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수밀 10편.
“아, 제 얘기 들으셨습니까? 어떻게 상상하셨는데요?”
기석은 활짝 웃는다.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온 원은 웃는 모습이 더 잘생겼네 속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게이란다. 완벽한 남자인데 그런 핸디캡이 있단 말이지.
“그냥 예의상하는 말입니다. 들은 건 별로 없어요. ”
“ 이거 실망인데요. 수련씨는 친구분 얘길 많이 해주셨는데요. 굉장히 터프하시고, 또 예민하시다고. 그리고 수련씨를 너무 좋아하신다고요.”
“네? ”
원의 눈이 휘둥그레져 있다. 수련에게 눈짓으로 너 내 얘기 했냐? 내 얘길 왜 했는데? 하는 하고 신호를 보낸다. 수련은 난 그런 적 없다고 시치미를 뗀다.
“아, 그렇게 놀라실 건 없습니다. 농담입니다.
수련씨와 가장 친한 친구 시라면서요. 그래서 그런지 풍기는 느낌이 참 많이 비슷합니다.”
비슷하다고? 비슷 할 리가 있나. 수련은 긴 생머리에 여성스러움이 폴폴 풍기는 하늘거리는 쉬폰 원피스를 입고 있는데다가, 화장도 어디 흠잡을 때 하나도 없는 화장이라고. 완벽 그 자체라고. 게다가 걸음걸이는 얌전하지 향수도 원처럼 시원하고 상쾌한 향이 아니라 달콤한 향을 좋아하는 그 취향이며, 손짓 하나를 하더라도 뻣뻣하지 않고 우아 한데다가 머리 핀 하나 꽂는 것 수건 한 장 개키는 것 하나하나까지 수련은 여성스럽다. 물론 여성스럽다는 것이 뭐, 정형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슬픈 영화를 보면 금방 울어버리고, 십자수며 손뜨개질 하는 거며 바느질이 취미인데다가, 요리도 잘한다. 엄마가 만든 음식 만큼은 아니지만 오랜 자취 생활에 느는 것은 음식솜씨 뿐이라더니 단연 음식도 맛나다. 뭐 자취 때문에 음식솜씨가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소아마비에 한쪽 손이 성하지 못하다는 걸 기억해보라. 그녀가 그녀 집에서 첫딸이라는 걸 기억해보라 그녀가 어떻게 성장했을지 상상이 되지 않나- 어째든. 그녀는 여성스러운 일을 참 좋아한다. 옷을 고르는 취향하나까지.
그런데 나는 말이다 원은 말이다. 기껏 친구가 옷을 사주겠다고 고르라고 사정사정해서 산 옷이 겨우 정장이다. 것도 치마가 아닌 바지 정장이다. 그걸 고른 이유는 나중에 면접을 보려면 필요하고 취직이 되면 혹시 한번이라도 입을까 해서다. 그것도 검은 색을 골랐다. 제가 무슨 장례식에 조문 가는 것도 아니고 친구가 남자를 만나러 간다는데 검은 색 정장이냐고 물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색깔 있는 옷이 거의 없다. 있다고 하면 누가 입다가 작아졌거나, 너무 커져서 못 입는 옷을 얻어 입은 것이다. 원의 집에 있는 청바지며, 재킷, 점퍼 심지어는, 츄리닝 까지 모두 색깔 있는 것은 언니나, 사촌동생 그리고 뭐 발에 채일 정도로 옷을 너무 많이 사서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옷을 보내주는 친구 의 것이다. 그럴 정도다. 게다가 바느질이라고는 단추 다는 것 외에는 할 줄도 모르는, 십자수는 짜증이 치밀어서 못하고, 뜨개질은 고 3때 남자친구 줄려고 목도리. 남들 다 한번 씩은 해본다기에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떠보고는 절대로 절대로 뜨개질은 안한다고 바늘까지 한 번에 버렸다. 게다가 슬픈 영화? 로맨스 그런 건 무슨 재미로 보는지 모를 정도다. 보는 영화라고는 액션영화 뿐이다. 드라마도 싫어한다. 걸음걸이는 팔자 혹은 11자 인데다가, 신발 끈도 나비를 묶지 못해 대충 묶고 다니면 수련이 다리를 올려보라고 해서 예쁘게 묶어준다. 그걸 풀어지지 않게 살짝씩 땡겨 주는 걸로 1년 내내 풀지 않고 신고 다닌다. 빨 때는 어떻게 하냐고? 물론 그냥 빤다. 어쩌다가 풀어지면 그냥 대충 묶고 다닌다. 수련이 발견해서 다시 묶어줄 때까지. 오랜 자취 생활에 요리는 잘하지만, 어찌나 덤벙대는지 빨래 해놓고 세탁기에서 옷을 너는 걸 잊어버리고 다음 빨래 할때 꺼내서 너는 여자였다. 옷은 그냥 깨끗하기만 하면 된다며 옷도 안 사입는다 이런 나와. 수련이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고?? 아 , 맞다. 이것도 예의상하는 말이겠다. 참.
반듯한 정장차림에 검정 보타이를 맨 웨이터가 쟁반을 들고 가까이 온다. 테이블에 놓인 빈 잔에 물을 따른다. 그리고 주전자를 다시 쟁반위에 올리고 천천히 메뉴를 읽고 있는 수련을 향해 살짝 미소를 보이며 말한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원은 메뉴판을 보고 있다. 어떤 메뉴가 있나 둘러보기 전에 숫자들에 눈이 간다.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싼 곳이 아니라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했지만 정령 이게 옷값이 아니라 밥값이란 말인가. 오호 통재라 를 외치고 싶을 정도로 비쌌다. 메뉴 하나당 원이 가끔 들르는 값싼 보세 매장에서 파는 티셔츠 가격과 맞먹는다는 사실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리고는 자신의 취향과는 전혀 상관없는 가장 싼 샐러드를 주문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리고 기석에게 메뉴판을 넘긴다. 기석은 메뉴판을 받아들더니 다시 웨이터에게 넘긴다.
“스테이크 하겠습니다. 숙녀분들은요?”
“전 봉골레 스파게티에요. 원아, 넌?”
“나? 나 , 샐러드.”
웨이터는 주문을 한번 확인해주고는 더 필요한 게 없냐고 묻는다. 기석은 꼬부랑말로 무슨 와인 한잔을 주문한다. 그러는 동안 수련은 원을 쿡쿡 찌르면서 묻는다.
“너 샐러드 좋아해? 아니잖아. 남자 앞이라 내숭떠는 거야?”
샐러드 따위를 좋아할 리가 있냐. 암. 그렇지. 그냥 어디서 야채만 송송도 아니고 그냥 대충 뜯어가지고 그 위에 요상한 드레싱 얹어서 먹는 아작아작 소리나는 그걸 말한다면 당연히 별로 안 좋아하지. 그런 건 배가 금방 꺼진단 말이다. 샐러드 하나 값이 삼겹살 1인분과 맞먹는다니. 셋의 음식 값이면 고깃집 가서 배터지게 먹을 수 있을 텐데 가난한 대학생인 나는 그런 걸 좋아할 리가 없지. 가격 싸고 양 많은 게 진리지. 그치만, 다른 건 너무하게 비싸단 말이다. 그러면서 원은 그 남자를 한번 쳐다본다. 눈만 마주쳐도 어색하지만. 그는 근사한 남자다. 평생가도 이런 남자는 먼 발치에서 구경만 할 수 있는, 그야말로 값비싼 난 처럼, 관상용 남자다. 신은 공평하시다. 역시 모든 걸 주지 않아. 하며 말이 스쳐지나간다. 수련은 이 남자 마음에 들어? 하고 묻는다.
“그게 아니라 너무, 비싸잖아.”
원은 그가 마음에 드냐는 말을 부인하려다가 비싸다는 말이 크게 툭 튀어나와 버렸다. 아. 원은 기석이 그 말을 듣지 못했길 바랐지만, 웨이터는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너무 비싼 가요? 걱정 마십시오. 오늘은 제가 낼 겁니다.”
기석은 여유로운 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그게 얄밉다. 원은 돈 많은 사람들이 싫다. 높은 탑 꼭대기 위에서 서서 저 아래에서 사다리를 잡고 힘겹게 기어올라가는 사람들을 발아래 개미보듯 보며 콧방귀를 뀔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든다. 돈 많은 사람들이 너무너무 싫다. 그들은 모른다. 배고픈 거 어떤 건지. 추운게 어떤 건지. 그리고, 불편한게 어떤건지. 그러면서 난 그래도 백화점 아울렛 매장에만 가. 불우이웃돕기 바자회도 꼬박꼬박 나간다구. 동물 애호협회 회원이라 모피 같은 것도 안입는다구. 했던 그 어떤 돈 많은 기업가의 딸인 같은 학교선배를 봤을 땐 정말 깜깜한 밤 어두운 뒷골목을 걸어갈 때 한 대쯤 쳐주고 싶었다. 물론 그걸 실행에 옮긴다는 것은 원의 도덕성으론 절대 불가능 했지만, 상상인들 누가 못하겠는가.
“그 쪽이 낸다고 해서 가격이 싸지는 것도 아니고 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오늘 셋의 밥값이면 대학생 한달 평균 밥값의 반은 된다구요. 덧붙이자면 아프리카에서는 한 가족이 한달동안 밥을 먹는 비용이란 말이에요. 당신이 한끼 먹는 식사가 그럴 대접을 받을 만한 행동을 오늘 하셨다고 생각하시나요?‘
원은 흥분해서 자신도 모르게 까칠한 말투를 내뱉고 말았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수련이 당황해서 이 적막을 깨고자 웃으면서 이야기 하려고 한다. 하지만 기석이 말을 선수친다.
“ 수련 씨 친구분은 수련씨보다 더 대단하신 분 같은데요. 오늘 좋은 것 하나 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먹은 밥 값만큼 값어치 있는 일은 했는가. 원씨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식사를 하시나봐요. ”
수련은 다행이다. 하면서 원을 쳐다본다. 원은 얼굴을 펴고 한마디를 덧붙인다.
“아니요. 그 것 뿐만 아니라요. 오늘 제 밥상에 올라오기까지 수고해준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덧붙이죠. 예를 들면 제가 오늘 된장국에 김치 그리고 밥을 먹는다면 된장을 만들어주신 분 된장국에 들어간 야채와 쌀과 배추를 키워준 하늘과 햇볕과 바람 땅. 그리고 그리고 벼 낱알을 떨어뜨려 쌀로 만들어주신 분 그것을 옮겨 내가 살 수 있는 곳까지 운반해주시는 분 그리고 밥을 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주신 분. 그리고, 쌀이라는 주식을 정해주신 조상님들과 시행착오 끝에 밥을 하는 방법을 정해 주신신 제 선조님. 김치도 물론이구요. 등등. 식탁에 앉아서 여기에 식사를 할 수 있게 해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는 간단한 인사를 드리죠.”
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런 게 일상이지 않냐. 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기석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수련 씨 친구분이라서 특별할 줄은 알았지만, 정말, 놀랐습니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정말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계시군요. ”
“독특한게 아니라요. 원래 우리 사고방식이었습니다. 바로 우리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겁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고,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는 생활방식이었죠. 옛날엔 노끈 하나, 작은 종이 도막 하나 아끼고 감사하게 생각했다고요. 지금 사람들이 편하고 합리적인 것만 찾는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옮아가서 그렇지요.”
원은 그렇게 대답한다. 수련은 원을 쿡쿡 찌른다. 작전은 어떻게 하고 이런 이야기만 하느냐 하는 것 같다. 원은 그때야 아차, 한다. 아, 이놈의 성질머리는 누가 마음에 안드는 소리만 하면 앞 뒤 안재고 그런 말을 툭 던지고 만다. 아, 원의 얼굴에 민망함이 떠오른다. 민망함을 떨구려고 어떤 말이든 꺼내보려고 하다가 물만 들이킨다. 그러는 사이에 음식이 나오고 있었다.
원은 조용히 있더니 , 속으로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마지막엔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겼다. 그것을 본 기석은 그녀의 말 뒤에 감사합니다.를 자신도 붙였다. 그러자, 음식이 더 맛있어 보이고, 좋아보인다.
음식을 먹으면서 원은 아까의 민망함을 털기 위해, 원은 옛날 이야기를 꺼냈다.
“수련이와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전 그때까지도 신발 끈을 묶을 줄 몰랐어요. 신발 끈이 풀려도 만날 그대로 다녔어요. 그러다가, 신발 끈이 신발에 밟혀 넘어진 적도 있었고요. 그 때마다 이리 줘봐 하면서 수련이가 신발 끈을 묶어줬어요. 엄마 같이요. 엄마 같다는 말은 안 어울릴 지도 모르겠어요. 우리 엄마는 신발 끈 같은 거 매는법을 가르쳐 주는 엄마도 아니었고, 옷을 어떻게 관리해야하는 지 알려주는 엄마도 아니었고, 그냥 밥 먹어라 학교가라 자라 이게 전부였으니까요. 그 때 수련이가 처음 신발 끈 묶는 법을 가르쳐줬어요. 아직도 잘 못하는 칠푼이지만요. 하하하.”
“수련씨가 그런 자상한 면이 있었군요. 두 분이 친한 모습 보니까 너무 좋습니다. 전 친구가 그닥 많지 않아서 그런지 두 분이 너무 부럽습니다. 제가 누구와 친하기로 하면 저희 어머니께선 그 친구 뒷조사를 다 하셔가지고 조금이라도 꺼림칙 한게 있으면 절대로 친하지 못하게 하셨거든요. 그래서 어릴 적 친구가 없습니다.”
“그러시구나. 그러면 우리가 친구해드리죠 뭐. 쿨하게. ”
원은 손을 내민다. 수련은 고개를 끄덕인다. 기석은 손을 맞잡는다. 그리고 일어선다
“감사합니다.”
“제가 더 고맙죠. 저도 친구가 별로 없거든요. 한 손에 꼽을 정도로요.”
원은 처음의 까탈함을 버리고, 시종일관 즐겁게 떠들어댔다.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수련에게 시선을 주면서 이야기를 한다. 수련의 부탁대로 그녀의 손을 만지작 거리기도 하고, 어깨위에 손을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기석의 시선도 함께 느끼면서. 그가 당황을 하는 지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쳐다보지를 의식하면서 말이다.
기석과 헤어진 원의 집에서 캔맥주를 마시고 있다. 수련은 원에게 묻는다.
“어땠어?”
원은 마치 자신이 소개팅이라도 받은 건가 하고 의아한다.
“그 남자 손가락 말이야. 약지 손가락이 검지 손가락보다 길었어.”
“응? 그게 무슨 말인데?”
“남성적이라는 거지.”
원은 맥주를 한모금 마시고는 대답한다.
“서양사람들은 손가락에 대한 연구를 좋아하는 것 같아. 얼마 전 ##신문에서 말이야. 하버드 연구 팀이 네 번째 손가락이 두 번째 손가락보다 긴 사람은 남성성이 강하고, 두 번째 손가락이 네 번째 손가락보다 긴 사람은 여성성이 강하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대. 그래서 유심히 봤는데, 네 번째 손가락이 두 번째 손가락 보다 길었어. 남성성이 강하다는 거지.”
“그래? 나도 한번 확인해봐야겠다. 어? 나는 검지손가락이 더 길다. 신기하네. 원아 네 손 좀 줘봐 네 것도 볼래.”
“난 약지 손가락이 더 길어. 내 성격이 어디 가겠니?”
“그래? 그럼 그 사람은 수가 아니라 공인가?”
“공은 뭐고 수는 또 뭐냐?‘
“아, 공은 공격적인, 수는 수용적인 혹은 수동적인 뭐 이런 비슷한 뜻이 아닐까 하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어. 전문용어랄까. 후”
원은 맥주를 또 한 모금 마신다. 원은 술을 싫어하는 편이지만, 마시면 많이 마신다.
“내가 들은 바로는, 게이도 모든 남자를 좋아하는 게이가 있고, 딱 한 사람 때문에 게이가 되는 사람도 있대. 여자를 만나는데 거부감이 없는 걸 보면 아마도 기석 씨도 딱 한사람 때문에 게이가 된게 아닐까 싶다.”
“그 사람이 누굴까. 갑자기 궁금해지네.”
수련도 맥주를 마신다. 마신다기보다 들이켜고 삼키고 있다고 해야할정도로 조금 급하게 마시고 있다.
“오랜만이다. ”
“뭐가?”
“이렇게 너하고 나하고 마음 턱 놓고 이야기 하는 거 말이야.”
“그래.”
수련은 대답을 해놓고 어떤 말을 덧붙일까 고민이 되었다. 나 때문에 내가 바빠서 그랬지 미안해 라고 이야기를 해야 하나, 예전처럼 지낼 수 없다는 것에 마음이 너무 걸려서 만나는 것도 껄끄러워서 그랬다고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사실대로 말하고 싶다. 마음속에 있는 말이 간질간질 심장을 간지럽힌다.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은 온전히 믿어주는 원이니까. 그 동안 꽁꽁 숨겨 논 이야기를 하고 싶다. 술의 힘을 빌어 이야기 해볼까. 하지만 원은, 누구보다 도덕적인 사람이었다. 초등학생일 때부터 수련이 잘 못하는 게 있으면 언제나 또박또박 원인과 결과를 따져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던 아이였다. 원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늘 그 자리를 지켜주었지만, 원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다. 부끄럽다. 이해 못 해줄지도 모른다. 날 미워할지도 모른다. 내게는 엄마 같은 아이였는데. 결국 수련은 덧붙이지 않고 말없이 맥주를 들이킨다.
“ 수련아. 미안해.”
원이 말을 꺼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은데, 듣고 싶지가 않다. 아니 들을 수가 없다. 듣게 된다면 ...................
“뭐가?”
수련은 이번에도 대답을 길게 하지 못한다. 무슨 말인지 듣게 된다면 울어버릴 것 같다. 그냥 원이 미안하다는 그 한마디 말을 했을 뿐인데도, 그 마음이 전해져버려 수련은 벌써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무슨 뜻인지 알았다. 뭐가 미안한지 알아버렸다. 하지만, 이야기 해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다.”
휴, 수련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래 니가 말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아. 하지만 미안해 할 것은 없잖아. 이건 내 인생이니까. 아무리 니가 나를 좋아해주고 아껴주는 친구라고 해도 내 인생이 이런 걸 어찌 해줄 수는 없는 거야. 수련은 말 없이 대답해준다. 둘 사이의 긴 침묵이 흐른다. 원은 캔맥주를 두 개 째 비우고 다른 것 하나를 딴다.
“너 많이 마셔도 괜찮아?”
수련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다.
“딱 이만큼만.”
“응?”
“우리 둘 사이가 딱 이만큼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테니까. ”
그 말에 수련은 석상이라도 된 듯 굳어진다. 그래 나도 그 걸 바란 건 아니었어. 중얼거린다. 전처럼 서로를 챙겨주고, 같이 울어주고, 가슴 속에 있는 먼지 한톨까지 보여주고, 먼지들을 떨어내려 서로가 서로를 털어주고 세탁해주는 그런 일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 나는 이제 너에게 할 수 있는 말보다 할 수 없는 말이 더 많으니까.
“그래. ”
“내가 미안해 하는 게 너에게 짐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뿐이야. 너는 너의 인생을 살고 나는 나의 인생을 살고 있지. 우리 둘이 가끔 이렇게 점이 되어 만나는 순간이 있다고 해도 너는 너의 선 속에서 나는 나의 선속에서 앞으로 나가고 있는 거니까. 내가 너를 아낀다고 해서, 너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네가 안쓰럽다고 해서 네게 짐이 되고 싶지는 않다. 미안하다는 말도 괜히 한 듯 싶다.”
하, 하면서 원은 고개를 딴 곳으로 돌린다. 술을 더 마신다. 마구마구 술을 들이 붓는다. 원이 고개를 숙이자 안주가 원을 쳐다본다. 너는 나를 손도 대지 않은 채, 왜 나는 신경도 안써주냐. 이런 빌어먹을 하면서 째려본다. 하지만 안주를 입에 넣고 씹어댈 기분이 아니니 니가 이해해라. 원은 이야기한다. 수련이 말이 없다. 말이 없으니 기분이 더 요상하다. 울렁울렁거리고 확 기분이 상하려고 한다. 원은 화가 버럭 나서 소리를 질러버린다.
“왜, 니가 나한테 죄 지은 것도 아닌데, 왜 그러는 건데?”
“원아. 나는 너를 친구라고 말하기 미안한, 그런 입장이야. 니가 알고 있듯이 나는,”
술기운에 풀이 죽은 수련과 술기운에 활활 끓어오른 원의 대화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그래. 너 몸판다고. 창녀라고. 그래서, 나랑은 친구 하면 안되는 거야?”
수련은 역시 말이 없다. 술을 마시자, 그간 도망치려고 했던 우울이 덮친다. 검은 구름이 수련의 마음 속으로 가득히 메워있다. 곧 우르르 쾅쾅 하면서 비가 쏟아질 것 같다.
“나, 창녀가 되고 싶었어. 고 3때 부모님 이혼하시고, 공부는 해야 하는데, 참고서는 사야하는데 학교에서 돈은 가져오라는데, 선생님들은 고3이니까 너희 부모님들이 신경 많이 써주시지.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해야 한다. 라는 말 들을 때마다 참 내 상황이. 우습더라. 참고서 살 돈 없어서 아빠한테 가면 아빠는 엄마한테 돈 다주고 나갔으니까 엄마한테 가서 타 써라. 하지. 엄마한테 가면 너는 공부해서 대학갈 생각하지 말고 졸업하고 돈이나 벌어라. 여자가 대학가서 뭐하니. 그리고 난 돈 있어도 너한테 줄 생각은 없다. 너희 아빠한테나 가서 괴롭혀라. 엄마가 이혼해서 뭐 먹고 살겠니 돈이라도 있어야지. 하면서 둘이 나를 이리 밀고 저리 서로 떠미는데 나는 내가 무슨 탁구공인줄 알았어. 참고서는 커녕 밥 먹을 돈도 없어서 굶는 적도 많았는데, 아르바이트 같은 건 해본적도 없고 사람도 제대로 못 사귀는 내가 그런 거나 할 수 있을까 하면서 무서워하기만 했지. 아무도 날 신경써주지도 않고, 학생신분으로 아르바이트 해봤자 고생만 더럽게 하지 돈도 몇 푼 못버는 걸. 차라리 너처럼 그 길로나 빠질까. 정말 그러고 싶었어. 정말. 그냥 쉽게 살고 싶었어. 그렇게 한다고 해도 누구도 나를 손가락질 하지 않을 것 같았어. 근데, 너 때문에 못했어.”
원은 맥주를 입에 퍼 넣는다. 급히 넣는 바람에 반쯤은 입가 주위로 흐른다. 옷 소매로 아무렇게나 쓱 닦는다.
“네가 욕 먹을까봐. 너 같은 친구 사귀어서 내가 그쪽 길로 빠졌다고 사람들이 너를 손가락질 할까봐. 혹시나 엄마가 너한테 찾아가 내 딸 망쳐놨다고 머리채라도 휘어잡을까봐. 거봐라, 저런 애 만나면 못쓴다고 몇 번이나 누누이 일렀니. 하면서 너를 몹쓸 전염병을 옮기는 애로 쳐다보듯 할까봐. 그래서 가슴 찢어져서 너덜너덜한 너를 다시 칼로 박박 긁어놀까봐서 그러질 못했어. 니가 고 3때 술 마시고 나 자취하는 데 찾아왔을 때 내가 그랬잖아. 나도 너처럼 다방 들어갈까 하고. 니가 절대로 안된다고 했지. 넌 그 때 내가 그냥 지나가는 말로 했을 거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진심이었어. 차라리 그렇게 살고 싶다고. 사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대학등록금, 밤새도록 공부해서 1등해서 장학금타도, 생활비도 만만치 않으니까. 생활비때문이라도 아르바이트를 해야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 공부를 못하고, 공부를 못하면 장학금을 못타니까. 다시 힘들지만 돈 많이 주는 아르바이트를 해야하고 그러면 공부를 더더욱 못하고. 하지만, 니가 일하는 곳에서 하루에 몇시간씩만 일하면, 등록금이며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고 싶었어. 말하지는 않지만 그런 식으로 대학등록금 내는 애도 있다고 들었어. 그러니까 나도 그런 것 쯤은 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너가 이 길에 있지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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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모두 글로 옮겼습니다.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거 였거든요.
이런 일을 하고 싶어할 수 밖에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요.
글쓰기는 감정을 표출하는 게 아니라 감정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라고 하더니.
도망치고 나니 , 마음이 후련합니다.
하,
첫댓글 재밋는데욤~
아, 재밌습니까. 감사합니다. 재밌다는 말이 힘이 납니다.. 아후~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