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의 기초가 되는 플랫폼은 수많은 모델의 뿌리가 될 뿐 아니라 메이커의 운명을 좌우한다. 21세기,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들의 인수합병과 함께 화두로 떠오른 플랫폼 공유. 플랫폼 당 100만 대, 전체 400만 대 이상의 차를 만드는 메이커만 살아남는다는 말은 플랫폼 공유에 총력을 쏟아 붓는 메이커들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준다 글 | 임유신
새로 나온 쏘나타의 플랫폼. 자동차 개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플랫폼은 한번 만들어놓으면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아우디 A4, 하나의 플랫폼에서 나온 차들이다
폭스바겐 파사트, 모두 하나의 플랫폼에서 나온 차들이다
슈코다 옥타비아는 하나의 플랫폼에서 나온 차들이다
하나의 플랫폼을 갖고 세단, 해치백, 왜건 등의 다양한 모델을 뽑아낼 수 있다. 사진은 GM대우의 라세티
하나의 플랫폼을 갖고 세단, 해치백, 왜건 등의 다양한 모델을 뽑아낼 수 있다. 사진은 GM대우의 라세티
어코드
혼다는 어코드플랫폼을 이용해 럭셔리 디비전 어큐라의 TL
세단인 아반떼 XD. 전혀 다른 세그먼트에도 플랫폼 공유는 이루어진다
SUV인 투싼. 전혀 다른 세그먼트에도 플랫폼 공유는 이루어진다
언제부터인가 세계 자동차 시장은 몇 년 내로 6개 메이커만 살아남는다는 말이 떠돌았다. 자동차 관련 기사에 세계적인 메이커들의 인수합병이 자주 오르내리면서 더불어 등장한 말이 ‘플랫폼 공유’. 자동차 전문지의 비교 시승기에서는 생판 다른 두 차가 나와 형제차니 쌍둥이차니 하며 강한 유대감을 뽐낸다. 새차 소식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모터쇼 기사에는 ‘어떤 차가 무슨 플랫폼을 썼다’는 식의 계보 밝히기가 빠짐 없다. 플랫폼 공유는 거대 메이커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먼 나라 얘기가 아니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싼타페와 그랜저 XG, 트라제 XG 등은 바로 EF 쏘나타의 플랫폼에서 나온 차들. 소형차가 나오면 으레 해치백 버전이 더해지는 것도 플랫폼 공유의 한 단면이다. 대우와 삼성이 외국 메이커 밑으로 들어가면서 국산차의 플랫폼 공유는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질 전망이다.
개발비용 줄이는 최선의 방법 자동차는 크게 어퍼보디와 프레임, 섀시, 언더보디로 나뉜다. 어퍼보디는 차의 외관에 드러난 부분으로 승객과 엔진, 화물을 감싼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동차 보디가 어퍼보디다. 프레임은 차의 기본 뼈대를 이루는 골격으로 보네트와 도어, 트렁크, 인테리어 등을 뺀 상태의 구조물이다. 보디와 부속품을 뺀 부분을 섀시라 하고, 여기에는 엔진과 트랜스미션, 스티어링 장치, 브레이크 등을 포함한다. 언더보디는 보디의 밑면으로 뒤 서스펜션과 디퍼렌셜 등으로 구성된다. 플랫폼이라 하면 사전적 의미로는 ‘기반’을 말한다. 자동차에 있어서 플랫폼은 명확하게 규정된 정의가 없지만 보통 섀시와 언더보디 부분을 가리킨다. 플랫폼 공유라 하면 이 부분을 함께 쓰는 것. 플랫폼의 변형은 언더보디 사이즈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같은 플랫폼으로 여러 차를 만드는 이유는 원가절감 때문이다. 개발비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플랫폼을 같이 쓰면 개발비뿐 아니라 부품 공급비용을 줄일 수 있고 생산공정도 간단히 만들 수 있다. 또한 생산 후 애프터서비스나 보수, 부품관리 등 폭넓은 분야에서 비용을 아낄 수 있다. 플랫폼 통합이 가속화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첫째, 자동차 생산비에서 부품과 소재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져 통상적인 수익 기준이던 차종 당 연산 25만 대, 모델 주기 4~6년으로는 채산성 확보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 둘째, 메이커간 경쟁이 심해져 글로벌 생산망을 확보하기 위한 원가 경쟁력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셋째, 세계적으로 강화되고 있는 환경 및 안전규제를 만족시키기 위한 새차 개발비용 부담이 커지고 있다. 플랫폼 통합에 가장 성공했다는 평을 듣고 있는 폭스바겐은 아우디와 스페인의 세아트, 체코의 슈코다를 인수하면서 승용차 플랫폼을 단 3개로 줄였다. 우리나라 현대-기아의 경우 합병 당시 합친 플랫폼이 무려 24개. 검토 결과 플랫폼을 7개로 줄여도 모든 라인업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EF 쏘나타와의 플랫폼 공유로 태어난 옵티마는 개발기간 20개월에 투자금액 2천200억 원으로 모두 4천500억 원이 들었던 EF 쏘나타의 절반밖에 안 썼다.
다양한 모델로의 변신 플랫폼 공유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형제차 만들기는 디비전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 거대 메이커들이 주로 쓰는 방식. 디비전마다 라인업을 채우는 데 효과적이다. 디자인을 달리하고 엔진과 파워트레인, 서스펜션 세팅 등을 손봐 성격이 다른 차를 만들어낸다. GM의 시보레 말리부, 뷰익 센추리, 올즈모빌 인트리그, 폰티액 그랑프리는 모두 한 뼈대에서 나온 차들. 플랫폼 공유는 보통 한 개 메이커 또는 그룹 내에서 이루어지지만, 로터스 엘리제를 바탕으로 태어난 오펠 스피드스터처럼 다른 메이커 사이에 오가는 경우도 있다. 모델 다양화는 한 개의 차로 스타일을 달리할 때 쓰는 방법. 세단형을 기본으로 해치백이나 왜건, 쿠페, 컨버터블 등을 만들어낸다. 해치백의 뒤를 늘려 노치백을 만들거나 세단을 왜건으로 바꾸기도 한다. 해외의 경우 도요타 캠리와 솔라라처럼 세단을 2도어 쿠페나 컨버터블로 바꾸는 경우가 흔하다. GM대우의 라세티는 세단 바탕으로 해치백을 만들고 왜건까지 더했다. 이들은 기본 스타일이 비슷하면서 용도에 맞게 차체를 줄이고 늘린 형제 모델들. 이와 달리 완전히 다른 차로 변신하기도 한다. 현대 티뷰론은 아반떼의 쿠페 버전이라 할 수 있지만 완전히 다른 차가 되어버렸다. 업그레이드는 기본 모델을 바탕으로 윗급의 차를 만드는 것. 흔히 럭셔리 디비전을 따로 갖고 있는 메이커들이 주로 쓰는 방법이다. 렉서스의 ES330은 도요타 캠리를 기본으로 한 것이고, 혼다 어코드는 어큐라 TL로 팔린다. 럭셔리 디비전이 없더라도 한 메이커 안에서 비슷한 크기의 차를 고급화하기도 한다. 쏘나타를 고급화한 그랜저 XG가 그런 경우. 한편 세단 바탕의 SUV 등, 완전히 다른 세그먼트로 변형시키기도 한다. 혼다 CR-V는 시빅을 베이스로 했고, 현대 투싼과 기아 스포티지는 아반떼 XD로부터 나왔다. 플랫폼 공유는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 메이커의 입장에서는 개발비를 큰 폭으로 줄이면서 새차를 만들 수 있다. 여러 개의 디비전을 거느리고 있다면 디비전별 모델 늘리기에도 유용한 수단. 비록 뼈대는 같더라도 디자인과 엔진, 트랜스미션, 서스펜션 세팅 등을 달리하면 얼마든지 개성이 다른 차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속은 그대로 둔 채 껍데기만 바꿔 새차로 내놓는다면 기본적인 주행특성이 같은 모델들의 개수만 늘어날 뿐, 실질적인 선택의 폭이 줄어드는 단점이 있다. 여기에 플랫폼 공유를 통한 비용절감 효과가 차값에 반영되지 않는다면, 소비자들에게는 이래저래 반갑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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