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국보회화 李慶胤이경륜 朝鮮조선, 16世紀세기 末말 모시水墨 수묵 23.0×22.5cm 湖林博物館호림박물관 所藏 소장 이 작품들은 현재 20폭으로 구성되어 있는 산수인물화 첩의 제1, 2폭이다. 이 화첩 중 앞쪽에 있는 9폭은, 이경
윤(李慶胤)의 관지나 인장이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그와
동시대인인 간이당(簡易堂) 최립(崔 , 1539∼1612)의 발
문(跋文)과 찬시(贊詩)가 들어 있고 화격(畵格) 또한 높아
그의 진작(眞作)으로 간주되고 있다.
제1폭의 우상(右上)에 적혀 있는 최립의 발문에 의하면 이경윤의 작품 9폭은 원래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것을
홍준(洪遵, 1557∼1616)이 수집한 것으로, 최립은 그림
속의 인물들이 비범하고 속기가 없어 보여 작가인 이경
윤을 만나본 적은 없지만 이 인물들 속에 혹시 자신도 알
지 못하는 사이에 표현된 화가 자신의 모습이 깃들어 있
을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9폭에 적혀있는 최립의 찬시는 1598년 겨울과 1599년
초봄에 걸쳐 쓰여진 것이며, 모두 최립의 문집인 {간이
당집(簡易堂集)} 권 8에 실려있다.
제1폭 시주도(詩酒圖)는 위엄있는 얼굴의 고사(高士)가 돈(墩)에 앉아 술단지를 받쳐들고서 있는 동자를 바라보
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인데, 이들이 딛고 있는 둥그스
름한 언덕을 먹으로 선염(渲染)한 것 외에는 배경에 아무
것도 나타나 있지 않다. 제2폭 송별도(送別圖)는 3인의
선비가 공수자세로 예를 갖추어 인사를 나누고 있는 광
경을 그린 것이다. 1폭과 마찬가지로 나즈막한 언덕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화면 우측에 도안화된 문양처럼
보이는 패랭이꽃 같이 생긴 잡풀을 그려 넣은 것이 눈에
띤다. 이러한 잡풀의 모습은 이 그림 외에도 이 화첩에
들어있는 다른 화폭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요소
로 주목된다. 두 폭 모두 얼굴은 담묵(淡墨)의 세필로 단
정하게 그리고, 의복은 농묵(濃墨)을 사용하여 빠르고 능
숙하게 묘사하였다. 비교적 간단한 구성을 보여주는 소
품(小品)들이지만 인물화에 특출했다고 전해지는 이경윤
의 명성에 걸맞는 우아하고 세련된 화풍를 보여주고 있다.
제1폭의 화면 우상(右上)에는 "我國名畵아국명화 多出宗英다출종영 目今목금 如石陽正梅竹鶴林守昆季水石여석양정매죽학림수곤계수석 亦殊絶者也엿수절자야 洪斯文自北來홍사문자저래
多得鶴林다득학림 散畵於流落中산화어류낙중 持以示余
지이시여 索題詠삭제영 觀其寫人物尤관기사안물우
逼眞핍진 要皆非凡俗風骨也요개비범속풍골야 余不曾見
여불증견 鶴林公학림공 或者此中有不覺혹자차중유불각
自肖其狀者耶자초기상자야. 萬歷戊만력무 戌冬술동 崔
立之최립지 識식"라는 최립의 발문
이 있고, 화면 좌상(左上)에는 "空中兮爲軒窓공중혜위헌
창 詩酒兮安能시주혜안능
使之雙사지쌍 可見者兮隨以一缸가견자혜수이일항 不可
見불가견 者兮滿腔자혜만강. 簡易간이"라는
찬시가 있다. 제2폭에는 화면 우상(右上)에 "偉然而皓者
兮위연이호자혜 乍(사)同而乍異동이사이 吾方諦視其三
人兮오방제시기삼이혜 俄若與之아약여지 爲四위사"라
는 찬시와 좌상(左上)에 "莫是淮南門下八公之三者耶막시
회남문하팔공지삼자야 向吾認之爲晧향오인지위호 安知
不復爲童也耶안지불복위동야야 今玆之遇焉금자지우언
其方非童非晧기방비동비호之間 耶지간야 己亥上春기해
상춘"이라는 후제(後題)가 적혀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混一彊理歷代國都之> 作者未詳작자미상
朝鮮조선, 1455∼1466年
비단彩色채색
164.0×171.8cm
日本 龍谷大學일본용곡대학 所藏소장
조선전기는 북방영토의 회복과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지도 제작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중국을 통해서
들어오는 중국 및 세계지도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세계
지도의 편집에도 많은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에 제작된 지도는 대부분 유실되었으며 일부를 제외
하고는 대부분 일본에 남아있다.
권근(權近, 1352∼1429), 김사형(金士衡, 1341∼1407), 이무(李茂, ?∼1409), 이회(李 )가 만든 이 지도는 아시
아, 유럽, 아프리카를 포함하는 구대륙의 지도로서 지도
위쪽에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彊理歷代國都之
圖)"라는 제목이 가로로 쓰여있고 그 아래 역대 제왕의
국도(國都)가 세로로 적혀있다. 지도의 아래쪽에 권근의
발문(跋文)이 붙어있는데, 이에 의하면 이 지도는 중국에
서 들여온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
와 천태승(天台僧)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混一彊理
圖)>에 조선과 일본을 추가하여 새로 편집한 것 이다.
중국과 조선은 매우 정확하게 나타나 있으며, 일본은 방
위가 틀렸으나 혼슈(本州)와 큐슈(九州)의 형태는 비교적
닮 아있다. 하천과 도서(島嶼)를 자세히 기입하고 있는
데, 특히 중국의 도시는 적색, 하천과 담수호(淡水湖)는
청색, 바다와 함호(鹹湖)는 녹색으로 채색한 것이 아리비
아 지구의(地球儀)의 수법과 일치하여 아라비아계 지도
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 작할 수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 는 우리나라가 다른 곳에 비해 매우 크게 과장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 나타난 우리나라 지도는 현존하는 최고
(最古)의 한국 지도로서, 1402년(태종 2)에 이회가 만든
조선 지도인 <팔도지도(八道地圖)>를 그대로 옮긴 것이
확실시 되고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1402년 처음으로 제작 된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필사(筆寫)된 것으로 보이는데,
내용에 일부 변화가 있으나 동일한 원도(原圖)를 바탕으
로 한 것으로 인정되는 지도가 현재 4개 남아있다. 일본
용곡대학(龍谷大學)에 소장되어 있는 이 지도 역시 1402
년 이후 개명(改名)된 지명을 반영하고 있어 원도(原圖)
가 아니라 1455년∼1466년 사이에 모사(模寫)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신대륙 발견 이전에 완성된 이 세계지도는
중국중심의 세계관에서 탈피한 것으로 현존하는 당시의
세계지도로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뛰어난 지도로
평가받고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과거은영연도 (科擧恩榮宴圖) 作者未詳작자미상
朝鮮조선, 1580年년
비단彩色채색
118.5×105.6cm
日本일본 陽明文庫양명문고 所藏소장
1580년(선조 13) 알성시(謁聖試)의 급제자에게 국왕이 내린 은영연(恩榮宴)의 광경을 그린 기록화이다. 알성시
는 국왕이 문묘(文廟)에서 작헌례(酌獻禮)를 올린 뒤 성
균관(成均館)에 친림(親臨)하여 치루는 비정기적인 시험
으로서 문과(文科)와 무과(武科)만을 실시하였으며, 합격
자들에게 베풀어지는 은영연은 의정부(議政府)에서 행해
지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이 작품과 직접적인 관련
이 있는 기록은 {선조실록(宣祖實錄)} 권 14의 선조 13
년 2월에 나타나 있다.
화면 상부에 궁중에서 열린 축하연회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축연 참석자의 이름과 이력(履歷) 등
이 기록되어 있다. 시험관(試驗官)은 영의정 박순(朴淳,
1523∼1589), 우의정 강사상(姜士尙, 1519∼1581), 호조
판서 김귀영(金貴榮, 1519∼1593), 병조판서 계현(啓賢,
1524∼1580), 승정원좌승지 손식(孫軾), 좌부승지 홍성
민(洪聖民, 1536∼1594) 등이고, 새로운 급제자 중에는
후에 조야(朝野)의 지도자가 된 이항복(李恒福,
1556∼1618), 한술(韓述, 1540∼1616), 여유길(呂裕吉,
1558∼1619), 유격(柳格, 1545∼1584), 윤명선(尹明善,
1547∼1608) 등이 포함되어 있어 이 작품의 의의를 더해
주고 있다.
정면 3칸의 건물 안에는 6인의 시험관들이 독상(獨床)을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 무용수들의 춤을 바라보고 있으
며, 음식 시중을 드는 시종들이 순백자 항아리와 병, 술
잔 등이 놓여있는 주칠탁자 곁에 서 있다. 건물 밖 기둥
이 있는 곳에는 대기중인 무희들과 음악을 연주하는 악
사들이 한줄씩 줄지어 앉아 있다. 건물의 넓은 기단에는
급제화(及第花)를 꽂은 합격자들이 앉아 있는데, 기단(基
壇)의 좌측에 무과 급제자 38명, 우측에 문과 급제자 12
명의 좌석이 구분되어 있으며, 이들 중에서 장원(壯元)을
한 사람의 자리는 맨 앞줄에 따로 마련되어 있다. 문.무
과의 급제자들 자리 사이로 재주넘기를 하는 놀이패들의
모습이 매우 역동적이며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고, 건
물 앞마당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은영연을 구경하고 있
는 사람들의 자세 또한 다양하고 얼굴 표정 하나하나가
살아있어 눈길을 끈다.
궁중기록화의 성격상 화면의 구도는 엄격하고 규격화된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세부 묘사를 살펴보면 은영연의
흥겹고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잘 살아있다.
목우도 (牧牛圖) 金금
朝鮮조선, 16世紀세기 後半후반
비단水墨수묵
37.2×28.1cm
日本일본 個人개인 所藏소장
김제는 산수(山水), 인물(人物), 화조(花鳥), 영모(翎毛) 등
다양한 화제(畵題)를 섭렵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특히 소 그림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현재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이 그림은 김제의 소 그림 중에서도 수작(秀作)에 속하는 것으로, 화면 좌측에 절벽같이 가파른 암벽이 있고 그 아
래에 잠들어 누워있는 소 한 마리를 묘사하고 있다.
암벽은 바위면의 뚜렷한 흑백 대조를 통해 입체감을 주
고 있으며, 윤곽선을 그린 필치는 먹의 농담을 미묘하게
조절하였고 비수(肥瘦)의 변화도 리드미컬하게 나타나는
등 매우 완숙한 경지를 보여준다. 화면 우측위에 묘사되
어 있는 뾰족한 원산의 봉우리 역시 바위면의 농담 대비
가 두드러져 당시에 유행하던 절파(浙派) 화풍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비교적 자세히 묘사한 자연 배경과는 달
리, 무심히 잠든 소의 모습은 몇 개의 선으로만 간략하게
그려내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김제의 이러한 화법(畵法)
은 그의 종손(從孫)이자 소 그림을 잘 그리기로 유명했던
퇴촌(退村) 김식(金埴, 1579∼1662)에게 직접적인 영향
을 미쳤을 것으로 믿어진다. 화면 좌측에 백문방인(白文
方印) [계수(季綏)]와 주문원인(朱文圓印) [취면거사(醉
眠居士)]가 찍혀있고 화면 위쪽에는 다음과 같은 제시
(題詩)가 쓰여 있다.
露地日高眠노지일고면; 땅위에 해는 높이 솟았건만 졸면
서
無心百草前무심백초전: 아무 생각없이 풀밭 앞에 앉아
있다.
廓然繩索外곽연승색외: 태평스러이 고삐를 멀리하고
終不夢人牽종불모인색: 사람에게 끌려가는 꿈은 끝까지
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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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제작에 참여한 김사형(金士衡, 1341∼1407)은 조선초에 좌의정을 지내고 우리 안동김씨의 익원공(翼元公)파를 연 방조(傍祖)가 되시는데 함자를 뵈오니 반갑습니다. 백범 김구선생이 이 파의 자손입니다. 개인적인 일을 써서 죄송합니다만 일본에서 이 귀중한 보물을 찾아 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얼마전 역시 제학공(提學公)파의 방조가 되시는 충무공 김시민장군관련 교지를 일본에서 찾아 온 일이 화제가 되었지요. 일본에 억류되어 있는 수많은 귀중한 문화재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