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군산출신 최영 시인의 "군산 풍물기"를 올리겠습니다. 그 시절 추억을 되살릴수 있는 좋은 수필이라 혼자읽기 아까워 추천 합니다! 초딩동창회밴드서퍼옴
최영의 군산풍물기(群山風物記) 1
보신탕집 풍경
내가 고등학교 1학년 가을 늑막을 앓은 일이 있었습니다. 순창 읍내에서 20리 길을 걸어 학교를 다녀오는 데 텃밭에서 고추를 따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작은 부엌에 가면 솥에 개고기 한 다리가 있으니 먹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시장했던 나는 집에 가자마자 개고기를 꺼내들고 나와 나의 방 책상에 올려놓고 젓가락 댈 것 도 없이 손으로 찢어 깨소금 장에 찍어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습니다. 밭에서 돌아온 어머니께서 나의 육량에 놀라시며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얼마나 고기를 못 먹였으면 하는 안타까움이었습니다. 저세상에 계신 그 어머님의 눈물을 잊을 수 없습니다.
1973년 7월1일은 개정, 수송, 나운, 소룡동이 옥구군에서 군산시로 편입된 날이었고 내가 시청에 발령 받은 날이기도 합니다. 그 몇 일전 전주 형님과 군산시청에 들려 임용서류를 접수하고 나오는 데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지나가는 행인에게 보신탕집을 물었더니 연산옥을 일러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연산옥이 보신탕 골목에 있다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당시 시청에서 경찰서, 백화선전탑, 조화당, 주택은행을 거쳐 개복교회 맞은 골목, 지금의 흥국생명 옆에 있는 보신탕 골목을 물어물어 찾아 갔습니다. 가로변엔 여름 푸라타너스 잎이 무성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내가 형하고 걸어갔던 그 길은 군산시의 중심로였습니다.
그 시절의 시청, 경찰서, 주택은행, 푸라타나스나무 등이 모두 이사를 갔고 조화당은 문을 닫았습니다. 아름다운 야광칼라 백화선전탑은 70년대 말 오일쇼크로 사라지고 개복교회는 90년대 초인가 갈라져 나갔습니다. 오늘 이 거리는 세월의 무상을 떠오르게 합니다.
보신탕 골목 깊숙한 우측에 연산옥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뒤에 알았지만 앞 좌측으로 대전옥이 있었어요. 연산옥 간판아래 삼배 커튼이 쳐져 있었던 생각이 납니다. 메케한 개장국 냄새 가득한 홀과 방안엔 이미 손님이 가득했습니다.
홀 식탁에 앉은 형과 나는 보신탕 두 그릇과 벡화소주 두병을 시켰습니다. 대형 솥에서 장작불로 끓여 밥 말은 개장국에다 양념, 고사리, 깻잎, 숭숭 썰어진 풋고추를 얹어 나온 뚝배기 탕은 시장한 위장에 지지 소리가 날정도 이었습니다. 비 오듯 흐르는 땀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긴 컵에다 백화소주 가득 따라 걸치는 맛이란 형언하기 어려웠습니다.
기분좋게 점심을 먹은 후 골목을 빠져 중앙초등학교를 지나 역전 쪽으로 가면 지금의 농협 마트 쪽이 시내.외버스 합동 터미널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전주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차가 출발하기 전 앞 버스를 보니 창에 마산이라 써 붙여있었습니다. 그걸 보며 “군산에서 경상도 마산가는 직통 버스도 있는 갑다”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뒤에 그것은 역전에서 옥구 마산가는 시내버스여서 고소를 지었던 생각이 납니다.
말 한데로 육완기 시장으로부터 소룡동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취임하기 위해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새로 편입한 소룡동 동사무소를 몰라 해망동 청구목재 하치장에 내려놓고 가버렸습니다. 지나가는 청구목재 다니는 아가씨가 손가락으로 가르치며 친절히 알려줘 찾아간 곳이 수용소 마을회관에 임시 설치한 동사무소였습니다.
동에서 1년 반쯤 있다가 시청 총무과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러면서 군산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모든 게 시청이 구심점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음식문화도 마찬가지고 보신탕집들도 시청의 원심력에 의해 위성처럼 직립하고 병립하여 빙빙 돌고 돌면서 경쟁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청을 중심으로 연산옥, 대전옥, 계순옥, 보신옥, 흥미옥, 영신옥, 등이 위성처럼 돌고 있었습니다. 뒤에 자가용이 늘어나면서 구암동, 하구둑 넘어 서천, 판교 까지 확장되어집니다. 보신탕집의 추억으로부터 흘러간 군산풍물을 함께 풀어가고자 합니다.*
첫댓글 보신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