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패지향(豊沛之鄕) 전주
이 명 철
(전북문화관광해설사 3기)
제왕의 고향을 지칭하는 풍패지향(豊沛之鄕) 전주. 그 전주를 둘러보기 위한 예비지식은 역사박물관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어제 내린 눈은 박물관 앞 나무위에 눈꽃송이 설경이 아름답다. 전북에 살면서 전북의 수도인 전주를 모르고 어떻게 전북에 산다 하겠는가. 그래서 딴에는 열심히 하자고 마음먹어 보지만 뜻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전주라는 옛 지명은 원래 마한(馬韓)의 원산성(圓山城)이 그 유래였으니, ‘원(圓)’은 ‘온’의 차음(借音)으로, 백제 때 완산(完山)이요, 완산의 한자식 표현인 전주(全州)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신라 경덕왕 때부터였다. 완(完)과 전(全)은 모두 ‘온전하다’는 의미니, 완전무결(完全無缺), 원만구족(圓滿具足), 순수무결(純粹無缺), 총화융합(總和融合)의 뜻이 담겨있어, 순수 우리말로 ‘온고을’이 바로 전주다.”가 전주의 예부터의 뜻이란 걸 배우고,
“신라는 구 백제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 유민을 익산에 이주시켜 보덕국(報德國)을 세워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구사하였다. 즉 고구려와 백제를 갈등과 대립으로 몰아 그 세력을 약화 시키려 했던 것이다.”란 전주 사람들의 예부터의 삶의 자취도 배웠다.
이러한 신라의 정책이 성공한 건 아니라 해도, 오늘날까지도 신라인들은 백제인들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는 내 생각이다.
“견훤은 900년, 전주에 도읍을 정한 뒤 백제(百濟)라 국호를 정하고, 백제왕이라 칭했으며, 정개(正開)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국가 수립을 대외에 선포하였다.”는 총론에 의거 구체적 각론(各論)은 전주의 답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전주시에서 내어 준 버스에는 떡과 과자 등의 간식거리도 넉넉하다. 고마운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초록바위는 곤지산 아래의 깎아지른 절벽의 갈마음수격(渴馬飮水格:말이 풀을 찾는다)의 바위이고, 좁은목, 숲정이와 함께 ‘3대 바람통’이라 불리었습니다. 김계남과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여 참형 자들을 효수하던 곳에 나무들이 지나는 사람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여춘희 해설사님의 해설에 찬바람이 으스스 이는 것 같다.
‘축귀양인(逐鬼洋人)’ 즉, ‘서양귀신(西洋鬼神)을 쫓아낸다.’라는 뜻인데, 천주교를 박해할 당시에는 등에 써 붙인 사람도 있었다 하니, 사주(使嗾)와 무지가 낳은 비극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한다.
“초남리 유항검(柳恒儉)의 집터 파가저택(破家邸澤)은 흔적인 연못만이 남아 있습니다.”란 말을 듣고, 당시의 위정자들이 자행한 노륙지전(孥戮之典)의 가혹한 형벌이 너무도 끔찍하다는 생각이다. 가축을 우리 안에 가두어 기르다가 크면 잡아먹는 식으로, 어리다고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가 나이가 들자 물에 밀어 넣어 죽이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 당시 유교의 덕목인 인(仁)을 배웠다는 벼슬아치들이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소름이 끼친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죽임을 당하는 어린 생명들, 아, 정말 가슴이 아려온다.
한벽루(寒碧樓)에서 놋 밥그릇에 푸짐하게 나온 전주비빔밥으로 점심을 들었다. 역시 전주 시에서 베푼 것이다.
비빔밥 하면 오방색이 떠오른다. 동쪽은 푸른색 나물이요, 서쪽은 콩나물과 도라지 같은 흰색이며, 남쪽은 고추장 당근과 같은 붉은 색, 북쪽은 고사리와 같은 검은색, 가운데 계란 노란 자를 넣고 비비면 우리의 전통 비빔밥이 되는 것이다. 전주비빔밥 한 그릇에 우주의 진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셈이다.
맨 먼저 찾아간 곳이 한벽당(寒碧堂)이다. 한벽당에서 바라보는 동고산성(東固山城)과 남고산성(南固山城)의 눈 덮인 설경이 장관이다.
한벽당의 옛 이름 월당루(月塘樓)라. 벽옥한류(碧玉寒流)와 한벽청연(寒碧晴烟)에서 연유한다고 추정하는데, 전주 팔경의 하나다. 상관의 깊은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차기에 맑은 것 같은 바람은 가슴속의 속진(俗塵)을 씻어내는 것 같다. 남고사의 종소리는 속세의 소음으로 듣지 못한 채, 끊어진 옛 철로의 흉물스런 모습 위에 찬바람만 몰아친다.
“남고산성은 견훤(甄萱)산성, 고덕산성이라고도 하는데, 전주 천을 사이에 두고 동쪽의 기린봉・승암산으로 이어지는 동고산성과 더불어 전주의 남쪽 관문을 지키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며, 견훤이 쌓았다는 설도 있고, 그 이전부터 쌓았다는 설도 있다.”는데, 동고산성의 산성지(山城止)는 승암산의 기암절벽(奇巖絶壁)에 의지하고 옛 자취 아련하게 단애(斷崖)에 멈춰있다.
“차령산맥(車嶺山脈) 이남의 지세가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형세로 배역의 기운이 있으므로 비록 양인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요로에 등용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훈요 십조를 생각하면서, 양 산성에서 북으로 흐르는 지세를 바라본다. 과연 북으로 흐르고 있었다. 동고산성은 승암산, 일명 중바위를 품에 안고, 그 흐름에 오목대와 이목대를 두면서 줄기차게 흐른다. 선경이다. 그네타고 낚시하는 모습이 곳곳에 있으리라는 상상도 해본다.
. 오목대 잔치에서 이성계가 부른 한고조(漢高祖)의 대풍가(大風歌)에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홀로 말을 몰고 남천을 건너 남고산 만경대에 올라 스러져가는 왕조의 한을 한 수의 시에 담아 읊었다는 남고산성이 바로 남천 건너 눈앞이다. 만고의 충신이란 정몽주! 그의 충성은 백성을 위한 것인가, 왕조를 위한 것이었던가.
춥지만 않다면 한벽당 난간에 몸을 기대고 시 한 수 읊고 싶은 생각이 들긴 한데, 격에 맞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괜히 스스로 부끄러워 얼굴 붉어진다.
완산 팔경 중 하나인 한벽청연은 슬치에서 발원한 물길이 북으로 내달려 옥류동 한벽당 밑 바위자락에 부딛쳐 피어오르는 물안개의 모습이며, 남고모종(南固暮鐘)은 해질녘에 남고진(南固鎭)의 저녁놀을 가르며 울리는 남고사의 범종(梵鐘)소리인데, 대낮이지만 추운 겨울인지라 한벽당에서 멀리 바라만 보았을 뿐이다.
‘죄 없는 산세에 ‘배역’이란 굴레를 씌운 억울한 역사의 현장이 바로 여기 전주가 아니던가.
훈요 십조가 최항 개인의 집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또한 친 신라계열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전라도 세력을 소멸시키기 위한 조작은 아니었을까’를 생각하면서 오목대로 발길을 옮겼다.
유지(遺址)는 옛 집 따위가 섰던 터를 말하는데, 이안사의 유지가 바로 오목대다.
오목대(梧木臺)는 목조 이안사가 살았던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 舊居遺地)요, 이목대(梨木臺)는 시조 이 한으로부터 18세인 목조 이안사가 누대에 걸쳐 세거하였던 조선왕조의 풍패지(豊沛地)다. 이목대에서 바라보는 한옥마을과 경기전 등의 겨울 풍광이 나에게는 새로운 아름다움과 이미지로 펼쳐진다. 이목대에 가지 않고 바로 한옥마을을 바라보며 내려왔다.
전주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한옥마을. 이는 정녕 우리의 여유와 멋, 너그러운 삶의 공간이다. 이 마을에 살았거나 살고 있는 분도 우리와 함께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집, 더 정겹다. 최명희 문학관도 이 마을에 있고, 도지사님 관사도 이 마을에 위치한다. 마당에서 둘러만 보려는 우리에게, “그래도 오셨으니까 따뜻한 물이라도 마시고 가셔야죠.”하시면서 한과와 과일이며 차를 대접하시는 도지사 사모님의 따뜻한 배려 역시 한옥마을의 인심이 아닐까. 안온함을 느낀다.
전주 이씨 시조 이 한부부의 위패를 모신 조경단과 조경묘, 풍남문 등은 이를 보여주는 상징물이란 해설을 들으며, 바쁜 발걸음으로 산태미에 콩 담는 식으로 바늘에 실을 묶는다.
“선화청은 관찰사가 머무는 곳. 동헌은 고을 수령이 머무는 곳. ‘등소만록’에 정여립은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고 기록되었다는 것. 역모 고변이 정여립의 활동무대인 전라도가 아닌 황해도에서 이루어졌다는 것. 무장조직 대동계가 저항하지 않은 것. 정권은 동인에게 있었고, 서인은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을 필요가 있었기에, 조작설도 있습니다.” 해설은 평소 내 생각과 다를 바 없다.
향교는 지금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이며, 관학(官學). 강학(講學)과 배향(配享)의 기능(技能) 수행(遂行)하였던 곳이다.
향교가 처음 건립된 것은 12세기 초반 고려 인종 대부터라고 할 수 있으나, 전국적으로 설치된 것은 조선건국 후의 일이다.
향교는 원래 읍격에 따라 교수(종6품)와 훈도(종9품)를 파견하였으나 배우는 자들이 서원 등 사학기관을 선호하게 됨에 따라, 강학기능을 상실하고, 선현을 봉사하는 배향기능만이 살아 움직였다. 조선말기에 강학기능을 살리기 위해 양사재(養士齋). 흥학제(興學齋). 육영제(育英齋) 등을 향교 부속으로 건립하기도 했으나 효과는 미지수다.
향교는 양인이면 입학할 수 있었으나, 양반과 양인을 구분하여 각각 동재와 서재로 나누어 기숙시킨다든지, 액내와 액외로 신분을 구분 짓기도 하였다. 정원은 읍격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전주부와 간이 부. 대도호부. 목 등 가장 큰 읍은 90명, 도호부 70명, 군은 50명, 가장 작은 읍인 현은 30명이었다.
향교의 구조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양쪽의 동무(東廡)와 서무(誓廡)로 구성된 배향공간과, 명륜당(明倫堂)을 중심으로 그 양편이 동제(東齋)와 서제(西齋)로 구성된 강학공간으로 이분된다. 대성전 중앙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안자 . 자사 . 증자 . 맹자 5성의 위패(位牌)가 모셔져 있으며, 대성전 벽과 동무 서무에는 중국성현과 우리나라의 동방 18현의 신위(神位)가 모셔져 있다.
명륜당은 강학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동서재는 일종의 기숙사다. 일반적으로 평지에서는 배향공간이 앞으로 오고 강학공간이 뒤에 위치하며 전묘후학(前廟後學), 언덕에 자리한 경우는 반대다. 그것을 전학후묘(轉學後廟)라 한다. 이런 향교의 건물배치법은 배향공간이 강학공간보다 더 격이 높았음을 시사해준다. 좌묘우사(左廟右社), 즉 객사에서 남면하여 좌측에 문묘(공자의 사당), 우측에 사직단(社稷壇)을 배치한다.
사직단이란 성황사(城隍祠), 여단(厲壇)과 함께 3사라하여 고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곳으로 사직이란 땅과 곡식을 의미한다. 社는 국토를 수호하는 신이며, 직(稷)은 곡식의 풍요를 관장하는 신이다.
전주향교의 구조는 전묘후학으로 배향 공간이 앞에 있는데, 대성전 중앙에 공자와 4성, 그 좌우로 공자 문인 10철과 송조(宋朝) 6현을 배향하고, 동무와 서무에 중국 7현과 동방 18현이 배향되어 있다. 또 공자와 그 제자 4성의 부친 위패를 모신 계성사(啓聖祠)의 존재도 전주성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전주초등학교가 1897년 이곳 전주향교의 양사재를 빌려 개교하였다 한다.
오목대는 고종의 친필 태조고황제주필유지패(太祖高皇帝駐畢遺址碑)를 세웠는데, 우왕 6년(1380)에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개경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전주에 들려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열었던 곳이다.
이목대 역시 고종의 친필 목조대왕구거유지패(穆祖大王舊居遺址碑)가 세워져 있다.
전주 객사는 주관(主館)과 좌우에 익헌(翼軒)이로 되어있는데, 주관(主館)에는 전패(殿牌)가 모셔져 있고, 익헌은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사천왕봉(四天王峰)은 수호봉(守護峰)이라 한다. 동(東:푸른색)의 기린봉은 청룡(靑龍)을 뜻하며 중바위(승암산)과, 서(西:흰색)의 황방산은 완산이며, 백호를 뜻하고, 남(南:붉은색)의 남고산에는 남고사가 있고 곤지산이며 주작을 뜻하며, 北북(:검은색)의 건지산은 유연대오 현무를 뜻한다.
전주에는 예부터 사불여설(四不如說)이란 말이 있었는데, ➀ 반불여리(班不如吏) : 양반이 아전만 못하다. ➁ 기불여통(妓不如通) : 기생이 통인만 못하다. 수령의 잔심부름을 하는 나이어린 아전은 항상 수령의 곁에 있음을 비유한 말. ➂ 이불여청(梨不如菁) : 배맛이 무맛만 못하다(전주 무가 유명). ➃ 주불여효(酒不如肴) : 아무리 좋은 술이라도 안주만 못하다. 전주의 여염집이나 주모들이 내 놓은 안주 맛을 따르지 못한다는 뜻인데, 이는 전주 음식을 이야기 하는 것일 게고, 예전에 술좌석에서 가끔 들어본 이야기 같기도 하다.
선화당은 전라감영 즉, 관찰사의 집무실이고, 전주부성을 관할하던 전주부윤(지금의 전주시장)의 집무실인 동헌은 지금의 풍남문과 객사를 잇는 도로에서 전북예술회관 뒤편 부근이란다.
경기전은 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4년에 중건한 것이다. 하마비(下馬碑)는 정문 밖, 도로가에 있다. 이 비석에 두 줄로 지계하마 잡인무득인(至皆下馬 雜人毋得人)(이곳에 이르는 자는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출입을 금한다.)라고 적혀 있다. 두 마리 사자(혹은 해태)가 판석 위의 하마비를 받치고 있다. 입을 벌리고 있는 아금강과 입을 다물고 있는 음금강은 곧 공격과 수비요, 양과 음이요, 따라서 완성이며, 수놈이고 암놈이다. 수놈은 발톱을 세우고, 머리와 몸의 덩치가 크다. 반면에 암놈은 발톱을 안으로 오므리고, 엉덩이는 수놈보다 더 크다. 눈매는 수놈이 부리부리하니 공격적이다.
전주사고와 조선왕조실록은 태조 때부터 철종대까지 총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것. 1,893권에 888책,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것 등을 상기해 보면서,
태조 영정과 실록을 보전한 인물 중에 안 의와 손홍록은 나의 11대조 할아버지인 일제一齊 이 항(恒)의 문인이라는 게 은근히 자랑스럽기도 하다.
풍수지리상 전주는 배역지지(背逆之地)이다. 주산이 성황산(지금은 승암산으로 호칭)이고, 좌청룡과 우백호의 지맥이 북서쪽으로 향하고 있다. 물줄기는 남동출(南東出) 북서류(北西流)로 이루어졌다. 즉 임금이 있는 북쪽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다.
전주의 풍수지리는 사신(四神)도인데, 사신은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 등 상상의 동물이다. 동쪽은 기린인데 백호의 대체며, 서쪽은 용, 남쪽은 봉황(鳳凰), 북쪽은 현무(玄武)인데, 거북으로 대체하였다.
궐패(闕牌)는 전패(殿牌)를 걸어놓고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으며 양익헌(兩翼軒)에서는 중앙의 관리 등 외부에서 오는 손님을 맞이하였다.
창암 이삼만이 정읍 사람인줄만 알고 있다가 전주 교동 출생이란 것도 이제야 알았고, 추사와 전주에서 만났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다.
버스에 승차하면서부터 태조 이성계의 영정과 실록을 봉안한 경기전까지, 끝까지 차분하게 해박한 지식으로 지혜롭게 해설을 해주신 여춘희(呂春熙) 해설사님의 놀라운 실력에 감탄과 존경을 금할 수 없다. 해설을 듣다가 컨닝을 하는 수도 있다. 그럴 때면 회장님이 가만히 가르쳐주신다. 그러한 것들이 모아져서 이렇게라도 한 편의 글을 쓸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래서 항상 헤어짐은 아쉽다. 다음 달에 익산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우리는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첫댓글 07 년에 같이 참여 하지 못한 고창문화관광해설사 3기생 들에게 좋은 자료가 될 것입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문화관광해설사님들이 읽어보시면, 해설할 때 참고가 될만한 것이 있다 생각하고 올렸는데, 누가 잘 읽지를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