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의 역사와 민담
머리말
한적한 강변마을이었던 이곳, 갈대밭 우거지고 물새 날던 아름다운 고장의 옛 이야기는 무엇일까? 우리는 그동안 바쁜 도시생활 속에서 항상 허전한 마음으로 몸담아 사는 우리 고장에 대하여 알고 싶은 것이 많았으면서도 무심코 지나쳐 버렸던 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무릅에 누워있는 손주에게 들려주었던 아련한 이야기 속에서, 그리고 따뜻한 사랑방이나 한여름의 원두막에서 구수하게 전해오던 좌담속에서 우리고장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자라면서 우리는 이 땅의 돌맹이 한 개·풀 한포기마저도 소중히 여겼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이야기들이 점차 사라져 버림으로써, 포근함이 없는 삭막한 도시공간에서 모든 것이 즉흥적이고 소홀히 하는 마음가짐의 근원이 되었으며,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가치마저도 가볍게 여기는 현실로 변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입니다. 물질문명의 산업사회에서 잊혀 버릴 수 있는 소중한 우리고장의 이야기들을 이제라도 채록해 놓지 않는다면 소멸될 위기에 놓여 있기에, 전해오는 향토자료를 모아 1994년 초판 발행을 시작으로, 계속 조사·발굴된 향토사료를 보강하여 1998년에 1차, 2002년에 2차 증보판을 내어 놓았으며, 더한층 충실한 사료를 더하여 이제 3차 증보판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국가적인 정사(正史)의 중요함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야사(野史)와 같은 한 지역의 민담설화 역시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제일 가깝고 우리고장에 대한 체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서민적 냄새를 풍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던 민담설화가 역사자료로서 고증이 되어 사료(史料)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정감이 서리어 있는 이야기를 찾아 구민들에게 들려줌으로써 애향심을 높이겠다는데에 본 책자를 발간하는 본래의 뜻입니다.
이책은 1부·2부·3부와 부록편으로 구성하였습니다.
1부 『각동의 민담설화』에서는 우리구 25개동(법정동 5개 포함)의 “연혁 ·지역, 유래·전설·속담·역사적 사실·
역사적 인물” 등을 순서로 동명연혁고, 양천향토지, 규장각에 소장된 양천군읍지 등 “10여종의 옛 문헌과
토착주민과의 면담,현장탐방” 등 방법으로 확보한 향토사료를 객관성을 기준으로 정리 기록하였고, 2부 『강서의 역사를 찾아서』에서는 우리고장의 역사 흐름을 김포군지 및 기타 참고문헌에서 자료를 수집, 선
사시대부터 일제시대까지 기록하였으며, 3부 『강서의 절경 소개』에서는 겸재정선의 진경산수화첩 등 제반 사료에서 우리구에 속한 작품·누정·시(詩)
등을 발췌 수록하였습니다.
부록편에서는
① 『관광자원으로 본 한강변의 사적』이란 제목으로 한양정도 600년의 역사 문화가 한강을 중심으로 이루어
져 내려오는 동안 한강 양안에 펼쳐진 수많은 문화유적과 전래전설, 역사적 사건 등을 옛 사료를 바탕으로
현장답사를 거쳐 기록하였습니다. 이 자원들이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만 있었더라면 세계적인 관광자원이 되었을 아름다운 한강, 개발이란
이름아래 땅속으로 뭍혀버렸거나 88올림픽도로 건설등으로 파괴되어 버렸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에서 기
록한 것입니다. ② 『구암 허준의 고향은 어디인가?』라는 제목으로 의성 허준(許浚)선생이 조상대대로 살아왔던 강서구에서
태어났고, 허가바위 동굴 속에서 “동의보감”을 마무리 하셨고, 이 땅에서 돌아가신 강서구 인물임을 규명
하였습니다. 허준의 고향을 연구하는 동안 많은 이들에게 격려도 받았고 또 역사왜곡의 가능성을 주의받기도 했습니
다. 그러나 다행히도 시간이 갈수록 강서구가 허준의 고향임을 알게 해주는 자료들이 추가로 발굴되는 성
과가 있었습니다. ③ 『겸재 정선의 요점정리』에서는 우리고장에 “겸재정선기념관”이 건립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밝히고, 나아
가 겸재정선의 일생을 조명하면서 시기별, 장소별, 장르별, 재질별, 규격 등으로 겸재작품의 생산내역을
개괄식으로 정리하였습니다. 또한 책자 중간중간에 본문내용과 관련하여 『뒷마당 글』이라는 공간을 삽입하여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사안들에 대해서 기록하였습니다.
2010. 12
필자 손 주 영
01 부
各洞 民譚, 說話 각동 민담, 설화
염 창 동(鹽倉洞)
1. 동 유래
염창동은 조선시대에 서해안의 염전으로부터 채취해 온 소금을 서울로 운반하는 소금배의 뱃길 어귀인 이곳에 소금보관창고(염창동 103번지 염창동아아파트 근방)를 지었기 때문에 염창동이라는 동명(洞名)이 유래되었다. 염창(鹽倉)에는 서해안과 남해안의 염전에서 모든 소금을 서해의 뱃길을 이용해서 한강 하구까지 들여오는데 이곳이 소금을 보관하기에 좋은 장소였으므로 여기에 소금을 부리고 다른 물품들은 마포까지 배로 운반되었다. 염창으로 운반된 소금은 국가용과 군사용, 그리고 일반 판매용으로 구분되어 각각 저장 보관하였는데 자염(煮鹽)으로만 제조되던 당시로서는 매우 귀한 물품으로서 전매품(專賣品)으로 지정,취급되었다. 이에 암거래도 매우 성행하였다. 암거래와 투기, 또는 운반도중 물에 녹아서 염전에서 반출한 소금의 양이 이곳 염창에 도착하면 심한 경우 1/50도 제대로 남지 않아 염창에 소속된 관원은 물론 양천현(陽川縣)의 관리들까지도 곤욕을 치루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양천현령이 염창을 딴 곳으로 이전해줄 것을 자주 요청하였으나 일제시대 때 비로소 이곳의 염창이 폐지될 수 있었다. 염창에 소금이 많을때는 소금더미에서 『임금용안을 볼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양이어서 창고 한군데 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자 上염창·中염창·下염창, 이렇게 3
군데로 나누어 각각 보관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명칭은 예전에 염창동의 웃마을과 아랫마을을 일컬었던 말에서도 확인된다.
2. 민담, 설화
(1) 지명에 얽힌 이야기
지금의 염창동은 소금배가 드나들던 염창탄(鹽倉灘)도 없어졌고, 한강변에도 많은 변화가 생겨나서 옛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몇 개의 자연부락명에서 그 옛날 염창동의 흔적을 조금씩 찾아 볼 수 있다.
① 주막거리
배를 저어온 뱃사람들이나 각지에서 모여든 소금장수들은 수중에 언제나 풍성한 돈주머니를 차고있게 마련이고 이 돈주머니를 겨냥한 주막의 주모나 방물장수들이 늘 곁에서 북적거렸다. 이 주막거리를 주막거리 염창 또는 시염창(市鹽倉)이라고 하였다. 거리의 염창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주막거리염창은 양천길 서쪽 김포·통진·강화로 가는 길목이고 동쪽은 양화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비단 소금배와는 상관이 없다 하여도 많은 사람들이 내왕했던 길거리에 위치했던 것이다.
② 장승배기
마을의 입구에 장승이 박혀있던 곳을 장승배기라 하는데,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위한 수호신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장승이 세워졌었던 곳은 현재 장@@자 써비스공장 근방? 을 일컫던 이름이다. 이곳에 서 있던 장승은 영험하기 그지없어 절손이 된 사람도 정성을 다해 이 곳에서 기도를 드리면 잉태를 할 수가 있었으나 마을제사를 지내지 않았을 때는 집집마다 흉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장승이 언제 없어졌는지 그 내력을 확실하게 알고있는 주민이 없고 다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로 일제 때까지 이곳에서 마을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장승배기는 까치재에 세워져 있었으며 웃염창과 아랫염창의 경계가 되기도 하였다.
③ 젓말
오래전부터 염창동은 소금 집산지임과 동시에 강건너 마포나루처럼 경성(서울)으로 공급되는 새우젓 집산지이며 또한 직접 새우젓을 담그는 곳(젓말)도 있었고 새우젓 독을 생산하는 도기공장도 많았다. 11개 도기공장 중에서도 손학준씨가 운영하던 광성토기공장과 손길성씨가 운영하던 광신토기공장이 유명하였다. 화곡1동의 월정초등학교와 우장산동 화곡아파트 일대에서 도기에 사용하는 흙을 많이 실어왔다. 광성토기공장 등은 현재의 염창동 현대1차아파트 일대에 몰려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치성단”이 있었던 염창산 아래인데 현재 산은 깎여 사라지고 현대아파트가 들어서있다)
(2) 전설
① 말무덤터
염창산의 동남쪽에서 마을과 이어지는 고개를 서낭당 고개라고 하였는데 옛날 이곳에 서낭당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이 산에는 궁중에서 기르던 명마를 탐낸 마부가 말을 훔쳐내어 이것에 숨겨두었으나 말이 식음을 전폐하고 마침내 숨을 거두자 마부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말을 묶었던 자리에 무덤을 만들고 장례를 후하게 치루었다는 곳으로 현재 염창동 산 20번지 현대 3차아파트 근방이다.
② 옻우물
염창산에는 옻우물이 있었는데 옻이 오른 사람이 이 물을 마시고 온몸에 바르면 씻은듯이 나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③ 증미마을(曾米마을)
소금배가 다닐 무렵의 강폭은 좁은데다가 물살마저 흐름이 빨라 배가 자주 침몰하였다. 물목이 좁아 상류에서 흘러내린 토사가 쌓여 강바닥이 고르지 못했기에 양곡을 실은 조운선(漕運船)이 가끔 침몰하였고 이 부근 사람들이 양곡을 건지게 되었다.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안동김씨 세력이 하늘을 찌르던 철종 때에는 김좌근의 애첩인 나합이 이곳에서 수륙제(水陸祭)를 올렸는데 행사가 끝나면 가마니채로 만든 흰쌀밥을 물고기 먹이로 강에 부리는 일이 자주 있었으니, 마을사람들은 이 행사가 있을 때면 구경을 하다가 쌀가마니를 물에 던지는 순서가 되면 노소할것 없이 물속 배 밑바닥에 숨어서 물속에 던진 쌀가마니를 건져올려 굶주린 배를 채우기도 했기에 쌀을 건진다는 뜻의 증미(拯米)가 증미(曾米)로 변하여 오늘날 증미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향토사학자 한종섭(韓宗燮)선생의 말씀은 우리나라 제례등 행사에서 쌀가마니채로 물에 던지는 예(例)가 없다고 하며 와전된 이야기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또한 증미마을에서는 마을의 안녕과 풍년과 평안을 빌기 위해 약 300년 전부터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산신령께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는 염창동 증미 노인정 김도신씨와 통장 김석권씨의 이야기는 아마도 아래에서 설명할 두미암 전설의 주인공인 김말손 장군의 제사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 증미산·염창산·쥐산(소엄지산: 인공폭포산)의 위치 증미산이나 염창산 그리고 쥐산은 멀리서 보면 한 덩어리의 산이었으며, 가까이서 보면 염창산을 중심으로 증미산과 쥐산이 연결되어진 3개의 봉우리였다.
<겸재 정선의 그림과 양천현의 해동지도, 광여도, 양천현지도 등을 분석한 결과> 염창동 증미마을 뒷산인 “증미산” 다음에 “염창산”이 있었고 그다음에 “쥐산”이 한강변에 나란히 있었다. 그러나 현재 산(山)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증미산』뿐이며, 염창산은 아파트 등으로 뒤덮혀 산의 면모를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후 당시 조선 총독부에서 『안양천 개수공사』를 통해 당시 선유봉 쪽으로 흘러가던 안양천 수로를 지금과 같이 염창산과 쥐산 사이로 돌려 놓음으로써, 당초에 육지로 연결되었던 염창산과 쥐산은 안양천을 사이에 두고 떨어지게 되었다. 겸재의 그림을 통해서 추정해 보면 염창동 100번지 꼭대기의 치성단 자리는 김말손 장군이 세웠다고 하는 영벽정 자리인 것으로 보이며, 염창산의 동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 강변의 그리 높지 않은 중턱에 이수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이미 그 자리는 주택지로 개발되어 현대아파트 등이 자리잡고 있어 옛모습을 찾을 길 없다. 혹시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옛누정들의 복원문제가 거론될 때 참고자료로 하기위해 상기 내용을 조사한 것인데 이수정 터는 멸실되었고 영벽정 터는 염창동 치성단 자리였으나 그 마저 현대아파트 자리로 바뀌어 버렸으니, 이로써 세월이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염창산의 북쪽 한강변에는 두미암(斗尾岩)이라는 경치가 빼어난 바위산을 형성하는데 두미암 동남쪽 줄기에 이수정, 서북쪽 줄기에 영벽정이 있었으며 이수정과 영벽정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전해오고 있으니 이에 소개하고자 한다.
④ 염벽정과 김말손(金末孫) 장군
염창산 자락 아래에 위치한 염창동은 강가의 작은 포구 마을로 이루어졌고 그 서쪽으로는 산협·평지를 이용한 농가들이 산재해 있는 비교적 한적한 마을이었다. 그런데 이 한산하고 조용하기만 하던 염창동의 下염창쯤에 뜻하지 않은 이변이 일어나면서 부터 염창산(불똥산)의 귀신바위라는 설화가 생겨나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옛날 어느 때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어느날 맑게 개인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일어나고 사방이 캄캄하여 졌다. 바람이 거세게 불고 흙먼지가 흩날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으며 나무가 부러지고 지붕이 날아갔다. 이때 마을의 한 농민이 집 단속을 하려고 밖에 나갔다가 이상한 일을 발견하고 놀라서 크게 외쳤다. 그것은 집채만한 큰 바위가 한강 위쪽에서 마을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뿌연 먼지 속이라 똑똑히 볼 수 없지만 큰 바위 덩어리인 것은 분명하였다. 모두들 뜻밖에 평생 처음 보는 일이라 놀라고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큰 일이 생길 것을 염려하는 사람도 있었다. 뒤에 들어 안 일이지만 이 바위는 한강 상류 여주땅에서부터 날기 시작하여 강을 따라 당시 양천땅인 이곳 염창마을까지 왔는데 이 바위에 귀신이 붙어서 제멋대로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것이었다. 염창동까지 와서 하늘을 빙빙 돌던 바위는 두미암(斗尾岩) 서쪽으로 가서 쾅하는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그런데 바위가 내려 앉음과 함께 그 일대에는 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즉 헐벗은 산판에 갑자기 수림이 무성해지고 나무가 하늘을 찌를듯이 높이 솟아 올라갔다. 그러자 숲속에는 또 사나운 짐승떼들이 날뛰며 울부짖기 시작하였다. 연달아 일어나는 이변에 부근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리고 당황하였다.얼마 후에 마을 사람들은 정신을 수습하여 촌장집으로 모여 급히 대책을 의논하였다. 한 노인이 천지간의 큰 변고이니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모두들 찬성하였다. 여기서 마을 사람들은 한 가닥의 희망을 가지고 바위가 내려앉은 곳으로 찾아가서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드리며 재변(災變)이 없게 해 주기를 기원하였다. 7일간을 정성을 들여 비니 그제서야 하늘이 청명해지고 울부짓던 짐승들이 조용해지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겨우 마음을 진정할 수 있었다. 몇 달이 지나 따뜻한 봄날이 되었다. 농부들이 밭을 갈기 위해 그 바위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변이 환해지더니 우르릉하고 바위가 굴러내리는 소리가 났다. 농부들이 놀라 소리나는 곳을 보니 그 바위가 굴러 한 농부에게로 달려드는 것이었다. 질겁을 한 농부가 도망을 가자 그 방향대로 바위가 따라가는 것이었다. 모두들 겁에 질려 멀찌감치 달아나고 그 농부는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온힘을 다하여 달아났다. 그러나 바위의 속력을 당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은 「악-」하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농부는 무참히도 그 큰바위에 짓눌려 죽고 말았고 바위는 멈추었다. 날벼락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소문은 강건너 한양의 용감한 김말손장군에게까지 알려졌다. 김장군은 「저런 고얀 일이 있나. 그 바위에 귀신이 붙었나보다. 내 당장가서 그 귀신을 잡아야겠다」하며 무기를 준비해 가지고 강을 건너 염창동으로 나갔다. 부하들이 만류하였지만 김말손장군은 기어코 귀신을 처단하고야 만다면서 바위있는 곳으로 갔다. 그러자 이변이 또 일어났다. 갑자기 뇌성벽력이 일어나고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김장군을 따라온 장졸들이 모두 멀찌감치 물러나서 동정만을 살피었다. 그러나 김말손장군은 겁내지 않고 바위를 향하여 꾸짖었다. 「이 요사한 돌귀신아! 어찌하여 이곳에 나타나 선량한 백성들을 괴롭히냐? 내 이제 너를 잡으려고 여기왔다」고 외치니 바위는 돌연 환한 빛을 내며 굴러서 김말손에게로 대들었다. 김말손은 「에잇-」소리와 함께 힘껏 활을 당겨 쏘았고, 화살을 중허리에 맞은 바위는 「꽝 우르릉」하는 큰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화살이 깊숙이 박힌 바위 한 가운데서는 시뻘건 피가 흘러 내리고 있었다. 바위에 의탁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고 백성을 괴롭히던 악귀는 김말손장군의 화살에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따라서 하늘은 다시 청명해지고 광풍과 뇌성도 멎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제서야 안심하고 각자 맡은 일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을의 평화는 회복되었다. 그후 부근 사람들은 김말손장군의 무공과 은공을 기념해서 바위 곁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영벽정(映碧亭)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1899년 5월에 편찬된 『양천읍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두미암은 매우 경치가 좋은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그런데 두미암에 고려시대 이래로 전라도 나주의 귀신이 래접하여 영험이 있다는 불상이 있었다. 기도하지 않으면 재앙을 받는다는 속설 때문이 이곳을 지나는 행인들이 다투어 기도를 하였으나 점차 사람들의 내왕이 끊어져 드디어 수목이 우거졌고, 중종임금 때에는 호랑이가 서식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충청병사를 지낸 김말손이 활로 석불을 쏘니 그 석불은 피를 흘리면서 그날 밤으로 강을 건너 도망을 갔다. 김말손은 그 나주석불이 있던 자리에 정자를 짓고 영벽정이라고 하였다. 김말손이 쏜 화살을 맞은 나주석불은 강 건너 지금의 성산동으로 건너갔는데 나주의 별호인 금성(錦城)이란 지명을 이 석불이 앉은 산에 붙여 금성산이라 하였기에 그 산아래 마을은 오늘날 마포구 “성산동”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귀신바위의 설화나 양천읍지의 이야기 모두가 두미암의 뛰어난 절경과 정자를 세운 동기를 말하는것이다.
3. 정자와 한시(樓亭과 漢詩)
① 두미암(斗尾岩)
김말손의 차지가 된 두미암은 강건너의 삼각산 연봉이 십리 백사장에 그림처럼 펼쳐지는 한가운데 있는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원주김씨의 세전지물(世傳之物)이 되었다. 그의 증손으로 우의정을 지냈으며 이산해(李山海)의 매제인 김응남(金應南 : 1546∼1598)은 두암(斗岩)으로 자호(自號)하여 이곳에 물러나 살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두미암집 버들숲에 잠깐 와 살며, 교거두미유음간(僑居斗尾柳陰間) 관청일 끝내고 돌아오면 문 닫아 건다. 아파귀래각폐관(衙罷歸來却閉關) 한가지 일도 하지 않고 오직 취해 누우니, 일사불영유취와(一事不營唯醉臥) 백년인생에 이몸처럼 한가로움 얻기 어렵지. 백년난득시신한(白年難得是身閑) 청명날 조금 온 비에 꽃 처음 피었으나, 청명소우화초발(淸明少雨花初發) 한식날 동풍에는 제비 아직 안온다. 한식동풍연미환(寒食東風燕未還) 집사람 구슬려 좋은 술 사왔으니, 설여가인고미주(說輿家人沽美酒) 내일아침 병든 몸 이끌고 앞산에 올라야겠다. 명조부병상전산(明朝扶病上前山)
② 이수정(二水亭)
두미암 영벽정의 동쪽 산자락 아래에 이수정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기록은 『양천읍지』누정조(樓亭條)에 나타나 있다. 염창탄 서쪽 깎아지른 절벽 위에는 옛날 효령대군의 임정(林亭)이 있었는데 그 후 한홍군 이덕연(1555∼1636)과 아우인 찬성 이덕형(1566∼1645)이 늙어 관직에서 물러나자 정자를 고쳐 二水亭이라 하였으며, 이수정에서 이덕형은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늙어서 새 정자 근교에 짓고, 임노신정축근교(臨老新亭築近郊) 옛 서울 문부상장 모두 버렸네. 구도문부상장포(舊都文簿上章抛) 시골백성 근심 바라보며, 방간전야우민사(方看田野憂民事) 즐겁게 힘써 일해 성교 따른다. 각회근로하성교(却喜勤勞下聖敎) 베개 밖의 먼 종소리 절은 가깝고, 침외소종운궐이(枕外疎鍾雲闕邇)
문 앞의 큰 나무엔 물새가 둥지를 튼다. 문전교수수금소(門前喬樹水禽巢) 물결같이 너른 대지 인가 많지만, 평임양지여염밀(平臨地閭閻密) 아득한 천년 세월 그대로일세. 봉력천추점상효(鳳曆千秋占象爻)
실제로 이곳은 안양천이 정자가 있던 두미암 산자락 밑을 감돌아 흘러들어 한강과 만나고 있으며, 이수정은 광무(光武) 3년(1899) 양천군수 박준우(朴準禹)가 양천군 읍지를 만들 무렵 이미 정자는 없어지고 터만 남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개항될 무렵까지만 정자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이수정은 안양천과 한강이 합수되는 지점에 세워진 정자임.)
③ 망호정(望湖亭)
두미암에는 영벽정과 이수정 외에도 망호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영벽정과 이수정이 있던 오른쪽의 또다른 정자인 망호정은 풍광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이어서 많은 문인들과 시객들이 시상을 찾아 모여 들었는데 이래(李來)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시를 썼다.
짙은 그늘이 땅을 덮고 구름이 비를 끌어오니 흰 김이 공중에 가로지듯 물에 연기가 끼었다.
강변이기는 하나 남·동쪽은 쉴새없이 이어진 고개들로 마치 첩첩산중인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고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로 인해 한낮이라도 컴컴한 곳이었다. 옛날 수림이 울창했던 곳의 강변을 따라 지금은 올림픽대로가 있어 차량이 질주하고 있고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엄청나게 많은 변화가 생긴곳이 염창동이다.
4. 역사적 인물
김도연 (金度演: 고종 31년 1894∼1967)
정치가, 독립운동가, 호는 상산(常山)이고 염창동 출신이다.
1894년 6월 16일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 염창리 20번지에서 태어났다
(현재 강서구 염창동 240번지 염창금호타운아파트 근방임).
1913년 일본 금성 중학교를 졸업,
1919년 경응대학 이재학부를 수료했다.
1915년 말, 겉으로는 학술연구를 표방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비밀항일 결사인 조선학회에 가입하고, 1918년
1월 간부 개선때 서기(書記)로 피선.
1919년 1월 6일 동경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학우회 주체로 웅변대회를 가장, 독립운동 방법을 숙의
하고 그 대표위원의 한사람으로 피선. 2월 8일 재일본 동경 조선청년독립단의 일원으로 독립선언식에
참여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27년 미국 콜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1931년 아메리칸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후 연희전문학교 강사로 취임했고,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함흥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고,
1945년 봄 출감했다. 광복 후 우파(右派) 진영의 한국 민주당 총무로 정계에 투신,
1946년 3월 입법의원을 거쳐 같은해 12월 과도정부 입법의원에 피선되고,
1948년 5월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재경분과위원장에 피선되고, 8월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재무장관에 취
임. 한·미 경제협정 교섭시 한국측 대표로 활약했다.
1945년 민주 국민당 최고위원으로 3대 국회에 진출. 1955년 민주당 고문에 추대, 4·5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국
회 부의장에 피선됐다. 4·19혁명후 8월 국무총리지명에 실패. 11월 민주당 동지들을 규합, 신민당 위원
장이 되었으나
1961년 5·16 군사 구테타로 의원직 상실,
1963년 11월 6대 총선에서 민주당 전국구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1965년 8월 한·일 협정의 국회비준에 반대, 의원직을 사퇴했다.
저서로는 자서전인 <나의 인생백서>, <한국 농촌경제> 등이 있다. 1964년 독립 운동 당시의 공을 기려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사진)-[토호의 집 사랑채] 전형적인 한국식 기와집
(참고) “양화리” 소개
현재는 영등포구 양화동이 되었으나 옛날 염창동이었던 선유봉(양화대교 입구)에서 인공폭포가 있는 쥐산까지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1) 쥐산(소엄지산) 이야기
한강가에 위치한 쥐산(인공폭포가 있는 산: 55.7m)은 양화도 근처에 있는 고양이산(선유봉)과 대칭되는 이름이다. 선유봉의 모습은 고양이가 쥐를 발견하여 발톱을 세우고 있는데 비해서 쥐산은 먹이를 앞에 놓고있던 쥐가 근방이라도 도망갈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해서 붙여졌다. 지금 안양천이 한강과 만나는 지점은 연꽃(蓮花)이 무척이나 많이 피어있던 연지(蓮池)로서 고려때부터 임금이 연꽃을 구경하러 오시기도 했으며 외국사신들이 즐겨찾던 경치가 참으로 뛰어난 곳이기도 하였다. 한편 쥐산에서는 분가루같은 백토가 있어 바람부는 날이면 근방 일대가 분(粉)이 날리는 것처럼 하얗다고 해서 분동산이라 하였다. 분동산에서 이어져 가양동쪽을 향한 고개턱을 남상지라 했고, 이 일대에 펼쳐진 논(畓)을 계명논이라 하였다. 염창 운영을 위해 국가에서 분배한 일종의 공전이었는데 계명논에서 나온 쌀은 윤기가 흐르고 밥맛이 좋아 부자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다툼하였다고 한다.
(사진)-쥐산 뒷부분, 일제가 공항로건설을 위해 채석장을 설치하여 파괴되었다.
(사진)-안양천의 정비된 모습, 을축년 대홍수 이후 ㄷ자 형식으로 수로를 돌려놓은 흔적이 보인다.
(2) 진주 강(姜)씨 사패지(賜牌地)
고려, 조선시대에 국가에 공을 세운 관원에게 수조권(收租權)으로 나라에서 지급하던 사전(賜田)을 사패지(賜牌地)라고 하였다. 이조 19대 숙종 임금이 당시 첨중 추부사(僉中樞府事)였던 강효직(姜孝直)에게 지금의 인공폭포가 있는 쥐산
을 사패지로 하사함으로써 진주 강씨 통계공파 32분이 모셔진 종중선형으로 오늘날까지 쥐산은 진주 강씨 통
계공파 종중땅으로 되어 있으며 현재 강서구 화곡본동에 사는 후손이 관리하고 있다. 이 곳 쥐산은 이웃하고 있는 선유봉(일명 고양이산)의 기(氣)에 눌려 32분의 선형외에는 더 이상 이곳에 모시
지 않고 있다는 속설을 간직하고 있다.
(사진)-진주김씨 사패지 (쥐산: 인공폭포가 있는 산)
(3) 선유봉(仙遊峯)
옛 양천현의 행정구역은 선유봉(仙遊峯: 신선이 놀던 곳이라는 뜻)에서 개화산 강변쪽 개화우(開花隅: 개안모루)까지였다. 인공폭포가 있는 산이 쥐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선유봉은 쥐산을 노리고 있는 고양이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일명 고양이산이라고도 불리웠었는데 선유봉은 두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졌으며 서쪽 안자락에 십여호 마을이 있었으니 양화리(楊花里)라 했다. 또한 선유봉 절벽의 경치가 아름답기 그지없어 중국 사신 이종성이 중국 황하강에 있는 저주봉과 같다고 하여 “지주봉”이라고도 불리웠던 이곳은 1930년에 일제가 대종아전쟁 수행을 위해 김포비행장을 건설하며 도로를 개설하고자 이곳 주민들을 인근에 이주시키고(이주터는 현재 양평동이 됨) 채석장을 개설하였다. 그 후 제2차대전 후에 미군이 계속하여 비행장 건설과 도로건설을 위해 본격적으로 석재를 채취, 현장에서 분쇄, 도로포장에 사용함으로써 선유봉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후 제3공화국 시절에 이곳에 제2한강교를 개설(1962. 6. 20 착공 ∼ 1965.1. 25 완공: 폭 34.1m, 연장 1.128m, 8차선)하였는데 선유봉 자리를 중간에 두고 다리를 놓았다. 지금의 양화대교이다. 또한 양화대교의 강건너 마포쪽은 잠두봉(절두산)이 있으며 절두산은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로 많은 천주교인들이 사형당한 사형장이었고 개화의 선각자 김옥균(金玉均)의 시신이 시해되기도 하였다. 선유봉의 양화나루 일대와 망원정 그리고 강건너 잠두봉 등의 뛰어난 절경으로 인해 이 근방은 시인 묵객들이 자주 찾는 경승지로 유명하였다.
(4) 『선유봉』의 전설
양화나루가 있었다 해서 동명이 유래된 양화동은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양화리였다가 1914년 김포군 양동면 양화리로 바뀌었으며 1936년 경성부 양화정이 되면서 서울지역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양화대교가 놓여있는 근방은 원래 양화진 혹은 양화도(楊花渡)라 부르던 나루터였는데 남쪽으로 가는 사람들이나 인천방면에서 육로를 통하여 서울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한강을 건너기전 마지막 휴식을 취하면서 배를 기다리던 곳이었다. 나루터 근방에는 버드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서 멀리서 보면 바람결에 날리는 버드나무가지가 마치 배를 타고 떠나는 사람을 아쉬워하며 손을 흔들듯 서 있는 풍경이어서 버드나루라 는 또다른 이름으로도 불리웠다. 안양천 쪽으로 붙어있는 나루를 작은 나루 또는 새끼나루라 했고 양화대교 근방 한강을 건너기 위해 만들어진 나루는 큰나루 혹은 어미나루라 했다. 원래는 한강쪽으로 있는 나루 한곳에서 사람들이 배를 타곤했다. 인천·강화쪽에서 오는 길손들의 짐 속에는 언제나 물화(物貨)가 가득했고 휴대한 짐의 부피도 컸다. 사공들은 천민의 신분이지만 승객들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어서 여간 횡포가 심한게 아니었다. 여기에 도강(渡江)하려는 사람들의 신분을 일일이 검색하는 포졸이 나루터에 항상 나와 있어서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밉보이는 날에는 사공노릇도 그만두게 되던 참이라 포졸과 사공은 한편이 되기 일쑤였다. 조선중종때 모반사건을 일으켰던 김자점(金自点)의 도강을 도와주었던 사공 한돌은 역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는데 그의 아내였 던 유씨는 억울한 나머지 강으로 뛰어들어 죽자 그 혼백이 나루터의 버드나무로 환생하였다고 한다. 한돌의 네 살배기 딸은 다른 사공의 손에 자라나 일곱 살이 되자 그옆 안양천쪽에서 사공노릇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애기나루, 작은나루, 새끼나루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안양천과 한강이 합수되면서 일종의 삼각주 형태로 형성된 곳이 양화동인데 여름 장마철에는 물이 깊숙하게 들어와 지금의 영등포수원지까지도 물에 잠겼기 때문에 풀이 우거지고 겉자란 갈대숲은 새들의 서식처였다. 더군다나 나루터에 서있는 버드나무에서 날리는 씨앗이 봄비처럼 내리는 풍경을 그리므로 행세깨나 한다는 사대부들은 앞다투어 이곳에 정자를 지어 한가함을 즐기곤 하였다. 멀리는 염창마을이나 월촌 마을에서, 가까이는 양평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짓던 곳이나, 때로는 여의성처럼 죄를짓고 몰래 성을 빠져나온 사람들이 이곳 갈대숲에 숨어사는 은신처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서울로 편입된 직후에도 한가하기만 했던 양화동은 영등포지역에 공장이 들어서고 읍(邑)으로 승격된 이후부터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영등포지역이 상공업지대로 새로이 부각되면서 벌판이나 다름없는 양평동 역시 발전 되기 시작하였는데 지대가 낮은데다가 장마철만 되면 범람하는 안양천·한강변이어서 도시기능을 갖춘 지역으로 더이상의 발달을 할 수가 없었다. 여기에 을축년(1925) 대홍수로 인해 영등포 일대가 물에 잠기는 바람에 양화동까지 영등포의 중심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론은 쑥 들어가고 말았다. 현 영등포수원지 자리는 목동 용왕산의 앞발에 해당된다. 용왕산에는 양평동의 선유도(先遊渡)에 살던 아가씨에 반한 천관(天官)이 옥황상제의 뜻을 어기고 아가씨와 결혼하여 용왕산에 숨어살았는데 이를 안 옥황상제의 노여움이 극도에 달해 마침내 천관은 용왕산 이무기로, 아가씨는 선유봉으로 만들어버리자 사랑하던 아가씨를 향해 달려가던 이무기의 양발은 양화동에 닿았으나 꼬리부분은 옥황상제가 밟고 있어서 발톱자국만 낸 채 용왕산으로 다시 옮겨앉았다. 이때 흘린 눈물이 안양천이 되고 발톱자국은 깊게 패여서 비만 오면 고랑이 되었는데 천관의 마음을 헤아린 옥황상제는 이곳이 사람 살곳은 못되나 많은 사람들이 오가면서 밟아주고 다듬어 준다면 벌을 받아 용왕산에 이무기로 숨어 살아가는 천관은 용서를 받고 사랑하는 선유봉 아가씨와 결혼 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무기로 변한 천관에게 말했다. 또 이무기가 긁어서 만든 땅은 물에 잠길 것이라 했는데 양화교가 가설되어 사람과 차량의 행령이 끊임없는 지금 선유봉아가씨와 이무기의 결혼여부는 알 수 없지만 물에 잠길 것이라던 이무기 발톱 자리는 결국 안양천이 흐르는 수로로 바뀌고 말았다 한다. (안양천 수로가 바뀌는 사연이 전설화 된 것임)
(5) 두미암과 이수정 등의 위치에 대한 조사
① 안양천 수로가 바뀌었다.
염창동의 지명유래, 전래전설 및 각종 문헌에 의해 등장하는 경승지, 누정등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위치가 자료들마다 각각 달라 상당한 혼란을 겪었으며 그 이유가 무엇인지 몰라 애를 태웠다. 그러나 불똥산의 귀신바위와 김말손 장군 전설, 두미암과 영벽정, 이수정 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위치를 찾아야만 하며 무엇보다도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한강변 경승지의 복원문제 등에 관련된 부분이므로 정확한 위치를 규명해야 한다고 생각되어 이 부분의 조사내용을 상세히 기술하고자 한다. 나름대로의 연구 끝에 어떤 심증을 가지고 인공폭포가 있는 쥐산과 염창동 100번지 치성단자리를 수차례 올라 조사하였고 겸재선생의 이수정 그림과 옛 지도 등을 대조하였으며 동네 노인들에게 물어도 보면서 보다 확실한 근거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결과 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에서 85년도 발간한 “한강사(漢江史)”에서 안양천 개수공사를 실시하면서 안양천 수로를 변경한 사실을 찾아내었다.
② 안양천 수로변경에 대한 근거
1) 한강개수 기본계획중 “안양천 개수계획”과 공사결과
1925년에 을축년 대홍수를 당하여 조선총독부의 토목관계자들은 홍수에 대한 근본대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연구와 논의가 진행되었고 그리하여 그들은 [한강개수기본계획]이라는 것을 수립하였다.
(사진)-을축년대홍수(1925. 7. 18) 부락인들이 시체를 발굴하고 있는 현장.
• 기본계획중에서 이러한 내용도 있었다 : 안양천 및 그밖의 지천은 유로(流路)의 굴곡이 심한 부분에는 지름길로 굴착하여 홍수의 유하(流河)를 양호게 하고 본 류 홍수위가 미치는 범위까지 방수공사를 시행케 한다.
그런데 1925년 7월에 있었던 이른바 을축년의 홍수는 실로 고금에 없었던 대홍수였다. 대홍수를 당하여 조선총독부 당무자들은 한강개수 기본계획을 총공사비 980滿員으로 1926년부터 9년간 계속사업으로 시공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안양천에서는 하구를 염창동쪽으로 내려붙임으로써 한강의 역수위를 약 0.5m 낮추어 안양천 유역의 범람지역을 멸소케 한다. 동시에 제방의 높이도 낮추어 공사비의 절감을 도모하는 한편 이 하구이체공사(河口移替工事)에서 나오는 굴착토를 양동제방축조 공사에 이용한다. 공사는 1926년부터 실시하였으며 그중 안양천의 하구이체공사등은 1929년부터 1937년까지 9년간에 걸쳐 1,274,665圓을 들여 제방을 축조하였다.(漢江史:852-857쪽 참조)
2) “양천군읍지의 지도”와 “양천현시대지도”의 분석
양천군수 박준우가 저술한 양천군읍지에 실린 지도(광무3년 5월)를 보면 당시의 안양천이 소엄지산(현재 인공폭포가 있는 쥐산)의 동쪽으로 흘러 한강과 합수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陽川縣地圓·海東地圓·廣興圓」 등 지도를 보면 이수정과 영벽정이 안양천과 한강이 합수되는 지점의 바로 서쪽에 위치함을 알 수가 있다. 옛 지도는 현재와 같은 정밀한 지도가 아니므로 거리감각에 혼란을 가져올 수가 있으나 두 지도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이수정과 영벽정이 안양천과 한강이 합수되는 지점의 안양천 서쪽대안에 있었다는 사실과 둘째: 당시의 안양천이 소엄지산(쥐산)의 동쪽으로 흘러 한강과 합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3) 겸재정선의 “이수정”작품 분석
영조 16년(1740)부터 5년동안 양천현령으로 재임하면서 한강변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놓은 조선조 진경산수화가 겸재정선의 “이수정”그림 두폭이 전해온다. 진경산수화라 함은 있는 그대로의 경치를 그린 사실화이므로 그림속의 모습이 그 당시의 모습인 것이며 이 그림에서 볼 때 이수정이 있는 두미암은 안양천 하류에 솟아있는 가파른 절벽의 모습이다. 인공폭포가 있는 소엄지산은 일제 때 채석장을 설치하여 산을 파괴한 결과 현재는 당시의 삼분의 일 크기도 안되지만 산위에 올라 지형을 살펴보면 어느정도 윤곽을 짐작할 수 있으며 지금의 영등포 수원지 자리가 바로 옛날의 안양천이흘러가던 강줄기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4) 인근의 80세 이상되신 토착 원로주민들은 안양천 수로가 바뀐 것을 알고 있으며 필자에게 당시 공사하던 모습을 들려주었다.
③ 안양천 수로의 바뀜과 두미암 및 이수정 등의 위치 관계
양천8경의 하나인 이수정(二水亭)의 위치가 염창동 100번지 치성단 자리라고 서울시와 학계에서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 조사된 것이며 앞으로 있을 수 있는 한강변 경승지의 복원 등에 관련된 예민한 부분이므로 안양천수로의 바뀜과 두미암 및 이수정 등의 위치관계를 정리하고자 한다. 인공폭포가 있는 소엄지산(일명 쥐산)은 목2동쪽에 있는 대엄지산(용왕산, 왕대산)과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 양화교가 설치되어 있고 그 아래의 안양천이 흐르는 곳은 낮으막한 평지였으며 나야가라 호텔 건너편 소엄지산(쥐산)아래는 연지라고 하는 연꽃이 많이 피어있어 호수처럼 되어 있었다. 그리고 소엄지산과 상산대교 사이의 영등포수원지 근방이 원래 안양천이 흐르던 물길이었는데, 조선총독부에서 1929년부터 1937년까지 9개년에 걸쳐 토목공사를 벌려 안양천 하구를 염창동 쪽으로 내려붙여 쥐산 서쪽으로 수로를 돌려 안양천 물줄기를 지금의 모습처럼 돌려놓았던 것이다. 이러한 대단위 방제공사를 위해 소엄지산(쥐산)은 한강변쪽을 채석장으로 하여 필요한 석제를 공급하였으며 그뒤에도 김포공항과 공항로 건설을 위해 석재를 공급하는 채석장을 운
영한 결과 소엄지산은 크기가 삼분의 일 이하로 줄어들었고 따라서 두미암과 이수정, 영벽정 등은 흔적도 없이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후 향토사 등을 기록한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안양천 수로가 바뀐 것을 모르고 현재의 모습만을 기준으로 하여 이수정 등의 위치를 염창동 100번지 치성단 자리라고 잘못 지적함으로써 위치상의 혼란이 오게 된 것이다. ※ 「증미산·염창산·쥐산」의 위치 참조
(사진)-염창동 100번지 치성단 자리에서 내려다본 한강과 안양천의 모습(1994년)
생각해보는 코너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우리 국문학상 최초의 노래인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는 양천현에서 만들어졌다. 고금주(古今注)≪해동역사(海東繹史)≫라는 문헌에 의하면, 대동강가에 한 백수광부(白首狂夫: 백발의 실성한 노인)가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고, 이내 익사하고 만다. 물에 빠진 시신을 보면서 애처롭게 울부짖는 노파의 애절한 모습을 마침 곽리자고(강가 나룻터 관리)가 목격하고는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면서도 생생해 그 노파의 애절함을 잊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 자신의 아내 여옥(麗玉)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아내는 애절한 상황을 공후 악기에 맞추어 노래로 만들어 부르게 되었다. 이 애절한 노래는 인근으로 퍼져나가고 그 지방의 민요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公無渡河[공무도하] : 님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公景渡河[공경도하] : 님은 끝내 물을 건넜구려.. 墮河而死[타하이사] :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當來公何[당내공하] : 아! 님을 어이할꼬?
역사학적 입장에서 이 노래의 배경을 생각해 볼 때, 고조선 사회의 발전으로 인해 王權(왕권)은 강화되고 巫覡(무격)은 쇠퇴하는 와중에 권위를 상실하여 삶의 의지를 체념한 한 무격[백수광부]의 자살설이 있으며, 또 민속학적 입장에서 볼 때 고대 巫堂入門式(무당입문식)의 한 절차인 맨발로 물을 건너는 의식에 백수광부가 무리한 도전을 했다가 실패했다는 학설도 있다. 이러한 공무도하가의 무대가 놀랍게도 양천현의 양화도(楊花渡: 옛날 선유봉)라는 기록이 광무3년 때 양천군수였던 박준우가 지은 “양천군읍지”에 나오고 있다. - 藿里子高 妻 麗玉 楊花渡 見人沒 作 公篌引 彈 公無渡河曲云 - 진위야 알 수 없지만 우리 국문학사의 효시가 될 고조선의 “공무도하가” 노랫가사의 무대배경이 대동강이 아니고 우리고장의 양화도였다는 기록은 뜻밖이며 감회가 새롭다. 결국 곽리자고나 여옥이 강서구(양천현)사람이었고 “공무도하가”는 우리고장에 만들어진 노래라는 것이다.
등촌1동(登村1洞)
1. 동 유래
등촌동(登村洞)의 동명(洞名)은 이 마을 지형이 산등성이로 구성된, 즉 등마루로 이루어졌다 하여 등촌동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공항로를 경계로 봉제산(鳳啼山) 북쪽에 형성된 마을이다. 일찍이 산업시설이 자리집은 공장지대였으나, 점차 주거지가 들어서면서 산업시설들을 밀어내고 연립주택들이 들어서더니 오늘날에는 아파트단지로 탈바꿈하고 있어 인구밀도가 조밀한 편이다. 옛날 등촌동 주민은 산마루에 자리잡아 비교적 나무가 많고 초생지 또한 많아 나무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주민들도 있었는데, 이렇듯 서울 근교의 평화롭던 농촌마을에 틈이 없을 정도로 주택이 들어선 오늘의 모습을 이루기 시작한 때는 3차 경제개발이 시작된 1975년 이후이며 지방에서 서울로 전입하는 인구가 점점 늘어나자 서울시에서는 인구증가에 따라 한강 남쪽 주택개발사업을 추진한데서부터 비롯되었다. 서울시에서는 인구증가에 따라 한강 남쪽 주택개발사업을 1960년대 중반부터 화곡동에서 시작하여 등촌동으로 확대시켜 1980년부터 는 빠른 속도로 진행하였다. 사실 한강 남쪽의 어느 區보다도 강서구 일대가 늦게 주택지역으로 조성되었으며 1980년 초까지는 논밭이 좀 남아있었다. 그러나 급증하는 서울시의 인구증가는 이 마을도 예외로 두지는 않았다. 이무렵 등촌동 일대에 자리잡기 시작한 사람들은 대부분 갓 결혼한 회사원들이었다. 이들이 등촌동을 택한 것은 같은 한강 남쪽의 다른지역보다 주택이 대체로 싸기 때문에 이 곳으로 밀려 들었던 것이며 또한 공항로 주변이 시내로 통하는 교통요지였으므로 등촌동은 일찍부터 상권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2. 민담, 설화
(1) 지명에 얽힌 이야기
① 도림(道臨: 길질)
백석초등학교 근방인 등촌1동 650번지 일대를 도림이라고 하는데 봉제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로 이 일대의 길이 늘 질척하게 젖어있으므로 해서 도림(道臨) 즉 길질이라 하였다. 원래 임(임)은 질(泥)의 훈차(訓借)이므로 해서 붙여졌다. 이 도림이 근방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해서 도림이 마을, 줄여서 도림이라 하였고 그남쪽 골짜기 곧 지금의 정보문화센터(舊 논노)가 있는 근방을 도림이 골짜기라 한다. 옛날 도림이 마을에는 맑은 우물이 있었는데 항상 차고 시원한 물이 넘쳐흘러서 이 물로 동네입구가 질퍽하게 젖었다고 한다. 이 우물을 도림이 우물이라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② 등마루골
지금의 봉제산과 한강변의 증미산은 원래 같은 산줄기로 이어진 것으로, 공항로가 지나고 있는 부분은 꽤나 표고가 높은 산마루터에 해당되는 곳이었다. 이 산마루턱을 중심으로 마을이 자리잡았다하여 등마루골이라는 순수한 우리말 이름을 지었다가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 등촌동이다.
③ 동녘말
이 등마루의 동쪽. 등촌동 644번지 아파트가 있는 근방을 동녘말이라 했으며 일대의 골짜기는 동녘말 골짜기라 하였다.
④ 더펄논
등마루의 서쪽은 넓은 들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의 경복여자정보고등학교와 마포중고등학교와 학교 맞은편 공장지대와 주택가 일대도 모두 논이었다. 이논을 더펄논이라 부른다. 더펄논은 비가 온후에는 등마루 골짜기에서 언제나 많은 양의 물이 흘러내려 이 골짜기를 덮었다 하여 더펄논 골짜기라 하였다. 더펄논은 염창의 운영을 위해 지급된 논과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농사를 짓는 땅으로 되어있었다. 홍수가 날 때마다 土山인 등마루로부터 흘러내려 퇴적된 기름진 흙으로 더펄논은 객토가 되어 비옥해지므로 수확량도 많았다.
(사진)-강서구청 사거리 경복여고 맞은편은 더펄논과 말키우던 “매화장”터였음.
⑤ 역논골짜기
이 더펄논보다 조금 지대가 높은 산마루의 서쪽 기슭은 비교적 얕으막한 능선으로 이루어졌으므로 가축을 방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곳에는 조선조에 한양과 인천을 왕래하는 마지막 화곡동 강서구청앞에 있었고 역마는 이 골짜기에 놓아 길렀다. 지금은 등촌동 654번지 동성프라자에 해당하는 곳으로 역말 골짜기 혹은 역논골짜기라고 하였다.
⑥ 매화장
이곳 역논골짜기에서 키우던 말은 때때로 궁중으로 진상이 되기도 하였고 궁중에서 키우던 말이 다시 이곳으로 보내지기도 했다. 궁중에서 키우던 말은 특별대우를 받았고 이 말이 배설하는 오물도 특별취급하였다. 임금님의 배변을 매화라 하듯 궁중에서 키우는 말의 배설물도 매화라 하였는데 후일에는 말 자체를 매화라 하였다.
이 매화를 키우는 장소라 하여 매화장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등촌동 637번지 원창물산근방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곳 631-5번지(E마트앞)에는우연하게도 최근까지 서울축협조합이 있었다.
⑦ 가장꿀(꿀=골=谷)
역논골짜기의 서남쪽으로 현재 공항로 인터체인지(강서구청로타리)근방은 작은 가장꿀 골짜기라고 하는데 역논이 나라의 것임에 비해 그 곁에 붙은 작은논 마을이라는 의미와 그 곁의 골짜기라는 이름이 복합되어 작은 가장꿀 골짜기라 하였다.
⑧ 구석말과 너덧말
지금의 등촌동 534번지 일대 백석초등학교와 등촌중학교 근방을 구석말이라 한다. 우장산 기슭과 등마루를 서남쪽으로 하여 그 구석진 곳에 자리잡았던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졌는데 세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구석말의 서북쪽에는 너멋 말이 있었는데 등마루너머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여졌으며 등촌의 원마을이 된다. 이 너멋말을 중심으로 등촌동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너멋말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의 등촌1동 653번지로 대한항공교육훈련센터 건물옆에 있었다.
⑨ 중벌
옛날의 역말이었으며 등촌동의 효시가 되고 있는 곳, 즉 구석말과 너머말 사이에서 한강쪽으로 나가다가 중간쯤의 거리에 있는 들판을 중벌이라 하였다. 현재 등촌동 639번지 일대인 마포중고등학교 맞은편 공장들이 들어서 있는 곳이다.
⑩ 방학머리와 북새뚝
그 외에 학의 일종인 방아학이 모여드는 곳을 방학머리라 하였으며 등촌동 505번지 그린월드호텔 자리에 해당된다. 또 631번지 E마트 앞 일대를 북새(일명 복새)가 모여드는 뚝 근처의 산이라는 뜻의 북새뚝이 있었다.
등촌2동(登村2洞)
1. 동 유래
등촌2동은 봉제산(鳳啼山) 동쪽 양지바른 기슭을 따라 길쭉하게 형성된 동네이다. 강서구에서 두 번째로 큰 명산으로 정상에 오르면 한강 건너 남산일대가 훤히 바라다 보이며 남쪽으로는 화곡 2, 4동이 접하고 서쪽으로 는 화곡본동과 화곡6동이 접하며 북쪽으로는 공항로 건너 등촌1동과 접하게 되며 동쪽으로는 등촌로 건너 목3동과 접하고 있다. 봄이면 아카시아 향기를 사방으로 흩뿌려 인근을 취하게 하는 아름다운 이 산의 정상 철탑 부근은 옛날 백제의 봉화터로서 향토사학자 “한종섭”선생이 유물을 발굴하기도 하였다. 위에서 바라보면 산의 모양이 마치 봉황이 알을 품고 앉아 있는 모습이라 하여 봉제산(鳳啼山)이라고 한다. 아이파크아파트뒤 등촌동 23-4번지에는 김포공항을 통해 들어오는 외국 반입동물의 검역을 위한 국립동물검역소가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그 옆에 법성사 절이있고 화곡4동쪽으로 약수터가 있으며 그 옆에 용천사 절과 용문사 절이 자리잡고 있음은 이 산이 그림같이 아름답고 뛰어난 산수였음을 짐작케 해준다.
2. 민담, 설화
(1) 지명에 얽힌 이야기
① 백석마을(白石里)
백석중학교와 등촌초등학교 뒷산의 암석이 흰빛을 띄우는데 유래하여 학교부근마을을 백석마을이라 하였다.
② 능안마을(陵谷洞: 능곡동)
양천허씨 시조인 허선문의 묘는 원래 구암(탑산)에 있었으나, 언제부터인지 봉제산으로 옮겨 기록되어진다.
(양천허씨 세보 참조) 짐작컨대 연산군 때 양천현 한강변 일대가 “금표구역”에 해당되면서 사람 접근을 차단할 때 묘소 이장을 강요받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여하튼 양천허씨 시조인 허선문은 신라 말기부터 이 일대를 다스리던 소왕국의 군주였으며, 고려 왕건으로부터 공암촌주로 임명받았던 왕(王)같은 분이었기 때문에 허선문의 묘소가 있는 봉제산 아랫마을인 양천허씨 집성촌을 능(陵)이 있는 마을, 즉 『능안마을』이라고 호칭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능안마을을 “능곡동”이라고도 했으며, “허준”(동의보감 저자)이 태어난 곳이다. <양천현 파릉리 능곡동이 허준의 고향으로 기록되어 있음>
③ 남산재(봉제산)
봉제산 즉 통합병원 뒷산의 높은 정상을 남산재라고 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이 일대를 남산면이라고 하였다.
④ 백석방죽(白石堰)
등촌리 백석부락 북쪽에 있던 방죽이었다.(현 영일고교자리로 추정된다)
(2) 전설
① 한독굴(굴=골=谷)
등촌로에서 강서도서관에 들어가는 입구 즉 육교옆(현 새한약국 건물근방) 509번지 근방에 3가구가 살고있어 이 고개턱을 세집메라고 하였는데 이 세집메 동남쪽 부근에는 은(銀)을 가득 채운 항아리 세 개를 이 동네에 살던 부자가 묻어 두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후세 사람들이 그 항아리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빈번히 실패 하다가 어느날 두 개의 항아리는 찾아냈으나 나머지 항아리 한 개는 끝까지 찾지 못하여 마을 이름이 한독굴이 되었다. 그러던 중 일제 때 능안마을에 사는 엄씨네가 찾아서 면장에게 갖다 바쳤다고 한다.
(사진)-한독굴자리
3. 역사적 인물
허준(許濬) 【생몰년】 1539.3.5(己亥)∼1615.8.17(乙卯)(광해군 7년 77세) 【저서·작품】 ≪동의보감, 언해구급방, 언해두창집요, 언해태산요집, 산찬벽온방, 벽역신방≫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岩)으로 훈련원 정(訓練院正) 허곤(許琨)의 손자이고, 허론(許論)의 아들이다. 조선 명종때 강서구 등촌2동 능안마을(능곡)에서 출생하여 선조 때 명의로 이름을 떨쳤던 의원으로 노후에는 강서구 가양2동 공암 일대에서 거처했다. 선조 때 어의가 되어 왕을 비롯한 왕족과 대신의 진료에 많은 공적을 세웠다. 1590년 왕자(광해군)를 치료하였으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어의로서 왕을 끝까지 호종(扈從)하였다. 선조 29년(1596) 선조의 명으로 ≪동의보감≫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선조 37년(1604) 왜란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 3등이 되었으며, 이듬해 양평군(陽平君)에 봉해지고, 1606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綠大夫)에 올랐으나, 중인인 의관(醫官)에게 정일품의 품계를 주는 것은 불가하다는 대간(臺諫)의 계속된 상소로 취소되었다. 이 해 선조가 승하하자 수의(首醫)로서 용약의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가, 광해군 원년(1609) 어의에 복직되었으며, 이듬해 8월 ≪동의보감≫을 완성하였다. 이 책은 1596년 여러 의관과 함께 편찬을 시작한 것인데, 정유재란으로 모두 흩어져 중지되었던 것을 선조의 명으로 혼자 의서 500여권을 참고로 17년의 각고 끝에 완성한 것이다. 총 25권 25책으로 된 ≪동의보감≫의 내용은 내과·외과·부인과·소아과는 물론 약리학과 침구학 등 근대 임상의학의 각과를 포함하는 방대한 것이었다. 특히 내용면에 있어서 당시 의학의 백과전서로서 의원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곧 일본과 중국에 전해져서 여러 차례 간행되었는데, 중국판 서문에 ‘천하(天下)의 보(寶)를 천하(天下)와 함께 한 것’이라 하였고, 일본판 발문(跋文)에서는 ‘보민(保民)의 단경(丹經)이요 의가(醫家)의 비급(秘笈)’이라 평한 것과 같이 그 학술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었다. 1615. 8.17(양력 9월 9일) 공암에서 서거 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綠大夫)에 추증되었고, 아들인 파무목사 겸(謙)이 100일 상을 치룬 후인 11월 13일 파주군 진동면 하포리에 장사하였다.
이정재(頣正齋)(서원) 이정재(頣正齋)는 이조판서 겸 경연관춘추관사지의 금부사를 지냈던 양천허씨 14대 허균(許稛)이 1402년 태종임금 때 양천현(강서구 등촌2동)에 세운 학교이다. 「파릉세고(巴陵世稿)」 제1권34쪽의 “이정재기”를 게재한다. 『 ‥‥ 내가 관서관찰사의 소임을 마치고 돌아온 달에 곳간에 남아있던 곡식을 곤궁한 사람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생각하건대 우리 집은 대대로 청백(淸白)하기로 알려져 왔거니와 재물을 대함에 사사로이 탐욕치 않았다. 이제 “이정재”를 창설하고 여기에 종자질과 외손들을 모아서 강의장소로 하니---40인을 한도로 하여 교육의 순서는 먼저 소학으로써 사친존숭의 예절로 하고 대학으로써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도리와 인간의 본성을 연구케 하여 --- 후일 조정에 출사하여 도를 행함에 대비케 하였다.』 이정재에서는 둘째아들 허형손을 비롯하여 수많은 종자질과 외손들을 가르쳐 많은 후손들이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중에는 세조 수양대군의 장자방이었던 “한명회”도 “이정재” 출신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기록출처: 양천허씨대제학공과 회장 허창욱의 “이정재기”
(사진)-서적
① 엄흔(嚴昕)---호 : 십성당(十省堂) 벼슬은 전한(典翰)이며 김안로(金安老)를 논척(論斥)하였다.
② 엄후(嚴厚)---호 : 막여정(莫如亭) 엄흔의 손(孫), 벼슬은 교관(敎官), 계축년에 이명달과 함께 연명으
로 상소(上疎)하였다. * 백석리(등촌초등학교 뒷산)에 엄흔과 엄후의 묘와 비가 있었다고 한다.
③ 엄성(嚴惺) 엄후의 제종제, 벼슬은 응교(應敎), 계축년에 4관(성균관, 예문관, 숭문원, 교서관)의 관원을 모아놓고 흉
소를 올린 자에게는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정지토록 했다.
④ 엄집(嚴緝)---호 : 만회(晩悔) 1635년(인조 13)∼1710(숙종 36).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경지(敬
止), 호는 만회(晩悔)이다. 감찰을 지낸 엄성구(嚴聖耈)의 아들로 현종 14년(1673) 정시 문과에 급제 후 전라도 관찰사·대사간·도승지를 거쳤으며, 형조 판서로 있을 때 장희빈을
논죄하였다. 기개가 있고 청렴하였으며, 권문을 멀리하고 당쟁을 싫어하여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만년에 궁핍한 가운데 와병 사실이 알려지자 숙종이 약(藥)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사진)-서당풍경
※ 막여정(莫如亭) 엄흔의 호는 십성당으로 영월사람이다. 중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적(典籍)에 이르렀으며 조정에
서는 바른말을 하여 김안노를 막아 물리친 바도 있다. 손자인 엄후(嚴후)의 호는 막여정으로 엄인달(嚴仁達)의
아들이다. 벼슬은 교관(敎官)에 이르렀으며 광해군 5년(1613)에 인목대비를 폐할 의논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
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등마루 북변에 그의 호를 딴 막여정(莫如亭)이란 정자를 짓고 아우인 엄성과 함께 관직을 물러난 후 만년을 한가롭게 보냈다. 막여정의 정자가 작천교(鵲川橋) 남쪽산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 자리를 막여정지라고도 했다. 막여정의 이름이 더펄논 동쪽구릉에 있던 말목장 “매화장”과 혼돈이 되어서 매화정이라 했는지 혹은 이곳 막여정의 이름을 빌어 말목장을 매화정이라 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 당시 등촌1동(하이웨이주유소 맞은편 일대)에 궁중의 말을 키우던 마장(馬場)있었는데, 임금의 배변을 매
화라고 하는바 궁중의 말이 배설하는 오물도 특별 취급하여 매화라고 하였으며 동시에 마장을 “매화장”이
라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엄후의 호인 막여정(莫如亭)을 후세사람들이 엉뚱하게 해석을 내려 마굿간인 매
화정으로 둔갑시켜버린 것이다.<劉基善선생의 “양천의 역사” 참조>
(사진)-엄흔과 손자인 엄후·엄성형제들의 분묘가 있었던 흔적으로 보인다.
등촌3동(登村3洞)
1. 동 유래
원래 등촌1동에 속했던 논바닥으로 마곡벌과 함께 드넓은 평야를 이루었고 질 좋은 쌀이 생산되던 이곳이 1990년 7월 26일(건설부고시제464호)에 의거 택지개발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수많은 고층아파트와 빌딩숲으로 변하고 말았다. 글자 그대로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단어가 등촌3동처럼 실감나는 데도 별로 없을 것 같다. 완전한 논바닥위에 어느날 갑자기 포크레인들이 밀어닥쳐 논바닥 정지작업을 하더니, 도로가 생겨나고 이곳 저곳에서 아파트와 빌딩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랐다. 정말 순식간이었던 것 같다. 전에 논 가운데를 흐르던 농수로와 더펄논 사이를 흐르던 까치내와 새개발이 개울도 콘크리트 포장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오리웅덩이도 사라져 버렸다. 어느 한순간에 그 넓었던 벌판이 콘크리트 도로와 아파트·빌딩숲으로 덥혀져 버림으로 흙이라고는 한줌 찾아볼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이제 등촌3동은 앞으로 개발될 마곡단지의 최첨단 실리콘 밸리 및 수변도시와 함께, 힘차게 강서구를 이끌어 갈 새로운 상권 중심지로 발돋움 하게 될 것이다.(1995년 12월 1일 字로 등촌3동이 개청되었음)
2. 민담, 설화
1) 지명에 얽힌 이야기
① 빗뒤골짜기
더펄논의 남쪽은 등마루와 바로 연결되는 우장산(雨裝山) 기슭에 해당되는데 이 골짜기에서부터 길가에 이르기까지 고을 군수들의 선정비와 우장산 기슭에 쓴 분묘의 묘비가 많다하여 빗뒤 골짜기라 하였다. 롯데 낙천대아파트와 88체육관 앞쪽을 말한다.
② 검덩미 골짜기
등마루 서쪽의 흙은 비교적 검은 빛을 띄우고 있는데 이는 부엽토가 많이 섞였기 때문이다. 영양분이 풍부한 부엽토가 많은 지역의 땅은 기름지고 식물이 잘 자란다. 이 부엽토가 섞인 흙이 산사태나 홍수로 인해 더펄논으로 운반되어졌으므로 등마루 서쪽의 더펄논은 갯펄의 진흙처럼 거무스름한 색이었고 이 논에서 나는 쌀이라 해서 검덩미라 하였다. 검덩은 「검정」의 방언이다. 검덩미가 나는 근처의 골짜기를 검덩미골짜기라 하는데 새마을중앙본부 북쪽에서 공항로가 이어지는 부근이다. 또 다른 의미로서는 새마을 중앙본부가 들어서있는 우장산의 북쪽산을 검두산(黔頭山)·검덕산(黔德山)·검지산(劍支山) 또는 검둥산이라 불리웠는데 이산 아래 논에서 나는 쌀이라 하여 검덩미라고 불리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③ 오리웅덩이
등촌동과 가양동 경계를 이루는 양천길 주위인 등촌동 58-1번지 오신 자동차공업사 옆(현재 아파트단지 진입도로 입구)에서 15번지에 이르는 곳에는 항상 물이 고여있었고 이 물에 오리가 와서 앉아 놀았다 하여 오리 웅덩이라는 이름이 붙어졌다. 오리웅덩이는 더펄논의 북쪽으로 농수로가 이 부근을 지나고 있으나, 현재는 아스팔트 도로속에 파뭍혀 흔적도 없다.
④ 세개발이 개울과 역논개울
이 농수로가 지나는 곳은 작은 개울이 여럿이 모여 합수되어 한강으로 들어가는데 가양동쪽의 개울과 등촌동 쪽의 개울이 더펄논 서북쪽에서 만난 곳을 세개발이개울이라 한다. 역논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더펄논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개울은 역논 개울이라고 한다. 이 역논개울은 역촌(강서구청 앞)을 돌아서 더펄논의 수로와 합쳐졌다.
(2) 파릉(巴陵)의 도당(都堂)재
고려시대에 파릉이라는 읍(邑)이 있었던 자리로 비석이 서있는 뒷산이라는 이름의 비뒷산이라고도 하였다. 맞은편에 있는 논사이의 나즈막한 야산이었는데 이곳을 서낭 당고개라고도 하고, 도당재라고도 하였다. 등촌동의 도당은 응골고개를 넘어가기 전 산마루턱에 있었으나 1978년경 도로공사로 철폐되었다. 도당할아버지를 신봉하였으며 신목(神木)은 소나무였다고 한다. 매년 7월 1일과 10월 1일에 치제(致祭)하였으며 7월 치제 때는 소를 잡고 무당을 불러서 대동(大同)굿을 하였다. 10월 제사에는 돼지를 썼다고 한다.
※ 이제 이곳은 택지개발로 고층아파트와 빌딩들이 우후죽선처럼 솟아있는 번화가로 바뀌었고 등촌3동이 되었
다.
(3) 설평기려(雪坪騎驢)
우리 강서구는 조선조 진경산수화의 대가이며 화성(畵聖)이라 일컬어지던 겸재(정선)의 기념지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어느 역사적인 인물의 기념지라고 하는 데에는 “탄신지(誕辰地)·활동지(活動地)·사망지(死亡地)”중에서 비중이 큰 곳을 기념지라 할 수 있는데, 겸재의 탄신지는 인왕산 아랫자락 청운동이지만 그 이상 자취를 찾을수 없고, 사망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니 자연히 생전에 이분의 발자취가 가장 뚜렷이 부각되는 곳이 기념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겸재선생의 발자취가 뚜렷한 곳은 북한의 금강산 등을 제외하면 영조16년(1740)에 우리고장인 양천현에 현령으로 부임해 와 만 5년 동안 가양동 궁산의 소악루에 매일같이 올라 개화산과 강 건너 안산의 봉화불을 간심하면서, 우리고장의 많은 그림을 그려 남겨 놓으셨으니, 우리 강서구가 겸재선생의 기념지가 된것이며, 현재 가양1동 옛 양천현아 옆자리에 겸재미술관이 세워져 있다. 마침 겸재선생의 작품 가운데 『설평기려(雪坪騎驢)』라는 제목의 설경을 그린 작품이 있는데, 이 작품속의 설경은 바로 오늘날 등촌3동이 된 드넓은 벌판이며, 저 멀리 우장산의 역말마을(현재 화곡6동)이 보이는 그림이기 때문에 소개한다.
※ 설평기려(雪坪騎驢)의 보다 자세한 해설은 본 책자 3부 「설평기려(雪坪騎驢)」편 참조.
(사진)-陽川縣衙에서 바라본 雨裝山의 雪景, 겸재가 양천현령으로 부임한 1740년 겨울모습임. 앞산자락 민 가는 현재 새마을 본부자리, 뒤편 우장산 민가는 역말자리(현재 화곡6동)이다.
화곡본동(禾谷本洞)
1. 동 유래
화곡동(禾谷洞)이란 지명의 유래는 땅이 기름져 벼가 잘되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라는 내용을 우장산동편에서 자세히 기술하려 한다. 조선시대에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능동(菱洞), 반곡리(盤谷里), 역촌리(驛村里), 화곡리(禾谷里)라는 4개 마을이 모여 화곡동이 된 것이다. 능동은 속칭 능꼴이라 불리워지는 현 화곡4동 신정여상 근방의 봉제산 기슭에 몇 가구가 살던 마을이며, 반곡리는 원촌말, 김촌말, 박장말이 있었던 화곡전철역 근방의 현 화곡3동과 5동에 걸쳐형성된 원씨, 김씨, 박씨, 장씨 등이 살던 부락을 말하며, 역촌리는 강서구청앞 우장산 기슭에 있었던 역말자리로 추씨집안 마을을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화곡리는 봉제산줄기인 까치산을 중심으로 화곡초등학교 뒤편에 3가구가 살던 조옥동(照玉洞: 초록동)과 화곡1동 가로공원 근방의 새까지마을의 두어가구, 그리고 더부리고개(일명 백구사고개)너머 더부리 마을의 몇 가구를 합쳐 화곡리라고 하였으니 당시의 화곡리는 오늘날 3개동(화곡본동, 1동, 8동)으로 바뀌어져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 지역적 특징 1963년 청계천 복개에 따른 판잣집을 시작으로 서울시 전역에 있는 무허가 판잣집들을 정비하면서 이들을 강남으로 분산 유치시키려는 서울시의 계획에 따라 화곡동에 10만명을 수용하려는 10만단지 주택조성사업을 계획하면서 화곡동의 모습이 달라지게 되었다. 특히 1968년 당초의 10만단지 계획이 30만단지 화곡동 시범아파트 설치로 변경되면서 땅이 기름져 벼가 잘되는 마을이라는 동명의 유래를 가진 화곡동의 모습은 급변하게 되었다. 화곡본동은 특히 우측으로 봉제산(鳳啼山)이, 좌측으로는 우장산(雨裝山)이 있는 계곡에 형성된 마을인데 이 계곡은 옛날 천수답지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이 기름지고 좌우 남산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벼가 잘 자라기 때문에 화곡(禾谷)이라는 이름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이 화곡본동이 화곡동 일대에서는 최초의 주거형성지로 되었다는 주민들의 주장에 따라 1970년 12월 31일 화곡본동으로 동명이 정해졌다. 당시 주민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의 “초록동자”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을 보면 오랜 옛날부터 이곳에 세가구가 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1968년 주택조성사업이 있기 전까지는 초록동 3가구 외에는 일체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던 산 중턱으로서 봉제산 숲속에서 산짐승들이 출몰하였으며, 산기슭에는 논밭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2. 민담, 설화(지명에 얽힌 이야기)
① 조옥동(照玉洞: 초록동)
임진왜란 당시 가양동 뒷산인 궁산에 전라창의사 김천일 장군, 전라소 모사 변이중장군, 강화의병장 우성전장군 등이 인천, 강화도, 김포, 통진, 양천 의병들을 지휘하여 한강을 도강, 권율장군의 행주대첩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사진)-초록동과 535포부대자리(화곡초등학교)
이때 양천의병으로 참가하여 전사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여 “초록”이라는 어린 아들이 아버지의 갑옷을 입고 의병에 들어가 왜군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때부터 이 마을을 초록동이라 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으니 화곡초등학교뒤 거성빌라 뒤편인사거리 근방으로 약 50번지 부근이 초록동으로 짐작된다. 또한 초록동에는 정낙윤(鄭樂倫)이라는 분과 그 집의 소작농가 2가구등 모두 3가구가 살았었는데 일제치하때 정낙윤씨는 독립운동가였다 한다. 임진왜란 때 의병이었던 초록의 후예가 정낙윤씨일수도 있고 초록의 가문과 정낙윤씨의 가문이 다를 수도 있고 또는 일제치하에서 정낙윤씨의 독립운동이 초록동이라는 지명을 만들게 되었을 수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이 땅의 마지막 양동면 장이셨으며 돌아가신 정낙윤씨를 독립운동 유공자로 추서하려 노력하셨던 김정묵(金鼎黙)할아버지를 만나 뵈었으나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였으며 그분의 후손이 있다 하여 찾으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 조옥동(照玉洞)의 뜻: 산중턱에 흰 돌이 옥(玉)처럼 비친다 하여 지어진 마을 이름으로 짐작되며 조옥동이 초록동으로 불리웠을 것이다.
3. 역사적 사실
① 일제시 대동아 전쟁을 위한 전쟁물자 저장창고 수백개 설치 1944년 대동아 전쟁의 패색이 짙어갈 때 일제
는 김포공항을 중심으로 전쟁물자 보관을 위해 우장산과 봉제산 중턱에 수백개의 반 지하창고를 건설했다.
전쟁물자 보관창고 건축을 위한 경상, 전라, 충청도에서 수 많은 젊은이들을 보국단이란 이름으로 동원하
여 화곡동 인근민가에 합숙시키며 당해 겨울동안 전쟁물자 저장창고 건설을 위해 혹독한 고생을 시켰다. 그
러나 이듬해인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미군이 진주하여 이들 창고의 전쟁물자들을 회수
하였으나 인근 주민들도 창고를 헐고 들어가 상당수의 각종 물품을 가지고 나왔는데 어떤 물건인지 또는 어
디에 사용하는 것인지를 몰라 황당한 일들이 생겼으니 예를 들면 공업용 알콜을 독한 술인줄 알고 나누어
마시다가 눈이 먼 사람들도 있었고 사망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번듯한 도로가 없었고 우마차가 겨우 다닐 수 논길뿐이었으나 일본군이 전쟁물자 보
관창고를 건설하기 위해 현재 우장산의 롯데 낙천대아파트 동쪽 담근방에서 당시 공동묘지가 있었던 ○○수
퍼 근방을 지나 우장산 산중턱을 타고 강 서성모병원 뒤편을 거쳐 까치산 중턱을 돌아 봉제산 중턱으로 들어
서서 화곡초등학교 뒤로하여 현 그리스도 신학대학 앞을 거쳐 하이웨이 주유소방면으로 ㄷ자 모양으로 군
수물자를 운반할 수 있는 차도를 건설하였으며 이 차도변에 100m정도 간격으로 군수물자 보관창고를 수백
개 건설하였으니 그 도로가 당시로서는 화곡동의 유일한 도로였던 것이다. 지금은 골목길로 대부분이 변하
고 말았다.
② 535보뚝
화곡초등학교 근방인 24번지와 46번지 거성빌라 근방에 6·25직후에 아군 535포부대가 주둔하였다. 그
당시 이곳 논밭들은 천수답으로 가뭄이 들면 농수가 모자라 고생이 심하였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했던
535포부대에서는 이곳에 보뚝을 쌓아 농수로를 끌어들여 농사짓도록 해주었으니 당시 이 보뚝을 535보뚝
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당시의 논밭위에 주택이 들어서고 빌딩이 들어섬으로써 옛모습을 찾
을 수는 없었다.
화곡1동(禾谷1洞)
1. 동 유래
옛날의 화곡리가 오늘날에는 강서구의 중심이 되었다. 옛날의 능동(菱洞), 반곡리(盤谷里), 역촌리(驛村里), 화곡리(禾谷里)가 오늘날의 화곡동이 된 것으로 능동은 오늘날 화곡 4동이며 반곡리는 화곡3동, 역촌리는 화곡6동, 화곡리는 우장산동으로 되었다. 화곡2동과 8동은 능꼴을 중심으로 한 조그만 마을이었고 화곡본동 역시 역촌리를 바라보는 야산의 3가구가 살았던 조옥동(일명 초록동)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화곡1동은 사람이 거주한 기록이 없는 야산으로서 화곡8동의 더부리 마을에서 곰달래(고음월리)로 넘어가는 고갯길 뿐이었다.
※ 지역적 특징 산짐승들이 출몰하던 까치산 줄기인 이곳에도 서울시에서 1963년 늘어나는 강북인구를 강남으로 분산유치시키기 위해 화곡동에 10만단지 주택조성사업을 계획하였던 것이 1968년에 30만단지로 변경되면서 이곳에도 개발의 바람은 불어왔고 산 전체에 주택들이 들어섬으로써 오늘날 화곡1동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화곡1동은 남동쪽, 남서쪽으로는 양천구 신월동과 접하며 동북쪽으로는 화곡전화국과 마주보며 화곡8동과 경계한다.
1동 한가운데를 관통하여 곰달래길이 지나가며 까치산 줄기의 끝부분인 이 동네는 신월동쪽으로 밋밋한 경사를 이루며 형성된 마을이다. 원래 이곳은 전형적인 논밭들이었고 까치산에는 숲이 우거져 산짐승들이 많은 곳으로 거의 민가는 없었던 곳이었다. 지금 곰달래길의 언덕 길가에 두어채 민가가 있었다고 하나 그 당시 누가 살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1963년 늘어나는 강북의 인구를 강남으로 분산 유치시키려는 서울시의 계획에 따라 주택조성사업을 계획하면서 이곳 논밭들도 주택지로 급변하게 되었다. 화곡1동과 7동은 원래 같은 마을이었으나 급격한 인구증가로 1977.9.1자 화곡1동과 7동으로 나뉘어져 오던 중, 변화된 도시행정환경에 걸맞은 행정 효율성 제고와 주민의 편익증진을 위해 행정자치부의 소규모 동 통폐합 추진지침 및 보완지침 (2007.8.31)에 의거 2008.8.25일자로 화곡1동과 화곡7동이 하나로 통합되어 새로
운 화곡1동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1) 지명에 얽힌 이야기
① 까치산
봉제산(鳳啼山) 일대에는 옛부터 까치가 많이 서식하였으나 화곡동 개발계획에 따라 봉제산 중턱까지 주택이 들어서고 인구가 급증하면서 봉제산 일대의 까치들이 갈 곳이 없어지자 비교적 늦게 개발된 이곳 까치산으 로 몰려 들어오게 되어 까치산이라는 산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까치산 주변도 주택지로 변모하였으며 특히 미성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부터는 그토록 많던 까치는 급속히 줄어들게되고 까치산이라는 이름만 옛 정경을 집작케 해준다.
(사진)-까치산 가로공원길
② 화곡동 진흙은 옹기그릇 원료
개발되기 이전의 화곡동 일대는 “마누라없이는 살아도 장화없이는 못산다.”고 할만큼 진흙이었다. 비만오면 온통 신에 엉겨붙는 진흙무게로 겨우 걸음을 뗄 수 있었고 이 때문에 몇곱절 더 차비를 지불한다 해도 택시가 들어가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화곡동의 진흙은 도기를 만드는 원료로는 최상급으로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후 한강상류의 도기공장들이 염창동에 이전해와서 이곳 진흙으로 도기(옹기)를 만들게 되었다.
1935년 무렵 한 해도 염창동에는 11개소의 독 굽는 가마가 있었는데 모두 이곳 화곡7동 진흙을 원료로 하였으니 당시 이곳에 논밭을 가진 땅주인들은 진흙을 팔아서 돈을 벌고 기름진 진흙땅을 무상으로 갈아엎어주니 농사가 잘되어 돈을 벌고 까치산 산기슭의 흙을 파냄으로 자연히 밭이 논으로 바뀌어지게 되니 땅값이 올라가고 대다수의 주민들에게는 고통만 안겨주는 진흙 덕택에 부자가 된 땅 주인이 많았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염창동은 소금집산지임과 동시에 강건너 마포나루처럼 경성으로 공급되는 새우젓 집산지이며 또한 직접 새우젓을 담그는 곳(젓말)으로 새우젓독을 생산하는 도기공장이 많이 있어 이곳 월정초등학교와 화곡아파트 일대에서
도기에 사용하는 흙을 많이 실어갔다고 한다.
③ 곰달래길
이토록 아름다운 우리말 지명이 있다는 것을 참으로 흐뭇해 하며 곰달래라는 어원이 이곳의 아름다운 정경을 그린 이야기로서 옛모습을 머리에 그리며 지명유래를 밝힌다. 우선 지도를 보면 화곡1동과 인접한 신월동의 땅모양이 마치 새가 날아가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풍수지리상으로는 반달형이다. 초승달에서 반달로 커가고 있는 형국인데 귀한사람이 배출되는 형국이라 한다. 곰달래라는 지명은 신월동에서부터 유래한다. 이곳은 지형이 낮아 달빛이 고루고루 한껏 비치었으며 골짜기 사이로 흐르는 맑은 실개천에 투영되는 달그림자와 반짝반짝 빛나는 달빛 즉 “밝고 맑은 고운달빛이 비치는 동네”라는 뜻으로 “고운(곰) 달빛의 내(川)-곰달내-곰달래”라고 하였다. 이곳 신월동의 지명이 인연이 되어 오늘날 곰달래라는 길이 생기게 된것이다. 곱다(고움: 古音)+달(月)이라는 듯의 한자음인 고음월(古音月)이라고도 표기하는데 곰달래의 원래 마을인 고음월리(古音月里)는 양천구 신원초등학교 근방이다. ※ 곰달래길: 노폭 15m, 연장거리 2,700m, 1984년 11월 7일 가로명 제정됨.
(사진)-곰달래 길
(2) 전설
① 곰달래 전설
아직 한강유역이 백제땅이었을 때 이곳에 서로 사랑하는 음소(音昭)와 음월(音月)이라는 남녀가 살고 있었다. 신라의 힘이 점차 세어져 끊임없이 백제를 위협하자 전국에 군대소집 명령이 내려졌고 이곳에 살던 청년도 나라를 위해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다. 청년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동산에 둥근달이 깃발처럼 떠 오르면 백제가 이긴것이니 자신을 기다려야하고 칠흑같은 밤이되면 백제가 싸움에 진것이니 다른사람을 찾아 떠나라는 말을 한 후 전쟁터로 떠났다. 몇날이나 계속되던 신라와 백제의 싸움이 끝나갈 무렵 동산에는 손톱 반만큼이나 작은 조각달이 떠오르기 시작하다가 이내 커다란 둥근달이 되었다. 여인은 기뻐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먹구름이 지나가면서 다시 캄캄한 밤으로 바뀌었고 이에 놀란 여인은 산위에 올라가 아래로 몸을 굴려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 구름이 지나가 다시 환하고 커다란 달이 나왔으며 얼마후 밤새 먼길을 달려온 청년이 왔으나 이미 여인의 목숨은 끊어진 상태였다. 산꼭대기 달이 떠오르는 곳에 자신의 손으로 여인을 묻고 돌아서며 청년은 “이제 끝이로구나. 이 거친세상 끝이로구나”라고 했는데 이것이 변해 고음월(古音月)이 되었다고 한다. 고(古)는 이두음으로 사용할때 거칠다. 끝났다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바로 음월이의 목숨이 끝났다는 표현으로 이것이 변해 고음월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 참고 우리조상들은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여기며 섬겨왔고 태어나 살고있는 대지를 신성(神性)으로 여겨왔다. 자손대대로 이어질 어머니의 품속인 대지를 이름 지을 때 신성(神性)을 바탕으로 하였고 풍수지리 사상도 여기에서 나왔다. 이러한 이유로 그땅에 사는 모든 주민과 자손에게 불경스럽고 욕되는 지명은 역사이래 이땅에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민담설화 자료수집차 만난 토착주민들에게서 얻어진 자료중에는 속되고 불경스러운 내용 몇가지가 나왔다. 예를들면 아름다운 마을의 정경을 말하는 "곰달래"지명유래를 음담패설에 관련지어 전래 전설인양 잘못 알고서 들려주는 이들도 있었다. 이렇듯 지명을 가지고 말장난 한것에 불과한 이야기들이 전래전설인양 회자(膾炙) 되는것들은 필연적인 민담설화가 될수 없기에 수록할수 없었다.
화곡2동(禾谷2洞)
1. 동 유래
화곡2동은 봉제산 남쪽 줄기아래 전형적인 야산과 논밭이었으며 봉제산에는 숲이 우거져 산짐승들이 많았던 곳으로 신정초등학교 근방에 “안골”이라는 조그만 마을의 몇가구와 참나무탱이의 두어가구 외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던 현 화곡4동 능꼴(菱谷)마을과 화곡8동 더부리마을 사이의 골짜기였다. 그러나 1963년부터 화곡동 일대에 주택 조성사업을 계획하면서 이곳에도 개발의 바람은 불어왔고 지금은 택지개발로 인해 주택지로 변하고 말았다.
2. 민담, 설화(지명에 얽힌 이야기)
① 안골
신정초등학교 근방에 몇가구가 모여살던 “안골”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② 골안말(참나무탱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였다. 823번지 근방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아람드리 참나무가 있었으며 이곳에 두어가구가 살고 있었다고 하며 이말을 골안말 또는 참나무탱이라고 불렀다 한다.
③ 옛논
현 고속도로 근방은 원래 옛논이라고 불리우는 논이 있었다. 옛논이란 이름의 진원이 불명하며 논 가운데로 농수로(안이서 보뚝)가 지나갔는데 오늘날 화곡2동 843-886번지앞의 복개도로가 농수로일 것으로 보인다.
④ 안이서 보뚝
일제시대때 안이서라는 사람이 농수를 끌어들이기 위해 사비로 뚝(제방)을 쌓았다 하여 이 보뚝을 안이서 보뚝이라고 하였다. 이 근방의 논밭은 천수답으로 가뭄이 들면 물을 댈 길이 없어 농민이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언제인지 “안이서”라는 사람이 오목교 근방 안양천에서부터 농수를 끌어들이는 보뚝을 쌓아 현재 화곡전화국 앞쪽에 있었던 양수펌프장까지 농수를 끌어들임으로 이 일대 논밭들은 가뭄의 고통에서 해방됐다고 하였다. 현재 843번지~886번지 사이의 복개도로가 안이서 보뚝이 변한 것이라고 전한다.
(사진)
⑤ 보호수에 얽힌 이야기
화곡2동 452-7호에는 수령 400년이 되는 측백나무 고목 한그루가 있어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이 보호수는 어떤 사람이 나무를 베려하자 나무 밑둥에서 피가 나오므로 사람들이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고 흙으로 피가 나오는 곳을 막았으며 극진한 치료후 지성으로 돌보고 있다고 한다.
화곡3동(禾谷3洞)
1. 동 유래
수명산(鉢山)자락아래에 위치하여 수명산의 자청룡에 해당하는 이마을은 조선시대에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반곡리였다. 풍수지리학에서 거주지(陽宅)는 좌청룡에 자리잡아야 주인이 장수하고 부자가 되며 효자, 효부가 많이 나오고 영리한 자손을 두게 된다고 한다. 단 음택지인 경우 좌청룡의 날이 우백호보다도 뛰어날 때에 후손이 잘 되므로 주택지(陽宅)와 묘소(陰宅)의 경우는 청룡의 기능이 정반대라고 한다. 화곡 3동은 수명산의 좌청룡에 해당된다. 강서로가 지나고 있는 화곡 3동 일대를 조선시대에 반곡리(盤谷里)라 한것은 우장산과 수명산의 산둥성이를 따라 굽이쳐 돌아 마을이 형성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반(盤)’은 ‘굴(掘)’과도 통하므로 “굽은골”이라는 의미인데 강 서로와 화곡로가 교차되는 화곡3동은 S字를 이루고 있어 조선시대의 이름과 거의 맞아 떨어진다. 화곡동(禾谷洞)동명의 유래는 땅이 기름진 골짜기 사이에 벼가 잘 되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조선시대의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역촌리 일대가 오늘날 화곡동이란 이름의 근원지였다. 이곳 화곡동은 1963년부터 청계천 복개공사에 따른 철거민 등의 이주공간으로 10만단지·30만단지의 주택조성사업이 급격히 진행되었다.
(사진)
화곡동 1062~4호에 거주하셨던 원로주민 장재환씨가 당시 이곳 박장말의 이장으로 있을때 어느날 주택개발공사에서 사람이 와 화곡동 일대 10만평을 매입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이곳을 주택지로 개발하여 서울시로 편입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왔었다. 곧 장재환 이장은 마을사람들과 협의 후 10만평을 주택개발공사에 팔게 되었고 그후에도 20여만평이 추가로 주택공사로 팔려나감으로써 이 땅에 국민 주택들이 들어서고 화곡시범아파트가 세워짐으로써 6.25 전만 하더라도 산 짐승이 출몰하던 한적한 농촌마을이 오늘날 거대한 빌딩 숲으로 변하였으며 강서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2. 민담, 설화(지명에 얽힌 이야기)
① 김촌말(金村마을)
화곡3동 푸르지오 아파트 자리가 김촌말이었다. 약 400여년전 안동김씨(金宅基 할아버님)가 이곳에 자리잡게 되면서부터 최근 13대손까지 이마을에서 살게 됨으로써 김촌말이 형성되게 된 것이다. 화곡3동 272번지 자
리가 400여년전 자리잡은 바로 그 자리이며 김원용(金元鏞)선생께서 종가(宗家)를 지키고 있었는데 지금은 이 일대가 아파트 촌으로 바뀌고 말았다.
② 바탕골(바퉁골, 벼퉁골, 가자울)
화곡리라는 지명의 유래와 상통하는 지명이다. 이 일대 벼(乐)의 나락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여름철에 벼가 트는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트다’라는 뜻은 새싹이 돋아난다는 뜻으로 해석되며 “벼가트는 고을-벼튼골-벼퉁골-바퉁굴”로 音이 변했다는 것이다.(자료제공자: 金元鏞) 그러나 향토사학자 한종섭 선생은 바퉁골의 어원이 “바탕골”에서 나왔다고 한다. 즉, 바탕(지형이 낮고 평평한 곳)에 골(谷: 마을)이 있었다하여 바탕골인데 음이 변하여 바퉁골, 벼퉁골로 변했다 한다. “가자울”이라는 뜻은 어원을 찾기가 어렵다. 결국 김촌말의 또다른 지명들이다.
③ 쉬울고개(쉴고개)
신월동쪽에서 발산동쪽으로 넘어와 우장산을 넘어 역말을 통하여 염창쪽으로 넘어갈 때, 강서로 중간쯤인 이곳에 나지막한 고개가 있었다. 이 고개에서 길손은 잠시 숨을 돌려 쉬어가고 했으니 이곳을 쉬울고개(쉴고개)라고 하였다. 강서로에서 발산동 화곡여중, 덕원여고 들어가는 길과 반대편 양서아파트 길을 통해 우장산 역말(화곡6동: 강서구청앞)쪽으로 넘어가는 사거리 역할을 하는 이 고개는 지금도 중요한 교통요로가 되고 있다. 정확한 위치는 아마도 우장산동 제1단 지양서아파트 정문앞(1055번지 일대)부근으로 생각된다.
④ 화곡리(禾谷里) 유래
화곡5동 양서 1,2단지 아파트(1004번지) 정문옆에는 아파트 담을 끼고 성모병원쪽으로 내려가는 샛길이 있다. 이길은 강서로 건너 화곡3동 1024번지 조흥은행건물 옆으로 일직선으로 뚫린 길인데 조금 관심을 가지고 보면 이 길이 강서로가 생기기 훨씬 이전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길이었으며 양서아파트 정문쪽에 서서 길 아래를 내려다보면 저멀리 화곡1동, 7동은 물론 곰달래 마을 너머 신월동까지 한눈에 들어오게 됨을 알수 있다.
이곳을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가 조명해보자.
현재의 강서로는 1970년대에 만들어진 도로이며 옛날에 화곡역 근방은 朴씨와 張씨가 살던 박장말이었고 1026번지 일대와 우신아파트 근방은 元씨네가 살던 원촌말이 있었으며 나머지는 논밭들이었고 통행로는 바로 위에서 말하는 샛길이었던 것이다. 또한 양서아파트 정문쪽 언덕이 쉬울고개로서 길손이 역말(화곡6동)너머 염창동으로 가는 도중 이 고개에서 쉬어간다는 고개였다. 어느 양천현감이 어느해 가을날 이 고개에서 저머리 신월동 쪽을 바라보니 골짜기 사이 아래에 누렇게 잘 익은 벼가 비단같이 펼쳐져 있고 공같이 둥근 물체를 굴리면 촘촘한 벼이삭 위를 굴러 땅에 떨어지지 않고 저 아래까지 굴러 갈것만 같은 모습을 보고 “골짜기 사이에 기름진 벼가 잘되는 마을”이라고 하여 이곳 지명을 화곡리(禾谷 里)라고 하게 되었다 한다.
* 김촌말에 대한 택지개발 사업 안동金씨의 400여년간 역사가 깃든 이곳 “김촌말” 역시 시대변천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1992년 12월 23일자로 고시 제1992~729호에 의해 택지개발사업지구로 지정되어 전면적으로 재개발이 시작되었다. 화곡3동의 원뿌리인 김촌말은 이제 푸르지오 아파트 단지 등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화곡4동(禾谷4洞)
1. 동 유래
조선시대에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의 능동, 반곡리, 역촌리, 화곡리로 4개 마을이 모여 오늘날의 화곡동이 된 것으로 그중 능동(菱洞: 菱谷, 능꼴)은 오늘날 화곡4동의 원뿌리인 능곡(신곡초등학교 근방)마을의 십여채의 가구가 살았던 마을을 말하는 것이며, 더부리 마을 다음가는 큰 마을이었다. 한자로 능동(菱洞)이라 불리우던 이곳은 약간 습한 지대로 약용으로 쓰는 마름풀이 많이 났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는데, 현재 화곡4동 476-478번지 일대이다.
* 지역적 특징 화곡4동은 봉제산(鳳啼山) 남쪽 줄기아래 형성된 마을로 동쪽으로는 등촌로를 경계로 양천구 목4동과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경인고속도로를 경계로 양천구 신월동과 이웃하며 서쪽으로는 화곡2동과 접하고 있다. 화곡4동 능곡(菱谷)의 역사는 백제 상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니 강서구에서는 어쩌면 가장 오래된 곳중의 하나일 것이며, 명당자리로 알려진 이곳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이지방에 살고 있었던 세도가들의 묘역이 형성된 묘택지로 유명하였다. 능곡에는 고려, 조선조에 걸쳐 이곳 출신 인물들의 많은 분묘가 있었다고 한다.(劉基善선생의 “양천의 사”참조) 김준룡, 김두남, 김경문, 김덕원, 김조윤 등 원주김씨 묘역이 있었으며 안동권씨의 시조 권행(權幸)의 외아들 권인행(權仁幸: 허선문의 사위)의 분묘도 이곳에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1963년부터 주택조성사업이 시작되었고 이곳에도 개발의 바람은 불어왔으며 지금은 택지개발로 인해 분묘는 이장되거나 멸실되어 현재는 주택지로 변했다.
(사진)-김덕원 등 분묘지 흔적
2. 민담, 설화(지명에 얽힌 이야기)
① 봉제산(鳳啼山)과 “군골”
강서구청 동쪽에 위치한 산이 봉제산이며 표고 116.8m의 봉제산 동쪽에는 등촌2동, 남쪽에는 화곡 2,4동이 봉제산 산자락 아래 마을을 이루고 있다. 강서구의 명산으로 강서구민의 사랑을 받고있는 이 산 정상(철탑 바로 위)에는 2,000년 역사를 간직한 봉화터 흔적이 있다. 지름 6m 정도의 둥근 원을 그린 돌들이 파뭍혀 있는 것을 지금도 지나는 사람들은 무심하게 밟고 지나갈 것이나 이것은 백제 상고시대때의 봉화터 흔적인 것이다. 이곳에 올라서면 남쪽으로는 동작동 쪽에서 흐르는 강물이 보이며 서북쪽으로는 김포평야나 강북의 고양시 들판까지 한강의 흐름을 한눈에 볼수 있는 위치였다. 고대의 전쟁은 보다 신속히 많은 준비를 해야만 적의 공격을 퇴치 할수 있었으므로 적의 기습등을 사전에 포착하고 통신체계를 이루기 위해 봉제산 봉화터는 그만큼 중요한 전략적 백제 군사기지였다. 화곡4동 능꼴(菱谷) 즉 지금의 신정여상 뒷편 골짜기의 이름이 "군골"로서 이것은 군인들이 있었던 장소라 해서 전해진 땅이름이라 생각되는 것이다.(韓宗燮 “위례성 백제사” 참조)
(사진)-봉제산 정상의 옛날 한성 백제때 봉화터(1994년)
3. 역사적 사실
① 김덕원(金德遠)공 묘 출토의복: 보물 제672호(1980. 8. 23 지정)
1972년 3월 김덕원공(1634-1704)과 그의 부인 전주이씨의 합장묘에서 출토된 유물로 총 53종 68점에 달하는데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거의 모두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어 우리나라 이조중기 상류사회의 복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김덕원공은 현종 3년인 166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 경상감사, 대사간, 형조판서, 예조판서등을 두루거쳐 1689년에는 우의정이 되셨다. 한편 출토된 의복은 거의 전부 견(絹)으로 만든 것이며 운문(雲紋)이나 화문(花紋)을 넣어서 짠 단류(緞類) 도 적지 않다. 그 당시 이불 5채 등을 포함한 53종의 다양한 복식을 17세기 조선시대의 복식연구에 중대한 의미를 주며 뚜렷한 통계치를 잡을 수 있게 된 점이 괄목할 만하다고 하겠다. 현재 후손들이 보존관리하고 있다.
(사진)-김덕원공묘 출토의복
우장산동(雨裝山洞)
1. 동 유래
파려산(玻瓈山)이라고도 불리우는 수명산(壽命山: 117.7m)은 마치 밥주발을 엎어놓은 모습이라 하여 발산(鉢山)이라는 또하나의 이름이 있으며, 이로 인하여 수명산 아랫마을 이름이 예부터 발산리였던 것이다. 수명산 서쪽은 외발산리(발산1동)이며 우장산과 수명산 사이에 있는 마을은 내발산리(발산2동)였다. 그러나 변화된 도시행정환경에 걸맞은 행정 효율성 제고와 주민의 편익증진을 위해 행정자치부의 소규모 동 통폐합 추진지침 및 보완지침(2007.8.31)에 의거 2008.8.25일자로 발산2동(내발산리)과 화곡5동(원당리)이 통합되어 우장산동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우장산동은 결국 옛날의 원당리(元堂里)와 내발산리(內鉢山里) 2개의 마을이 합해져 형성된 동(洞)이며, 북쪽으로는 공항로를 경계로 하여 등촌3동과 이웃하고 동쪽은 우장산 등성이를 경계로 화곡6동과 마주하며 서쪽은 외발산동(발산1동)과 경계하고 남쪽은 화곡3동과 접하고 있다.
2. 민담, 설화
(1) 지명에 얽힌 이야기
① 우장산(雨裝山)
우장산은 남쪽으로 2개의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으며 각각 산이름이 있으나 현재는 통칭하여 “우장산”이라고 부른다. - 북쪽산: 검두산(鈐頭山), 검덕산(鈐德山), 검지산(劍支山), 검둥뫼라고 부르며 현재 “새마을 탑”이 있는 우장
산 롯데캐슬아파트가 있는 산을 말한다.
- 남쪽산: 원당산(元堂山), 이라고 부르며 현재 「한국폴리텍1대학」이 있는 산을 말한다. 언제부터인지 검두산과 원당산에 기우제를 지내면서부터 두 산을 합쳐 “우장산”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는데, 기우제를 지낼때 제주(祭主)가 세 번째 기우제를 지내는 날에는 언제나 소나기가 쏟아져 내리므로 이날은 참가자 모두가 우장(雨裝)을 갖추고 산을 올라갔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② 원당리(元堂里)
원당리는 원당산(元堂山)자락 아랫마을로서 우장산 아이파크 아파트 일대에 있었던 마을이었다. 공항로와 만나는 즉 강서로 동쪽 발산동을 말하는 것이다. 원래 우장산 남쪽 봉우리인 원당산에 당(堂)집이 있었다 하여 “원래 당집이 있던 마을”이라는 원당리(元堂里)라 불리웠던 것이라 한다.
③ 간뎃말
가운데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에 내발산동의 중심지였다. 내발산초등학교가 있는 곳에서부터 687번지와 700번지 일대이다.
④ 웃 말
영일여중, 명덕여고가 있는 일대의 동네를 윗말 또는 웃말이라고 하였다.
⑤ 대장간 모퉁이
우장산 힐스테이트 아파트가 있는 곳은 농기구를 만드는 대장간이 있던 곳이었다.
⑥ 박장말(朴長마을)
강서로가 생기기 前 화곡3동과 5동에 걸쳐 농심가 근방에 형성되어 있던 마을 1062-1064, 1052-1055, 1030-1031번지 일대이다. 상주 朴씨와 인동張씨가 약 200여년간 모여살던 곳이다.
⑦ 범바위(봉바위)
원촌말 뒷산이었던 화곡5동 산80-3(우신아파트)자리에 범(虎)모양의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이 바위를 범바위라 하였는데 음(音)이 변하여 봉바위라고도 하였다. 이곳 마을주민들은 범바위에서 마을의 평안과 번성을 기원하였으며, 자손의 귀한 원(元)씨 집안에서도 치성을 드린 결과 많은 자손을 두게되었으며 집안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이 범바위 자리에 우신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바위를 부숴버리고 그 위에 아파트를 세움으로서 범바위는 전설속으로 살아지고 말았다.
⑧ 돌안말
우신아파트 자리 뒷산에는 바위와 같은 돌(石)이 많았으며 이곳에 집 한 채(유씨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음)가 있었는데 이곳을 돌안말이라 했다. 우신아파트 뒤 화곡5동 사무소 일대이다.
(2) 전 설
① 경문밭(慶門田)
조선조 7대 임금인 세조(世祖)가 아직 보위에 오르기 전 수양대군으로 있을 때 이 곳을 지나면서 하룻밤을 유숙하게 되었다고 한다. 곧 수양대군이 무술을 연마하기 위해 말을 타고 김포의 통진 쪽으로 다녀올때 길을 잘못들은 데다가 날이 저물자 가까이 불빛이 보이는 마을에서 쉬게 되었던 것이다. 이 마을에는 효자와 효부가 많이 살았는데 수양대군은 이들이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이 그지없이 숭고해보여 날이 밝은 즉시 도성안으로 들어가 대군의 이름으로 이 마을사람 전체의 효성을 기리기 위한 이문(里門)을 세우도록 하였다. 또 이를 축하하는 뜻에서 경문(慶門)도 세워 주었는데 이때 수명산(鉢山)이 소리내어 기쁨의 울음을 울었다 하여 발음(鉢音)말이 생겼으며 또한 동네의 이름을 오랫동안 빛날것이라는 뜻으로 광명리(光明里)라 하였다. 그후 광명리 가 광명이, 굉명이로 변하였으며 그 후 사람들이 차츰 늘어나자 고개너머에 이곳사람들이 이주해 살면서 먼저 마을을 구굉명, 새로운 마을을 신굉명이라고 하였다. 또한 수양대군이 경문(慶門)을 세워주며 경문의 유지관리를 위해 나라에서 이마을에 밭을 내려주었으니 이 밭을 경문밭이라 한다. 명덕고교, 영일여중과 가곡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는 땅과 부천으로 넘어가는 삼거리 사이의 논밭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② 말 무덤터
어느 재상이 자식처럼 여기고 돌보던 애마가 죽자 성대한 장례를 치루고 말을 묻었다는 말 무덤터가 우장산(검덕산)자락 아래에 있었으니 현재 관문주유소 자리라고 전한다.
③ 아리랑 고개
강서구민회관 고갯길을 아리랑고개라고 하였다. 일제시대에 국방도로(현 공항로)가 개설되면서 상여가 국방도로를 지나갈 수 없도록 하였기에 발산동과 가양동 또는 공항동의 상여들은 우장산 고갯길을 통하여 역촌리(강서구청앞)의 공동묘지로 지나갔다. 따라서 이곳 원당리 주민들이 상여를 막고 지나가지 못하게 하기도 하였다 한다.
(사진)-아리랑 고개 귀인의 장례식
3. 문화유씨 집성촌
원당의 우장산 자락에 있는 옛 발산2동의 2, 9, 13통 일대는 문화유씨 집성촌(文化柳氏 集姓村)이었다. 고려 태조 때의 공신 유차달(柳車達)을 시조로 하고 있는 문화유씨(文化柳氏)는 조선조 숙종 때 명신공(命新公) 유담후(柳譚厚)가 개화동쪽에서 농사를 짓다가 새로운 농토를 찾아 정착한 곳이 이곳 우장산 기슭으로 한 두집이 이주하면서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급격한 근대화 과정에서 시골에서나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집성촌을 서울에서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문화유씨 집성촌은 모두 16寸 이내의 촌수로 혈연관계를 유지하는데 자손이 번성하고 부귀가 끊임없이 계속되는 이곳의 지세에 대해서 우장산과 앞의 원당평야 그리고 한강이 마을앞 먼곳에서 동류서향(東流西向)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이 때문에 내발산동 문화유씨 주민들은 우장산을 영산(靈山)으로 여겨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에는 동네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 우장산 산신제 장소: 우장산 가든 뒷편
검덕산 산신제 장소: 경민사 절뒤
한국폴리텍1대학(서울강서캠퍼스)
우장산 산 60-1번지 우장산 공원 내에는 한국폴리텍1대학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폴리텍1대학이 1990년
7월 27일 서울시립청소년직업훈련원으로 서울시에서 운영하다가 1998년 3월 27일 기능대학법 및 교육관
계법에 의한 전문대학인 서울시립기능대학으로 승격하였으며 이듬해인 1999년 5월 1일 학교법인 기능대
학에 통합되었다. 그뒤 2001년 1월 15일 서울강서기능대학으로 개명되었으나 21세기 기술강국을 이끌어나갈 IT직종의 전
문기술자 양성을 위해 기술단지로서의 디지털 정보화, IT직종화로 세계화 시대에 부응할 수 있는 교육체
계를 갖추어 국가에서 지원하는 지금의 서울정보기능대학으로 2002년 1월 1일 다시 개편되었으며 또다시
2006년 3월 한국폴리텍1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사진)-한국폴리텍1대학
화곡6동(禾谷6洞)
1. 동 유래
화곡6동은 원래 역촌마을(驛村: 역말)자리로서 현재 강서구 관내에서는 가장 중심지가 되고 있어 고금(古今)의 지명이 서로 상충함을 알 수 있다. 지금의 강서구청과 강서경찰서 주변과 해바라기주유소가 자리하고 있는 일대를 역말이라고 하였으며 동시에 역원을 관리하던 추씨네 마을이라고도 하였다.
2. 민담, 설화
(1) 지명에 얽힌 이야기
① 역말(驛村)
화곡6동 984, 985, 986번지 일대에 역말(驛村)이 있었고 추씨(秋氏)집안 약 4∼5가구가 역을 관리하였다. 역촌이라 함은 고려, 조선시대의 주요교통수단으로 전국에 약 500여개소의 역(驛)이 있다고 경국대전에 기록되어 있으며 주요도로의 약 30리 거리마다 역마(驛馬)와 역정(驛丁)을 배치하여 관청의 공문을 체송(遞送)하며, 공무로 여행하는 자에게 마필의 제공과 숙식을 알선해 주며 진상(進上)과 공납물의 수송을 담당하였다.
(사진)-옛 역말자리의 현재모습
② 역말방죽(金見之堰)
현 강서구청과 강서경찰서 일대가 “역말방죽”자리이며 화곡동 일대의 논에 물을 대어주는 수리시설이었다. 현 화곡6동사무소 옆 골목이 방죽제방으로 이곳에서부터 구도로까지이며 남쪽으로 예다원 건물을 돌아 제방이 둘러져 있었으므로 강서구청, 강서경찰서, 군인아파트 등이 방죽자리였던 것이다.
③ 도당재 샘물
우장산 배드민턴장 계곡아래(984-1호 앞) 약수터가 하나가 있다.
(사진)-도당재 샘물. 자가용이 있는 위쪽에 신목이 있었고 오른쪽 전신주 근방에는 김도현 박사 부친의 묘가 있었다.
이곳이 도당재 샘물로서 우장산 기우제의 시원(始元)이 바로 여기였으며 우장산 정기가 담긴 이 샘물은 오늘날 이 동네주민의 가장 사랑받는 약수터로 변했다. 지금도 추봉하씨등 원로주민들이 마을의 평안과 주민들의 안녕을 위해 매년 음력 10월 3일 이 샘물로 조라술을 빚어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조라술: 도당재 샘물로 술을 빚어 샘물 위 산에 파묻은 다음 3일 뒤에 꺼내어 제삿술로 쓰는데 그 술맛이 참으로 뛰어나다 한다.)
④ 빗뒤 골짜기(비림)
화곡6동 1093번지 88체육관이 있는 일대와 공항로 건너 등촌1동 661번지 일대이다. 역대 양천현감의 선정비등 비석이 우장산 북동쪽 산기슭에 세워져 있으므로 해서 비(碑)가 서 있는 뒤쪽골짜기라는 의미로 붙여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 없어졌으며 일부가 양천향교 앞에 이전되어 보존되고 있다.
(2) 전설
① 신목(神木)에 얽힌 이야기
6·25전 도당재 샘물 바로위(배드민턴장 바로 옆)에는 아람드리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으며 그 속에는 수백년 묵은 소나무가 한그루 있어 이 역말의 신목으로 섬김을 받아왔었다. 6·25가 일어나던 날밤에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휘몰아치며 소나무가 쓰러지고 말았는데 마을의 신목(神木)이 쓰러짐에 마을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도 이 동네 주민 한 사람이 이 쓰러진 신목을 가져다 불을 때었다. 불을 땐 다음날에 이 사람은
목이 돌아가고 몸을 움직일 수 없이 굳어버렸기에 마을 산신의 벌을 받았다고 하여 산신께 용서를 빌며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도 하였다 한다.(신목은984-1호옆 도당재 샘물 바로 위 산에 있었다 한다. 또한 도당재 샘물의 바로 오른쪽에는 화곡동 개발 전까지 초대 재무장관이며 독립투사였던 염창동출신의 김도연박사의 부친 묘가 있었던 자리이다.)
② 9·28 수복 때의 전투와 우장산 산신의 가호
9·28 수복 전날 강화지방에서 밀고 들어오는 아군과 밀리는 인민군과의 전투가 이곳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역말마을을 사이에 두고 뒷산인 우장산에 포진한 아군과 봉제산 일대에 포진한 인민군과의 엄청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때 피아간의 사상자는 500여명이 넘었다. 그러나 전쟁터 가운데에 노출된 역말마을에는 유탄에 맞아 부상당한 1명 외에는 사상자가 한사람도 없었다. 유탄에 맞은 사람도 현재까지 정 정하게 살아있다. 이는 오직 이 마을을 돌보시는 우장산 산신의 가호라고 이 마을 원로주민들은 굳게 믿고 있으며 지금도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기타 -새마을 중앙본부 화곡6동 1093번지에는 현재 우장산 롯데캐슬아파트와 88체육센터가 있다. 예전에 이곳은 초교파에서 운영하는 선명회 합창단이 있었으며, 1980.12.1부터 2000.6.25일까지 “새마을중앙본부”가 들어서 있다가 현재 강남구 대치동으로 이사하였다.
(사진)-옛날 빗뒤 골짜기였던 80년대 새마을중앙본부 (사진)가 있었고 현재 롯데낙천대아파트 자리.
새마을 운동의 시발은 1970년 4월 22일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지방장관회의에서 “우리 스스로가 우리 마을을 우리 손으로 가꾸어 나간다는 자조(自助), 자립정신(自立精神)을 불러 일으켜 땀 흘려 일한다면 모든 마을이 멀지 않아 잘 살고 아담한 마을로 그 모습이 바뀌어 지리라고 확신한다. 이 운동을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라고 한데서부터 시작되었다. 1986년 7월 7일 새마을운동의 영속적인 발전과 새마을지도자 정신을 표상하는 [새마을지도자 탑]이 88체육센터 뒷산인 우장산 정상에 홀로 남아있어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시작된 “새마을 운동”의 역사를 들려주고 있다. 새마을 탑은 화합과 단결을 상징하기 위해 전국 8도에서 석재를 모아 탑을 쌓았다고 한다.)
-그리스도 신학대학교 화곡6동 953번지에 강서구에서 유일한 종합대학인 그리스도 신학대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1958년 4월 한국기독학원으로 개교, 초대교장에 홀튼선교사가 취임. 1962년 4월 이곳에 본관을 준공하였으며 1965년 2월 학교법인 김포그리스도교회 신학교로 개칭하였으며 1966년 2월에 문교부로부터 정규신학교 인가를 받아 초대학장에 다니엘하딩 선교사가 취임하였고 1973년 12월 그리스도신학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1997년 3월 1일자로 “그리스도 신학대학교”로 개명되었다.
화곡8동(禾谷8洞)
1. 동 유래
양천군 남산면 능동(菱洞)에 속하였던 더부리마을이 오늘날 화곡8동이 되었다. 봉제산 줄기인 까치산 아래 오목한 곳에 자리잡은 마을로서 약 10여 호가 오순도순 모여 살던 곳이었다.
※ 지역적 특징 화곡8동은 북쪽으로 까치산을 경계로 하여 화곡본동과 이웃하며 남서쪽으로는 화곡 1동과 동쪽으로는 화곡2동, 그리고 남쪽으로는 양천구와 접하며 동 한가운데를 곰달래길이 관통하여 지나가는 마을이다. 원래 이곳은 전형적인 논밭들이었고 까치산에는 숲이 우거져 산짐승들이 많은 곳으로 까치산 중턱(현재 까치터널 입구)의 마치 삼태기 모양의 오목한 곳에 더부리라고 하는 마을이 있었으며 10여 채의 민가가 있었다.
2. 민담, 설화(지명에 얽힌 이야기)
① 더부리 고개(백구사 고개)
화곡1동 화곡아파트를 조금 지나 화곡8동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말한다. 원래의 지명은 더부리 고개인데 언제부터인지 백구사고개라는 수사적 지명이 생기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개발계획과 더불어 이 고갯길(347번지 근방)에 백구사복덕방이 생기면서부터 복덕방 이름에서 나온 지명일 것으로 짐작된다. 이 고개를 넘어가면 더부리마을(현 화곡8동 까치터널 입구)에 들어서게 되므로 더 부리 고개라고 하였다. 옛날 이 더부리고개에는 봄이 되면 개나리와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서 이웃마을 처녀총각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고 한다. 더부리 처녀들을 가슴에 담고 사모하는 이웃마을 청년이 더부러 고개를 몰래 넘다가 더부리 청년들에게 몰매를 맞는 일이 허다하였다는 이야기도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아마도 “더불어(興) 산다”라는 뜻을 지닌 이 더부리마을과 더부리고개 이야기는 이웃과 아웅다웅 지내면서도 같이 협조하며 살아야 하는 세상살이 모습을 상징하는 이야기로 생각된다.
② 배다리 마을
지금의 까치터널 입구 근방은 지형이 마치 삼태기 모양의 오목한 곳으로 이곳에 십여 가구의 민가가 오순도순 살고 있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에 전반적으로 지형이 낮은 양천현(강서구, 양천구)일대의 대부분이 물속에 잠겼을 때 더부리 마을 역시 침수 되었으며 이때 더부리마을은 널판지로 띠배를 만들어 건너다녔다고 하여 별명이 배다리가 되었다고 전한다.
(사진)-까치산역 근방이 엣날 배다리골 마을이었음.
③ 되무골
339번지 제일은행지점 근방이 옛날 되무골이란 마을이었다.
④ 술청모탱이
896번지 근방에서 해방전에 두세가구가 있었는데 그중 한집은 이 근방에서 유일한 구멍가게였으며 술도 팔고 하여 동네사람들이 모이는 사랑방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갈 때 술청모퉁이를 돌아서 간다는 말을 술청모탱이 지나간다라고 했다 한다.
(사진)-술청모퉁이의 현재모습
가양1동(加陽1洞)
1. 동 유래
가양동(加陽洞)의 동명은 가마동과 고양리가 합쳐지면서 비롯된다. 즉 가마동(加麻洞)은 고양리(古陽里)와 함께 가양동의 동명이 유래된 곳인데 지금의 (주)세원공장 언저리에 옛날 삼밭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양천군의 중심지역에 해당하였다.
2. 민담, 설화(지명에 얽힌 이야기)
① 고양리(古楊里)
고양리는 굉이말이라고도 하는데 고양이의 방언이 굉이이기 때문이다. 양천초등학교가 있는 근방으로 궁산의 남쪽 볕이 잘 드는 곳에 위치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양리라는 지명은 아마도 이 일대가 양천현아가 가까이 있기 때문에 오래된 동네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 같기도 하다.
② 향교동(鄕校洞)
향교동은 가양동 234번지 양천향교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향교동에 사는 사람은 대개 양천향교의 전답을 소작하였다.
③ 성재정리(城才井里)
성재정리는 옛날 양천고을의 원님만 먹을 수 있는 우물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마도 현재 대아동신아파트 정문 건너편에 있는 지남교회 옆 공터 자리(성재정은행나무 길 입구)로 추측된다.
④ 보호수에 얽힌 설화(성재정 은행나무: 가양1동 146-5)
어떤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고 물맛이 좋아 양천 성주(城主: 현감을 성주로 부를때)가 사용했다고 해서 성재정(城才井: 성주우물)이라고 불리웠던 우물터 옆에는 한산모종(寒山暮鐘)의 전설을 간직한 수령 400년이 된 “성재정 은행나무”가 있어 마을 사람들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다.
※ 한산모종(寒山暮鐘) 성재정 은행나무에 둥지를 튼 까치는 구렁이에게 자기의 새끼가 잡혀 먹힐 뻔 했던 위급한 순간에 구렁이를 죽이고 새끼를 구해준 선비에게 은혜를 갚는다는 이야기이다. 구렁이를 죽인 선비에게 복수하려는 암구렁이 때문에 선비가 위험에 빠지자, 까치는 몸을 종에 부딪혀 종소리를 내 은혜를 갚고 죽었다고 하는 까치전설이 이곳 성재정 은행나무에 서려있다.
⑤ 상개개울, 쌍개받이 개울
궁산의 성재정으로부터 흘러내린 물이 개울을 이루는데 이개울을 상개개울이라 하였다. 궁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가양동 벌판의 농수가 되는데 1926년부터 1934년까지 조선총독부에서 한강 연안에 제방을 축조하여 농경지를 확보하고 양동·양서지구에 수리조합을 설치하였다. 이때 설치된 것이 한강 수리조합 신곡리 양수장이다. 외발산동과 지금은 공항동이 된 송정리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가양동의 벌판에서 합쳐져 큰 수로를 형성. 한강으로 유입되는데 가양동의 합수점을 쌍개받이 개울이다 하였다.
⑥ 노바리 동산
마곡단지로 불리우는 논 가운데(공항로변)에 조그만 동산이 있었다.
⑦ 보룡산(보룡뫼)
변전소가 있는 조그만 동산인데, 주택으로 뒤덮여 동산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⑧ 하마비(下馬碑) 부락
가양동 159-2(현재 6차선 신설도로 4거리, 확장공사전 철공소가 있었던 자리임)에 하마비가 있어서 이 일대를 하마비부락이라 하였다. 이조 태종 13년(1413)에 종묘·대궐 앞에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란 내용의 하마비를 설치한 이래 전국향교 등에 파급되었으며 “대소 인원을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공경심을 나타내는 표석으로 이곳에도 양천향교를 공경하기 위해 하마비가 세워졌으나, 6·25이후 파손되어 농지수로 빨래터에 토막난 채로 빨 래판으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옛 역사의 발자취가 소멸됨을 안타까워 하던 이곳 토착주민인 향토연구가 유기선(劉基善)선생께서 사비를 들여서라도 이를 복원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원래 위치가 4거리가 되어 달리 복원할 장소를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던 중 양천초등학교 입구 소공원에 복원하여 놓았다.
3. 역사적 사실
① 양천초등학교
가양동 273번지에 위치한 양천초등학교는 강서구에서 110여년이란 오랜 세월동안 이 지역의 현대식 교육을 담당하여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문학교이다. 1900년(광무4년)2월 현대식 교육으로 백성을 일깨워야만 한다는 고종황제의 의지로 전국에 신식 교육기관인 소학교를 몇 군데 세웠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양천공립소학교이다. 당시 양천현아(가양동 239번지 일대)의 향청(鄕廳)에 설립된 양천공립소학교 대표자는 권봉규(權鵬奎)였다. 그 뒤 1907년 4월 1일 공립보통학교로 되었으며 그 뒤 학제개편에 따라 양천향교의 옛날식 교육이 폐지되고 향교는 오직 공자의 문묘(文廟)만을 지키게 되자 양천현아의 향청에 설치되어 있던 양천공립소학교가 1908년 8월 양천향교 명륜당으로 교사를 이전하여 1911년까지 3년 동안 향교에서 학교가 운영되다가 또다시 양천현아의 객사로 학교를 이전하였으며 그 뒤 1922년 4월 현재의 위치에 학교교사를 신축하여 이전 개교하면서 처음으로 6학년 학제를 실시, 동시에 여자를 모집하니 이 지방에 최초의 여성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 양천지역은 물론 부천군 오정면 고강리, 김포군 고촌면 전호리, 경기도 고양군 지도면 행주리 등의 아동들이 양천초등학교로 유학을 와 가양동 일대에 기숙하는 등 근방에는 양천초등학교가 하나뿐이므로 학생수가 많아서 교 실부족으로 수업이 어려웠으니 이때가 양천초등학교의 전성기였다. 그 후 신정리(은행정 부락)에 부설 신정간이학교를 개교(1930년 4월 5일)하고 그 뒤에 송정초등학교(1945년 5월)가 설립되는 등 1면 1개교 방침으로 사방에 학교가 설립되게 되니 양천초등학교는 학생수가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다.(丁大鉉 저: 陽川鄕土誌 참조)
(사진)-양천초등학교
(사진)-옛날 양천현아터에는 빌딩과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② 양천현아(陽川縣衙)
가양동 239번지에 있었던 양천현아는 중앙에 동헌인 종해헌, 그 동쪽에는 객관인 파릉관이 있고 남쪽에는 아전들이 있는 녹청, 북쪽에는 향청이 있었다. 또 향청의 동쪽에는 장교청. 그 앞의 좌우에 창고가 있었다. 이중 종해헌은 양천의 명문집안이었던 원주김씨의 문중에서 배출한 명필인 만교(晩橋) 김경문(金敬文)(1602∼1692)이 1679년(숙종5년)에 현판 글씨를 써서 붙였다. 당시는 조선이 명나라의 계승자로 곧 중화문화(中華文化)의 유일한 담당자라는 자부심이 상하에 팽배해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조선이 곧 중화라는 자부심으로 고유색 짙은 진경문화(眞景文化)를 창달해가고 있던 사대부들은 모든 면에서 우리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표출해내고 싶어했다. 종해(宗海)란 바로 종주(宗主)의 뜻을 가진 것이다. 명이 멸망하고 바닷길로나마 다니던 조종(朝宗)의 길이 끊어졌으니 바로 이곳이 종해(宗海)라는 의미로 이름지어졌던 것이다. 사천 이병연( 川 李秉淵)은 이런 종해헌에 대해 종해청조(宗海聽潮)라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겸재에게 보냄으로써 화제로 삼도록 하였다.
크구나 믿을만한 너른 바다. 大哉滄海信(대재창해신) 감개어려 조수 밀리는 노래 듣는다. 感慨坐潮歌(감개좌조가) 조종길 막힌 후에. 路 阻朝宗後(노조조종후) 하늘과 땅 노기(怒氣)만 가득하다. 乾坤怒氣多(건곤노기다)
1797년(正祖 21년) 가을에 원종(元宗)의 능인 장릉으로 정조(正祖)가 행차하면서 종해헌에 잠시 머물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한강 가을물결 무명베를 펼쳐 놓은 듯, 江韓秋濤匹練橫(강한추도필연횡) 무지개다리 밟고 가니 말발굽 가벼웁다. 虹橋踏過萬蹄輕(홍교답과만제경) 사방들녘 바라보니 누런구름 일색인데. 爲看四野黃雲色(위간사야황운색) 양천 일사(一舍)에서 잠시 군대 쉬어간다. 一舍陽川少駐兵(일사양천소주병)
한편 양천현아의 파릉관은 1606(宣祖 39년) 4월 11일 사신으로 왔던 중국의 한림 학사 주지번(朱之蕃)이 이 객관에 와서 노닐며 파릉관(巴陵館)이라 이름짓고 자필 현판을 걸어놓았다. 이 때문에 양천별호를 파릉(巴陵)이라 한다. 파릉관(巴陵館)은 양천현아의 동헌보다 60여년 먼저 있었으니 중국 사신들이 오면 한강연안의 이곳으로 자주 찾았던 것도 무리가 아닐 듯 싶다. 양천 현아 부근 궁산 기슭에는 은촉루(銀燭樓)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그 곳의 경치 또한 절경이었다. 고려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윤자(尹慈)는 「고객영조해람행 (賈客迎潮解纜行)」이라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은촉루에서 읊었다.
어옹주포수간좌(漁翁住浦垂竿坐,) : 어옹(漁翁)은 갯가에 앉아 낚싯대 드리우고, 고객영조해람행(賈客迎潮解纜行.) : 상인들 조수 만나 배 띄워 간다. 파면백구응소아(波面白鷗應笑我,) : 파도 위 백구들 응당 날 웃겠지만, 일생하사반부명(一生何事絆浮名.) : 일생 동안 무슨 일로 헛된 이름에 얽매겠는가.
은촉루에서 한강을 굽어보면 도도히 흐르는 물과 낚시하는 어옹(漁翁)이 한 폭의 그림처럼 조화를 이루매 벼슬도 명예도 모두 버리고 사는 것이 참된 삶으로 보여졌던 것이다.
[崔完秀 著 “겸재(정선)의 진경산수화첩”에서]
③ 겸재기념관
우리나라 산천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진경산수화풍을 창안한 겸재정선(1676∼1759)선생의 위대한 예술혼을 기리고자, 강서구 가양1동 243의 1번지 궁산 자락 아래 겸재정선의 발자취가 새겨있는 옛 양천현아 터 한편에 겸재정선기념관이 2009년 4월 23일 개관하였다. 겸재가 양천 현령으로 재직(1740∼1745)했고 이 시기에 궁산 소악루 등에서 그린 ‘한수주유도’ 및 ‘경교명승첩’ ‘양천팔경첩’ 등 진경산수화 걸작을 남긴 점 때문에 이 지역에 세워진 것이다. 국가 예산 25억원. 서울시 예산 103억원 등 총 169억원을 들여 연면적 3.305㎡ 공간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인 기념관은 옛 양천현아의 모습을 복원한 양천현아실, 겸재의 진경산수화를 감상할 수 있는 상설전시관인 겸재기념실 및 기획전시실 등으로 꾸며져 있다. 겸재정선기념관은 겸재에 대한 소개 외에도 다양한 문화예술행사와 기획전시, 세미나 등을 통하여 구민의 문화예술저변확대에 노력하고 강서구가 문화예술의 고장임을 알리는데 전초가지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④ 양천향교(陽川鄕校 : 서울시 기념물 제8호)
양천향교는 서울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향교인데 유교의 교리를 교육 덕목으로 하여 수학하던 조선시대의 지방교육기관이다. 공자의 도의사상은 주자에 이르러서는 성리학설로 경주되어 인의도심(仁義道心)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철학적 경지를 개척한다. 이러한 유교가 고려말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선시대에는 국시로 정해졌고 유교가 유학을 널리 펴기 위한 교육기관을 각 군과 각 군과 현에 확장·설치하였다. 1411년(太宗 11)에 설치된 양천향교도 많은 유생과학자·정치가 등을 배출하였다.
(사진)-양천향교
오늘날 향교에서는 봄·가을 2회(음력 2. 8월 初丁日)에 걸쳐 공자를 비롯한 27성현에게 문묘제(文廟祭)를 지내고 있으며 매년 옛 진사시험(進士試)을 모방하여 청소년 서예백일장을 개최하며 충효교실, 전통예절교실 운영과 한글·서예·사군자 등을 지도하고 있고, 전통혼례식장으로도 개방 활용하고 있다.
(사진)-1600년부터~1953년까지 양천현감 군수들의 선정비
⁂ 향교앞 비림(碑林)해석 향교앞 정문 좌측에는 1600년 전후에서부터 1800년 전후까지 양천 현령 등으로 재직하던 사람들의 선정비 등이 있다. 양천현이 서울시에 편입되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전 여러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모아 이곳 향교 정문 옆에 모아둔 비림(碑林)인데, 6개 비석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나머지 3개중 2개는 탁본을 떠서 확인 할 수 있었고, 1개는 마모가 너무 심하여 탁본으로도 확인이 불가하므로 양천향토지등을 참고 유추하였고 년대 확인은 간지와 연호 등을 중심으로 확인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성명 |
비문내용 |
입석간지 |
제작년대 |
비고 |
라 흡 |
故城主羅公恰善政碑 고성주라공흡선정비 |
萬曆丙戌二月日立 만력병술이월일입 |
1586 선조19년 |
탁본불가 |
박 환 |
行縣令朴公煥淸德善政碑 행현령박공환청덕선정비 |
順治十一年甲午四月日立 순치십일년갑오사월일입 |
1654 효종5년 |
탁본확인 |
이도룡 |
縣令李公徒龍淸德善政碑 현령이공도룡청덕선정비 |
四月日立 사월일입 |
1665경 현종5년 |
탁본확인 |
이덕소 |
懸令李公德邵愛民善政碑 현령이공덕소애민선정비 |
壅正五年四月日立 옹정오년사월일입 |
1727 영조3년 |
육안확인 |
송우연 |
行懸令宋侯友淵淸德愛民善政碑 행현령송후우연청덕애민선정비 |
道光二年四月日立 도광이년사월일입 |
1822 순조22년 |
육안확인 |
김진교 |
懸令金侯晉敎廉公宇惠永世不忘碑 현령김후진교염공우혜영세불망비 |
道光十四年日立 도광십사년일입 |
1834 순조34년 |
육안확인 |
서칠보 |
行懸令徐侯七輔永世不忘碑 행현령서후칠보영세불망비 |
咸豊七年十月日立 함풍칠년십월일입 |
1857 철종7년 |
육안확인 |
김보현 |
觀察使金公輔鉉永世不忘碑 관찰사김공보현영세불망비 |
光緖六年庚辰三月日立 광서육년경진삼월일입 |
1880 고종15년 |
육안확인 |
이한경 |
行懸令李侯漢慶愛民善政碑 행현령이후한경애민선정비 |
光緖六年庚辰三月日立 광서육년경진삼월일입 |
1880 고종15년 |
육안확인 |
⑤ 官山(양천고성지: 사적 제372호)
신증동국여지승람(중종 25, 1503년),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 문헌기록에 의하면 성산(城山)에 고성(古城)이 있는데, 그 둘레는 726척(약 218m)이고 지금은 성으로서의 기능은 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이 산의 이름은 파산(巴山)·성산(城山)·궁산(宮山)·관산(關山)·진산(鎭山) 등 여러 이름이 붙을 만큼 다양하다. 파산이라 함은 삼국시대에 주변의 땅 이름이 제차파의(齊次巴衣)로서 이것에 연유된 것이며, 성산이라 함은 성(城)이 있기 때문에 불리워진 이름이고, 진산은 양천 고을의 관방설비가 되어 있어서 붙여진 것이다. 관산은 빗장 ‘관(關)’자를 썼는데, 한강을 지키는 빗장 역할을 했던 산이라 해서 지어진 이름으로 건너 행주산성과 함께 빗장처럼 한강을 지킬 수있는 산이다. 궁산은 양천향교가 있어서 궁(宮)으로 표시했던 것으로 공자(孔子)를 숭배하는 유교(儒敎)사상에 의해 향교를 학궁(學宮)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현재 국립지리원의 표준명칭도 궁산이다.(향교를 학문의 궁궐(學宮)이라고 하였음) 성(城)의 꽤 많은부분이 6·25동란 직전만 하더라도 남아있었으나 환도직후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훼손·파멸되어 지금은 인위적으로 쌓아 올린 몇 개의 석축과 겨우 십여미터 정도되는 길이의 성벽흔적만이 남아 있어 석성인지 아닌지 얼핏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이다. 궁산이 갖는 역사적 의미로는 임진왜란때 전라창의사 김천일, 전라소모사 변이중,강화의병장 우성전 등이 김포, 통진, 양천, 강화, 인천의병들을 이끌고 이 산에 유진하였다가 한강을 건너 권율장군을 도와 행주대첩에 참가하여 크게 승리한 것을 들수 있다. 또한 양천현감들은 매일 저녁 궁산에 올라 강건너 안현(길마재)에서 피어 오르는 봉화를 간심(看審)하여 국가의 안위를 살피기도 하였다.
- 북쪽: 인왕산 서쪽 안현(鞍峴: 길마재) 봉화를 감시 - 남쪽: 부천 장명산 봉화를 감시 - 동쪽: 목멱산(木覓山: 남산) 제5봉수를 감시 - 서쪽: 파주 오두산성과 개화산 봉화를 감시
⑥ 정자(누정: 樓亭)
궁산에 있었던 누정의 정확한 위치, 건립시기, 규모, 형태, 소멸경위 등의 유래에 관하여 정리된 기록은 없지만 한강변을 중심으로 특히 경치가 뛰어난 이 지역에 춘초정, 망호정, 춘산와, 제일정, 소악루 등 많은 누정이 있었다는 것을 문집을 통해 확인해 볼 수가 있다.
⑦ 소악루(小岳樓)
가양동 한강변의 뛰어난 절경은 중국 동정호의 악양루에서 바라보는 경치와 버금간다 하여 누군가가 이곳에 악양루라는 정자를 지어놓았는데 영조때 동복 현감을 지냈던 이유(李)가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와 악양루 옛터 에 소악루를 짓고 조해헌, 조관빈, 윤봉조, 이병연 등 명사들과 더불어 이곳에서 시회와 풍류를 즐겼다. 그뒤 조선시대 화성(畵聖)이라 불리워지는 겸재(정선)가 이곳 양천현령(1740년 가을)으로 부임한 뒤 만 5년동안 매일같이 이곳에 올라(직책상 매일 동서남북의 봉화를 간심함) 소일하면서 한강변의 그림을 그렸으니 이 작품집(漢水舟遊), 이야말로 오늘날 한강변의 옛모습을 전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사진)-궁산 뒷부분의 채석장으로 파괴된 흔적(산위에 소악루가 보인다)
특히 파산(궁산)기슭의 소악루에 앉아 해돋는 정경을 바라보면 초봄의 해는 남산(木覓山)에서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것을 사천 이병연(1671~1751)은1740년 7월에 양천현령으로 부임해 간 겸재 정선과의 우정을 생각하며 「목멱조돈(木覓朝暾)」이라는 시를 지어 보냈다.
새벽 빛 한강에 떠오르니, 曙色浮江漢(서색부강한) 언덕들 낚싯배에 가린다. 稜隱釣參(고릉은조삼)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朝朝轉危坐(조조전위좌) 첫 햇쌀 종남선에서 오르리라. 初日上終南(초일상종남)
아침마다 남산의 일출을 바라보고 저녁이면 안산의 봉화를 홀로 쳐다보고 있을 겸재를 그리워하지만 함께 하지못하는 아쉬움을 가득 담은 우정어린 연시(戀詩)로, 70노경에 접어든 노대가들이 서로를 조석으로 그리워하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것은 현대인들에게 많은 귀감을 주고 있다.양천현령이었던 겸재는 매일저녁 피어오르는 봉화의 살핌을 소홀히 할 수 없어 매일 저녁 파산의 소악루에서 이를 관찰하였다. 사천(槎川)은 직책상 안현(인왕산 서쪽 길마재)의 봉화를 보고 있을 겸재를 생각하며 「안현석봉(鞍峴夕熢)」이라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보냈다.
계절 맛 참으로 좋은 때 有味老淸時(유미노청시) 발 걷으니 山 빛이 저물었구나 捲簾山色晩(권렴산색만) 웃으며 한 점 별을 바라보고, 笑看一點星(소간일점성) 양천(陽川)밥 배불리 먹는다 飽喫陽川飯(포끽양천반)
(사진)-소악루
이 시를 받은 겸재는 즉시 붓을 들어 파산 기슭에서 안현을 바라보는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에서 보면 파산아래 소악루와 탑산 및 광주바위가 있고 그보다 조금 멀리에서 소(小)동정호로 불리던 한강의 넓은 수면이 마치 호반의 경치인듯 구성이 되어있다. 소악루가 있는 파산자락 끝에 위치한 탑산은 은은하기 그지없고 초가지붕으로 된2층 누각형태의 소악루에서 친근감을 느끼게 해준다.(崔完秀渚 겸재(정선)의 진경산수화첩“에서)
⑧ 공암먹(墨)
예부터 공암 마을은 먹(墨)으로 유명하였다. 고려 명종 때 명신 이인노는 1260년에 간행된 그의 저서 『파한집』에서 조정에 바칠 먹을 이곳 공암에서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인노가 맹성태수로 재직하던 당시 도둑부의 명령으로 왕에게 바칠 먹 5천개를 만들게 되었다. 이에 이인노가 이곳 공암에 도착하여 많은 일꾼들을 직접 지휘·감독하여 소나무 관솔을 태우고 매연을 만들고 이를 재료로 2개월 동안에 명령 받았던 먹 5천개를 제조해 왕에게 바쳤다. 그런데 먹을 제조하는 2개월 동안 이인노가 직접 감독하는 바람에 의복은 물론 살갗까지 연기가 스며들어 검은색으로 피부가 변했다고 한다. 원래 우리나라는 황해도 해주의 부용당(芙蓉堂) 먹을 제일로 손꼽으나 이곳에서 먹을 제조하고 나서부터 공암먹이 유명해졌는데 이는 이인노의 공로라고 할 수 있다.
4. 전래속담
① 陽川 원이 죽은 말 지키듯 한다
조선 효종때 강화도에서 방목하는 효종의 애마가 있었는데 이름은 벌대총으로 국가에 일이 있을 때에는 그 말이 혼자 상경하여 공사를 마친 뒤 귀환하는 것인데 돌아가는 도중에 방화리(버머리)산길 옆에서 병들어 죽어 버렸다. 임금의 애마가 죽자 양천현감은 자기 관할 경내에서 죽었으므로 현감이 직접 병사한 말 옆에서 수(守
直)하였다는데서 나온 말이다. 「범머리」 산에 벌대총의 무덤이 있다고 하나 위치는 알수 없다. 당시 말이 죽자 현감이 올린 장계에 「마와불기(馬臥不起)하기 3일이요 꼴을 먹지 아니하기를 3일이옵니다」하였고 효종은 하론하기를 「그러하면 죽었단 말이냐?」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강화도에 벌대총을 방생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② 양천원님 부임할 때 울고, 나갈 때 운다
양천현은 가로 30리이며 세로 15리가 되는 아주 작은 고을인데다가 한강이 가까운 야생지이기 때문에 수해가 가끔 있어서 해마다 흉년을 면하기 어려웠다. 이 고을에서 생산되는 곡식이라야 잡곡뿐이어서 누가 보든지 한심스럽게 생각되었다. 현감이 이런 고을에 처음으로 부임하여 보니 낙심이 되어 울고 싶었다. 그러나 부임하여 지내고 보니 봉급 외에도 꽤 생기는게 있었다. 즉 매년 백미의 관수미(현감의 식량으로 매년 정해놓은 쌀)가 108石이고 손님 접대용으로 정해놓은 쌀이 30石이며 그밖에 남이 모르게 생기는 것과 또 살림에 해당하는 모든 물건이 들어오니, 작은 고을로는 그만하면 상당한 수입이 되었다. 이런 고을을 버리고 다른 임지로 떠나게 되니 아까운 생각에서 또 한 번 울 정도였다하여 나온 말이다.
③ 양천 쇠궁둥이 돌리듯 한다
양천현은 토산물로는 땔 나무가 많고 암소(牛)를 주로 사육하였다. 농사는 부실하고 나무가 많아 매일 서울로 나무를 가져가서 파는 나무장사가 많았다. 나무를 팔고 돌아올 때 노상에서 암소와 수소가 서로 만나면 수소는 성질이 암소에게 기어오르기를 잘하는데 암소는 이것을 피하느라고 궁둥이를 이리저리로 돌린다. 이것을 가르켜 친구 사이에 수작하는 말로 둘러대는 말이 있으면 농담하기를 「양천 쇠궁둥이 돌려대듯 한다」는 속담이 생기게 되었다.
④ 양천 사람은 바람 마시고 죽 마신다
이 말은 기후에 따라 부는 바람이 아침에는 동풍이 불고 저녁 때는 서풍이 부는 경우가 많아 일기가 고르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날 한양으로 나무를 팔러가는 나무꾼이나 행인이 마냥 일찍 출발하므로 집에서 떠날 때에는 동풍이 불어 바람을 안고가니 바람을 마시게 되고 저녁때 집으로 올 때는 서풍이 불어 또 바람 마시며 오게 된다. 해마다 계속되는 흉작으로 조반석죽(朝飯夕粥)을 하게 되어 죽을 먹는다는데서 나온 속담인데 실제로 옛날의 실정이 그리하였다고 한다.
(사진)- 장작장수
⑤ 역사적 인물
장세구(張世九) 독립유공자
장세구는 1899년 1월 14일(고종 광무3년) 가양동 231번지(양천향교 정문 앞 자택(무예당 터))자택에서, 장규환(張圭煥)의 8남매중 5남으로 출생, 양천소학교(양천초등학교)를 거쳐 연희 전문 의과 2기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하던 중, 21세(1919)때 3.1독립만세사건에 가담하여 시위함으로써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 뒤 감옥에서 풀려나와 자택에 연금 중, 동생 장세오(張世五)가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갈 위기에 처하자, 동생을 데리고 만주 봉천으로 탈출하여 김구선생을 찾아 독립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으며, 의학을 공부하였기에 독립 지사와 독립군 그리고 한인들을 주로 치료하면서, 한편 군자금과 의약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는 역할을 담당하던 중 장세구는 병을 얻어 만주 이역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작과였다고 한다.
※ 상기내용은 『독립운동·향토사자료실』에서 우리 강서구청으로 독립유공자인 장세구씨의 족적을 확인하여 달라는 요청이 있어, 필자가 조사결과 밝혀진 내용임.
생각해보는 코너
정선(鄭敾)의 당호인 겸재(謙齎)의 의미
겸재정선은 진경산수화의 대가로서 오늘날 200여점의 작품을 남기신 뛰어난 조선조 대표적인 화가로 역사에 기록되어 전해오고 있으며, 특히 동양화(한국화)미술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 분이 정립하신 동양화 기법을 맨 처음 공부하게 된다. 또한 1740년 7월에 양천현령(강서구)으로 부임해 와 만 5년 동안 우리구 한강변의 옛모습을 그림으로 전해주고 있는 분으로 누구보다 강서구민에게 친숙한 역사인물이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외면적인 면에서의 겸재보다 이분의 내면적인 인품을 살펴볼 때 더 한층 우리가 본받고 배워야 할 가르침이 있기에 이 자리에 소개하고자 한다. 겸재정선은 숙종2년(1676년)에 지금의 서울 경복고등학교와 청운중학교가 있는 백악산 서쪽 아랫동네, 그러니까 경복궁 근처에서 태어나서 영조 36년(1759)에 세상을 떴으니 86세로 장수를 한 셈이다. 그의 성품은 호 그대로 겸손을 중시하여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폭이 넓었다. 당시 벼슬을 산 사람은 어느 편이든 당쟁에 휘말리게 마련인데 그는 그런 당파를 짓는 것에 초월하여 그토록 장수 나이가 되도록 그림에만 매진을 하였다. 1754년 죽기 몇 해 전에는 종4품인 사도사첨정 벼슬을 살았는데 주변에서 영조대왕에게 너무 관직을 높여주니 물리치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정선은 천한 그림으로 이름을 얻고 왕세자를 호위하는 일 등 중요관직을 얻고 그동안 현령벼슬도 사는 등 출세를 거듭하였습니다. 그만하면 벼슬은 충분합니다. 그런데 이번 높은 벼슬을 내리시는 것은 무슨 근거인가요? 동료가 어울리기를 싫어합니다. 오래두면 물의만 일으킵니다. 하오니 정선을 이 벼슬에서 물리치십시오.” 이런 상소가 조선왕조실록에도 보이는데 영조는 따르지 않았다. 도리어 벼슬을 올려주어서 죽을 때는 “가선대부지중추부사”라는 종2품에까지 이르렀다. 이로 보면 조선역사상 그림으로 출세를 한 대표적인 인물이 겸재라고 하겠다. 그를 시기한 사람도 많고 비방한 사람도 많았으나 그는 매사에 독창적이면서도 성실하게 산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의 겸손제일이라는 인생관에서 비롯된 것 같다.
정선은 주역(周易)을 많이 보고 또 조예가 깊었으며, 그 중에서도 겸손(謙遜)에 관해서 깊이 공감하였다. 주역 상권 15번째에 “지산겸(地山謙: 땅과 산은 겸이다.)”에 이르기를
① 겸(謙, 겸손하면)은 형(亨, 형통하리니)이니 군자유종(君子有終, 군자가 시종일관 겸손하면 유종의 미를 거
두리라)하고, ② 세부적으로 겸손하고 겸손한 수양이 깊은 군자여(謙謙君子), 큰 강을 건너는 위험한 일이 있어도 문제가 없
구나(用涉大川吉), ③ 겸손하다고 명성이 나면(鳴謙) 좋고, ④ 공로가 있는데도 겸손하면(勞謙) 끝까지 좋고, ⑤ 겸손하면 불리할 것도 없어서 좋고, ⑥ 부귀하면서 겸손하면 이웃이 좋아하여 좋고(不富以其隣), ⑦ 설사 명겸(鳴謙)하면 이웃나라를 정벌하여도 유리하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오늘날에도 겸손은 미덕이요, 사실상 실리(實利)인 것이다. “주역에 이르기를 군자가 겸손하고 겸손하여 자기를 낮춤으로 자기를 지키고 높인다.(君子謙謙, 卑以自牧: 하늘의 복은 겸손이요, 여러 복 중에 으뜸이다.)라는 말을 따서 정선어른은 겸재(謙齎)라는 당호를 지었다고 하였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서울에서 생활하고 사후에는 현재 서울 도봉구 쌍문동인 (옛날 양주군 해등촌면 계성리)에 안장하였다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이곳에 대형 아파트 건물들만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 후손들이 이장하였는지 여부는 알 수가 없고 세월의 무상함만이 차가운 바람되어 가슴에 스며들 뿐이므로, 감히 겸재의 흔적이 남아있는 우리구(가양동 궁산 소악루)를 겸재의 기념지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양2동(加陽2洞)
1. 동 유래
한강서부지역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형 비류가 나라를 세웠다는 미추홀에 해당되니 삼국사기(券 第37雜誌 第6地理) 백제 한산주편에 “잉벌로현(仍伐奴縣: 시흥),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 강서구), 매소홀현(買召忽縣: 인천)등은 모두 미추홀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강서구는 비류백제의 미추홀에서부터 역사가 시작된다고 볼 수 있으며 최초의 지명이 “제차파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우리고장 최초의 지명이 “제차파의”로 기록되어 있으며, 제차파의는 “허가바위”를 가리키는 용어이므로 오늘날 가양2동 허가바위 일대가 우리고장 최초의 중심지였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실제로 조선왕조에 들어와 양천현아가 가양1동에 위치하기 전까지는 이곳 가양2동 허가바위 일대 즉 공암리(파릉)가 이 땅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 지명변천과정: 제차파의-공암현(신라 경덕왕 때)-양천현(고려 충선왕 때)
2. 민담, 설화
(1) 지명에 얽힌 이야기
① 제차파의(齊次巴衣)→제의(祭儀: 제사)를 드리는 바위라는 뜻임.
제차파의(齊次巴衣)란 지명은 한자(漢字)의 뜻과는 상관없이 순수한 우리말을 한자의 음(音)을 빌어 표기한 것으로 판단된다. 즉 고구려에서는 하늘에 동명제(東明祭)를 올릴 때 국왕이 도성에서 가까운 강변의 큰 굴 속
에 있는 수신(隨神: 길<道>을 관장하는 神)을 맞아다가 동쪽의 고지(高地)위에서 제(祭)를 올렸다고 한다. 이같은 수혈(隨穴)의 입지조건으로 볼 때 한강변에 소재한 검단산(송파구와 하남시 사이)은 동계인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백제의 동명제(東明祭)를 올리던 제의처로 추정되며, 또 강서구 가양동의 강변동굴인 공암(孔巖: 허가바위)이 백제의 수혈(隨穴)일 가능성이 높다. 동굴의 외관마저도 고구려 집안현의 수혈과 상호 닮았다. 이곳의 행정지명이 고구려 때 “제차파의”였고, 통일신라 때는 “공암(孔巖)”이라는 이러한 지명은 한결같이 강변동굴인 “공암”에서 유래하였음을 알려준다. 제차파의(齊次巴衣)는 “재계(齎戒: 제사)하는 곳의 바위” 즉 제의처(祭儀處: 제사 드리는 곳)임을 암시해 주며 신성구역이었을 것으로 본다. <연세대학교 사학과 “이도학”박사 논문 「한성백제의 도성제와 그구조」 참조>
※ 파의(巴衣)=고대어로서 “바위”를 뜻함.
어떻든 제차파의란 지명은 이곳 탑산아래 바위에서부터 유래된 지명임이 분명하 다.
② 탑산(塔山)=거북바위(龜岩)
88올림픽도로가 생기기 전까지 이곳에는 인천취수장이 있었으며, 현재는 허준기념관과 대한한의사협회가 들어서 있고 구암공원이 만들어져 있는 나즈막한 산을 탑산이라 한다. 탑산아래에는 양천 허씨 시조의 발상지인 허가바위가 있고, 그 옆에 옛날 공암나루터(孔巖津: 북포나루)가 있었으며, 또한 광주바위를 중심으로 허준선생을 기념하는 구암공원이 조성되었다. 옛날 공암리 또는 파릉이라 불리웠던 이곳에 옛절은 사라지고 탑만 남아있어 이름을 탑산(塔山: 진산)이라 하였다. 山중턱에는 선조임금 당시부터 내려오던 매우 오래된 탑이 서 있었다. 그러나 6·25동란 때 무너져 버린후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 외 화리고개라는 지명이 남아 있으나 어디인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탑산의 남쪽에 펼쳐진 들판을 탑산이 벌이라 하고 궁산이 이어지는 능선을 용구재라 하였다. 얕으막한 용구재를 경계로 남쪽으로 펼쳐진 벌판을 용구 재벌이라 하였다. 탑산의 모양이 마치 한강물속으로 기어가는 거북 형상이므로 탑산의 별칭을 거북바위(龜岩)라고 하였다.
③ 공암(孔岩): 허가바위
탑산 아래 절벽 밑 가양동 산 1-2번지에는 구멍뚫린 바위가 있어 이를 흔히 공암바위 또는 허가바위라고 칭해오고 있다. 탑산 아래 있는 이 바위 주변의 경관은 학교와 아파트가 들어서 있어 지금은 옛날과 달리 많이 변했지만 이 구멍바위 때문에 이곳 의 지명을 백제와 고구려는 제차파의현이라고 하였고 신라는 공암이라 하였다. 공암을 고구려 때에는 제차파의라고 하였는데 바위의 한자 표기인 파의(巴衣)로부터 양천의 별호인 파릉(巴陵)이라는 지명도 생기게 되었고 가양1동으로 읍치(邑置)를 옮긴 후 뒷산을 파산이라 한 것도 파의산 즉 바위산이라는 글자에서 유래된 것이다.
④ 공암 나루터(북포나루·고매나루·사곶포)
공암의 이름을 딴 공암 나루터가 있어서 강건너로 사람들을 건네주었고 삼남지방으로부터 수송되어 온 물건이 하역되었다. 이 공암나루터는 강건너 고양군 행주리의 행주나루터와 이어지기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남도에서 개성으로 가는 요진이 되었다. 이 나루는 공암도·공암·구멍바위나루의 별호를 여럿 가지고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와서 양화나루와 조강진(祖江津) 사이에 잇닿던 중간점으로 양천·강화에서 도성으로 통하는 길목으로서 일찍부터 개설되어 3남지방의 특산물이 하역되었다. 그러나 선객들의 대개가 양화나루를 이용했던 까닭에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공암나루는 양화도 별장의 지휘를 받았고 진선 5척을 배속받았다. 후에 관선(官船)은 폐지되고 사도선(私渡船)만 남아있어 선가를 받고 인마의 통행을 도모하였다.
⑤ 광주바위
가양2동 공암나루 끝 한강변에 탑산(塔山)바로 옆 강물속에 서 있는 두 개의 바위가 광주바위이다. 높이 12m의 그리 높지 않은 바위지만 우리구의 유서깊은 경승지(景勝地)의 하나이다. 현재는 올림픽대로가 강물을 가로질러 그 일대의 옛자취는 많이 변질되었으나 바위 자체는 고색이 창연한 채 옛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 옛날 서해로부터 크고 작은 배들이 드나들고 이곳 경관에 도취한 뱃사람, 선유객들이 노를 멈추고 도원경에 심취하던 곳이다.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오며 경치가 수려해 인근 주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광주바위는 지금 가양동 아파트단지안에 위치하며 “구암공원”을 조성한 곳인데 공원의 인공호수내에 있게 되어 앞으로도 우리구의 정서와 문화적 공간으로 자리할 것이다.
(2) 전설
① 광주바위
광주바위는 원래 경기도 광주에 있던 바위로 오랜 옛날에 비가 계속 내려 큰 홍수가 나자 광주에서 이곳까지 떠내려왔다고 한다. 비가 개인 뒤 광주 고을에서는 없어진 바위를 찾아다니다가 양천의 탑산 끝머리에 와 있는 것을 알자 광주 관아에서는 「이 바 위는 우리 고을에서 떠내려와 이곳에 있는 것이니 해마다 우리 고을에 조세를 바치시오!」하고 양천관아에 요구하였다. 양천 원님은 광주 관아에서 요구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였으나 그 바위에서 생산되는 것이 없고 오직 싸리나무가 몇 주씩 드문드문 있으므로 해마다 싸리나무를 베어 비 세자루를 만들어 보내 주었다.
(사진_광주바위
어느해에도 비 세자루를 만들어 광주고을에 보내준 양천고을 원님이 조용히 생각해보니 「저 벌거숭이 바위에서 기껏해야 싸리나무 몇 주 나는데 그것마저 비를 만들어 바치니 이런 귀찮은 일을 하면서까지 저 바위가 우리 고을에 무슨 이익이 있는가?」하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광주관아에「이 바위는 우리 고을에 아무 소용이 없으니 도로 가져가시오. 앞으로는 빗자루도 못바치겠소」하고 통보하자 광주고을에서는 이 바위를 가져갈 수 없어 양천 고을에 빼앗기고 말았다고 한다.
② 허가바위(서울시 기념물 제11호)
공암은 위에서 보면 그리 높지 않지만 강에서 보면 수직 절벽으로 꽤 높은 바위산으로 보였다. 광주바위와 같은 자색을 띤 자암인데 강변의 산 아래에는 수십명이 비를 피할 만한 동굴이 있다. 일명 「허가바위굴」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양천 허씨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이 이곳에서 나왔다는 설화가 있기 때문에 주민들은 이곳을 양천허씨의 발상지로 부른다. 허선문은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하러 가면서 이 나루를 통과할때 도강의 편의와 군량미 제공 등으로 공을 세워 공암촌주의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 『경기읍지(京畿邑地)』 성씨조에 보면 다음과 같은 양천허씨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허선문은 나이가 90이 지났는데도 고려 태조를 섬겨서 견훤을 정벌하러 갈 때에 군사들을 격려한 공이 크므로 공암촌주로 삼았다. 그래서 그 자손이 양천허씨가 되었다. 공암은 양천이므로 공암허씨는 양천허씨를 말한다.
(사진)- 허가바위(許哥바위: 일명 공암바위)
③ 투금탄(投金灘)
공암나루 앞의 강을 투금광·투금뢰 또는 투금탄이라고 부르는데 이와 같은 이름이 붙은 유래가 『경기읍지』에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성주이씨가승(星州李氏家乘)에 의하면 고려말의 명사였던 이조년, 이억년(李兆年,李億年) 형제가 한양으로 오는 도중에 길에 떨어진 황금 2개를 주워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두 형제는 공암진에 이르러 나룻배를 탔다. 나룻배가 거의 江복판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아우가 황금덩어리를 강에 던져 버렸다. 이를 본 배안의 손님들과 형은 크게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찌 그 귀한 것을 물 속에 던졌느냐?” “형님 제가 어찌 황금이 귀한 것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평소에 우리 형제 우애가 두터웠는데 황금을 주워 나누어 갖고 나니 갑자기 욕심이 생겨 만약 형이 없었다면 제가 혼자 두 개의 황금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마음이 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물질 때문에 우애를 잃어서는 아니되겠다는 생각에서 황금을 버린 것입니다.” 하니 이 말을 들은 형은 “네 말이 옳다. 이까짓 황금 때문에 우리 형제의 우애를 잃어서야 되겠느냐?” 하고 말을 마친 후 형도 뒤따라 황금을 물 속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중국 천중기(天中記)에 기록되어 있는 투금탄 내용에는 형제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나 “성주이씨가승”기록에는 이조년·이억년 형제의 이름이 나온다. 우리 강서구에서는 1994년에 우장산 문화의 광장에 이조년의 시비(詩碑: 다정가)를 세워 이들 형제간의 우애를 기리고 있다.
(사진)- 도강중인 나룻배
3. 역사적 인물
양천허씨의 시조 허선문의 현손은 고려조에서 평장사를 역임한 재(載)이고, 재(載)의 5대손이 공(珙)이다. 허공(許珙)은 충렬왕 때 거란족의 침입을 막았으며, 천성이 강직·검소·산뜻하였다.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며 충렬왕 사당에 배향하였다. 공(珙)의 현손은 금(錦)인데 그는 벼슬이 전리판서에 올랐으나 곧 은퇴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부터 가산을 털어 약을 준비해두었다가 은퇴 직후에는 병자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약재를 나누어주고 치료케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조선조의 현상(賢相)으로 이름이 나있는 허종(許琮)과 허침(許琛)은 바로 금(錦)의 현손으로 이들 두 사람이 양천허씨의 인맥을 중흥시켰다. (“허선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문 191∼121쪽 “양천허씨 유래” 참조)
① 허종(許琮)
조선조 세조때 문신으로 자는 종경(宗卿)이고 호는 상우당(尙友黨)이다. 1467년 함경도의 이시애난 평정. 1469년 전라도 장영기 일당의 난을 진압. 1477년 평안도의 여진족을 토벌하는 등 무사로서 이름을 떨쳤다. 기골이 장대한 허종은 임금에게도 직언을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자신을 지극히 칭찬하고 아껴주던 세조의 여섯 가지 잘못을 서슴없이 지적, 「이단을 물리치고 언로(言路)를 열 것이며 유렵을 삼가고 경언(徑言)에 나와 글을 읽으시오」하며 고치라고 하였다. 이에 성격이 대쪽 같았던 세조는 노발대발하여 곤장을 치도록 명하였는데 굽히지 않고 직언을 계속하자 마침내 허종을 참수하라는 명령까지 하였다. 세조는 역사에게 『내가 칼집에서 칼을 다 빼는 순간 즉시 허종의 목을 치라』하며 칼을 천천히 뽑아 올렸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하였고 세조는 『그래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겠는가?』 라며 다시 묻자 허종은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잘못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세조는 뽑던 칼을 도로 칼집으로 넣고 「참으로 사내 대장부로다」라고 감탄과 아울러 칭송하였으며 이후로 더욱 허종을 총애하였다. 허종은 후일 성종이 보위에 오른 후 윤비를 폐하자는 일이 어전회의에서 거론될 때 늙은 누님의 말을 듣고 동생 허침과 함께 짐짓 다리에서 굴러 떨어진 일화도 있다. 이때 허종이 떨어진 다리를 사람들은 종침교(琮琛橋)라 하였다. 좌의정까지 역임한 그는 관직을 물러난 후 다시 고향인 양천현으로 돌아와 평민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보냈다.
② 허침(許琛)
1444(세종26)∼1505(연산군 11).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헌지(獻之), 호는 이헌(邇軒)이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허종(許琮)의 아우로써 세조 8년(146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종6년(1475) 문과에 급제하여 연산군10년(1504)에 좌의정에 이르렀다. 연산군이 세자일 때 그는 필선(弼善)이었고, 조지서는(趙之瑞)는 보덕(輔德)이었는데 연산은 날마다 놀이만 일삼고 학문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았는데 단지 부왕 성종의 훈계가 두려워 억지로 서연(書筵)에 나올 뿐이었다. 조조서는 천성이 굳세고 곧아서 연산이 학문에 태만히 할 적마다 그를 깊이 질책하고 성종에게 이르겠다고 하였는데, 허침은 부드러운 말씨로 매번 깨우쳐 줌으로 연산이 몹시 좋아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연산은 글을 써서 벽에 붙이기를 ‘조지서는 큰 소인(小人)이요, 허침은 큰 성인(聖人)이다’라고 하여 그를 매우 총애하였다. 연산군이 즉위하고 나서 조지서는 살해되었지만 그는 무사하였고 오히려 우의정에 제수 되었다. 그는 형 허종(許琮)과 명상(名相)으로 일컬어졌는데 그의 누이 역시 학덕과 행실이 뛰어나고 장수하여 문중에서는 ‘백세할머니’라고 불렸다. 형제가 모두 누이를 극진히 섬겨서 조정의 대사가 있을 때 마다 꼭 가서 물었는데 성종이 왕비 윤씨(尹氏)를 폐하려 할 때에도 그는 누이에게 이 일을 묻고 나서 폐비론에 반대하였다. 뒤에 연산군이즉위한 뒤에 폐비에 찬성한 자들은 모두 주살되었으나 그는 홀로 면하였으니 모두 그 탁견에 감복하였다고 한다.
③ 허욱(許頊)
1548(명종 3)∼1618(광해군 10).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공신(公愼), 호는 부훤(負暄)이다. 우의정 허종(許琮)의 4대손으로 대사헌 허항(許沆)의 손자이며 허응(許凝)의 아들이며,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선조 5년(1572) 춘당대 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선조 25년(1592)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재임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강(錦江)을 굳게 수비하는 한편. 승병(僧兵)·의병(義兵)과 함께 청주(淸州) 탈환에 전공을 세워 호서·호남지역을 안전하게 하였다. 선조 26년(1593)에는 충청도 관찰사로서 권율(權慄)의 서울수복작전에 가담하였다. 즉, 권율은 한강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진을 치고, 전라 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는 수원(水原) 광교산(光敎山)에, 전라 소모사(全羅召募使) 변이중(邊以中)은 양천(陽川)에, 충청 감사 허욱은 파주(坡州)와 양천(陽川)을 연결하는 전선에 각각 포진하여 남하하는 명나라 원병과 호응하여 서울에 버티고 있는 왜적을 일거에 부수고 수복을 기한 것이다. 그러나 권율로부터 내포(內浦)가 풍년임에도 군량(軍糧)을 변통치 못한다고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러나 곧 이조(吏曹)의 요청과 유성룡(柳成龍)의 추천으로 형조참의에 임명되었으며, 난후 나라 전체가 큰 기근에 빠지자 청량사(請糧使)로 명나라에 건너가 산동(山東)지방의 곡식을 얻어와 백성을 진휼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호조·이조 판서를 지내고 선조 39년(1606)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라 양릉부원군(陽陵府院君)을 습봉(襲封)하였다. 광해군 즉위년(1608)에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 했던 유영경(柳永慶)의 일파라 하여 파직되어 서호(西湖: 양천현)의 월촌리(지금의 목2동)에서 10년간 살면서 시사(時事)를 말하지 않았다. 이어 광해군 8년(1616)에 신경희(申景禧)의 옥사에 연루되어 원주(原州)에 귀양 가서 그곳에서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는 말이 적고 일에 임함에 있어 신중하였으며, 효성과 우애 또한 지극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관작(官爵)이 복구되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시호는 정목(貞穆)이다.
④ 허준(許浚)
양천허씨로 손꼽히는 또 한사람의 인물로는 허준이 있다. 字는 청원(淸源), 號는 구암(龜岩)인데 양천에서 1539년 3월 5일 허론(許論)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서자이기 때문에 당시 적서차별로 인해 전통있는 문벌과 천재적 자질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기술관으로 내의원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엄격한 가정교육과 선대로부터 의 교훈으로 다져진 인격이 궁중에서도 인정받게 되어 내의로서 입신의 영예를 받았고 1590년에는 왕자의 병을 고쳐서 왕의 특명으로 승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왕이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되자 계속된 피난길에서도 끝까지 왕을 시종하여 1606년에는 양평군에 봉해지고 숭록대부에 올랐으나, 중인출신에게 당상관의 위계를 줄 수 없다는 제신들의 반대로 취소되기도 하였다.
(사진)- 허준동상
세조가 붕어하고 1608년 광해군이 계승하자 선조가 병으로 서거한데 대한 어의로서의 책임을 절실히 느끼고 있던 차, 그를 시기하던 무리에 의한 모함으로 한때 파직되어 적소에 유배되는 불운을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허준은 적소에서 갖은 인고와 싸워가며 『동의보감』의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마침내 1609년(광해군 1)적소로부터 유배가 풀어졌으나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주위의 모함과 집권자의 멸시와 학대뿐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참으며 방환된 이듬해 15년간에 걸친 피눈물 나는 노력의 결과인 『동의보감』을 완성하여 1610년 8월 6일 광해군에게 바쳤다. 광해군은 감탄해 마지않았으며 그의 노고를 위로하며 포상을 대신해서 그의 일생일대의 숙원인 서자의 불명예를 씻어주었다. 곧 특별교지로 『이후로 양천허씨에 한해서는 영구히 적서의 차별을 국법으로 금한다』는 것이었다. 1615년 8월 17일(양력 9월9일) 허준은 77세의 일기로 선조의 고향인 양천의 허가바위굴속에서 일생의 대작인 『동의보감』을 어루만지면서 연구와 고난으로 일관된 생을 마치게 되었다. 양평군(君)으로서 예우에 따라 100일 동안 장사지낸 후 당시 파주목사로 재직하던 아들 “허겸”이 부친의 시신을 허가바위 앞 공암나루에서 배에 태워 임진강으로 모시고 가서 파주군 진동면 하포리에 모시게 되었다.
4. 정자와 한시(樓亭과 漢詩)
① 詩
이렇게 양천허씨의 유래가 되기도 하는 유서깊은 공암에 대해 겸재와 그의 친구 사천이 『공암층탑(孔岩層塔)』을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공암(孔岩)에 옛 뜻 많으나, 孔岩多古薏(공암다고의) 탑 하나만 아득하구나. 一塔了洪濛(일탑료홍몽) 아래에 창랑수(滄浪水) 있으니, 下有滄浪水(하유창랑수) 고기잡이 노래 저녁 그림자 속에 잠긴다. 漁歌暮影中(어가모영중)
② 소요정(逍遙亭)
진산(津山)위에 진산사라는 절이 있었으며 이 절터에 탑(塔)이 있어 오늘날 탑산(塔山)으로 바뀌었다. 이 절터에 소요당 심정(沈貞)공이 자신의 호를 딴 소요정(逍遙亭)을 세웠다. 1519년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하여 세간의 지탄을 받기도 했던 심정공은 말년에 이곳에서 회한의 아픔을 달래였었다. 뛰어난 절경이었던 소요정은 지금은 전하여 지지 않는다.
※ 소요정에는 많은 시인 묵객의 시(詩)가 전해오고 있는데 그중 이곳에 한편을 소 개하며, 방화3동에도 소요정에 있었던 시 3편을 소개한다.
김준손(金俊孫)의 시(詩)
본래 승지(勝地)란 하늘이 만드는 것, 안개에 가득한 경치 형언할 수 없구려. 몇 나무 기특한 꽃은 뜰 앞에 곱다랗고, 강에 가득한 서늘한 달빛 창에 밝게 비치네, 홍진 속에서도 다만 운림(雲林)의 꿈만 지녀. 젊은 시절에도 벼슬길에는 뜻이 없었다네. 은총이 많아질수록 돌아올 날이 적으니, 바다 갈매기 산새들 공의 행차만 기다리네.
(사진)-의성(醫聖) 허준박물관(許浚博物館)
생각해보는 코너
의성(醫聖) “허준”(許浚)과 구암공원(龜巖公園)과 공암(孔巖: 허가바위)
1. 공암(孔巖: 허가바위)의 역사적 의미
올림픽대로 건설로 인해 한강의 일부분이 잘려나와 호수처럼 된 곳, 아파트가 하늘높이 솟아있어 병풍처럼 둘러쳐진 구암공원에는 이 공원의 주인이신 의성 허준선생께서 환자를 진료하시는 인자한 모습의 동상이 앉아있으며, 또 한편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고 그 호수 속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담겨있는 고색이 창연하고 구멍이 뚫려있는 자색의 광주바위가 있어 아름다운 풍광을 더해주고 있다. 양화대교가 놓여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은 한강하류를 건너는 공암 나루터였다. 그리고 그 옆(영등포공고 정문앞)에는 장정 20여명이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허가바위』라는 동굴바위가 있어 여러 차례의 정변과 임진왜란·병자호란 가깝게는 6·25동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피신하였으니, 허가바위(孔巖)는 이 일대의 역사적 최초의 지명인 “제차파의(劑次巴衣)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허가바위 동굴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양천허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善文)은 고려태조가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하러 가기 위해 한강에 도착하였으나 마땅히 건널만한 배가 없어 당황할 때에 허선문이 자신과 마을사람들의 배를 추렴해서 태조에게 기꺼이 바쳤으며 군량미까지 거두어 군사를 격려하였다. 그 후 승리한 태조가 고마움을 갚기위해 허선문을 삼한공신양천촌주(三韓功臣陽川村主)로 삼았다. 양천허씨는 조선중기 이전까지 이 곳 양천현의 막강한 세력가였으며, 한강에 배를 띄우는 도선권을 장악하여 선가(船價)를 받고 공암나루에서 인마(人馬)의 통행을 도모하였다.
2. 공암(孔巖)과 허준(許浚)
허준은 허선문의 집안인데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으로 부친은 용천부사를 지낸 론(論)의 서출이다. 선대가 대개 무관으로 지내왔던 것과는 달리 허준은 1574년부터 내의원에 봉직하면서 의술과 정성이 뛰어나 어의(御醫)로 선조와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다.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왕을 모시면서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며 대소 신료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전쟁을 당하여 전염병과 갖은 질 병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의 아픔을 덜어주고자 많은 의학서를 연구·저술하였으니 오늘날 세계적으로 한의학의 조종(祖宗)으로 받들어지는 「동의보감」 (2009. 7. 30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됨) 등 많은 의학서를 전해줌으로써 허준은 의성(醫聖)으로 숭앙받게 되었다. 허준은 관직을 물러나서도 후세에 지침으로 남길 의학서를 저술함과 동시에 임금의 건강문제에 언제나 관심을 함께 할 수 있는 장소로 택한 곳이 바로 “양천현(陽川懸)”이었다. 우선 도성과 가까운 한강변으로 경치가 뛰어나며 약초도 쉽게 구할 수 있고 또자신의 어린시절 추억이 어린 허가바위 근역에서 마음을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하고 탑산(가양2동)아래에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파릉산집(巴陵散集)”에는 『허준선생이 허가바위 동굴속에서 “동의보감”을 저술하였으며, 또 굴속에서 돌아가셨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파릉산집”을 저술한 산허거사(山墟居士)라는 사람은 거사라는 칭호에서 볼 때 재가스님이며, 임진왜란 이후 사람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조선 중기 초에는 불교의 박해가 매우 심대하여 “거사(居士)”라는 호칭을 거의 사용하지 않을 때이며,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와 승병들의 공적이 커서 왜란 이후불교박해가 누그러졌을 때, 일부 불심이 깊은 불자들이 “거사(居士)”의 칭호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산허거사 또한 그들 중 한 부류로 당시 탑산위에 있었던 “진산사(津山寺)”절에 거하거나 또한 자주 왕래하던 불교신자로서, 탑산 아래 허가바위(孔巖)에서 때에 따라 먹고 자며 동의보감을 편찬하는 허준선생을 보고, 『“허준재어공암하루옥시동작저 준졸위암(許浚在於孔庵下漏屋是洞作著 浚卒爲庵)”』 “허준은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동굴암자에서 책을 저술하였으며, “준”은 암자에서 졸(卒)하였다.”라고 “파릉산집”에 기록하고 있다. 즉 허가바위를 동굴암자(孔庵)로 보았으며,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곳(下漏屋)이라고 표현하였다. 지금도 허가바위 동굴 속은 여름에 빗물이 뚝뚝 떨어져 흘러내린다. 그리고 “시동작저(是洞作著)”라고 한 것은 동굴 속에서 책을 저술하고 있다. 는 내용이므로 허준선생이 “동의보감”을 편찬하고 있음을 기록한 내용이다. 또한 “준졸위암(浚卒爲庵)”이라고 한 것을 보면 허가바위 동굴 암자속에서 허준이 최후를 마쳤다는뜻이기도 하다. 허준선생은 일부 신하들의 극심한 탄핵으로 고향인 이곳 양천현에 위리안치(圍離安置)되어서도, 15년 동안 저술해 오던 동의보감을 허가바위에서 결실을 맺었다고 보아진다. 이로써 허준선생은 당시 조정의 탄핵에 심신이 지쳐있는 상태였으나, 자칫 퇴골심(포기함)이 생길 것을 두려워하여, 승려들이 토굴 속에서 수행하는 식의 방식으로 허가바위 굴속에서 마지막 온 힘을 다하여 필생의 작품인 “동의보감”을 편찬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허준의 퇴직 후 거취문제를 기록한 史料인 『巴陵散集: 山墟居士저서』에 기록된 내용. 1993. 12월호 “구암학보(姜薰德 글)” 참조>
허준 사후에 경기도 파주군 진동면 하포리에 묘소를 정한 것은 그 곳이 선조의 명으로 1604년 허준을 “양평군(陽平君)”에 봉하면서 파주에 사패지를 하사하셨던 것으로 판단되며, 따라서 그 곳으로 묘소를 모신 것으로 보인다. 정일품보국숭록대부(正一品輔國嵩祿大夫)와 부원군(府院君)의 칭호인 양평군(陽平君)에 봉함은 문관직의 경우 영의정에 제수되는 것과 같은 궤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직함에서가 아니라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멸의 의학서인 「동의보감(東醫寶鑑)」이외에 수종(數種)의 의서(醫書)를 남겨 민중구료(民衆求療)에 앞장선 허준이 그의 생애를 마감한 곳인 공암은 또한 백제상고사에 중요한 일익을 담당했던 “수 혈제의처(隨穴祭儀處)”이기도 하다. 또한 탑산 모양이 마치 한강물속을 향해 기어가는 거북형상으로 생겼기에 허준선생이 자신의 호를 구암(龜岩: 거북바위)이라고 했던 것이다.(“양천허씨 세보” 참조)
가양3동(加陽3洞)
1. 동 유래
현재의 가양3동은 대부분 옛날에 한강변의 강가에 있는 뻘이었고 88고속도로가 개설되면서 비로소 육지가 된 곳이며 양천길가에 위치하여 일부 군소공장들과 몇 개의 연립주택이 있었던 한적한 곳이었으나 가양지역 택지개발 계획에 따라 고층아파트가 들어서면서 93. 4. 1자로 가양3동으로 분동되었다.
(사진)-가양3동 전경, 저 멀리 염창산과 왼쪽건물 끝에 염창유수지가 보인다.
※ 지역적 특징 88고속도로 진입로 개설에 따라 가양2동과 나뉘어 졌으나 원래는 가양2동과 같은 공암리(孔岩里)였으며 강서구의 최초의 지명인 제차파의(祭次巴衣)라는 지명이 유래된 하가바위 부근이다. 이곳 공암리에서 동의보감을 저술하신 의성(醫聖) “허준(許浚)”선생이 광해군에게 파직되어 이곳으로 유배되었을 때 이곳 갈대밭(가양3동 자리는 갈대밭이었음)에서 고기잡고 땔나무를 하시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강서구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오랜 역사와 온갖 애환(강화도로 귀양 가는 길, 강화도령이 철종임금이 되어 한양으로 귀경하던 길)을 간직한 “양천길”이 가양3동을 지나가기도 한다. 옛날 양천의 중심지였던 가양동 소금창고로 인하여 가장 번창했던 염창동을 넘어가던 중간지점으로 당시에는 사람이 거주할 수가 없었던 갈대밭의 뻘이었으며 한강 철새들의 보금자리였던 곳이었다. 그러나 바다가 변하여 육지가 된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처럼 오늘날에는 고층아파트 빌딩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 옛모습을 찾을 길이없다.
2. 민담, 설화(지명에 얽힌 이야기)
① 증미뻘
이 일대 가 “증미뻘”이라고 불리웠던 갈대밭이었으며 이웃 염창동 일대가 증미마을이었기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또한 맞은편 등촌1동 일대의 논을 계명논이라고 하였다.
② 양천길
양천지방에 최초로 만들어진 길이었으며 또한 김포, 강화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일제시대에 일본군이 대동아 전쟁준비를 위해 국방도로(현 공항로)를 개설하기 전까지는 김포, 강화로 통하는 유일한 길로서 고려 때 몽고의 침입으로 고종임금이 이 길을 통하여 강화도로 피신하였으며, 선조임금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 우성전, 변이중 등 의병장들이 이곳 양천의 의병을 지휘하여 양화도전투, 선유봉전투 등 격전을 치루며 이곳 양천길에서 말을 달렸으며, 권율장군을 지원하는 행주산성의 전투를 위해 가양동 궁산으로 이 길을 통하여 삼남지방의 의병들이 집결하기도 하였으며, 정묘호란 때 인조대왕이 이 길을 통하여 가양동 양천현아에서 하룻밤 유숙 후 강화로 피난을 가기도 했고, 나이 어린 영창대군이 이 길을 통하여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하기도 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선비와 정객들이 이 길을 통하여 강화로 귀양을 갔던 눈물의 길이요 슬픔의 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강화도령이 철종임금으로 등극키 위해 이 길을 통하여 한양으로 올라갔으니 양천길은 꼭 슬픔의 길만은 아니었다.
③ 돌다리께와 줄웅덩이 개울
지금은 복개되어 없어졌지만 양천길을 가운데로 하여 등촌동 628-16번지 광명돗판 인쇄(주)와 同629-8번지에 있는 한일철강(주) 등촌동 창고 사이에는 제법 물살이 빠르게 흘러가는 개울이 있었다. 토교(土橋)를 놓으면 빠른 물살로 금방 다리가 떠내려가므로 돌로 튼튼하게 가설한 다음부터 그대로 있게 되자 이곳을 돌다리라 하고 근방을 돌다리께라 하였다. 돌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은 지금의 강서소방서 앞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에는 겉모양은 벼처럼 생겼으나 잡초인 「줄」이 많이 나는 웅덩이가 있었다. 때문에 줄이 나는 웅덩이라는 뜻에서 줄웅덩이 개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지금의 가양3동 “E마트” 근방임)
(사진)- 나무다리
마곡동(麻谷洞)
1. 동유래
마곡동은 옛날 이 일대에 삼(麻)을 많이 심었던 동네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후포리(後浦里)와 마곡리(麻谷里)를 합쳐 마곡동이 되었다. 마곡동의 현 위치는 동쪽으로는 가양동과 서쪽으로는 방화동에 연접해 있으며 북으로는 올림픽대로를 끝으로 해서 한강에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공항동과 연결되어 있다. 마곡동의 현재 행정동은 가양1동이다.
2. 민담, 설화(지명에 얽힌 이야기)
① 마곡(麻谷, 麻結)
마곡동 308번지 일대를 마곡 혹은 마결이라고 부른다. 마곡동의 중심 마을이 되는데 삼을 많이 심었던 곳이다. 마곡에는 항상 논에 물이 가득 채워져 있다는 굿논이 있고 이 굿논의 중간을 뚫고 흐르는 개울을 굿논개울, 개울에 놓은 시멘트 콘크리트다리를 굿논다리라 하였다.
② 뒷동산
마곡동의 223번지 근처의 동산을 뒷동산이라 하였다.
③ 웃 말
마곡의 북쪽, 지금의 영서창고와 보성상가가 있는 곳을 웃말이라 하였다.
④ 아랫말
마곡의 서남쪽 방화동과 경계 부근에 형성된 마을을 아랫말이라 하였다.
⑤ 새 개
마곡과 가양동의 국제제2통신연구소 사이에 직선으로 만들어진 농수로 겸 배수로를 새개라 하는데 새로 만든 개울이라는 뜻이다.
⑥ 동고리개울
마곡 앞 들판에는 동고리개울이 있는데 들과 고랑이 복합되어 들고랑이라는 말이동고리로 되었다고 한다. 들은 들판, 고랑은 밭고랑의 뜻을 가지며 혹은 똘고랑이라 부르기도 한다. 똘은 개울·도랑의 의미가 있어 둘다 들판을 흐르는 개울이라는 뜻이다. 이 동고리 개울에 토교(土橋)가 놓여 동고리다리라 하였으나 후에 목교(木橋)로변했고 지금은 시멘트 콘크리트 다리로 바뀌었다.
⑦ 대초리산
뒷동산(궁산)과 이어진 산을 대초리산이라고 하는데 주민들은 이산에서 대(竹)와 대나물이 많이 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얼핏보아 억새풀처럼 생긴 대나무가 여기저기 자생하고 있는데 군데군데에는 대나물 혹은 은자호라고도 하는 풀도나고 있다.
⑧ 고시네촌
한강변인 이곳은 바로 농경지와 접해 있고 또 어로생활을 겸할 수 있었기 때문에 꽤 윤택한 생활을 하였다. 도심과 거리가 멀고 서울시에 있다고는 하나 시골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이곳에 일본인이 일찌감치 자리잡았던 것도 바로 농업과 어업을 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복 전까지 이 마곡동 강변 궁산의 서쪽에는 고시라는 일본인이 처음 들어와 살면서 주변의 농경지를 매입, 제법 넓은 지역을 소유하면서 본국의 친척들을 불러 농장처럼 운영하게 되었다. 일본 하류민이었던 고시(高市)라는 사람이 들어와 이 땅을 차지하고는 대지주 가 되어 일본의 보호하에 엄청난 횡포를 부렸는데 이 인근부락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고시(高市)네 농장을 소작하였다. 마곡 동 41번지 일대는 고시(高市)네 일족이 거주하였던 고시네 촌이었다.
(사진)- 고시네 마을 전경
⑨ 긴등다리
또 방화동과 마곡동의 경계지점에는 긴등다리가 있는데 개화산이 방화동과 마곡동으로 이어지는 부분으로 긴 등성이를 형성하고 그 끝 개울가에 놓은 다리를 말한다. 방화동의 긴등마을 끝에 있는 다리라 해서 긴등다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⑩ 뒷개말(後浦里)
뒷개말은 마곡동5번지 일대로 마을뒷쪽에 한강이 있고 포구(浦口)가 있다해서 붙여졌는데 후포리(後浦里)라 쓴다. 마곡리와 함께 마곡동을 이루는 마을이다. 뒷개말(후포리)은 고려시대 개경을 건너가는 나루터(고고마진 나루터)였으며 조선시대에는 고기잡이 배들이 정박하던 곳이었다. 고려때 양천현에서 개경으로 건너가는 3개 나루로서 탑산의 공암진나루(孔岩津:일명 北浦나루), 마곡동 후포나루[後浦나루 : 일명 고고마진(古雇馬津)나루], 개화동상사마을의 행주나루(幸州나루)가 있었다.
(사진)-뒷개말은 원래 고고마진 나루터였다.
⑪ 배수장(排水場)
배수장은 장마 때 논의 물을 빼고 갈수기에는 논물을 대기 위해 1926년 한강수리 조합을 만들면서 설치하였다.
3. 역사적 인물
이곳 후포리(뒷개말)에는 임진왜란 전 「황숙(黃璹)」과 그 일족이 살았던 곳이며, 나라에 공을 세운 인물이기에 소개한다.
① 황숙(黃璹)
마곡동 후포리의 궁산서쪽 선두암 위 산줄기에 효령대군이 수도하던 “춘초정”이란 정자가 있었는데, 나중에 참판 황숙(黃璹)이 이주해 와서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한다.(효령대군은 세종대왕의 둘째 형님이며, 춘초정이 있었던 선두암은 88올림픽 도로 공사로 없어졌다. 황숙(黃璹)은 친구인 허봉(허엽의 둘째아들, 허균의 형, 허준의 조카뻘)과 절친하였으며, 나중에 허봉의 형 허성의 손녀딸을 손자인 황여구의 부인으로 맞아 들였으니 허씨집안과 사돈간이 된다. 황숙(黃璹)은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때 자기고을에 머물러 3개월을 지내는 동안 정성을 다하고 또 자기고을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도록 위로하며 잘 다스리니 임금이 이를 지켜보시고 “거정주인(居亭主人)”이라고 이름지어 불렀다고 한다. 그 뒤 임진왜란 때 증산(甑山)수령으로 평양에서 왜적을 쳐 전공을 세웠기에 영유현감으로 벼슬을 올려주었으며 나중에 참판까지 오르게 되었다.
② 황여구(黃汝耈)···호 파록(巴麓)
황숙(黃璹)의 아들 황치중과 손자인 황여구, 증손자인 황의·황최·황진은 모두 후포리에서 대대로 뿌리 내리고 살아 오던중 인조14년(1636)에 병자호란이 일어났으며, 이때 황숙의 증손인 황여구와 어머니 심씨(沈氏) 그리고 아우와 누이 두사람 모두 다섯 사람이 강화도로 피난하였다가 나라가 위급한 것을 보고 의롭게 순사하였다. 이에 이조판서 허성(許筬)의 손녀요 황여구의 妻인 허씨는 돌지난 아들을 업고 몸소 싸움터에 나가 주야로 울며 하늘과 신령에게 축원하고 낚시와 그물을 모아서 7일동안 물속을 찾아 시어머니 심씨와 남편의 사체를 끌어내어 장사지내고 그통에 다른 죽은 사체들도 건져내어 자기집을 팔아서 음습하여 매장하였다. 이 소문이 조정에 알려져 “허씨”에게는 정문(旌門)을 세워주고 황여구에게는 지평(持平)을 증직하니 세상에서 말하기를 한집에서 5烈이 낳다고 하였다. 황숙은 황치중의 묘(墓)가 역촌(驛村: 강서구청 앞)에 있었으나, 지금은 이장하여없어졌다.
③ 황의
황의의 字는 선백(善伯)이며 호는 후촌(後村)으로 황여구의 아들이다. 병자호란때 할머니 이하 부친, 숙부 등 온 집안이 의롭게 죽을때 한 살이었다. 점점 자라자 그는 세상사에 상관하지 않고 오직 독서에만 열중하고 청나라 책력은 보지 않았다. 친척들이 벼슬길에 오르라고 권고 할때마다 그는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되듯이 변천되는 세상에 태어났으니 문을 닫고 ‘춘추(春秋)’나 이야기 하는것이 족하거늘 어찌 명예를 내고 이로운 것을 할 것이냐.”하고 거절하였다. 슬하에 다섯 아들이 있었으나 한사람도 과거시험장에 보내지 않았다. 이를 본 사람들은 옛날 녹문산(鹿門山)에서 벼슬을 싫다하고 약초를 캐며 살던 사람과 같다고 하였다.
마곡 R&D 시티 조성
서울시는 강서구 마곡동과 가양동 일대 103만평 규모의 마곡지구를 아시아 경제중심 도시를 위한 전략거점 지역으로 설정하고, 서울의 미래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사업 IT·BT·NT의 첨단융합기술(FusionTechnology) R&D시티로조성키로 하였다. ‘마곡 R&D 시티’에는 세계적 연구소와 국내외 기업, 대학의 연구센터 등이 유치될 예정이며, 국내 대기업 연구소·국내 유수의과대학 임상 실험연구센터와 해외 유명대학의 MBA 과정도 유치할 예정이다. ‘마곡 R&D 시티’의 건설이 시작되면 서울의 마지막 농경지인 마곡벌의 들녘 풍경은 2009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볼 수 없게 된다.
(사진)-마곡벌의 마지막 전경
「마곡 워터프런트」란 이름으로 「고고마진 나루(後浦)」가 부활되다. 한강 르네상스 계획에 따라 8개 워터프런트가 조성된다. 다른 워터 프런트는 한강 지류를 따라 조성되는데 유독히 마곡 워터프런트만 내륙으로 물길을 파서 한강물을 끌어들인 다음 인공하천과 호수를 만들어 수변도시를 만든다. 인공 하천과 호수에는 요트와 유람선이 오가고 주변에는 호텔과 위락시설, 연구시설 등과 주거단 지가 들어서기 때문에 제2의 오사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마곡 워트프런트는 마곡동, 가양동, 공항동, 방화동, 발산동 일대 336만 4000m2 부지에 펼쳐지는 마곡 도시개발사업의 일부로 신도시 개발과 맞물려 총 5조1620억원의 예산을 들여 2031년까지 3단계로 나누어 조성된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마곡지구는 “첨단과 주거가 조화된 환경친화적 첨단사업단지”로서 서울 서 부권의 핵심지역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마곡 워터프런트는 1단계 사업으로 2011년까지 완공 예정) 마곡(麻谷)은 과거 삼밭이 많았던 곳으로 원래 조선조 양천현아 옆 후포(後浦:고고마진 나루)리였는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한강개수계획을 세워 양천길을 만들었기에 양천길 안쪽으로는 논(마곡벌판)을 만들고 길 바깥쪽으로는 늪지가 되어 삼밭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그후 1963년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하수처리장(서남물재생센터)을 설치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이곳에 수변도시가 세워짐으로 인하여 결국 원래대로 배가 드나드는 후포(後浦: 고고마진나루)리가 부활되는 셈이다.
외발산동(外鉢山洞 : 발산1동)
1. 동 유래
외발산동은 이 마을의 주산인 수명산의 모습이 마치 밥주발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으므로 발산(鉢山)이라 하는데, 그 발산의 바깥쪽으로 마을이 형성된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서울특별시로 편입되기 전의 이 마을은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 외발산리였다. 조선, 인조 때 양천현이 양천군으로 승격됨에 따라 양천현의 신광명·구광명의 2개의 마을이 합쳐져 양천군 가곡면 외발산리로 되었다. 외발산동의 위치는 북쪽으로 가양동이, 동쪽으로는 발산을 경계로 하여 우장산동이 있고 남쪽은 신월동과 부천시와 연접해 있으며 서쪽은 공항동으로 에워싸인 마름모꼴의 동네 형태를 이루고 있다. 외발산동의 행정동명은 발산1동이다. 외발산동은 높이 72.3m인 발산의 바깥쪽으로 형성된 마을로써 발산은 수명산의 중심산으로 화곡동의 우장산이 수명산의 좌청룡이 되고 이곳에서 다시 가지를 뻗어 서남쪽에 가서 결(結)을 형성한 것이다. 이러한 발산의 서북부와 서남쪽에 형성된 외발산동은 능선 아래로 취락구조가 발달되어 있으므로 준평원과 산록이 어울어진 자연적인 입지를 갖추고 있다. 곧 발산쪽으로는 얕은 구릉이 형성되므로 산비탈을 이용한 과수원과 밭이 일찍부터 발달되었고 그 보다 낮은 준평원지역은 김포평야의 일원이 되어 넓은 들을 이루고 있다. 이 때문에 외발산동은 주택지보다는 구획정리가 아직 안된 자연 그대로의 농촌지역 특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속에서 시골풍경을 만끽할수가 있었다. 그러나 2010년부터 “마곡 R&D 시티”가 조성이 시작됨으로써 더 이상 서울에서는 벼가 익어가는 누런 들판을 볼 수가 없게 된다.
2. 민담, 설화
(1) 지명에 얽힌 이야기
① 내발산리
수명산(발산)과 우장산 두개의 산이 만나는 산기슭의 안(內)에 부락이 형성되었다 하여 통칭 내발산리(內鉢山里)라 하였으나 그중에서도 강서로 동쪽 우장산 아래마을을 원당리라고 하였으니 원래의 내발산리(內鉢山里)는 강서로 서쪽을 말하는 것이다. 내발산리는 야산이 많은 지역으로 아직까지 주변에 농지가 많아 서울에서는 보기드문 도시와 농촌이 혼재되어 있는 곳으로 수명산 아래 명덕, 화곡, 영일, 덕원, 발산, 가곡 등 초중고등학교 12개가 모여있어 우리 강서구의 최대 명문학군을 이루고 있다.
② 경문재
경문재는 수양대군이 경문(慶門)을 세웠던 고개이므로 해서 이름이 붙었는데 내발산동(우장산동)과 경계를 이룬다.
(사진)-경문밭 뒤에 외발산동이 보인다.
③ 굴우물
신광명에는 굴우물이 있었는데 굴속의 물이 흘러 내려와 모인 곳에 우물을 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④ 삼밭재
또 삼을 심었던 곳을 삼밭이라 했는데 신광명에서 산비탈에 있는 삼밭을 지나야만 구광명으로 갈 수 있었다.
삼밭이 있는 고개라 하여 삼밭재라 불렀으며 삼의 키가 어른 한길 정도 자라는 계절이 되면 이 삼밭에서는 마을의 처녀들이 겁탈당하는 일이 더러 생겨나므로 마을사람들이 삼밭을 없애기로 하였다. 삼밭이 있을 때는 신광명에서 멀리 돌아야만 구광명으로 갈 수 있던 것을 전에 삼밭이 있던 곳을 거쳐 바로 갈 수 있으므로 사람들이 내왕하는 고개로 변한 것이 바로 삼밭재이다. 삼이 무성하게 자랄 때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되고 삼밭을 없앤 후에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는데 이곳이 택지개발예정지구로 되었음은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만은 없다.(삼밭재는 서부자동차 운전면허 시험장 동쪽 부근이었다.)
⑤ 이문덕
이문(里門)이 서있던 고개를 이문덕이라고 하였는데 이문턱이 변해서 이문덕으로 되었다. 그 외 고개 이름으로는 수재가 있었는데 위치나 유래를 확인해 볼 수가 없다.
⑥ 만묵과 동다리
외발산동 301번지 일대는 지형이 다른 곳보다 물이 늘 괴어있으므로 만묵이라는 지명이 붙었으며 근처에 있는 다리는 동다리라 한다. 이 동다리는 공항동과 경계가 된다.
(2) 전설
① 산우물과 산신제
발산 아래 마을 쪽에는 산우물이 있었는데 옛 부터 산제사를 지낼 때에만 이 물을 사용하고 그 이외에는 덮어둔다고 한다. 이 동네에서 지내는 산신제는 오곡이 잘되고 여름 장마철에 산사태가 나는 일이 없도록 기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용하게도 다른 우물을 제수(祭水)로 사용하면 마을에 재앙이 들었다고 한다. 곧 가뭄이 들어 곡식이 다 타버리거나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산사태가 나지 않으면 논에 물이 너무 많아 병(病)으로 인한 피해로 벼의 수확량이 현저하게 감소되었다고 한다. 원인을 알 수 없던 끝에 마을의 노인 한사람이 잠시 낮잠을 잘 때 꿈 속에 어린 동자 한명이 나타나 산신제 때 떠올린 제수(祭水)에 지렁이가 나와 마실 수가 없는데도 계속 이 물을 떠놓으니 사람들도 물을 마실 수 없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노인이 어떤 물을 마셔야만 되느냐고 반문하니 산우물만이 정결한 물이므로 부정한 사람들은 마시지 않도록 하고 그 물을 떠서 바치라 하였다. 꿈속의 동자가 일러준대로 산우물을 제수로 사용하면서부터 마을에는 재앙이 나지 않게 되었다고 전한다.
(사진)-산우물, 바위틈에서 나는 약수인데, 필자가 마셔보니 참으로 달고 시원하였다
② 매봉재와 王陵터
부천시와 경계되는 부근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이곳은 옛날 어느 정승이 임금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름있는 지관에게 논 열마지기와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지어주고왕릉이 될만한 곳을 터로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임금은 정승이 모반할 뜻이 있어 왕릉터를 잡은 것으로 오해하고 정승을 귀향보낸 후 사약을 내렸는데 정승의 원혼이 구천을 헤매므로 후손들이 몰래 잡아놓은 능터에 시신을 수습, 안장하였다. 그로부터 매일 밤만 되면 알 수 없는 무덤이 한 기 혹은 두 기씩 생겨나 마침내 공동묘지로 변하게 되었다. 이 공동묘지가 있는 산의 모양이 날아가는 매처럼 생겼는데 풍수지리적인면에서도 이러한 매봉은 무인지지(武人之地)라 하여 무관이 배출되는 곳이라 한다. 그런데 문치(文治)와 무치(武治)를 겸비해야 할 왕의 능을 무인지지(武人之地)에 쓰던 후손들은 피를 흘리는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므로 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이 터의 살기를 물리치고 누를 수 있는 방법은 많은 사람이 밟아 주거나 터를 내려 누르는 힘을 가져야 하는데 공동묘지로 쓰면 가장 적격의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공동묘지로 변한 능터의 뒤로 전개된 들은 마을의 뒷부분이 되기도 하는데 이를 능뒤라 하며 또 능뒤를 돌아서 들판으로 가는 모퉁이 근방의 길을 능뒤모퉁이라 하였다.
③ 엉굴과 천년 이무기
남부순환로변의 264, 271~75, 261, 262, 256, 259번지 일대의 들판을 엉굴이라 하는데 엉굴에서 천년묵은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했다 하여 용의 굿이라고도 부른다. 엉굴이 있는 곳 남쪽의 야산은 부천시와 경계가 되며 이곳에 서낭당이 있었기에 서낭당이라고도 부른다. 고려 때에는 이곳에 장이 섰다 하여 장터고개(어온동장)라고도 한다. 조산(造山)은 동다리 아래로 지나는 개천에서 매년 준설을 하면서 파낸 흙이 높아 산처럼 보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이 근방의 벌판은 조산 근처에 있다 해서 조산뜰이라고 하였다. 서울시가 취락구조 개선사업을 하면서 신광명 마을의 14만 228㎡를 자연녹지에서 주거지역으로 용도를 변경한다는 변경고시를 하였다. 이를 보고 마을 사람들은 옛날 수양대군이 이곳 외발산동에 효자·효부를 칭송하여 새운 경문과 이문을 구경코자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때와 같은 번성함이 부활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하였는데, 실제로 현재 발산택지지구가 건설되어 아파트 촌을 이루고 수천가구가 모여 살게 되었으며, 앞으로도 마곡 최첨단융합기술 R&D시티로 조성되게 되므로 외발산동은 가장 나중에 제일 번성하는 동네가 될 것이다.
(3) 보호수에 얽힌 설화(은행나무: 외발산동 85-6 구광마을)
옛부터 마을에 경사가 있을 때마다 떡과 과일을 은행나무에 진상하며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했고 또 은행나무에서 딴 은행열매를 동네가 모두 나누어 먹었다. 마을에 무슨 일이 있으면 나무가 구슬피 울었는데 해방이 되던 해, 6·25동란 때에 나무가 울었다고 전한다. 홍수 때 마을이 물에 잠기면 떠내려가지 못하게 은행나무에 초가집들을 붙들어 메기도 했다고 하는 등 나무의 신성에 대한 의존이 강했다.
(사진)-구광마을 보호수
3. 『경주최씨』 집성촌
외발산동 일대는 경주최씨 집성촌으로 시작된 마을이다. 경주최씨 17대 손 최인한(崔仁漢)이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부터 약 500여년 이라는 세월을 경주최씨가 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지금도 60여가구 200여명이 외발산동에 거주하고 있는 서울에서 찾아보기 힘든 집성촌이다. 그동안 거센 개발 바람 속에서도 이 마을이 집성촌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이며, 텃세도 있어 다른 성씨들이 이 마을에 들어와 살기 어려웠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곳 경주최씨 문중에서 배출한 역사적 인물 중 한 분으로 최흥운(崔興雲)장군이 있으며 병자호란 때 최흥운 장군의 강건한 기백과 지혜로움은 이곳 최씨 집성촌의 긍지가 되고 있다.
4. 역사적 인물: 최흥운(崔興雲)장군
최흥운 장군(1602~1636)은 1621년 무과에 등과한 후 형조좌랑으로 재직할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조선조 16대 인조 14년(1636)에 청 태종이 군신(君臣)의 관계를 요구하여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침략해 옴에 따라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최흥운 장군은 두툼한 누빈 솜바지 저고리를 갑옷 속에 입고서 12월 한겨울에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으며, 청나라 군대와 치열한 격전을 치루던 중 포로로 붙잡히게 된다. 청나라 군사들은 최장군을 굶겨 죽이려고 감옥에 가두고 오랫동안 하루 물 한 대접 외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으나 굳굳하게 버티게 되므로 기인이라 여겨 두려워하며 방면하게 된다. 사실은 최장군의 누빈 솜바지 저고리에는 솜 대신 미숫가루가 들어 있었는데, 이것을 먹으며 기운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 군사들 중 일부가 조선의 장군 중에 저런 기인을 살려두면 후환이 두렵다고 생각한 나머지 장군을 죽이려고 뒤를 밟게 된다. 장군은 감옥에서 풀려 나와 샘물가에서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는 중에 뒤를 밟고 기회를 엿보던 청나라 군사들이 달려들어 목을 베어 가져갔다. 전쟁이 끝난 뒤 최장군의 죽음을 알게 된 인조임금은 눈물을 흘리며 최흥운 장군의 목없는 시신을 정중히 수습하여 장사지내 주었으니 1636년 12월 23일 35세로 일신을 마감하게 된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9년 뒤 1645년(을유년)에 인조임금은 최흥운장군을 “가선대부 이조참판”으로 추증하고 외발산동 경주최씨 집성촌에 있는 후손(최기창)의 집에 정문(旌門: 충신문)을 세워주어 자손대대로 그 공덕을 기리게 하였다. 최장군이 물을 떠 마시던 표주박은 자손 대대로 가보로 보관되어 내려왔으나 6·25동란 혼란기 때 잃어 버렸다고 한다.
(사진)-최흥운 장군의 충신문
(발산택지개발지구)
발산택지개발지구는 지하철 5호선 발산역과 마곡역이 인접하여 대중교통이용이 편리하고, 지구 북측으로 공항로, 남서측으로 남부순환도로가 관통하고 있어 주변지역으로의 접근성이 양호한 지역이다. 우장산,수명산 등 양호한 주변 자연환경과 함께 서남권 농수산물 도매시장 등이 입지하여 생활환경이 우수한 지역으로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되는 환경 친화적인 주거단지이기도 하다. 원래 이지역은 조선조 초기 때부터 경주최씨 집성촌이 들어서 있던 곳이다. 성종 임금 때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최숙정(崔淑精),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임금을 모시고 결사항전을 하다가 전사한 최흥운 (崔興雲)장군 등은 이곳 외발산동(광명마을) 출신 인물들이다. 또한 이곳은 소문난 효자마을이기도 하다. 수양대군이 김포 통진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밤늦게 길을 잃고 헤매던 중 불빛을 보고 이 마을로 들어와 하룻밤을 쉬어갈 때, 비록 가난에 찌든 마을이지만 늙으신 부모를 지성으로 공양하는 갸륵한 모습을 보고감격하였다. 이틑날 대궐로 돌아간 수양대군은 대군의 이름으로 마을에 경문을 세워 효자마을임을 칭송하고 경문밭을 마을에 내려주어 늙은 부모를 잘 공양하라고 하였기에 수명산(“발산”이라고도 함)이 기뻐 울음을 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지역은 무섭게 발전하였지만 이 지역은 개발 제한구역으로 묶여 오랜 세월동안 무너져가는 옛집들과 공장과 비닐하우스, 논·밭 등으로 이우어져 강서지역에서 가장 낙후된 곳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SH공사(서울시 도시개발공사)가 175천평의 이 드넓은 땅에 '2004년 5월부터 착공하여 약 3년에 걸쳐 1단지∼8단지에 5592가구의 아파트를 세웠다. 발산택지개발지구 아파트는 임대가 많은 게 가장 큰 특징이다. 발산지구 5592가구의 절반이 넘는 2805가구가 임대이며 같은 단지나 같은 동에 섞여 있는 형태이다. 발산지구는 향후 개발예정인 마곡지구와 연계하여 강서지역의 새로운 중심 생활권으로 성장할 것으로 크게 기대되는 곳이다.
공항동(空港洞)
1. 동 유래
공항동의 동명 유래는 이곳에 김포비행장이 있음으로 해서 붙여졌다. 조선시대까지는 경기도 양천군 가곡면·납어리·송정리·소율리였으나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 제 111호에 의거, 경기도내 각면의 명칭과 구역을 새로 정할 때 이들 납어리·송정리·소율리를 한데 묶어 김포군 양서면 송정리라하였다. 3개의 자연부락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인구가 많은 송정리는 소나무가 울창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공항동은 북쪽으로 마곡동과 방화동이 접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외발산동과 연접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오곡동·오쇠동 및 경기도 부천시 고강동과 접하고 서쪽은 과해동과 접하고 있다. 일제가 소위 아시아공영권(共榮圈)이라는 미명아래 중국대륙을 침략하려는 의도로 1913년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일본의 항공산업을 발달시키고 육군항공대의 기능을 강화시키면서부터 달라지게 되었다. 만주사변으로 괴뢰국인 만주국을 탄생시킨 일제는 중국본토까지도 식민지화하기 위해 1937년 7월 마침내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만주안동까지 철도로 군수용품을 수송할 수 있도록 1908년에 안봉선(安奉線)을 건설하였으나 일본 본토에서 만주와 중국 남경까지 직항로로는 군용비행기의 연료보급이 어렵다는 판단아래 이곳 공항동 일대에 일본 육군 군사비행장을 건설코자 하는 계획을 1936년에 수립, 1937년부터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에 공항동에 살던 조선시대 이래의 자연부락들은 군사비행장 시설계획지구 밖으로 소개되어 현재의 공항동 60번지 일대에 새로운 마을을 형성케 되었다. 공항이 건설되기 이전까지는 넓은 김포평야의 한가운데 비교적 습지가 적은 밭지역으로 형성되어 주거지역으로 안성마춤이었다. 따라서 주민들은 이곳 공항동일대에 거주하면서 과해동·방화동·마곡동·가양동·내발산동·외발산동의 농경지에서 농사를 하며 살았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이 때문에 아직은 자연부락명이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가 있다.
2. 민담, 설화(지명에 얽힌 이야기)
① 김포국제공항(金浦國際空港)과 새말(新村)
김포국제공항은 국제선지역과 국내선지역으로 나누어지는데, 국내선 지역은 일제 때 군사비행장 시설의 중심으로 확충된 것이다. 이 국내선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활주로는 원래 간뎃말(가운데 마을)이라 불 려지던 곳이다. 간뎃말은 갈말(칡이 많이 나오는 마을)과 소배미(밤나무 숲속의 작은 마을)사이에 있던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졌는데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비행장이 건설되자 공항동 60번지 일대로 집단이주, 새로 마을을 형성했다 하여 새말 또는 신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진)-개화산 미타사 쪽에서 바라본 김포공항
새말은 대략 1937년경에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당초의 주민들은 농사를 짓는 일보다 상업을 주로 하거나 비행장 건설을 위한 인부로 동원되어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② 갈말(葛村)
갈말은 한자로 갈촌으로 표기하며 칡이 많이 나는 고개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붙여졌다. 비행장으로 거의 흡수되었으며 주민들은 새말로 이주하였다.
③ 송정리(松亭里)
송정리는 소나무가 무척 울창했던 이곳에 누가 지었는지 모르는 소나무로 된 정자가 있었는데 그 정자를 송정이라 하고 일대를 송정리라 불렀다고 한다.
④ 눌언리(訥言里)
눌언리는 누랭이말이라고도 하는데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 살기 시작하던 사람이 말을 더듬었기 때문에 「눌언이」 마을이라 하던 것이 눌언리로 되었다. 누랭이는 눌언이 변해서 된 이름이다.
⑤ 소율리(小栗里)
소율리는 소배미라고도 하며 밤나무골이라고도 했다. 옛날 밤나무가 많이 있었고 그 속에 예닐곱집이 살아 소배미라 했는데 6·25동란 때 피난민들이 밤나무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⑥ 송촌(松村)
송촌을 솔말이라 하는데 소나무가 무성하던 이곳에 약 400년 전 자리를 처음 잡은 고령 김씨가 송촌이라는 마을 이름을 붙였다. 송정리는 송촌의 한 귀퉁이에 있던 마을이었으나 1914년 일제가 동·리명을 정할 때 간뎃말·소배미·솔말·갈말 등을 모아 송정리라고 하였으므로 송촌은 송정리의 중심지역이 되었다.
⑦ 등골과 뒤너머골
그 외의 자연부락으로는 등골과 뒤너머골이 있었다. 등골은 등너머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과수원 지역을 등골이라 하였다. 뒤너머골은 늦다리 마을의 뒷쪽 너머에 있는 마을을 말하였다.
⑧ 눌언(訥言)방죽
눌언리에는 눌언방죽(누랭이방죽)이 있었는데 그 안쪽의 논을 안굿논이라고도 하였다. 누랭이방죽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 살던 말더듬이가 돌을 한 개 두 개 주워다 방죽을 쌓았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⑨ 만교(晩橋)
이 방죽에는 돌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늦다리라고도 하고 눌언방죽 돌다리라고도 한다. 고려 때 이 다리를 만들어 수원과 송도를 다녔는데 이때 돌다리의 준공이 매우 늦게 되었으므로 만교라 하였다. 눌언방죽(訥言之堰: 눌언지언-눌언리 북쪽에 있었다)의 안쪽 뜰은 물이 많아 농사가 잘 되므로 안굿논이라 하였다. 또 솔말 근처의 논을 왕새논이라 하고 다리 근방에 있는 들판의 자개방죽논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맑은 개울의 돌 밑에서 사는 짜가사리가 많이 모이는 논이라 해서 자개방죽논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맑은 개울의 돌 밑에서 사는 짜가사리가 모이는 만큼 논의 물이 매우 맑았다. 왕새논은 어른키만큼이나 크게 자란 억새와 갈대가 숲을 이루고 그 아래에서부터 논이 시작되므로 해서 왕새논이라 붙여졌다. 모기골논은 골짜기에 모기가 유난히 많이 서식하므로 이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로 논에 물을 댄다 하여 모기골논이라 붙여졌다. 공세논은 세금을 내지 않는 논이라 하여 공세(空稅)라는 이름이 붙었다. 골짜기로는 공세논골짜기·모기골·황새논골짜기·못골·산우물골짜기가 있다. 이중 산우물골짜기는 늦다리 근처에 있는 골짜기로 산우물이 있기 때문에 명칭이 유래되었다. 못골은 비행장 근처의 옛날 갈말골짜기를 말하는데 골짜기에 연못이 여러개 있어서 이름이 붙여졌다. 고개이름으로는 서울고개·칡불고개가 있다. 지형이 습지와 야산의 과수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다른 동네와는 달리 고개가 적은 것도 공항동의 특징이다. 이중 서울고개는 공항동에서 서울쪽으로 가는 김포가도상의 고개를 말한다. 칡불고개는 갈촌에 있었던 고개로 갈불고개라고도 하였다. 산이름으로는 신가재마루터기와 큰동산 그리고 칡불고개산이 있었다. 신가재마루터기는 양서출장소가 있던 산의 이름이었다. 칡불고개산은 칡이 많이 나는 고개가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큰동산은 송정리 마을 앞에 있던 큰동산을 말하는데 지금은확장된 김포공항 안에 편입되었으며 깎여져서 활주로로 변하였다.
3. 역사적 사실
1937년 일제는 김포비행장 건설사업을 착수하면서 한강변에 여러 곳의 채석장을 설치하고 석재를 실어나르기 시작하였다. 이때 한강변의 수많은 절경이 파손되어 현 공항로(당시는 국방도로)와 김포비행장 활주로 바닥의 석재로 사용하여 사라져 버렸으니, 이당시 선유봉(양화대교 입구)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고, 인공폭포가 있는 쥐산의 뒤편과 가양동 궁산의 강변쪽 절경이 심하게 파괴되어 볼품사나운 절개지가 되어 버렸다.(채석장을 설치했기 때문) 특히 일제는 가양동 궁산에(현 유동기업자리) 비행장 건설토목국현장사무실을 차려놓고선 비행장까지 논밭사이로 폭이 좁은 철길을 깔아놓고 카바이트 기관차(탄광에서 석탄 등을 실어 나르는 화차)로 석재를 실어 날랐다. 그 당시 궁산 채석장에는 한강 상류로부터 돗배로 돌을 실어와 쌓아놓고 비행장까지 화차로 운반하기도 했다. 가양동과 마곡동 사이의 구 양천길을 통하여 방화동 신안빌라 아파트 앞과 대성연립 앞을 지나 공항동 사거리를 거쳐 비행장까지 철길을 깔았는데 이 길은 오늘날까지 뒷골목으로 남아 있어 옛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방화1동
1. 동 유래
방화라는 동명은 산(山)의 형국이 활짝 핀 꽃 모양이라고 이름이 붙은 개화산(開花山) 옆에 발달한 마을이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방화동은 북쪽에 한강이 있고, 연안에 농경지가 발달하였으며 한강 건너로 행주산성과 마주보며 강을 건너는 행주나루가 있었다. 그리고 구한말 대한제국까지 경기도 양천군 삼정면 정곡리·치현리·능리로 각각 불리워지던 부락들이었다. 옛 방화동이 현재는 방화1.2.3동으로 나뉘어져 있으나 지금의 방화1.2동은 대부분 논밭들이었고, 현재 방화3동 일대에 주로 마을이 형성되었었기에 자연히 여러 기록과 이야기들은 방화3동 편에 집중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가급적 그 고장의 여러 기록들을 발굴 소개하고자 하나, 현재 방화3동편에 기록이 몰리게 되므로, 본래 한 뿌리였던 방화동의 여러 기록을 1.2.3동으로 나누어 분산 소개하려 한다.
2. 민담, 설화
(1) 지명에 얽힌 이야기
① 능리(陵里)---현재 방화3동임
능리는 능말이라고도 하는데 고려말에 이곳을 왕릉지로 삼았으나 왕기가 모두 남경(지금의 서울) 쪽으로 빠져 나간다는 대신들의 만류로, 이곳에 왕릉터임을 알리는 말뚝을 박아 놓고 능지임을 표시하여 사람들에게 알리기만 했고 그 자리에는 어느 누구도 묘를 쓸 수 없게 하였다는 전설에서 비롯된다. 또 조선 중종 때 좌의정이었던 심정(1471~1531)이 관직에서 물러나 노년을 지낼 주택지로 보고 재임 중에 이미 선택을 했던 마을이라고도 한다. 그는 개화산 아래 양지 바른 곳에 집을 짓고 배산 임수하여 글 읽고 후진을 양성코자 가양동에 미리 별장을 짓고 자주 내왕하였다.(좌의정 심정이 이곳에 정착하기 전에는 연안車씨가 고려 때부터 살고 있었으나 심정공이 들어오면서 점차 타곳으로 이전하였다 한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생부인 원종(追尊, 宣祖의 5子)의 능을 천장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풍수지리가를 보내어 물색하던 중 이곳 능리가 고려 때에도 왕릉지로 선정되었던 적이 있었던 것을 감안, 높이 131.2m의 개화산을 주산으로 해서 능지로 선정하였다.
좌측70.5m의 치현을 좌청룡으로 삼을 수는 있으나 주산에서부터 휘어져 내려오는 우백호가 없어 장손이 없고 형제간에 끊임없는 정권다툼이 예견되는 자리라 하여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더구나 왕릉으로서는 골짜기 100개를 채워야만 후손이 발복하고 나라에 평안함이 지속되는 것인데, 99개 밖에 없으므로 조금 더 서쪽인 김포 풍무리로 옮겨 장릉지(북성산)로 정하였다. 그래서 고려 때와 조선조 두번에 걸쳐 왕릉지로 선정되었던 연유로 해서 이곳은 마을 이름만 능리 혹은 능골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한때는 심씨마을이라는 뜻의 심울(沈蔚)이라고도 했다.
② 긴등
긴등은 광복 후에 새로 생긴 마을인데 집들이 치현을 중심으로 산등성이에 길게 산재해 있었다. 247. 607. 608. 609번지 일대이다. 긴등의 서쪽 끝에는 수용소말이 자리잡고 있었다. 수용소 마을 혹은 수용소 부락이라고도 하는데 6·25동란 뒤에 황해도 송화군에서 월남해왔던 피난민들의 수용소가 해체되자 그곳에 수용되어 있던 사람들이 이 일대에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③ 공장(工場)말
공장은 일제말기에 세운 벽돌과 옹기를 굽던 공장으로 인해 100여세대가 모여 살면서 생긴 마을이다.
④ 해루굿논
전체 면적 가운데 논이 1/3정도 되는 방화동에는 논의 이름도 여럿 남아있다. 방죽이 있는 근처의 들은 방죽논, 논이 다른 곳보다 좀 낮은 곳은 해루굿논이라 부른다. 능리와 치현·정곡 앞에 있는 벌판을 앞벌이라 하는데 414~420, 443~447번지 일대이다. 옛날에는 마을 앞에 누런 벼들이 있었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주택가로 변하였다.
(사진)-치현산 아래 앞벌 논바닥이 주택가로 변한 모습.
⑤ 새탕개울
지질상 여늬 논에 비해 모래가 많이 있는 새탕벌, 모래가 많은 개울을 새탕개울이라 한다. 모래(沙)가 바닥(바탕)에 깔려 있다는 뜻이다. 한편으로는 이 개울이 홍수가 지면 흙탕이 지나고 새 물(湯)이 흘러 내려가는 개울로 형성되었다는 의미의 신천 즉 새 개울이라는 뜻도 된다.
⑥ 시널다리
그 외 시널다리가 있었는데 시널다리개울에 걸쳐 있었다. 나무판 조각으로 다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시널다리라 했는데 지금은 개울이 없어졌기 때문에 시널다리는 물론 시널다리개울의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다.
⑦ 여우굴 전설
개화산이 있음으로 해서 개화동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듯 개화산에는 봄이면 온갖 꽃이 만발하고 온산이 꽃물감을 풀어 놓은 듯하다. 가을날 김포의 넓은 들판에 누런 벼이삭과 개화산의 붉은 단풍 속에 파묻힌 개화산은 한폭의 그림이다. 약사사를 거의 다가서 길 왼쪽쯤에 여우굴이라 부르는 작은 굴이 하나 있다. 여우가 숨어 살면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굴인데 길이는 약 7-8m, 폭은 2m정도 되는 넓은 굴이다. 주민들은 이곳에 다음과 같은 전설을 들려준다. 사랑을 이루지 못한 두 남녀가 마을을 떠나 행주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려 하였으나 나루터를 지키는 관원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이 굴에 숨어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밤에 몰래 강을 건너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굴속에서 밤을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는데 뭔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잠을 깨보니 여우가 사랑하는 여자를 해치려 하는 것을 보고 남자는 죽을힘을 다해 여우와 싸워 이겼으나 그 자신도 심한 상처를 입고 숨을 거두었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린 여자가 그 모습에 넋을 잃고 미쳐버리고 말았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어쩌다 지나는 행인을 마주치면 여우처럼 자세를 갖추고 공격하기 일수였다. 마을사람들이 굴 입구에 불을 때서 미친 여자는 질식해 죽었으나 그 후부터 누구도 이 굴 가까이 가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⑧ 세우물
방화동에는 오래된 우물이 네 개가 있었다. 능말에 있던 세우물은 우물 셋이 나란히 삼각형을 이루어 3대를 나타내고 있다. 흔히 어머니·처·누이(또는 시할머니·시어머니·며느리)의 3女가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위치를 이루고 있다고 말해온다. 그런데 한 집안의 중심이 되는 세 여자가 화합을 하면 집안이 조용하고 번창하지만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면 망할 집안이라 일컫는다. 세우물의 경우 한군데 우물에서 물을 퍼올리면 다른 우물은 수량이 급속하게 줄어들므로 마을사람들이 삼음도회(三陰都會)라 하여 이 우물물을 마시면 자식을 못 낳거나 집안이 시끄럽다고 하여 우물을 메우자는 회의를 가졌다. 그 결가 세우물은 매몰되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 큰 우물만 남아있었다. 큰 우물은 복종마을에 있는 우물인데 물맛이 달고 시원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 한다. 큰 우물에서 물을 마신 사람은 누구나가 다 「물맛좋다」라고 표현을 해야 수위의 변화가 없지 그런 소리가 없으면 물이 양이 갑자기 줄어들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아파트로 변하여 옛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방화2동
1. 동 유래
방화라는 지명은 개화산 옆에 있으므로 얻어진 것이다. 개화산을 중심으로 인근일대의 부락이 모여 형성된 방화동은 꽃이 피는 모습과 같은 개화산 옆에서 발달한 동네라는 뜻으로 동명이 유래된 것이다. 또한 방화2동은 법정동인 개화동 지역과 방화동의 일부를 관할하는데 이 책에서는 개화동 편을 별도로 편집하였기에 여기서는 자연히 방화동의 일부지역인 “방화로” 서쪽 부분만을 기술할 수밖에 없다. 이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의 대부분이 논밭이었고 1963. 1. 1부로 서울시로 편입되면서부터 일부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하여 1970년대에는 전국적으로 부동산 투기붐이 일면서 단독주택이 들어서다가 1992년도 방화지구 택지개발계획에 의거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시가지로 형성되었으니 방화2동지역의 역사는 일천하기만 하다. 따라서 기록할 내용이 별로 없으므로 필자가 이 책을 집필하면서 가장 곤혹스러워 한 부분이 바로 방화2동이라고 실토할 수밖에 없다.
(사진)-1994년 방화삼거리에서 바라다 본 옛 방화동길
2. 민담, 설화
(1) 지명에 얽힌 이야기
① 신설동
신설동이란 지명은 원래 예닐곱채 정도의 집이 있었으나 6·25동란 이후 새로 집들을 많이 짓고 사람들이 모여들자 새로 동네가 형성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640. 641. 667. 620. 626. 634번지 일대로 공항로타리에서 행주대교 쪽을 바라보며 오른쪽 마을이 이에 해당한다.
② 복종머리(伏鐘머리)와 삼거리
복종머리는 개화초등학교가 있는 주변일대로 옛날 이곳 마을에서 집터를 닦는데 땅속에서 엎어진 “종”이 나왔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 혹은 복종이라고도 한다. 삼거리는 공장 앞과 복종 앞 두 군데의 세 갈래 길을 말하며 송도길은 옛날 고려의 송도 쪽으로 통하는 길을 일컫는다. 지금은 개화초등학교 앞 삼거리이다.
③ 불당골
불당골은 옛날에 불당이 있었다는 골짜기를 말하는데 능리 뒷산의 도당을 불당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복종이 나왔다는 복종머리와 불당골이 멀지않은 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불당골에 조그마한 암자가 있어 그 암자를 불당이라 불렀을 듯하다.
④ 양천 길과 방화로
방화동을 통과하는 가로로는 염창동 양화교 다리에서부터 방화동 501번지 개화초등학교 앞까지 이르는 노폭 20m~30m, 길이 7.300m의 양천길이 있다. 양천길은 공항로가 개설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울-강화, 통진, 김포를 이어주는 국도로서 주된 도로였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곳의 유일한 길이었던 양천길은 이 땅의 역사의 이끼가 첩첩으로 쌓여있는 옛길이다. 나이어린 영창대군의 강화유배길, 정묘호란 때 인조의 피난길, 정변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의 강화도 귀양길로서 눈물의 길이었으나, 강화도령이 철종임금으로 등극키 위하여 한양으로 귀경하던 기쁨의 길, 희망의 길이었기도 한 양천길이다. 그리고 방화동길은 김포국제공항 입구 사거리에서 방화동 569-12번지 방화사거리에 이르는 노폭 12m 연장기리 1.400m이다. 개화로가 개통되기 전까지 서울-강화간의 버스가 다니던 간선도로로 좌우의 상가일대는 인근에서 가장 번화한 상가 거리였다. 1984년 11월 7일 가로명이 처음 제정될 때 이 길이 통과하는 방화동의 동명에서 가로명을 정했다. 방화동길보다 넓은 폭 20m의 개화로가 신설됨으로써 강화까지 가는 직행버스의 노선을 빼앗겼지만 방화동길은 아직도 이곳에서 제일 번잡한 곳으로 노변에 상권이 형성되어 있는 길이다. 대형버스 두 대가 어깨를 맞닿을 듯한 자세로 겨우 스쳐가는 이 길을 중심으로 한 때는 5일장이 서기도 했다.
⑤ 김포공항과의 관계
1937년 8월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이에 따라 김포군사비행장도 건설되기시작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소위 보국단이란 이름으로 젊은 청년들을 붙들어와 비행장 건설노역에 투입했으며 그 외에도 많은 기술자등이 비행장 건설에 투입되므로써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다. 따라서 비행장 정문앞 공항사거리 근방에는 시장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 뒤 6·25동란 때에도 미군의 군사비행장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시설을 보다 확충함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었으니 자연히 김포, 강화등지에서는 농수산물이 이곳 시장으로 반입되며 서울에서는 일반 생필품들이 들어와 상당히 큰 시장으로 변천하게 된 것이 오늘날 공항시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공항동과 방화동에 인구가 급증하게 된 것이다. 또한 현금이 풍족한 상인들이 몰려들게 되자 현재 공항파출소가 들어서 있는 방화2동 620번지 뒤편을 중심으로 김포공항 입구 주변에는 많은 색주가가 들어서서 외로운 객인의 노독을 풀게 하였으니 한창 번창할 때에는 접대부들이 백여명이 넘었다고 한다.(오늘날에는 세련되고고급스런 음식점 등으로 변하였음)
(사진)-방화동길 입구의 공항시장 일대
방화3동
1. 동유래
1990년 3월 21일 건설부고시 제138호에 의거 방화1동 구간 중에 개화산 아래자락의 정곡리·능리·치현리의 대부분을 택지개발함으로써, 오늘날 거대한 아파트 군락과 6개의 초중고교와 많은 상가들이 들어섰으며, 옛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게 변하고 말았다. (1994년 11월 1일 字로 방화3동이 개청됨)
2. 민담, 설화
(1) 지명에 얽힌 이야기
① 능리(陵里)
고려말에 이곳을 왕능지로 삼았으나 왕기가 모두 남경(지금의 서울)쪽으로 빠져 나간다는 풍수지리가의 만류에 의해, 왕릉지라는 표시만 해두고 아무도 묘를 쓸 수 없게 하였다. 그 뒤 조선조 때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임금께서 생부이 신 원종(追尊: 宣祖의 5子)의 능을 이곳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한성에서부터 골짜기 100개를 넘어야 후손이 발복하고 나라의 평안이 유지되는데, 능리까지는 골짜기가 99개밖에 되지 않으므로 조금 더 서쪽인 김포 풍무리(북성산, 냉정산)로 옮겨 왕릉지로 하였으니 오늘날 『장릉』이 되었다. 그 후 이곳은 이름만 능리로 전해지게 되었으며 심정(沈貞)공이 들어와 자리잡고 살면서부터 심씨마을이 되었다.
② 정곡리(井谷里)
치현의 동쪽 끝에 자리한 마을을 정곡리라 하는데 마을 골짜기에 언제나 맑은 샘물이 흘렀기에 정곡리라 하였다. 아무리 가물어도 샘물은 마을을 감돌아 흐르기 때문에 돌정말(돌샘말)이라고도 하였다.
③ 치현리(稚峴里)
개화산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이어진 치현(꿩고개)고개 주위에 발달한 마을이다. 치현을 방화고개라고도 하였다. ※ 위의 지명유래에 대하여 보다 자세히 알고자 하면 방화1동편을 참고하시기 바람.
④ 큰고개
개화산과 치현이 이어지는 잘록한 허리부분을 큰고개라 불렀다. 행주나루로 가기 위해서는 지름길이었던 이 고개를 넘었는데 은근히 높고 나무가 울창해서 대낮에도 혼자 넘기에는 으스스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고개를 넘으려면 대여섯명이 모여서 횃불을 들고 지나갔다고 한다. 토성고개는 큰고개에서 이어진 작은 고개에 해당하는 곳이다. 얼핏 보면 와우(臥牛)의 모양이기도 하고 복호(伏虎)의 모양이기도 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이러한 곳을 장지로 선정하면 부(富) 혹은 귀(貴)가 따른다 하여 명혈(名穴)로 여긴다. 그 때문인지 주변일대에 무주묘(無主墓)인 듯한 묘들이 여러 개가 있다.
⑤ 도리 모퉁이
도리모퉁이는 치현의 동남 끝부분에 해당되는데 길이 돌아 꼬부라져 있는 모퉁이를 말한다.
⑥ 배다리벌
배다리벌은 올림픽대로의 강쪽에 한강체육공원으로 조성된 곳인데 옛날에는 이곳에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한강을 오가는 배가 이곳보다 하류지점의 서쪽에 있는 행주나루에 정박하지만 작은 거룻배가 이곳까지 들어오므로 배가 다리를 놓아준다는 의미의 배다리벌이라 하였다.
⑦ 범머리 웅덩이
범머리웅덩이는 버러미못이라고도 하는데 1925년에 일어난 을축년 대홍수로 불어났던 한강물로 일대의 전답이 모두 물에 잠겼는데 다른 곳의 물이 빠진 후에도 여기만큼은 물이 빠지지 않고 계속 고여있어 자연적으로 못이 생기게 되었다. 범머리처럼 생겼다는 산줄기의 끝에 있는데 어느덧 범머리 웅덩이는 동네 낚시터가 되어 주민들이 즐겨찾는 곳이 되었다. 88올림픽도로가 생기면서 일대는 아파트촌으로 변하고 말았다.
⑧ 개화산
개화산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양천읍지』를 보아야 한다. 『양천읍지』의 산천조에서는 개화산을 양천의 진산으로 보고 있는 『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말하고 있다. 「동해의 산맥은 백두산을 조종(祖宗)으로 하여 태백산에 이르고 서쪽으로 굽이쳐 속리산이 된 다음 북행하여 청계산이 되는데, 여기서 맥을 나누어 일맥은 북쪽으로 관악산을 이루고 다시 북쪽으로 떨어져 양화도 선유봉이 되며, 일맥은 서북을 향하여 안산의 수리산·인천·소래산으로 이루어져 북행해 와서 본현(本縣)」에 이르러서는 증산(曾山)이 된다. 증산은 산모습이 예뻐서 군자봉이라고도 하니 이것이 일읍(一邑)의 조봉(祖峰)이 되며 일맥이 북향하여 방화산(개화산)이 되는데 일읍(一邑)의 진산(鎭山)이다. 주룡산(개화산)을 진산이라 표현한 것은 잘못된 표현이지만 이곳에 봉수대가 동·서 두 곳이 설치되어 있고 봉수꾼 100명과 봉대별장(烽臺別將)이 있었다 하는 것으로 보아 봉수진이 있었던 산이라는 의미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두 개의 봉수대중 동쪽은 방화동의 치현에서, 서쪽은 개화산에서 각각 봉수를 받아 같이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⑨ 개화산 봉수대
개화산은 전라도·충청도 방면의 해로를 통한 봉수를 회현(會賢)쪽 산마루의 남산 제5봉에서 연결받아 김포로 보냈는데 개화산의 봉수 2개 가운데 동쪽의 봉수대는 치현이었다. 지금은 통신대가 주둔한다. 옛날 봉수대의 직봉 또는 간봉 지역은 오늘날에도 통신대의 주둔지이거나 기상관측소가 있는 곳이 많다. 소백산의 국립관측대, 남산 봉수대 근방의 수도방위사령부, 모악동봉(母岳東峰)의 주둔부대 등이 그것이다. 이 치현에서 봉화를 들었던 곳을 봉화뚝이라 한다. 개화산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행주산성과 마주보는 산이다. 산정에 서면 삼각산과 도봉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고 한강과 임진강이 마주치는 조강(祖江)의 광활한 조해(潮海)풍광을 아울러 조망할 수 있다. 또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인왕산·낙산·백악산·남산을 비롯해서 멀리 관악산과 그 사이를 굽이쳐오는 한강 상류의 물길도 한눈에 즐길 수 있는 명소 중의 명소일 수밖에 없는 곳이다.
(참고) 임진왜란·병자호란 전까지는 봉화불을 올렸다하여 개화산(開火山)이라 하였는데,그 후에 개화산(開花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주장이 있다. 개발제한구역과 군사시설이 위치하고 있어 자연 그대로의 숲이 제법 울창한 것도 개화산의 자랑이다. 이런 까닭으로 개화동 곳곳에는 오래 된 아람드리 나무가 많이 있다.
(2) 전설
“개화사”(현. 약사사)이름 유래
『양천읍지』의 고적조에서는 개화사(약사사)가 있는 산이름을 주룡산(駐龍山)이라 하기도 하고 개화산이라고도 하는 내력을 다음과 같이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신라 때에 한 도인이 이산에 살면서 주룡선생(駐龍先生)이라 자칭하며 숨어서 도(道)를 닦고 세상에 나오지 않다가 이곳에서 늙어 세상을 떳다. 그런데 그가 이곳에 살 때 매년 9월 9일에는 동자 두세명과 더불어 높은 곳에 올라가 술을 마시며 구일용산음(九日龍山飮)이라 하였으므로 주룡산이라 이름하였다. 선생이 돌아간 후에 그 자리에는 이상한 꽃 한송이가 피어났다. 이를 두고 사람들이 개화산이라 일컬었다. 지금의 개화사(약사사)가 선생이 살던 옛터라고 한다. 상국 송인명이 일찍이 개화사 산방에서 독서한 끝에 재상이 되기에 이르자 절 아래에 불향답(佛享沓)을 두었으며, 뒷날 사찰을 중수할 때 그 후손 교리 송백옥이 중수기를 지었다.
3. 역사적 인물
① 심정(沈貞)
심정의 호는 소요당(逍遙堂)인데 평소 가양동 구암(탑산) 근방의 지기가 뛰어난 곳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던 중 어느 날 탑산 쪽을 다녀오는 길에 잠시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니 산위에서 강을 내려다보는 풍경이 절경 중에서도 뛰어나며 광주바위와 허가바위가 있고 한강변의 절경이 내려다보이는 것이 천하 절경
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심정은 구암(탑산) 위에(현재 허준박물관, 대한한의사협회 회관이 들어서 있는 곳) 별장을 지어놓고 자신의 호를 따서 소요정이라 하였다. 그는 우의정을 거쳐 1527년에는 좌의정에 올랐다. 그는 후에 복성군의 옥사로 인해 김안노의 탄핵을 받아 양천으로 유배되었다가 박빈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사사(賜死)되었다. 그가 일으킨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강직하기 그지없었던 최숙생의 관직도 삭탈되었는데 그는 관직 생활의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 소요정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육합(六合)띠끌 속에 큰 바다가 뜬 듯이 몸이 꿈속인데 누굴 위해 머무나 이제까지 청운길이 붕새 날개에 걸려 요당(拗堂)에는 풀잎 배가 붙은 것 못 보았네 만약 자유롭게 놀아서 참으로 즐길 수 있다면 비록 인작(人爵) 없으나 다시 무엇 구하리 멀리 생각하건데 술잔 잡고 등림(登臨)하는 곳에 물결따라 출렁이는 갈매기 보고 있으리
라고 하면서 높은 관직에 오르려 안간힘을 다하는 사람들도 소요정에 올라보면 바다같은 세상사 가운데 벼슬이란 먼지처럼 작고 미약한 것이므로 연연하지 않고 살아가는 최선의 길을 택하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주변환경과 인맥과 요행을 따라 처세하여 인간이 주는 최고의 영광인 인작(人爵)을 받을 지라도 그 순간 지나면 헛된 것이 되어 버리지만, 순리에 따라 도덕과 겸손으로 수고(壽考)하는 것은 곧 하늘이 주는 천작(天爵)을 받는 것이라 하였다. 소요정에서는 천작과 인작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문계창도 이곳 소요정을 방문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사진)-심정공이 세웠던 공암바위 위의 소요정
세상은 바다인데 한 몸이 떳다 가는 것을 누가 밀며,
그친 것은 누가 멈춰줬나 먼지같은 세상을 향하여 아름다운 그릇(벼슬) 거두기 싫어하여 강위에 와서 조각배를 갖추기 힘썼네 임금 은총은 분수가 있는 듯 하나 도리어 분수가 아니었고 신선 경지 못 구할 듯 또한 구할 수 있다 낭묘(조정)의 강호가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 생각을 바꿔서 갈매기 놀램을 꺼리어 미워하지 말라
티끌과 아지랑이로 이루어진 세상을 살면서 서로 미워하고 보다 높은 벼슬길로 올라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는 의미에서 장자가 지은 『남화경』의 제1장 소요정에서 이름을 따온 이곳 소요정에 올라 분수에 맞추어 살 것을 강조하였다. 『손수』도 여주를 감돌아온 한강 하류에 사면이 절벽으로 이루어진 강변의 소요정에 오르면 세상사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마치 신선이 사는 곳에 있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했다. 더구나 한강에 흐르는 물은 마치 소요하려는 듯 천천히 만물을 쓰다듬고 지나고 있어 이곳에만 있노라면 그저 즐겁기만 하고 병든 몸도 절로 나올 것 같아 마냥 살고 싶다고 하였다. 『손수』는 이러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시로 표현하였다.
몸이 풍진에 얽혔으나 마음가는 곳은 구학(丘壑)뿐이었다 세정(世情)은 겸하기 어려운 것 두 갈래져 각각 됨을 많이 본다 성 서쪽 소울음도 들리는 곳에 큰 강물이 넓고 넓어 아득하다 외로운 섬이 남쪽에 있어 기이한 바위가 어슷어슷하네 우리 공(公)의 소요하는 마음
이 곳을 구하고 커졌다 정자는 북쪽 흐름에 세워졌는데 마을은 남쪽으로 城과 닿았다 먼 들은 앞에 펼쳐졌고 뭇 묏부리는 사방으로 얽혀있네 조회에서 물러나 바로 돌아오며 숲속 끝의 지붕을 향한다 낚싯돌 머리에 갈대꽃 피었는데 걸을 때는 한 쌍 짚신 있다 많은 버들 그늘져 침침한데 고깃배 언덕에 기대두었네 모래가 깨끗하니 백로가 모여오고 길이길이 소요하신다면 지극한 맛 담박한데 이루리 물이 넓으니 물고기 좋아한다 밤이 되면 하늘에는 바람 불고 바다에서 솟은 달 깨끗하게 씻겼다 만리에 띠끌 먼지 없어지니 맑고 맑아 사방 천지 보인다 맑은 흥취가 문득 소연하여 온갖 물상이 나의 맘에 들어오니 세상 밖이란 것 의회하게 여긴듯 인간 세상 벌써 잊어버렸던가 평생동안을 편하게 할 방법이요 한 몸에 병 없애는 약이로세 마음 가득 즐거울 뿐이고
띠끌 찌꺼기 붙은 것 없다 이것은 공(公)의 심증 얻은 것이 어찌 외물로서 녹아지랴 이러므로 이 집을 좋아하여 누워있기 열흘 한달 넘어간다 성시(城市)와 강호(江湖) 더불어 어디라 적당하지 않은 곳 공명높은 향상(鄕相)이시니 여기 오는 것 어찌 잦으리 응당 장생(莊生)과 함께 황홀한 곳 발들이지 않으리라
②송인명(宋寅明)
개화사(약사사) 산방에서 공부를 했다는 송인명(1689~1746)은 이조참판을 지낸 송광연의 손자이다. 호는 장밀헌(藏密軒)인데 1719년 증광문과에 올라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을 제수 받았다. 세자시강원의 설서로 있을 때 당시 세제(世弟)로 있던 영조의 총애를 받아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충청도관찰사로 기용되었다. 이듬해는 동부승지가 되어 붕당(崩黨)의 금지를 건의하자 왕이 받아 적극적인 탕평책을 전개하였다. 소론 탕평재상으로 세도를 담당하였는데, 1731년 이조판서가 되어 온건한 인물들을 두루 등용하여 당론을 조정, 완화함으로써 더욱 두텁게 영조의 신임을 받았다. 1736년에 우의정이 되자 도성안의 권세있는 집에서의 공물매득(貢物買得)을 금지하는 법을 건의하여 영조의 재가를 받았다. 이듬해 개화사를 크게 중수하고 절 아래에 불향답을 사서 시주하기까지 하였다. 송인명의 개화사 중수 및 시주에 관한 사실을 그의 현손인 송백옥이 1887년에 중수기를 지으면서 밝혀놓은 이야기이다. 송인명이 어리고 가난했을 때 역시 빈찰을 면치 못했던 개화사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글 읽던 기억을 잊지 못했기에 성공하고 난 후 그 보답을 했던 것이다. 글 읽다 나와보면 수려한 산화경관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에 끝내 이근방의 풍경을 못잊어 후일 그가 맞은편 덕양산(행주산성)에 자신의 호를 딴 장밀헌이라는 별장을 의리의리하게 지을 수도 있었다. 이 장밀헌의 경영은 아마도 개화사의 중수와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듯하다. 이러한 개화사와 송인명의 불가분한 관계에 대해 당대 진경시(眞景詩)의 태두인 사천 이병연이 송인명의 친척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보냈다.
봄이 오면 행주배에 오르지 마오 春來莫上杏州舟(춘래막상행주주) 손님오면 어찌 꼭 소악루만 오르려 하나 客到何須小嶽樓(객도하수소악루) 책을 서너번 다 읽을 곳이라면 書冊三餘完課處(서책삼여완과처) 개화사에서 등유(燈油)를 소비해야지 開花寺裏費燈油(개화사이비등유)
4. 문화재 소개
① 풍산심씨(豊山沈氏)묘역(서울시 유형문화재 제77호)
이조 11대 중종 때 우의정 및 정국공신인 “심정”과 그 자손인 “심사손. 심사순 및 손자인 이조청백리 심수경” 등 풍산심씨 가문의 분묘 약 50여기가 있는바, 이중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위의 4분 분묘와 그에 딸린 묘비, 상석 등을 문화재로 지정 보호하게 된 것이다. 정국공신 심정(沈貞)公은 연산군 12년에 반정하여 연산군을 추방하고 중종을 옹립하였으며 황해도 관찰사. 개성유수. 형조판서. 예조판서. 한성판윤.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을 등직하였고, 심정의 손자이며 심사손의 아들인 심수경公은 6조판서. 강원. 충청. 전라. 경상. 함경. 경기도 관찰사. 평안. 함경 병마절도사. 한성판윤. 승정원도승지. 사간원사간. 사헌부대사헌. 우의정을 역임하였고. 청백리로서 임진왜란당시 도체찰사 및 팔도의병장으로 임명되는 등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신명을 바쳐 나라를 수호하신 분이다.
(사진)-심정공 묘소
문화재로 지정된 내용을 살펴보면 • 심정(沈貞)공묘: 1기 • 심사순(深思順)공묘: 1기 • 심사손(深思遜)공과 부인의 묘: 2기 • 심수경(沈守慶)공과 부인의 묘: 2기 • 위의 분묘 6기. 묘비 5개. 상석 4개. 문무관석 4개. 신도비 1개. 사당 1동 등 이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② 약사사(藥師寺) 3층석탑(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9호)
개화산내의 약사사 경내에 위치하며 단층기단위에 화강석으로 축조한 4m 높이의 3층탑으로서 고려말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이 있는 약사사는 행주산성이 마주보이는 강안(江岸)에서 동쪽으로 향한 사찰로서 오늘날까지 법등(法燈)을 이어오고 있는 오랜 사찰인데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의하면 이 산의 봉수(烽燧)는 동쪽으로 서울의 목멱산제5봉(木覓山第5峰=남산), 서쪽으로는 김포현 북성산(냉정산)과 응한다고 하였으며, 또 옛기록에는 절의 위치를 개화산봉대하(開花山烽臺下)라고 말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일찍부터 국방과도 관련된 곳에 이 사찰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석탑은 고려의 불교미술이 다소 퇴화하던 고려시대 후기의 시대적 반영을 잘 타나내어 고려중기의 탑파건축(塔婆建築)의 변천과정을 알게 하는 귀중한 자료가되고 있다.
(사진)_약사사 석탑
이곳 약사사가 위치하고 있는 개화산(開花山)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행주산성과 마주보는 산으로, 산정에서는 삼각산과 도봉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고 한강과 임진강이 마주치는 조강의 광활한 풍광을 아울러 조망할 수 있는 명산이다. 또한 옛기록의 개화사가 오늘날 약사사로 명칭이 바뀌어 내려오고 있다.
③ 약사사 석불(藥師寺 石佛)(서울시 유형문화제 제40호)
약사사 경내에 위치하며 높이 3.3m. 어깨폭 90cm. 보관(寶冠)의 직경 1m 규모의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고려말기의 석불이다.
(사진)-약사사 석불
석불의 본래 형태는 기단(基壇)을 마련하지 않고 아래쪽은 그냥 지하에 매몰되었으나 석불 이전 당시 기단석을 새로 만들어 석불을 올려놓았다. 두부(頭部)에는 원형(圓形)의 석조보관(石造寶冠)을 놓았는데 보관의 밑부분에는 상당수에 달하는 명문(銘文)이 있으나 판독이 불가능한 실정이다. 석불의 두볼은 풍만한 편이고 코와 볼이 약간 손상된 흔적이 있지만 그런대로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특히 두툼한 두 눈과 가는 미소를 머금은 엄숙한 입술 등이 인상적이고, 연꽃을 지닌 두손을 앞가슴에 단정하게 모우고 있으며, 어깨에서부터 겹치면서 내려온 법의(法衣)는 다소 경직함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 석불의 이모저모에서 나타난 조형수법(造形水法)으로 보아 이 절내에 현존하는 3층 석탑과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약사사 중수기(重修記)에 일장미록(一丈彌勒)이라 하고 있으므로 이 석불의 존명에 대하여도 쉽게 판단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 사찰의 명칭이 옛부터 약사암(藥師庵)이라 고도 불려 왔었다는 것만으로 약사주존(藥師主尊)으로 단정하기도 곤란한 형편이다.
④ 국제청소년 체육센터
방화3동 801번지에 국제청소년센터가 들어서 있다. 국제청소년센터는 세계화에 발맞춰 외국 청소년들과의 교류 및 만남의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우리 청소년들에게 외국문화의 간접체험 기회 제공, 청소년국제교류 활성화의 주요거점으로서 유스호스텔 기능을 수행하고 청소년단체의 활성화를 위한 청소년종합 전문시설이다.
¤ 보호수에 얽힌 설화 (은행나무 : 방화3동 436-1) 삼정초등학교 정문 앞에 위치한 소공원 안에 있는 은행나무 보호수는 조선 중종때 정승 심정이 심은 나무로 능말의 옛터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이곳 능리는 고려말에 왕릉지로 삼았으나 왕기가 모두 남경 (지금의 서울) 쪽으로 빠져나간다는 대신들의 만류로 잡아놓은 왕릉터에 말뚝만 박아 놓은채 누구도 묘를 쓸수 없도록 했기에 능리(陵里)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그 옆자리는 심정공의 사당터였으며, 그 옆 국제청소년 체육센터 옆에는 심정공의 손자인 조선 청백리 심수경 공의 사당이 지금도 존재한다. 또한 그 옆에 최근 “개화사”란 사찰이 들어서 있는 곳은 원래 풍산심씨네 99칸 집이었는데, 얼마전까지 다른사람이 전통한식 식당을 하던 곳이었다. 필자가 10여년전 99칸 집을 문화재로 지정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상당히 개보수를 한 상황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떨어짐으로 지정하지 못하였다. 결국 강서구의 유일했던 99칸 집은 사라져버린 셈이다.
(사진)-심수경공 사당
개화동
1. 동 유래
개화동(開花洞)의 동명은 이 동네의 면적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높이 132m의 개화산이 있음으로 해서 유래되었다. 개화동은 대한제국까지 김포평야와 행주나루 끝에 걸쳐있는 경기도 양주군 삼정면 “상사동, 내부석리,외부석리, 개화리”의 자연부락들로 이루어졌다. 또한 옛날에는 강화, 인천, 한양으로 오가는 뱃길 어귀로서 개화산 서쪽 4km 지점에 석굴나루와 현 행주대교 진입로에는 행주나루가 있었으며 한적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2. 민담, 설화
(1) 지명에 얽힌 이야기
① 상사마을(想思마을: 상시꿀, 상사꿀, 꿀=골=谷)
상사동은 상시꿀, 상사꿀, 갯모랭이 등의 이름으로 불리우는데 행주대교 남단 인터체인지로부터 개화로의 북쪽지역에 걸쳐 발달한 마을이다. 옛날 어떤 사람이 개화산 귀퉁이에 뽕나무로 집을 지었다 하여 상사꿀(244번지 일대)이라 했는데 이로 보면 아마도 상산곡(桑山谷)이 변하여 상사(想思)마을로 불리워지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상사마을은 안동권씨가 처음 자리를 잡은 마을이라 함.) 한편 갯모랭이라는 이름은 갯가 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한강하류는 바닷물이 섞여지므로 소금기가 있어서 강변이지만 갯가라고도 하였다. 상사꿀 입구에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의 장승이 서 있어 올림픽대로로 진입하는 수많은 차량들이 오늘날 보기 드문 한국전통미를 볼 수 있어 새로운 감흥을 일으킨다고 한다. 또한 상사꿀에는 수령이 350년 이상 된 은행나무가 있어 지정보호수로 보호하는데 그 옛날 마을의 당나무 역할을 했음직도 하다.
② 내, 외부석리(內, 外浮石里)
개화동 365번지 일대로 마을 뒷산 부석(浮石)의 안쪽과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각각 붙여진 이름이다. 부석바위 두 개가 상하로 서로 덮쳐있는데 그 사이로 실이 빠져나갈만큼 공간이 있으므로 떠있는 바위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통신대가 주둔하기 위해 부대를 만들면서 바위를 묻어 버렸으며 그 후 통신부대가 이전하고 일대를 주택지로 새로 조성하였는데 부석리는 개화동 새마을회관이 있는 일대로 새터말과 상사동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 부석마을은 문화류씨(柳氏)진사공 후예들로 시작되었다 한다. 또한 부석마을 356번지에는 수령 400년 이상된 잘생긴 향나무 한그루가 있어 지정보호수로 보호받고 있다. 조선 중종무렵에 문화류씨 선조중 한분이 심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 향나무는 동네에서는 매우 신성시 하여 매년 제사를 지내오고 있으며, 그 모습도 젊잖은 선비의 풍채마냥 고아한 자태를 뽐내던 향나무였는데, 누군가가 향불로 쓰기 위해 싱싱하던 나무의 밑둥을 크게 훼손시켜 버림으로써 지금의 모습은 어쩐지 애처롭고 안타까운 느낌을 주고 있다.
③ 새터말
신대(新垈)라고도 하는데 418번지 일대로서 부석마을 사람들 일부가 이곳으로 내려와 새로 부락을 형성하자 부석마을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택지정리가 된 곳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므로 모양새가 네모반듯하다.
④ 새말
새말(558번지 일대)은 6·25동란 때 경기도 장단군 피난민들이 들어와 정착한 마을이다.
⑤ 내촌(內村)마을(451번지 일대)
내촌은 개화산 중턱아래에 자리잡아 산 안쪽에 생긴 마을이므로 내촌 또는 안말이라고 하였다. 내촌마을은 남원양씨(梁氏)부호군이 처음 이 마을에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오늘날 그 후손들 중 일부가 살아가고 있다.
(사진)-아늑한 내촌마을의 모습
⑥ 개화동 다리
한강수리조합에서 1923년에 설치한 인공수로는 부석이 앞에서 시작되는데 바로 마을앞 수로위에 설치한 다리를 개화동 다리(새마을 회관 앞)라고 하며, 상사동 입구 부석이 끝에 있는 다리는 갯모랭이다리라고 했다.
⑦ 상두물
부석이마을 산 밑에 있는 큰 우물을 상두물이라 하였다. 마을제사 때 제수(祭水)로 사용했다는 이 우물은 마을에서 상여가 나갈 때도 반드시 우물 앞에 멈추어서 상여꾼들이 물을 마시고 사자(死者)의 영혼도 목을 추기고 지나가군 하였다고 한다. 49일동안이나 멀리 험한 저승길을 가야하는 사자(死者)에게 살아있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베풀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상두물에서 목을 추기게 해주는 것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⑧ 냇물터
냇물터는 322-5번지의 약사사로 올라가는 기슭에 있는 빨래터로 약사사 승려와 내촌사람들이 주로 이용하였다.
⑨ 성거모이(成家墓)
상사동 옆 구묘(舊墓)가 있는 일대를 말하는데 옛날 정승을 지낸 성씨(成氏)의 묘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개화산을 관통하는 고속도로가 만들어지면서 성씨묘는후손들이 이장하였다.)
⑩ 행주나루
갯모랭이 앞의 나루를 행주(幸州)나루라고 하는데 행주대교가 놓이기 전에는 개화동에서 고양군 지도읍 행주리로 건너가는 나루터였다.
⑪ 절고개와 약사사
부석이에서 약사사로 넘어가는 고개를 절고개라고 한다. 처음 절이 창건되었을 때에는 개화사(開花寺)라고 하였으나 약 150여년전 이절의 주지스님이 바뀌면서 약사여래(藥師如來)를 주불(主佛)로 모시고 절 이름도 약사사(藥師寺)로 바꾸었다.
⑫ 미타사(彌陀寺)
내촌마을 위로 올라가면 미타사 절이 있다. 고려후기 때 절로 추정되는 미타사가 역사 속에 파묻혀 쓸쓸히 그 명맥만 유지하여 오던 중 1992년 7월 22일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에서 김송강 스님이 주지로 오시어 토착주민 양승춘(미타사 불교 신도)씨와 함께 땅속에 파묻혀 있던 미륵부처를 꺼내어 제자리에 모시고 점안식을 하였다 한다. 고려후기의 미륵불상으로 추정되는 미타사의 미륵석불이 오랜 세월동안 땅속에 묻혀있었던 연유는 알 수 없었다. 그후 6·25때 인천상륙작전시 적의 진지를 파괴시키는 함포에 맞아 절이 불타 없어지고 현재는 조그만 임시 사찰을 지어 절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 미타사의 웅장했던 옛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2) 전설
① 내촌마을의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언젠가 내촌사람들이 오랜 세월동안 내촌마을과 역사를 같이했던 마을의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를 서울사람한테 팔았는데 그날 밤 여러 마을사람들의 꿈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타나서 우리집이 없어졌다 하시며 밤새 울고 다니는 꿈을 꾸었다. 놀란 마을 사람들이 그 이튿날 해약을 하고 현재까지 마을 수호신으로 보호하고 있다.
② 미타사의 대호(大虎)
매년 음력 12월 30일이면 밤 12시에 커다란 호랑이가 미타사를 들러 돌아보았다고 한다. 대호(호랑이)는 반드시 다녀간 흔적을 남겨놓아 절에서는 범이 다녀갔음을 알 수 있었으나 6·25이후부터는 발길이 끊겼다고 한다.
③ 산신제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산신제를 지낸다. 10일전부터 제관(祭官)을 정하고 몸을 깨끗이 한다음 제일(祭日) 새벽에 개화산 상봉에 올라가 오방기(동, 서, 남, 북, 중) 5개를 꼿고 제관이 인사를 한 다음 산신을 꽃가마에 모시고 내려와 마을 뒷산 제단에 모시고서 국가안녕과 마을평안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낸다.
④ 약사사의 약수물맛
약사사의 앞 뜰 석탑 왼쪽에는 약수터가 있어 주민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특이한 것은 이 산의 이름이 개화산이라서 그런지 약수 역시 꽃물이 오르는 5-6월이 되면 달짝지근한 물맛을 내는데 이때 약수의 효능이 가장 좋다고 알려져 있다. 이때쯤이면 약수를 받기 위해 물통을 몇 개씩이나 들고 한강을 건너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 이 약수가 개화산의 이름에 맞추어 봄철에 맛을 내는 것인지 약사사의 약사여래가 물맛을 달게 하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⑤ 행주대교
행주대교는 경기도 고양군 지도면 행주외리와 개화동의 상사마을을 잇는 폭 10m, 연장 1.400m의 2차선 다리이다.(1975년 7월 5일에 착공-1978년 7월 22일에 완공)
⑥ 지온보육원(개화동 325-11)
지온보육원은 용산구 효창동에서 1975년 12월에 이곳 개화동으로 신축 이전한 어린이 보육원이다. 보육원에는 부모를 잃었거나 혹은 부모가 양육할 여건이 되지 않는 어린이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상처와 좌절을 극복하고 건전한 정신과 인격을 기르며 생활하는 곳이다.
개화산 충혼비
6·25전쟁 중에 개화산 전투에서 산화한 1.100명의 국군 전사자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개화동 산81-13(미타사 옆)에, 1999년 12월 국방부에서는 호국충혼비를 세워 영령들을 위로하였으며, 국민들의 애국정신 함양 및 전쟁 미체험 세대들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이곳을 성역화 하였다. 이곳에서 산화한 부대는 38선 접경의 황해도 연백지역을 지키다가 1950년 6월 25일 한강을 건너 이곳 개화산에 방어진을 치고 전투를 벌였던 육군 제1사단 12연대 3대대장 김무중 소령 휘하부대였다. 본부와의 연락이 끊어진 채 마지막 한발의 총알마저 다 소비한 상태에서 6월 30일 인민군의 화력과 수에 밀려 결국 3대대와 중도에서 합류한 13연대 및 15연대 일부를 포함한 부대원 1100여명 전원이 개화산 골짜기에서 최후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포성이 멈춘지 50년이 다 되도록 아무도 이 부대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잃어버린 부대로만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1사단장이었던 백선엽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12연대는 임진강 다리를 건너 후퇴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26일 정오께 피투성이가 된 채 지프에 실려 온 연대장 전성호 대령을 비롯한 40여명이 후퇴병력의 전부였고 그 뒤는 바로 인민군이 따라붙어 12연대는 거의 전멸한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또한 회고록에는 백선엽 장군이 28일 밤 행주나루터에서 나룻배를 얻어 타고 한강을 건넜는데 야밤인데도 김포방면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났다고 기록하고 있음을 볼 때, 아마도 3대대 병력의 마지막 방어전이었을 것이다. 개화산 주변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12연대 3대대는 황해도에서 바다로 철수해 김포비행장을 거쳐 26일 개화산에 들어와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3대대를 뒤쫓은 인민군이 곧바로 개화산을 포위해 전투를 벌였으며 28일 밤까지 버티다가 본부와의 통신이 끊어진 채 탄약과 보급이 떨어져 전원 전사했다는 것이다. 미타사 주지인 (송강)스님의 꿈에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는 군인들의 환상이 자주 나타나므로 이 동네 원로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3대대의 전몰내력이 들어나게 되었고, 이로써 개화산 호국충혼비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사진)-미타사 경내에 호국충혼비가 세워져 있다.
과해동
1. 마을에 얽힌 이야기
과해동은 강서구의 서쪽 끝에 있는 동(洞)이며 서울특별시의 극서지역이다. 마을의 형국이 오이줄기가 바다 쪽으로 뻗은 꼴이라 하여 과해(瓜海)라 하다가 음이 같은 과해(果海)로 지명이 바뀌게 되었다. 과해동은 얕으막한 구릉을 경계로 내과해와 외과해로 이루어졌는데 고개 안쪽의 마을은 내과해라 하고 고개 밖에 있는 마을은 외과해라 하였다. 내과해와 외과해 중간쯤에는 새말이 있었다. 원래 새말의 외과해에 속한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생긴 마을인데 김포국제 비행장이 확장되면서 공항부지로 편입되었다. 과해동의 지형은 얕은 구릉과 평야지대로 이루어진만큼 높은 산이나 고개는 없다. 산이라는 명칭이 붙은 곳도 약간 경사진 억덕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정도였다. 그나마 지금은 비행장 활주로가 되었으므로 형체가 남아있을 수가 없다. 과해동과 오곡동의 법정동 경계가 되는 곳 외과해 쪽에는 노루메가 있었다. 이 마을이 위치하고 있는 뒷산의 모양이 노루가 뛰어가는 모습처럼 생겼다해서 붙여졌는데 한자로는 장산(獐山)이라 하였다. 옛날 공세논(空稅 즉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논) 사이를 지나가던 개울을 공세논개울이라 했다. 공세논이란 나라에 세금을 마을 단위로 낼 때 마을 경계사이의 자투리 논은 세금을 물지 않아 공세논이라 하였다. 그래서 공세논은 마을사람들이 공동 경작하면서 소출을 나누어 가졌다고 한다. 내과해 앞에 구불구불 흐르는 개울은 굽들개울, 오곡동 방아다리 근처에서 흐르는 개울을 방아다리개울이라 했다. 또 옛날에 구실 서른 짐을 바쳤다는 논에서 흘러나오는 개울을 서른지미개울이라 하는데 구실은 거름이다. 논이 메마르고 황폐하므로 구실을 서른 짐이나 져나른 후에야 근처의 어느 곳과도 견줄 수 있는 옥답으로 변하여 수확량이 늘어났으므로 서른지미 답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과해다리는 내과해 앞에 놓여진 다리를 말하며 모장산의 뿌리되는 곳에 있는 다리는 모장뿌리다리라 하였다. 모장산은 장산을 말한다. 배수로에 걸쳐있는 다리는 배수로다리라 했다. 외과해 앞의 다리는 외과해다리, 장산 앞의 개울에 있는 다리는 장산다리라 하였다.
(사진)-과해동 마을 왼편 활주로에 비행기가 보인다.
이곳 주민들의 말을 빌자면 과해동은 구한말시대부터 주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사람들이 한명 두명씩 모여들어 거주해 왔다고 한다. 그 옛날에는 확트인 농경지와 맑은 공기, 후한 인심으로 무척이나 살기좋은 동네였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지금은 과해동 대부분이 김포비행장으로 변하였으며, 일부만 남아있어 과해동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데, 이마저도 조만간 공항동 택지개발지로 집단 이주하게 된다.
2. 역사적 인물
김득남(金得男)장군
조선중기의 무신이며 충신. 자(선술), 호(매죽헌), 본관(광산) 1620년(광해13)무과에 급제하여 1624년(인조2) 이괄이 난을 일으킴에 공주까지 어가를 호종하였고, 안현(鞍峴)에서 적을 격파한 공으로 백령진 첨절제사에 제수되었다.
1636년(인조14)병자호란 때 서해 병참기지인 철곶첨사(鐵串僉使 : 현재 인공폭포가 있는 양화교 일대에 철곶진이 있었음) 로 있던 김득남은 세자를 강화로 호종할 때청나라 오랑캐가 부녀자들을 포로로 잡아가는 참상을 보고 추격하려 하니 세자가 활과 말과 갑옷을 주었다. 김득남 장군은 굴포천(掘浦川) 벌말까지 추격하여 포로로 잡힌 부녀자들을 모두 탈환하였다. 그뒤 청군들이 강화도를 함락하고 한양성을 침공할 무렵, 굴포교에서 관군과 의병 30여명을 이끌고 청군의 한양진격을 결사적으로 저지하니, 청군은 할 수 없이 길을 돌려 그 남쪽에 돌다리(掘浦石橋)를 새로 놓고 김득남 장군을 피해 통과하였다. 그래서 이 돌다리를 오랑캐 다리라고도 하였다. 그래서 김장군은 또다시 청군을 쫓아가 말을 타고 용감히 싸웠으나 수백배가 넘는 청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기진맥진 싸우다가 적군의 화살에 안면을 맞아 장렬히 전사하였다.(47세) 부하들도 거의 전몰하였다. 그뒤 인조는 병조참판에 추증하고 과해리에 충신문(旌閭)을 세워주고 강화 충렬사에 배향하였다. 청군이 삼전도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고 회군할 때 이 오랑캐다리((掘浦石橋)에다 『청군이 승리한 것은 이 다리 덕분으로 여겨 이곳에 전승비를 세웠다』고 전하는데, 오랑캐다리나 전승비 모두 부평수리조합의 설치로 모두 사라지고 오늘날엔 흔적도 없으며 다만 일대를 “오랑캐다리뜰”이라는 이름만 남아있어 김득남 장군의 치열한 『벌말전쟁』을 말해주고 있다. 1951년 6.25전쟁 중 미군 탱크부대가 지나가면서 과해리에 있던 충신문(旌閭)도 멸실되고 말았으며, 그 터는 김포공항 활주로에 파뭍혀지고 말았다.
양천현읍지(陽川縣邑誌) : 1891년 고종18년(광서16년)기록 果海里有忠臣贈兵曺參判金得男之門 (과해리 유충신증병조참판김득남지문)
생각해보는 코너
경인운하(굴포천) 경인운하 공사가 2009. 3. 25일 착공됐다. 경인운하가 뚫리고 마포. 뚝섬. 잠실 등에 하역설비만 갖춰지면 부산을 출발할 컨테이너 선박이 서울로 들어오게 되며, 양쯔강을 출발한 중국 배들이 서해를 통하여 직접 서울로 진입하게 된다. 한강은 바다로 이어진다. 이 간단한 진실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한강이 바다로 이어진다면 한강을 달리는 배는 바다로 나갈 수 있다. 한강에서 배를 타고 중국과 일본. 먼 대양으로 나갈 수 있다. 한반도 내륙 깊숙이 자리한 서울이 대양으로 이어지는 “항구도시”가 된다. 역사 속에서 볼 때 한강은 조운(漕運)이란 부세(賦稅) 운반제도에 의해 국가 재정 공급의 한축을 담당하였다. 조운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3남에서 세금으로 징수한 현물미곡을 배에 싣고 서해안을 돌아와 한강을 통해 한양의 경창으로 납입하는 제도였다. 조운은 고려초기부터 제도화 되었는데. 조선조 숙종 이후에는 3남에 8개창(倉)으로 확장되었고 이에 딸린 조운선이 140여척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전국에서 징수된 현물세곡 중 72%가 이곳 3남에서 조운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정조는 「국가 경비를 오로지 삼남의 부세(賦稅)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삼남의 조운선(세곡선)은 반드시 서해연안을 타고 들어와 조강을 통과하여 한양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런데 조운선을 위협하는 3대 험로가 있었으니 안홍량 관대항과 강화 손돌항 그리고 행주 염창항이었다. 만기요람≪萬機要覽≫을 보면 『관대항과 손돌항은 돌뿌리가 날카로운데다가 물이 빠르고 거세어 이곳을 통과할 때 좌초할 위험이 많았고, 염창항에는 근래 수초가 많이 생기고 모래로 강이 메워져 물이 얕아진 관계로 조운선의 항해가 어려워졌다.』고 하였다. 이렇듯 조운을 방해한 3대 험로중에서도 유독 “손돌항”이 가장 험난한 코스였다. 영조41년에서 정조 말까지 36년간 23건의 조운선 18척이 좌초되었는데 그 중 11건이 3대 험로에서 좌초되었으며 그중에도 손돌항에서 가장 많이 좌초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조운선의 안전운항문제는 조운이 제도화 된 고려시대 이래의 과제였다. 이 과제를 해결하는 방안, 다시 말해 험로를 회피하여 세곡 등을 안정하게 수송하는 방안으로 모색된 것이 “김포굴포(金浦掘浦)”였던 것이다. 즉 운하를 파서 조운선을 안전하게 통과시키려던 운하계획이었다. 김포굴포에 대하여 ≪萬機要覽≫에 다음과 같이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조에 최이(崔怡)가 사람을 파견하여 안남(부평)땅을 살피고 운하를 파서 물을 통하게 하려 하였으나 불가하므로 곧 중지하고 말았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김안노(金安老)가 다시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또한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것이 김포굴포이다.』라고 하였다. 이렇듯 한강은 일제 강점기 이전까지 조운선(세곡선)은 물론 민간의 소금. 새우젓을 실은 배가 충주까지 거슬러 올라갔다가 그곳에서 다시 목재나 곡물을 싣고 내려오는 등 오늘날의 고속도로 역할을 감당하였으나, 강화 “손돌항”의 가장 험난한 코스를 안전하게 통과하는 것이 최고의 숙제였던 것이다. 이번 경인운하 사업은 고려시대 이래의 숙원이었고 두 번이나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던 김포굴포(경인운하)를 성공하는 셈이다. “굴포천(掘浦川)이란 사람 손으로 판 개천”이란 뜻이다. 과거 역사 속에서 두 번이나 수로를 파다가 실패하였던 굴포천은 이제 정부에서 한강을 되살려 서울에 잃어버린 항구도시의 면모를 되찾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강을 경인운하를 통해 서해주운으로 연결하기 위한 각종 사업을 2010년까지 완공키로 하고 총 1538억원의 예산을 투입하게 된다. 경인운하 구간은 “행주대교-인천시 계양구 계양동-서구 백석동- 서해 (총19㎞)이다. 경인운하가 완공되면 한강에서 올라온 대형 여객선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화물 바지선의 운항도 가능할 것으로 예측된다. 경인운하와 한강 프로젝트가 완공되면 또다시 한강은 대(對)중국 무역의 전진기지 노릇은 물론 영종도 국제공항에서 한강으로 연결하는 뱃길이 되어 각종 물자를 실은배들이 서해에서 경인운하를 통하여 행주대교를 지나 서울로 드나들 것이다. 고려조 때부터 강화 손돌항을 피하고자 노력했던 800년 이상 오래 숙원이었던 “인천↔한강”구간의 안전한 뱃길이 오늘날에 만들어지게 되며, 더욱이 인천공항에서부터 지하철과 고속도로가 개화산 자락을 통과하여 서울로 들어오게 되므로 많은 통과여객이 서울을 들렀다 갈 것으로 예측된다. 즉 전세계 수많은 통과여객이 우리 강서구를 밟고 지나간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천기를 놓쳐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우리 강서구에서 경인운하와 마곡워터프런트를 이용하여 “의성 허준”의 기념지인 강서구를 세계 속에 “한의학의 메카”로 가꾸어 국제관광단지로 육성해 나가야만 할 책무가 강서구민에게 주어진 셈이다.
오곡동
1. 마을에 얽힌 이야기 오곡동은 지금의 김포국제공항이 위치한 곳으로 옛날에는 골짜기 5개가 있었기에 여기에서 연유된 이름으로 현재 공항동에서 관할하고 있다. 오곡동은 북쪽으로 과해동과 공항동이, 동쪽으로는 오쇠동과 접하고 있고 서쪽은 부천시 대장동과, 남쪽은 부천시 고강동·원종동과 접한다. 산등성이가 길게 늘어진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을 긴등(산등성이가 긴데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210. 212~218. 200~205. 356~360번지 일대로 현재 취락지구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안말은 227. 232. 174~180. 111~120번지 일대에 형성된 마을로 긴등보다 공항동쪽으로 위치한 마을이다. 오곡동을 이룬 주된 부락이다. 또 옛날에 마을입구 개울가에 개나리꽃이 많이 피어있는 동네를 꽃다리마을이라 했고, 마을 뒷산이 노루처럼 생긴 동네를 노루메라 했는데, 과해동쪽에서 보는 노루메의 뒤쪽 동네인 듯하다. 솔말은 소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던 산의 아래에 있는 마을을말한다. 도당재가 있는 동리의 큰 마당을 도당마당이라했다. 지금은 엄나무 한그루와 약 5m쯤 떨어진 곳에 소나무 한그루가 남아 있는데 이곳을 도당재라 부른다. 좌측으로 김포국제공항 국내선 활주로가 길게 늘어져 있고 왼쪽과 앞쪽은 넓은 김포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이 도당이 있는 근처의 고개를 도당재 고개라 한다.
(사진)-오곡동의 황금들녘
긴등마을 앞 200-4번지와 210-4번지에서 밭 652-3번지의 사이에 있는 수로에는 시멘트콘크리트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를 긴등다리라 한다. 폭 3m 정도의 좁은 이다리는 오곡동에 사는 사람들이 인공수로를 건너 마을 반대편에 있는 논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다리이다. 긴등다리는 과해동과 경계가 되기도 하나 다리 북쪽은 과해동. 남쪽은 오곡동이다. 뒷벌 곧 안말의 앞에 있는 들로 가는 농사길은 뒷벌길이라 하고 산모양이 동그랗게 생긴 산을 동그란산, 공동묘지가 있던 산을 북망산이라고 했다. 오곡동에는 공동묘지가 있어 이를 북망산 공동묘지라 했고 산 모양이 용의 허리처럼 생긴 곳을 용허리라 했다. 오곡동 역시 거의 대부분이 김포비행장으로 변하였고, 극히 일부만 논밭형태로 남아있다.
오쇠동
1. 마을에 얽힌 이야기
오쇠동은 옛날 이곳에 弩(쇠노)를 만들던 사람 다섯명이 도망와 숨어 살았다 해서 붙여진 동명으로 과해동에서 관할하고 있다. 오쇠동의 북쪽은 공항동, 서쪽은 오곡동이며 동쪽과 남쪽은 부천시와 답(沓)과 경계를 하고 있다. 안오쇠와 밖오쇠는 오쇠동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밖오쇠는 밖오시라고도 하는데 공항동과 경계되는 지점에 해당된다.
밭 한가운데 옻나무가 두그루 있었고 그 중 마을 바깥쪽에 있는 옻나무의 독성이 더 강해 이 옻나무 곁을 스쳐가기만 해도 옻을 탔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 안쪽에 있는 옻나무는 이보다 옻의 성질이 약하고 또 옻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먼저 타므로 밖에 있는 옻나무에서 옻이 먼저 오른다는 뜻의 밖오시라 했다고 전한다.
(사진)-오쇠동의 넓은 농경지
웃말보다는 아랫말에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 살며 마을 규모라든지 역사도 더 오래 되었다 한다. 이 안오쇠의 아랫말과 웃말 사이에는 우물이 한 개 있어서 가운데 우물이라 불렀으며 아랫말의 동네 입구에 있는 들은 앞논들. 논 앞에 있는 산은 앞산이라 했는데 옛날에는 학이 날개를 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번학형(飜鶴形)이 될 것 같은 이 마을의 일부가 김포국제비행장으로 편입된 것은 묘한 우연의 일치를 갖고 있다. 비행기가 두 날개를 펴고 일직선으로 나는 자태와 학이 공중을 날아갈 때 두 다리를 뒤로 뻗고 양날개를 곧추 펴고 날라가는 자세와는 거의 흡사하기 때문이다. 웃말과 아랫말을 이어주는 곳에는 꽃다리가 있다. 흙과 나무로 만든 이 다릿가에는 사철 꽃이 피어있기 때문에 꽃다리라 불렀고 다리양편으로 봄에는 개나리와 진달래, 민들레, 제비꽃 따위가 피고, 가을에는 돼지감자꽃과 코스모스, 망초꽃이 피어 있어서 마치 화원을 지나는 듯 한 착각을 주기도 한다.
오쇠동 역시 김포비행장으로 대부분 편입되었으며, 극히 일부만 남아있다.
맺 음 말
자기가 출생하여 성장한 곳, 즉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생활하는 곳을 향토(鄕土)라 하며 일정한 거주지를 같이 하는 사람들과 지연집단(地緣集團)을 형성하게 되므로 향토(고향)는 자연환경과 문화적 전통속에 뿌리깊은 공동생활 감정으로 결부되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향토라는 단어는 포근한 안식처로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은 옛 양천현(강서구, 양천구)의 역사, 지리, 경제, 인물, 문화재, 민속, 풍물 등을 조사 연구한 것으로 우리고장의 ‘향토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애틋한 향토의 뿌리를 물질문명의 바람 앞에서 지키고자 노력하신 분들이 계시기에 이 분들의 기록과 연구자료들이 바탕이 되어 우리고장의 민담․설화집을 펴낼 수 있었습니다.
역사교사 출신으로 오랫동안 강서구청 문화공보과에서 강서의 정체성을 접할 수 있었던 제가, 우리고장의 향토사를 연구 조사하고 이를 널리 알려야 하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그것은 저 또한 우리고장의 구성원으로 지역사회와 교감을 나누고 지역사회발전에 일정한 공헌을 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고장의 향토사료를 정리하면서 저는 객관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역사나 인물, 문화유산들이 상품으로 포장되어 구민들에게 공개될 가능성을 극히 두려워하고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음을 말씀드립니다.
강서(江西)의 연원(淵源)과 사적 등 옛 사료를 집대성하여 “양천 향토사(陽川鄕土史)”를 발간하여 후세에 남겨주신 故 정대현(丁大鉉)어른과 그 자제이신 故 정우섭(丁宇燮)선생님, “양천의 역사(陽川의歷史)”를 저술하여 남기신 故 유기선(劉基善)선생님, 백제사 연구에 열성을 다 하시는 한종섭(韓宗燮)선생, 그리고 각종 향토사료와 민담 설화를 들려주신 지역 어르신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며, 옛 양천현 지도 등 자료촬영을 흔쾌히 허락하신 서울대학교 규장각 실장님과 직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부족한 점이나 새롭게 발굴되는 자료는 계속 보완 발행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귀중한 자료나 옛 설화 등을 간직하고 계신 분들에게 계속적인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2010. 12.
筆者 孫 周 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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