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장사 대웅전 건물입니다.
칠장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으로 중앙에 목조 석가 삼존불(1685년 제작, 불상의 크기는 150cm,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 213호)을 모시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 세워져 쳐러 차례 수리했고 내부 천정은 우물 천정으로 불화와 연꽃 무늬로 채색되어 있습니다.
대웅전 내부의 우물천정 입니다.
석가삼존불 후경으로 있는 그림은 영산회상도, 석가여래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명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1886년에 제작. 불화의 크기는 259* 268cm(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239호)입니다.
이 칠장사에는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인조반정 이후, 아들 영창대군과 친정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의 명복을 빌기 위해 하사한 <오불회괘불탱(五佛會掛佛撑)>이 있다 하나 그 원본 탱화는 현재는 외부에서 치루어지고 있는 특별전시회에 차출되어 있다고 합니다.
마침, 이 오불회괘불탱의 모조그림이 사칠내의 허름한 건물 벽에 걸려 있기에 카메라에 감아 보았습니다.
명부전 외벽에는 혜소대사와 7명의 도둑이야기, 궁예의 이야기가 벽화로 그려져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화해설사 선생과 명부전 외벽에 그려진 그림들.
아래에서 왼쪽 그림은 나한전의 모습을, 오른 쪽은 7인의 도둑을 제도하는 혜소대사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후삼국 시대 태봉국을 세웠던 궁예, 신라 왕궁에서 간신히 도망쳐나온 궁예가 다섯 살 무렵부터 열 살까지 이곳 칠장사에 숨어 살았다고 합니다.(삼국유사에서는 강원도 영월의 어느 절에 숨어 살았다고도 함.) 어린 궁예는 이곳 공터에서 활쏘기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유년시절의 궁예가 활쏘기 연습을 하던 곳이라 합니다.
대웅전 맞은 편 건물은 응향각으로 오른쪽으로부터 1~4번째 기둥에 소동파의 <오도송>을 써붙였습니다. 이 <오도송>은 칠언절구로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계성변시장광설(溪聲便是長廣說)
계곡서 흘러가는 냇물 소리가 부처님의 장광설이요
산색개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
산색 그대로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로구나
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
밤새 쏟아내는 팔만사천 부처님의 감로 법문을
응향각 뒷편으로 극락전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임꺽정과 갖바치(병해대사) 전설을 갖고 있는 목조여래상이 있다하여 찾아 보았습니다. 갖바치는 예전에 가죽신을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던 사람을 말합니다.
극락전에 모셔진 부처님들, 한 가운데 모셔진 부처님, 꺽정불로 불리고 있습니다. 스승인 병해대사가 돌아가시자 임꺽정이 병해 대사를 위해서 손수 나무를 깎아 부처님을 조성하여 이곳에 안치했다고 합니다. 절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스승을 생각하는 꺽정의 마음이 우리 가슴을 따뜻하게 합니다.
* 칠장사 홈페이지에서는, ' 충북대 연구팀이 꺽정불 밑 부분에 ‘봉안 임꺽정(奉安 林巨正)’이라고 쓰여 진 삼베 조각 등을 연대측정 한 결과 “1540년을 중간연대로 ±100년의 방사선 연대측정”이라는 결론을 내려 실제 임꺽정(?~1562)이 불상을 봉안했을 것으로 확실시 된다'고 주장합니다.
http://www.chiljangsa.org/bbs/content.php?co_id=3030
극락전에서 나와 다시 대웅전 방향으로 잡아들었습니다. 대웅전과 응향각 사이에 있는 삼층석탑입니다.
'삼층석탑(경기문화재 179호)은 본래 죽산대사 천변의 구사지에서 인근 농원(강성원목장)에 옮겨져 30여년간 불모지에 머물다가' 2005년 11월 28일 칠장사로 이전된 것이라 합니다. 탑의 전체적인 구조와 비율로 보아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답니다.
극락전을 바라보며 오른 쪽에 1980년 경, 안성 봉업사지에서 옮겨온 석불입상이 있습니다. 고려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칠장사 원통전
원통전 앞의 소나무와 돌탑,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칠장사의 국사전입니다. 혜소대사와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 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합니다.
해설을 듣고 있는 원석회원들
칠불사의 약수, 1천여년 전에도 이 약수가 있었다면 혜소스님이나 궁예왕, 임꺽정 들이 마시지 않았을까......약수물은 달고 시원하였습니다.
칠불사와 암행어사 박문수의 전설
혜소국사비각
혜소국사(972~1054)의 속명은 이정현(李鼎賢),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 10세 때 광교사(光敎寺) 충회(忠會)에게서 구법.
- 중략-
1046년 문종이 즉위하자 내전에서 <금고경(金鼔經)>을 강했으며, 1049년 문종의 왕사(王師) 1054년 다시 국사(國師)로 봉해지고 칠장사로 들어왔다. 산에 돌아와서부터는 승상(繩床)에 앉아 옷 1벌만을 해 입고, 모든 인연을 끊고 있다가 오래지 않아 입적했다. 문종 8년(1054) 세수 83세였다. 시호는 혜소(慧昭)이다.
http://www.chiljangsa.org/bbs/content.php?co_id=2010
혜소국사비 비석- 혜소국사의 일대기 및 업적을 기록함
비석내용 글은 김현, 글씨는 전중순, 민상제가 씀/ 비석의 석재는 중국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비석의 받침과 비석, 그 위에 이수(덮개)까지 올리면 전체 높이는 4. 95m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수(비석 덮개)
비석받침
나한 전으로 향합니다.
혜소국사 당시 건물이 없어서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서 제자들을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훗날 나옹화상(1320~1376)이 칠장사를 찾아와서 나한전의 뒤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으니 이것이 나옹송입니다.
나옹화상의 소나무
나한전의 내부입니다.
후경으로 부처님이 계신 아래 7 부처는 바로 칠현산에 살던 7인의 도적들, 이들이 혜소국사의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얻어 현자가 되었기로 본래 아미산이었던 산 이름이 칠현산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 아래로 넙적 바위위에 꽃항아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 옛날 소나무 아래 바위 위에 혜소국사가 앉으셔서 제자들에게 법문을 들려주던 곳이라고 합니다.
마침내 칠장사를 한 바퀴 돌아보고 떠나려는 때에 절에서 기르는 것인지 검둥이 한 마리가 나타나 총무님과 인사를 나눕니다.
전용버스에 올라 일주문을 나서다가 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았습니다.
철당간(鐵幢竿), 조선시대 중기에 만들어진 것. 현재 유형문화재 제39호,
총 높이 11.5㎝, 직경 0.4㎝. 지주 높이 3m. .
당간은 사찰에서 커다란 불공을 드릴 때 일종의 깃발을 달기 위한 달기 위한 깃대를 말합니다.
사진: 칠장사 홈페이지에서 빌려옴
한편 우리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이 칠장사에는 인목대비가 하사한 친필 족자가 있다고 합니다. 칠장사 홈피에서 찾아본 족자의 사진입니다. <계축일기>의 주인공이었던 인목대비의 글씨를 감상하기 바랍니다.
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늙은 소 힘쓴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목덜미 쭈그러들고 가죽은 헤져서 졸립기만 하고,
쟁기질 다 끝나고 봄비 또한 넉넉한데,
주인은 어찌하여 또 채찍을 든단 말인가?"
현재 이 친필족자는 경기도 향토 사료실(鄕土史料室)에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신라시대부터 그 이력을 두고 있는 칠장사, 궁예왕 전설, 혜소국사와 7인의 도둑( 현인), 나옹화상, 임꺽정과 병해대사 등 전설이 서려 있는 오래된 사찰, 단청이 벗겨진 사찰 건물에서 오히려 정다움과 그리움을 느끼게 해주는 아주 좋은 곳이었습니다.
우리들은 다음 장소인 조병화문학관을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첫댓글 강버들 개인 사정으로 탐방자료 한꺼번에 올리지 못하고 나누어 분재합니다. 탐방자료의 연속성을 위해, ~02, ~03을 여백인 채로 미리 자리 잡아두었습니다.
이제 회원님들께서 현장에서 담아오신 자료들, 이곳에 올리셔서 활발한 소통과 즐거움의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적극 참여 해주시기 바랍니다.
교수님
정말 멋지시네요
한분도 빠짐없이 챙기시는 교수님
존경합니다.
저는 미쳐 가보지 못한 곳도 구석구석 카메라에 담아오셔서
해설을 붙이고 정리 해서 올려 놓으신 유교수님~
덕분에 여유있게 곳곳을 탐방하는 호강을 누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