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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시대별로 본 안식일 준수
1) 창조시 부터 족장시대 (창2:1-3, 8:4,10,12)
①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칠일(주일) 제도를 봄으로 (창8:4,10, 창8:10,12)
참고) 제도는 역사가 있었음을 증거함. 또한 역사가 있어야만 제도가 생김. 그역사는 기념일을 나타냄. 그러므로 안식일은 창조시부터 족장시대에 이르기 까지 계속 지켜져 왔다.
“안식일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기 2500년 이전에 제정되었다. 그것은 창조때에 제정되었다” (C.B.헤인즈, 그리스도인의 안식일 p.17)
2) 아브라함의 시대 (창26:5)
3) 모세의 광야의 시대 (출16:4,5,13-30)
“광야에서 장기간 체류하던 때에 매 주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희 마음에 안식일의 신성함을 감명시키려고 고안된 삼중 이적을 목격하였다.”
(부조와 선지자 상권 P.385)
참고) 오랜 노예 생활로 하나님과 율법에 대한 지식을 잊어벼려 우상숭배와 이방습관에 완전히 몸에 배여있으므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잊어버린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새롭게 회복시켜 주며 우상숭배와 이방습관에서 벗어나게 하는 최선의 길이였기 때문이다.
① 왜 하나님께서는 안식을 계명을 제일 먼저 저들에게 회복시키셨는가?
⇒ 안식일은 하나님께 대한 가장 바르고 참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참된 지식을 알려 주므로.
4) 시내산 후 안식일 (출20:3-17, 출32:15,16, 신10:1-10)
참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시내산에서 친히 십계명을 손으로 써서 주심으로 잊어져 버리고 망각된 하나님의 율법의 구체적 조목을 말씀하심. - 그 근본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5) 바벨론 포로를 전후로 하여 안식일
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된 주원인이 무엇이라고 성경은 말하는가?
(렘17:19-27)
② 그리하여 계속적으로 선지자는 어떻게 하였는가?
(사56:1-8, 사58:13,14)
③ 바벨론 포로 이후에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무엇을 회복하고 거룩히 준수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는가?
(느13:17-32)
참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존중하며 따르며 순종하는 것을 말하지만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며 멸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법을 거룩히 지키게 되는 것이다.
(요일5:3, 계14:12, 요14:15)
6) 그리스도 당시의 안식일
① 그리스도께서 친히 지키심 (눅14:6)
*(벧전2:21) ---“우리로 그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심”
②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이후에 안식일이 거룩히 지켜질 것과 그 어떠한 경우에도 안식일의 거룩함이나 신성함이 더럽혀져서는 아니 될 것을 말씀하심. (마24:19,20)
*(눅23:56) --- 예수님 따르는 자들은 예수님 죽음 이후에도 거룩히 지킴
7) 초대 그리스도인의 안식일 ⇔ 사도시대
본 문 교 회 년 대 집 회 수
㉠ 행13:14, 42-44 안 디 옥 45년 2번
㉡ 행16:12-13 빌 립 보 53년 1번
㉢ 행17:1-2 데살로니가 53년 3번
㉣ 행18:1-4,11 고 린 도 54년
참고) 바울이 단순히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을 찾은 것은 그들을 만나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지 않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켰음과 동시에 안식일의 참된 주인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소개하고 그러므로 저들에게 참된 안식일의 의미와 목적을 설명하여 주어 잃어버린 참된 안식을 회복시켜 주는데 있었다.
① 사도요한 (계1:10)
※(막2: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그분의 안식일을 제정하셨으므로”
8) 신천지에 가서도 구원받은 자들이 안식일을 지킴 (사66:22,23)
9) 그러므로 참된 하나님의 백성과 여자의 남은 자손은 무엇을 지키는가?
○ 계 12:17
⇔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
○ 계 14:12
9. 각 시대의 안식일 준수에 대한 역사적 언급들(초대 교회이후 부터)
1) 초기 배교 시대
① 제 1세기부터 5세기까지 역사적 증거에 대한 요약
1세기부터 5세기까지 현존하는 역사적 문헌들을 주의 깊이 살펴보면 참괸 성경상 안식일의 신성성이 일요일로 얾겨진 것은 길고도 점진적인 과정이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미시간주 베리엔 스프링스에 위치한 앤드루스대학교의 약사학 교수인 케넷 스트랜드(Kenneth Strand) 박사는 이렇게 단언한다. “2세기전까지는 그리스도인들이 매주 일요일을 기념한 구체적인 증거를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2세기 동안에 첫 구체적인 언급은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에서 나오는데, 이 곳은 또한 제칠일 안식일 준수를 초기에 거절했던 곳이기도 하였다”(The Sabbath in Scripture and History. p.330.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 1982)
왜 알렉산드리아와 로마가 안식일 진리를 다른 대부분의 도시보다 먼저 포기하였는가? 초대 기독교를 이해할 때 그 대답을 발견할 수 있다. 신약의 기독교화는 주로 개종한 유대인들로 구성되었고, 후에 수많은 이방인들이 교회로 떼지어 들어왔다. 초대 기독교 신자들은 참 안식일을 준수함으로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신실히 지지한 반면에, 그들의 배경이 태양 숭배에 젖어 있던 새로운 개심자들이 더욱 안식일을 포기하였다. 기독교의 중심이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이방인 개종자들은 첫째 날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부활에 강한 영향을 받았고, 태양 숭배에 대한 그들 자신의 배경으로 인해 더욱 쉽게 타협 방법을 용납하였던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형편은 로마의 모든 도시의 전형은 아니였다. 5세기의 교회사인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Socrates Schilasticus)는 다음과 같은 의미 심장한 통찰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세계의 거의 모든 교회가 매주 안식일에 신성한 신비(성만찬)를 기념한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고대의 유전 때문에 이것을 행하기를 중단하였다. 알렉산드리아 근처의 애굽인들과 테베의 거주자들은 안식일에 그들의 종교 모임을 가진다”(Socrates Scholasticus, Eccelsiastical History, 5. 22 [NPNF]/22:132)
“콘스탄티노플과 거의 모든 곳의 사람들이 주일 중 첫날과 마찬가지로 안식일에 함께 모이는데 그 관습이 로마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결코 준수되자 않았다” (Sozsmen, Eccelsiastical History 7. 19[NPNF]2/2:390).
우리기 이미 발견한 대로 안식일을 일요일로 바꾸려는 시도는 서서히 일어났다. 일요일이 처음에 기독교 내에 들어왔을 때 그날은 일하는 날로 계속 남아 있었으나 부활을 존숭하는 예배의식이 포함되었다. 위의 인용문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대로 그것은 즉시 안식일을 대신하지 않았다. 200년동안(주후 100-300) 일요일 준수는 참된 안식일 준수와 나란히 존속되었으나 콘스탄티누스황제와 다른 이들이 세운 방향이 결국에 가서 안식일이 일요일로 바꾸어지도록 인도하였다.
그러나 신실한 하나님의 남녀들은 그러한 경향을 저항하였다. 현존하는 역사적 문서들은 안식일 예배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리를 주창해 온 신실한, 순종하며 따르는 자들을 가지고 계셨다. 비록 안식일 진리의 촛불이 깜박거렸을지라도 충성된 진리의 굳센 용사들이 그 불꽃을 보존하였던 것이다.
2) 주후 2세기
요세푸스(Jesephus) - “그리스의 어떤 도시나, 또한 어떤 야만족이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제칠일에 안식하는 우리의 관습이 이르지 않은 곳은 없다!”(M' Clatchie, Notes and Queries on China and Japan, edited by Dennys, Vol. 4, Nos 7, 8, p.100).
필로(Philo) - 제칠일이 이 도시나 저 도시의 축제가 아니라 전세계의 축제라고 선언함(M' Clatchie, Notes and Queries, Vol. 4, 99)
3) 제2세기
초기 그리스도인들 -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에 대한 큰 존경을 가졌고 그날을 헌신과 설교로 보냈다. 그들은 여러 성경구절에 그런 취지로 나타나는 바, 그 습관을 사도 자신들로부터 가져왔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Dialogues on the Lord's Day, p.189.London:1701 by Dr.T.H.Morer, a Church of England divine).
“‧‧‧안식일은 전체 백성의 생활과 그들을 연합시키는 강한 끈이었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킴으로 그들은 예수의 모본만이 아니라 그 계명을 좇았던 것이다”(Geschichte des Sonntags, pp.1314).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의 안식일을 지켰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오랫동안 함께 안식일에 집회를 하였고, 율법책의 일부를 낭독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라오기게아회의 때까지 계속되었다”(The Qhole Qorks of Jeremy Taylor, Vol.Ⅸ, p.416, R.Heber's Edition, Vol ⅩⅡ, p.416)
“고대 안식일이 남아 있었고, 또 우리 주님이 돌아가신 후 약 300년간 동방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주의 날의 경축과 아울러 준수되었음이 분명하다”(A Learned Treaties of the Sabbath, p.77).
참고) 여기에 저자가 언급한 “주의 날”은 성경이 말하는 안식일인 참된 “주의 날”이 아니라 일요일이다. 위의 인용구는 사도들이 죽은 지 얼마 후인 초기 세기에 일요일이 사용되었음을 보여 준다. 바울이 자신의 죽음 후 진리로부터의 큰 “배도”가 곧 일어날 것을 예언한것을 회상해 보라.)
4) 제3세기
이집트(옥시린쿠스 파피루스, 200-250 A.D.) - “너희들이 안식일을 진정한 안식일로 만들지 않고는 하늘 아버지를 보지 못할 것이다”(The Oxyrhynchus Papyri, pt. 1, p. 3, Logion2, verso4-11, London:Offices of the Egypt Exploration Fund, 1898).
초대 그리스도인들 - “제칠일 안식일은 ‧‧‧라오디게아 종교회의에서 안식일 준수를 폐지하기까지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엄수되어졌다”(Dissertation on the Lord's Day, 33, 34, 44).
팔레스틴에서 인도까지(동방교회) - 주후 225년까지는 (안식일을 준수하는) 동방교회의 큰 교구나 관구가 팔레스틴에서부터 인도에 걸쳐남아 있었다(Mingana, Earli Spread of Christianity, Vol. 10, p.460).
인도(불교 논쟁, 주후 220년) - 북 인도의 키샨 왕조는 그들의 매주 안식일 준수를 불교 승려가운데서 통일하도록 바이셀리아에서 유명한 불교 승려회의를 소집하였다. 어떤 이들은 구약의 글들에서 너무 감명을 받아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 시작하였다(Lloyd, The Creed of Half Japan, p.13).
5) 제4세기
이탈리아와 동방 - “그것은 동방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리고 서방에서는 부분적으로 교회의 관습이었다. ‧‧‧밀란의 교회에서‧‧‧토요일이 매우 존중히 여겨진듯이 보인다. ‧‧‧동방교회나 또는 그날을 지켰던 그 외의 교회들이 유대주의화 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함께 안식일에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기 위하여 왔다” (History of Sabbath, Part 2, Part 5, pp.73,75, London:1636, Dr. Heylyn).
라오디게아 종교회의 - 365. -“법규 16-토요일에 복음서와 성경의 다른 일부분을 크게 낭독할 것이다.” “법규 29-그리스도인들은 유대주의화 하거나 토요일에 게을러서는 안되며, 그날에 일하여야 한다. 그러나 주의 날에는 특별한 존경을 드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가능하면 그날에 일하지 말 것이다”(Hefele'a Councils, Vol. 2, p.6).
동방 - “고대 그리스도인들은 토요일 혹은 제칠일 준수에 매우 세심하였다. ‧‧‧모든 동방교회들과 세계의 가장 큰 지역이 안식일을 한 축제로 준수하였음이 명백하다. ‧‧‧아다나시우스(Athanasius)도 그들이 안식일에, 유대주의에 감염되어서가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를 예배하기 위하여, 종교집회를 가졌음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에피라니우스(Epphanius)도 똑같이 말하고 있다” (Antiquities of the Christian Church, Vol. Ⅱ, BookⅩⅩ, Chap. 3, Sec. 1, 66. 1137, 1138).
아비시니아(Abyssinia):이디오피아) - “이 세기의 후반부에 밀란의 성 암브로스는 공식적으로, 아비시니아의 감독 무세우스가 세레스(중국)국의 거의 모든 지역을 여행하였음을 언급하였다. 17세기 이상 아비시니의 교회는 토요일을 젯쩨 계명의 성일로 계속해서 거룩히 지켜 왔다”(ambrose, De Moribus, Brachamnorium Opera Omnia, 1132, found in Migne, Patrologia Latina, Vol. 17, pp.1131-1132).
스페인-서기 305년 엘비라종교회의 - 엘비라종교회의의 법규26은 그 당시 스페인의 교회는 제칠일인 안식일을 지켰음을 보여주고 있다. “매 안식일에 금식하는 문제에 대하여:매 안식일에 금식하는 오류를 시정하도록 결의함.” 이 종교회의의 결의는 안식일을 낮추고 백성들에게 그 날을 비위에 거슬리는 날로 만들기 위해 금식일로 명령한 로마교회의 정책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페르시아 주후 335-375 -(샤펄 2세의 40년간의 박해) 기독교에 대한 대중의 불평 - “그들은 우리의 태양신을 경멸하고 안식일에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그들의 죽은 자를 땅에 묻음으로 신성한 땅을 더럽히고 있다” (Thruth Triumphant, p.170).
6) 제5세기
5세시의 그리스도인들 - 5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대 안식일의 준수가 기독교회 내에서 계속되었다. 제롬은 당시에(주후420년)매우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에 일상 업무의 일을 행하였다.(Treaties of the Sabbath Day, by Dr. White, Lord Bishop of Ely, p.219)
프랑스 - “이와같이 저녁예배나 저녁기도를 제외하고 토요일(안식일)과 일요일을 제외한 날에그들 가운데공적 집회가 없었다” 요한 카시언은 프랑스 남부에 있는 자신의 수도원에서 안식일과 일요일을 모두 준수하도록 권장하였다. 그는 주일의 제칠일이 창조의 안식일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손가락으로 돌비에 기록하시어 모든 시대의 인류에게 주셨다고 가르쳤다. 그는 일요일만을 주수하게 하는 로마의계획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였다. 비록 케시언이 프랑스에서 용납된 일요일과 마찬가지로 안식일 주수를 실행하도록 시도하였으나 로마교회 당국은 배격하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안식일 준수를 위한 계획이 프랑스에서 결코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프리카 - “어거스틴은 아프리카의 이웃한 두 교회가 하나는 제칠일 안식일을, 다른 하나는 그날에 금식하는 사실에 대하여 한탄하였다”(Dr. Peter Heylyn, The History of the Sabbath, p. 416).
스페인 - “암프로스는 (그 자신이 증언했듯이) 제칠일을 안식일로 성별했다. 암브로스는 토요일 안식일을 준수하고 있었던 스페인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Thruth Trliumphant, p.68).
시도니우스(소트족의 데오도릭왕에 대해 말함. 주후4354-526) - “주의 날과 같은 방법으로 안식일을 지키고 거룩한 집회를 여는 것이 이전의 동방의 관습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반면에 서방의 백성들은 주의 날에 만족하고 안식일을 기념하는 것을 소홀히 하였다”(Apollinaris Epistolse, ilb,1,2:Migne, 57).
이탈리아-밀란 - “밀란의 저명한 감독인 암브로스는 자신은 밀란에서는 안식일을 지키고, 로마에서는 일요일을 준수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로마에서는 로마인처럼 행해하’는 속담이 생기게 되었다” (Heglyn, The History of the Sabbath, 1612).
콘스탄티노플 - “콘스탄티노플과 거의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주일의 첫째 날과 함께 안식일에 함께 모였는데그 관습이 로마나 알랙산드리아에서는 결코 지켜지지 않았다”(Socrates, Ecclesiastical History, Book 7, chap.19)
이집트 - “이집트에는 그밖의 다른 지역에서 세운 제도와는 반대로 사람들이 안식일 저녁에 함께 모이고 비록 그들이 식사를 이미 하였을지라도 성만찬에 참가한 여러 도시들과 마을들이 있었다”(Sozomen, Ecclesiastical History, Book 7, ch. 19).
교황 인노센트 402-417년 - 교황 실베스터는 교회로 하여금 안식일에 금식하도록 명령한 첫번째 사람이었으며 , 교황 인노센트는 자기를 순종했던 교회에 지켜야 할 법으로 만들었다.(안식일을 좋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인노센트는 토요일 또는 안식일에 항상 금식하도록 명하였다”(Dr. Peter Heylyn, History of the Sabbath, Part 2 ch. 2, p.44).
7) 도망간 노예와 왕세자가 성경 진리를 증거함
(제6세기에서 11세기까지 보존된 안식일 진리)
자기가 살던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붙잡힌 배트릭은 매를 맞은 후 기다리고 있는 배로 끌려갔다. 그가 의식을 차렸을 때는 자기가 노예로서 아일랜드로 수송되고 있음을 알았다. 거기서 잠깐동안 일하다가 탈출할 기회를 찾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고울 지방으로 도망을 갔다. 그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침례를 받았다. 그가 노예로 있던 나라에 복음 전할 책임을 느껴 그는 아일랜드로 배를 타고 갔다. 여기서 그는 감동적인 성서설교를 하여 많은 사람들을 십자가 밑으로 인도하였다. 심지어 아일랜드 왕족의 “상왕”들도 그의 심오한 영적 설교에 감명을 받았다.
그 결과 왕자 코날이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패트릭에게 침례를 받았다. 코날의 증손자 콜룸바는 그의 어머니 에이트니의 왕족 계보를 따라 왕위에 오를 서열에 있었다. 콜룸바는 패트릭이 전파한 성경 기별을 받아들였으며 그리스도의 사업을 위하여 왕위를 포기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패트릭을 따라 그는 성경을 믿음의 유일한 기초로 높였고 그가 “그리스도의 율법”이라고 불렀던 십계명을 사랑으로 순종할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하나님의 신이 콜룸바를 통해 임있게 역사하였으며, 그는 주후 536년경 영국 연안에 가까운 작은 아이오나 섬에 기독교 학교와 선교 센터를 세웠다. 그는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을 최소한 300번 손을 베겼을 것이라고 한다.
“영국의 켈트 교회”라는 탁월한 그의 저술에서 레슬리 하딩박사는 켈트 족의 뛰어난 특징중의 하나는 성경의 안식일을 신성히 여긴 것이라고 하였다. 콜룸바의 마지막 임종의 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스코들랜드에서 34년간 계속 수고한 후 그는 분명하고도 공개적으로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였으며, 6월 9일 토요일에 자기 제자 디에르미트에게, ‘오늘은 안시길이라고 부르는 날, 즉 안식의 날이요’ 또 내게 안식이 될 것이니 그것은 내 수고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앤드루 랑은 켈트 교회사에 대해 쓰기를, “그들은 일요일에는 일하였으나 토요일은 안식일로 지켰다”고 말한다. 모펫은 주의 깊게 연대를 매긴 그의 스코들랜드 종교사에 이렇게 첨가하였다. “스코들랜드와 마찬가지로 아일랜드 초기의 켈트 교회에서는 유대인의 안식일인 토요일을 노동으로부터 휴식의 날로 지킨 것이 관습이었던 것 같다. 그들의 문자적으로 주일의 제칠일에 넷째 계명을 순종하였다.”
하나님의 진리의 투사들인 페트릭과 콜룸바, 한사람을 도망했던 노예였고 또 한사람은 왕위 계승자였던 그들이 암흑시대에 아일랜드와 스코들랜드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밝게 비추었던 것이다.(Truth Triumphant, Pacific-publishing, 1944, p.108)
8) 제6세기
스코틀랜드교회 - “이 후자의 경우는 우리가 살펴본 대로 그들은 토요일에 모든 일에서 쉬고 안식일로 지켰던 아일랜드 초기 수도원 교회의 관습은 따랐던듯이 보인다” (W.T.Skene, Adamnan Life of St. Columba. 1874, p.96)
스코들랜드와 아일랜드 - “우리는 여기서 아일랜드 초기 수도원교회에서 토요일 혹은 안식일을 휴식의 날로 지켰던 관습에 대한 암시를 보는 것 같다.” (History of the Catholic Church in Scotland, Vol. 1, p.86)
9) 제7세기
스코들랜드와 아일랜드 - 프린스천 대학교의 교회사 교수인 모팻박사는 “스코들랜드와 마찬가지로 아일랜드 초기의 켈트교회에서는 유대인의 안식일인 토요일을 노동으로부터 휴식하는 날로 지킨 것이 관습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문자적으로 주일의 제칠일에 넷째 계명을 순종하였다”고 말한다.(The Church in Scotland, p.140)
“겔펠트족들은 불가타 성경(카돌릭성경)이 아인 다른 라틴어 성경을 사용하였고, 일요일에 특별 종교 예배와 함께 토요일을 안식의 날로 지켰다”(Flick, The Rise of the Medieval! Church, p.237)
로마 - 그레고리 1세(주후560-604)는 “안식일에 어떤 일도 금한 로마 시민들”을 반다하여 기록하였다.(Nicene and Post-Nicene Father, Second Series, Vol XIII, p.13, epist.1)
교황 그레고리 1세(주호590-604) - “하나님의 은혜로 감독이 된 나 그레고리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인 로마 시민들에게 말하노니, 너희 가운데 어떤 잘못된 영을 가진 사람들이 거룩한 믿음을 타락시키고 반대하는 일을 퍼뜨려, 안삭일에 아무것도 못하도록 금하는 도다. 내가 그들을 적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자들이라는 것 외에 무엇이라고 부르겠는가?” (Epistles, b.13:1)
10) 제8세기
리프티네 회의(벨기에 - 745년 보니파스가 참석함) - “이 회의의 제3훈시는 라오디게아회의의 법령을 언급하면서 안식일을 준수하는 일에 대해 경고한다” (Dr.Hefele, Conciliengesch, 3, 512, sec.362)
인도, 중국, 페르시아 등 - “동방 교회 신자들과, 로마와 연결이 결코 없었던 인도의 성 토마스 그리스도인들 중에 안식일 준수가 널리, 그리고 오래 퍼져있었다. 안식일 준수는 또한 칼케돈회의 이후에 로마로부터 떨어져 나간 아비시니안, 야코바이트, 마로나이트 및 아르메니안 단체 가운데 유지되었다.” (Schaff-Herzog, The New Encyclopedia of Religious Knowledge, art. “Nestorians”; also Realencyclo Paedie fur Protestantische Theologive und Kirche, art, Nestorinaer)
중국(781년) - 주후 781년 유명한 중국 기념탑 대리석에 그 당시 중국의 기독교 성장을 말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비문은 763자로 되어 있는데 장안시 근처에서 1625년에 발굴되어 현재는 “사판 숲”에 있다. 그 돌판에 안식일이 준수되었다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제칠일에 우리는 마음을 정결케 한 후 희생을 드리고 우리 죄의 사면을 받았다. 이 종교는 너무나 완전하고 훌륭해서 이름을 짓기 어려우나 그 탁월한 계명들로 어둠을 밝혀 주고 있다” (Christianty in china, M.I'Abbe Huc, Vol.I, ch 2, pp.48-49)
11) 제9세기
불가리아 - “복음화를 위한 초기 시절의 불가리아는 안식일에 아무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Responsa Nicolai Papae I and consulta Bulgarourm, Responsumio, tound in mansi, Sacro-rum concilorum Novaet Amplissima Collectio, Vol.115; p.406;-also Hefere, Conciliengeschiote, Vol.4, Sec.478)
불가리아의 통치자 보가리스의 서신에 대한 교황 니콜라스의 답장 “질문 6-일요일에 목욕하는 것을 허락한다. 질문 10-일요일에는 일하지 말고 쉬어야 하지만, 안식일에는 쉬어서는 안된다” (Hefere, 4;346-352, Sec.478)
“교황 니콜라스 1세는 9세기에 불가리아를 통치하는 왕에게 보낸 긴 문서에서 일요일에는 일하지 말고 쉬고, 안식일에는 쉬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다. 희랍 교회의 수뇌는 법왕의 간섭에 감정이 상하여, 법왕을 파문한다고 선언하였다” (Truth Triumpamt, p.232)
12) 제10세기와 11세기
동방교회-쿠르디스탄 - “네스토리우스파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며 안식일을 지킨다. 그들은 고해성사나 연옥을 믿지 않는다” (Schaff-Herzog, The New Encyclopaedia of Religious-Knowledge, art. "Nestorians")
스코들랜드 - “다른 날처럼 주의 날에 온갖 종류의 세상 사업에 몰두함으로써 그들은 주의 날에 돌려야 할 존경심을 소홀히 하는 것이 그들의 또 다른 관습이었다. 그것은 법에 반대되는 덕이라고 마가렛 여왕은 권세와 논리로서 그들에게 입증하였다. 그녀는 ‘그날에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주의 날에 존경을 돌리고, 이날에 더이상 아무 육체 노동을 하비 말자. 교황 그레고리 성하도 그 같은 증언하고 있다’고 하였다” (Life of Saint Margaret, Turgor, p.49, British Museum Library)
스코틀랜드(역사가 스킨이 마가렛 여왕의 사업에 대해 언급함) - “그녀의 다음 주안점은 그들이 주의 날에 대해 온당하게 존경을 돌리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이 후자의 경우는 그들은 우리가 아일랜드 초기 교회에서 그 자취들을 발견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토요일을 그들의 안식일로 삼아 모든 노동으로부너 안식하였던 습관을 따랐던 듯하다” (Skene, Celtic Scotland ,Vol.2, p.349)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 레트클립 바넷은 1060년 콜룸바 형제들을 파멸시키려고 처음 시도했던 열렬한 스코들랜드의 카돌릭 여왕에 대한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 문제에 있어서 스코들랜드 사람들은 일요일 대신에 토요일을 안식의 남로 준수했던 고대 아일랜드 교회의 전통적인 관습을 지켰을 것이다” (Barnett, Margaret of Scotland Saint, p.97)
클레르몽회의 - “첫 십자군 운동 기간에 교황 우르반 2세는 클레르몽 회의(1095년)에서 안식일을 동정녀 마리아를 존경하는 날로 구별하도록 조서를 내렸다” (History of Sabbath, p.672)
콘스탄티노플 - “너희들이 유대인들과 같이 안식일을 지키고 또 우리와 같이 주의 날을 지키기 때문에 너희들은 이러한 준수를 통해 나사렛 파를 모방하려는 것같아 보인다” (Migne, Patrologia Catina, Vol.145, p.506; also Hergenroe ther photius, Vol.3, p.746)
희랍교회 - “안식일 준수는 모든 사람들이 아는 바와 같이 헬라인들과 라틴족들 사이의 혹심한 논쟁의 주제이다” (Neale, A History of the Holy -Eastern Church, Vol.1, p.731)
13) 진리의 종을 울리는 알프스 산들
(안식일 진리가 12세기 부터 16세기 까지 보존됨)
중세시대 법왕권에 의해 박해가 고조된 시기에라도 안식일이 안식의 날로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니었다. 비록 모든 왈덴스인들이 성경의 안식일을 지켰다는 확실한 역사적 증거는 없지만 그들의 일부가 안식일을 지켰다는 것은 분명하다. 왈덴스인들은 성경외의 다른 신조를 용남하지 아니한 성경을 믿는 기독교의 한 그룹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유일한 교회의 머리로 쳐다보았다. 이 믿음 떄문에 그들을 자주 격력한 박해를 받았다.
남프랑스와 북이탈리아 산속의 은신처에서 그들은 프랑스와 스위스와 이탈리아에 상인으로 가장하고 내려왔다. 진리를 진정으로 구하는 자들을 끊임없이 찾으면서, 그들은 목숨을 걸고 길게 늘어뜨린 옷 속에 주의 깊게 바늘로 꿰매어 숨긴, 손으로 베낀 소중한 셩경원고들을 자주 나누어 주었다.
앤드루스대학교의 다니엘 어거스버거박사는 월덴스인들에 대해 “‧‧‧왈덴스인들이 가장 성공적으로 복음을 전파한 곳에 안식일 준수의 실례가 일어났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흥미로운 사실이다”라고 말한다. )Daniel A Ugsberger, The Sabbath in Scriptre and History, p.208)
북프랑스에서 있었던 한 경우에는 어떤 안식일 준수자 그룹의 비밀 집회가 1420년 관계 당국에 발각되었다. 열여덟명 가운데 열여섯명이 체포되었다. 그들의 목사와 함께 “종교재판”이라불린 교회 법정에서 심문을 받았다. 이 기간의 법적 문서들은 그 단체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토요일을 그들의 안식일로 지키는 것”이 그들의 죄목 가운데 하나였다. 그 단체의 목사인 버토울 투린은 안식을을 지킨 이유로 처형당하였다. (Daniel Augsberger, The Sabbath in Scripture and History, p.209)
나의 가까운 친구인 “기록되었으되”텔레비젼 프로그램의 조지 밴더맨 목사는 “진리냐, 선전이나”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놀랄만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여러해 전에 한 목사님이 일단의 젋은 이들을 이끌고 피에몽의 왈덴스인 골짜기들을 여행하였다. 어느날 저녁에 그들이 캠프 화이어 주위에 모여 노래를 부르고 선교미담을 하고 있을 떄, 그곳에 사는 왈덴스인 몇 사람이 끼어들어 어두움 가운데서서 그들이 부르는 노래와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젊은이들이ㅢ 간증과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관해 노래하는 것을 들을 떄 그들은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노래와 이야기가 끝나자 한 왈덴스 노인이 캠프화이어 불빛 앞으로 나와서 말하기를 ‘여러분들이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 왈덴스인들을 자랑할만한 유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산기슭과 골짜기 아래, 위에서 진리의 빛을 높이 들어 보존하기 위해 싸웠던 우리 백성들의 역사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과거의 위대한 유산입니다만 우리는 참으로 미래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때 믿었던 가르침들을 포기하였습니다. 슬픈일은 용기를 가지고 우리가 미래를 직면하기 위하여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계속하셔야 합니다’
여러세기의 외침들이 시간의 복도를 따라 바로 이순간 오늘의 우리 귀에도 울려 퍼지고 있다. 누군가가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진리의 횃불을 이어받아야 하며 누군가가 주님께서 위하여 죽으신 그 진리를 충실하게 보존하여야 한다. 누군가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일어서서 지켜야 한다” (Truth of propaganda, George Vandemn, pp.164-165)
14) 제12세기
롬바디 - “안식일 준수의 유래는 그레고리 1세와 그레고리 7세 및 롬바디의 12세기 시대에 찾아볼 수 있다” ( Strong's Cyclopaedia, I, 660)
왈덴스 - “같은 백성들이 만든 그 문서들 가운데 보이어가 1120년대 것으로 연대를 추정한 십계명의 해설집이 있다. 세속적인 노동으로부터 쉼으로써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Blair, History of the Waldenses Vol.1, p.220)
웨일즈 - 첫 로마의 감독이 성데이비스 성당에 취임한 1115년까지 안식일이 웨일즈에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 있었다는 많은 증거가 있다. 옛 웨일즈의 안식일을 지키는 교회들은 그때에도 함께 로마에 무릎을 꿇지 않고 피난처로 도망하였다. (Lewis, Seventh Day Baptists in Europe and America, Vol.1, p.29)
파사기니 -(법왕교의 저자 보나퀴수스는 “파사기니”를 반대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소수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파사기니라고 불렀던 자들의 오류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첫째, 그들은 안식일을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더구나 그들은 교부들과 전체 로마교회를 정죄하고 거절함으로써 그들의 오류를 더하고 있다” (D'Achery, Spicilegium I, p.211-214)
헝가리,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독일(안식일을 준수하는 파사기니에 대한 언급) - “이 당시 이단이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널리 퍼졌다. 불가리아에서 에부로, 북 프랑스에서 테베르까제 어디서나 우리는 그들을 만난다. 헝가리와 남 프랑스처럼 온 나라들, 즉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에 만영하며, 심지어 영국에까지도 그들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Dr.Hahn, Gesch, der ketzer. 1, 13,14)
15) 제13세기
왈덴스 - “그들은 말하기를 법왕 실베스터 성하가 바울 서신에 멸망의 자식이라고 언급된 적 그리스도라고 하며 또 안식일을 준수해야 한다고 한다” (Ecclesiatical History of the Ancient Churches of Piedmont, p.169)
프랑스의 왈덴스인들 - “종교 재판관들은 ‧‧‧사형에 합당한 한 보우도봐인의 표징은 그가 그리스도를 좇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순종하려 했다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History of the Inquisition of the Middle Ages, H.C.Lea, Vol.D)
16) 제14세기
왈덴스 - “죽은 성인들이 아닌,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는 유일하신 한 하나니믈 예배하기 위하여 우리는 거룩한 안식일을 준수해야만 한다” (Luther's Forerunners, p.38)
영국, 네덜란드, 보헤미아 - “우리는 1250년과 1600년 사이의 보헤미아, 트랜실바니아, 영국, 네덜란드의 안식일 준수자들에게 대해 기록하였다” (Wilkinson, p.309)
보헤미아(1310, 현대의 체코슬로바키아) - “1310년 루터의 95개조 선언이 있기 200년 전에 보헤미아형제회는 보헤미아 인구 사분의 일을 구성하고 있었으며 오스트리아, 롬바디, 보헤미아, 복부 독일, 투린기아, 부겐든버그, 모라비아에 많이 거주하고 있던 왈덴스인들과 접촉되었다. 에라스무스는 보헤미아 왈덴스인들이 얼마나 제첼일 안식을을 업격히 지켰는지를 지적하였다” (Armitage, A History of the Baptists, p.318)
노르웨이 - 그 당시, 제14세기에 사용되었던 “교리문답서”에서도 안식일 계명을 “제칠일을 준수하는 것을 잊지 말지니라”고 기록하여 놓고 있다.
“또한 사제들이 백성들로 하여금 토요일을 일료일처럼 지키게 하였다” (This is quoted from Documents and Studies concerning the History of the Lutheran catechism in the Nordish Churches, p.89), (The ological Periodicals for the Evangelical Lutheran church in Norway, Vol.1, p.184.also)
17) 제15세기
보헤미아 - “에라스무스는 약 1500년경까지도 이 보헤미아인들은 제칠일을 철저히 지켰을 뿐만아니라 그들은 또한 안식일 준수자들이라고 불리웠다고 증언한다” (cox. The litera-ture of the Sabbath Question, Vol.2, pp.201-202; Truth Triumphant, p.204)
노르웨이(1435년 8월 22일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열린 교회회의) - “첫째 문제는 토요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그 나라의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토요일을 거룩히 지키려 했다는 것이 대주교의 주목을 꿀었따. 누구든지 교황과 대주교의 감돌들이 정한 것들 외에 어느 주구도 다른 휴일을 지키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교회법에 업격히 금지되었고, 명시되었다” (The History of the Norwegian church under catholicism, Rkeyser, Vol.II, p.408)
(1435년 베르젠에서 열린 카톨릭 지방회의) - “우리들은 이 나라의 여러 지역에서 어떤 이들이 토요일 준수를 받아들여 준수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교회 볍령에 의하면, 거룩한 법령과 대주교나 주교들이 명령한 것 외의 날들을 중수하는 것은 개인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엄금되고 있다. 토요일 준수는 이제 후로 교회 법령이 명하지 않는 한 어떤 환경에서도 더이상 허락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 노르웨이에서 거룩한 교회에 순종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모든 친구들에게 권하노니 이 토요일 준수의 악을 포기하도록 하라. 그밖의 사람들에게는 토요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을 혹심한 교회 형벌아해서 금하노라” (Dip norveg, 7. 397)
(1436년 오슬로의 교회회의) - “노동을 하지 아니함으로써 토요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동일한 형벌아래서 금지된다” (History of the Norwegian Church, p.401)
프랑스(왈덴스) - “프랑스 왕 루이 12세는 프로빈스의 한 지방에 거주하는 왈덴스인들의 적들로부너 몇 가지 흉악한 범죄가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소청관과 소르본느의 어떤 의사를 이 문제에 대해 알아보도록 파송하였다. 그들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자기들이 모든 교구를 방문하였으나 그들이 기소된 그런 범죄를 저지른 아무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은 초대교회를 따라 안식일을 지키고, 침례식을 행하며, 그들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인 믿음과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국왕이 파송관의 보고를 들은 후에 맹세하여 말하기를 그들은 국왕 자신이나 자기 백성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II, pp.71-72)
18) 안식일의 주님 - 우리의 목숩을 바치기에 합당하신 분
(안식일 진리가 16세기에서 20세기까지 보존됨)
오스왈드 글래잇은 안식일 진리를 위해 계속해서 자기 목숨을 걸었다. 그는 중부 유럽에서 선교 사명을 행하는 중1545년에 체포되었다. 일년 6주일 동안 감옥에 갇힌 후, 그는 한밤중에 복도에서 자기 감방으로 걸어오는 병사들의 요란한 발걸음 소리에 잠은 깼다. 돈에 고용된 잔인한 사람들이 그의 손발을 묶어 도시 밖으로 끌고 나가 다뉴브강에 던져 넣었다.그가 목숨을 바친 진리가 고요한 저녁, 맑은 호수가에 던져진 돌의 파문 처럼, 중부유럽 전역에 신속히 전파되리라는 것을 그들은 조금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 진리는 대영 제국과 스칸디나비아로 퍼져 나갔으며, 후에는 미국에 전하여졌다. 영국의 많은 초기 제칠일 안식일 준수자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의 주님은, 그들의 목숨을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었다.
안식일을 준수하는 목사인 영국의 존 제임스는 1661년 10월 19일 안식일 오후에 설교하고 있을 때, 경찰이 교회당에 들어와 국와 찰스 2세의 이름으로 설교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였다. 쉽게 협박당할 사람이 아니었던 그는 계속 설교하였다. 소동이 일어났다. 제임스는 체포되었고, 매수된 배심원에 의해 거짓 기소를 당해 유죄 선고를 받았다. 교수형을 선고받고 말에 끌려 도시를 누비다가 도끼로 사지를 잘렸다. 그의 아내가 용감하게도 두 번이나 왕에게 호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고는 집행되었다. 교수형에 처해진 후 그의 몸은 끌어내려져 도살당하고, 가슴의 심장도 꺼내에 불에 던져지고 머리는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고자 하는 자에게 엄중한 경고가 되도록 교회밖 기둥에 매달아 놓았다.
존 제임스의 진리에 대한 증언은 웅변적으로 오늘 우리들에게 말해 주고 있다. 그의 용기는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고 그의 피는 땅으로부터 “결코 진리를 더럽히지 말라!”고 상징적으로 소리 치고 있다. 다음의 성경 말씀은 나팔 같은 음조로 우리 세대에게 말하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히브히 12장 1절)
친구여, 진리를 꼭 붙들고 경주를 하라. 중세 시대의 신실한 순교자들의 삶이 당신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Tell It To The World, Mervyn Haxwell, pp.71-73)
19) 제16세기
러시아(회의, 모스크바, 1503) - “비난받은 자들(안식일 준수자들)이 소환되었다. 그들은 공적으로 그들의 새 신앙을 시인하고 옹호하였다. 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들인, 국무장관 쿠리친, 이반 멕시모우, 카시안, 노브고로드의 쥬리 수도원장은 사형 선고를 받아 1503년 12월 27일에 모스크바에서 우리 안에 갇힌채 공개적으로 화형을 당하였다” (H. Sternberfi, Geschiche der Juden Leipzig, 1873, pp.117-122)
스웨덴 - “토요일 준수에 대한 이 열심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토요일 준수의 행습을 고무시키는 사소한 일까지도 형벌을 받았다” (Biahop Anjou, Sevenska Kirka Kirkans Historia efter Motet i upsala)
리켄스타인 - “안식일 준수자들은 외형적 안식일, 즉 토요일이 아직도 준수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일요일을 법왕이 창안한 것이라고 말한다” (Refutation of Sabbath, by Wolfgang capito-published, 1599)
보헤미아(보헤미나 형제회) 알 콕스박사는 “나는 에라스무스의 한 구절로부터 종교개혁 초기시대에 보헤미아에 제칠일을 지킬 뿐만 아니라, 그 날에 쉼으로써 고지식하다고 일컬어지는 안식일 준수자들이 있었다는 기록을 발견하였다”고 하였다. (Literature of the Sabbath Question, Cox, Vol.II, pp.201-202)
역사가의 교회 목록(16세기) - “주의 날의 준수를 성경에서 명령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거절하기 때문에 안식일 준수자들로 불리우는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날에 안식하시고, 또 안식을 명령하시고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기에, 안식일만이 거룩하다고 생각한다”
독일(에크박사, 개혁자들을 논박함.) - “그러나 교회는 성서에 의하지 않고 그 자신이 권세로서 의식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옮겼다” (Dr. Eck's Enchiridion, 1533, pp.78-79)
유럽 - 1520년경 많은 안식일 준수자들이 “참된 안식일 준수를 고수한 리히텐스타인의 왕자”였던 리히텐스타인의 영주 레온하르트의 소유지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History of the Sabbath, J.N Andrews, p.649, ed)
노르웨이(1544) - “너희들 중 어떤이들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토요일을 지키는도다. 너희들은 심한 벌을 받아야 한다. 누구든지 토요일을 지키는 것이 발견되면 십 마르크의 벌금을 지불해야 한다” (History of king Christion the Third, Niels Krag and S. Stephanius)
핀란드(1544년 12월 6일) - 핀란드 국민에게 보낸 스웨덴 국왕 구스타부스 바사 1세의 편지 “얼마 전에 핀란드의 어떤 사람들이 큰 오류에 빠져 토요일이라고 부르는 제칠일을 준수하였다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State Library at Heisingfors, Richsregister, Vom, 1554, Tell B.B. leaf 1120, pp.175-180)
스위스 - “안식일 준수는 도덕률의 한 부분이다. 그것은 창세 이후로 거룩하게 지켜져 왔다” (ref, Noted Swiss writer, R. Hospinian, 1592)
네덜란드와 독일 - 1529년에 처형당한 티에르스의 바바라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제칠일에 안식하도록 명령하셨다”고 선언하였다. 다른 순교자 크리스티나 톨링게린은 “거룩한 날들과 일요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엿새동안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제칠일에 쉬셨다. 다른 거룩한 날들은 법왕, 추기경, 대주교들에 의해 제정되었다” (Martyrology of the churches of christ, commonly called Vaptists, during the era of the Refotmation, from the Duch of T. J. van Bright, London, 1850, 1, pp.113-114)
20) 제17세기
영국(1668) - “이 곳 영국에는 흩어진 많은 제자들 외에 훌륭히 보존되어 온 안식일을 지키는 아홉 내지 열 개의 교회가 있다” (Stennet's letters 1668 and 1670, Cox Sab, 1, 268)
영국 - 크롬웰 의회의 의장이었던 토마스 뱀필드씨도 또한 제칠일 준수를 옹호하는 글을 썼고 그의 종교적 원칙으로 인해 일체스터 감옥에 투옥되었다. (Calamy, 2, 260)
스웨덴과 핀란드 - “우리는 이러한 의견들을 그 당시 스웨덴 거의 전역, 핀란드로부너 북부 스웨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웁살라지역에서는 농부들이 일요일 대신에 토요일을 지켰다. 1625년경 이 종교적 경향은 이 나라들에 아주 널리 퍼져서, 많은 수의 일반 백성들이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킬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제들까지도 지켰던 것이다” (History of the Swedish church, Vol.I, p.256)
아메리카(1664) - “미국의 첫 안식일 준수자인 스티픈 멈포드는 1664년 런던에서 왔다”
아메리카(1671 -제칠일 침례교회) - “안식일을 준수하기 위하여 침례교회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See Bailey's History, pp.9-10)
영국(찰스 1세, 1648년, 국회의원들에게 질문) - “토요일을 더 이상 지키지 말거나 일요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를 변경하고 다른 것을 제정한 것은 교회위 권위였음에 틀림없다” (Cox, Sabbath Laws, p.333)
영국(존 밀턴) - “첫째 날을 받아들이기 위해 단지 인간의 추측에 불과한 권위를 따르기보다는 하나님의 명백한 계명을 딸 제칠일을 준수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할 것이다” (Sab. Lit.2, pp.46-54)
21) 제18세기
독일(누렘베르크의 텐하르트) - “그는 안식일 교리를 그것이 십계명의 하나이기 때문에 엄격히 지켰다” (Bengel's Leben und Wirken, Burk,p.579)
그는 친히 말하기를 “일요일이 안식일을 대신하였다는 것을 보여 줄 수가 없다.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주일의 마지막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적 그리스도는 반대로 주의 첫날을 제정하였다” (Kl.Auzug and Tennhardt's Schriften, p.49)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오늘의 체코글로바키아, 1635년부터 1867년까지의 그들의 역사가 아돌프 덕스에 의해 이렇게 묘사되었음.) - “안식일 준수자들의 형편은 끔찍스러웠다. 그들의 책과 저서들은 불살라지도록 칼스부르크 추기경 회의에 넘겨져야 하였다” (Aus Ungarn, pp.289-291, Leipzig, 1880)
모라비아(진젠도르프 백작) - 1738년 진젠도르프는 자신의 안시일 준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이미 여러해 동안 앙식일을 안식을 위해 사용하였고, 일요일은 복음을 전파하는 날로 삼았다” (Budingsche Sammlung, Sec.8, p.224)
미국*1741, 모라비아 형제회, 진젠도르프가 유럽에서 도착한 후) - “한 특별한 경루로서 그가 베들레헴 교회와 함께 제칠일을 안식의 날로 준수하지로 결의한 것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id., 5. 1421, 1422)
미국 - 구러나 진젠도르프와 베들레헴의 모라비아인들이 안식일 준수를 시작하여 흥왕하기 전에 펜실바니아에 안식일을 지키는 작은 독일인 단체가 있었다. (See Rupp's History of Religious Denominations in the United State, pp. 109-123)
22) 제19세기
중국 - “이 당시 홍슈취안은 아편과 담배까지, 그리고 모든 술 사용을 금하였으며 안식일이 종교적으로 준수되었다” (TheTi-ping Revolution, by Lin-le, an officer among trem, Vol.I, pp.36-48,84)
“제칠일은 아주 경건하고 엄격히 준수되어진다. 태평천국의 안식일은 우리의 토요일에 지켜졌다”(p.319)
“태평천국 사람들이 왜 제칠일을 안식일로 준수하느냐고 질문받으면, 첫째, 성경이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요, 둘째로 그들의 선조들이 그날을 예배일로 준수하였기 때문아라고 대답하였다” (A Critical History of the Sabbath and the Suday)
인도와 페르시아 - “이외에 그들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지독교 예배의식을 제칠일에 엄숙히 계속 준수하여 왔다” (Christian Researches in Asia, p.143)
덴마크 - 1975년 엠 에이 소머목사는 제칠일을 준수하기 시작하였고 그의 교회 잡지, 1875년 11월 5일자 인도벳 크리스텐돔에 참 안식일에 대한 감명적인 기사를 썼다. 그는 존 매티슨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말했다. “이곳 덴마크 침례교도 가운데 안식을 계명에 대한 큰 동요가 있다. ‧‧‧그러나 내가 덴마크에서 재림교도들과 아주 가까이 서서 여러해 동안 그리스도의 재림을 선포한 유일한 목사일 것이다” (Advent Tidente, May, `875)
스웨덴(침례교도) - “우리는 안식일의 성화가 그 기초와 근원을 하나님께서 바로 창조시에 전 인류를 위해 세우신 법에 두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각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구속력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제 힘껏 노력할 것이다” (May 30, 1863, p.169 Evangelistein(The Evangelist), Stockholm, May 30 to August 15, 1863, organ of the Swedish Baptis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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