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라의 흔적을 잊지 않으려는 미점(米點)의 여정
염선옥
서곶 동인의 시는 ‘현미무간(顯微無間)’의 입장에서, 구체적인 존재의 현상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연 철학적 이치와 그 너머 현상학적 원리까지도 연속으로 파악하는 사유로 나타난다. 그들은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파편화되지 않고 포용의 방식으로 세계를 껴안는다. 이때 현미무간이란, 존재자가 존재하는 것들과 분리되지 않고, 상즉(相卽)하여 있음을 보이는 뜻을 품고 있다. 서곶 동인에게 시적 세계는 갖추어진 하나의 ‘정동의 풍경’(제인 베넷)인 셈이다. 이들에게 물질은 존재자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정동적 촉매를 일으키는 매개이자 주체인 셈이다. 즉, 인격과 비인격의 만남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의 만남으로 이들의 시는 세계-내-존재에서 서로를 보듬고 돌보는 그것으로 관계한다.
우리 문학사의 여정을 살펴볼 때 서곶 동인의 시편들이 지니는 현상은 매우 유의미하다. 우리 문학사는 내용과 형식의 대립 속에 꾸준히 놓여 있었다. 물론 이는 한국문학에 영향을 미쳐온 커다란 두 가지 비평적 흐름과도 연관이 있다. 사회과학적 비평과 형식주의 비평의 대립이 그것이다. 루카치, 아도르노, 골드만 등 후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문학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역사적 상황을 문학의 출발점으로 삼고 문학 외적 요소들을 강조하였다. 반면 러시아형식주의나 신비평 등은 문학작품의 형식에서 예술적 가치를 수확하고자 했다. 이러한 이항 대립 속에서 한국문학사는 무엇을 중심에 두느냐 하는 관점과 취향에 따라 지속적 긴장과 대립을 보여온 것이다. 하지만 호미 바바의 말처럼 문화란 삶의 반영이고 문학이 인간의 삶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사회적․역사적 상황을 떠날 수 없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해서 시를 역사적 시각으로만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과연 역사가 역사인가? 하는 야우스의 물음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문학사의 양분화 현상은 뫼비우스의 띠 속에 갇혀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서곶 동인은 우리 문학사에 미쳐온 두 가지 흐름 가운데 어느 것에도 편향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현실에 유리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면서도 형식적 새로움을 추구해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이들의 시는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상황을 문학의 출발점으로 삼으면서도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풍경을 점묘법으로 그려나가고 있다. 이때 점묘법은 동양화에서 자연을 인상적으로 해석하는 미법산수의 미점(米點), 인상주의의 경우에는 프리즘에 의해 분해된 색의 병치에서 색점 배치의 묘법 등이 대표적이다.
미법산수(米法山水)로 시를 그려내다
이은춘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아파트 숲에 가려져 자라지 않는 소나무/자꾸만 헐거워지는 작은 산/어깨가 뻐근하다.//잠들지 못하는 도시의 숲//더/세밀하게/귀 기울이려 키를 낮춘다.”라고 말한다. 이은춘은 도시에 살면서 삶의 풍경에 자연이라는 여러 미점(米點)을 찍어내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시적 풍경은 도시 속의 미법산수가 된다. 화자는 “…삼월을 깔고…바람을 등에 지고”있는 ‘숲’에 서 있다. “구름 한 점 없이/빠른 걸음으로 사월이 다가오고/숲은 여전히 마른 바람”(「삼월의 비」)이 부는 곳에서 지구 반대편 리우데자네이루의 삼월을 떠올린다. 그리하여 그것은 두 개가 아닌 하나의 숲으로 포개진다. 이은춘의 시선과 사유가 겹쳐지는 공간이다. 그리하여 그는 여백 속에서 ‘터’와 ‘자리’를 읽듯 ‘자연’ 속에 자리한 빌딩과 그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읽어나간다. 이처럼 이은춘의 시는 도심에서 찾아보기 힘든 여운과 여백을 담아내고 있다. 「삼월의 비」에서 거대한 두 개의 숲이 하나로 포개질 수 있는 것은 시인의 사유가 보이지 않는 ‘너머’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은춘의 사유는 공허한 유희만 존재하는 오늘날에 삶을 관통하는 반성과 성찰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시인은 사유의 너머만을 매만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유리되지 않은 시를 쓺으로써 바람, 두려움, 막막함, 긍정, 허무, 행복을 다 담아낸다. “노브랜드에 들어선” 화자는 ‘키오스크’라는 현대문명 앞에서 “되새 떼처럼 일제히 날아드는 시선”을 견뎌내고 “화면 속 요란하게 떠다니는 오늘의 메뉴”를 선택한다. ‘시그니처 투게더팩’, “눈인사도 없이/얼굴 빤히 쳐다보며 투게더와 빈 컵 두 개”를 챙겨 버스를 타고 집을 향한다. 그녀는 계속 생각한다. “이 빈 컵은 뭐꼬”그리고 마침내 기억이 떠오른다. 바로 ‘셀프 콜라’였던 것이다. 화자는 “종이컵 가득 헛헛함만 담아온/저녁/셀프 찾으러 가야 하나/다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있다.”(「빈 컵」) 이은춘의 시는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일상에 오류를 내는 에피소드들을 시적 소재로 사용한다. 오늘날 메이저 출판사의 대부분이 MZ 세대가 경험하는 ‘두려운 낯섦’의 풍경과 이것의 시적 형상화에 집중해 있다면 이은춘의 시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장년층 역시 과학 시대의 틀에서 실패하고 있노라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시인의 시에는 풍요롭고 화려하고 편리한 현대인의 삶에 찾아든 ‘두려운 낯섦’의 풍경이 전시되는데 그것이 찾아드는 자리에서 새로운 사유가 시작된다. 어느 날 화자는 “마을버스를 타고 있었다/거북이 경주하듯 굴러가는 버스/승객”처럼 혼자였다. 천천히 가는 통에 화자는 운전기사에게 말을 걸게 된다. “교대 시간 맞추느라 그러냐”고. 되돌아오는 답변은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 “전화 받지 않는 사무실 원망하며/이제 정말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바짝 핸들을 움켜잡는” 기사의 모습은 어딘가 고장이 난 세계를 살아가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본주의 시대의 자본가들이 내놓은 경영 방식이 과연 그런가를 묻게 한다.
화자는 고요한 아파트 놀이터에서 할머니의 모습을 지켜본다. 어떤 ‘고요함’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다. “헐거운 스웨터 속으로/파고드는 바람”이며 “털신 코끝으로/톡/톡” 떨어지는 빗방울을 확인한다. 회색머리 할머니와 회색 비둘기까지 온통 12월 회색빛이다. 「십이월」이 상기시키는 이미지는 ‘할머니’의 삶과 포개지면서 자연의 풍경을 집단적 삶의 복수 전체로 확대시킨다. 이제 시인은 「술래잡기」에서 외롭게 홀로된 단수로서의 ‘나’가 아닌 환경과 공존하는 삶의 복수로서의 ‘나’를 상기시킨다. 화자는 우연히 집 안에 날아든 “새 한 마리”와 고군분투 중이다. “창문을 열어놓고 휘휘 신문지”를 저어도 “작은 날갯짓/한참을 숨바꼭질하다/이파리 무성한 벤자민 가지에 가는 발가락을 얹고 있다.”, “나무 이파리 뒤에서/의자에 앉아/모르는 척 서로를 경계”하지만 “나, 그리고 너”(「술래잡기」)는 모르는 척할 뿐 사실 ‘우리’로 있던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자꾸만 헐거워지는 작은 산”(「시인의 말」)이 걱정되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이어 절대 “황혼육아는 없다”더니 손주를 돌보는 화자를 소개한다. 볼리비아에 자리한 “우유니사막을 찾아 손가락을 길게 늘려”보지만 “전세대출 갚을 길이 없다는 말에 갇혀”서 손주를 보는 화자는 두 공간에 놓여 있는 셈이다. 머릿속은 온통 우유니사막인데 육신은 도시 공간에 갇혀 있어도 화자에게 두 공간은 포개지면서 오아시스가 된다. 희망은 성취가 아닌 믿음의 결과물이며 도래하지 않은 우리의 행위라는 점에서 화자의 태도는 비관적이지 않다. “선잠 깬 손주의 투정이 버킷”을 저 멀리 밀어내도, “소금사막은 멀기만”해도, “거실 한쪽 잠들어 있는 배낭”(「버킷리스트」)은 도래하지 않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은춘의 다양한 시적 시도는 ‘시’라는 짧고 제한된 장르를 통해 세계-내-존재인 복수 존재의 삶을 돌보는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할머니, 기사, 가게 주인 등 다양한 이웃의 삶과 자식과 손주의 삶에 더해 새의 삶과 헐거워지고 작아지는 산까지 모두 헤아리는 시인의 몸부림이 살갑게 다가온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갈라지는 사유의 방향과 육체(물질)의 방향, 이상화 현실의 방향은 좀체 하나로 포개지지 않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돈다. 그 반복의 일상은 브레이크가 들지 않는 버스처럼 화자를 괴롭히고 조심스럽게 하지만, 우리는 ‘파바로티 주인처럼’ 웃을 수 있다. 우리는 헐거운 스웨터 속으로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에도 우리를 바라봐주는 따스한 시선을 이은춘의 시에서처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 분 거리 대형마트도 모자라 바로/이웃해 들어선 다준다정육점/한 달 넘도록 줄어들지 않는 긴 행렬에/이짝은 사막을 걷고 있다면서도/목소리는 오아시스를 만난 듯하다//막이 바뀌듯//…듬뿍 담아주며/…유쾌한 테너 씨”(「파바로티」)는 신이 난다. 이렇게 삶은 모두가 공존하는 일이다. 오늘의 불행이 누군가의 희망이라면 그것은 총량의 법칙에 따라 같은 것이다. 나의 행복으로 누군가 불행하지 않기를 바라는 시인의 모습은 ‘존재’ 모두를 배려하고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는 태도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시인은 ‘불평등’이라는 “피켓 높이” 들고 시위를 벌이는 이들이 도로 한 쪽을 가득 채우고 있어도, “좁은 이차선 도로 위/뒤엉켜 울려대는 클랙션 소리/끌끌 혀 차는 소리/웅성거림”마저 놓치지 않고 담아낸다. 이것은 도저히 좁혀지지 않는 현실과 이상 사이를 돌고 도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삶을 채우고 있는 일이다. 시인은 그것이 삶이라면 존재 모두를 이해하고 싶어 한다. 이은춘의 시에는 여러 미점(米點)으로 자리한 다양한 화자들의 모습이 소개된다. 삶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은 모두 같지만, 그들이 소개하는 삶의 색다른 일면들은 ‘미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일러주는 듯하다. 다양한 존재의 경험과 인식의 편린이 시인의 삶의 총화를 이루는 것이다.
자두, 소라 껍데기 그리고 한 알의 모래
유리구슬 속을 들여다보면서 은하계를 닮았다고 생각하던 일, 귀가 소라 껍데기를 닮아 바다의 소리를 그리워하나보다 여기는 일(장 콕토, 「귀」), 냉장고 속의 자두가 너무 맛있어 보여 “내가 먹었다고” 고백하는 일(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This is just to say”), 한 알의 모래알에서 세계를 볼 수 있다고 말하는 일(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 등은 순수한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생각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기도 하고, 보거나 듣고자 하는 것을 현미경과 확대경을 이용해‘자세히’ 관찰할 때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무수히 많은 것 중에 하나를 택해 존재자 쪽으로 당기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하여 마침내 감정이 그것을 포획했다면 그것은 ‘나’라는 존재자를 중심으로 세계와 존재가 움직이는 것이 될 수 있겠지만, 만약 하이데거·가다머·레비나스 식으로 존재가 그 세계를 크게 ‘열어 보이고’ 그래서 그것을 마주하게 된 것이라면 과연 어떨까? 분명한 것은, 존재는 순수한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생각할 때 포착된다는 것이다. 세계 내 존재의 본질은 이성의 시각과 이항 대립적 세계 인식의 토대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보이는 진리의 결과물이며 ‘열어 보인 것’과 부딪쳐 새로이 탄생한 것이 ‘소리’가 되고 ‘시’가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모든 것들은 신이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저 아이는 보고 들은 것을 감탄할 뿐이다. 어쩌면 시란 감탄의 글인지도 모른다. 또한 시인은 어린아이처럼 숲길을 헤매거나 헤쳐나가는 존재자(하이데거)인지도 모른다.
송선영은 열 편의 시에 순수한‘미성년 화자’를 통해 불화 없는 세계로의 여행과 환원을 꾀한다. “툭, 여기도 있다 툭” 떨어지는 도토리를 주워가며 집으로 향하는데 “자꾸만 툭 툭” 떨어지는 도토리는 ‘나’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요것만 주워야지/요것만 주워야지//엄마는 자꾸만 부르고/나는 신이 나는데//툭//툭”(「도토리 하나」) 아이의 발길을 붙잡는 것은 바로‘도토리의 역동성’이다. 도토리가 떨어지는 일이 자신의 발걸음과 겹쳐지고 도토리가 자신에게 더 놀고 가라고 붙잡는 것 같아서 아이는 자꾸 신이 난다. 도토리가 자기를 던지는 일은, 존재가 자신을 던지는 ‘계시’와도 같다. 떨어지는 도토리가 모두에게 보이는 일이 아니듯 존재는 자신을‘은폐’하기도 하는데 도토리는 어린 화자에게 자신을 드러내 준다. 오로지 순수한 아이의 눈에만 포착되는 존재의 계시를 마주한 아이는 불화 없는 세계를 여행하는 중이다. 송선영의 「동전」은 게임을 함께 할 친구를 기다리는 ‘미성년 화자’의 “저금통에 눌러앉은”동전에 대한 시다. ‘나’는 “한 밤 두 밤/내 동전이/긴 잠을 자면서/닌텐도 스위치에 신나는/게임기 꿈을 꾸겠”구나 생각한다. 송선영은 이 시에서 마치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서 ‘동전’을 전시한다. ‘나’는 “옷 속에서 잠을 자”는 동전, “친구를 기다리며/자꾸자꾸 잠을 자”는 동전, “긴 잠을 자면서…게임기 꿈을 꾸”(「동전」)는 동전이 안쓰럽기만 하다. ‘나’에게 ‘동전’은 어른의 그것과 다른 의미가 된다. ‘나’에게 동전은 같은 시간과 공간을 나누어 쓰는 ‘존재’로 자리한다. 친구를 기다리는 동전은 꿈을 꾸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아이 화자에게 그냥 ‘놓인’ 것이 아니다. 아이는 모든 살아 움직이는 것을 포착하고 목격하며 그것을 증언하는 자다. 그래서 송선영은 ‘미성년 화자’를 통해 모든 것을 목격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엄마 손 잡고 버스를 타고/놀이방 가는 날//버스 차창 가운데/전선줄”이 걸려 있다. 아이는 “내려서 걸어가면/높다랗게 걸려” 있던 엄청 많던 전깃줄이 “차창에 내려와/떡하니 걸려”(「전선줄」) 있어 신기하기만 하다. 실제로 전선줄은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차 밖에서 매우 높아 보인 전선줄이 높은 차 속에서는 낮게 보이는 것은 아이만 포착할 수 있는 감각일 것이다. 송선영은 어린아이 같은 시선을 간직한 시인이다. 그래서 시인의 미성년 화자는 모든 존재가 염려되고 직접 대화할 수 있다. “쉿 링링아//우리 동생 잠잔다” 염려하는 ‘미성년 화자’는 ‘링링 태풍이’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태풍 ‘링링’으로 동생이 잠을 깰까 봐 염려하는데 송선영은 그중에 고개 숙여 우는 억새와 목수국의 울음소리, 컴퓨터 종이, 119 아저씨의 소리 ‘잉잉’을 함께 배치해 둔다. 존재한다는 말과 세계-내-존재라는 말은 같은 시간 안에 있다는 것,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는 모두 한 세계에 던져진 존재다. 시인은 어찌할 수 없는 세계에 ‘피투’된 존재이지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투’의 존재로 아이 화자 ‘나’를 내세운다. 아이는 ‘링링 태풍이’에게 분명하게 경고하는 셈이다. “쉿” “우리 동생 잠잔다”(「링링 태풍이」)라고. 화자 ‘나’의 대화는 「배」에서도 이어진다. “나비가 앉아 나에게 손짓”하는 ‘배 밭에서’ ‘나’는 “향기 가득한 배//어디서 땄어”라고 묻는다. 그러자 ‘흔들흔들’ 대답한다. “그럼 주었어”(「배」)라고 다시 묻는다. 그러자 이번에는 ‘끄덕끄덕’ 한다. 「배」 에는 ‘까치’와 ‘나비’ 그리고 ‘엄마’와 ‘할머니’, ‘나’와 ‘배’가 모두 현재-내-세계에 존재한다. 그러니 이 질문이 누구를 향하는지는 상관이 없다. ‘나’는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으며 모든 존재는 ‘나’에게 열린 대화 대상이기 때문이다. 한 공간 안에 놓인 모든 존재를 본다는 것은, 하나의 ‘모래알’에서 세계를 발견하는 일과 같은 일이며, 존재가 연 자신의 세계를 목격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 발자국” 앞에는 “까치 발자국/강아지 발자국…눈자국”까지 같이 놓여 있다. 한 풍경에 놓는 다양한 ‘자국’을 ‘나’는 “새 학기 내 짝꿍”(「발자국」)에게 보여주고 싶다. 존재가 ‘텅 빈 개념’이 아니듯 세계는 어린아이 존재자를 매개로 투사되는 하나의 작품이 되기 때문이다. “하얀 옷에 까만 모자 쓰고/까만 자동차 타고/이모 품에 안기어/수목원으로 이사”온 ‘아이’는 “손에서 먹이를 먹는 아이/꼬꼬 꼬꼬”하는 병아리에게 “꼬꼬라고 이름 지었다//물 한 모금 먹다 말고/갑자기 꼬끼오 꼭 기오/큰소리로 소리”치자 “외할아버지는/소리에 맞추어/윤 이야 윤이야/오빠 이름 함께 부르고//외할머니는/유리야 유리야/내 이름을 부른다.”(「꼬꼬」) 존재성은 ‘이름’(텍스트의 역동성)이 부여되는 자리에서 출현하는지도 모른다. 어린 화자는 병아리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어린 ‘윤’과 ‘유리’의 존재를 알린다.
송선영의 어린 화자는 순수의 감각으로만 열리는 세계를 향해 “두둥실 올라가”기를 바란다. “하늘을 날고 싶은/내 꿈도/자꾸 자꾸만/커져”가고 “어른이 되어 비행기 타면/노랑풍선 파란풍선”(「풍선」) 모두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한다. 어른이 되면 모든 풍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나’의 희망은 모든 감각이 열리는 어른이 되기를 원하는 송선영의 희망 그 자체가 아닐까.
한 사람, 한 마디 그리고 스냅 사진
사진은 한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사용되는 도구다. 젊은 세대들은 다양한 SNS에 자신의 현재 상황을 업로드하기에 꽤 분주하다. 비싼 호텔과 레스토랑에서 무엇을 먹는지를 통해 자신의 경제 능력을 과시하기도 하고 노포 바이브(vibe)가 물씬 풍기는 곳에서의 사진 한 장으로 남다른 사유의 깊이나 개성 넘치는 멋스러움을 드러내기도 하고 고가의 자동차나 명품 걸친 사진 한 장으로 경제적 지위를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학교 사진을 통해 지적 정체성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의 공간은 주로 물질세계가 명명한 수치가 높다. 이에 비해 낡아가는 앨범 속 스냅 사진의 피사체는 어떠한가. 대부분은 오늘날 사진 풍경과 매우 다르다. 스냅 사진의 공간은 별다르지 않은 장소이거나 집안이 대부분이고 특별하다고 여겨질 때는 운동회, 소풍, 여행, 생일 등의 풍경이다. 스냅 사진 속 공간이 새롭지 않아도 그 누구의 것보다 찬란하고 특별한 것은, 그것을 가득 채우는 ‘존재’에 그것이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와의 관계가 생동하는 순간을 포착한 스냅 사진은 바깥에서 찾아볼 수 없는 무한한‘가치의 공간’을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손현숙의 시편은 그러한 스냅 사진과도 같은 풍경을 재현하고 있다. 그의 시는 감상주의나 자아 분열적 글쓰기의 한계를 넘어서는 낡음의 생기가 가득하다.
“스무 살의 손녀/머리가 희끗한 칠십을 바라보는 아들/구순을 훌쩍 넘기신 시어머니/사각 식탁에 모여 아침 식사를 한다.” 이 한 장의 풍경에서는 어떠한 특별함이 눈에 띄지 않는다. 누구에게 과시하기 위한 그 어떤 것도 없다. 그러나 이 풍경이 소중한 것은 손녀, 시어머니, 시어머니의 아들과 ‘나’라는 며느리가 함께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냅 사진의 풍경은 한 장의 사진 속에 스토리를 담고 있다는 데 가치가 있다. 그 가치는 누구의 이야기가 아닌 그들만의 삶의 에피소드이며 ‘관계’가 뜨겁게 피어오르게 하는 불쏘시개가 되기 때문이다. “이게 뭐냐/할머니 곰취예요/이걸 누가 뜯어 왔어?/새벽에 제가 응골* 가서 뜯어 왔지요/정말 새벽에 아범이 응골 가서 뜯어 왔어?/네, 할머니/네, 할머니/젊었을 때는 그 산을 다람쥐처럼 오르내렸는데/나도 좀 델꼬 가지//마주친 눈길들이 먹먹하다/언제부터인가 기억 상자 속에 갇힌 시어머니/하루에도 수없이 그 세월 속으로 들어가 계신다/식사를 마치고 워커를 밀고 가시는 뒷모습이 서럽다.”(「아침 식탁에서는」) 이들의 활기찬 대화는 ‘곰취’에서 시작된다. “어제 저녁 재래시장에서 사온/곰취에 젓가락들”이 향할 때 할머니는‘곰취’의 향수에 젖는다. “이걸 누가 뜯어 왔어?”라는 말에 가족 구성원들은 할머니의 향수를 방해하지 않는다. “새벽에 제가 응골* 가서 뜯어 왔지요”라는 표현에 할머니는 자신의 젊은 날을 추억한다. 할머니의 현재는 낡은 몸이고 그의 정신이 온전하지 않다고 해도 그것은 슬픔이 아니다. 때론 먹먹한 그러나 따스하게 보일 수 있는 경험이다. 그것은 몸에 새긴 기억이자 진한 추억이기 때문이다. 강원도 인제에 소재한 ‘응골’을 중심으로 아들과 어머니의 서사는 ‘곰취’에서 파악된다. 가치란 수치에 있지 않다는 허다한 표현이 아니더라도 손현숙의 시에서 우리는 소중한 가족애가 ‘식탁’과 ‘곰취’로 피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새로움은 어쩌면 스냅 사진 속에 담긴 남다른 스토리를 담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손현숙의 시를 더 살펴보자. “유난히 짜장면을 좋아하던 어머니//짜장 스파게티라면 한 묶음 사들고 오면서” 하시는 말씀에 화자는 “귓전에 맴도는 목소리”를 잊지 못한다. “비싼 짜장면을 왜 사먹어 이것 한 묶음이면 다섯 번은 먹는데” 제대로 한번 대접해 드리지 못한 서러움과 뒤섞여 있다. 손현숙의 기억 속에는 “오늘도 마중 나와 계신”(「스파게티라면」) 어머니가 그립기만 하다. 우리 삶의 문턱에서 파괴되거나 사라져가는 것들은 추억할 줄 아는 능력의 상실에 있는지도 모른다. 추억하고 그것을 곱씹으며 관계의 소중함 속에서 ‘나’의 가치를 찾고 회고를 통한 반성 속에서 현재를 더욱 충실하게 살아가는 힘은 손현숙의 시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렇게 손현숙은 따스함을 발견하려는 데 집중하면서 사라져 가는 것에 안부를 묻는 시인이다. 시인은 이제 현실의 냉엄한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바깥 공간에서도 따스함에 주목하려 한다. “서로 몸이 닿을 듯/틈이 좁혀진”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은 “손바닥에 든 핸드폰”에 시선을 떨구고 가끔 “다음 역을 알리는 전광판을 힐끔” 할 뿐이다. 멀뚱하게 있던 사람들은“유난히 크게 들리는 안내방송”에 미소를 짓는다. 그것은 “‘내리실 때는 빠진 물건이 없나 확인하시고/근심 걱정은 모두 내려놓고 가십시오/제가 모아서 버리도록 하겠습니다’”(「그 사람」) 라는 역장의 말 때문이었다. 세계가 나와 무관한 비현실적 공간이라는 방어적 태도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세계를 하나의 실내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존재의 따스한 한 마디였다. 역장의 한 마디로 무관한 세계는 한순간 아주 잠깐이지만 내밀한 공간(바슐라르)이자 판타스마고리아(발터 벤야민)가 된 것이다. 손현숙의 시에서 확인하듯이 냉혹한 세계는 ‘한 사람’과 ‘한 마디’로도 충분히 환상의 공간이자 현실적인 공간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수치의 가치가 매겨질 수 없는 것들이어서 오히려 가능한지도 모른다. 진정한 가치는 스치는 무수한 일상 속에서 감동과 감격에 주목하려 할 때 비로소 획득되는 것이 아닐까.
‘거기가 공중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의 시가 가슴을 사로잡은 적이 있다. 그의 시에는 “새떼 하나가 날아오고 새떼 하나”는 떠난다는 구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거기가 공중이다”라고 썼다. 새떼가 살자고 날아오르는 공간에서는 가끔 “마주 보고 날아서, 곧장 맞부닥뜨려서, 부리를, 이마를, 가슴뼈를, 죽지”를 다치지만, 시인은 말한다. “공중에서는 새의 몸이 빈다고, 새떼도 큰 몸이 빈다고, 빈 몸들끼리 뚫렸다고, 그러므로 공중(空中)이다, 라고”(위선환, 「새떼를 베끼다」) 가끔 우리는 죽음과 아픔을 추측하거나 상상하려 한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에게 죽음이란 경험되어지거나 상상되는 것이 아니어서 선취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너는 죽음에 대해 가지급금을 하는가?”(레비나스, 시간과 타자)라고 지적한다. 어쩌면 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 죽는다는 것은 관념인지도 모른다.
이명숙은 「시인의 말」에서, “봄이 되면 파릇한 새순에 눈물이 난다. 아들의 이야기를 알리고자 쓰기 시작하던 것이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 됐다.”라고 적었다. 그렇게 시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이명숙의 시는 서른셋이 된 ‘현이’의 동선을 따라 흐르는 엄마의 마음이 관념이 아닌 행동과 삶에 묻어난다. 레비나스는 행동하지 않는 생각과 삶 그리고 앎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체계화된 삶이 아니라 어떻게 타자와 마주하는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본질이라는 의미이다. 위선환과 레비나스에게 죽음은 고통으로만 자리하지 않는다. 세계는 아픈 사람들과 이들을 돌보는 이들의 집합체인지 모른다. 혹은 잠재적으로 아플 수 있는 존재들과 돌보는 이들이 수시로 역할을 바꾸어가며 존재의 의미를 찾는 공간인지도 모른다. “안방 문 빼꼼이 열며/월요일이야, 환하게 웃는” 아들은 “희망교회 앞에서 빵 한 봉지/커피 한 잔 받아들고/체육공원”을 지나고 임학역에 도착한다. “삼십삼 년 지나도록/탯줄을 자르지 못한 현이”는 “처음인 양 매일 가르치고/다시 또 들려주고 해도/그날이 그날로” 돌아오기만 한다. “죽은 귀뚜라미 풀숲에 놓아주며/엄마 찾아가”(「오늘만 있는 사람」) 하는 아이는 나이가 많아도 ‘아이’다. 엄마를 찾아가라는 아이의 한 마디는 아이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 엄마임을 증명한다. 이명숙에게 엄마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 엄마가 되어 아이 동선을 따르는 시인은 “구십 년 넘게 소화되지 못한 응어리”를 “더듬더듬 뒤꼍으로 가 혼잣말 웅얼거리며” 해감하던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는 그렇게 “아무도 없는 응달 속에서”(「해감」) 자신의 아픔과 슬픔을 달랬다. 시인에게 세계는 아픔의 공간이어서 “무거운 짐”(「짊」)을 얹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선환의 시에서처럼 고통과 죽음은 ‘공(空)’이라는 세계 중간(中)에 놓인 것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제아무리 생(生)이 “반 평도 안 되는 철조망 안/누런 白狗 한 마리”가 “그 자리에서 밥 먹고,/똥 싸고/한 발짝 물러/잠”을 자는 겨우 “두 걸음 길이의 하루”(「포도나무집 백구」)이더라도 “엄지손가락에 겹겹이 엉겨붙은 반창고”에도 “비닐 한 장 위에 구부려”(「푸루쥬 살아유」) 앉아 ‘칼끝’에 생을 내맡기는 일이더라도 힘을 내는 것은 돌볼 누군가의 ‘엄마’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명숙의 시에서 삶은 아픔 자체이지만, 그 안에는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하는 윤리적 존재를 마주하게 된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이런 윤리적 주체는 멜랑콜리아(우울증) 환자와 달리 고통과 수치(羞恥)를 정직하게 대면하는 존재(크리스테바)가 되기 때문이다.
‘표류하는 배’와‘물’의 포용력
상상을 한다는 것은, 흐르는 의식의 바다에 몸을 내맡기는 일이다. 그 바다는 ‘나’를 갈매기에게 데려가기도 하고 생계를 해결하려는 어부가 운행하는 한 척의 배를 만나게도 한다. 그 배는 밤이 되어 표류하다가 지옥으로 향하는 ‘카롱의 배’로 둔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의식의 바다에 표류하는 것은 실제 본 적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한다. 그것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국과 바다를 노래하던 랭보의 「취한 배」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랭보는 책에서 읽거나 본 이미지들만을 가지고도 독창적으로 종합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시적 이미지로 가공해냈다. 「취한 배」는 바다를 가장 신비롭게 그려놓고 있으면서 바다의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내 준다. 바다는 자신을 열어 모든 것을 보여주기도 하며 때론 모든 존재를 다르게 보이도록 변화시키기도 하며 스스로를 ‘은폐’하기도 한다.
물은 바슐라르가 상상력의 네 가지 원형이라고 불렀던 4원소 중에서 가장 영혼에 가깝고 그러면서도 물질이며 강력한 변신의 힘을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상상한다는 것은 가장 ‘물’에 가까워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박기을은 상상력의 4원소 가운데 변화무쌍한 ‘물’의 이미지를 가장 잘 떠올리게 하는 시인이다. 시인은 “아무리 추워도 옷깃 하나 여미지 않고/아무리 더워도 땀 한 방울” 안 흘리는 바다를 바라보며 “늘 알몸”인 채로 “인고의 시간”을 보내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얻어맞아 생긴 멍투성이”로도 “실실 웃으며 뒷걸음질 치는/바다”(「바다의 혈액형」)라고 생각한다. 시인은 그러한 바다가 혈액형이 있다면 무엇일까 하고 상상한다. 그에게 바다는 “얼굴색 하나 변함” 없고 어떠한 고통도 감수하는 포용력 가득한 존재다. 바다에 대한 시인의 애정은 여러 시편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수시로 바다에 향하는데 그가 바다로 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존재가 자신을 열어젖히며 포용해주기 때문이다. 화자는 무더위를 피해 십리포를 찾는다. 그곳은 “꼬리 흔들며 안기는 바람”이 있고 “고개 들지 않아도 하늘”이 보는 곳이다. “바다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수 백리를 다녀오고/하늘은 강산 몇 번 바뀌어도/주름살 하나” 없다. 시인은 말한다. “바다에 뿌려지자”라고. 그리하여 “하늘에 안기자”고. 나아가 그는 그것이 바로“파란 물 뼛속까지 젊어지는 영원자의 바램”(「십리포에서」)이라고 말하며, 이제 ‘아라 폭포’를 바라본다. ‘아라 폭포’는 시인의 눈에서 ‘큰바위 소년’이 되는데 소년의 발에는 “멱감기 물장구 묻어”있고 “채찍 상처투성이 등줄기에도/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눈동자”를 지니고 있다. “밤이면 날아오는 물오리”가 “발가락 간질이면” “소년의 깔깔거림”은 “별빛 종소리로 들려”오는 존재로 변화한다. 물의 이미지는 스스로 고정됨이 없이 무엇으로든 변화한다. 시인의 화자는 이제 욕심 없는 존재로 살자고 말한다. “너나 나나 이방인”이며 이 땅에 있는 무엇도 ‘내 것’이 아니기에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욕심부리지 말자고 말이다. “풀어주자 나눠주자 돌려보내자” 그리하여 “헤엄쳐 먼 바다 지날 때/튀어올라 꼬리치는 별빛/만선으로 노래 불러주자”(「정서진」)라고 말한다. 이는 인간은 다스리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공존하는 존재임을 깨닫고 자신과 나머지 존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가고 결국 나 역시 전체 자연의 일부라는 인식으로 나아간다. 바다에 홀로 떠 있는 ‘배’에 선 한 존재자의 형상을 떠올리게 하는(모네, 「인상, 해돋이」, 1987) 이 시는 자신이 포착한 자연의 인상에서 신을 깨닫고 존재의 자리를 확인하게 한다. 박기을의 자연을 보는 새로운 시선은 죽음이 삶의 불행한 결과물로 자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인에게 죽음이라는 원소는 새로운 삶을 탄생시키고 존재를 윤리적 존재로 살아가게 하는 연금술 재료가 된다. 그래서 시인은 “어디쯤일까 내 자리/먼저 가신 분들이 반갑다며/맞이해주실까”(「납골묘」)라고 말할 수 있으며 “전국노래자랑 사회 내려놓으신 송해 선생”이 “지금은 천국노래자랑 기획하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이집트에서 백성들 이끌어낸 모세”도 “소고 잡은 미리암과 춤추는 백성들”도 “다윗과 고라자손”그리고 “삼손 들릴라”(「천국노래자랑」)까지 만날 수 있다. 삶의 부정(否定)으로써 죽음을 검토하지 않을 때 비로소 사유는 유로(流露)할 수 있듯이, 박기을은 죽음을 존재의 삶에서 후경(後景)으로 삼지 않는 탁월함을 보여주고 있다.
공간의 알리바이, 기억
우리가 계속 대상에 대한 경험과 사유, 느낌을 해명하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인식을 정초하고자 하는 시도로 볼 수 있다. 파롤과 에크리튀르는 감각 이후에 주어지는 결과물로서 감각과의 ‘시간 낙차’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불완전하다. 그리하여 존재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반복해서 증언하고 증명하여 본질을 닿으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존재의 기억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들을 부정하는 기제가 되며 객관의 세계에 놓인 것을 모두 주관의 세계로 끌어오게 한다. 박영옥은 현재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먼 기적소리 같은 기억들”(「거미줄」)을 통해 주관의 세계 속 모든 존재를 새롭게 증언해나간다. 그렇게 시인은 모든 존재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 존재의 본질을 새롭게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기억의 기표는 현재라는 시공간의 어떤 대상으로 치환될 수 없으며 새로운 기의를 창출하지도 못한다는 점에서 ‘텅 빈’ 공간을 날아다니는 무엇이다. 그리하여 시인의 시는 언제나 ‘빈자리’가 될 수밖에 없어 아련하고 “가슴이 저릿해”(「녹슬은 자물통」)지는가 보다.
박영옥의 기억은 항상 존재에게서 피어나는데, 그것은 자신의 관계에 대한 열망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신을 스쳐 지나간 인연들에 대한 그리움이자 안부를 묻는 방식이며, 동시에 어린 시절의 ‘자신’과 만나는 행위일 수도 있다. 자를 대고 그린 세계는 존재에 의해 흔들리게 되고 시인은 고정된 세계를 흔드는 존재에게서 기억이 호출되곤 한다. 먼저 그는 퐁듀라는 카페에서 “여자아이가 칭얼칭얼 엄마 손에 이끌려”가고 나서 “플레인몽블랑 1개 카페라떼 1잔”이 테이블 위에 놓이는 장면을 본다. 카페의 불빛이 유리창을 빠져나가면서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부딪치고” 사라지고 다시 부딪치기를 반복할 때, 시인은 카페에서의 “문득 시절 하나가 끔뻑 눈을 크게 뜨고” 다가오는 것을 경험한다. “교복을 입고 바나나빵 테이블 앞에서/어느 소지품을 잡을지 망설이는 소녀”는 친구와 함께 있고 “교복 입은 여학생 둘/할로겐 불빛 아래서 빵 하나 고르는데” 참으로‘많은 웃음’이 새어 나온다. 화자는 “운동화가 보도블록에 닿을 때마다 뽁뽁 소리”(「퐁듀」)를 내는 아이에게서 어린 ‘나’의 풋풋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다. 이제 시인은 “양평 세미원”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시인은 더 어렸을 적의 ‘나’를 마주한다. “태극문 지나 징검다리 위에” 서자, “징검다리 건너 논둑길”을 지나게 된다. 기억은 징검다리에서 피어나는데 학교에 가는 “돌기와집 아이”를 떠올리면서 시작된다. 징검다리 위에서 아이는 “한 발 한 발 개울물”에 젖는다. 그런 아이를 염려하는 시인은“목 치켜들고 내게 다가오던 물뱀의 기억”을 어디에 내려놓아야 할지 고민한다. 그 아이를 도와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아이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상실이며 ‘빈자리’이지만 시인에게 기억은 아무래도 “투명한 봉지 속에” 담긴 “빨주노초파남보”의 색깔 사탕이다. “봉지 안을 뒤적거리던 아이가/무지개를 꽉 움켜잡고 다시”(「화이트데이」) 묻자 ‘나’는 이번에 “보라색”이라고 대답한다. 아이가 느끼는 ‘달콤한 사탕’은 그래서 인생은 달콤하다고 말하는 목소리는 분명 시인 자신의 목소리일 것이다. 박영옥의 화자는 이제 “섬강에 가고 싶다.” 시인에게 섬강은 “봄바람에 날리는 꽃들의 이름/낱낱이 불러보고 싶은” 좋은 날 가고 싶은 곳이고 “오래된 이별처럼 담담해지고 싶은” 슬픈 날에 가는 곳이다. “문득 그리운 날” 가는 곳이고 “소슬해지고 싶은” 외로운 날 그리고 여유 있는 날에도 가고 싶은 희로애락의 장소다. 장소에서의 부딪힘은 ‘기억’을 소환하고 그 기억이 떠난 자리 문득 외로워지지만, “물결 같은 이야기들이 문득 그리운 날”(「섬강에 가고 싶다」)에도 가고 싶은 ‘섬강’은 시인에게는 기억의 자리가 된다. 시인은 상주 주상절리에서도 “여섯 살 아이가 후~ ~우/볼 바람으로 민들레 홀씨를 날려” 보내는 장면을 본다. 빨리 오라는 엄마의 재촉에 “아이는 한 뼘 걸어”가고 아이는 다시 “바다를 향해 볼 바람을 분다.” ‘한 뼘’씩 걸어가는 아이는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시인의 세계는 아이를 찍는 엄마와 “없는 홀씨를/볼 바람으로” 날리며 “한 뼘 한 뼘 한 뼘” 걷는“바다와 아이가 허공에 둥실 뜬다.”(「홀씨 –상주 주상절리-」)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대상’이 자아의 기억으로 ‘현상’되는 것은, 세계란 언제나 ‘자아’ 혹은 ‘의식의 주관성’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박영옥의 기억은 객관화의 세계에 균열을 내며 현재로 소환되어 자기만의 세계 속 새로움으로 재구축되고 있다.
재배치되는 이미지와 ‘정동’의 주체 ‘서곶’
랑시에르는 감성의 분할에서, 예술이란 절대적 독특함을 통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들의 대상들과 이미지들의 ‘재배치’이며 우리가 가진 시선과 태도들의 수정된 결과물이라고 하였다. 즉, 기존의 재료들과 장치들의 방향과 몸, 이미지와 공간, 시간의 관계를 재분배하여 장소를 점유하는 것이 예술이 되는 것이고 이러한 감각의 나눔은 ‘정치’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란 특수한 공간의 구성, 특수한 영역의 분할, 공동의 결정에 속하는 대상들을 다르게 지칭하고 주장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데, 서곶 동인은 시는 일종의 새로움을 창출하는 일에 있어 장소에 고인 특수한 대상과 이미지를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감성의 분할을 촉발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 ‘서곶문학’이 첫발을 뗀 지 벌써 네 돌이 되었다는 것은, 서곶 동인의 예술적 방향이 어느 정도 정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빛이 바랜 곳은 새로운 색을 입히고 비틀린 것은 바르게” 하면서 “지역사회의 맑고 밝은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심응식, 「여는 글」) 문화적 소중한 자산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지역의 여러 문화 활동에 참여하며 ‘몸’의 참여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 동인의 시는 성실하게 삶을 반추하고 있으며 시가 시대적․사회적 산물임을 잊지 않으면서도 강한‘시정신’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시에 드러난 철학적 힘이 삶의 방향을 지시하고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며 지역의 증인이자 목격자로 ‘정동’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 동인의 시는 내용이냐 형식이냐의 사이(in-between)에서 평형감각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다. 물론 이들의 시에선 재기발랄한 요설과 패기를 살펴볼 수 없지만, 깊은 고뇌와 오랜 여운의 맛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서곶 동인은 각자 모두 자신의 방식으로 세계를 구축한 ‘한 알의 모래알’이지만, 이들은 하나의 미점(米點)이 되어 거대한 하늘(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을 그려내고 있다.
심응식의 시는 존재와 관계 맺는 과정에서 형성된 실내공간과 집이라는 세계가 공적인 영역의 대립적인 이데올로기로 인해 억압당하는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파괴되는 ‘내밀의 공간’을 다시 형성한다. 실내공간과 집의 파괴는 ‘나’의 ‘관계’의 파괴이자 인간 소외를 유발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의 시는 낡음을 철거하고 새로움을 건조하는 도시 문명의 ‘언캐니’ 방식을 뒤흔든다. 시인은 현대문명이 새로움을 주조하는 방식에 무의식적으로 구식 물건을 정확히 연결시키며 천박한 물질세계로부터 우리의 시선을 재배치하려 한다. “집이란 집 다 헐었다//마구리의 빨간 자수꽃무늬 베개, 자개 떨어진 호마이카 교자상 따위/단물 빠져 땟국 쩐 쭉정이들 모여 단결투쟁/허공에 주먹질하는 것 같다/그 사이로 절반 남짓 찢어진 산수화”(「폭염주의보」)가 보인다. 투쟁의 현장은 자기의 세계가 파괴된 폐허이다. 그 공간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을 값싼 물질로 흥정하려는 이들은 이들이 몇 푼 더 받자는 것으로 그들의 세계와 공간을 폄훼한다. ‘집’과 실내공간의 상실은 프로이트가 말한 거세에 대한 두려움이다. 집을 메워준 오브제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의 정서가 하나로 통합된 하나의 양식이자 형태였다. 이것은 수적 가치와 관계없이 ‘나’와 유기적 통합을 이룬 영역이다. 오브제와 존재는 내적인 ‘합’이 도출한 외적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찢어진 산수화”는 “만수 형네 집에 있던” 그림은 나의 찢김이며 “청라국제도시로 이사 갈 때 어쩌다 끼지” 못한 그림은 나 자신의 일부의 버려짐이다. “마구리의 빨간 자수꽃무늬 베개”와 “자개 떨어진 호마이카 교자상”은 이제‘존재’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존재와의 관계성을 잃은 교자상과 베개는 이제 어떤 의미와 목적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에서“빈 터서리들”인 것이다. 사실 낡음은 아우라의 다른 이름일 수 있고 그것은 현재의 ‘나’를 과거와 단절되지 않은 연속체로 만드는 것들이다. 스토리를 배태하고 ‘나’의 세계를 독창적으로 만들어주는 물질이며 바깥에는 없는 것이다. 그것과의 단절은 추억과 존재, 고인 시간을 버리는 것이다. 심응식은 그것의 상실이 얼마나 큰 세계를 잃는 것인지를 일러주고 있다.
시인은 “여름에 입주한다는/신성한 새집을 올려다” 본다. “그 밑으로 붉은 벽돌담장/불두화 하얀 고염주네” 있고 “동네 첫 번째 이층양옥 딸고만네 집/여치네 반짝이는 파란 세라믹기와지붕/중풍 맞은 왕표씨/네 살배기 손자 놈 오줌발로 샌다는 지붕/초록색 천막 덮고 폐타이어 올려놓은 거//감나무 꼭대기 삭정이보다 높은 사십층/옥상에 올라앉은 쪽달/시퍼렇게 무진장한 한들벌 눈알 쪼며/탈탈 낮을 털고 있는 거//다 보인다.”(「한들 아파트 1」) 심응식의 화자는 담장과 지붕만으로도 누구네 집인지를 분간할 수 있다. ‘고염주네’, ‘딸고만네’, ‘왕표씨네’ 집은 존재와 오브제 사이에 존재하는 복합적 관계의 결정체로서 모든 감각이 살아 숨 쉬는 ‘살아있는 공간’이라면, 아파트는 과연 어떠한가. 모든 존재가 동일한 창의 크기와 방향을 가지고 한 방향을 보게 만드는 것, 내부와 외부가 동일한 공간에 정주하게 하는 것은 그들의 경험을 상자 안에 담아 통제하려는 어떤 악마적 힘의 작용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심응식은 이러한 ‘언캐니’ 상황을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감각을 되살리고 도시의 비극적 운명을 담아내면서 정체성의 확립을 촉구하는 것이다.
‘살아간다’, ‘산다’, ‘살 수 있음’에서 지시하는 살아있다(生)는 것은 무엇일까?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에서, 누군가는 심장이 뛰어서, 감각으로 보고 듣고 말할 수 있어서, 의식이 있어서 등으로 다양한 답을 내놓을 테지만, 과학적으로 생물 즉 생명체가 무생물과 구분되는 특징은 유전과 증식을 한다는 것이다. 문학에 과학적인 생명의 개념을 대입한다면, 삶은 관계 속에서 더 나은 존재로 진화하고 서사를 쌓아가며 존재와의 관계를 확장해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심응식의 시는 무수한 삶의 이야기가 고인 ‘터’의 중요성을 그 공간에 자리한 오브제와의 관계들에서 확인해주고 있다. “갯내 독한 똥섬바람 불어와 순해지는 동네/못자리물 가득한 수렁배미 올챙이다리 어설퍼지면/엄마 따라 쑥 뜯고 무릇 캤다//말갛게 씻어 송기 겅그레 깐 가마솥에 안치고/도드미로 바쳐낸 엿기름물 부어 진득이 고아낼 때/탁탁 불똥 튀는 아궁이 앞, 한 이틀/엄마 아버지 두런두런 장리쌀얘기/양은세숫대야에 물 떠다 놓아도 아랫목은 까맣게 뜨거웠다//우리는 부엌으로 방으로 괜히 분주한 신바람 피웠다//대접 가득 곤 무릇에 한 숟가락 콩가루 얹으면/아리고 고소한//그 봄날”(「노구메」)이었던 시절이 시인에게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의 시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축(부모, 오브제)의 재배치를 통해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가며 현재의 나를 형성한 나의 일부를 붙잡는 사건으로 등극한다. 우리의 경험은 반복될 수도 없으며 같을 수도 없음에도 현대인의 삶은 모두가 같은 삶을 살도록 강요받는 듯하다. 우리는 작은 가게보다 대형마트에 간다. 그곳에서는 어떤 관계와 스토리가 생겨날 수 없다. 의미가 결여된 장소에서 우리는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는다. 관계는 절단되고 억압된다. 번호표와 수치로 나의 정체를 드러낸다. 이러한 억압된 일상의 반복은 ‘나’를 잃는 일로서, 심응식은 잃어가는 고향과 터전은 새로움의 공간으로 재탄생되는 기적이 아니라 추억의 근거를 지우는 일로 ‘불안한 일의 조짐’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시인은 “마음 눅눅한 저녁 무렵 동네 한 바퀴” 돌면서 “박 사장네 롯데아이스크림 냉동고, 털보네 공장은 벌써 헐리고 이사 간 집 대문에 빨간 스프레이로 엑스 자 그려놓고 철거라 쓰인 것”(「봄 밤」)을 보고 더욱 마음이 착잡해진다. 그곳은 어머니의 꽃밭이 있는 곳이고 어머니와 가족 구성원의 추억이 담긴(「봄 밤」, 「밀장떡」) 곳이다. ‘터’를 잃는다는 것은, “싱싱한 아름드리역사가 베”(「간약굴댁」)진 것이며 개인의 역사가 부정당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심응식은 「시인의 말」에서, “도시를 개발하는 파괴를 나는 보았다. 전장의 그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눈곱만큼의 빈틈도 없이 철저하게 소멸”시켰고 “마을은 볏짚이 타듯 그렇게 사위”고 마을 사람들은 “재티처럼 시나브로 흩어졌다.”라고 하였다. 이제 “뼛속까지 익숙한 것들의 북새통 속에 나는 생의 누추한 도구를 짊어지고” 떠난다. 시인의“저 고급스러운 개발을 위하여 손때 전 기억의 내준 채 지금 나는 사육되는 중”이라는 표현은 한 개인의 세계와 역사가 산업과 공적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되는 세계와 관련된다. 서곶 동인의 시는 작지만 온 세계가 들어찬 ‘한 알의 모래’를 오롯이 보여준다. 그들의 시는 형식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현실과 유리되지 않고 새롭지는 않아도 바른 정체성과 주체성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지켜내려 한다. 세계가 귀족적인 취향으로 제아무리 위장한다고 해도 그것은 미적 가치를 가지지 않은 산업 생산물일 뿐이며, 이러한 포장과 환상이 모든 것을 겉치레로 만들고 키치화한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진정한 가치를 전하며 토실토실해지는 자본의 토끼를 감시하는 서곶문학이 내년 이맘때 더 큰 보람과 수확이 있기를 바란다. 시쓰기는 아우라의 흔적을 기록하는 나와 가족, 이웃과 공동체의 역사를 기억하는 일이다. 미점(米點)과도 같은 이들이 더 많아져 아름다운 점묘화가 제대로 완성되기를 바라는 마음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