보이고 있다. 142엔 아래에 있던 엔/달러 환율은 6월 21일 오후 142.36엔을 찍었다. 이는 지난해 11월 11일 미국의 인플레이션(물가상승) 둔화 조짐에 엔/달러 환율이 146엔대에서 140엔 수준으로 내려온 뒤 최고치다. 이는 올 들어 엔/달러 환율이 약 8% 오른(엔화 약세) 수치다.
엔저 현상으로 가장 타격을 입는 수출기업들은 일본에 직접 수출하고 엔화로 대금을 받는 기업들이다. 엔화로 대금을 받아 원화로 원자재와 인건비 등 경상비를 제하고 나면 적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중국에 공장을 두고 문구류를 일본 유통업체에 납품하는 N사 관계자는 “현재의 환율로는 사업을 지속할 수 없지만, 20년가량 지속해온 거래를 당장 끊을 수 없어 속이 탄다”고 말했다. 대일 의존도가 높은 금형업계 관계자도 “손익분기점 이하로 전환된 지 오래됐다”며 “달러화로 결제통화를 변경하기도 힘든 상황”이라고 전했다.
일본기업과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는 수출기업들도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엔저 심화는 세계시장에서 우리 기업의 수출 경쟁력을 상대적으로 떨어뜨려 자동차, 철강, 석유화학 등 분야 기업에 특히 큰 타격을 준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작년 말 보고서에서 한일 간 제조업 수출 경합도가 69.2로 한미(68.5)·한독(60.3)·한중(56.0) 등 다른 주요국과 비교해 가장 높다고 지적했다. 이어 작년 1∼3분기 달러 대비 엔화가 원화보다 5.86%포인트 더 많이 평가절하 되는 엔저 현상이 나타나 해당 기간 한국의 수출이 168억 달러 감소했다고 추산했다.
다만, 미국발 금리 인상 시작 후 엔화 약세가 상대적으로 더 심할 뿐이지 장기적으로는 원화, 위안화 등 주요 아시아 수출국 통화도 ‘강 달러’ 속 동반 약세를 나타내 이번 엔저에 따른 영향이 제한적일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산업 경합도 측면에서도 최근 강한 전기차 수출 호조 현상이 보여주듯 한국의 주요 수출품이 해외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차별화된 품질과 기술 경쟁력을 앞세우고 있다는 것도 과거와는 뚜렷하게 달라진 점으로 꼽힌다.
산업통상자원부 통계에 따르면 꾸준한 엔저 흐름 속에서도 한국의 자동차 수출은 지난 3월 처음 60억 달러를 넘어선 이후 5월까지 3개월 연속 ‘60억 달러 고지’를 돌파했는데 고가의 전기차가 수출 증가세를 주도하고 있다. 전기차 등 친환경차 수출액은 5월 21억 달러를 기록하는 등 4개월 연속 20억 달러를 돌파했다.
반면 가격경쟁력이 높아진 일본 제품의 한국 진출은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관세청 무역통계에 따르면 지난 4월 일본 맥주 수입액은 307만4000달러로 지난해 동월 대비 무려 866.7%나 급증했다.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 조치 이후 국내에서는 일본 맥주 불매운동이 벌어져 월간 수백만 달러 수준이던 일본 맥주 수입액은 2019년 9월 6000달러 수준까지 줄었으나 지난해 3월 150만3000달러로 100만 달러 선을 넘은 데 이어 올해 1월 200만4000달러로 200만 달러를 넘어선 데 이어 4월에는 300만 달러 선까지 넘은 상황이다.
●“쌀 때 사 두자” 엔화 예금 급증 = 최근 들어 원화가 강세를 보이면서 은행 외화예금과 환전으로 자금이 몰리고 있다. 외화 중에서는 큰 폭으로 떨어진 일본 엔화로 차익을 시현하기 위한 환테크(환율+재테크) 수요가 급증하는 모습이다.
4대 시중은행의 지난 5월 엔화 매도액은 301억6700만 엔으로 전월보다 32%(73억2800만 엔) 증가했다. 엔화 예금 잔액도 이달 들어 15일까지 1131억 엔 늘었다. 업계 전문가들은 일본은행의 완화적 통화정책 지속으로 약세 흐름이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일본은행은 좀 더 견고한 인플레이션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완화적 통화정책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지난해와 달리 경제 역시 회복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엔화 약세를 저지하기 위해 공격적인 외환시장 개입도 자제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 연구원은 “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 중인 주가 랠리 등 일부 과열 현상을 억제하기 위해서라도 연말경에는 초완화적 통화정책의 출구 전략을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며 “이는 엔화 흐름의 기조적 전환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본으로의 여행 수요도 크게 늘었다. 100엔당 1000원대일 때에 비하면 최근의 엔화 약세는 여행비용을 10%가량 낮추는 효과가 생긴다.
6월 22일 일본정부관광국(JNTO)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5월 중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189만8900명 중 한국인이 51만5700명으로 가장 많았다. 여행업계는 7~8월 휴가 시즌에 더 많은 일본 여행 수요가 생길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원화에 대한 일본 엔화 가치가 약 8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까지 떨어지면서 일본여행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6월 21일 김포국제공항 출국장에서 일본 하네다로 떠나는 여행객들이 탑승수속을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
●원/엔 환율 어디까지 내려가나 = <뉴시스>는 엔/원 환율이 연일 하락세를 보이는 것은 일본 중앙은행(BOJ)의 통화 완화 기조 유지와 경기 반등 기대감 등으로 나타난 원화 강세가 엇갈린 게 원인으로 해석했다. BOJ는 6월 14일부터 이틀간 열린 통화정책 회의 이후 단기금리는 -0.1%로 동결하고 장기금리 지표인 10년물 국채금리 허용 변동 폭은 ±0.5%로 유지해 통화정책 완화 기조를 유지하기로 했다.
양양현 한국은행 국제총괄팀장은 “원·엔 환율 하락 배경에는 원화 강세와 엔화 약세가 맞물린 것이 원인으로 작용했다”며 “원화의 경우 반도체 수급 개선과 외국인 자금 유입 등으로 강세를 보인 반면 엔화는 지난 3월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 이후 강화됐었던 안전자산 선호심리가 되돌려지는 양상과 엔화 자체의 펀더먼털이 약화된 면도 있다”고 밝혔다.
김승혁 NH선물 연구원도 “현재 원·엔 환율이 낮아진 데에는 최근 BOJ가 금리를 동결하면서 물가 하방압력이 존재한다고 발언해 통화정책 선회 가능성 역시 크지 않다고 해석된 것이 원인으로 작용했다”며 “반면 원화는 무역수지나 경상수지 등 경기 반등에 대한 기대가 유입됐으며 특히 반도체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가 반영돼 이 두 요소가 엇갈렸다”고 말했다.
엔화의 단기적 전망과 관련해선 “단기간 내엔 엔화가 현 수준에서 유의미하게 약세를 보일 것은 어려워 보인다”며 “원화는 추가적인 강세를 보일 여지가 있지만, 이마저도 아직 노이즈가 있는 국면이기 때문에 미국의 기준금리 행방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김유미 키움증권 연구원은 <뉴시스>에 “엔화 약세 기조는 현재 하락세를 키우거나 유지하기 보다는 3분기까지 현수준에서 등락을 반복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백석현 신한은행 연구원은 “최근 미 국채 거래에서 달러를 사고 엔화를 파는 등의 거래가 주를 이뤄 미 국채 금리 하락과 엔화의 자체적인 약세가 동시에 나타났다”며 “하단의 경우 900원이 저점으로 예상되지만 890원까지 하락할 추가적인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며 “중기적으로는 현재 레벨을 유지하는 기간은 한 달을 넘기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출처 : 주간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