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여행에서 만난 梅花
사람들은 여행하기를 좋아 한다. 나도 남들과 마찬가지이다. 여행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나는 특히 불현듯이 현재상태를 떠나는 여행을 좋아 한다.
낯선 곳을 다닌다는 것은 신기함 뿐만 아니라 이방인으로서 갖는 마음의 자유가 더욱 좋다. 그러므로 여럿이 가는 여행보다는 혼자서 가는 여행이 훨씬 멋있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여행이라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가릴 것 없이 그 나름대로의 특색과 멋이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겨울 여행은 혼자서 하는 여행으로 더없이 알맞는 계절이다. 사람들이 죄다 떠나버린 겨울바닷가라든가. 봄, 여름,가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붐비던 산사도 을씨년스럽게 바뀌고 그런 풍경 속에서 홀로 사색을 즐기며 다니기에는 절호의 시간이 된다.
눈발이 고요하게 나부끼는 겨울날 완행열차를 타고서 차창에 부딪히는 눈발이나 희미한 산하를 지켜 보는 것도 즐거움이 될 수 있으며, 열차내에서 마나는 사람들의 정겨운 삶의 진솔한 체험담을 귀동냥으로 듣는 것 또한 즐거움이 될 수 있다.
나의 여행은 먼 장거리 여행이 아니고 도시 근교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마을이 목적지가 된다. 정확히 말해서 뚜렷한 목적지가 없이 그저 발길 닿는 그곳이 목적지가 되는 그런 여행이다. 그 곳도 분명 낯선 곳이기에 평소 느끼던 감정의 테두리에서 해방감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서 사람들의 삶을 엿보기도 하고 나 자신도 찾아 보는 것이다. 그러다가 작은 술집이나 아니면 다방같은 곳에서 한동안 앉아 따끈한 한잔의 차를 마시고 떠나고 싶을 때 그곳을 떠나서 돌아 온다. 어찌보면 방황이라고나 할까.
시골의 작은 다방은 톱밥 난로가 중앙에서 열기를 뿜고 있고 주변에는 젊은 사람들이 둘러 모여 잡담을 주고 받고 있다. 그리고 한쪽의 어두운 구석에서는 연인 사이인듯한 남녀가 이마를 맞대고 심각한 대화인지 속삭이고 있다. 나는 흩날리는 눈발을 털고 그들의 세계에 뛰어든 이방인이었다. 그들은 낯선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금 자신의 일들로 빠져 들어 갔다.
밖은 눈발이 흩날리고 있다. 나는 창가의 밝은 자리에 앉아 커피를 시켰다. 흩날리는 눈발과 톱밥난로와 그리고 한잔의 커피가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러나ㅣ 그 꿈은 얼마되지 않아 깨어지고 말았다. 커피를 가지고 온 아가씨는 다방의 소박한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야한 옷차림과 짙은 화장과 분내음이 심하게 풍겨 분위기를 조화에서 깨뜨렸으며, 김이 무럭무럭 나는 따뜻한 커피는 따뜻함 이외에 아무런 맛이 없었다. 물론 그런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큰 기대에 너무 못미치는 향음이었다.
나의 시선은 다시금 젊은 연인에게로 갔다. 남자는 여자에게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득하려는 태도였고, 여자는 고개를 떨구고 낙심한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이별의 냄새를 맡았고, 괜스레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 창밖은 눈이 내리고 있겠지’
이런 생각이 떠올라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에는 김이 서려 부옇게 되어 밖이 보이지 않았다. 호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어 창을 닦았다. 눈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 눈발 속에서 의연하게 서서 꽃을 피우고 있는 나무가 있었다. 그것은 매화였다. 하얀 꽃송이가 눈발 속에서 마악 피어난 것 같은 모습으로 소담스럽게 달려 있었다.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는데도 꽃잎을 터트릴 자세의 꽃봉오리도 맺고 있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이 육사의 시 「광야」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가늘게 흩날리는 눈발속에 피어 있는 매화를 처음 보았다. 늘 말로만 들어 오던 설중매를 눈으로 확인하는 셈이었다. 그야말로 한떨기 가냘프면서도 강건함을 지닌 조선의 여인 같았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떠나간 임을 기다리며 서있는 여인만 같았다.
엄동설한을 이기고 핀 매화를 보면 봄이 와 있음을 느낀다. 매화가 피었기 때문에 봄이 왔는지 아니면 봄이 왔기 때문에 매화가 피었는지 모를 일이나 분명히 매화는 설한풍 속에서 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매화는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의 시문이나 그림속에 수없이 오르내리면서 그 신화를 우리의 가슴속에 심어 왔다. 매화는 엄동설한을 이기고 모든 다른 꽃들보다 가장 먼저 꽃을 피우며 맑은 향기를 뿌린다.
검은 갈색의 용틀임하는듯한 줄기는 승천하는 용과 같고 고고한 선비 같기도하고 의연한신선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매화는 고색 창연하면서 그윽한 향기와 고고한 모습에서 귀족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고, 하얀 매화의 청초하면서도 그윽한 정향은 현숙한 여인의 자태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여러 연유 때문에 시인묵객들의 붓 끝에서 오랜 생명을 얻었고, 범속한 자태 때문에 사군자의 첫째 자리를 차지하면서 그림으로 그려져 왔던 것이다.
온다던 임 어찌 이리 늦을까
매화꽃은 어느덧 뜰위에 지는데
가지 위에 까치 우니 임 오실 징조려나
거울 들어 화장해도 헛일이로세
선조 때의 기생 이옥봉이 매화가 핀 것을 보고 임을 기다리며 읊은 노래다.
매화를 가장 사랑한 이는 「금오신화」를 지은 매월당 (梅月堂) 김시습이라고 할 수 있다.
매월당은 지금의 경주 남산인 금오산에다 용장사라는 절을 세우고 뜰앞에 매화를 심고 항상 읊조리고 취하며 스스로 즐겼다고 한다. 그의 호 「매월당」이란 것도 금오산에서 매화와 달을 취했다는 뜻이다.
그의 한문소설 금오신화 (金鼇新話)의 제목과 같은 제목의 漢詩에 이른바
납작한 작은 집에 푸른 담요가 따뜻함이 남아 돌고
창에 가득한 것은 매화의 그림자에 첫닭이 밝음이로다
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매월당은 「용장사(茸長寺) 유회시」에서도 매화를 등장 시키고 있다. 매화는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고 표현한 것 같다.
용장사 골짜기는 깊어
사람이 오는 것이 보이지 않네
바람은 뜰의 매화를 감싸 주네
.....
창밖의 매화를 지켜 보면서 상념에 젖어 있는동안 다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빠져 나가고 손님은 나밖에 남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이제 돌아갈 시간이 도니 것 같다.
밖으로 나서니 날은 어두워 졌고 눈발은 계속 날리고 있었다. 2월도 다 지나 갔는데 추위는 풀리지 않는다. 창가에 심어져 있는 매화 한가지를 꺾어 들었다. 봉오리만 서너개 맺혀 있다.
梅花 옛 등걸에 봄철이 돌아 오니
예피던 가지에 피엄즉도 하다마는
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내 눈에는 사방 여기 저기에 매화가 피어 있는듯이 보였고 코속에는 매화 향기가 가득 담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어깨를 움추리고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보니 막차는 떠나 버리고 텅 비어 있었다.
추위가 나를 엄습해 왔다.
<부산산업대학교 2부 교지 ‘연야’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