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 달마봉(635m : 속초/외설악)
*일 시 : 2004. 9. 12(일), 한솔회원(29명), 날씨(종일 비)
*코 스 : 목우재-526봉-달마봉-635봉-(울산바위-내원암)-안양암-신흥사-소공원주차장
*소 시 : 오전 11시 05분 ~ 오후 3시 30분 → 총 4시간 25분 소요
달마대사 모습 닮은 달마봉(達磨峰)
달마봉은 신흥사(神興寺) 앞의 세심천(洗心川) 건너 동편에 솟아있는 봉우리로 해발 635m의 암봉(岩峰)이다. 산봉우리의 둥글기가 흡사 달마와 같다하여 달마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달마』라는 뜻은 달마대사의 준말로서 달마대사(達磨大師)는 선종(禪宗)의 시조이며 남인도 향지국(香至國) 왕의 셋째 아들이다.
달마 대사는 인도의 향지국 왕족 출신으로 본 이름은 보리다라이다. 부처님 전등 제 27조이신 반야다라 尊者로부터 법을 받아 달마라는 이름을 받으니 곧 28조다. 존자는 동쪽의 중국 땅에 불법의 인연이 성함을 보시고 바다 위에 작은 배를 띄우고 3년 간의 기간을 보낸 후에 중국으로 오니, 梁 무제와의 문답, 제자 혜가와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가 유명하다.
그가 남긴 <二入四行>(報怨行. 隨緣行, 稱法行, 無所求行)의 가르침을 남겼다.
報怨行은 일상생활 중 일어나는 원망과 증오, 고통과 번뇌는 모두 자신이 지은 과거의 업보이므로 감내하며 받아들여 본래의 도에 힘쓰는 일이다.
隨緣行은 인연에 순응하며 사는 일이다.
無所求行은 만물은 모두 空이므로 밖에서 추구하고 집착하는 것을 그치고 구함을 없애는데 철저히 하자는 것이다.
稱法行은 일체중생이 모두 본래의 청정함을 믿고 끊임없이 자리이타의 행을 실천하자는 것이다.
달마 대사의 정법은 혜가 스님에게 전해지니 이가 바로 제 29조 혜가대사다.
법을 전하며 후에 오조 홍인대사에게서 육조 혜능이 나오고, 이로부터 선종이 발양됨을
다음과 같은 전법 시로 남겼다.
'내가 본래 이 땅에 온 것은
법을 전해 어리석은 이를 제도하려는 것이니
한 송이의 꽃에서 다섯 꽃잎이 벌어져
열매는 자연히 이루어지리라.'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그의 가르침의 진수는 '以心傳心 不立文字'를 재 강조한데 있다.
나의 법은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느니라, 문자를 쓰지 않는다는 의미다.
以心傳心은 불교 선종(禪宗)의 용어다.
말이나 글에 의하지 않고도 불법의 심오한 뜻이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전달되는 것을 말한다. 釋迦牟尼佛이 영취산(靈鷲山)에서 8만 명의 대중을 향하여 꽃을 들어 보였을 때, 제자들 가운데 마하가섭(摩訶迦葉)만이 부처님의 뜻을 간파하고 미소를 지었다는 데서 유래한 '염화시중의 미소(拈華示衆 微笑)'라는 고사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것은 깨닫는 내용이 그대로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전수되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우화이며, 이심전심이라는 말은 이후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과 함께 선문(禪門)의 표어가 되었다. 달마봉을 바라보며 생각나는 이야기가 두서 없는 횡설수설이 됐다.
둥글둥글한 달마대사의 모습처럼 달마봉도 둥근 것이 특징이며, 달마봉에 오르면 오른쪽에 보이는 영랑호(永郞湖)의 잔잔한 물결에 달마봉의 모습이 비친다고 한다. 이렇듯 달마봉 풍경은 무엇보다도 봄에 진달래가 필 무렵과 가을의 단풍이 물들어 만산홍록(滿山紅綠)으로 변할 때 보면 볼 수록 붉디붉어 그 절경에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른다.
새벽 5시 10분.
집을 나섰다. 밤새 줄기차게 내리던 호우가 어느새 그쳤는지 페이브먼트는 막 걸레질을 마친 마루처럼 깨끗했다. 대신 소슬한 가을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하늘은 맑아지고 있다. 어제 밤 양경태-김연자 두 분으로부터 명일 산행여부에 관한 전화를 받았다. 淸濁不問, 座席不問, 日氣不問이 매니아들의 공통분모가 아니던가 싶다.
그렇게 서럽도록 흘린 눈물처럼 쏟아진 비를 무릅쓰고 동대문 주차장에 모인 일행은 9명이었다. 어제 밤을 생각하면 뜻밖의 참여다. 설악과 달마봉이 가져다 준 매력 때문인가? 누군가 먼저 인사를 건네기에 '한솔' 회원인줄 알았다. 후에 알았지만 오영삼씨 후배가 되는 박문식씨였다. 그러고 보니 '사계절'에서 만난 기억이 살아났다. 눈이 어두운 건지, 아니면 기억세포의 한계인지 자책이 앞섰다. 가끔 나타나는 실수다.
맑았던 하늘이 인제를 지나며 북쪽부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예보대로 우중산행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금년 산행의 70% 이상이 우중산행이다.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하늘은 그렇게 산꾼들을 괴롭혔다. 작년의 경우도 유사한 여름이었음이 기억됐다. 금년 여름도 예외 없이 답습이다. 오늘 하루도 山보다는 강우와의 지겨운 싸움으로 소진할 것이다.
오전 11시 5분.
속초시 목우재 들목이에 올랐다.
산행은 목우재에서 출발하여 능선을 오른 후 흔들바위가 있는 계조암 방향으로 하산하는 코스다. 시작부터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올라가는 미끄러운 비탈이다. 금강송이 가득 찬 소나무 산이다. 사방은 운무로 가득 차 시계가 짧다. 8분만에 무덤 1기가 누워있는 안부에 올라섰다. 소나무 사이로 상수리와 떡갈나무가 보인다. 80m를 직진하면 잔디가 없는 붉은 무덤이 보이는데 봉분이 풍우에 깎여 마치 야구장의 핏쳐 마운드 같다. 방치된 무덤인가 싶다.
본격적인 주능선에 올랐다.
1.5m 너비의 평탄한 오솔길이다. 빗물에 젖은 어수리, 뚝갈, 누룩치, 기름나물, 강활이 즐비하다. 붉은 물봉선 군락지대가 나오고 곰취(?), 거북꼬리가 흔연하다.
11시 22분. 오르막 소로다. 좌측에 소계류를 끼고 잠시 오르면 삼거리가 나온다. 마타리 노란 꽃이 가는 가을을 응시하고 있다. 우측 소로를 10m 오르면 경주이씨 무덤 1기가 나온다. 봉분 밑둥은 2단으로 석축을 쌓고 그 봉분 위에 잔디가 무성한 무덤이다. 봉분 토사를 방지하기 위함인가. 보기 힘든 무덤형태다.
솔밭 능선이다. 양경태씨가 연자색 산오이풀 꽃을 가리키며 "산오이풀!"하고 외친다.
관심을 가지면 보인다고 그의 시선이 꽤나 밝아졌다. 오이풀과 산오풀은 잎과 꽃 자체가 다르다. 공통점이 있다면 산중에서 화상을 입었을 때 全草를 짓찧어 그 즙액을 바르면 급한 처리는 넘길 수 있다. 능선 우측은 깎아지른 절벽이다. 운해가 깔려 시야는 좋지 않지만 그래도 운치와 낭만을 실어 보는 기회가 되어 좋았다.
송이버섯 채취꾼 한 남자가 우측 솔밭에서 무언가 열심히 더듬고 있다.
이곳은 허가가 난 송이채취지역은 아니지만 송이가 많이 나오는 곳이라고 일행 중 누군가 알려준다. 손쉬운 채취지역이라 유명무명의 채취꾼들이 많이 몰린다는 이야기다. 허가지역은 일반인들의 출입을 제한한다. 산행을 마치는 동안 세 사람의 채취꾼을 보았다. 싸리꽃이 무성한 능선이다. 항용 그렇듯 능선 길은 재미가 있어 좋다.
出世와 산에 오른다는 것.
옛 의미는 불교용어인 '出世間'이란 말에서 비롯됐다. 즉 世間을 떠난다는 뜻으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이 최대의 영광과 행복으로 알았다. 한자인 '出'은 뫼山자 위에 뫼山이 겹친 것으로 산 위의 산으로 간다는 의미다. 조선시대로 접어들며 출세, 즉 입신양명의 기회는 관리진출뿐이었다. 따라서 본래 出世라는 본 뜻이 변질되어 세속화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산에 오르는 게 진정한 의미의 출세다. 우리는 매주 한 차례 이상씩 통쾌하고 활기 찬 출세를 즐기고 있다.
우리 국토는 출세하기에 좋은 약 70%의 산을 보유하고 있다. 그것도 동, 식물이 생존할 수 있고, 물과 식량을 제공하는 실용적이며 양질의 1,000m급 산이 주류다. 이런 축복된 훌륭한 산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흔치않다. 등산의 의미가 새롭게 穿鑿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용헌 교수가 밝힌 掌文이 생각나 정리해본 거다.
磨砂가 깔린 암반 슬랩지대다. 작은 봉우리다. 우의를 벗어 넣은 지 오래다.
흐르는 땀을 주체하기란 어떤 우의도 감당하기 힘들다. 일반 우의 두 개, 1회용 우의 하나를 준비한 산행이다. 하늘은 보슬비가 내리다가 가랑비를 흘린다. 작은 산이라고 우습게 알게 아니다. 있을 건 다 있다. 까다로운 암릉도 있고, 암봉도 있다. 우중이라 암릉과 암벽지대 통과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11시 58분.
<천연보호구역>
<삼각점 1992 복구, 속초 21>
지적 경계지점이 되는 작은 봉우리다. 도락산 정상아래 과 쉰움산 정상에서 본 움푹 패인 암반 가운데 물이 고여있다. 깊이 15Cm, 폭(1m×2m)과 좁은 홈을 연결되어 위 아래로 암반 연못 두 개가 있다. 그 안에 올챙이가 노닌다. 산개구리들이 산란한 올챙이일 것이다. 카메라에 담았다. 일행들은 신기한 시선으로 모두들 한참씩 눈길을 머물곤 한다. 오늘 달마봉을 차지한 사람들은 우리 일행 18명(11명은 역 산행)과 소수의 송이꾼들이다.
12시 4분.
526봉 암봉이다.
우중의 까다로운 암봉과 암릉 좌측을 통과했다. 상당히 조심스런 구간이다.
암벽 방향으로 몸을 붙이고 통과하는 지점에서 다소 시간이 걸렸다. 오희숙씨가 열심히 후미리더의 코치를 받으며 어렵사리 통과했다. 다른 암봉에 올라섰을 때 달마봉을 향했던 선두가 되돌아 왔다. 오늘 같은 날씨와 장비 없인 달마봉을 직접 오를 수 없다는 판단이다. 달마봉 좌측 산록으로 한참 내려가 우회하자는 판단이다. 곳곳에 리본들이 보이는 것으로 미뤄 우회가 정석이다.
12시 36분.
거대한 암석으로 구성된 달마봉 아래를 지나가며 위를 바라보니 절경이다. 후미리더 최대장이 가리킨 일부 암봉을 올려다보니 가관이다. 거북이 주둥이처럼 나온 바위와 그 뒤편에는 남근상이 삐죽 나와 있다. 자연 희한한 장면을 카메라에 담으며 메모하다보니 일행 중 후미다. 이슬비에 젖은 산구절초 무더기가 맑은 소녀의 표정처럼 퍽 청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2시 40분.
달마봉을 안고 도는 중간지점 쯤 해당하는 안부에 올라섰다.
문득 돌아서서 바라보니 촛대를 닮은 바위가 起(우뚝 일어섬)한 자태다. 최근 중국이 부국강병을 위해 내건 슬로건의 하나인 '和平 起'(평화롭게 大國으로 발전함)란 용어가 생각났다. 突兀이란 용어와 비슷한 의미다. 안부에서 선두를 따라 남쪽 능선으로 내려갔다가 되돌아 올라오는 시행착오로 약 20분을 허비했다. 달마봉 우측을 감고 올라가는 오르막이다.
오후 1시 13분.
달마봉을 감고 돌아 완전 통과한 암릉 안부에 일행을 모였다. 북한산 백운대 만큼이나 거대한 암봉이 장엄한 자태다. 달마봉 정상을 올려다보는 시선이 흐릿했다. 행동식을 나눠먹는 시간이다. 황규하 대장이 어느새 頂上酒라는 이름으로 두 잔을 연거푸 권해왔다. 사방조망이 안되니 상당히 갑갑하다.
달마봉에 대한 구전가요 한 토막이다.
「달마봉에 달빛은 이 밤 나를 울리고 밤이 내린 계곡에 구름만이 흘러가죠
물소리 새소리 풀벌레소리 외로운 날 달래지만 떠난 사람 못 잊어서 잠 못 드는 이 밤에
나의 노래 실어갈 구름만이 벗이리요 산사람 사랑은 산 같은 사랑 변함 없이 주는 사랑
이 생명 진다해도 그대만을 사랑하오 그대만이 나의 사랑 한산만이 나의 사랑」
그래서 구슬프고 애닳다.
설악산이 안고 있는 봉은 수십 개다. 소개된 대체적인 <봉(峰)>에 대한 열거다.
-나한봉(羅漢峰) : 공룡(恐龍)능선에 있는 봉우리 중의 하나. 마등령(馬登嶺)과 1,275m봉
사이에 있음. 불교의 수호신인 나한(羅漢)에서 그 이름이 유래됨.
-노인봉(老人峰) : 공룡(恐龍)능선에 있는 봉우리 중의 하나. 해발 1,120m. 1,275m봉에서
희운각(喜雲閣) 방향으로 첫 번 째 나타나는 봉우리. 여기서부터 북동쪽 으로 뻗은 20개의 암봉을 천화대(天花臺)라고 한다.
-노적봉(露積峰) : 권금성(權金城) 바로 동쪽 봉우리. 토왕골과 소토왕골 중간에 있다.
모양이 곡식을 쌓아둔 형태임.
-달마봉(達磨峰) : 소공원 북쪽에 우뚝 솟은 높은 봉우리. 해발 635m. 산봉우리가 달마대사 (達磨大師)의 모습처럼 둥글둥글하다고 하여 달마봉(達磨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대청봉(大靑峰) : 다른 말로 상청봉(上靑峰), 또는 청봉(靑峰)이라고도 하는 설악산(雪嶽 山) 주봉으로, 해발 1,708m이다. 바로밑(북서쪽)에 중청봉(中靑峰)이
있고, 그 밑(북쪽)에 소청봉(小靑峰)이 있다.
청봉(靑峰)이란 명칭의 유래에 대한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의 기록이다.
<遠見只標渺而靑故指其絶頂而名日靑峰>
[멀리서 보면 아득하게 청색으로 보인다. 그런 까닭으로 그 봉우리를 가리켜서
이름을 청봉(靑峰)이라고 하였다.]
-문수봉(文殊峰) : 토왕성(土旺城)폭포를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 중의 하나. 석가모니불(釋迦 牟尼佛) 옆에 문수(文殊)보살과 보현(普賢)보살이 위치하고 있다는
불교의 설명처럼, 석가봉(釋迦봉) 옆에 문수봉(文殊峰)과 보현봉(普賢峰) 이 위치하고 있다. 일명 문주봉(文珠峰)이라고도 한다.
-문필봉(文筆峰) : 토왕성(土旺城)폭포를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 중의 하나. 모양이 붓처럼 생긴 데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미륵봉(彌勒峰) : 비선대(飛仙臺) 바로 북쪽에 높이 우뚝 솟은 큰 돌산. 마치 미륵불(彌勒 佛)처럼 우뚝 솟아 있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짐. 또는 장군의 형상 이라고 하여 장군봉(將軍峰)이라고도 한다. 중턱에 금강굴(金剛窟)이
뚫려져 있다.
-범봉 : 천화대(天花臺)의 20여 개의 봉우리 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보현봉(普賢峰) : 토왕성(土旺城)폭포를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 중의 하나. 석가모니불(釋迦 牟尼佛) 양옆에 문수(文殊)보살과 보현(普賢)보살이 위치하고 있다는
불교의 설명처럼, 석가봉(釋迦峰) 양쪽에 문수봉(文殊峰)과 보현봉(普賢 峰)이 위치하고 있다.
-석가봉(釋迦峰) : 토왕성(土旺城)폭포를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 중의 하나. 불교의 설명대 로 양옆에 문수봉(文殊峰)과 보현봉(普賢峰)이 있다.
-세존봉(世尊峰) : 마등령(馬登領) 밑(동쪽) 금강문(金剛門) 바로 위(북동쪽)에 있는 봉우리.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존칭인 석가세존(釋迦世尊)에서 이름이 유래됨.
-소청봉(小靑峰) : 대청봉(大靑峰) 바로 북서쪽에 있는 작은 청봉(靑峰).
-왕관봉(王冠峰) : 천화대(天花臺)에 있는 봉우리 중의 하나.
-육형제봉(六兄弟峰) : 양폭(陽瀑)산장 뒤로 보이는 여섯 봉우리
-중청봉(中靑峰) : 대청봉(大靑峰)과 소청봉(小靑峰) 사이에 있는 청봉(靑峰).
-진대봉 : 마등령(馬登嶺) 바로 북쪽에 입는 봉우리. 해발 1,327m, 최근에 등산객들에
의하여 붙여진 이름이 아니고, 이전부터 주민들에 의하여 불리어진 지명인 것
같으나, 요즘은 거의 망각되어지고, 지도에도 1,327rn봉으로 표기되고 있다.
-집선봉(集仙峰) : 권금성(權金城) 바로 뒷쪽(남쪽)에 연이어 있는 암봉. 수직절리의
암봉들이 밀집되어 있는 것이 마치 신선들이 모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취적봉(翠滴峰) : 토왕성(土旺城)폭포를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 중의 하나.
-칠성봉(七星峰) : 화채(華彩)능선에 있는 봉우리 중의 하나. 해발 1,077m. 남쪽 화채봉(華 彩峰)과 북쪽 집선봉(集仙峰) 중간에 있다.
-칠형제봉(七兄弟峰) : 공룡(恐龍)능선 신선암(神仙岩) 북쪽에서 천불동(千佛洞)계곡을
향하여 용소골과 작은 바위골 사이로 뻗은 여러 개의 봉우리.
-화채봉(華彩峰) : 화채(華彩)능선의 대표적 봉우리.
-황철봉(黃鐵峰) : 북주능선(北珠綾線)에 있는 봉우리 중의 하나. 남쪽으로는 저항령(低項 嶺), 마등령(馬登嶺), 공룡(恐龍)능선으로, 북쪽으로는 미시령(彌矢嶺), 신선봉(神仙峰)으로 이어진다.
계조암을 향한 능선을 오르고 내렸다. 길섶에 흰 삽주꽃이 많이 뜨인다. 되려 갑갑하다.
그랜드 캐넌을 축소한 암벽으로 이뤄진 협곡이다. 깊숙한 협곡 내리막을 바라보는 거 자체로도 달마봉의 산행은 절반 이상 거친 셈이다. 환상의 능선을 환각상태로 지나가고 있다. 한솔의 황-최대장도 그렇고, 우리 일행의 양경태씨도 맑은 날 달마봉 한번 산행을 다시 하자는 제안이다. 모두가 공감하는 표정들이다.
1시 30분.
개념도 상의 635봉을 통과했다.
肉山 능선이다. 솔밭 사면 숲에서 황금싸리버섯과 밤버섯 채취를 하는 일행들 따라 두 김연자씨들도 욕심이 생겼는지 행보가 늦춰지며 채취에 열심이다. 달마봉은 달마대사의 너른 가슴처럼 버섯분포도 다양하고 풍부했다.
1시 42분. 좌측 산록 아래 운무 속에 안양암이 언뜻 비친다.
신기루처럼 환상의 극치다. 흐르는 운무에 따라 안양암의 경관이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꿈속을 거니는 착각이다. 죽림처럼 매출한 키를 자랑하는 고밀도 송림지대다. 이제 내리막길이다. 아까부터 한솔의 서회장이 오늘 참여한 회원들을 위해 구입했다는 연락을 들었는지 물오징어회를 빨리 맛보겠다는 농담을 던지며 일행들의 행보가 다소 빨라졌다.
사거리 안부다. 우측은 학사평 저수지로, 좌측은 안양암 방명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다.
진달래, 단풍나무, 신갈나무가 자욱한 오르막 능선이다. 오늘 산행 중 마지막 오르막이다.
우천 관계로 울산바위 등정은 접기로 內約했다. 잠시 휴식하는 자리다. 금연한지 약 1개월이 되는 정재근씨의 금단현상은 야생의 포식동물처럼 엄청난 먹성으로 변했다. 어찌 보면 걸귀같이 보여 웃음이 나온다. 오희숙씨는 아예 그럴라치면 아예 담배를 피우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의다. 정상주를 마실 때나 회식장소에서 금주를 해야하는 그는 3중 고통을 겪고있다.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의지의 한계가 어디쯤이 될까 시험하나보다. 지저스 크라이스트가 겪었던 악마의 유혹과 시험으로 생각해보면 견딜 만 하지 않겠는가. 온갖 유혹을 거부하는 아픈 과정을 지켜보는 일행들의 시선도 안쓰럽기는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들은 큰 저항없이 금연을 했다는데…
노송들이 들어찬 능선이다.
이어 얕은 경사의 내리막이다. 음향기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가 지척에서 들린다.
오후 2시 26분, 계조암 아래 음식점에 내려섰다. 너른 암반에 올라 일행 9명은 기념사진을 올렸다. 예서 흔들바위가 있는 계조암은 지척이다.
繼祖庵.
울산바위 남쪽 기슭에 둥글고 커다란 목탁바위 밑 굴속에 계조암이 있다.
계조암이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수도하면 득도하기가 쉬울 뿐 아니라 조사(祖師)라고 일컫는 큰스님들이 계속해서 배출되었다고 해서 불려졌다. 일찍이 동산, 각지, 봉정 3조사가 수도 정진하였고 또 원효, 의상 2조사가 이곳에서 수도하였다고 한다. 신라 진덕왕 6년(652)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계조암은 의상대사와 원효대사가 수도를 계승하여 더욱 유명해진 고찰이다.
계조암(繼祖庵)의 바위에 새겨진 각자, 繼祖屈(계조굴)은 정조 때의 문인 윤사국(尹師國)이 쓴 글씨다. 또한 그 암면에 朴趾源(박지원)이란 이름이 눈에 띄는데, 양반전을 지어 양반사회를 풍자한 실학자로 양양부사에 있을 때 이곳에 다녀간 것으로 추측된다. 관광객들이 즐겨 등반하는 명소이며 흔들바위와 함께 일반 관광객의 단골 코스다.
계조암 앞에는 그 유명한 설악산 흔들바위가 있다.
사람이 혼자 밀어도 흔들리는 것으로 유명한 흔들바위다. 계조암은 천연바위동굴을 이용해 만든 암자이며, 흔들바위 앞에 서면 계조암 뒤로 펼쳐진 울산바위의 경관이 빼어나다
계조암을 지나 약 500m 정도 가파른 길을 올라서면 한 덩어리 바위로는 동양에서 가장 크다는 울산바위가 성벽처럼 버티고 있다. 해발 950m이고 사방이 화강암 절벽으로 곱게 다듬어 쌓아올린 듯한 거대한 돌산으로 발붙일 곳이 없이 여섯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웅장한 광경은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렵다. 그 둘레만도 4km나 된다. 808 계단의 쇠다리가 가설되어 있어 누구나 쉽게 정상에 접근할 수 있다.
울산바위는 외설악의 팔기 가운데 하나다. 산악인들이 즐겨 등반하는 암벽으로 여러 개의 암벽 등반코스가 있으며 정상에서 사방으로 펼쳐지는 설악산과 동해바다의 광경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안겨준다.
울산바위의 이름은 3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울타리 같이 생겼다하여 '울산'이라는 설과, 경남 울산(蔚山)의 지명을 딴 전설적인 이름이고, 또 하나는 울산(蔚山) 즉 우는 산이라는 뜻의 우리말을 漢字化한 것이다. 비가 내리고 천둥이 칠 때 산 전체가 뇌성에 울리어 마치 산이 울고 하늘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으므로 일명 '천후산(天吼山)이라고까지 한다는 기록이 신흥산지에 실려 있다고 한다. 신중동국여지승람에는 기이한 봉우리가 꾸불꾸불하여 마치 울타리를 두른 것과 같다하여 울산이라 이름하였다는 얘기도 전한다.
울산바위 바로 아래에서 정상까지는 바위높이만 200여m에 달하며, 30~40분이 걸리는 아주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울산바위 정상의 전망대 두 곳이 바로 옆으로 나란히 있다. 울산바위 정상에 서면 외설악 일대가 캔바스처럼 누워있다. 대청-중청봉, 천불동계곡, 화채능선, 북주릉을 아우르는 전망을 바라보노라면 도시에서 찌든 문명의 냄새가 모두 씻겨진다. 또 동해바다와 달마봉, 학사평 저수지 일대가 덤으로 다가온다. 울산바위 정상은 가을철이면 단풍으로 물든 외설악 전체를 조망하기에 좋은 위치이며, 주말이나 연휴, 피서철, 단풍철이면 관광객들로 붐빈다. 그러나 오늘은 제외였다.
2시 38분.
내원암에 앞을 논스톱으로 통과했다.
<흔들바위 0.6Km, 소공원 2.3Km>
내원암은 신라 진덕여왕 7년(653년)에 자장율사가 암자를 지어 능인암이라 하였으나, 그 후 여러 차례 중건되었고 현재의 내원암은 1914년에 중건하였다 하며, 암자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인데 일반인들에겐 공개하지 않고 보관한다는 얘기다.
소공원을 1.6Km 앞둔 지점부터는 시멘트 포장소로다. 좌측 소로 변에 과거엔 보지 못했던 신설암자가 있다. 막 단청을 마친 듯한 본당인 '법당' 현판이 보이고, 바로 옆에 요사채 한 동이 앉아있다. 현재도 공사중인 모양이다. 바로 앞에 신설 시멘트 다리가 있다. 아직 마무리가 덜된 모양인지 다리 이름조차 써넣지 않았다.
오후 3시 15분. 신흥사 앞이다.
울창한 전나무 숲이 하늘을 가린 산록에 신라시대에 창건된 외설악의 대표적인 사찰인 신흥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 3교구 본사이다. 653년(신라 진덕여왕 7) 자장(慈藏)이 창건하여 향성사(香城寺)라 하였다. 698년(효소왕 7) 소실된 뒤, 701년 의상(義湘)이 중건하고 이름을 고쳐 선정사(禪定寺)라 하였다. 선정사는 1000여 년을 번창하다가 1592년(조선 선조 25) 임란으로 9층탑이 파괴되었고, 1642년(인조 20) 완전히 소실됐다.
1644년 연옥(連玉)·혜원(惠元)·운서(雲瑞) 등이 중창을 발원하던 중, 어느 날 세 스님은 똑같이 소림암(小林庵)으로부터 나타난 신인(神人)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오래도록 3재(三災)가 범하지 않을 것이라 일러주는 꿈을 꾸고, 선정사 옛터에서 아래쪽 10리 지점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신흥사라 하였다. 1647년 대웅전을 짓고 61년(현종2년) 해장전(海藏殿)을 지어 《법화경》 등의 판본을 두었으며, 1717년(숙종 3) 불탄 설선당(說禪堂)을 다시 짓는 등 불사(佛事)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남아 있는 堂宇로는 극락보전·명부전·영산전·보제루·천왕문·일주문·불이문·적묵당·설선당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 보물 제443호인 향성사지 삼층석탑과 청동시루, 범종,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5호인 경판 277매, 사천왕상 등이 있다. 부속암자로는 내원암(內院庵)·안양암(安養庵) 등이 있다.
신흥사(神興寺) 앞에서 운무에 가린 권금성과 칠형제봉을 배경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이내 바쁜 마음으로 사찰 앞을 통과했다. 세속에 찌든 마음을 씻고 가라는 세심천(洗心川)이 흐른다. 세심천을 가르는 극락교와 洗心橋를 건너 소공원 방향으로 내려서면 좌측에 높이 18m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靑銅좌불상이 있다. 원암골, 가는골, 저항령계곡의 계류들이 합해 쌍천이란 이름으로 바뀌는 합수머리에서 일행들은 땀과 빗물을 씻었다. 가랑비는 그칠 줄 모르고 여전하다. 靑銅좌불상을 지나 소공원 너른 광장을 횡단했다.
3시 30분.
설악동 소공원 주차장은 우중을 불구하고 항상 북새통이다.
목우재를 들머리로 달마봉 정상-울산바위-계조암-내원암-신흥사를 거쳐 소공원에 이르는 7Km 거리에 소요된 산행시간은 4시간 25분이다. 버스 뒤꽁무니에 마련된 중식장소에서 산악회가 마련한 식사를 치렀다. 빗물에 젖은 음식들이 처참하게 깔려있다.
귀로에 오른 시각은 예상대로 4시 05분이었다.
차창에 비친 풍광을 바라보는 마음에 의식의 흐름처럼 세월의 흐름이 감지된다.
오전의 길을 되짚어 올라가는 귀로다. 예상대로 차량이 구간마다 지, 정체였다.
그런 와중에서 서울 전철 5호선이 통과하는 광나루역에 닿은 시각은 8시 50분이었다.
이른 서울 도착이다. 횡재라도 얻은 기분이다.
장대같이 거친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전철에 올라선 피곤한 일행들은 모두 헤어지기에 바빴다.
헤어지는 연습에 익숙한 우리들이 아니던가.
밤 9시 50분. 우장산 역에 도착했다.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 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 아버지의아버지의……… 」
李箱의 <烏瞰圖> '詩第二號'를 흥얼거리자 실타래처럼 수일 전 無價紙에 실린 비릿한 시가 생각났다. 온몸으로 이 시대의 밑바닥 삶을 직접 체험을 통해서 얻어낸 언어는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짜릿한 전율과 함께 신선하다. 그런 임희구(1965~)시인의 이야기가 만든 '어머니의 전화'는 귀가하는 콧잔등에 아린 통증을 안긴다.
「이른 아침 출근길, 전철 안에서
무심코 들여다본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표시
팔순이 넘으신 어머니의 전화번호
순간, 온몸이 경직됩니다./
이른 아침에 걸려왔던 어머니의 전화
무슨 일일까 무슨 일일까 도대체 무슨 일일까
어머니께 전화를 걸기까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기까지
온몸을 휘감아오는 싸늘한 전류… /
어머니께서 되레 내게 물으십니다.
"아까 니가 전화했었냐?" /
불안이 물러간 살 속에 그리운 어머니의 목소리가 확 퍼집니다. 」
지난 주 화요일.
태풍 '송다'가 北上중임에도 직장에서 우정 年暇를 냈다.
많은 생각들도 정리하고, 추석 전 어머니의 산소라도 볼 참이었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莫逆之友인 Y를 대동하고 억수로 퍼붓는 豪雨 속에 찾아간 무덤은 어제 밤에 나타난 악몽은 아니었다. 행여 변했을까 두려워했던 염려는 빗물에 씻겨갔다. 호우를 마다하고 낫자루를 챙겨 주변 잡목과 잡초를 제거했다. 우중등산보다 더 무거운 마음으로 40분 동안 우중벌초를 마친 후 어머니께 잔을 올렸다. 잔 속에 담긴 술은 빗물인지 눈물인지 天刑같은 무거운 짐이 되어 荷重을 더하고 있다.
그래도 임희구 詩人은 행복하다.
항상 염려스럽지만 찾아 뵐 수 있는 老母라도 계시니 말이다.
모실 수 없는 자식은 항상 원죄보다 더 가혹한 죄를 안고 살아가는 죄인이다.
耳順이 되어도 명절이 가까워 질 때면 간절하게 반복되는 회한과 더불어 나타나는 憂鬱은 귀가 길을 비틀거리게 한다. 누구나 나이를 먹을수록 어린애가 되나보다. 아니 어린애가 되어가나 보다.
오희숙씨와의 落穗같은 이야기를 나누던 전철 안 맞은 편 좌석에서 부산한 움직임과 함께 일그러진 표정의 6~7세 어린애와, 젊은 어머니의 침착한 표정이 삼삼하다. 심장병을 앓는 어린아이의 受難과 젊은 어머니가 잠자리에 들어서도 자꾸 눈에 밟힌다. 세상에는 눈이 아프도록 보기 힘든 고난이 비일비재하다. 새털보다 가벼운 그 어린 나이에…
혼돈한 자정이 가까이 오는 밤이다.
*교통 :
-항공[서울에서 양양국제공항 매일 5회(40분 소요)운항(아시아나 항공 2회, 대한항공 3회)
공항에서 설악산행 시내버스 → 종점에서 호텔 셔틀버스 이용
(대한항공 예약전화 : 1588 - 2001, 아시아나 예약전화 : 1588 - 8000
-승용차
1코스[울-영동고속도로-대관령-강릉-38휴게소-설악산입구(7번 국도)-설악산공원]
2코스[서울-영동고속도로-하진부(오대산국립공원)-진고개-금강-주문진-설악산입구(7번 국도)-설악산소공원(4시간 10분 소요)]
3코스[서울-양평-홍천-한계령-양양-설악산입구(7번 국도)-설악산소공원(4시간30분)]
4코스[서울-양평-홍천-용대리-미시령-목우재-설악산소공원 (4시간 소요)]
5코스[서울-양평-홍천-내면-구릉령-양양-설악산 입구-설악산 소공원 (4시간 30분 소요)]
강남. 동서울 고속터미널 (속초행 매 30분 간격 출발
시외버스/ 상봉. 구의 터미널 (속초행 매 30분 간격 출발)
※ 터미널에서 호텔까지 7번 버스 이용
*숙식 :
-설악동 지구(호텔 4개동:347실)
;설악파크호텔:121실 033-636-7711), 켄싱턴호텔: 109실 033-635-4001~3
설악산 관광호텔:43실 033-636-7101, 설악교육문화회관(가족호텔):74실 033-636-7540
여관 80개동3,227실, 설악산유스호스텔 1개동 87실 033-636-7115
-오색 지구 (호텔1개동:227실 033-672-8500 )
;오색그린야드호텔(가족호텔), 여관6개동:167실
-백담 지구 (민박가옥 18동 54실) ; 장수대 지구(민박가옥(한계리) 41가구 175실 )
-대피소
중청 150명 1,600고지 설악산 중 最高지대, 대청봉에서 바라보는 동해바다 일출절경
소청 95명 1,450고지 봉정암과 소청봉 중간, 6-7월중 용아장성과 공룡능선의 멋진 운해
희운각 70명 1,200고지 오색-대청-비선대 중간, 공룡능선을 縱走하려는 등산객이 찾음
양폭 60명 750고지 천불동계곡 중간에 위치, 기암절벽이 절경
수렴동 70명 600고지 계곡의 형태가 완만하고 물이 맑음
백담 130명 500고지 주변에 백담사 위치
권금성 46명 700고지 케이블카를 이용, 숙박은 하지 않으나 원두커피가 유명
*기타 :
첫댓글 매양 지난번의 흔적을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잠시갈등했던것 죄송했구요.비가와서많은아쉬움이남았었는데선생님의자상하신후기읽으며하나하나되짚어봅니다.감사드립니다
대장님의 글에는 吟遊詩人 의 모습이 진하게 베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