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에 드러난 나무도마위 생채기를 본다. 온몸으로 칼날을 받아내다 떨어져 나간 살점들이 길을 낸 도마 위 상처, 순교자들의 피가 씨앗이 되어 자라난 청주제일교회를 찾았다. 시간과 공간 속으로 난 무수한 길 사이 육거리시장 안, 잘 보존된 고딕양식의 청주제일교회(이건희 담임목사)는 흔히 충북의 모(母) 교회로 통한다.
지난 2004년 11월 교회 100주년 기념에배를 드린 청주제일교회터는 순교의 터전이다. 조선 후기, 청주 영장(營將)의 관사와 옥사(獄舍)가 있던 곳으로 1800년의 신유박해 이래 병인 대 박해에 이르기까지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취조와 고문을 받고, 옥에 갇혔다가 처형된 천주교의 ‘순교성지’이다.
'잘 보존된 고딕의 꿈' 현 제일교회 부지에 있던 옥사에는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갇혀서 심문을 받으며, 배교를 요구 받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양반가문의 처녀들도 있었다. 이들은 배교 요구를 거절하면서 “내일은 꽃이 필 것이다”고 말했는데, 이는 그들의 순교가 씨앗이 되어 새로운 교회의 꽃이 피어날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한다.
바로 그해 충북선교의 아버지 민노아(밀러)목사가 미국에서 태어났고, 그는 1904년 청주에서 선교부를 설립하고, 현 제일교회 터를 사들여 청주읍교회를 세우고,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한다. 이렇 듯 청주제일교회는‘순교자들의 피가 씨앗이 되어 개신교회 청주읍교회로 다시 태어 났다.
영혼과 육신의 틈, 부활의 순간을 기억하는 청주읍교회는 선교사들의 활동 중심이 였으며, 최초의 조직교회 였다. 1909년 평양의 박정찬 장로가 청주로 이사해 오면서 청주읍교회는 당회를 조직해 지방의 여러 교회들을 지도했다. 또한 읍교회 출신 장로들이 선교사들을 도와 각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고, 강단을 지킨 사람들이 많았다. 초창기 충북의 많은 교회들은 제일교회 교인들의 전도로 혹은, 직접 개척에 의해서 설립 되었다.
북장로의 밀러와 김홍경이 1900년 말부터 청주지역을 돌며 전도해 처음 얻은 교인은 박원배, 방흥근, 이영균, 김재호, 이범준 등 이다. 이들은 1904년에 이르러 남문 밖, 방 여섯 딸린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해 김홍경의 처소 겸 예배당과 책방으로 사용했다. 초가집 예배당이 있던 남문로 1가 194번지에는 일제시대 소방소가 있다가 지금은 복잡한 시장 골목으로 변했다.
△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제일교회의 역사 가운데 가장 일관성 있게 추진되어 온 것은 교육이다. 교회가 설립된 같은 해, 교회 청년들은 방흥근의 집에서 학교 교육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청남학교의 시작이다. 변화를 갈망하는 청년들은 교회로 몰려 들었고, 설립 1년만에 교회를 옮겨야 할 만큼 부흥 성장했다.
1905년 교회 설립자인 김원배가 임종 유언으로 100원을 교회에 기부한 것이 계기가 되어 새 예배당 건축 헌금이 시작 되었다. 초가 예배당에서 멀지 않은곳에 지금의 교회터를 마련하게 되었고, 그곳이 바로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았던 청주 영장 관사 기지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다.
교회 건물을 새로 건축 하면서 방흥근의 집에서 모이던 청남 학교도 이곳으로 옮겼고, 청신여학교를 설립해 여성교육을 시작했다. 청주 기독교 역사의 특징인 청년운동의 구심점 이였던 기독청년(YMCA)과 면려회 조직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역사적 의미를 지닌 ‘영사 관사’터에 자리잡은 청주읍교회는 1935년 지금의 청주제이교회(현 청주중앙교회)를 개척하면서 청주읍교회는 청주제일교회로 불리게 되었다.
그 때 3만 3천원을 들여 지은 예배당 2층 전면 중앙에는‘청주제일교회예배당’이 예서체로새긴 돌판 9개가 아치형으로 부착되어 있고, 예배당 건물 서남쪽 붉은 벽에는 6,25 때 큰 폭탄이 떨어져 패인 흔적 들이 여러곳 있다. 일부에서 보기에 흉하다고 벽을 새로 쌓자고 하였으나 교회측은 전쟁을 모르고 자란 아이들에게 전쟁의 상처를 보여주기 위해 그대로 보전하고 있다고 한다.
예배당 뒤쪽으로 돌아가면 ‘망선루’라고 쓰인 비석 하나가 있는데, 이는 1982년 충청북도 지방유형문화재 110호로 지정된 ‘망선루’가 있었던 곳이다. 망선루는 본래 취경루(聚景褸)로 양반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거나 관찰사가 기생을 불러다 술잔치를 벌리던 누각으로 지금의 쥬네스 터에 있었다. 옆에 맑은 연못이 있고, 사방이 훤히 트여있어 주변의 정취가 수려했다고 한다.
고려말 공민왕 10년(1361)흥건적이 처들어와 완이 경상도까지 피신했다가 돌아오던 중 청주에 수 개월 머물면서 과거를 치르고, 합격자의 방을 이곳에 걸었던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1921년 일제가 도시계획이란 미명아래 무덕전(체육관) 신축을 빌미로 헐어버리자, 청주기독청년회는‘망선루’재건 운동을 전개하고, 쌓여있던 자재를 가져와 제일읍교회 마당에 건물을 재건해 청남학교와 청신여학교, 상당유치원 등 한글강습소, 각종집회 및 강연장으로 활용 했다. 광복 후에는 청주 최초의 인문계 사립 세광중·고등학교가 이곳에서 탄생됐다. 즉 망선루는 청주가 교육문화도시임을 웅변해주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로간부인 기념비
예배당을 돌아 나오다보면 담벼락 밑 숨져있는 풀꽃들 사이에 오롯이 서 있는 작달막한 비석 하나 한숨처럼 떠 있다. 청주에선 가장 오래된 한글 비석으로 알려진‘로간부인 긔념비’다. 로간 부인은 센트럴 대학 기독청년회와 여자기독청년회를 지도하다가 남편이 사망하자 한국선교를 지원해 북장로회의 요청으로 청주로 옮겨 청주지역 여성 선교에 열심을 다했다. 탑동에 있던 로간부인 방 문 앞에는 늘 짚신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고 한다. 청주 여성들에게 로간 부인은 언제나 찾아가 만날 수 있는 ‘자애로운 어머니’였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 여성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광복 후 교인 중 조윤순은 충북도청에서 여성분야를 전담하는 책임자가 되기도 했다.
80년대에는 청년회를 중심으로 민주화, 도시빈민, 노동, 농민, 학생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충북 민주화의 성지’로, 90년대 이후에는 지역 운동 단체의 요람으로 성장한 청주제일교회는 지난 2004년 11월 15일 교회 설립 100년을 기리는 기념예배를 드렸다.
이날 이건희 담임목사는 “급격한 변화 속에서도 우리 교회는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교회의 본질을 찾고, 교회의 자기정체성 확립을 위해 끊임없는 자기갱신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고, “사람을 키우는 교회”, “양적, 질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성장하는 선교 공동체로써의 사명을 다하는 교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러한 믿음에 이르는 순례의 길에서 어떤 형태로든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길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길이야 함을 청주제일교회 앞마당 돌벽에 더께진 마른 이끼 위에 발자국 하나 낙관처럼 찍어두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