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갑사..일주문..
갑사(甲寺)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산인 마곡사의 말사로 계룡갑사·갑사·갑사사·계룡사라고도 한다. 창건연대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420년(백제 구이신왕 1) 고구려에서 온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는 설, 556년(백제 위덕왕 3) 혜명대사가 창건했다는 설,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혜명대사가 중창했다는 설이 있다. 679년(문무왕 19)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건물 1,000여 칸을 짓고 계룡갑사에서 갑사로 바꾸어 화엄대학지소로 삼았으며, 이때부터 화엄10찰의 하나가 되었다.
1579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건물이 모두 불타버리고, 1654년(효종 5) 사정·신휘 등이 중수했고,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강당·대적전·천불전·응향각·진해당·적묵당·팔상전·표충원·삼성각·종각·요사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공주 갑사 철당간(보물 제256호), 공주 갑사 승탑(보물 제257호), 갑사동종(보물 제478호), 월인석보목판(보물 제582호) 등이 있다
갑사 내려가는 길 초겨울 정취가 완연하다
계곡길에 만난 이끼먹은 돌
물과 이끼먹은 돌
갑사 하산길 계곡
오랜시간 물흐름에 의한 이끼먹은 돌..고드름이었다면 좋아는데
갑사와 연천봉 갈림길
처음보는 현수막. 돌탑쌓기가 불법인 것을 이 현수막을 보고 알게된다..아리숑
민초들의 애환이 짙게 스려있는 소나무..먹거리가 없어 니무 속껍질을 먹든가 아니면 송진 채취를 위해 상처를 낸것..청송 주왕산에서 보고 이곳에서 또보니 민초들의 고달픈듯 민초들의 생활이 그려진다. .주왕산 아름더리 소나무 다수였는데 다행히 이곳은 한곳이구나..
갑사에서 연천봉과 금잔듸고개(남매탑에서 조금 밑쪽에 있고 더 넒은 공간이다) 갈림길인 삼거리
불공 기도효험이 신비로운 약사여래 암자 옆 작은 폭포
갑사 석조 약사여래입상 앞에 있는 용문폭포
갑사..본사 마곡사의 말사..갑사 대웅전 직전에 있는 약사여래불..기도 영험이 신비로운 곳이다. 갑사 석조여래입상
갑사 대웅전...다른 산사의 절집에 비해 대웅전 앞쪽 탑이나 석등 그리고 나무가 없는 빈 터이..화재가 난 것인지 꼭 있어야 할 석탑이 없는 것이 아리숑하다..웬지 대웅전으로서 낮설은 느낌..
조선조 고종때 중창하고 지금에 이른다.
계룡산 갑사 전경
갑사(甲寺)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산인 마곡사의 말사로 계룡갑사·갑사·갑사사·계룡사라고도 한다. 창건연대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420년(백제 구이신왕 1) 고구려에서 온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는 설, 556년(백제 위덕왕 3) 혜명대사가 창건했다는 설,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혜명대사가 중창했다는 설이 있다. 679년(문무왕 19)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건물 1,000여 칸을 짓고 계룡갑사에서 갑사로 바꾸어 화엄대학지소로 삼았으며, 이때부터 화엄10찰의 하나가 되었다.
1579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건물이 모두 불타버리고, 1654년(효종 5) 사정·신휘 등이 중수했고,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강당·대적전·천불전·응향각·진해당·적묵당·팔상전·표충원·삼성각·종각·요사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공주 갑사 철당간(보물 제256호), 공주 갑사 승탑(보물 제257호), 갑사동종(보물 제478호), 월인석보목판(보물 제582호) 등이 있다
계룡산 갑사 전경
계룡산 갑사의 사리탑인 부도탑..갑사의 승탑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계룡산 갑사 일주문 가는길.가을 단풍이 필때면 아름다운데..갑사는 황매화로 봄철 출사분들이 많이 찾는다. 갑사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오리길이고 거을이면 단풍으로 아름답다
갑사 일주문 가는길에 만나는 괴목대신제..갑사의 역사와 함께한다.
괴목대신재 안내도..수령이 몇년이나 될지
계룡산 관음봉에서
계룡산 삼불봉에서
게룡산 남매탑 8경의 월광은 8경인데 역광으로 햇살을 잡는다
계룡산 남매탑
계룡산 남매탑의 전설
이상보의 ‘갑사로 가는 길’(이상보) 속 남매탑 전설
때는 거금(距今) 1400여 년 전, 신라 선덕 여왕 원년인데, 당승(唐僧) 상원(上原) 대사가 이곳에 와서 움막을 치고 기거하며 수도할 때였다. 비가 쏟아지고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천지를 요동(搖動)하는 어느 날 밤, 큰 범 한 마리가 움집 앞에 나타나서 아가리를 벌렸다. 대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눈을 감은 채 염불에만 전심하는데, 범은 가까이 다가오며 신음하는 것이었다. 대사가 눈을 뜨고 목 안을 보니 인골(人骨)이 목에 걸려 있었으므로, 뽑아 주자 범은 어디론지 사라졌다.
그리고 여러 날이 지난 뒤 백설이 분분하여 사방을 분간할 수조차 없는데, 전날의 범이 한 처녀를 물어다 놓고 가 버렸다. 대사는 정성을 다하여 기절한 처녀를 회생시키니, 바로 경상도 상주읍에 사는 김화공(金和公)의 따님이었다. 집으로 되돌려 보내고자 하였으나, 한겨울이라 적설(積雪)을 헤치고 나갈 길이 없어 이듬해 봄까지 기다렸다가, 그 처자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전후사를 갖추어 말하고 스님은 되돌아오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김 처녀는 대사의 불심에 감화(感化)를 받은 바요, 한없이 청정한 도덕과 온화하고 준수한 풍모에 연모의 정까지 골수(骨髓)에 박혔는지라, 그대로 떠나보낼 수 없다 하여 부부의 예(禮)를 갖추어 달라고 애원하지 않는가? 김 화공도 또한 호환(虎患)에서 딸을 구원해 준 상원 스님이 생명의 은인이므로, 그 은덕에 보답할 길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자꾸 만류(挽留)하는 것이었다. 여러 날과 밤을 의논한 끝에 처녀는 대사와 의남매의 인연을 맺어 함께 계룡산(鷄龍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김 화공의 정재(淨財)로 청량사(淸凉寺)를 새로 짓고, 암자(庵子)를 따로 마련하여 평생토록 남매의 정으로 지내며 불도에 힘쓰다가, 함께 서방 정토(西方淨土)로 떠났다.
두 사람이 입적(入寂)한 뒤에 사리탑(舍利塔)으로 세운 것이 이 남매탑이요, 상주(尙州)에도 이와 똑같은 탑이 세워졌다고 한다.
‘공주시지(公州市誌)’ 속 남매탑 전설
옛날 백제가 망한 후 왕족이 이곳에 와서 토굴을 만들고 수도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깥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나가 보니 큰 호랑이 한 마리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그는 호랑이에게 자기를 해치러 온 것이냐고 물으니 호랑이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입만 벌리고 있는 것이었다. 무서움을 무릅쓰고 호랑이 입 속을 살펴본즉, 뼈가 입 속에 가로질러 있었다.
그가 호랑이 입에서 뼈를 빼줬더니 고맙다는 듯이 머리를 숙이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며칠이 지난 후 눈이 펑펑 내리는 밤 호랑이 소리가 나기에 나가보니 젊은 여자 한 사람을 내려놓고 달아났다. 그 여자를 방에 끌어들인 후 사연을 물어본 즉 “저는 시집을 가게 되어 혼사를 치르고 남편과 신방에서 자다가 잠깐 밖에 나왔다가 호랑이를 만났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날부터 토굴에서 함께 한 이들은 봄이 오자, 여자를 고향에 돌려보내니 부모들이 “내 딸은 어떤 인연이든지 호랑이에게 물려 죽을 것을 구해주었으니 그대가 데리고 살라”고 했다. 계룡산으로 함께 온 그들은 머리를 깎고 훌륭한 스님으로 이름을 떨치다 노승이 되어 죽었다. 이런 소문이 나자 두 스님의 높은 뜻을 살리기 위해 신도들이 석탑을 쌓았다. 두 사람의 거룩한 정신을 후세에 길이 빛내기 위해 세워진 ‘오뉘탑’은 이러한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한 채 계룡산을 지키고 있다.
용산구곡안내도
첫댓글 계룡산 갑사 일주문에서 사천왕상까지 이르는 거목의 활엽수로 이어지는 오리길은 가을이면 아름다운 단풍으로 유명한 곳이다.
(사진은 앞보이는 절집이 사천왕상이다. 초겨울이라 사람들은 없다)
덕분에 다시 오르는듯 심어요
그림 설명까지 곁드려 많은 도음이 됩니다
함께해서 즐거웠고 감사합니다
함께여서 즐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