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평면 향토사
게시자는 <내고장 문화재와 학문의 발자취>를 읽고 그 역사성에 근거하여 지역 교육기반의 향상, 인적 자원. 인재 육성이란 주제를 이 시대의 봉평정신으로 파악하였다. 온고지신의 맥락에서 현재의 문화마을이 교육문화마을이어야 한다,는 바램이 있다. 그것이 고향발전에 조응하는 게 아닐까 싶다.
發刊辭
經濟와 文化藝術, 生活環境 등 文明社會 發展의 모든 여건들이 劃期的인 進展을 계속하는 이 時代에 우리 鄕土人들의 和合과 融和團結이 그 어느때 보다도 절실히 要求되며, 필연코 그리 되어야 2千年代에 또다시 이루어지는 고향땅의 엄청난 變遷에 蓬坪人들의 成熟한 自存을 수호하리라 생각됩니다. 때에 和合團結의 母體는 우리 同門會가 아닌가 판단되며 그러기 위해서는 모임의 活性化와 脈의 結束유지가 方法이며 따라서 業의 창조가 필연적이여서 많은 苦心과 熟議끝에 이 기회에 鄕土史를 정립함도 뜻과상통하는 大意가 있음을 結論짓고 一年간의 準備過程을 거쳐 미약하나마 今月에 이 記錄을 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發刊되는 鄕土史의 資料는 本會 副會長이신 하찬수氏께서 수백일 동안 자기 일을 全閉 하다시피 하고 全國各地의 圖書館을 찾아 자료를 수집 검토하였고 歷史 敎授들과 意見交換을 하였으며 많은 參考書籍과 古書를 탐독하면서 現地確認을 거처 이루어 놓은 苦行의 結晶體라 評價하면서 이 자리를 빌어 感謝의 뜻을 전합니다.
따라서 資料의 檢討와 編輯에 적극 참여하여 주신 “최행부, 박주택, 강희철, 강기용, 강영하” 다섯분의 編輯委員任들께도 眞心으로 고마운 뜻을 보내며 특히 강영하委員任께서는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製本까지를 完成시켜 줌에 대하여 더욱
고마움을 전합니다.
記錄中에는 많은 아쉬움을 남기는 부분들이 있었고 의아한 점도 수없이 낳고 있습니다.
즉 歷史라고 기록할 수 없는 처지가 아쉬움을 가중시켜 주었습니다.
특히 地理와 人物란에는 傳함은 있는데 確認하지 못하는 일들이 있고, 생존하고 있는 분은 記錄하지 않았습니다.
親愛하는 모든 會員 여러분
이번에 發刊되는 이 책은 우리 同門會의 첫 作品이요 우리들의 作品이라고 생각하면서 수천의 理解를 거듭하시면서 탐독하시기를 바라며 다 읽으신 후에는 반드시 修正해야 할 점이나 漏落된 部分 또한 讀後感 등을 간단히 나마 적어 보내주시면 感謝하겠습니다.
親愛하는 會員 여러분
前에도 그러 했듯이 앞으로도 우리 蓬坪人이 돌뿌리에 걸려 길바닥에 쓰러질때 남의 눈치 보지말고 쫓아가 그를 일으켜 세워 줄 수 있는 勇氣와 雅量을 잃지 마시고 조약돌이 모여 큰 바위가 되도록 모든 일에 諒解하시고 理解하시고 協助하면서 살아가는 雅量이 넘치는 故鄕이 되도록 애써 주실 것을 간곡히 바라면서 인사를 올립니다.
1993年 7 月
蓬坪國民學校 總同門會長 김창하
一 . 우리봉평
우리 봉평은 지리적으로 태기산이 남북으로 뻗어 있는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남은 대화면이요 서쪽은 횡성군 둔내면과 갑천 청일면이며 북으로는 홍천군 서석면과 내면을 경계로 하고 있다. 그리고 영동고속도로가 진조리와 면온리를 지나므로
교통이 좋고, 산수가 수려하고 아름다우며 문화 유적지, 명승고적과 아울러 문인, 열사, 효자, 효부가 많은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봉평은 서울서 188km요 대관령서 48km에 위치하고 있다. 어머니와 같이 인자한 태기산과 씩씩한 장군과 같은 회령봉을 앞세우고 송항치, (웃써근새 재), 갈밭골, 마전치, 말구리재, 삼형제봉, 평촌 동쪽이 부채살처럼 퍼져있다. 봉평의 젖줄인 흥정천은 흥정리 양지동에서 비롯하여 금강평을 지나 화암을 감돌아 창동을 지나 팔석정을 이루고 판관대 앞을 돌아 나가며 멀리 북쪽 수점동(용평면 노동)에서 시작한 속사천과 합하고 구룡소를 이루었으며 용전에서 도사천을 만나 장평과 재산을 감돌아 백옥포에서 흥정천과 합류하고 다시 면온물을 만나 한강상류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와같이 산수가 수려한 아름다운 곳이므로 옛부터 산과 물이 감싸고 도는 곳을 지리학적으로 산태극, 수태극이라 하여 이러한 곳에는 율곡 이이 선생 가산 이효석 선생과 같은 인재가 나실 만한 곳이라고 어떤 학자는 평하였다.
1. 덕고산과 태기산
덕고산은 태기산의 고호라 한다. 덕고산 아래 큰 마을이라 하여 덕거리라 이름한 점과 봉평의 옛 어느 학자가 쓴 글에도
德高山下 白雲陽(덕고산 아래 백운동 양지)이란 부분이 보이는데 덕고산은 태기산의 옛이름이라 함이 옳지 않은가 싶다.
청일면 촌노에 물어보니 둔내면 화동리 성황당에도 덕고산 산신령을 모셨으며 갑천 청일 근방에도 덕고산 산신령을 모신
점 으로 보아 태기산의 고호가 덕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성터는 태기산인 갑천면 신대리에 있다.
다만 덕고산 봉복사 마을에서는 덕고산은 절 뒷산이요, 태기산은 그 뒤 큰산이므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2. 태기산 전설
(편집자 주 : 태기산에 전설의 내용에 관하여는 편집부에서 여러 각도로 조사를 실시했다. 평창문화원과 횡성군 문화원의 내용이 차이가 있었다. 많은 고증 자료들을 찾아보았지만 미흡한 부분이 많아 요번 향토사에서는 두 가지 내용을 함께 소개하기로 한다.)
① 부족국가 시대(B.C 3 세기경)에 예라는 나라와 맥이라는 있었는데 맥이란 나라는 춘천에, 예라는 나라는 강릉에 도읍
하였다고 한다.
(강릉 임영지에 예국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두 부족국가는 봉평의 덕고산(현 태기산)을 국경으로 정하고 있었는데 대구 경주 지방에서 진한이란 나라가 맥나라를
치니 맥나라 왕은 항복을 하였으나 아들 태기만은 항복할 수 없다고 하며 군사를 이끌고 횡성을 지나 갑천 개울물에서 군사 들의 갑옷을 씻고 (갑천이라 한다) 갑천면 신대리 덕고산에 성을 쌓고 (성꼴) 재기의 꿈을 품고 군사들을 훈련시켰다. 진한이 와서 치고자 하였으나 아무리 공격하여도 함락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진한의 장수가 어느날 밤 꿈을 꾸는데 하얀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이 미련한 놈아 앞만 알고 뒤는 모르느냐. 덜미를 처야지’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한편 태기도 군사를
정비하여 삼형제 장군에게 군사 300을 주어 평촌 삼형제봉에 초소를 치고 호령장 장군에게 군사 500을 주어 진을 쳤는데
삼형제 봉에서 봉화불을 올리면 호령봉에서 알 수 있고 호령봉에서 봉화불을 올리면 태기산에서 알 수 있도록 대비하고
있었다. 진한의 군대가 도주골(현 도사리)로 몰래 들어와 호령봉을 먼저 치니 호령장군은 예기치 못한 기습을 당하였으니
패할 수 밖에 없었다. 호령부대를 섬멸한 적군은 태기산성의 덜미를 쳤다. 이 소식을 뒤늦게 안 삼형제 부대가 태기왕을
도왔으나 산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왕을 모시고 피난을 하려고 점을 쳐보니 원길로 가는 것이 길하다는 점괘가 나온지라
원길로 피난을 하다가 무이리 백운동에서 적군을 만나 싸우던 중 용마봉에서 용마(馬)를 잃고 안자바위에서 안장을 잃고
원길로 못가고 옥산대에서 옥새를 잃어버리고 왕율에서 잠깐 쉬었다. 그리고 면온에서 전군사를 잃으니 삼형제 장군과
왕 밖에 남지 않은지라 더 이상 어찌할 수 없게 되자 삼형제 장군은 현 백옥포에서 백의로서 왕을 업고 강물에 투신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맥국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의 막은 내렸다. 그후부터 덕고산이 태기산으로 명칭이 변화하였다고 한다.
한편 횡성군 둔내면에도 태기왕에 관한 전설이 있는데 봉평면의 것과는 다소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② 옛날 삼한의 한 나라였던 진한이 새로이 힘있게 나타난 신라와 투쟁을 계속하던 중 삼랑진(三浪津)전투에서 대패하게
되었는데 이 박혁거세거서간(朴赫居世居西干)이 등장하여 한창 흥기할 때이고, 진한은 태기왕이 정권을 잡고 있을
당시였다. 삼랑진 전투에서 대패하고 국토를 빼앗긴 태기왕은 패잔병들을 이끌고 이곳 덕고산에 와서 분노와 한을 안고
재기의 노력을 하였다.
그는 실지 회복을 노리며 군사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고 화전을 개간하며 군대를 훈련하기를 4년간이나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이 신라에 염탐되어 신라군의 재추격을 받게되었다. 진한군은 이 산성을 거점으로 신라의 대군을 맞아 싸웠으나 끝내는
또 참패를 당하였으며 진한도 멸망하고 태기왕도 덕거산에서 최후를 마쳤다. 이 뒤로부터 태기왕의 이름을 따서 덕고산을
태기산이라 부르고 그 성터를 태기산성이라 이름하였다는 것이다.
3. 사적지
● 태기산 성지
봉평 무이리 서쪽끝, 태기산정상에 위치해 있고 그 서쪽은 횡성군 청일면 신대리로 횡성군과 평창군의 경계가 되는 산이다.
옛날 태기산은 덕고산이라 불리웠던 산으로 ꡔ세종대왕실록 지리지ꡕ에는 덕고산성이라 이름하고 둘레 568보 높이 5척이며
샘물이 있고 군창 5간, 관청 2간이 있다고 하였으며 ꡔ신증동국여지승람ꡕ에는 돌로 쌓은 성이 둘레가 3653천이고 안에
우물이 있으나 오랜 풍상을 겪는 동안 황폐하였다고 하였다. 이 태기산 부근에는 예맥이 있던 초기 철기시대 태기왕을
주인공으로 한 전설이 구전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당시에 축조되기 시작한 산성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 조사단
이 현지를 확인한 결과 돌로 쌓은 성벽을 확인하였으며 축조 연대도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二 . 봉평 문화재
1.봉산서재
봉평면 평촌리 산 16번지에 있는데 율곡 이이 선생과 화서 이항노 선생을 모신 곳이다.
(두 어른을 모시게 된 사유)
1) 이율곡의 아버지 판관 이원수공이 1526년 부인 신사임당과 함께 봉평 판관대에 임시 거주하였다. 1536년 봄 사임당께서
오죽헌 언니댁에서 머물던 중 하루밤 꿈에 흑룡이 자기의 품에 안기는 꿈을 꾸고 봉평으로 오니 한양에서 근무하던 남편
판관공이 와 있었다. 그 달부터 태기가 있어 가을에 친정 오죽헌에 가서 12월26일에 옥동자를 낳으니 이 분이 후일자라서
동방의 성인이요, 성리학자 율곡 이이 선생이다.
2) 이화서 선생은 1792년(정조 16년) 2월13일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 마을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였으며 후진
양성을 하다가 1868년 고종 5년에 별세하였다. 선생도 성인이요 성리학자로서 구한말 위정척사론을 주장하시고 변천하는
세계 열강과 대응하자면 국력을 배양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10만 양병론을 주장하였다. 또한 대원군의 경복궁 창건 철회를
역설하고 높은 벼슬자리도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일생동안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 제자들이 이곳 봉평에 많이
이주하였으며 특히 이곳 학자 봉서 신범 선생도 화서 선생을 추모하였다.
3) 1896년 2월에 화서 문인 제자 홍재학께서 장촌에 거주하면서 봉산서재 창건을 건의하여 허가는 얻었으나 당시 나라에
정변이 있어 홍학자가 정변의 부당성을 상소하다가 시상열사의 형을 받음으로 서재 창건이 수포로 돌아갔다.
1903년 지방학자 태은 추성구, 황문진, 여청 김상섭 등 8인이 면암 최익현, 의암 유인석 등 많은 애국지사의 자문을 구하여
1906년 착수하여 1907년 3월에 단청을 완공하였다. 그후 오늘날까지 몇차례의 중수와 보수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많은 분들의 노고하에 보존되고 있다.
4) 서재에 모신 분들의 제향을 올릴 대책이 막연하자 1922년에 지방 유림에서 독지성금으로 평촌리 444의 2번지 372평과
평촌리 465의 7번지 301평 계 673평을 구입하여 그 토지의 수입으로서 제항의 비용을 충당하였다.
5) 1984년 9월15일 극동운수 주식회사 사장 유창호씨가 부지대금 중 반액을 희사함으로 평촌리 산16번지 5,700평을 매입
하였다.
2. 효석 문학비와 물레방아
가산 이효석은 1907년2월23일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 681번지에서 봉평 2대 면장인 아버지 이시후씨와 강홍경 여사 사이에
1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분이 바로 근대문학에 선구자이신 저 유명한 <메밀꽃 필 무렵>이 바로 이 고장을 소재로 하여 쓴 이효석이다.
1991년에 문화부는 남안동을 문화의 마을 1호 지정하였으며 서울 거주하는 전상옥씨가 부지를 희사함으로써 1991년에
문학비와 터비를 세웠고 1992년에는 물레방아도 건축하였다.
이효석 문학의 발전을 위해 결성된 봉석회를 비롯한 많은 단체와 주민들의 협조로 매년 기념사업, 효석백일장 등을 거행
하고 있으며 93년에는 효석공원(현 성황당 일대) 조성되므로 봉평을 찾는 이들에게 문학의 향취를 느끼게 될 것이다.
三. 이 고장 학문의 발자취
우리 봉평은 옛부터 문인, 학자가 많이 배출되고 교육열이 대단한 고장으로 마을마다 훈장 선생님과 서당이 없는 곳이
없었다. 모두 수록할 수는 없으므로 대표적인 몇 곳을 수록하고자 한다.
1 . 봉호재와 조사정
지금으로부터 150년전(19세기 중엽) 성인에 가까우신 봉서 신범 선생께서 훈학을 한다고 하자 사방 각처에서 학문에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이에 원길리에 봉호제라는 서당을 지었는데 그 건축비를 신범 선생 사저로는 부족하여 마을
사람들의 협조금으로 충당하였다. 그러나 수학생이 너무 많아 봉호재로는 수용이 불가능하여 별관을 지었으니 이가 곧
조사정이다. 초등반은 봉호재에서 성인반은 조사정에서 향음 주례의 예법을 실습하였다고 한다.『봉서 유고집』중
「봉호재 상량문」,「조사정기」
2 . 포촌여숙
서기 18세기 말 이 나라 장래가 위태로울 때 이화서 선생의 문인 태은 추성구 선생이 홍천군 기린에서 봉평면 사리평으로
이주하여 여기에 서당 짓고 포촌여숙이라 이름하였다. 많은 문인들에 이곳에서 학문을 수양하였는데 문인록에 수록된 문인
만도 100여명에 가깝다. 태은 추성구 선생은 구한말 의병 항일항쟁에도 깊이 관여한 학자로 충의 효열록과 강원도 항일
운동사에 기록이 보인다 『태은집』
3 . 우은당
1945년 8.15해방을 전후하여 우제 이기주 선생이 평촌1리 마진터에다 서당을 차리고 이름을 우은당라 했다. 우제 선생은
이 우운당에서 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유품은 우제집 3권을 비롯하여 많은 서적을 그의 자손이 소장하고 있다.
四. 명승고적
1 . 팔석정과 봉래 양사언
봉래 양사언는 1517년에 출생하여 1584년에 사망한 조선시대 문인이며 학자이다 『청주량씨 대동보 1 권 』
선생은 24세에 진사과에 합격하였으나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6년동안 시묘를 살고 병오년 문과에 합격하여 대동승에 발탁
되었다. 그후 삼등, 함흥, 평창, 강릉도호부사를 역임하고 내직인 성균관사성 종부시정이 되었다가 다시 회양, 철원군수로
나가 강원도의 아름다운 산천을 누비였다고 한다.
산천과 명승지며 시와 풍류를 즐기며 강릉도부사로 재직하던 그때 선생은 영동지방을 두루 살핀 후 자연경치에 탄복하고
영서에는 이만큼 아름다운 곳이 없겠는가 생각하여 영서지방 여러 곳을 다니던 중 이곳 봉평면 평촌리(당시는 강릉부에
소속)에 이르렀다. 아담하고 수려한 경치에 끌려 정무도 잊은 채 8일간 신선처럼 모든 잡념을 버리고 노닐다가 8일경이란
정자를 세우고 매년 3번씩 춘화, 하방, 추국에 찾아와서 이 고장 선비들과 시상을 즐겼다. 그가 임기가 만료되어 내직으로
발탁되니 다시 이곳에 찾아와 정자를 관리하기 위하여 창동에 집 한 채를 짓고 샘을 깊이 파고 봉래고정이라 하였다.
『조선환여승람』 그리고 주변 바위 여덟 군데에 각각 봉래, 방장, 령주, 석대투간, 석지청련, 석실한수, 석평위기, 석구도
기라 써놓았다. 이리하여 이곳을 팔석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봉래 양사언은 이곳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天通九曲中流白이요(하늘은 중국무이산 구곡과 통하며 가운데가 희고) 地接三山半落靑(땅은 삼산에 연접하여 삼신산에
푸르름이 떨어졌다)이라 읊고 이곳을「 四美九奇」(네가지 아름다움과 신기한 아홉가지)라 칭송했다. 즉 「사미」라 하는
것은 동유봉산(東有蓬山), 남유청강(南有靑江), 서유삼산(西有三山), 북유노송(北有老松)을 말함이요, 「구기」라 함은 萬丈
穴龍(만길 깊은 룡굴)과 行石九龍(반석에 구룡이 지난 흔적)을 말한다. 하였으니 돌과 물을 뜻함이다. 일설에 의하면 양봉래
선생은 죽어 신선이 되어 봉래산으로 갔다고 한다(평창군지 평창군 1909.)『 서울대 규장각소장 청주양씨 세보』
2 . 충암(忠 岩)
원길리와 흥정리 경계점에는 충암이라 새겨진 바위가 하나있다. 옛날 어느 누가 새겼는지 알길이 없다. 1890년대 관서지방
에서 이화서 선생의 문인 충재 오영인이 흥정리 입구에 살았는데 혹시 자기의 호를 따서 쓰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도
하였으나 최근 발견된 『 충재기』에는 오히려 자기집 옆에 바위의 충자를 따서 자기의 호를 정했는가 하는 오해를 받을까
두려워서 아니라는 해명까지 쓴 기록이 보인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가 없다.
3 . 노적바위 름봉 화암(露積巖,凜峰,華巖)
바위 하나의 이름이 이 셋이다.
봉평에서 서쪽으로 약 4.1km 떨어진 흥정천 변에는 노적바위라 불리우는 바위가 있다.이 바위는 노적바위란 이름외에도
노적암 곡식을 쌓은 것같다 하여 름봉이라 이름하기도 하며 이 바위에는 정기가 흐른다 하여 화암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정상에는 수령을 알 수 없는 피나무가 있어 10여명이 더위를 식힐 수 있는 곳이다. 이 바위 앞쪽에 흐르는 흥정천에는
만여평이나 되는 섬이 있고 섬에는 수령을 알 수 없는 소나무와 온갖 잡목이 울창하여 여름철 피서 인파가 성시를 이룬다. 이
부근의 자연부락을 화암동이라 부른다. 옛날 무이리 학자 면제 추병즉 선생은 이 바위를 발견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煇門亦有石凜高 衣食繞足活萬人 (마을어귀에 높은 쌀섬이 있으니 의식이 풍족하여 만인이 살수 있구나)
4 . 구영소
흥정 입구서 약 2km 올라가면 기암괴석으로 둘러샇인 소(沼)가 있는데 사람들이 이 소(沼)가 소 구유(먹이통)를 닮았다고
하여 구영소라 불러오고 있다. 옛날에는 명주실 1타래가 다 풀렸다고 할 만큼 물이 깊으니 자연 룡 아홉 마리가 놀았다고
구룡소라고도 하며 양편 바위와 돌이 금강산을 닮았다 하여 청년들은 소금강이라고도 부른다.
이 구영소에 대해 봉서 선생께서 쓰신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맑은 물에 나의 마음 담그니 한가지 절경인데 조는 갈매기와 꿈꾸는 해오라기가 어울려 같네)
5 . 작은산
원길리 사리평 끝에 섬과 바위가 있는데 근래에 와서 젊은이 들이 작은산이라 명 하였다 . 섬과 강변에 수목이 잘자라서
풍치 조화를 이루고 있다.
6 . 솔모종 거리
원길리 본동에는 소나무 몇 10그루가 서 있는 거리가 있다. 옛날에 백로와 황새가 서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봉서 신범선생의 부친 4형제분이 낚시하러 갔다가 소나무 모종을 하였다고 하여 오늘날 솔모종 거리라 부른다.
『 봉서 유고집』 「송백기」
7 . 매지 폭포
덕거 국민학교에서 북쪽으로 약5km 떨어진 계방산 줄기에 있는 폭포이다. 폭포의 높이는 약 10m 정도로 폭포수가 흘러내리
는 양쪽으로 미끄럼틀의 칸막이 모양으로 바위가 둘러 있어 마치 폭포수가 미끄럼틀을 타는 듯한 모습으로 흘러 내리고
있다. 옛날 폭포수 주위에 매화나무가 있었는데 신선들이 내려와서 놀다가 매화 가지를 던졌다고 하여 매지 폭포라 하며 이
마을을 매지골이라 한다.
8 . 천심대
영동고속도로 면온 진입로에서 빠저 성황당 숲을 지나 진조리 용포동으로 1km정도 가다 보면 수통목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
에는 암반과 계곡이 조화를 이룬 곳이 있다. 암반은 화강암으로서 석공이 조각한 것처럼 매끄럽고 섬세하다.
바위 밑은 소가 형성되어 있는데 옛날에는 어름치라는 고기가 서식하였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전 두 선비
(임운천, 장완심)가 세상이 어수선하여 이곳에서 수양을 하다가 이런 곳에 이름이 없을 수 있느냐 하며 각자 자기의 이름
끝에 자를 따서 천심대라 명명하였다 하며 그 앞산 봉에다 완월대라는 정자를 지으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9 . 외솔박이
면온리에서 북으로 올라 가다 보면 옛날 태기왕이 유 하였다는 왕율이라는 마을에 이르게 된다. 이곳 하천 암반에는 소나무
한그루가 외롭게 서 있는데 흙 한삽 없이 신기하게도 서 있다. 구전되는 전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사명당이 소나무 지게
작대기를 지팡이 삼아 짚고 가다가 암반에서 쉬면서 그 작대기를 꽂으며 이 나무가 살면 이 나라가 평화를 찾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 전설과 같이 만고 풍상을 겪으면서도 소나무는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자료 제공자 추상희)
10 . 열목어 서식지 흥정천
서울 한강의 상류에 있는 주천인 흥정천 상류에는 우리 나라에서 회귀종이며 보호어종인 천연기념물 열목어가 서식하고
있다. 1991년도에 미탄면 함준식씨가 송어치어를 방류하였으며 92년에는 봉평면 번영회의 협조와 강원대학 생물학과 교수,
상지대학 생물학과 교수, 강원대 대학원 생물학 전공 박사과정 학생들로 1박 2일간 흥정천의 생태계 및 어류상(魚類相)을
연구한 결과 19종의 어족이 발견됨(미확인6종)으로 강원도 어느 하천보다 많은 어족의 서식하고 있음과 먹이자원이
풍부함으로 흥정천의 보존이 중요시 되었다.
11 . 면온 팔경
봉평의 서쪽에 위치한 면온은 자연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우제 이기주 선생이 면온의 아름다운 자연경관 여덟 곳을 시로
읊으니 이 시가 곧 면온팔경이다.
바위개재에는 봄바람이요 금당산에는 가을 달이로구나
두루봉에 안개 내리니 가마소에는 폭포가 운다
용포동에 구름이 뜨니 진조리에는 저문비가 오네
골말에 아침연기 나니 고든골에는 아침해가 뜬다
五 지명 유래(地名 由來)
1. 봉평
1. 봉평은 예맥(濊貊)이 태기산을 국경으로 할때 예국(강릉)에 속하였던 것 같다.
2. 이조 초에는 강릉부 진부에 봉평리, 기풍리로 있었던 것 같다. 봉서 신범선생이 ꡔ송담기ꡕ와 ꡔ판관대기ꡕ를 쓸 때에
ꡔ珍富 深谷 蓬坪里ꡕ란 대목이 보이는데 이는 아마 사임당이 봉평에 머물던 당시(1525) 진부에 속하였다가 진부와 분리
되지 않았나라고 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옛날 수상은 태기산 밑에 풍년을 바라는 마음에서 기풍이라 하고 수하는 흉풍이 없어 신선 부럽지
않다고 하여 봉평이라고 그 옛날 분들이 지은 것 같다.
3. 1757년(영조33년)에 진부로부터 분면당시 봉평면으로 통합
4. 1857년(철종8년)에 기풍면으로 개칭
5. 1906년(광무10년)평창으로 편입시 봉평면으로 개칭
◆ 참고 자료
① ꡔ 봉서 유고집ꡕ ꡔ송담기ꡕ ꡕ판관대기ꡕ
② ꡔ 사임당 수기ꡕ
③ ꡔ 신천강씨 세보ꡕ(信川康氏 世譜)
내용;강 연이란 사람이 흉도 이인을 피하여 경상도 안동에서 강원도 강릉 기풍방 원길리로 이거 1727년(영조3년)
④ 평창군지 (1909년 융희3년 4월 30일字 發行)에 당시 봉평면에는 봉평리와 면온리가 있다는 기록이 보임.
⑤ 평창군지
● 어떠한 기록에 봉래선생의 봉자를 따서 봉평이라 하지 않았나 한 것을 보았다.
◎ 봉래선생의 봉자를 따서 봉평이라 했다는 주장을 부정하는 이유
※ 신사임당이 봉평 판관대에 거하던 때는 1525년이고
양봉래 선생이 강릉 부사를 재직한 시기는 1565년이다.
즉 양봉래선생이 강릉부사 재직시보다 40년 전에 사임당께서 판관대 거주시기부터 봉평이라는 지명이 보이므로 양봉래 선생의 봉(蓬)자를 따서 봉평이라 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봉래 선생이 너무나 유명하여 우연히 蓬字가 같으니 추측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一 창동리(蒼洞里)
1. 원래는 이조때 창고가 있다 하여 창마을(창말)이라 하였다.그 후 광무10년(1906) 평창군으로 편입되고 1914년 행정
구역을 통폐합 할 때 남안동, 석항동(일명 장촌), 방축동을 병합하여 창동리라 하고 봉평면 사무소와 봉평주재소
(현 봉평지서)를 짓는 한편 시장(市場)을 형성하였다. 이어서 봉평국민학교와 우체국을 건축하여 봉평의 중요지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2. 현재 기관 및 교회, 사찰
1)봉평면사무소, 봉평지서, 봉평우체국, 봉평단위농협, 봉평중고등학교, 봉평국민학교, 봉평보건지소 ,산림협업, 한전
출장소, 예비군중대, 봉평신협
2)봉평천주교회, 봉평장로교회, 늘사랑교회, 봉평감리교회, 안식일교회
선관사, 성황당
◉ 소지명
1. 남안동 : 남안이란 사람이 이조 세조에 쫓겨 숨어 살았다하여 남안이라고 부른다.
2. 남안동 : 1907년 문학가 이효석 선생이 태어난 곳
3. 음치골 :남안동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6.25때 전투가 치열하였다
4. 장촌(일명 석항) : 돌목고개 북쪽에 있는 마을 장씨가 살았다하여 장촌이라고도 한다.
5. 석항동 : 돌목고개 창동 남쪽에 있는 고개 현재 창동서 평촌 고개를 끊고 길이 되었음
6. 방축동 : 창동 동쪽에 위치한 저수지 두 곳(큰방축 작은방축이 있다)
7. 마산 : 창동 동쪽가에 있는 산 말처럼 생겼다고 한다
8. 삿갓봉 : 창동 동북쪽에 솟은산 삿갓 모양의 산
9. 송항치 : 평촌 후군내로 가는 웃 써근새 고개 소나무가 무성하여 사양 목시가 좋았다고 한다.
10. 창말 : 창동리의 옛이름
11. 한답 모퉁이 : 돌목고개 앞에 있는데 물이 귀한 논이라 하여 한답이라 불렀다.
12. 성황당 : 창동4리 강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돌배나무 고목이 여러 그루 있고 당집이 있다. 93년도부터 가산공원을 조성
할 계획이며 봉평중고등학교와 연접하여 있다.
二 원길리(元吉里)
1. 강릉군 봉평의 지역으로써 엄씨와 김씨가 살았다하여 엄김이라 하기도 하고 옛날 태기왕이 점을 치니 길한 곳이라 하여
원길(元吉)이라 되었다고 한다. 광무10년 평창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부드래골, 회동, 북길동, 상포항,
하포항, 신대(새터말), 사리평을 병합하여 원길리로 부르게 되었다. 천왕사 금선사가 있음.
◉ 소지명
1. 솔모종 거리 : 1780년대 봉서선생 아버지 4형제가 솔(소나무)모종 70 그루를 모종하였다하여 솔모종거리라 한다.
2. 못 나오는 골 : 북쪽에 있는 골짜기 매우 험하고 좁아서 한번 들어 가면 나오기 힘들다고 하여 못 나오는 골이라한다.
3. 방축고개 : 원길리에서 동쪽으로 창동리 방축동으로 가는 고개
4. 부드래골 : 원길 동쪽 마을, 부들꼴이 많았다고 한다.
5. 북길동: 원길 북쪽에 있는 마을 천왕사와 금선사가 있다.
6. 불담골 : 원길 남쪽에 있는골 돌부처가 있었다고 한다.
7. 사리봉 : 사리평 앞산
8. 넙쩍꼬댕이 : 사리평과 북길동 두곳에 있다 넙쩍하다고 한다.
9. 여우골(여깽이골) :남쪽에 있는데 여우가 많았다고 한다.
10. 이어내골 : 하포항 뒤골 한문자 乃자를 닮았다 하여 이어내골
11. 작은산 : 사리평 입구에 있는 섬 청년들이 작은산이라 부른다.
12. 새터마을(새터말) :사리평끝에 새로 생겼다 하여 신대라고 한다. 효석 문학비와 물레방아가 있다.
13. 회동 : 옛날 전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전나무골(회동)이라 한다.
14. 추동(楸凍) :윗 개목이 뒷골(가래골)
三 덕거리(德巨里)
1. 덕고산밑에 있는 큰마을이라고 하여 덕거라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때 매지동, 사동, 인흥동, 보래동, 기운동을
합하였다.
덕거국민학교, 세계 정교기도원, 덕거감리교회
◉ 소지명
1. 기운동 : 덕거리 동쪽에 있는 마을
2. 도사치 : 기운동서 동북쪽 용평면 도사리로 넘어가는고개 해발 885m
3. 매지동 : 인흥동 동북쪽에 있다. 매화와 매지폭포가 있다.
4. 보래동 : 태기왕이 보물을 가지고 이곳으로 갔다 한다.
5. 보래령 : 보래동에서 홍천 내면 창내로 넘어가는 큰재 해발 1,011m 현재 도로 공사중에 있다.
6. 절골 : 절이 있었다고 하며 조사단이 사기와 질그릇 몇 조각 발견
7. 이방우골 : 강릉 이방이 죄를 짓고 도망와서 살았다 한다.
8. 인흥동 : 한학자 송와 배진환이란 선생이 모든 만물이 仁字로 시작 된다 하여 인흥이라 하였다고 한다.
四 흥정리(興亭里)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금강평, 거문동, 양지동, 음지동, 유동, 직동, 화명동 원터 연작을 합하였다.
무이국민학교 흥정분교, 흥정리교회, 산채 연구시험장이 있다.
◉ 소지명
1. 거문가니 : 삼거리 남동쪽에 있는 마을, 큰학자가 있었다 한다.
2. 구나무 재 : 양지동 서쪽 서석 피리골로 가는 재 해발 967m 큰 느티나무가 있었다(구목령). 1960년대에 공귀덕 여사가
아기를 업고 빚을 갚으러 이 재를 넘어가 구몽령에서 아기를 안고 동사. 아기는 행인이 발견하여 살았다.(홍천 내면
뱃재에 비석이 있음)
3. 금강평 : 흥정리에서는 제일 큰 마을이며 금강산을 닮았다 하여 금강평이라 한다. 1960년대에는 동명임업 주식회사
후로링 공장이 있다가 화재로 인하여 공장이 소실되었다.
4. 느릅가래 : 음지동 북쪽 골짜기 마을에 느릅나무가 있었다. 안느릅가래, 바깥느릅 가래가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 있었다.
5. 불바래기(火明재) : 내면 좌운으로 가는 재.
6. 삼거리 : 음지동, 양지동, 거문동으로 가는 삼거리에 있는 마을,
현재 무이국민학교 흥정분교가 있다.
7. 원터 : 흥정리 첫마을 행인들이 가다가 지치면 쉬기도 하고 자기도 했다는 원집이 있었다 한다.
8. 九富터 : 옛날 부자 아홉 집이 있었다하여 九富터라 한다.
9. 연작이골 : 제비 모양을 한 연작암이 있어 연작이라 부른다.
10. 양지동과 음지동 : 봉서 유고집에 보면 영지버섯과 벌꿀 농사를 많이 하여 석굴에서 벌이 날던 것을 보고 글을 지으셨다.
과거에는 영지버섯과 벌꿀농사를 많이하여 석굴에서 벌이 날아오르느 게 보일 정도였다.ꡔ봉서 유고집ꡕ
11. 장골재 : 불바라기서 북서쪽 서석 장골로 가는 재.
12. 흥정산 : 흥정리에서 제일 큰산, 해발 1277m
13. 충충바위 : 일명 퉁퉁바위라고도 한다. 강양편에 암석이 절경을 이루고 물이 맑으며 숲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옛부터
학자들의 놀이터로 각광을 받고 있다. 길 우측 도랑옆에는 연대를 알수 없는 충암(忠岩)이라 써 있는 바위가 있는데 글씨
의 마멸 상태로 보아 무척 오랜된 것 같다.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다.
14. 중길이터 : 옛날 중길이라는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15. 구룡소 : 일명 구영소. 소금강, 소먹이통 같다고 구영소, 용 9마리가 있다 하여 구룡소, 금강산 같다고 하여
소금강이라고 부른다.
五 무이리(武荑里)
1906년 평창군으로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백운동, 안흥동, 무이본동을 통합하여 무이리라 칭하였다. 당시
이곳 학자들은 이곳이 중국에 무이산 절경과 같다는 뜻에서 무이리라고 하였다 한다.
무이국민학교, 무이 산돌 감리교회, 무이 안식일 교회
◉ 소지명
1. 노적바위 : 무이리 입구 흥정천변에 있는 바위. 바위 꼭대기에 수령을 알 수 없는 피나무가 있다. 곡석 낫가리 같다고
노적바위, 쌀섬을 쌓아놓은 것 같다고 름봉, 바위가 빛난다하여 화암등 세 이름으로 불린다.
2. 백운동 : 무이리 서북에 있는 마을, 운중선화형 의명당이 있다고함.
3. 뱅가리 : 백운동과 안흥동 사이에 있는 마을을 작은 뱅가리라 한다. 백운동의 발음을 빨리 하다가 뱅가리로 변한것 같다.
4. 서둣골 : 무이리 동북쪽에 있는 골 한때 중석광을 시추하여 현재 광산굴이 있다.
5. 옹장골 : 화암동 서북쪽에 있는 높은 산 옆에 속골이 있다.
6. 사발복뜨기, 투구봉, 안장바위, 룡마봉 : 전설에 의하면 태기왕이 파발봉에서 연락이 없음으로 투구봉에서 투구를 잃고
룡마봉에서 용마를 안장바위에서 안장을 잃었다고 한다.(태기산 전설 참조)
7. 무이고개 : 본동에서 안흥동으로 가는고개
8. 옥산대 : 태기왕이 옥쇄를 잃었다고 한다.(태기산 전설 참조)
9. 양구두미 : 안흥동에서 둔내로 넘어가는 고개. 구릉이 둘이다.
10. 용치미골 : 안흥동 남쪽에 있는골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
11. 큰마을 : 무이리본동에 있는 마을 제일 넓다고 큰마을이라 한다.
12. 진등 : 옛날 학자들이 향음주례의 예법을 실습하였다고 하여 진등(進登)이라 한다.
13. 상굿골 : 진등을 거처서 면온으로 가는 골짜기
14. 호프농장 : O.B맥주회사에서 호프를 재배하고 건조하는 건조실이 있다.
15. 양구두미 : 정상에 T.V 송신소와 무선중계소가 있다.
六 면온리(綿溫里)
옛날 태기왕이 전멸 하였다고 하여 멸인(滅人)이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고종 광무 10년(1901)에 평창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합당시 왕율, 운무동, 길음동, 삼동거리, 직동을 병합하며 면온이라 하였다.
면온 출장소, 면온국민학교, 면온우체국, 면온 안식일교회, 면온감리교회
◉ 소지명
1. 직동 : 삼동거리 남쪽에 있는 마을, 똑바른 골짜기
2. 곡촌 : 삼동거리 동쪽 골짜기에 있는 길음동 마을을 일컬음
3. 더렁산(뒤굽산) : 길음동 동쪽에 있는 산. 해발 777m, 봉평강과 면온천이 합수 하는 굽이 뒷산
4. 바우갯재 : 길음동에서 동쪽 백옥포로 넘어가는 재, 영동2터널(옛봉평 터널)길이 625m
5. 비룡(飛龍)바위 : 골말과 상동거리 사이의 길가에 있는 바위. 바위앞 냇물에서 용이 날아 갔다고 한다.
6. 삼동거리 : 세갈래의 냇물과 세갈리의 길이 있음
7. 따우기골 : 면온 서쪽에 있는골
8. 쇠판이고개 : 면온2리에서 쇠판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9. 양지뜰 : 골말에 있는 들 양지가 바름
10. 왕율 : 섬동거리 서북쪽에 있는마을. 옛날 태기왕이 이곳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11. 외솔박 : 소나무 한그루가 홀로 서 있다고 하여서 외솔박이라 한다.
12. 운무동 : 지대가 높아서 항상 구름과 안개가 낀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
13. 장자터 : 골말 동쪽에 있는 마을 부자가 살았다고 한다.
14. 큰 골산 : 큰골 뒤에 있는산
15. 영동고속도로 : 면온정류장이 있고 봉평 터널이 있다.
七 진조리(眞鳥里)
참사직을 보관한곳이였다 하여 진조리로 명명하였다 한다. 또 참새지기라고도 하였으나 1906년 평창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페합때 용포동, 직동, 서문동을 페합하고 진조리로 명명 하였다.
◉ 소지명
1. 곧은골(직동) : 용포동 북 서쪽에 곧게 있는 마을
2. 서문동 : 봉평의 가장 서쪽에 있어 봉평으로 들어오는 처음이라고 하여 서문이라 한다고 한다.
3. 용포동 소(沼) : 용포동 어귀에 있는소 용이 등천하였다 한다. 일명 천심대라 한다(명승지편 참조)
4. 용포동 : 진조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
5. 수통목 : 용포동 어귀 물통처럼 좁다는데서 유래한 지명
6. 참샘지기
7. 참새지기
8. 서냇재 : 곧은골서 서남쪽으로 유포리 서내로 넘어가는재
9. 영동제1터널과 마을 중앙으로 영동고속도로가 관통하였다.
10. 효석 문학비가 영동고속도로 영동 제1터널 동쪽 태기산 전망대에 위치하고 있다.
八 류포리 (柳浦里)
류포리는 버들개 라고도 하며 대화면 신리와 개수리와 접하고 있고 금 당산 앞쪽에 위치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등매지(登梅地), 수림대(水臨垈), 서천(西川), 상축덕(上축德), 하축덕(下축德)을 병합 하여 유포리라하였다.
등매국민학교, 등매국민학교유포분교, 면온국민학교 유천분교,등매그리스도교회
◉ 소지명
1. 등매지 : 버들개 서북쪽에 있는 마을, 등매국민학교가 있음.
2. 물림터 : 버들개 서남쪽에 평창강 물가에 있음(등매국교 유포분교가 있음)
3. 시계바위 : 버들개 강 건너쪽에 있는 바위. 서울에 해가 뜰 때 같이 뜬다 하여 시계 바위라 한다.
4. 상수림대 : 하수림대, 웃물림터, 아래물림터
5. 상축덕 위축덕 하축덕 아래축덕
6. 서내 : 물림터 서쪽에 있는 마을
7. 서내천 : 서내 마을을 지나 물림터 앞에서 평창강과 합함.
8. 유포고개 : 버들개에서 물림터로 넘어가는 고개
9. 서천마을 : 서천 냇물이 있는 마을 진조리서 넘어가는 서내재 아래에 위치
10. 금당 계곡 : 휴양지로 개발 예정지
九 평촌리(坪村里)
원래 강릉부 봉평면의 지역으로서 들이 넓다고 하며 버덩마을이라하였는데 1906년 평창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후근내(厚根乃)와 쇠판동(釗판洞)을 병합하여 평촌리라 함.
◦사찰 - 효덕사 ◦유적 - 봉산서재
◉ 소지명
1. 구룡소(九龍沼) : 팔석정 밑에 있는 소. 룡 9마리가 있다고 한다.
2. 쇠판동 : 현 금산동
3. 낙수바위 : 구룡소 아래 있는 바위.과거에 낚시터가 되었다 한다.
4. 봉산 : 평촌뒷산. 옛날에는 덕봉산이었는데 봉래 양사언이 노닐다간 후부터 봉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5. 맞인터 : 평촌 맞은 편에 있는 마을.
6.작은쇠판이 : 남안동 동쪽 맞은터 뒤 큰 쇠판이 가기전 마을 .
7.봉산서재 : 1906년 이곳 학자들이 건립하여 율곡과 화서 두 선생 영전을 모신곳.
8.삼신산(일명 삼산) : 봉산 맞은편에 있는 산.경관이 매우 수려하다.
9. 삼형제봉 : 태기왕시절 삼형제 장군이 진을 친 산.(태기산전설참조)
10.섬바위 :평촌 서쪽 산밑강가에 베섬 모양의 바위.섬바위 꼴이 있다.
11.성황골 : 평촌옆에 성황당이 있는 골짜기.
12.썩은새 (후근새) : 평촌 동북쪽에 있는 마을 이조 중엽 석은(石隱) 이라는 李氏가 살았다 함.혹 석은사라고하는 절이
있어다고 한다.
13.여가지골 : 우동짓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14.우동짓골 : 세조때 우동지가 숨어 살았다고 붙여진 지명
15.종대집골 : 평촌리 안에 있는 골. 천종대라는 사람의 집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
16.팔석정(일명 팔일정) : 옛날 봉래 양사언이 강릉부사로 있을 때 이곳에 와서 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7.벼락 바위 : 쇠판이에 있고 그 앞에 터밭골이 있다.
18.범덩골 : 평촌 동북쪽에 있는골. 호랑이가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
19.관모봉 : 평촌 남쪽에 있는 산.
人 脈
이 고장은 산천이 아름다워 옛부터 문인, 열사, 효자, 효부, 열녀가 끊임없이 줄을 이어가고 있다. 지면 관계로 자세한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요점만 수록하고자 한다.
● 율곡 이 이 : 1536년 봄에 봉평면 판관대에서 잉태
● 봉래 양사언 : 1565년경 강릉 도호부사 재직시에 팔석정을 명명하다.
● 강효승 자 석삼 : 1737년(무오) 생원에 급제
● 강사원 자 계염 : 1778년(무자) 영조14년 진사에 급제
● 강자반 자 주석 : 1798년(정종 무오) 초시 생원급제 ꡔ강씨세보ꡕ
● 무우제 하서복 : 1790 (정종 경술) 사마시 성균진사에 급제 유품 어사품으로 당송백선, 주서백선, 관동빈홍록, 경술사
마방목 등이 가보로 소장하고 있다.
● 하서관 자 광녀 : 1790 (정종 경술), 사마시, 초시 생원합격
● 신 석 형 1834 (순조34 갑오)사마시 진사급제
● 신 석 우 1834 (순조34 갑오)사마시 진사급제
* 신석형과 신석우(일화)
신석형과 신석우 두 선비가 주경 야독으로 열심히 학문에 힘쓰던 중 나라에서 사마시 과거(정기가 아니고 특별고시)를 실행
한다는 방이 붙자 형제분이 금번은 형님께서 응시 하시고 아우는 다음 기회에 응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형 석형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출발하고 아우는 봄철에 밭을 갈고자 보쟁기를 소에 얹고 밭을 한참 갈고 쉬는데 벼슬이 빨간 수탉이 날아와
탑손에 올라 서서 울었다. 이것을 본 아우 석우씨는 닭벼슬을 보고 길조이구나 생각하고 행장을 수습하여 형의 뒤를 따라
경기도 양근에서 만나 형제가 나란히 과장에 들어가 사마시에 응시한 결과 두형제가 나란히 진사에 급제(합격) 하였다고
한다. 그 뒤부터 보섯귀에 닭 벼슬이라고 후손에게 전하여지고 있다.
◉ 봉서 신범
성균관 생원 석우의 아들로 1823년 원길리에서 출생 1875년 원길리에서 사망하였다. 문학의 대가로 화서 선생의 학통을
잇고 또한 경통학과 문장력이 뛰어 났으며 많은 유적지를 답사하고 그 유래와 감상문을 기록하였다. 벼슬에는 나가지
아니하고 봉호재와 조사정을 건축하고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학자들 간에는 봉산서재에 율곡과 화서 선생과 같이 그
신위를 모셔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으며 면암 최익현께서 이분은 도통하신 분이라고 ꡔ봉서유고집ꡕ 말미에 쓰셨다.
봉서유고집은 서울대학 규장각에도 소장되었다.
◉ 태은 추성구
이화서 선생의 제자로서 1900년대에 봉평면 원길리 사리평으로 이주하여 ꡔ포촌여숙ꡕ 이란 학당을 건립하고 많은 후진을
가르쳤으며 봉산서재 창립의 주역을 맡았다.
정미의병 봉기 때 박장호 장군과 같이 64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랑천까지 진격하다가 노환으로 돌아 오다 적군에 포로가
되어 갖은 고문을 당했다. 포로가 되어 고문 당할 적에 썼다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전한다.
爲國而死, 吾得死地, 爲身求免, 非吾志也, (사람은 나라위해 죽는데 내가 죽을곳을 얻었다. 몸이 위태롭다고 면함을 구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로다)
ꡔ태은집ꡕ,ꡔ충의효열록ꡕ,ꡔ추씨9백년사ꡕ,ꡔ강원도 항일운동사ꡕ에 선생의 이름이 전한다.
◉ 강벽진 ( 조동대부 동몽 교관)
1907년 정의의병 당시 운강 이강연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숙소와 급식을 제공하고 또 왜군이 들어왔을 때 유인하여 이
지방의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 금남 김진규 자 성언
1843년 강릉에서 출생하여 강릉에서 수학하고 덕거리로 이거하여 덕거정사를 설립하였으며 후진양성을 위해 힘쓰셨다.
많은 유고집을 남겼으나 오늘에는 ꡔ금란고ꡕ3권만 남아있다.
◉ 송와 배진한
1871년에 출생하여 의암 유인석 선생 문하에서 수업을 하다가 20세 나이로 유인석 장군을 모시고 제천 충주 전투에 참전
하였으며 장군을 따라 만주 관동지방까지 갔다 왔다.
23세때 봉평 덕거리로 와서 인흥동의 지명을 지었다. 봉산서재 1차 개축의 주축이 되어 현판을 쓰기도 하였다. (현재 게시)
덕거리에서 많은 후진을 기르고 말년에 둔내 율리로 이주하였다. ꡔ송와집ꡕ을 남겼는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순범 연구
위원이 소장하고 있다.
◉ 여청 김상엽
철종때에 초시합격 관즉통정대부 부총관 겸 수군방어사 고종6년 11월 8일 측명 태은 선생과 같이 봉산서재 차건.
◉ 농현 신선묵
태은 추성구선생과 같이 봉산서재를 창건하고 사회에 모범적인 선행을 하였다는 기록이 ꡔ조선환여승람ꡕ에 있음.
◉ 황문진
태은 추선생과 같이 봉산서재 창건, ꡔ태은집ꡕ및ꡔ서재 연혁ꡕ에 수록되어 있음.
◉ 신상묵.
봉서선생의 손자로 ꡔ봉서유고집ꡕ을 편집하였음.
◉ 차강 박기정
고종11년 8월 13일 출생. 1949년 1월 27일 사망.
의제 권인돈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서예대가로 도내 어느 곳에서나 인정받았다. 명문대가로 전국각처를 돌아 다니며 몇달
씩 묵으니 가족은 생활이 어려워 이곳 덕거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선생은 봇짐지고 다니며 묵화나 병풍을 그려주고 돈이
생기면 독립자금으로 헌납하였다고 한다.(ꡔ태백ꡕ지 1988년 12월호) 오늘날 그분의 유품을 찾는 이가 많다.
◉ 의강 연영훈
봉평에서 한약국을 경영하며 남을 돕는데 앞장섰으며 불우이웃돕기에 솔선수범 하였음은 물론 걸인이 병이 나면 자기 집에
재우며 치료하여 완치되어야 보내니 항상 걸인들이 집에 묵고 있었다. 이에 걸인들도 감탄하여 걸인들 스스로 잔치상을
차려 모셨다고 하니 얼마나 인자 하신가를 알 수 있다. 사망 후 향리에서 송덕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ꡔ조선환여승람ꡕ에
있으나 찾을 길이 없다.
◉ 경은 전호경
부모님을 잘 모시고 이웃과 화목하며 자손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생활은 근검절약하며 대인관계를 친절히 하여 공자의
윤리관을 실천하였다.
ꡔ孔夫子 聖蹟圖續修五倫行實錄ꡕ에 수록.
◉ 이환호
부모님을 잘 모시고 이웃과 화목하며 자손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생활은 근검절약하며 대인관계를 친절히 하여 공자의
윤리관을 실천하였다.
ꡔ孔夫子聖蹟圖續修五倫行實錄ꡕ에 수록.
◉ 우제 이기주
평촌리 마진터에 우은당 이라는 학당을 설립하고 8.15해방을 전후하여 많은 후진을 교육하였으며 당시 학자들간에
추앙을 받았다. 어머니 한씨는 효부상을 받았다는 기록이 ꡔ조선환여승람ꡕ에 전한다. ꡔ우제집ꡕ3권과 많은 서적이 전한다.
◉ 중산 곽영익
품행이 단정하여 사회적으로 모범이 되었고 한문학을 이수한 분으로서 지역사회에 많은 공을 남겼다는 사실이
ꡔ조선환여승람ꡕ ꡔ선행편ꡕ에 기록되어 전한다.
◉ 임봉관
봉평국민학교 초대와 몇차례 교장직을 역임하면서 투철한 인생관과 교육관으로 많은 인재를 육성하여 이고장 발전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 조양환
덕망이 높고 인자하여 8.15해방 이후 봉평면 초대 면장으로 발탁되어 질서와 혼란이 극심한 시절에도 면민을 위한 행정에
힘써 안정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 가산 이효석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에서 태어났다. 현대 문학사의 대표적인 단편문학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 봉평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도 가산 이효석의 대표작품인 ꡔ메밀꽃 필 무렵ꡕ때문이다. 봉평면 진조리 태기산전망대에 효석문학비와
봉평면 원길리에 물래방아와 문학비가 있으며 효석공원 조성도 추진중이다. 매년 효석백일장을 봉석회에서 주관하여
진행하고 있다.
◉ 화봉 정병락
1962년 11월 6일 정부에서 대현 이율곡 선생의 사당을 강릉시 오죽헌에 재정비하고 성역화하였다. 그 후 제1회 율곡제
백일장을 개최하였는데 이 백일장 한시부에 참가하여 장원으로 입상하여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으로부터 직접 상장과 부상을 받았다.
1898년 4월21일 출생, 1981년 (신유) 1월20일 사망.
◉ 한춘택
1949년 태기산에 공비(이북에서 보낸 유격대)가 출몰하자 대한청년단 면온단장으로서 전투경찰대와 같이 지역방위를
하다가 적에 피습되어 전사하였다. 국가유공자로 추서.
◉ 주태준
8.15.해방과 더불어 봉평면 덕거리 이장을 역임하면서 지역 행정에 이바지 하던 중 1950년 6.25사변 바로 직전 봄에 태기산
공비로부터 저격당하였다. 현 국가유공자로 추서.
◉ 김정옥
8.15.해방과 더불어 봉평면 의용소방대장을 역임하면서 소방업무는 물론 지역 방어에 주야 분투하던 중 1950년 봄에 공비의
피습을 당하여 순직하였다. 현 국가유공자로 추서.
◉ 청은 황일부
한평생 봉산서재를 자기의 집보다도 더 소중하게 보호 관리하였다. 또한 서재창건의 참뜻을 간파하고 사라져가는 윤리
도덕관을 일으키고자 행동과 언행이며 예의범절을 몸소 실천하여 이 사회에 올바른 가치관을 심으려 노력하였다.
봉평면의회 초대 의원과 한약방을 경영하였다.
◉ 강흥길 자 강우영
송와 배진환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횡성군 둔내면으로 가서 둔내면 우체국장과 둔내면장을 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재경
둔내면민회에서는 송덕비를 둔내면 비석거리에 본인 생존시 건립하였다.저서 :ꡔ지산유훈ꡕ
◉ 박원홍
봉평면 평촌리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1955년도 봉산서재를 보수한 다음 현판을 섰다. (현재 게시)
◉ 국회의원 장춘근
본적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거주하면서 8.15 해방과 더불어 평창군 대한청년단 단장을 역임하였고. 그후 1948年
봉평면 본가에 돌아와 각급 사회단체장을 두루 거치게 됨은 물론 1952年 초대 지방자치단체의 의회가 구성된 바 본면의회
의원 당선 활동중 간선제로 봉평면장에 역임 만 4년간 면정에 공로가 지대함에 따라 면민의 칭송이 높이 평가되었다.
1960年 제5대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여 치열한 경합지구였으나 평소 공덕으로 면민 유권자 남녀노소가 총궐기하여 선거전에
임한 바 압도적으로 당선 민주당 집권시 약 9개월간 국방 분과위원으로 국정에 임했다. 1961年 5月 16日 군사혁명으로 본적
지에 귀향 기거중 불행히도 건강 불량으로 1976年 6月에 별세되어 現 평창군 봉평면 평촌2리(厚根洞) 에 안장되어 있다.
◉ 박희동
봉평면 창동리 방축동에서 훈학을 하였으며 1972년도 봉산서재를 보수하고 현판을 섰다.(현재 게시)
◉ 최종구
8.15.광복을 맞아 국민운동과 청년운동을 하였으며 봉평면의회 초대 의원과 강원도 의회 초대의원으로 당선되어
문교사회 분과위원장으로 4년간 활동하였다.
◉ 6 . 25 전사자 명단
서기(西紀) 1950年 6月 25日 이북(以北) 공산당이 불법 남침하자 대한민국이 위태롭게 되자 청장년(靑壯年), 학생, 경찰,
애국단체와 온 국민이 이 나라를 지키고자 총궐기하여 용감하게싸우다가 장열히 순국(殉國)하였다.
이에 이고장 출신 용사(勇士)의 넋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그 명단(名單)을 다음과 같이 기록(記錄)한다. 또한 군번 계급을
잘 알 수 없어 기록을 약한다.
▣ 봉평면 전사(순직)자 명단
군 별 전사(순직)자 주 소
육군 김 정 현 봉평면 원길리 2/3
육군 임 동 식 봉평면 덕거리 476
육군 김 성 길 봉평면 덕거리 118
육군 김 석 영 봉평면 창동리 153
육군 최 돈 철 봉평면 평촌리 208
육군 이 만 우 봉평면 원길리 171
내무부 한 용 국 봉평면 무이리 75
육군 이 종 대 봉평면 덕거리
육군 배 진 악 봉평면 평촌리 214
육군 김 종 완 봉평면 원길리 1/2
청년단 조 상 환 봉평면 원길 2 리
육군 최 돈 규 봉평면 원길리 658
육군 장 기 준 봉평면 창동리 2/2
육군 조 덕 형 봉평면 면온 2 리
육군 김 재 권 봉평면 유포리 379
육군 장 상 철 봉평면 창동리 4/1. 288
육군 이 진 수 봉평면 창동리 573/14
육군 김 극 남 봉평면 유포리 237
육군 한 도 수 봉평면 평촌리 27
육군 홍 순 철 봉평면 창동리 3/2. 416
육군 최 대 영 봉평면 창동리 3/3. 165
육군 신 종 철 봉평면 덕거리 2/2
육군 홍 복 학 봉평면 평촌리 584
육군 곽 영 순 봉평면 원길리 843
육군 곽 희 영 봉평면 원길리 434
곽 희 완
육군 최 동 철 봉평면 원길리 1/1. 478
육군 김 재 국 봉평면 유포리 397
육군 이 병 수 봉평면 원길리 290
육군 김 경 춘 봉평면 창동리
해병 추 교 진 봉평면 원길리 556
육군 이 종 택 봉평면 진조리 39
육군 봉평면 무이리 549
육군 윤 한 봉평면 유포리 884
육군 김 영 경 봉평면 원길리 1058
육군 최 종 하 봉평면 덕거리 394
육군 윤 방 기 봉평면 흥정리(흥정국교)
육군 봉평면 덕거리(보래동)
육군 박 봉 선 봉평면 원길리 759
육군 박 영 철 봉평면 평촌리 509
육군 최 대 영 봉평면 유포 2 리
육군 박 현 태 용평면 백옥포리
육군 박 용 선 봉평면 면온리 946
육군 김 정 현 봉평면 원길리 2/3
육군 홍 봉평면 면온리 680
육군 김 상 범 봉평면 평촌리 25
육군 장 기 준 봉평면 창동리 2/2
육군 박 호 석 봉평면 유포리 770
육군 강 봉평면 유포리 641
육군 이 복 기 봉평면 덕거리 475
육군 최 봉평면 평촌리 208
육군 김 봉 대 봉평면 평촌리 335
육군 이 종 학 봉평면 창동리 37
육군 임 동 식 봉평면 덕거리 476
육군 김 성 길 봉평면 덕거리 118
육군 배 진 악 봉평면 평촌리 214
육군 곽 희 영 봉평면 원길리 434
육군 조 병 철 봉평면 덕거리 500
육군 김 남 길 봉평면 면온리 308
육군 오 봉평면 창동리 273
육군 홍 복 학 봉평면 평촌리 584
육군 박 용 구 봉평면 창동리 613
해병 김 남 준 봉평면 면온리 308
청년단 조 상 환 봉평면 원길 2 리
육군 곽 영 순 봉평면 원길리 843
육군 이 종 대 봉평면 덕거리
육군 권 태 기 봉평면
육군 신 봉평면 덕거리 52
의소대 김 장 수 봉평면 창동리 406
육군 이 형 우 봉평면 유포리 135
한청 주 봉평면 덕거리 889
한청 권 중 호 봉평면 덕거리 669
한청 김 석 영 봉평면 창동리 153
한청 조 봉평면 면온 2 리
한청 이 만 우 봉평면 원길리 171
한청 봉평면 유포리 123
한청 봉평면 무이리 55
한청 봉평면 창동리 273
▣ 효자
◉ 죽포 주용수 자 운용
1900년대 봉평면 흥정리에 살면서 한문학을 이수하고 후진을 가르치던중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흥정리 금강평 앞산에
모시고 그 옆에다 초막을 치고 3년간 시묘를 사는데 하도 정성이 지극하므로 단샘물이 솟아 나는가 하면 날마다 호랑이가
호위하였다. 이 소문이 퍼져서 효자 포상을 하였다.
▣ 효부
◉ 청주한씨
시아버님이 위독하여 먼곳에 있는 의원에게 가서 약을 구하고 나니 해가 저물었다. 남자들도 혼자서 넘기 힘든 고개길을
밤에 넘어오니 날이 밝았다. 약을 달여 드려 효력을 보았으며 또한 남편이 사경을 헤매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을 하여
회생시켰다.
이 사실을 이곳 지방 학자들이 연명으로 성균관에 올려 성균관에서 포상을 내렸다. 평촌 이기주 선생의 모친이다.
편집후기
글을 쓴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작업이다. 그 중에서도 점차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잊혀져가는 우리 고장의 엣 역사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더욱더 그렇다. 원고를 손에 잡은지 벌써 5개월이 넘는 시간이 유수와 같이 지나갔다. 그동안 봉평의
역사적인 자료들이 하나 둘 없어져 가거나 잊어져 가는 것을 볼때 후대들에게 죄송한 마음뿐이 였는데 총동문회
부회장이신 하찬수동문께서 많은 날 동안 현지답사와 고증거리들을 수집 연구한 보따리를 풀어놓음으로 가능케 하였다.
물론 이번의 초판 향토사는 아직 미숙한 부분이 많이 있다. 그러한 부분은 계속 연구 검토하여 제2판 3판에서 완성된
모습으로 보여지리라 기대한다. 혹 잘못 알려진 부분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총동문회 향토사 편집위원이나 총동문회
사무실로 연락을 바라며, 이제 그 초판을 두려운 마음으로 총동문회원들께 드린다. 강영하
첫댓글 봉평의 역사공부 잘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