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뒤늦게 자동차업계에 진출한 크라이슬러는 제너럴 모터스와 포드의 뒤를이어 미국 자동차 업계에서 세 번째를 달리고 있다. 그럴수 있었던 것은 크라이슬러가 처음 세워진 70여 년 전부터 '기술로 앞선다.'는 자신들만의 철학을 지켜 왔기 때문이다. 크라이슬러에는 프레드 제더를 비롯한 미국에서 손꼽히는 많은 기술자들이 있어, 미국 자동차 업계의 기술을 이끌어 왔다. 그들은 세계 최초로 간편하고 안전한 전자 점화 장치를 개발했고, 개폐식 유체변속기, 현대식 전압 조절장치, 수압 브레이크 등을 만들어 냈다. 70년대 말과 90년대 초 경영악화로 파산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연비가 좋은 K카, 세계 최초의 미니밴 캐러밴, 캡 포워드 다지인의 LH세단 등혁신모델을 내놓으며 재기에 성공, 세계적인 메이커로 자리잡았다. 현재 크라이슬러, 플리머드, 이글, 지프, 다지 등 5가지 디비전을 갖추고 전 세계 100여개국에서 소형차부터 최고급 럭셔리카, 미니밴, SUV 및 트럭 등 다양한 모델을 생산한다. 사람들이 사고 싶어하고, 즐겁게 운전할 수 있으며, 다시 갖고 싶은 차를 만든다’는 기업이념에 따라 고객이 원하는 모델을 발빠르게 만들고 기술 본위의 전통을 이어온 것이 성공 비결이다. 크라이슬러의 98년 판매량은 286만대. 세계 1, 2위를 점하는 GM(880만)과 포드(690만)보다는 못하지만 세계 5위에 랭크되는 규모다. 99년에는 벤츠와 합병한 다임러 크라이슬러가 480만 대를 판매해 전년보다 7% 늘어나 역대 최고 판매가록을 세웠다.
설립년도 |
1925년 |
본사 소재지 |
Highland Park / Mcgn |
대표자 |
Robert J. Eaton |
종업원수 |
94,300 ('97년 평균) |
총생산대수/승용차 |
1,809,342 / 433,631 ('98년) |
경 영 지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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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결산 기준 |
'97.12 |
매출액(백만$) |
61,147 |
세후 순익(백만$) |
2,805 |
총자본(백만$) |
60,418 |
자기자본(백만$) |
11,362 |
자본,기술 제휴업체 |
- Eurostar(오스트리아, 50%) - NEWVENT.GEAR(미,64%) - Officine Alfieri - Maserati SPA(이,15.3%) - 北京汽車(중,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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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기관차 엔지니어였던 아버지 덕에 어려서부터 기계에 대한 관심이 컸던 월터 P 크라이슬러는 한때 GM뷰익의 사업부 책임자로 일했다. 그는 GM사에서 일하는 동안 강철로 된 자동차 보디를 개발하고, 자동차 보디 전문 공급어체를 많이 사들이라고 제안하는등 장기적인 사업계획을 세우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수석 부사장으로 승진, GM 전공장의 생산관리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1919년 듀런트와의 불화가 심해지자 GM을 나와 자신의 차를 만들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크라이슬러는 1924년 첫 모델 ‘크라이슬러 6(Chrysler Six)’를 개발한다. 그는 GM을 나온 후 윌리스(후에 지프를 만들어 유명해진 회사다), 맥스웰 등 부도위기에 몰린 중소 메이커의 구조조정을 도와 ‘기업 의사’(Company Doctor)라는 별명을 갖기도 했는데, 모델6는 그 시절에 만들어졌다. 유명한 일화에 따르면, 크라이슬러는 이 차를 뉴욕에서 열린 모터쇼에 전시하려 했지만 아직 양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해서 그는 쇼장으로 통하는 길에 있는 뉴욕 코모도어 호텔 로비에 차를 전시해 모터쇼 관람객이 볼 수 있게 했고, 다음 해인 6월 맥스웰사를 인수해 자신의 이름을 딴 "크라이슬러 자동차회사"를 차리게 되었다. 모델6는 양산된 첫 해 3만2천대나 팔렸다. 프레드 제더, 오웬 스켈턴, 칼 브리어 등 세 명의 엔지니어와 함께 개발한 6기통짜리 고압축 엔진(압축비 4.7:1, 당시는 4:1이 흔했다)을 얹고 4바퀴 유압 브레이크, 알루미늄 피스턴, 강제윤활, 에어 클리너와 오일 필터 등 고급부품을 많이 갖추고도 값이 싼 것이 장점이었다. 1926년 임페리얼80을 내놓은데 이어 50, 60, 70 (차 이름에 붙은 숫자는 최고속도를 뜻함)등 높은 기술력을 담은 차종을 잇따라 선보이며 당시 패커드, 캐딜락, 링컨 등 럭셔리카와 고급차시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했다. 1928년에는 인디 500에 진출하며 퍼포먼스의 향상을 위해 노력한다. 그에 따라 2년 뒤에는 112마력의 엔진을 개발해 탑재하는 등 엔진의 파워를 지속적으로 늘려나갔고, 개량된 브레이크와 더 정확한 조타장치를 양산차에 적용한다. 또한 조절식 시트와 AT 등의 옵션으로 준비하는 등 고급차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높여나갔다.
1928년에는 닷지, 플리머스, 데소토 등 중소 자동차회사를 대거 인수해 화제를 모았다. 그때의 미국 자동차시장은 대중차를 앞세운 포드와 고급 대형차를 주로 만드는 GM이 판매의 60%를 차지하고 많은 중소업체가 나머지 40%를 점유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크라이슬러는 값싼 대중차를 만드는 플리머드와 미들 클래스의 다지, 가장 윗급에 크라이슬러 디비전을 갖추고, 다지에 대한 GM의 판매간섭을 없애기 위해 약간 낮은 가격대의 데소토를 준비했다. 그 결과 이 해 크라이슬러는 시장점유율 10%를 확보하며 업계 3위로 부상했다.
1930년대 들어서는 디자인에도 눈을 돌려 당시로는 획기적인 스타일이었던 에어플로와 에어스트림을 발표했다. 이미 1927년부터 항공역학을 연구하기 시작한 칼 브리어(Carl Breer)는 그 상상력의 결과로 1934년 에어 플로우(Airflow:기류)라는 새 모델을 선보였는데, 이 차는 풍동실험을 통해 공기저항을 최소한으로 줄인 유선형 모델로 다른 메이커들은 물론 향후 크라이슬러의 차량 개발에도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나 디자인이 너무 급진적이어서 판매에 실패했고, 반면 고전적인 직선 보디에 적당히 굴곡을 넣은 에어스트림(35년)이 잘 팔렸다. 1935년에 카우프먼 T. 켈러가 경영을 맡으면서 로열과 인저, 커스텀, 뉴요커 등이 연이어 등장했다. 이 모델들의 인기에 힘입어 1937년 크라이슬러의 시장 점유율은 25%까지 뛰어올라 포드를 제치고 업계 2위의 자리를 굳혔다. 이러한 구도는 2차대전 전까지 이어졌다. 창업주 월터 P. 크라이슬러는 1940년 65세로 세상을 떴다. 1940년대 후반들어 크라이슬러는 ‘뷰티플 크라이슬러’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의 차들을 만들어냈다. 타운 & 컨트리는 이때 출시되어 인기를 모았다.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크라이슬러는 다른 메이커들처럼 전쟁을 위한 산업에 몰두해야 했다. 참고로 크라이슬러사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지프의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2차대전 직후에는 민간용 자동차 생산을 시작한다. 그러나 50년대 초반 페이스 리프트 수준에 그친 크라이슬러의 차들은 시장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해 포드에게 2위 자리를 내주었다. 그런 가운데도 1951년 V8 오버헤드 밸브의 5,424cc 300마력을 가진 헤미 엔진을 장착한 크라이슬러 300으로 시작된 레터시리즈를 만들어냈는데, 이 차는 경쟁회사의 V8 엔진보다 출력이 20% 정도 높고, 드라이버빌리티, 스타일링에서 인정을 받았으며 NASCAR에서도 큰 활약을 보였다. 하지만 소형차 위주의 시장에서 고급 대형차 시장으로 옮겨가는 와중에서 위축되기 시작한 크라이슬러는 59년과 60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며 위기를 맞게 된다.
60년대 미국에서는 머슬 카(Muscle Car)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닷지에서 챌린저를 필두로 이같은 붐에 대응한다. 61년 크라이슬러에 이어 경영권을 장악한 타운센드가 사장으로 취임하며 경영혁신이 추진돼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된다. 판매조직을 개편하고 상품라인을 확대해 61년 77만대에 불과했던 생산량이 68년에는 200만대로 올라갔고 판매도 급증 추세를 걸었다. 순조롭게 성장을 거듭한 크라이슬러는 금융회사와 부동산회사를 설립하고 유럽과 남미에 투자를 확대해 사업 다각화를 꾀하게 되었다. 71년 미쓰비시 자동차에 15%의 자본참여를 하는 등 해외투자에 적극적이었던 크라이슬러에 닥친 또하나의 시련은 오일쇼크다.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자금압박에 몰리고 있던 79년 제2차 오일쇼크는 헤어날 수 없는 큰 시련으로 다가왔다.
불황과 유럽사업의 경영악화가 계속되며 부도위기까지 몰리던 크라이슬러는 적자규모가 무려 11억 달러에 달했다. 이런 위기 속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사람이 아이아코카다. 미국에서는 경제대통령이라는 애칭까지 받고있는 경영의 귀재 아이아코카는 35명이나 되는 부사장 가운데 33명을 해임하고 8천500명의 근로자를 해고하는 등 철저한 감량경영으로 체질개선을 추진해나갔다. 자신의 연봉을 1달러로 묶고 종업원 연봉도 일률적으로 10% 감봉하는 등 극약처방을 과감히 썼다. 그는 팔리지 않는 자동차 라인은 모두 정리하고 해외사업도 매각하는 등 대대적인 경영합리화 정책을 밀어붙였다. 경영진의 회생노력은 노조의 자발적인 희생을 유도했다. 79년에서 81년 사이에 노조는 세차례의 임금인하, 생계비 수당 포기 등에 합의했다. 노조의 자발적인 희생은 연방정부의 융자를 얻어낼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연방정부로부터 12억 달러의 자금을 90년까지 갚는다는 조건으로 얻어낸 크라이슬러는 81년 17억 1천만 달러 적자에서 82년에는 1억 7천만 달러의 흑자로 전환하고 83년 예정보다 7년이나 빠르게 융자금 12억 달러를 상환했다. 이와 함께 1981년에는 앞바퀴굴림으로 연비가 뛰어나고 실내 공간을 넓힌 K카 개발을 추진해 플리머스 릴라이언튼, 닷지 에리즈 등을 선보였다. ‘연비의 경제성’을 내세운 마케팅 전략이 적중해 1983년 크라이슬러는 140만대의 차를 생산, 세계 8위 메이커로 떠오른다. 그러나 크라이슬러재기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모델은 모엇보다도 크라이슬러 타운 앤드 컨트리, 플리머드 보이저, 다지 캐러밴 등의 미니밴 삼총사다. 미니밴 계획은 78년 아이어코카의 회장 취임과 함께 본격화되었는데, 기존의 스테이션 왜건보다 운전과 주차가 쉽고 실내공간의 효율성과 승차감이 뛰어난 차를 만든다는 취지였다. 결국 84년 세계 최초의 미니밴인 닷지 캐러밴이 탄생,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전세계에 미니밴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1987년부터는 AMC를 인수로 지프 디비전을 더해 SUV와 미니밴 등 RV시장에서 강자로 부상한다. AMC는 1954년 탄생한 회사로 70년 카이저 지프를 흡수, 4WD의 원조격인 지프를 생산하던 회사다(지프는 2차대전 때 군수용차로 명성을 떨친 4WD의 이름으로 이 차를 만들던 윌리스사가 53년 카이저사로 흡수되었다).
90년대 초 크라이슬러는 또 한 번의 위기를 맞는다. 새차개발에 소홀하고 항공기 메이커 인수 등 비정상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91년 크라이슬러의 미국내 시장점유율은 8.5%로 떨어지고 일본 혼다에게 3위 자리를 내주게 된 것이다. 크라이슬러는 리 아이아코카 회장 후임으로 로버트 이튼 회장이 경영권을 이어 받는다. 이튼 회장은 크라이슬러의 기술력 개발에 전력을 기울였다. 90년 초부터 2스트로크 엔진, 하이브리드 카 등 다양한 컨셉트카를 선보였으며 1993년 세계 최대규모의 기술연구센터를 준공하는 등 기술본위의 메이커로 입시를 세웠다. 크라이슬러 특유의 플랫폼 팀 조직이나 캡 포워드 디자인 등이 확립된 것도 바로 이때부터다. 혼다의 사업운영 전반에 대해 2년간 치밀한 연구 끝에 탄생한 1993년 출시된 LH카 시리즈는 크라이슬러 콩코드, 다지 인트레피드, 이글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데뷔한 중형 세단 시리즈로 캡 포워드 방식―캐빈룸(실내공간)을 보네트 중간까지 바짝 늘인 디자인―을 써 실내공간이 넓고 개성 있는 스타일, 넉넉한 성능으로 인기가 높았다. 또 개발기간을 39개월로 단축시켜 개발비를 줄인 네온을 8,975달러에 파는 등 최근에는 개발기간과 개발비를 줄여 가격책정에 응용하는 자동차 가격파괴운동을 주도하는 등 ‘일본차 킬러’라는 닉네임도 갖게 되었다. 크라이슬러는 또 소형차 부문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 미쓰비시와 제휴, 87년 이글 디비전을 창설하고 서미트, 탈론 등을 만들기도 했다. 차례의 위기를 슬기롭게 넘긴 크라이슬러는 기술력 향상에 전력을 기울였다. 디트로이트 북쪽 근교에 위치한 크라이슬러 기술연구센터는 약 500에이커의 부지에 고공실험실, 318개 풍동, 자동차설계에 필요한 고성능 컴퓨터, 시제품 생산시설 등을 갖추고 7천여 명의 디자이너와 엔지니어가 새차 개발에 전념한다.
98년 11월 크라이슬러는 핵탄두 같은 뉴스를 발표한다. 메르세데스 벤츠와 합병으로 다임러-크라이슬러가 정식 설립됨으로써 지역적으로나 생산라인 측면에서 균형을 맞춘 가장 이상적인 클로벌 기업으로 탄생된다. 다임러-크라이슬러는 거대한 두 기업의 합병 이후 크라이슬러 직원이 독일에서, 벤츠 직원이 미국에서 근무하는 등 기업간의 이질감을 극복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합병에 따른 어려움도 겪었다. 그러나 다임러크라이슬러는 작년에 1천50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해 98년보다 12% 늘어나는 등 합병을 통한 효과가 서서히 빛을 발하고 있고 최근 미쓰비시와 전략적 제휴를 성사시켜 세계 3위의 자동차 메이커(생산대수 기준)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크라이슬러는 그간 미국 빅3의 다른 두 회사에 비해 해외시장 진출이 부진했다. 60∼70년대 프랑스 심카, 탈보 등의 흡수·합병을 시도했으나 70년대 말 경영난 타개를 위해 모두 정리했고, 87년에는 람보르기니를 인수했다가 94년 인도네시아 메이커에 되팔았다(람보르기니는 98년에 폴크스바겐으로 넘어갔다). 포드의 월드카 정책이 세계 각지의 자회사와 협력사 등 굳건한 판매망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크라이슬러의 이같은 실패는 뼈아프다. 그러나 올 11월 벤츠와의 합병을 통해 다임러- 크라이슬러사가 정식 설립됨으로써 이제 GM, 포드와도 대등한 경쟁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벤츠와 크라이슬러의 합병은 주력시장을 넓힘과 동시에 다양한 모델 레인지로 시장을 공략하는 시너지 효과까지 갖고 있어 부동의 1, 2위를 굳히고 있는 GM과 포드를 위협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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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내용]
크라이슬러는 미시건주 오번 힐(Auburn Hills)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각기 다른 이름의 차를 만들어내는 4개의 회사로 분할되어 있다. 또한 자동차 공업도시 디트로이트를 중심으로 차체 조립 및 엔진, 트랜스미션 등 20여개의 생산기지를 갖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 4개의 디비전에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차를 생산하고 있다. 제품 브랜드는 중형차급 Chrysler, 저가격 소형차급의 Plymouth/Dodge, 4WD 차량의 Jeep/Eagle이고 상용차는 미니밴과 SUV등 소형 트럭만 생산하고 중.대형 트럭은 생산하지 않으며, Mitsubishi, Fiat, Renault, Maserati등에서 OEM으로 완성차를 공급 받아 제품라인 체제를 보강하고 있다. 주요 자동차 브랜드로는 메르세데스 벤츠(Mercedes-Benz), 크라이슬러(Chrysler), 지프(Jeep), 닷지(Dodge), 플리머스(Plymouth), 스마트(Smart), 프라이트리너(Freightliner), 스털링(Sterling), 세트라(Setra) 등이 있다. 자동차 사업체 경영자원을 집중하기 위해 비 자동차사업을 매각하거나 축소하는 합리화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70년대 경영악화에 따라 감량 경영을 목적으로 멕시코를 제외한 전 해외사업을 정리 하였고, 80년 미국 의존율리 76%에서 91년 84%로 빅3중 해외 의존율이 가장 적다. 1991년 동사의 전세계 공장 출고 대수는 90년보다 6%하락한 187만대로 계속 부진을 보이고, 미국내 판매대수도 144만대로 전년비 12% 감소하여 M/S는 11.5%를 유지하였다.
[국내 사업내용]
우성유통과 손잡고 국내에 진출했다가 지난 96년 가을부터는 크라이슬러 한국판매(주)로 직판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주)신원 JMC와 (주)혜인을 메가딜러로 선정해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친 덕에 98년까지 국내 수입차시장에서 선두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소형차 네온부터 스트라투스, 비전, 뉴요커 등 다양한 차급의 승용차와 캐러밴, 그랜드 체로키와 랭글러 등 인기 RV를 국내에 소개하고 파격적인 차값 할인, 전국 AS망 구축 등으로 고객 서비스에도 심혈을 기울인 결과였다. IMF로 수입차시장이 크게 위축된 98년에도 그 해 10월까지 670대를 판매, 시장점유율 1위(31.2%)를 기록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작년에는 BMW에 밀려 2위를 기록했다. 환율인상으로 수입차값이 크게 올라 주력차종이었던 스트라투스의 판매를 잠시 중단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크라이슬러는 작년 말부터 메가딜러 없이 직접 영업에 나서고 있다. 단일규모로 국내에서 가장 큰 서울 청담동 매장(약 300여 평)의 전시장을 갖추었고 전국 12개 도시에 전시장이 있다.
한편 97년 2월에는 경기도 화성군에 자사의 순정부품을 취급하는 모파부품물류센터를 열었다. 모파(Mopar)는 크라이슬러에 순정부품을 공급하는 계열사로, 수입자동차업체가 전문 부품센터를 세운 것은 처음이었다. 이 센터는 건평 700평 규모에 1만여 점의 관련부품을 갖추고 전국 AS센터로 48시간 내에 배송한다. 필요한 부품을 값싸고 빠르게 구할 수 있어 고객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벤츠와 크라이슬러가 합병한 이후로 크라이슬러 코리아는 다임러-크라이슬러 한국(주)으로 상호를 바꾸어 활동하고 있지만 벤츠의 판매망은 한성자동차가 계속 관리하고 있다. RV쪽에 강한 크라이슬러와 고급차 분야에 강세인 벤츠의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당분간은 이득일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크라이슬러의 자회사]
■ 자회시 개요
크라이슬러 - 미니밴과 고급 세단 위주의 메이커다. 크라이슬러 이름으로 만들어지는 차는 300M, LHS, 콩코드, 시러스, 세브링 쿠페와 컨버터블, 그리고 미니밴은 타운 & 컨트리와 보이저가 있다.
닷지 - 정열적이며 스포츠성 강한 승용 모델과 램 픽업 등이 중심이다. 네온, 스트라투스, 어벤저, 인트레피드, 바이퍼 등의 승용 라인업과 캐러밴, 다코다, 두란고, 램 밴·왜건을 만들어내고 있다.
플리머스 - 대중적인 모델을 주로 생산하고 있다. 소형차 네온(Neon), 중형 4도어 세단 브리즈(Breeze), 미니밴 보이저(Voyager), 라이코스 광고에도 나오는 모델로 감각적인 디자인이 돋보이는 2도어 오픈 로드스터 프라울러(Prowler)까지 네가지 모델을 만든다.
지프 - 랭글러, 체로키, 그랜드 체로키까지 3가지 모델만 생산한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각종 이벤트를 통해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고 있으며, 오프로드 마니아를 위한 전용 액세서리도 소비자들에게 인기다.
[신합병회사의 특징]
다임러 크라이슬러의 성립에 의해 세계 3위의 국제적 자동차기업이 형성 되었으며, 많은지역,제품분야에 있어서 세계의 자동차 시장의 성장을 개척하는 지위를 확보 하였다. 벤츠와 크라이슬러의 매출액은 합계 약 1,300억달러(2,340억 마르크), 세전이익 69억달러(125억 마르크)가 된다. 1997년 양사의 실적치를 합계하면 캐쉬 플로 127억달러(228억 마르크), 연구개발비 71억달러(128억 마르크), 종업원 42.1만명이 된다. 양사는 각각 다른 시장의 리더이며, 합병은 최적의 만남이다. 양사는 고기능 스탭. 인기 제품을 갖고 있으나, 시장과 지역이 서로 다르다. 양사는 완전히 상호보완하는 세계 클라스 브랜드의 제품범위를 가지고 있다. "우리들은 이미 브랜드와 다른 아이덴티티를 유지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양사가 공통의 문화와 목적을 갖는다는 것이다. 즉 혁신적이고 고품질 평가를 받는 세계적 승용차,트럭을 제조함에 의해 고객서비스 제공에 집중하고, 주주의 자산증대에 노력한다"(Robert j.Eaton, 클라이슬러 회장) 양자 상호 설비,능력, 인프라스트럭처를 활용해 직접적인 성장기회를 가지고 있다. 성숙시장은 원래 아시아를 비롯해 다른 신흥시장에서의 성장을 목표로 했던 제품전략을 취한다. 합병 1년째가 되는 1999년에는 다임러-클라이슬러는 부품,기술의 교환, 구매력의 통합, 유통로지스틱스의 분담에 의해 14억 달러(25억 마르크)의 이익 획득이 기대된다. 이러한 사업 통합 효과는 공장 폐쇄나 정리해고를 포함한 것이 아니며, 현재 진행중인 코스트삭감 프로그램도 포함된 것이 아니다. 중기적인 통합 효과는 개발, 제조분야의 노하우 분할에 의한 것으로, 3~5년내 연간 30억달러(50억 마르크)의 이익이 기대된다. 다임러-클라이슬러는 세계속에서 거의 대부분의 제품 세그먼트를 커버하는 강력한 브랜드자산을 갖게되며, 그자산을 유지.강화할 계획이다.
[특유의 조직과 기술]
■ 플랫폼 팀(Platform Team)
1989년 크라이슬러가 처음으로 주장한 플랫폼 팀 조직체계는 자동차 개발에 있어서 기존에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던 작업 방식을 탈피해 팀 구성원들이 동시에 작업하는 체제를 의미한다. 팀 구성원들은 자동차의 일부분에만 전념하는 것이 라니라 전체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러한 조직 구조는 차량의 개발에 요구되는 시간을 줄여, 적은 비용으로도 보다 나은 품질의 차를 생산하는 이점을 지니고 있다. 플랫폼 조직은 디자인, 엔지니어링, 구매, 생산 및 판매에 관련된 모든 구성원이 자동차 개발의 최초 단계에서부터 계획, 개발 그리고 신제품의 출시에 이르기까지 공동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각 팀별로 완전한 하나의 소공장처럼 기능한다. 크라이슬러는 이러한 플랫폼 팀 조직 운영을 통해 기존에 5년이 소요되던 신차 개발기간을 약 3년 내지는 그 미만으로 당길 수 있었다. 과거의 경우 자동차의 생산과정에 있어서 디자이너와 엔지니어간에는 자동차 개발에 관련한 서로의 의견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진행해왔기 때문에 디자이너가 의도한 대로 엔지니어가 xck를 마들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이는 다시 엔지니어에게 되돌려져 재제작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당연히 개발기간이 길어지게 되어 현재의 플랫폼 팀 방식과 비교하면 효율성이 상당히 떨어진다. 크라이슬러는 현재 소형차, 대형차, Jeep, 트럭 및 미니밴의 5개 플랫폼 팀 조직을 갖추고 있다. 닷지 바이퍼(Viper)가 이러한 새로운 팀제를 통해 처음 개발된 모델이며, 바이퍼의 성공에 뒤이어 1992년 지프 그랜드 체로키, 혁신적인 캡 포워드 디자인의 새로운 패밀리 세단등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크라이슬러 콩코드, 닷지 인트레피드, 이글 비전 등 3형제차였다. 닷지 어밴저나 스트라투스 역시 플랫폼 팀에 의한 작품이다. 크라이슬러 본사의 복합단지는 이러한 플랫폼 팀 조직을 그대로 잘 반영하고 있다. 1986년 미국 내 주요 자동차 메이커 중 최초로 자동차의 디자인, 제품기획, 엔지니어링, 생산 및 판매 기능이 한지붕 아래에서 이루어질 크라이슬러 기술센터(CTC:Chrysler Technology Center)의 건설을 시작했고, 로버트 이튼 크라이슬러 회장은 1996년 6월 5일 기술센터 옆으로 2층 높이의 크라이슬러 5각형 별로 외관을 장식한 15층 규모의 본관 건물 완공식을 가졌다. 이러한 첨단 시설은 크라이슬러가 저렴한 생산비용과 함께 차량 1대당 수익면에서 업계 최고를 성취할 수 있게 했다.
■ 캡 포워드(Cab Forward) 디자인
캡 포워드는 자동차 전체 실내 공간이 앞방향으로 이동된 상태로, 전면 유리가 앞바퀴의 상부 위치에 걸릴 정도로 연장된 것이다. 크라이슬러는 이처럼 현대적이고 새로운 자도차 구조를 1993년 크라이슬러 콩코드, 닷지 인트레피드와 이글 비전에 처음으로 도입했다. 캡 포워드 디자인은 내부 공간이 연장되어 그만큼 공간이 확충되는 효과를 제공한다. 동시에 후미쪽으로 더 붙여 차체의 오버행은 줄이고, 축간 거리는 늘어나 안정된 하체로 앞선 주행감각과 조작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승·하차시 편리함을 제공해 줄 수 있도록 뒷문의 크기가 확대된다.
■ 오토스틱
크라이슬러의 오토스틱(Autostick)은 운전자의 스타일에 따라 AT로, 또는 MT처럼 사용할 수 있는 트랜스미션이다. 실렉트 레버를 D위치에 놓으면 일반적인 AT처럼 사용되고, 레버를 오토스틱(A/S) 모드로 한단계 더 내리면 1단에서 4단까지 수동기어처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레버는 사용의 편리함을 위해 인체공학적인 손잡이 모양이며, A/S 상태에서 레버를 옆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플로어 콘솔은 T자형 홈을 갖고 있다. 왼쪽으로 밀면 시프트다운(-), 오른쪽은 시프트업(+)의 동작을 수행한다. 또한 레버가 A/S 상태로 되며, 현재 성정된 기어의 포지션이 계기판에 표시된다. 엔진 과회전 방지를 위해 3단까지는 6,300rpm 이상이면 자동으로 시프트업되고, 정지시에는 자동으로 1단으로 내려가는 기능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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