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16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19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20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신뢰 프로세스
요즘 묵상을 하면서 논어를 자주 인용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논어를 많이 인용하고 되새김질 하고 싶습니다. 60년이 넘는 어린 시절에 논어를 처음 대하고 공부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오래 동안 논어를 대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살이에 힘들어서 논어를 공부할 새도 없었고, 또 제 전공과 많이 달라서 별로 관심을 두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2006년부터 묵상을 시작하면서 신부님들의 권유도 있었고,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논어의 가르침이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너무 많아 제 묵상에서 논어를 인용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논어를 이용해서 묵상하고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논어의 본문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얼마나 기억력이 나빠졌는지 천자문도 다 잊어버렸으니 이제 정말 별 볼일 없는 노인이 되었나 봅니다. 묵상을 하면서 기억을 더듬어 문장을 찾고, 한 글자 한 글자 옮기면서 옛 기억을 더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복음의 말씀을 해석해 가는 과정에서 주님께서 왜 그런 가르치심을 주시고자 하셨는지 묵상하려고 애씁니다. 조금 생소하게 느끼실지 몰라도 저와 같이 논어도 공부하실 겸 논어 인용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논어의 자한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왈 ; 주충신, 무우불여기자, 과즉물탄개’ (‘子曰 ; 主忠信, 毋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충성과 신의를 위주로 하고, 자기만 못한 사람을 벗하지 말 것이며, 허물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고쳐라.”
요즘 신뢰프로세스 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남북관계에서 이 말이 가장 우선시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신뢰프로세스는 모든 사람들이나 공동체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원전부품도 그렇고, 남북관계도 그렇고, 정치가들의 공약도 그렇고, 모든 계약과 거래뿐만 아니라 먹거리 등 신뢰프로세스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래 전 원전부품의 납품비리는 4천5백만 원을 착복하기 위해서 2조5천억 원의 손해를 발생시켰다고 하니 이런 신뢰프로세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좋겠습니까? 가짜가 판을 치고, 짝퉁이 세상을 현혹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위약금의 문제나 환불의 문제 등 우리 주변에는 신뢰프로세스의 문제로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신뢰프로세스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신뢰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공자는 충성과 신의를 위주로 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충성은 하느님 사랑과 사람 사랑의 중심에 하느님을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생활을 할 때 충성입니다. 그러면 신뢰의 과정은 저절로 형성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의를 위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이 되지 않기 때문에 부정부패와 불의가 세상에 판을 치는 것입니다. 신뢰가 생기지 않고 불신이 만연한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삶의 중심에 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자기만 못한 벗과는 사귀지 말라고 한 말은 충성과 신의를 위주로 하지 않는 벗과 사귀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생각한다면 이 세상에 사귈 사람은 하나도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살고 계시니 그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귀면 진실로 모든 사람과 벗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겸손한 사람만 된다면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짓 예언자들이며 상종할 수 없는 사람들과는 사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양의 옷차림을 하고 게걸스런 늑대들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양두구육(羊頭狗肉)이라는 고사성어에서 처럼 양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으로, ①겉은 훌륭해 보이나 속은 그렇지 못한 것과 ② 겉과 속이 서로 다름과 ③ 말과 행동(行動)이 일치(一致)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신뢰프로세스는 허물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고쳐 나가는 과정을 잘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지난날의 과오를 알면서도 반복한다면 신뢰는 구축되지 않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이 그동안 잘못했던 사실을 반성하고 그 즉시 고쳐 나가면서 새로운 과정을 만들어갔다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타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부터 새롭게 하느님 중심으로 충성스럽고 신의를 위주로 살았으며, 잘못된 것을 알고 그 즉시 고쳤더라면 가시나무에서 포도가 달리도록 접을 붙여 주셨을 것입니다. 아직도 양두구육으로 모든 사람들을 속이고, 거짓 예언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사람들을 어찌 본받으라고 하시겠습니까? 우리도 그 사실을 알면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올바르게 고쳐 나가야 합니다. 잘못된 습관과 버릇에서 벗어나 정도(正道)를 찾아 새롭게 시작하는 자세로 우리의 생활을 고쳐야 합니다. 내 삶의 중심에 하느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신뢰의 프로세스를 만들기 위해서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지금 남북관계에서 우리가 가장 걱정하는 것이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과연 그대로 지켜 나가면서 북한 백성들을 위해서 평화를 심어주고, 핵무장을 해제한다는 약속을 지킬 것이며, 인권을 회복시켜주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희망을 걸어도 될 것인지에 대한 신뢰의 문제입니다. 그들이 그동안 우리와 모든 세계 사람들에게 신뢰를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임 대통령들에게서 신뢰심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실망한 것과 같이 우리도 다시 북한의 정치가들에게서 신뢰를 찾지 못하면 큰 상처를 입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