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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시 모음> 유종호의 '돈' 외
+== 돈 ==
신사임당은 사람 볼 줄 모른다
율곡도 사람 볼 줄 모른다
대왕 세종도 마찬가지다
사람 볼 줄 안다면
왜 나와 착한 내 친구 천수 호주머니에
돈이 없는가
한국은행은 앞으로 돈 만들 때
대왕님께 안경을 씌워 드리시오
그리고 대왕 세종께서도
큰길로만 다니시지 마시고
골목길도 다니시오
(유종호·문학평론가, 1935-)
+== 차이 ==
돈 되는 일은
말 많은 사람이 알고
돈 안 되는 일은
말 없는 하늘이 안다.
(서정홍·농부 시인, 1958-)
+== 어르신은 힘이 세다 ==
세탁물 속에서 이천 원이 나왔다
윗도리 주머니에 넣어두고 잊었던 지폐 두 장
구겨졌지만 멀쩡하다
세탁기를 돌리고 나면 가끔 주머니에서
뭉친 휴지나 지폐가 나온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젖은 종이는
메모지나 영수증으로 추측될 뿐
내용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지폐는 힘이 세다
흔들고 쥐어짜고 두드리고
거친 소용돌이를 헤쳐나오고도
또렷한 일련번호, 선연한 은박 수직선
어른의 수염 한 올 다치지 않는다
툭툭 털고 일어서는 저 올곧은 뼈대라니,
나보다 힘이 센 어른 앞에 서면
왠지 무릎을 꿇고 싶다
등을 구부리고 돈을 만져본다
서슬이 퍼렇다
어르신 두 장 공손하게 지갑에 모신다
(김진기·시인, 1937-)
+== 돈탑을 쌓다 ==
돼지 배를 갈랐다
누런 기름 낀 창자처럼
와르르 쏟아져 나온 동전들
세고 또 세었다
마이산 탑사(塔寺)의 돌탑들처럼
천 원씩, 오천 원씩
오와 열 맞춰가며 나란히 나란히
돈탑을 쌓았다
손가락 끝에는 새까맣게, 소원하던
돈때가 끼고
허전해진 마음 한 끝에는 슬몃
돈독이 올랐다
육보시 돼지를 잡은 날
네 식구가 오롯이 모여앉아
하루 저녁 배불리 뜯어먹었다
복돼지, 껍데기만 남아서도
부처님 웃음을 물고 있었다
(이영혜·시인)
+== 긍정적인 밥 ==
시(詩) 한 편에 삼만 원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함민복·시인, 1962-)
+== 작은 보따리 ==
참으로 작은 보따리를 가지고
이곳까지 잘도 살아왔다
얼마 되지 않는 지식
얼마 되지 않는 지혜
얼마 되지 않는 상식
얼마 되지 않는 경험
얼마 되지 않는 창작
얼마 되지 않는 돈
실로 서투른 판단과 행동을 가지고
용케도 이곳까지 살아왔다
이제 머지않아 이곳을 떠나려니
아무런 후회도 없다
어쩌면 이렇게도 고마울 수 있으랴
어쩌면 이렇게도 고마울 수 있으랴
(조병화·시인·1921-2003)
+== 돈의 권세를 꺾어 주소서 ==
돈의 힘이 너무 강하여
하나님이 아니 계시는 듯
믿음도 사랑도 느껴지지 않나이다.
돈이 사람을 부리고 하나님 위에 서서
군림하는 세상이오니
하나님이 참으로 계시다면
돈의 권세를 꺾어 주소서.
(박재순·신학자)
+== 돈이 하는 말 ==
당신은 나를 손에 쥐고 '내 것'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내가 당신을 '내 것'이라고 부를 수 있지도 않을까요.
내가 얼마나 쉽게 당신을 지배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나를 얻기 위해 당신은 양심과 명예심을 쉽게 내팽개치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불사하지 않습니까?
나는 비처럼 값을 헤아릴 수 없고 물처럼 중요합니다.
내가 없어 죽는 사람도 있고 문을 닫는 기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누구를 살리고 죽일 힘이 없답니다.
당신의 욕심이라는 도장이 찍히지 않으면 나는 아주 무익합니다.
당신이 나를 데려가지 않으면
나는 아무 곳에도 갈 수 없습니다.
나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어울립니다.
나 때문에 사람들은 실망하고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비웃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성스러운 일에 쓰여지기도 합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교육비로,
굶어 죽는 사람들을 위한 식비로 쓰여지기도 합니다.
나를 손에 쥐는 사람이 누구이냐에 따라
나의 힘은 참으로 무시무시해집니다.
나 때문에 한 집안이 망하기도 하고
나라와 나라 사이에 싸움이 붙기도 하지만,
역시 나로 인해 생기 있고 건강한 사회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나를 신중하고 지혜롭게 사용하세요.
그래서 나의 종이 되지 않도록 하세요.
(레이 존스)
+== 돈과 흙 ==
하루에도 몇 번은
돈을 세거나 만지작거리는
그 손으로 흙을 마지막으로
만져본 게 언제였나.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척 오래됐다
보드랍고 편안한 흙의
느낌을 까맣게 잊을 만큼.
참 부끄럽고
염치없는 일이다
머잖아 내가 돌아갈
생명의 본향을 모른 체하다니.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