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강요에 못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 두어야 한다"
- 경기도 광주군 <나눔의 집>과 <일본군'위안부'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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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원당리 65번지 나눔의 집. 이곳 나눔의 집 앞에 세워져 98년 8월 14일 처음 개관된 일본군'위안부'역사관. 지하 1층, 지상 2층의 총면적 104평 규모인 이 역사관은 그 다지 큰 규모는 아니다. 아니 '전문박물관'치고도 조금 작은 듯 하다. 하지만 이 역사관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권박물관'이자, 전쟁으로 인해 수난 당한 여성들을 위한 세계최초의 '군위안부 박물관'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곳곳에 세워진 유대인학살 박물관 등이 나찌의 전쟁범죄행위를 고발했다면 이 역사관은 일제의 전쟁범죄행위를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사관이 시기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유럽의 유대인학살 박물관과 비슷한 점 이외에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다. 거대한 일본이라는 전범국가를 상대로 아직도 '역사의 진실'을 위해 싸우고 있는 박물관이라는 것이다. '위안부'역사관이 다루고 있는 일본군'위안부'문제는 아직 그 진상규명조차 되고 있지 않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이 '위안부'역사관은 지난 97년 3월 1일 (주)대동주택의 기증으로 첫 삽을 뜨게 되었다. 1년 6개월여에 걸친 공사과정 끝에 광복절을 하루 앞 둔 지난 8월 14일 개관을 하게 된 것이다. 약 9억 상당의 건물비용은 (주)대동의 기증으로, 내부전시비용 약 3억은 한국과 일본의 순수한 자발적 시민모금으로 총 12억이 넘는 '뜻 깊은' 돈이 모아져 완성을 본 것이다. 물론 시민모금의 과정에서 IMF 구제금융 등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많았고 그로 인해 개관 일정에 차질을 빚기도 했지만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처럼 피해국 한국과 가해국 일본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해 순수민간차원에서 건립했다는 것이 또한 유럽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또 한가지다.
이 역사관은 크게 몇 개의 장으로 나누어 테마별로 동선을 배치하고 있다. 먼저 군'위안부'문제의 개괄적 이해를 돕기 위한 15분짜리 영상물이 상영되는 '영상자료실'을 거치면 지하로 들어가게 된다. 지하는 어둠과 고통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무덤과 같은 그곳에는 각종 사진자료와 할머니들의 증언을 토대로 '실물 위안소'를 원형 그대로 복원해 놓았다. 일본 오키나와 위안소 발굴현장에서 수집된 진품 유물 등도 맞은 편에 전시되어있다. 또한 이곳에는 당시 위안소 상황을 알 수 있도록 '위안소관리규정' 등 각종문서 사본과 아시아 일대에 분포했던 위안소들의 사진을 전시해 놓고 있다. 당시의 참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체험공간'인 것이다.
그 다음 옆 동으로 이어진 지하터널을 지나 다시 지상 1층으로 나가면 그곳은 묘하게도 '광복의 슬픔'을 주제로 한 장이다. 광복이 되어도 더럽혀진 몸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할머니들의 심정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맞은편은 설치미술가 윤석남씨의 '원혼을 위한 터'이다. 높다란 벽면 위에 나무조각으로 짜 맞춘 조선한복을 입은 여인네, 그 아래 분향을 위한 작은 모래그릇과 약 20여개의 대형 촛불이 불을 밝히고 있다. 이곳을 지나면 위안부문제가 실린 한국과 일본의 교과서와 일제 당시 일제가 위안부문제에 간여한 사실을 증명하는 공문서 자료등이 진열장에 전시되어 있다.
또한 '증언의 장'에는 극사실주의 판화작가 정원철씨의 판화로 찍은 초상화들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물론 초상화의 주인공은 '위안부'할머니들이다. 초상화 벽면 앞에 서서 버튼을 누르면 가운데 김학순 할머니로부터 조명이 비춰지며 김할머니의 육성이 들려온다. 김학순 할머니는 아다시피 91년 당신께서 '위안부'였던 사실을 용기있게 최초로 증언함으로써 다른 할머니들의 용기있는 증언과 동참에 물꼬를 트게 하신 분이다. 김할머니의 기구한 개인사는 시사하는 바도 크다. 김할머님의 아버님께서는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그 때문에 가족이 만주로 이주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일제에 의해 김할머니의 아버님은 체포, 처형되고 김할머니는 우여곡절 끝에 위안부로 끌려가게 되었던 것이다. 김할머님은 과거사를 은폐하려는 일본의 거듭되는 망언을 지켜보시다 '역사의 증언대'에 스스로 서신 것이었다. 스피커에서는 조금은 떨리고 격앙된 듯한 김할머님의 첫 기자회견 내용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그런 김할머님의 목소리도 이제 더 이상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1997년 겨울 남겨진 전재산을 소외받고 가난한 이웃에게 환원한 뒤 유명을 달리하신 것이다.
이 역사 전시관의 2층은 미술작품 전시공간이다. 윤데레사수녀님의 앙증맞은 닥지인형 작품과 나눔의 집 할머니들께서 직접 그림수업을 받으시며 그리셨던 그림작품들이 벽면 가득 전시되고 있다. 생전에 '화가'로 유명하셨던 강덕경 할머니의 많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어쩌면 할머니들은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당신들의 고통을 그림으로 고발하려 하시지는 않았는지.....
그 한켠에 유명한 비디오아티스트 육근병씨의 '타임터널'이란 작품도 전시되고 있다. 그리고 벽면 한 켠에는 나눔의 집을 상징하는 너무나 유명한 작품인 김순덕 할머니의 '못다 핀 꽃'이 전시되어 있다. 이 작품과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김할머니는 애초 그림그릴 종이를 구할 수 없어 문밖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는 병풍을 주웠단다. 그리고 병풍 '천'조각을 뜯어 깨끗이 세탁해 다리미로 잘 다린 후 꽃봉오리 가지가 뻗친 그 병풍 '천'조각 위에 마치 당신의 모습인양 앳된 소녀의 모습을 그리셨다. 왼쪽 밑에서 위로 뻗은 꽃봉오리와 그 꽃봉오리를 딛고 겹쳐있는 해맑은 소녀의 모습. 할머니께서 직접 제목을 붙이신 '못다핀 꽃'이다. 그런데 그림의 맨 왼쪽 상단에 '花盛幸運'이란 한문글씨가 수놓아져 있다. '꽃이 무성하고 행운이 돌아온다' 한문글씨를 아실 리 없는 김할머니셨지만 묘하게 병풍내용과 맞아떨어진 것이다.
2층 전시장을 둘러보고 1층으로 내려오면 출구방향이다. 그곳에는 할머니들의 손 모양이 흙벽에 찍힌 '핸드프린트'가 벽에 걸려 있다. 손을 대면 할머니들의 체온이 느껴지는 듯 하다. 그리고 서명대. 서명대는 판화작가 정원철씨의 아이디어로 독특하게 꾸며졌다. 커다란 종이 위에 손도장을 찍게 되면 할머니의 얼굴모습이 드러나는 일종의 모자이크적인 판화방식을 취하고 있다. 마지막 전시공간은 역사관 건립에 도움을 준 사람들의 뜻을 기리는 공간이다. 벽면에 붙은 검은 오석 위에 빼곡히 개인과 단체의 이름이 가득하다. 눈에 띄는 이름도 보인다. '누리앎, 신들메, 경실련문화역사기행' 이 역사관을 위해 성금은 물론 자원봉사활동 조차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과 단체가 돌 위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위로 김대중 대통령에서부터 아래로 초등학생까지, 또한 일본의 수많은 자원봉사자들! 무엇보다 이름 조차 밝히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김영동, 최현수, 최진실, 박중훈, HOT, 윤도현밴드 등 우리에게 낯익은 이름들도 눈에 띈다. 한국과 일본에서 폭넓은 각계각층의 참여가 이루어낸 '작은 기적'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건물의 외벽엔 화가 임옥상씨의 작품이 출구와 입구 쪽을 마주하며 벽면에 걸려있다. 할머니들의 고통과 희망을 상징하는 두 개의 작품인 것이다.
자랑스런 역사만 어디 우리의 역사겠는가? 용기있는 증언으로 '역사의 진실' 앞에 당당하게 살다 가신 김학순 할머니의 말씀 한마디가 역사관 입구에 새겨져 오늘도 말없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가 강요에 못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 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