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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자 - 정든 님 ; 대비 천추태후와 (외가 쪽 먼 친척) 김치양과 私通
대비 천추태후는 목종을 도와 국정을 펼치는 대신 외가 쪽 먼 친척인 김치양과 사통私通을 하였다. 그리고 아들을 낳게 되자...
[이별이 주고간슬픔] 이미자 - 정든 님 kpop 韓國歌謠
https://www.youtube.com/watch?v=LXjICkTtpHU
조회수 50,971회 2016. 1. 15.
[이별이 주고간슬픔] 이미자 - 정든 님 kpop 韓國歌謠
정든님이 붙잡으니 난들어이 하리오
구중궁궐 깊은곳 한많은 세월속에
어쩌자고 정든님이 역적이던가요
아 ~ ~ ~ 그러나 지금은 헤여질길없어라
님이 가자면 울며 따라가리 님의뒤를 따르리라
정든님이 역적인줄 난들어이 알았으리
괴로워도 슬퍼도 잊어야 합니까
정이란 무엇인지 불타는 가슴
아 ~ ~ ~ 그러나 지금은 헤여질길없어라
님이 가자면 울며 따라가리 님을 따르리라
고려의 요부, 고려 최초로 섭정을 한 천추태후는
왕건의 손녀이자 고려 5대왕인 경종의 부인, 6대왕 성종의 동생, 7대왕 목종의 어머니, 8대 현종의 이모이다.
천추태후는 대비가 되어 목종을 도와 국정을 펼치는 대신 외가 쪽 먼 친척인 김치양과 사통私通을 하였다.
그리고 아들을 낳게 되자
목종穆宗, 고려 7대왕
천추태후와 김치양
997년 10월, 38세의 성종이 재위 16년 만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죽기 전 경종의 장자인 개령군 송(誦)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이때 개령군 송의 나이 18세, 이가 제7대 왕 목종(穆宗)이다.
성종이 목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은 아들이 없고 딸만 두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아들이 없었던 성종은 송을 궁궐에서 양육하여 개령군에 봉하는 등 아들처럼 길렀다. 선왕인 경종이 비록 2살이지만 왕자 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선위해 준 은혜를 저버리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목종을 낳은 헌애왕후(獻哀王后)는 성종의 친동생이었다. 성종이 외조카 목종에게 선위를 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고려 사회에서 여형제는 남형제 못지않았고 왕녀일 경우에는 더욱 밀접했다. 고려 왕실에서 왕손보다 부마가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곤 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순탄한 절차를 밟고 왕위에 오른 목종이었지만, ‘술과 사냥을 좋아할 뿐, 정치를 돌보지 않은 무능한 왕’으로 후대 사가들의 혹평을 받았다. 그가 정사를 돌보지 않은 것은 친모인 헌애왕후(경종비, 천추태후)가 목종이 어리다는 것을 빌미로 섭정했기 때문이었다. 《고려사》는 목종이 “폐행을 너무 가까이 하여 화를 입게 되었다.”라고 지적했으나, 사실은 모후인 헌애왕후가 더 큰 화근덩어리였다.
헌애왕후(경종비, 천추태후)
목종을 무기력한 왕으로 만든 헌애왕후는 태조의 일곱 번째 왕자 욱(대종으로 추존됨)의 딸로 남편인 경종과는 친 사촌지간이었다. 태조 때에 시작된 근친혼은 어언 반세기가 훨씬 지난 이후에도 공공연히 되풀이되고 있었던 것이다.
경종이 일찍 죽어 과부가 된 헌애왕후는 천추궁에 살면서 김치양이란 자와 정을 통하고 있었다. 김치양은 동주인(洞州人)으로 천추태후 황보씨의 외척이었다. 성격이 간교하고 정욕이 강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찍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천추궁을 무시로 드나들며 온갖 추악한 소문을 퍼뜨렸다. 이 사실을 안 성종은 분노하여 김치양을 멀리 귀양 보내버렸다.
성종이 죽고 아들인 목종이 즉위하자 하루아침에 정권을 쥐게 된 헌애왕후는 스스로 ‘천추태후’라 칭하고 귀양 간 정부 김치양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를 합문통사사인이란 벼슬자리에 앉히고는 함께 정사를 마음대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태후의 뜨거운 후광으로 김치양은 등용된 지 몇 년도 되지 않아 우복야 겸 삼사사(右僕射兼三司事)가 되어 백관의 임명·파면권이 그에게 주어졌다. 그는 이때부터 공공연히 재물을 거둬들였다. 그는 거둬들인 재물로 300여 칸짜리 집을 짓고 정자·정원·연못·누대 등을 화려하게 꾸며 놓고 밤낮으로 태후와 함께 주지육림에 싸여 있었다. 그런가 하면 농민에게 부역을 시켜 동서북 모퉁이에 시왕사(十王寺)를 새로 지었다. 그 절에 그린 화상은 기괴망측하여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태후의 간통과 암살 계획
목종은 어머니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관계를 알고 있었으나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봐 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천추태후의 몸에 태기가 있었다. 태후는 바라는 바가 아니어서 몹시 난처해졌다. 태후가 걱정이 되어 말했다.
“스님, 이를 어쩌지요? 아기를 어찌해야 하오?”
김치양의 태도는 의외로 태연했다. 그는 애초부터 계획하고 있었다.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왕위를 잇게 하여 권력을 잡아보고 싶었다.
“염려 마시오. 장차 이 나라의 왕위를 계승할 왕자님이 태어날 것이오.”
태후는 깜짝 놀라 김치양을 쏘아보았다.
“그 무슨 해괴한 말씀이오. 왕위라니 당치도 않소.”
“금상은 몸이 너무 허약하여 아무 일도 못할 인물이외다.”
“닥치시오! 그렇다고 김씨 성을 왕으로 추대하겠다는 말이요!”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도 일으켜야죠.”
김치양은 느글느글했다. 태후는 김치양의 야심을 알고 더욱 마음이 착잡해졌다.
태후는 열 달을 채워 옥동자를 낳았다. 김치양은 이 소식에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김치양은 천추전에 찾아가 태후의 노고를 치하하고 갓난아이의 왕위계승 문제를 의논했다. 우선 목종과 가까운 인물부터 제거해야 했다. 태조 왕건의 후손으로서 헌정왕후 소생인 대량원군(大良院君)이 목종과 가장 가까웠다.
대량원군은 헌정왕후가 숙부인 안종 욱과 간통하여 태어난 이른바 불륜의 씨앗이었다. 헌애왕후(이후 천추태후)의 친동생이기도 한 헌정왕후는 경종이 죽은 후 외롭게 친정에 살고 있다가 그만 안종 욱과 눈이 맞아 대량원군을 임신하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성종은 50이 넘은 늙은 숙부 안종을 귀양 보냈다. 이후 헌정왕후마저 산고로 죽는 바람에 대량원군은 성종에 의해 궁궐에서 양육되었다.
천추태후는 자신의 이종조카이기도 한 대량원군만 없애면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을 후계자로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다. 태후는 끝내 대량원군을 중으로 만들어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보냈다. 그리하여 당시 사람들은 대량원군을 신혈소군으로 불렀다. 태후는 대량원군을 중으로 만들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여러 번 자객을 신혈사로 보내 죽이려 했다.
하루는 궁녀가 술과 떡을 잔뜩 사들고 신혈사를 찾아왔다. 궁녀는 노승에게 간곡히 청했다.
“스님, 천추태후께서 대량원군께 내리는 음식이옵니다. 대량원군을 만나게 해주소서.”
노승은 궁녀를 죽 훑어보고 나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노승은 대량원군을 땅굴 속에 숨기고 대답했다.
“대량원군께서는 며칠 동안 산속 수행을 나가셨습니다. 지금 어디 계신지 알 수 없소.”
“그럼 대량원군이 오시거든 이 음식을 전해 주십시오.”
궁녀가 돌아가자 노승은 음식을 뒤뜰에 버렸다. 갑자기 날아든 까마귀와 참새가 음식을 먹고 그 자리에서 죽어 나자빠졌다. 천추태후의 독살 음모는 끊임없이 이어졌으나 그때마다 노승의 기지로 대량원군은 무사했다.
강조의 쿠데타와 목종의 폐립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대량원군만이 아니었다. 위험에 처해있기는 목종도 마찬가지였다. 목종 12년(1009) 1월 16일, 목종은 상정전(祥政殿)에서 연등회 행사를 즐기고 있었다. 김치양은 자신의 도당들에게 은밀히 지시했다.
“상정전에 불을 지르고, 그 불을 끄는 척 임금에게 접근하여 시해하라.”
잠시 후 상정전에 불길이 치솟아 밤하늘을 밝혔다. 상정전 일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정체불명의 사내들이 복면을 하고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목종은 호위를 받으며 안전한 곳으로 옮겨 갔다.
불길은 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천추전까지 태워버렸다. 심약한 목종은 이 일로 그만 자리에 드러눕고 말았다. 목종이 완쾌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태후와 김치양은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사생아를 왕위에 앉힐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병석에 누워 간신 유행간과 유충정만을 의지하고 있는 왕과 왕위계승 암투에 혈안이 된 태후, 고려 조정은 엉망진창 그 자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목종은 채충순(蔡忠順)을 은밀히 불러들였다. 목종은 시종들을 물리친 후 채충순에게 말했다.
“과인이 들으니 왕위를 노리는 자가 있다 하오. 경은 이 사실을 알고 있소?”
“신도 소문으로 들은 바 있사옵니다.”
채충순은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천추태후가 두려워 바른 대로 고하지 못했다.
목종은 베개 밑에서 봉서를 꺼내어 채충순에게 내밀었다. 그 봉서는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던 유충정(劉忠正)이 올린 상소였다. 채충순은 봉서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간사한 김치양이 심복들을 널리 구하여 신에게도 조정에서 내응해 달라고 했사옵니다. 신이 그를 타일러 보냈사오나 이 사실을 전하께 알리지 않을 수 없사와 비밀리에 봉서를 올리오니 속히 결단을 내리시옵소서.
채충순이 떨리는 마음으로 봉서의 내용을 다 읽고 나자 목종은 또 한 통의 봉서를 내놓았다. 그 봉서는 신혈사에서 올린 대량원군의 상소였다. 그 내용은 천추태후의 음모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태후와 김치양이 대량원군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목종은 중추원사 최항과 급사중 채충순을 불러들였다.
“나의 병이 점점 깊어져서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가 없구나. 지금 태조의 후손으로는 대량원군 순 한 사람밖에 없으니, 경들은 진심으로 사직을 위하여 이성(異姓)이 왕위에 앉지 못하게 하라.”
비록 나약한 목종이었지만, 김치양의 아들에게는 결코 왕위를 내줄 수가 없었다. 목종은 자신의 후계자로 대량원군을 지목하고 채충순과 최항에게 신혈사에 있는 대량원군을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아울러 김치양 일파인 전중감 이주정을 서북면 순검부사로 이직시키고 대량원군을 보호하기 위하여 서북면 도순검사로 있던 강조(康兆)를 급히 개경으로 불러들였다.
왕명을 받은 강조는 그날로 서경을 출발하였다. 그런데 강조가 동주(서흥) 용천역에 도착했을 때 마침 내사주서 위종정(內史主書 魏從正)과 안북도호장서기 최창회(安北都護掌書記 崔昌會)가 찾아왔다. 이들은 범죄를 저질러 파직된 후 조정을 원망하고 반란을 도모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강조는 가뜩이나 서울의 소식이 궁금하여 그들을 기꺼이 맞아들였다. 강조가 조정의 소식을 물었다.
“공께서는 개경으로 가지 마십시오. 공을 소환한 것은 왕이 아니라 태후와 김치양입니다. 이들이 왕의 병세가 악화된 것을 빌미로 사직을 뺏으려고 거짓으로 공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다시 서북면으로 돌아가 군사를 일으키고 몸을 보전해야 할 것입니다.”
“왕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조정은 치양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는 말이 사실이구나.”
이들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강조는 말머리를 다시 서북면으로 돌렸다. 강조가 이들의 말에 쉽게 속아 넘어간 것은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 목종이 이미 김치양 일파에게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무성했기 때문이었다.
강조가 개경으로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태후는 자신들의 계획에 차질이 올까 염려하여 절령(자비령)에 군사를 보내어 길을 막고 강조의 개경행을 저지하려 했다.
정국이 혼란스럽게 돌아가던 와중에 아들이 걱정된 강조의 부친은 “왕이 이미 세상을 떠나고 간신 무리가 조정을 어지럽히니 군사를 이끌고 와서 국난을 수습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강조에게 보냈다.
당시 이 서신을 강조에게 전달할 임무를 띤 하인은 머리를 깎고 중으로 위장하여 태후의 군사가 지키고 있는 절령을 무사히 통과하였다. 이때 그는 얼마나 길을 서둘렀는지 기갈이 심하여 강조에게 편지를 전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하지만 이 편지는 강조에게 전달되지 말았어야 했다. 이때는 아직 목종이 세상을 떠나기 전이었는데 강조의 아버지는 그저 항간에 떠도는 말만 듣고 그런 글을 보낸 것이었다.
위종정과 최창회에 이어 부친한테서조차 목종이 살해되었다는 말을 전달받자 강조는 병졸 5천 명을 이끌고 다시 개경으로 향했다. 그러나 평주(평산)에 도착해서야 목종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일이 잘못되었다고 깨달은 강조가 잠시 머뭇거리자 부하들은 계속해서 개경으로 진군할 것을 건의했다.
“일이 이미 벌어졌는데, 지금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그 말이 옳다.”
이미 군사를 이끌고 온 터라 반역자로 몰릴 것은 불을 보듯 훤한 일이었다. 결국 강조는 부하들의 요청에 따라 목종을 폐립할 것을 결심하는데 강조의 실수는 또다시 이어진다. 목종이 이미 대량원군에게 사람을 보냈다는 사실을 모르고 신혈사에 군사를 보내어 대량원군을 데려오게 한 것이다. 그리고 개경의 목종에게는 귀법사로 잠시 몸을 피하고 있다가 김치양 일파를 제거한 다음에 다시 모셔오겠다는 서찰을 보냈다.
부하 김응인이 신혈사에 있던 대량원군을 데려오자 강조는 곧바로 개경의 왕성으로 말을 몰았다. 강조의 군대가 들이닥치자 놀란 목종은 강조가 간신으로 지목한 유행간을 강조에게 보내어 위기를 모면하려 했으나 허사였다. 어쩔 수 없음을 깨달은 목종은 눈물을 머금고 태후와 함께 궁인, 채충순, 유충정을 데리고 법왕사로 피신했다.
궁궐에 난입한 강조는 호상(胡床)에 앉아 마치 왕처럼 위세를 부렸다. 보다 못한 최항이 한마디를 했다.
“일찍이 이런 일이 없었소.”
강조가 왕좌에 앉아 있자 이를 본 부하병사들이 별안간 만세를 불렀다.
“새 임금이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왜들 만세를 부르느냐?”
막상 부하들이 자신을 왕으로 앉히려 하자 강조는 고개를 내저었다. 바로 이때 황보유의 등이 18세밖에 안 된 대량원군을 모시고 들어왔다. 강조는 그를 왕으로 세웠다. 이렇듯 고려 8대 왕인 현종의 즉위는 일종의 반정(反正)에 가까운 것이었다.
1009년 2월 3일, 강조는 목종을 폐위한 후 법왕사에 유폐시켰다. 이어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 등 7명을 잡아 죽이고 그 일파와 태후의 친속 이주정 등 30여 명을 섬으로 귀양보냈다.
목종의 비명횡사
강조의 쿠데타로 법왕사로 피신해 가 있던 목종은 최항을 시켜 강조에게 말을 빌려 줄 것을 간청했다. 강조로부터 겨우 말 2필을 얻은 목종은 태후와 1필씩 나눠 타고 귀법사로 갔다. 이때 목종은 옷을 벗어서 음식을 구할 만큼 비참한 처지에 있었다. 그뿐 아니라 강조에게 보냈던 심복 최항마저 자신의 곁을 떠났다는 충격적인 말까지 듣게 되었다. 외롭고 비참하기 그지없는 신세가 된 목종은 최항에게 “새 임금을 잘 보좌하라.”는 말만을 남기고 외가가 있는 충주로 말을 몰았다.
사실 목종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이미 살해된 김치양이나 유행간에게 놀아난 탓도 있지만 그들보다 태후에게 더 잘못이 많았다. 그러나 목종은 그런 모후를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충주로 가는 길에 태후가 혹 배가 고프지 않을까 걱정하여 자신이 먹던 것까지 올리고 태후가 말을 타면 친히 부축하여 드릴 정도였다.
강조는 목종이 떠난 뒤에도 여전히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적성현 부근에 도착했을 무렵, 사약을 받든 김광보가 목종 모자를 찾아왔다. 목종은 강조가 내린 사약을 끝내 거부했다. 결국 살해명령을 받은 김광보는 같이 간 장수 안패를 시켜 목종을 시해했다. 그리고 문짝으로 관을 삼아 시체를 보관한 후 목종의 사망사실을 강조에게 보고했다. 목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강조는 적성현 창고의 쌀을 내어 제사를 지내주었다.
재위 12년, 나이 30세에 왕위에서 쫓겨난 뒤 객지에서 비참하게 비명횡사한 목종은 생을 마감한 지 한 달 만에야 적성현 남쪽에 화장되었다. 목종이 죽자 천추태후는 황주로 피신해 살다가 현종 20년(1029)에 사망했다.
모후의 섭정에다 비명에 간 목종이었으므로 치적이라는 것도 별로 보잘 것이 없었다. 그는 재위 12년 동안 관직이라곤 임명한 적이 없었던 왕이었다. 그나마 목종 원년(998)에 서경을 호경(鎬京)으로 개칭한 것이 치적 중의 하나라면 하나이다. 목종 5년(1002)에는 6위의 군영에 장수를 배치하고 그곳 군사들의 잡역을 면하게 해주기도 했다. 그 밖에 전시과를 개정하여 18과와 한외과로 나누고 전(田) 100결과 시(柴) 70결에서 전 17결까지 주기로 한 것과 민간의 교역에는 철전 외에 베를 사용하게 한 것, 그리고 동서 양면에 몇 성을 새로 쌓은 것이 전부이다.
목종은 남색을 즐긴 탓인지 선정왕후 유씨 외에 다른 부인은 두지 않았으며 소생도 없었다. 선정왕후 유씨는 태조의 아들 수명태자 소생 홍덕원군 규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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