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흔히 왕비라하면 아주 화려하고 궁궐에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며 백성의 존경을 받으며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살았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 내면을 살펴보면 그리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 같지는 않다. 차라리 왕비보다는 평범한 가정의 아낙네가 오히려 훨씬 행복한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도 든다. 그러면 이런 왕비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왕비가 되었을까?
우선 고대 시대를 살펴보면, 고대시대에는 왕비가 될 수 있는 가문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당시는 고대국가가 형성되어 가면서 정치력을 가진 가문의 전유물이었다. 이 가문은 왕권 못지 않은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대대로 왕비족을 독점하면서 왕권을 뒷받침하는 가문이었다.
고구려에서는 주로 연노부, 소노부, 절노부에서 주로 왕비를 배출하였고, 신라는 박써족에서, 백제는 진씨와 해씨족에서 왕비를 독점적으로 배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왕비족은 왕권이 강화되고 안정되면서부터 지위가 격하되었으며 그들의 역할도 약화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왕비를 종친이나 귀족 가문에서 맞아들였는데 이를 보면 왕실 내에서는 근친혼이 성행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귀족가문으로는 이자겸이 그의 두 딸을 인종의 비로 삼는데서 볼 수 있듯이 권력을 가진 가문에서 정략적으로 딸을 왕비로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충선왕 복위교서에서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을 정하였는데 대체로 이들 가문의 여식들이 왕비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몽고간섭기에는 의무적으로 원나라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원나라의 공주가 고려의 왕비가 되면서 욍실에 몽고의 피가 섞이게 되었고 이전에 왕비족들은 세력이 약화되었다. 원 출신 왕비로는 원 세조의 딸이자 충선왕의 어머니인 제국대장공주 외에 계국대장공주, 복국장공주, 조국장공주, 경화공주, 덕녕공주, 노국대장공주 등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국법에 명시한대로 왕비를 체계적으로 정비된 절차에 따라 선택되었다.
조선시대 왕비는 간택이라는 절차를 거쳐 왕의 배필이 되었다. 하지만 그 대상은 사실상 사대부가문 중에서도 당대의 명문가문으로 한정되었다. 왕비를 간택하는 절차를 보면 먼저 금혼령을 전국에 반포하여 처녀들의 결혼을 일시적으로 금지하였다. 금혼령의 대상은 사대부집안의 규수로 13∼17세 정도의 처녀들이었다. 그리고는 가례도감이라는 임시 관청을 설치하여 간택과 혼례를 주관하였다.
심사기준으로는 부덕과 집안의 가계, 미모. 이 세 가지를 갖춘 처녀를 최종적으로 한 명 뽑았다. 간택을 할 때 이씨는 본관을 불문하고 제외되었는데 이는 엄격한 유교 질서에 따라 동성혼을 금한데서 연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으나 여기서는 이정도 소개하는 데 그치기로 한다.
간택은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으로 이루어졌으며 최종 단계인 삼간택에는 3명이 후보로 올라간다. 세 명 중 한 명이 왕비나 세자빈으로 낙점되면 나머지 둘은 결혼하지 못하고 평생을 혼자서 살거나 황의 후궁이 되기도 하였다.
최종 간택에서 낙점받은 처녀는 그날부터 별궁에 들어와 일정기간 동안 궁중예절과 왕비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예의범절교육을 마치면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고 왕비나 세자빈이 되었다. 혼례가 끝난 후 왕비의 친가에는 혜택이 주어지는데, 왕비의 아버지는 부원군에 통해지고 어머니는부부인으로 봉해졌으며 왕비의 본향은 행정단위를 승격 시켜주었다.
이렇게 궁중에 들어온 왕비는 궁중 여인들을 통솔하는 최고의 사람이 된다. 궁중의 여인들은 내명부와 외명부로 구분되어 각각의 서열이 정해져 있었는데 내명부에는 왕의 후궁과 상궁, 궁녀들이 속해 있었고, 외명부에는 종실의 처, 왕세자의 자녀, 문무반의 부인들이 속해 있었다.
내명부에 속해 있는 모든 후궁들은 그 품계가 정해져 있었다. 왕비는 원칙적으로 품계를 초월한 존재였지만 왕비를 제외한 후궁들은 품계에 따라 서열이 정해졌다. 후궁은 내명부의 품계에 따라 정1품인 빈. 종1품인 귀인, 정2품 소의, 종2품 숙의, 정3품 소용, 종3품 숙용, 등으로 나뉜다.
그리고 왕비는 옥좌를 물려받은 왕이 그의 소생이건 아니건 간에 대왕대비, 왕대비 등으로 .불리며 왕실의 어른으로서 대우받았고, 종묘에 그 신위가 안치되었다.
*왕비의 혼례
조선 시대 왕의 정식 배우자를 왕비라 했다. 보통 황제의 부인은 황후라 하는데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은 이를 왕비라 했다.
왕비는 혼례를 치르고 종묘의 조상에게 고해지며 중국항제의 고명을 받는다.
조선시대의 혼례는 유교식 혼례였다. 왕의 혼례절차는 왕실의 의례서인 [국조오례의]에 정해진대로 준수되었다.
국조오례의 규정이 미비하거나 불확실 하면 [주자가례] 또는 [의례] [예기] 등의 유교경전을 참조한다.
*가례도감
조선시대 왕은 혼례를 치르기 위해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왕의 혼례가 결정되면 가례도감이라는 임시관청이 설치되고 전국에 금혼령이 내린다.
가례도감은 왕의 혼례를 주관하는 관청이고 금혼령은 왕의 배우자가 될만한 연령에 있는 처녀들의 혼인을 금지하는 법령이다.
* 금혼령과 함께 처녀를 둔 가문에서는 조정에 보고한다. - 처녀 단자
처녀단자(처녀의 사주, 거주지, 부.조.증조.외조의 이력을 기록하여 가문의 이력을 알수 있게 했다.)
*처녀단자를 기초로 한 3차 선발 -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 이라 한다. (사실 이것은 형식에 그치고 왕비감은 미리 정해 놓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교식 혼례
의혼. 납채. 납폐, 친영. 부현구고. 묘현의 여섯가지 절차로 이루어진다.
*의혼 - 사가의 중매를 넣어 혼인을 의논하는 것이다. 간택 과정이라 보면 된다.
*납채 - 약혼식이라 보면 된다.
*납폐 - 폐백을 받는 것이라 보면 된다.
*친영 -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색시를 데리고 오는 것이다. 왕은 직접 친영을 행할 수 없으므로 대신 사자를 보낸다.
친영은 초저녁에 행한다. 따라서 신랑이 신부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혼례를 치르는 시각은 밤이 된다.
*혼례 - 본래 밤에 행하는 의식이라는 의미이다. 또 밤에 예를 치러야 바로 초야를 치를 수 있다.
*부현구고 - 첫남밤을 치른 신부가 시부모를 뵙는 의식이다.
*묘현 - 시집온 신부가 사흘 만에 사당의 조상님들을 뵙는 의식이다. 왕비의 경우는 당연히 종묘에서 예를 치러야 한다. 왕비는 이외에 중국 황제의 고명장을 받는 절차가 또 있다.
왕비를 배출한 가문은 당대의 명문거족이다. 또 왕비를 배출함으로써 명문거족으로 발돋움한다.
왕은 왕비 외에도 후궁이라는 배우자들이 있다. 이 후궁들은 내명부의 직첩을 받고 왕을 모시는 여인들이다. 조선 500여 년동안 100여 명이상의 후궁들이 내명부의 직첩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지만 실제는 더 많을 것이다.
조선초기는 후궁도 왕비와 마찬가지로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간택 선발 되었으나 후기에 후궁 간택은 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