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가을바람에 실어온 文化亂場 - 가수 은희의 ‘누비이야기’
조금 차분해진 마음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볼 때
푸른하늘 아래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볼 때
산다는 게 뭘까 하고 문득 혼자서
중얼거릴 때
나는 새삼스레 착해지려고 한다.
나뭇잎처럼 우리들의 마음도
엷은 우수에 물들어간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중략)
이 가을에
나는 모든 이웃들을 사랑해주고싶다.
단 한사람이라도 서운하게 해서는 안될 것 같다.
가을은 정말 이상한 계절이다.
<법정스님의 ‘가을은 정말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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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천지의 너른 들에도 가을이 깊어간다. 비워내기 위해 가을은 깊어간다. 많이 비워낼수록 깊어지고, 더 많이 채울 수 있음을 깨닫는다. 전남 함평군 손불면 산남리. 마을 앞 들판에는 가을이 노오랗게 익어가고 있고, 동네 마당 여기저기에는 참깨 말리기가 한창이다. 여느 농촌과 다름없는 시골풍경이다.
마을 입구에 걸려 있는 이정표 ‘민예학당’. 이런 농촌에 웬 학당인가? 훈장님이 곰방대라도 물고 나올 것 같은 이름 ‘민예학당’. 그런데 이곳은 70년대 ‘사랑해’, ‘꽃반지 끼고’ 등 주옥같은 노래로 모든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국민가수 은희가 사는 곳이다. 은희 씨는 몇 년 전 폐교된 초등학교를 인수, 이곳에 ‘민예학당’이라는 새 둥지를 틀고 천연염색과 우리의 전통옷인 ‘갈옷’디자인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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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 씨는 70년대 초 첫 음반 ‘사랑해’를 발표하고 이어 첫 독집음반 ‘꽃반지 끼고’를 발매하면서 공전의 히트를 치고 일약 국민가수로 등극했던 분이다. 무려 40년이 지난 지금도 이들 은희의 노래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누구나 애창하는 노래들이다. 당시 ‘꽃반지 끼고’ 음반은 무려 50만장 이상 판매하는 대히트를 쳤으며 MBC 10대 가수상 여자 신인가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가 몇 년 안돼 홀연히 사라졌다. 그녀의 노래는 더욱 인기 절정으로 치닫는데 정작 가수는 보이지않았다. 그 무렵 그녀는 가수생활을 접고 도미, 뉴욕주립대에서 패션공부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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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 씨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패션을 연구한 후 15년 만에 귀국, 서울에서 국내 최초의 토털 코디네이션 업소를 차리고 화려하게 재기했다. 참으로 엉뚱한 변신이었다. 은희 씨는 KBS TV의 ‘빅쇼’ 등을 통해 20여년 만에 모습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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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이제 가수가 아니라 패션디자이너로 우뚝 섰다. 은희 씨는 그가 심취하고 있는 우리의 전통 갈옷을 ‘코리아 브라운 진’이라는 이름으로 명명, 전 세계로 진출하고 있다. 베트남에 OEM공장을 설립했고, 일본 도쿄, 나고야, 오사카, 교토 등지에서 순회전시를 했으며, 일본업계와 공동으로 컨퍼런스 및 한일문화교류 전시도 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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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코리아 브라운 진’을 세계에 알린다는 취지로 뉴욕전시도 준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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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녀가 지난 10월 22일 함평에서 ‘가을바람에 실어온 문화난장-은희의 누비이야기’라는 제목으로 패션쇼와 가을콘서트를 열었다. ‘문화난장(亂場)’은 이름 그대로 하루저녁 지인들과 팬들이 함께 모여 신나게 노는 한판이다. 은희 씨는 함평에 정착한 후 벌써 여덟 번째 매년 문화난장을 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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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비’란 스님들이 무소유를 실천하기 위해 헝겊조각을 기워서 만든 옷에서 유래된 말이다. 비워냄으로 더욱 깊어진 ‘은희의 누비이야기’. 그녀의 누비이야기는 많은 것을 비워내고 홀연 서 있는 가을을 닮았다. 화려했던 시절을 내려놓고 촌여자가 되어 소곤소곤 갈옷과 수다 떨며 살아가는 그녀의 가을이야기. 자연을 길어 천을 만들고 계절을 불러들여 갈천 사이를 누비는 그녀, 들꽃같은 그녀의 누비이야기가 참으로 잔잔하고 감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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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방송 오미연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펼쳐보인 누비이야기는 뮤지컬 배우 배해선의 음악무대, 가을과 사랑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 가수 이미배의 가을노래, 이생진 시인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에 얽힌 ‘섬시’ 이야기와 현승엽 가수의 노래, 은희의 누비패션 쇼, 은희와 함께 하는 가을콘서트 등으로 다채롭게 꾸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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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의 누비이야기에 자리를 함께 한 뮤지컬배우 배해선은 1995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데뷔, ‘국화꽃 향기’, ‘맘마미야’, ‘시카고’, ‘아이다’, ‘친정엄마’ 등에 출연한 우리나라 최고의 뮤지컬 배우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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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배 가수는 짙은 허스키 목소리로 ‘당신은 안개였나요’, ‘서글픈 사랑’, ‘눈이 내리네’, ‘그런 날이 있었지’ 등을 노래한 인기가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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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생진 시인은 ‘그리운 바다 성산포’ 등 섬 관련 시집을 33권이나 펴낸 바 있는 원로시인으로서, 섬을 1천개 이상 돌아다니며 섬을 시로 쓰고 노래한 우리나라의 독보적 ‘섬시인’이며, 현승엽은 통기타 가수이자 작곡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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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염색의 갈옷 패션쇼’와 ‘은희와 함께 하는 가을콘서트’는 이날의 하이라이트. 갈옷이 이처럼 아름답고 우아한 줄은 필자도 이날 처음 알았다. 형형색색의 디자인들, 옷은 물론 모자, 구두, 핸드백, 심지어는 쇼파에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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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오랜만에 직접 육성으로 들어보는 은희 씨의 노래들은 감격 그 자체였다. ‘꿈길’, ‘꽃반지 끼고’, ‘사랑해’ 등등. 무대 앞에 다소곳이 앉아 기타를 두들기며 온몸으로 노래하는 그녀의 모습은 70년대의 모습 그대로다. 노래도 그녀의 모습도 더욱 깊어지고 원숙해졌다. 수백명이 모인 실내 공연장 관중석은 쥐죽은 듯 고요하다. 은희의 노래에 취해 숨도 멈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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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의 누비이야기’ 메인이 끝난 후 민예학당 곳곳은 밤새도록 ‘난장판’이 이어졌다. 학교 운동장이었던 넓은 정원에는 캠프파이어 불꽃이 타오르고 천막 여기저기에는 바베큐와 전, 막걸리가 어우러진 술판들이 흥건했다. 본관 건물 공연장에서는 계속 노래와 춤, 퍼포먼스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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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워 반가워 너무나 반가워/ 맺힌 사연 말못하고 몸부림치며/꿈에서 깨일까 봐 그 님이 가실까 봐....’ 은희의 노래 ‘꿈길’같은 밤은 그렇게 익어갔다.(글,사진/임윤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