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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17;12-18. 삼림일지라도 스스로 도전하는 것이 약속에 대한 자세입니다. 2024. 7. 7.
사람이 살다보면 원하지 않지만 감당해야 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계절을 따라 감당해야하고, 필요치 않을 때에도 감당해야 하고 바꿔야 할 때 바꾸고 변화를 줄 때에 감당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어진 것만 가지고는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가 없고, 전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감당하는 것을 신앙의 삶이라고 합니다. 신앙은 근본적으로 고치고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어떤 신앙입니까? 믿음을 주님의 십자가 위에 바로 세우는 신앙입니다. 십자가의 신앙이 온전한 변화와 창조와 개척을 이루어냅니다. 苦難과 역경을 극복하고 이겨냅니다. 이것을 개척정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쓸모없고 버려지고, 기대하지 않았던 땅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비전의 사람, 개척자와 선구자라고 합니다. 이미 조성 되어진 좋은 조건 속에서 쉽게 일하는 사람은 개척자가 아닙니다. 선구자가 아닙니다. 어려운 조건과 악조건 속에서 낙심하지 않고 새롭게 만들어 가는, 창조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비전의 사람이고, 선구자이고, 개척자입니다. 여러분,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무엇입니까?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고립무원(孤立無援) 상태입니다. 도와 줄 그 어떤 것이 없는 진퇴양난의 다음 단계입니다. 그런데 새롭게 만들어 가는 사람은 사면초가를 뚫고 진퇴양난에서 벗어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메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없이는 창조와 개척은 요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존재입니까? 잘 차려진 밥상만을 받는 존재입니까? 물론 주님께서 생명을 받쳐서 차려 놓은 반드시 받아야합니다. 그런데요 우리는 하나님에 의하여 디자인 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열심과 약속으로 만들어지고 디자인 된 존귀한 사람입니다. 예스님의 생명과 몸으로 투자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뿐입니까? 부모님의 배려와 보살핌과 사랑의 결과로 만들어졌습니다. 또 있습니다. 내 자신의 헌신과 눈물과 넘어짐과 고민과 기도로 만들어지고 디자인 된 존재입니다. 이렇게 잘 차려진 밥상 앞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차려진 밥상이 아닌 그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다가 올지라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넉넉히 소화할 수 있습니다.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투정부릴 때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내용을 가르쳐 줍니다. 이스라엘 지파 중에 큰 복을 받은 지파는 유다지파입니다. 다음은 요셉 지파입니다. 역사적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가나안땅을 입성하고 어느 정도 정복을 했습니다. 물론 아직 점령할 땅이 있지만 그 가나안땅을 여호수아가 12지파에게 제비를 뽑아 땅을 분배를 합니다. 이미 요단 동편의 땅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지파가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아직 점령하지 못한 땅에 대하여 먼저 선 분배하고 후 점령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의 갈렙이 험준한 헤브론산지를 가리키며 이 산지를 달라고 합니다. 갈렙이 누구입니까? 여호수아와 함께 이스라엘의 열두 명의 정탐꾼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갈렙은 45년의 세월이 흐른 후 85세가 된 노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믿었고, 45년 전이나 85세가 된 지금이나 여전히 40세인 청년입니다. 그는 산세가 험하고 거인족인 아낙자손이 사는 헤브론 산지를 내게 달라며, 도전하고 개척하려는 신앙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17;14절은 요셉자손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여러분, 요셉지파는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큰 민족이 되었습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요셉 가문을 크게 축복했습니다. 디자인 했습니다. 다른 지파보다 큰 복을 받았습니다. 스스로 인정을 합니다. 큰 민족으로 복을 받았다는 것은 요셉의 후손,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아버지반열, 삼촌의 반열에 똑 같이 나머지 10지파의 취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의 12지파는 야곱의 후손들입니다. 12명의 자녀들입니다. 그 중에 요셉이 있습니다. 그런데 땅을 분배를 받을 때에 레위지파는 제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11지파가 분배를 받아야 마땅한데 하나님께서 요셉지파를 축복하셔서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당당하게 삼촌과 같은 족보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12지파에 들어가고 12지파와 같이 땅의 분배를 받습니다. 이것이 요셉지파가 받은 축복이고 큰 민족이 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각 지파마다 제비를 뽑아 분배되는 땅을 다 말없이 수용하는데 요셉 지파인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지파가 여호수아에게 나와서 불평을 합니다. 불평의 내용은 왜 우리에게도 다른 지파처럼 한 몫만 줍니까? 우리는 큰 지파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이 이 말을 하는 배경 속에는 어떤 특권의식이 있습니다. 자기들의 선조는 요셉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누굽니까?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은 이스라엘 백성이 굶주려 죽게 되었을 때 요셉 때문에 11형제가 다 살아났는데, 오늘의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공을 내세웁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멋진 답변을 합니다.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여러분! 얼마나 멋진 답변입니까? 디자인 된 사람들 입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투자된 지파입니다. 여호수아가 어느 지파 사람입니까? 요셉의 자손인 에브라임 지파입니다. 자기가 속한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와서 한몫을 더 달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언지하에 스스로 개척하라고 합니다. 참으로 매몰찹니다. 어떻게 자기 친족들이 와서 부탁을 하는데 한마디로 잘라버릴 수 있을까요? 자기가 속한 지파 이익보다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한 자세와 태도입니다, 디자인 되었고 투자된 존귀한 인생입니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개척자의 정신이며 올바른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물론 불평이 이해가 됩니다. 두지파이기 때문에 두 몫을 요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땅은 산지요, 점령키 어려운 땅을 개척해서 소유하라고 합니다. 왜요? 왜 대부분 산지이고, 장대한 가나안 족속이 철 병거를 가지고 진을 치고 있는 그 땅을 주었을까요? 여러분, 우리가 요셉지파와 같은 불평과 원망을 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기둥인데, 내가 주님을 위하여 얼마나 열심을 다 하는데, 감당하지 않은 때가 없는데 왜 이 모양과 방법으로 주시는가? 왜 나의 삶은 고되고 힘든 일만 계속 되는 것일까? 하나님! 정말 이럴 수 있습니까? 두 몫을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요셉지파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된 연유입니까? 감사해야 할 일인데. 불평과 불만과 원망을 합니다. 마음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기에는 땅이 비좁습니다.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예언을 하셨는데 민수기33;5절에 너희의 종족을 따라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눌 것이니 수가 많으면 많은 기업을 주고, 적으면 적은 기업을 주되 각각 제비를 뽑은 대로 그 소유가 될 것인즉 너희 조상의 지파를 따라 기업을 받을 것이니라. 약속대로라면 크면 큰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받되, 제비를 뽑아서 받으면 됩니다. 이미 디자인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감사를 해야 하는데 불평과 불만과 원망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삶 가운데 복을 주시고, 많은 것들을 누리도록 디자인하셨는데 지금의 상황이 좀 나쁘다고 불평하지는 않나요? 죽었던 우리들을 구원하셨는데,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시면서 살리셨는데, 이렇게 투자되었고 만들어졌는데, 무엇을 더 요구해야 되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불평과 불만과 어려움이 아니라, 사랑과 복과 은혜로 디자인 된 것을 감사와 순종으로 살아가시는 모든 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그러면 스스로 개척하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14,18절의 내용은 간단하게 홀로서기입니다. 분깃으로 주어진 땅이 부족하면 다른 곳으로 가서 스스로 개척하면 됩니다. 헤브론 산지에서 아낙 자손을 몰아내고 그곳을 분깃으로 삼았던 갈렙에게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개척하라는 단어 베레타는 나무를 자르고 황무지를 가꾸어 옥토를 만든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cut down입니다. 여러분, 신앙인으로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컷 다운 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옥토로 만들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믿음과 삶이 그렇고 우리의 내일과 미래가 그렇습니다. 개척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면 cut down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2-1. 창조의 개념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서 재창조가 이루어집니다. 삼림이라도 베레타하고 개척이 됩니다. 여호수아는 요셉자손의 불평과 불만과 요구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을 하나요? 15절은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 이에 요셉자손은 16절,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 무슨 말인가요? 여호수아는 요셉자손이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아 큰 민족을 이루었으니까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할 것을 요구하지만, 요셉자손은 그 땅에 거주하는 자들은 다 철 병거를 가지고 있어서 점령하기 힘이 드니까 다른 땅을 요구하고, 쉽게 차지할 수 있는 땅을 분배하라고 여호수아에게 요구합니다. 개발의 부적절함을 조목조목 따집니다. 생각으로 따집니다. 상황을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 위대한 비전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무엇이 위대한 비전입니까? 요단 온들 위에 세우는 목표입니까? 에덴동산과 같은 곳에 세우는 바벨탑입니까? 애굽의 나일 강과 같은 풍요로운 곳에 세우는 소돔과 고모라입니까? 오늘 요셉자손의 모습을 보면서 14장에 나오는 갈렙을 봅니다. 갈렙은 85세라는 노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지파 내에서 정치적 입지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파들이 다 꺼리는 헤브론 산지를 요구합니다. 스스로 정복할 수 없는 산지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요셉자손의 모습은 어떤가요? 큰 민족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쉬운 땅을 분배받을까를 놓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비교가 됩니다. 여러분, 어디에 서 있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더 많고, 더 쉽게 차지할 수 있는 것, 더 어렵지 않은 것을 차지하려는 모습인가요? 85세의 노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열정과 도전하는 정신이 있었기에 갈렙은 스스로 청년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젊은 생각, 도전하는 정신, 열정이 있으면 늙지 않고, 베레타와 창조정신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젊어도 생각이 늙고, 도전정신이 없고, 열정이 없으면 노인입니다. 이미 창조할 그 무엇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꿈꾸고, 소망하고, 그것에 도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실 축복을 맘껏 누리고,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실 때에 스스로를 제한하지 않을 수 있어요. 비전은 그냥 탄탄대로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도리어 산지에서 이루어지고 산림에서 이루어집니다.
개척이란 표현은 베레타와 또 다른 히브리어로 타타오가 있습니다. 타타오는 열린다는 뜻입니다. 닫혀있고 불가능하다고 그 문을 여는 사람이 바로 비전의 사람이고 창조자입니다. 그들이 누굽니까? 생각을 바꾸어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신앙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낙심과 문제 앞에서, 안 된다고 하는 상황에서, 그것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그런 불가능 속에서 열수 있는, 타타오가 있는 사람이 신앙인이고 창조자입니다. 여러분, 경제와 건강과 사업과 사람과의 갈등과 여러 가지 어려운 문들이 있지요? 이때 하나님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실까요? 사면초가에서도 창조와 열어야 하는 베레타와 타타오입니다. 나무에서 사과 떨어지기를 바라는 요셉지파에게 여호수아는 15절과 18절에서 스스로 개척하라고 합니다. 바라 레하, 너를 위하여 자르고, 너를 위하여 만들라는 표현은 창1:1 베레쉬트(태초에) 바라(창조하셨다) 엘로힘(하나님이)의 첫 문장의 두 번째 단어와 같은 단어가 사용이 되었습니다. 창조는 자르다, 개간하는 것입니다. 바라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개척정신은 창조로 연결이 됩니다. 여러분, 세상을 돌파해 나가는 모든 힘과 능력은 창조입니다. 여호수아는 불평만 하지 말고, 벧 스안, 이스르엘 지역, 므깃도 등을 스스로 개척하고 개간하라고 합니다. 창조성을 요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레타와 타타오의 복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여러분의 모든 것이 이루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 신앙인의 삶은 늘 도전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왜 개척하라고 말씀 하실까요? 지시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명령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구하신 여호수아가 옆에 있습니다. 여러분, 되지 않을 일을 주님이 시킬까요? 지도자가 가르쳐줄까요? 주님과 지도자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알 수 없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주변 환경을 보고 한탄하고 낙심하고 못하겠다고 불평하십니까? 이제는 끝났어, 소망이 없다고 스스로 포기 하십니까? 주님은 안 된다고 하지 말고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해보지도 않고 노력도 안 해보고 일찍부터 손 떼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복을 받을만한 사람에게 길을 여시고, 재능을 주십니다. 그러면 누가 복을 받을 만한 사람인가요? 하나님을 보지도 않고 절망과 자포자기와 원망과 불평하는 사람에게 주실까요? 현실은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무엇인가를 해보겠다는 사람에게 복을 주실까요? 여러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고 믿음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나무에서 사과 떨어지기를 바라는 요셉지파에게 여호수아는 도전을 말 합니다.
2-3. 현실과 풀어야 할 문제의 겉모습만 보지 않아야 합니다. 겉모습만으로 어떻게 현실을 돌파할 수 있으며, 보이는 것으로만 어떻게 현실의 문제를 해결 할 수가 있습니까? 산지에 철병거로 무장한 사람들입니다. 생각만 해도 겉모습에 놀랍니다. 이 것이 현실이고 풀어야할 문제인데 희생과 죽을 각오가 없습니다. 주님은 능히 쫓아낼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약속하시는데 왜 지체하고 낙심합니까? 여기까지 온 것이 여러분의 힘입니까? 주님의 은혜입니다. 메뚜기의 思考方式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 자손의 약한 마음은 메뚜기사고 방식입니다. 어디서 나온 표현입니까? 12명의 정탐꾼들이 와서 보고 할 때 믿음 없는 10사람들이 와서 보고했지요?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 같다고 스스로 평가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메뚜기 정신을 지닌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안 돼, 실패야, 사면초가야! 왜 메뚜기 사고방식을 갖습니까?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이 말렸습니다.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당신을 죽이려는 결사대들이 당신을 죽일 텐데 올라가지 마십시오. 40명의 자객이 식음을 전폐하면서 바울을 기다립니다. 사방팔방 우겨쌈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따라 갑니까? 내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면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겠다는 바울입니다. 현실은 거대한 철 병거이고, 산지와 삼림입니다. 감당이 되지 않는 아낙자손입니다. 하지만 감당해야 할 현실이고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임마누엘 주님과 이루실 주님과 승리케 하시고 얻게 하시고 이기게 하시는 주님만을 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4. 인정입니다. 존귀한 사람의 인정입니다. 투자된 인생의 인정입니다. 디자인 된 존재의 인정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부질없는 지팡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능력의 지팡이가 있습니다. 이미 할 수 있고 능력이 있으니 개척하라는 것입니다. 요셉자손은 많은 힘이 있는 두지파입니다. 민수기에 의하면 20세 이상 싸움에 나갈만한 자가 에브라임이 40,500명, 므낫세가 32,200명 도합 장정만 72,700명입니다. 막강한 힘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힘과 능력을 주신 것일까요? 일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왜 주셨을까요? 주의 일에 사용하라고 주셨습니다. 왜 땅속과 수건 속에 감추시나요? 복 받은 것을 인정하고, 큰 민족으로 성장한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고 책임져 주는 자신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 실패를 할까요? 기능을 모르기 때문이고, 고민과 생각지 않기 때문이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철 병거는 어디서 유용한가요? 평지와 평야입니다. 산지와 삼림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무섭습니까? 가지고 있는 사실만으로 안 된다고 하십니까? 유용성과 효율성을 세밀히 보아야 합니다. 어느 때 쓸 수 있는지를 알아야지요. 여러분, 철 병거는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용할 수 있어야 위대한 철 병거가 됩니다. 왜 두렵고, 왜 실패할까요? 주신 것과 있는 것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용하면 할수록 강해지고 시너지가 나타납니다. 17;17절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시 40: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사용하면 할수록 커지고 강해집니다. 사용해야 지경이 넓어집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지파는 그들에게 있는 능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인정도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창조의 큰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의 보따리입니다. 능력의 지팡이가 시대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주신 것과 현재 있는 것을 사용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작은 이익에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요셉 지파는 눈앞에 작은 이익에 눈이 어두워 가나안 백성들을 쫒아내지 않았습니다. 쫒아내기 보다는 노예로 삼아 일을 시키거나 조공을 받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5년 동안 그렇게 살았어요. 여러분, 눈앞의 이익을 따라가면 무조건 실패를 합니다. 의사결정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님입니다. 작은 이익에 매달리면 큰 것을 못 봅니다. 가장 좋은 요단 온 들을 결정할 것이 아니라, 동서남북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씨앗은 땅에 뿌려지고 심겨질 대 그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한국 속담에 미련한 농사꾼이 씨앗 주머니를 베고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씨앗을 뿌리고 심으면 열매를 얻어 굶어 죽지 않을 텐데 그것을 아까워하다 굶어 죽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도전하지 않습니다. 소명을 잃어 버렸습니다. 개척과 도전이라는 단어가 삶에서 사라졌습니다. 이 것이 약점입니다. 18절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고 능력을 인정했는데도, 가지고 있는 것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주어진 상황에 대한 순종이 신앙이라면, 내게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지 간에 그 상황에 순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그 용기 있는 한 사람에 의하여 역사는 바뀝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신 것도 인정하시고 승리할 것도 인정하시고 거기서 시작되는 베레타와 타타오로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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