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머리에
나의 무용생활 어언 40여 년, 이 머리글을 쓰는 나에게는 온갖 감회가 서린다.
아직 무용이 예술로서 이 땅에 발디디지 못했던 시절에 예술에 대한 열망 하나만으로 뛰어들었던
나 자신의 모습에도 이제는 반백이 서렸다.
참으로 힘겹고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 어려움 속에서도 내가 의지할 수 있었던 하나의 희망이 있었다면
그것은 예술에 대한 순수한 열정 그것이었다.
그것이 나의 인생에 얼마나 많은 결실을 가져다 주었는지는 아직 나는 모른다.
그러나 여기 이 조그만 책이 일부나마 나의 일념의 결실이었어며,
30여 년간 손수 모아온 고지식한 결산이었음을 숨길 수 없다.
아직 우리의 전통무용이 그 자리를 튼튼히 굳히지 못한 상태이며 그에 따라 발전이나 창작도 많이
부족한 상태이지만, 나는 여기서 위의 아끼는 후배들을 위하여 나의 예술, 나의 작품만이 아닌,
우리의 예술, 우리의 작품을 위한 하나의 길을 제시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우리고유의 무용을 정말 순수한 예술로 끌어올려 모든 사람에게 공감와 아름다움을 줄수있는 삶의 청량게 역활로 남기고 싶었다.
그것이 나의 개인적인 욕심이나 만족에 끝나지 않고 우리 후배들에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기 나의 30여 년간의 작업을 부분적으로 엮어본다.
이것은 타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직접적인 수집이었어며, 우리 고유의 맛을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노력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이해하였으면 싶다.
내 열정의 작은 결산인 이 책 앞에서 나는 더욱 마음이 무거워짐을 느낀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수고하고 힘써 주신 김성재 사장님과 나의 동료들,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리며 우리 무용 예술의
발전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끝맺는다.
박금슬 선생님께서 82년 펴내신 저서 <춤 동 작>책 머리에 쓰신 글입니다.
"오늘날 김은희 라는 한 무용가를 낳게 해주신 나의 선생님 박금슬
존경하는 선생님을 기리는 자료이기에 제가 직접 쓰겠습니다."
박금슬(1922~1983)의 본명의 김길남 이었다.
예명인 박금슬은 소설가인 공초 오상순(1894~1963)씨가 지어준 이름이다.
거문고와 비파를 연상케 하는 이름이다.
선생님은 경기도 이천 소거리 에서 태어나셨으며 유복한 집안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풍족한 환경의
어린시절을 보내셨다.
강원도 백담사 근처에별장을 소유했던 부친이 곽서순 이라는 스님을 알게되어 사위로 맞았고,
이후 선생님 부부는 일본에 유학했었다.
학승이였던 곽서순 스님은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동국대 교수를 지냈어며, 한국전쟁때
납북 되셨다고 한다.
선생님 께서는 1942년 일본 청수 고등학교를 마치고 , 그 이듬해인 1943년에 일본 여자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하셨다.
유학당시 일본 근대무용의 여명을 열고 활동하든 이시이 바쿠 문하에서 춤을 사사받으셨다.
이시이 바쿠 의 문하생으로 한국에서 알려진 무용가는 최승희. 조택원.등이다.
박금슬 선생님께서 처음 만났던 춤은 이시이 바쿠의 현대무용 이였다.
1944년 귀국하신 선생님 께서는 백담사 오세암의 천월 스님에게 범패를 배웠으며
그 이후 불교는 선생님의 예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해방후 서울 와룡동에서 무용연구소를 개설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쳤어나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대구로 피난하셨다.
대구에서 선생님은 한말 여령을 지낸 관기 정소산 선생에게 궁중정재를 비롯 입춤,즉흥무,무고,검무,
승무,등등을 배웠다.
정소산 선생님 께서는 살풀이 라는 말 대신에 즉흥무,혹은 수건춤, 이라고 하셨다.
정소산 선생님은 필자<김은희>가 경북예고 재학 시절에 스승이셨던 대구의 백년욱 선생님의
선생님 이셨으므로 김은희도 잠시 백년욱 선생님 덕택에 정소산 선생님께도 직접 춤을 배운적이 있다.
부산 피난시절에는 성남여고를 비롯 문교부와 해병대 정춤감실 후언으로 문화극장에서
고전무용 발표회를 가졌다.
이때 공연된 작품은 관등무,구운몽,연화대,호접,낙화승천,사친,추억,편시춘,청춘시절,
봄놀이,국민무장,시조,춘몽,등이 있었다.
작품 제목으로 볼 때 불교적이고 서정적인 소재들로 이루어 진걸로 보인다.
전쟁이 끝난후 서울로 돌아오신 선생님은 안암동, 용두동,종암동에서 무용연구소를 운영하셨다.
1954년 시공간에서 신작 무용공연을 가졌고,1959년 공연에서 선보인 승무에서는 경기승무의 도특한 운치를 잘 표현했다고 한다.
1961년 인천 신흥강당에서의 동인무용발표회 등 꾸준이 신작을 발표했다.
1963년 한국무용협회 이사로 선임되기도 했어나 박금슬의 관심은 오로지 민속예능의 현장에 산재해 있는 토속적이고 고유한 우리춤에 쏠려있었다.
특히 불교무용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다.
범패와 작법의 명인 권수근 문하에서 나비춤,바라춤,법고,등 불교무용을 섭렵한다.
당시에는 권수근 스님이 범패의 전승자로 유일한 사람이였다.
박금슬 역시 불교무용의 맥을 이은 전승자중의 한사람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드디어 선생님 께서는 1967년 경남 밀양으로 초빙되어 오셨다.
선생님께서는 경남 밀양의 전설인 밀양아리랑을 원형 발굴 하시어 무용극을 만드셨다.
필자<김은희>가 밀양여자중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였다.
현재 무용계에 나와있는 선생님의 약력에는 밀양아리랑 원형발굴로 밀양에 오신게 1964년으로 잘못 기재되어있어 이는 정정 되어야 한다.
그때 만난 선생님은 매우 검소하고 소박하시며 인정이 많은 분이셨다.
1967년 선생님이 만드신 밀양아리랑 원형발굴의 작품에는 젊은이와 여인, 그리고 아랑, 사명대사, 사또,동네사람,거북이, 등등 40여명이 출연하였다.
대전에서 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작품배역 젊은이 역에는 국수호 선생님이 20세때 였었고, 여자 주인공은 서울에서 내려온 제자 였으며
현재 의상계의 대부이신 그레타리 선생님이 분장을 맡아 주셨다.
다음해인 필자<김은희>가 중학교 3학년때는 당시 콩쿨중에 아주 유명했던 진주 계천예술제 에서 대상을 받았었다.
그 무렵에 박금슬선생님은 고성오광대에서 춤을 배우기도 하고 가르치시기도 하시면서 춤동작 용어를 수집하셨다.
지금 고성오광대 춤사위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박금슬 선생님의 기본에 들어있는 춤동작을 찾아낼수 있다.
그리고 선생께서 배우신 고성오광대의 문둥춤을 토대로 안무하신 작품이 오늘날 박금슬 "번뇌"로 전해 지면서 김자은 스님에게 안무해 주신 작품이다.
김자은 스님은 67년 "번뇌"라는 작품으로 신인콩쿨에 입상 하였다.
나중에 선생님께서 말씀 하시길 김자은 스님의 신체 조건에 꼭 맞는 작품을 일부러 만드신것이라고 하셨다.
그말을 들었을 당시는 필자가 다시 서울에서 선생님께 공부하든 1981 년 이였다.
그리고 선생님은 1982년 서울시립무용단에서 개최한 명무전에서 "번뇌"를 추셨다.
필자가 직접 무대뒤 분장실에서 선생님을 뵈올때 선생님께서는 도저히 춤을 추실수 없은 지경에 계셨다.
교통사고로 한쪽팔에 쇠막대기가 박힌 상태였다.
그래도 무대에서는 전혀 관객이 눈치 챌수 없을 정도로 열연을 하셨다.
필자가 좀더 많이 선생님께 춤을 배울수 없었던 기막힌 사건이 발생한다.
1969년 홍콩, 싱가퐁,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미얀마,등 국위선양 차원의 동남아 순회공연을 하든중 여러가지 사정으로 귀국할 비행기표가 없을정도가 되어서 태국에서 체류하게 된다.
태국에서 체류하는 동안 선생님은 그곳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태국 국립예술학교 무용학과에서 주최한 강습회에 6개월간 참가 하기도 했고 1974년에는 UN Womens Group 주최 아시아 민속축제에 참가했으며, 1975년 국제민속경연대회에서 부채춤으로 우승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나타난 자료에서는 기획사에 사기를 당했다고 기록이 되어있어나, 필자가 직접 박금슬선생님과 함께 공연에 참가 하셨던 김광숙 선생님과 인터뷰를 한 결과 그것은 잘못된 기록인걸 확인하였다.
당시 선생님 제자로 함께 태국에 발이 묶였던 김광숙 선생님은 먼저 귀국을 하시고 선생님께서는 9년의 세월을 태국에서 보내다 건강의 악화로 1977년 고국에 돌아 오셨다.
한국에 돌아오신 선생님께서는 몸이 회복되면서 중곡동 사위집에 머물면서 제자 양구자씨의 제자였던 서희주씨가 운영하는 면목동 무용학원에서 우리춤을 지도 하셨고 청주사범대 교수인 제자 박태조 교수의 도움으로 청주 사범대학 무용교육과 강사로 나가시기도 하셨다.
내가 다시 선생님께 공부를 시작할수 있었던것도 바로 이때였다.
선생님이 안계신 9년동안 나는 경북예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계속 공부를 하고 있던중에 다시 선생님을 만날수가 있었다.
선생님은 80 년 제2회 대한민국무용제 에서 김자은 스님이 주축인 자비무용단 에 "태초"라는 작품을 안무 하셨고 이작품으로 김영동 선생님이 작곡하신 음악상과 김광숙 선생님께서 신인상을 받기도 하였다.
작품 "태초"는 86년 제3회 박금슬선생님 추모공연에서 필자(김은희)가 김광숙 선생님 역활을 대신하여 주역을 맡았었다.
선생님께서는 경제적 여건으로 하여 작품활동을 많이 하시지는 않았지만 우리춤의 기본동작을 과학적으로 체계화 시키시는일에 전념을 하셨다.
시간 날때 마다 조금씩 올릴께요...^^*
첫댓글 김은희 선생님께서 입을 여시니 우리가 모르던 박금슬선생님의 상황을 더 정확하게 알게 되는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귀한 자료를 직접 올려주시니..*^^*
이번 여름 강습회에서 과학적인 박금슬 기본을 김은희 선생님의 교습법으로 확실하게 배워야 겠어요.
김은희 선생님 날로 건강 하시고 행복 하시길 빕니다 07년 8월 님의 육성이 걸려 왔을 땐 흥분 상태여서 말미를 몾 찾았읍니다.
실버우리님.. 겨울 강습회 1차에 구경오셔요... 초보자도 가능한 강습회입니다...^^*
박금슬선생님의 존함과 그분이 남기신 기본, 춤용어,작품에 대해 여러번 듣기는 했으나 그분의 깊이있는 내용은 처음이군요!..귀한자료 감사하고 그분의 기본을 기회가 닿는다면 제대로 배워보고 싶군요...하시는 일이 꿈이...이뤄지시길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