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친목산우회 5월 10일~ 11일 정기산행 완도 보길도 격자봉 무박산행
선박료포함 회비 : 65,000원 선입금제(차량비, 선박료, 식대등)
연락전화 : ☎ 회 장 011.685.5349
산대장 : 010. 5288. 4164
총 무 : 010. 4643. 3081
카페지기 : 010. 4162. 9371
준비물 : 충분한 간식, 충분한 물, , 모자, 여벌옷, 상비약, 쵸콜렛, 기타
산행코스 : 산행들머리 -백년사지 삼거리 - 뽀래기재 -거북바위 - 415m봉- 누룩바위 -
격자봉 - 수리봉 - 큰길재 - 예송리 산행날머리(약 4시간)
☆ 본 무박산행은 현재의 정황상 변경될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기타 자세한 사항은 정해지는대로 공지방을 참고하시거나
문자메세지등을 통하여 회원님들께 알려드리겠습니다.
보길도 격자봉 (格紫峰) 430.3m
격자봉은 멀리서 바라보면 황소가 드러누운 듯 완만한 산세를 지니고 있으나 안으로 들어서면 곳곳에 솟은 기암을 마주할 수 있다. 정상에 서면 북으로 분지를 이룬 부용리와 동천석실, 승룡대,석전대가 보이고 멀리 바다 건너 땅끝마을 해남과 달마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북에서 오른쪽으로는 노화도 뒤로 완도 상황봉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예작도, 당사도, 소안도가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을 장식하고 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남쪽으로 추자도와 제주도가 보인다.
격자봉이란 산 이름은 고산 윤선도가 명명하였으나 언제부터인가 적자봉으로 변하였다. 완만한 등산코스에 습지인 듯 칙칙한 느낌이 들지만 능선에 올라서면 다도해가 시원스럽게 펼쳐지고 맑은 날이면 추자도, 제주도를 조망할 수 있다. 격자산에는 황칠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기도 하다. 섬 하나가 면을 이루는 보길도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의 아름다운 바다에 에워싸인 그림같은 산이다.
물을 떠나 바다 한가운데에 격리된 해방감이야말로 보길도의 자랑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섬 풍광이 아름답다. 배로 건너야 하는 어려움덕에 지금의 고요함과 아름다움이 지켜진 셈이다. 보길도는 완도에서 남서쪽으로 32km 떨어져 있고, 해남반도 땅끝에서는 남으로 12km 떨어져 있다. 동서 12km, 남북 8km에 면적이 32.98제곱km인 섬 전체가 온통 상록수림에 덮혀 있다. 섬 중앙에는 대형 운동장을 연상케 하는 분지가 형성돼 있고, 분지 한가운데에 부용리 주민들의 식수원인 수원지가 자리하고 있다.
보길도의 관문인 청별나루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이르면 고산 윤선도의 사적비(사적 제368호)인 세연정이 반긴다. 세연정은 우리나라 조경유적중 특이한 곳으로, 고산의 독특한 발상이 잘 나타난 곳이다. 개울에 보(일명 굴뚝다리)를 막아 논에 물을 대는 원리로 조성된 세연지에서 어부사시사가 창작되었다. 연못 가운데에 있는 정자는 1992년에 복원된 건물이다.
세연정에서 보길초등학교 앞을 지나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포장길을 따라 약 1km 거리에 이르면 부용리사무소가 나타난다. 사무소 앞에는 '낙서재 0.7km, 동천석실 0.5km, 곡수당 0.65km'라고 쓰인 이정표가 있다. 이정표 앞에서 남쪽 낙서재로 들어서는 수렛길로 발길을 옮겨 5~6분 거리에 이르면 왼쪽 계류가에 안내판만 세워져 있는 곡수당터가 나타난다. 곡수당은 고산 윤선도의 아들 학관이 기거했던 곳으로 지금은 옛모습은 사라지고 논밭으로 변해있다.
세연정보다는 규모가 작은 정자였다고 한다. 곡수당터를 뒤로하고 약 100m 더 올라가면 낙서재터에 닿는다. 낙서재는 윤선도가 살았던 집터이다. 초가로 집을 지었다가 나라에서 송금령(松禁令)으로 소나무를 못베게 하자 잡목으로 집을 지었고, 낙서재 뒷편(남쪽)에 있는 소은병이라는 너럭바위에 걸터앉아 사색에 잠겼다고 한다.지금은 낙서
재 집터에는 새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듯 잡초만 무성하다.
孤山 尹善道 (1587~1617)
고산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8세 때 큰집에 양자로 가게 되어 해남 윤씨 집안 대종을 잇는다. 그는 30세 되던 해 이이첨 일파에 대한 탄핵으로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이때부터 유배와 은둔으로 이어지는 일생을 보낸다. 51세 되던 해(1637년) 왕(인조)이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세상을 등지고자 제주도로 향하던 중
보길도의 수려한 풍광에 매료되어 이곳에 정착하기로 하고 부용동 정원을 꾸미기 시작했다.이듬해 난이 평정된 뒤에도 그동안 고초를 겪은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경북 영덕으로 유배되었다가 1년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고산은 가사문학의 대가인 정철과 더불어 시조문학의 대가로 특히 자연을 시로 승화시킨 뛰어난 시인이었다. 문집 고산유고에 시조 77수와 한시문 외에 2책의 가첩(歌帖)이 전한다. 작품으로 견회요, 산중신곡, 산중속신곡, 어부사시사 등이 있다. 85세로 격자봉 산자락인 낙서재에서 일생을 마감하였으며 자신의 문학적 토양이었던 문소동 골짜기에 몸을 뉘였다.
첫댓글 권재기님 예약 입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