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행복이 가득한 자라전 한씨네*
 
 
 
 

최근 댓글 보기

 
최신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 알림

 

회원 알림

다음
 
  • 방문
  • 가입
    1. 한다은
    2. 한예은
    3. 난됴
    4. 시리우스
    5. 찬미
    1. 힘을내요슈퍼파월
    2. heavensoul
    3. koreahahn
    4. 한정훈
    5. 한성욱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한씨네이야기 스크랩 쑥(쓴 것)을 먹이시는 하나님
gil4423 추천 0 조회 15 11.03.03 04: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쑥(쓴 것)을 먹이시는 하나님


 
"나를 쓴 것으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 (애 3:15)
 
"…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 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마 26:39)


  
인간의 혀는 다섯 가지의 맛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는 그 다섯 가지 맛의 식품을 체질에 따라 골고루 섭취해야만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밥상 위에는 단것과 기름진 것으로만 가득 채워져 돼지처럼 살만 찌게 되었고, 그래도 끝이 없는 맛에 대한 욕망은 돌이킬 수 없는 만성병으로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시들어가게 되었다.


인간들은 쓴 것보다는 단 것을 좋아한다.
약을 먹어도 달콤한 것을 요구하고, 충고도 달콤하게 해 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약은 써야 맛이고 충고 역시 독약처럼 쓰디써야만 효과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 것이다. 이처럼, 죽음을 앞두고 투병하는 환자들도 자연에서 찾아낸 쓰디쓴 풀 한 포기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줄 수도 있는, 보물보다도 더 귀한 약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한다.


이렇게 육신의 병에도 쓴 약이 필요하듯이 우리의 영혼도 병들어 있을 때에 하나님은 쓴 약이 담긴 죽음의 잔을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사정없이 퍼부어 내려주신다.
그 만성 고질병은 죽음으로만이 치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일꾼(a[ggelo" 앙겔로스: 사자. 천사)들은 사람들에게 그 쓴 죽음의 잔을 전해주는 택배(宅配) 배달꾼 이다.
그래서 당신이 기다리는 축복은, 저주의 죽음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다며 풍족하고 평안하여 감사하다고 하지만, 그건 어린애 신앙이다.
달콤한 만나를 먹으며 헤매던 광야에서의 표적 신앙이다.


하나님은, 복 주시는 하나님은, 저주라는 이름의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랑하시는 참 아들들을 저주받은 자들의 십자가에 달리게 내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도 저주받은 자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그들과 함께 살다가 자신이 시범으로 죽음의 잔을 받고 저주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 10:17)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많은 선지자들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강권(强權)에 의하여 할 수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죽어갔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과 육신의 고통 속에서,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외로움과 환희의 눈물을 흘리며 살다가 갔다.
그들의 삶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좋아 보이는 축복의 삶이었지만, 인간들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저주하신 고통의 삶이요 신(神)들린 미친 자들의 삶으로 보일 뿐이었다.


현실(此岸)속에서 비 현실(彼岸)을 추구하고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삶. 그 삶은 거짓으로 가득한 위선이 아니면,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지하는 능력의 삶 일 것이다.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에 속하지 못하는 자들의 삶은 미친 자들과 장애자들과 문둥 병자들처럼, 화려한 세상에서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미 격리된 삶을 살아가게 되어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겠다고 하셨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당신의 입에서 자주 자주 쏟아져 나오는 축복이라는 그 기도 소리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한탄의 기도로 바뀔 때, 그때야 비로소 당신은 생명으로 발길이 옮겨지는 것이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욥 3:11)


성경의 히브리어 바라크(축복하다)라는 단어는 '축복하다'뿐 아니라 '저주하다'라는 뜻으로도 함께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두어야 한다(왕상 21:13; 욥 2:9). 그래야 성경에 있는 축복의 말씀들이 자신에게 저주의 사건으로 닥쳐올 때, 당신은 진정으로 회개(悔改)의 기도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생명으로 가득 차있는, 그러나 저주받은 자들이 죽어가며, 실제 체험한 자신의 십자가에 대한 기록이다.
생명은 죽음 위에서만 피어나는, 피를 머금은 붉은 꽃이기 때문이다.
무덤에서 나사로는 예수를 만났지만, 이제 우리들은 보혜사 성령이신 그리스도를 만나 생명으로 하나 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의 성령 그리스도는 에스겔 골짜기 마른 뼈들이 가득 찬 무덤으로만 찾아오시는 살리는 영 이시기 때문이다.
볼 수 있다는 당신, 들을 수 있다는 당신, 문둥이가 아니라는 당신에게는 진리의 보혜사는 절대로 올 수가 없다.
건강하다는 자들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막2:17).


이처럼 하나님의 저주는, 새로운 생명으로 나갈 수 있는 축복의 좁은 문이다.
그 문은 저주를 받아 죽어야, 성령과 하나되어 바람으로만이 들어갈 수 있는 바늘구멍처럼 좁은 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이 복음을 전한다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전해 주어야 한다.

달콤하기만 한, 축복이라는 당신의 그 소리는 사람들을 착각하게 할 뿐이다.
왜냐하면 축복은 하나님의 저주 보따리 안에서 반짝이는, 진주라는 보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축복을 받으려면 먼저 저주의 보따리를 받아야만 한다.
축복만을 떠벌려 대는 것은 속임수요 장사치들의 사기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저주의 말씀을 전해 주는 것이고, 그 저주의 보따리 안에서 축복을 찾아내는 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은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경륜(오이코노미아, 섭리, 청지기직)이다.


그러나 화려한 축복만을 외치며, 너희가 구하기만 하면 세상의 부귀영화를 모두 얻을 것이라는 허황된 약속을 하며, 당신 안에서 당신의 욕망에게 역사 하는 당신의 하나님 마귀가 오늘도 당신을 시험하고 있다는 사실(마 4:1-).
그래서 욕망으로 가득 차있는 당신은 가난과 고통을 싫어하여 풍요의 신 바알을 숭배하고, 이 땅에서 거두는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며 축복 받았다고 즐거워한다.
하나님에게 저주받아 가난하고 병든 소경과 문둥이들을 향하여 손가락질하며, 바알에게 받은 자신의 풍요로운 삶에 대하여 더욱 흐뭇해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께 저주받아 쑥이나 먹는다고 비웃으면서….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 (애 1:2)


고독(孤獨)하다고 말하는 것은, 차라리 사치다.
그래서, 고독은 '죽음에 이르는 병(病)'이라고 말한 어느 철학자의 그 고독은 위선이다.
고독은 신(神)과 한 인간이 죽음과 삶에 대하여 결판(決判) 내야 하는 독대(獨對)의 자리다.


그러나, 신(神)과 단독으로 대면하여 만난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한다(출 33:20-23).
하나님을 만남으로서 오는 죽음, 그것은 신(神)을 떠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즐거운 귀향 길이지 고독으로 오는 죽음의 병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생명, 독생자(獨生子)를 잉태한 여인의 즐거운 친정집 나들이 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이야기한다.
휘장이 찢기우는 십자가 고통 없이는 사랑과 하나될 수 없는데도, 축복이라는 이름아래, 진리를 알았고 진리가 자신을 자유롭게 해 주었다며 방탕하고 있다.
스스로 율법을 폐한 자유(?)안에 사랑이 있는 줄 알고, 자유와 방종이라는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애매한 관념의 줄타기만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신(神)에게로 나아가는 길은 고통이 따른다고 했다.
그래서 원시 종교들은 신으로부터 점지 받은 사람은 신에게 바쳐져 고통 속에서 죽어가게 했고, 죽는 사람은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태어날 다음 생애에 보장된 화려한 환상의 욕망 속에서 즐겁게 죽어간 것이다.


엄청난 과학 문명이 밀려오는 현대라는 첨단세계 속에서도, 세상의 많은 종교들은 신(神)을 접하기 위하여 형식이 되어버린 스스로의 자학(自虐)에 빠져 피를 흘리거나, 자위로 하는 고행(苦行)을 영광스러운 듯이 행하고있다.


이처럼 한편에서는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형식 때문에 신과 상관없는 자학의 구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편에서는 그따위 자성(自省)의 고통 따위는 미련한 짓이라며 신(神)이 거저 주었다는 축복과 자유를 맘껏 누린다.


과연 누가, 어떻게 사는 삶이 신(神)에게로 향하는 참된 삶이란 말인가?
한편은, 이루지도 못할 피안(彼岸)의 경지를 이루겠다고 교리에 얽매어 환상 속에서 육신만을 괴롭히고 있는 것 뿐이요(율법주의), 또 한편은 고통스러운 자신과의 싸움은 필요없는 어리석은 위선이요 작위(作爲)일 뿐이라며 내동댕이쳐 버리고 신(神)이 거저 줄 것이라는 구원의 환상에 빠져 방종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은혜주의).
 

그러나 신(神)은, 내 자신 안에서 자신과의 싸움, 피 흘리기까지의 처절한 싸움의 정점(頂點)에서 만 만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인위적인 교리적 방법으로 자신을 자학하는 고통 속에도 신(神)은 존재하지 않으며, 은혜(恩惠)라는 허황된 환상 속에도 그는 자리 잡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모두가 깨달은 사람들을 쫓아다니던,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어리석은 방법들 일 뿐이다.


얍복강 가에서 환도뼈가 부러지도록 밤새도록 씨름을 하며 만난 야곱의 하나님.
그 만남은 평안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 흘리는 고통이다.
당신이 말하는 그 평안은 사람들을 허송 세월만 하게 만들 뿐이요, 또 당신이 스스로 자학하는 그 고행(苦行)은 위선일 뿐이다.


진정한 천국은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이 만나서 하나되는 바로 그곳에 있다.
그 사건이 내 걸레 같은 이 육신 안에서 이루어 질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한다.
그 가능성이 은혜요, 그 은혜에 감사하고 자신과의 피나는 싸움을 하며 이루어 나가는 것이 신앙인 것이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히 12:4)
 

믿음은 피나는 싸움 끝에 피어나는 소망으로 가득한 꽃이고, 피어난 꽃은 차고 넘쳐야 사랑이라는 이름의 열매로, 남에게 생명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사역이라는 당신의 그 사역도, 당신 안에 가득 찬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생명이 되어 흘러 넘치는 삶이 되어질 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신(神)들린 무당들이 자기가 모시는 그 신(神)이 스스로 되어서 자신도 모르는 소리를 지껄이듯이, 하나님의 사역자들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입이 되어 대언(代言)의 말씀으로 넘쳐나는 소리가 되는 것 뿐이다. 그 소리는 축복도 되고 저주도 된다.
내 의지의 외침과는 상관없이, 인간이 만들어놓은 단어의 의미와도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수시로 뒤바뀌는 소리다.

 

1) 예레미아의 사역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가로되 슬프도 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렘 1:5-6)
 
예레미야의 사역은 가나안 땅에서 심판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사람들은 등 따쉽고 배부르니, 그 달콤함에 취하여 하나님을 저버린 것이다. 자신들의 하늘에서 자기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자신이 판 우물물을 퍼먹으며 고향의 아버지를 잊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종살이하던 애굽과 광야에서의 방황하던 삶은 먼 추억 속 조상들의 역사 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져 버리고, 가나안 기름진 땅에서 풍요로움만이 그들의 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전해 주어야 될 복음은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경종의 말씀이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저주의 말씀을 전해야만 하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예정해 놓으신 것이다.
예레미야의 사역은 사람들에게 젖과 꿀처럼 달콤한 말로 사랑과 구원과 축복을 떠버리는,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거짓사역이 아니라, 미쳤다고 손가락질 받으며 듣던지 말던지 저주의 말씀만을 전해야하는 고통스러운 사역이었다.


추수꾼의 사역은, 예리한 낫으로 열매를 거두어 알곡과 쭉정이가 드러나게 하는 작업이다.
쭉정이는 불에 던지면 그만이다.
그러나 성경은 온통 알곡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다.
성경의 구원은, 농부가 알곡의 껍질(겉옷)을 벗겨서 정결한 곡식으로 만들어 곳간에 넣어두는 이야기다.
그리고 심판은 알곡을 까부르는 작업이다.
알곡의 껍질은 쭉정이와 함께 불 속에 던져진다.


껍질 벗겨지는 작업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지, 곡식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저주라고 불평하는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축복이, 인간들에게는 저주로 여겨진다.
현실은 항상 거꾸로, 하나님의 저주를 축복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축복을 저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입만 열면 축복이요, 축복하면 부(富)와 권력과 명예만을 이야기한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Sattan 사탄: 고소자, 마귀)이 밀(알곡)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요구하다)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하라" (눅 22:31-32)


심판과 구원은 하나다.
심판은 하나님의 사자 사탄(마귀)이 알곡들에 대하여 하는 것이요,
구원은 하나님이 내어주신 마귀의 시험에서 이긴자를 건져 주심이다.


마귀는 쭉정이들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보다도 더 낫지(페리슈어:넘치게 되다. 풍성해지다. 초과하다) 못하면 심판 받을 자격도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가 욕했다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덩달아 비난한다.
자신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그들을 욕한 것은 그들이 종교의 틀(율법)을 뛰어 넘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움이요, 그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욕 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뛰어 넘어야 될 대상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뛰어넘은 자들만이 그들에게 심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들은 자신들을 뛰어넘은 자들에게만 관심을 갖고 십자가에 달아 주기 때문이다.


그래도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을 비난만 할 것인가?
예레미야도 예수도 바울도 모두 바리새인이었지만 그들을 상대하여 싸운 것은, 이들이 그들을 뛰어 넘었기 때문이었다.
진정, 이단(異端)이란 말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뛰어넘은 자들만이 들어야 될 영광된 이름이다(마 5:20).

 
이들은 그들에게 무엇을 전했던가?
하나님의 축복을, 돈과 명예와 이 세상 권력이라고 전했던가?
이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의 말씀을 전했다.
천국은 심판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고 험난한 것이다.

저주받아 발가벗은 자들만이 천국에 들어가 눈같이 흰옷으로 갈아입은 신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쌀 겨 까부르듯이 벗기고 또 벗기어 앙상한 뼈(속 알)만 남은 자들이 예수라는 새 살과 그리스도라는 새 피로 입혀져 하나로 되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이다.
 

이방인으로 한없이 방황 하다가, 죽어서 하얀 뼈만 돌아 갈 수 있는 곳이 열조들이 묻혔던 동굴무덤이요, 그곳은 조상들의 영혼이 다시 살아서 그들의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살고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시발점이다.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 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 20:8-9)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그 사랑은 겉은 달콤하지만 삼키면 속에서 쓴 것으로 녹아지는, 꿀로 코팅된 당의정이다.
화려한 표적을 보고 광야로 이끌려 나온 무리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들은, 불 뱀과 전갈과 지독한 갈증뿐이었다. 육신의 부귀영화를 꿈꾸며 화려한 현실의 삶만을 추구하던 이들에게,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기막힌 저주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축복을 받으려고 바알에게 돌아간다.


하나님 사역한다는 당신, 설탕이나 소금을 치면서 맛을 낼 필요는 없다.
사랑이든 저주든 당신 안에 있는 것이 요동쳐 나오면 된다.
말씀은 이미 온 세상에 가득 차 있는데, 그 음성을 듣는 자와 못 듣는 자가 있을 뿐이다.
밖에서 주워 먹이는 당신의 소리는, 태양이 떠오르면 그 빛에 의해 썩어 녹아져버릴 광야의 만나 일 뿐이다.


그래서, 먼저 당신 안에서 들리는 말씀을 자신이 들어야 한다.
당신은 어차피 하나님이든 마귀든 당신 안에 있는 존재의 소리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 운운하는 당신의 그 말이, 당신 안에 아직도 하나님처럼 도사리고 있는 마귀의 소리 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당신이 안다면, 무조건 남을 판단하거나 달콤하기만 하게 잘못 가르치는 일은 스스로 포기해야 할 것이다.


말씀 사역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먹이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단 것만을 요구하고, 스스로 사역자라는 엉터리 장사치들은 자신들이 배합한 달콤한 사료로 은혜와 자유를 떠 벌이며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돈벌기 바쁘다.
그래서 과다한 당분 섭취로 속이 시커멓게 썩은 불치의 당뇨병 환자들만 득실거리게 만들뿐이다.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 당한 자는 내로다 나를 이끌어 흑암에 행하고 광명에 행치 않게 하셨으며 종일토록 손을 돌이켜 자주 자주 나를 치시도다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를 꺽으셨고 담즙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나로 흑암에 거하게 하시기를 죽은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 (애 3:1-6)

 

2) 미리암의 사역


두 번째 사역은 자신이 문둥이가 되어, 문둥이와 함께 사는 삶으로의 사역이다.
문둥이는 세상에 속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모욕거리가 되어, 던지는 돌이나 얻어 맞아가며 성(城)밖 골고다(해골,마른 뼈들이 있는 곳)로 쫓겨나 격리되어야 할 존재들이다.


하나님의 진정한 사역자는, 자신의 온 몸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자신들은 이미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라며 스스로 깨끗하다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에게 문둥병을 옮겨 주어야 되는 삶이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 함께 살아가며 서로의 상처를 닦아주고,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치료받으며 살가죽이 벗겨져 뼈가 드러난 곳에서 새 살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삶이다.


결국 사역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문둥이라는 동류(同類, " 메토코스: 동반자, 나누는 자)들이 한데 모여 사는 삶이다.
자신을 떠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자신도 틀림없는 문둥이로 보일 때만이 문둥이와 함께 살 수 있는 것이다.
그처럼 '믿음'은 우리를 문둥병이라는 십자가 밑으로 이끌어 가고, 간절한 '소망'은 우리를 십자가 위에 달릴 수 있는 능력과 담대함을 준다.


그래서 참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갈라진 휘장 안 지성소에서 눈같이 하얀(라반: 희어지다. 순결해지다) 문둥이로 만날 수 있는 것이다(민 12:10).
이 길은 우리 모두가 가야할 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와 문둥병의 죽음과는 상관없이 입으로만 구원을 외치며, 고통  받는 문둥이들을 비난만 하고있다.

자기 안에 사랑은 없고 율법만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물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세상을 평탄하게 만들려 하지만, 법은 인간을 위선자로 만들어 비판만이 가득한 혼란한 세상으로 만들뿐이다.


문둥이는 문둥이와 함께 살고, 벙어리 귀머거리도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살아간다. 자신들 서로의 처지를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추(醜)한 상처를 감출 필요없이 편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사람을 외모(外貌)로 판단할 필요도, 서로 잘났다고 남을 비판하지도 않는다.
입으로 '사랑'을 말 할 줄은 모르지만, 서로 애처로운 마음으로 위로하며 감동으로 뜨거워지는 가슴을 안고 살아간다.
이 땅에서 그들의 소망은, 화려한 축복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일 뿐이다. 거기에 구원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무덤 속의 안식(安息). 커다란 돌로 입구가 막혀진 무덤.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할 수 있는 곳은 무덤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들을 무덤으로 이끌어 오는 것이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께 불러모은 사람들이 여인에게 한 말처럼,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한 것처럼, 여인이 한 일이 당신 사역의 한계요(요 4:42), 야곱의 우물과 예수는 우리가 반드시 찾아가 빠져야할 무덤인 것이다.


사역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사역은 함께 떡(살)을 나누어 먹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생명(피)을 이루는 삶 일 뿐이다.

 

그래서, 문둥이로 죽어 하얀 뼈로 변해버린 뒤, 예수의 살과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되어 새 아들이 되어지는 역사가 무덤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에게 야곱의 우물은 빠져 죽어야만 될 무덤이다.
사막의 신기루 같이 다가가면 사라져 버리는 허상, 먹어도 먹어도 목마름만 더 심해지는 야곱의 우물물(요 4:13)은, 광야의 만나처럼 먹어도 결국은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무덤은 죽음의 종착지요, 수확된 열매 율법의 결말(토 텔로스: 세상 끝. 세금)들을 거두어 모아 두는 곳간이다.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겔 37:13)


열매는 쓸쓸한 가을 들판, 화려했던 꽃과 잎들이 모두 말라서 떨어져 버린 나무에서 수확한다. 그래서 가을 시골집 안 마당은 수확을 위한 타작마당(심판)이요, 흥겨운 혼례 집 잔치마당(구원)이 되기도 한다.
천국 좋아하는 사람들아,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는 심판이 먼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라.
예수 이름은 초청 우대권은 되지만, 완전 무료 입장권은 아니라는 사실도 빨리 알아야 망신당하지 않고, 후에 이를 갈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벧전 4:16-17)


식물이 꽃을 피움은 완성의 표현이다.
이른 비 늦은 비를 맞으며 스스로 필요한 영양분을 가득 채웠음을 말함이요, 신랑을 맞이하여 수정할 준비가 되었음을 향기로 알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완성은, 자신의 육신(싸르크스:살, 몸, 인간성)이 끝나 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말은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아무리 화려한 꽃을 자랑하던 풀이라도 열매를 맺으면 수확을 위하여 바싹 말라버려 죽어 버린다는 것과, 또 하나는 화려하게 푸른 잎을 자랑하던 훌륭한 나무라도 열매가 없으면 잘리어 불 속에 던져저서 태워질 뿐이라는 사실이다.

추수(심판)는, 성령의 뜨거운 바람에 잎이 말라 버려야 열매를 거둘 수 있다.
다만 자기 안의 생명의 씨앗이 결실 했느냐 못 했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이로서 알곡과 쭉정이가 갈라지는 것이요, 말라죽는 것은 같지만 하나는 새로운 생명으로 다른 하나는 영원한 죽음으로 사라져 갈 뿐이다.


예수는 문둥이 마을 가버나움에서 문둥이들과 함께 살다가 하나님께 죽음의 잔을 받고 저주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문둥이가 되어 진(陣)밖에 칠일동안 갇혔다가 죽었다.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에 의하여 말구유에 실려 이 세상에 오셨지만, 모세는 이름도 없는 레위 족속 여인에게서 태어나 방주(갈대상자에 역청과 나무진을 칠한)에 실려 하수에 버려진 것을 미리암의 보호아래 애굽공주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왔다.
그리고 미리암은 모세에게 친 어미의 젖을 먹고 자라게 해 준다(출2:).
모세는 애굽 공주의 아들이 되었고, 그래서 후에 이스라엘인들이 애굽을 탈출하는데 인도자가 된 것이다.


처녀 미리암(높다)은 모세를 구원해준 보혜사다.
모세가 이스라엘인들의 법이면, 미리암은 그들의 사랑이었다.

출애굽 때, 선지자 미리암에게 소고를 메어주시고 춤추게 하시어 이스라엘의 기쁨이 되게 하신 하나님이셨다(출 15:20).
하나님은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한 그 사건을 빌미로(민 12:1), 그 사실을 꾸짖은 미리암을 저주하시고, 문둥 병자로 만드신 후, 진(陣)밖 무덤에 칠일간 감금하시어 완전케 하신 뒤 거두어 가셨다.

그 사건으로 인해 모세와 그를 따라 출애굽 한 무리들의 가나안 인도를 포기하시고,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자만 가나안에 들여보내신 하나님이시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로 장식하고 즐거운 무리처럼 춤추며 나올 것이며…" (렘 31:4)


하나님 진노의 꾸지람은 관심을 가지심이요, 그 관심은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사랑의 표현이시다.
광야 생활은 모세의 법 아래서 겪는 고통의 삶이다.
광야에서의 구원은 그 법 아래서 죽고, 광야에서 새롭게 태어난 자들만을 건져서 가나안에 들여보내는 것이다.


"정월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서 백성이 가데스(카데쉬:신성한곳.지성소.성물)에 거하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 장사 하니라"(민 20:1)


흘러 넘치던 샘, 미리암이 가데스에서 죽은 뒤, 회중에는 먹을 물이 없어 난리가 난다.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 하여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기적을 행하지만, 그 사건 후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민 20:2-13).


미리암은 신(神)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다가 신(神)의 저주를 받아 문둥이가 되었고, 하얀 백골에 새 살을 입힌 신부가 되어 지성소에서 아버지 품으로 돌아갔다.

신(神)의 사랑 속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스스로 신이 되어 호령하던 모세는 모압 땅 느보산에 올라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눈앞에 보며, 혼자 죽어 골짜기에 묻혔다.
그의 나이 일백 이십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신 34:7).
저주받아 문둥이가 되어 온 몸이 하얗게 변하여 죽어간 미리암과, 축복 받아 이스라엘 족속의 지도자가 되어 죽을 때까지도 힘이 넘치도록 남아있던 모세의 차이다.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
당신이 구하는 하나님의 축복은, 세상 마귀가 당신을 망하게 하려고 주는 신기루 같은 허상으로 가득 찬 저주의 잔이다.
당신이 비웃으며 돌을 던지는 문둥이의 저주는, 하나님이 문둥이를 다시 살리시려고 내려주신 사랑이 가득한 축복의 잔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저주의 보따리 안에 숨겨져 있는 반짝이는 진주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먼저 저주의 보따리를 받아야만 된다.
그 저주의 보따리를 하나님이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기쁨으로만 가득 차 보이지만, 그 사랑으로 가는 길에는 슬픔의 눈물로만 가득 차 있다.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는 나무는 눈물로만 자랄 수 있다는 그 사실을 당신이 안다면, 하나님 축복을 돈 보따리로 잘못 가르치며 값없이 떠들지 말자.


예수의 십자가는 떠받들면서, 형제의 고통과 불행은 하나님의 저주라고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당신의 예수는 우상일 뿐이다.


이제 당신은 무엇을 구하고, 그리고 무엇을 전할 것인가?


"바위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중심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찌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옵 1:3-4)


아멘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