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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4:4~7 감옥은 없었다 2013. 2. 17
한 사람이 억울한 살인 누명을 덮어쓰고, 프랑스령인 남미의 <가이아나 섬>에 갇힙니다. 가이나나 섬은 바다 한가운데 있는 감옥 섬입니다. 이 섬에 들어가면 아무도 탈출하지 못하고 갇혀 버린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감옥입니다.
이 사람은 몸은 갇혔으나, 마음은 갇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합니다. 첫 시도가 실패하여 형벌로 2년을 독방에서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탈출을 시도합니다. 탈출한 후에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컬럼비아에 겨우 도착하지만, 수녀원장에게 속아 다시 붙잡히게 되고, 이제는 독방에서 5년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자유를 향한 열망은 식지 않아서 다시 탈출하다가 붙잡혀 상어떼가 득실거리는 악마의 섬으로 보내집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꿈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는 야자열매를 채워 물위에 떠오르게 만든 자루를 안고, 삼킬 듯이 덤비는 사나운 파도 속으로 절벽에서 뛰어내립니다. 그리고 드디어 자유를 얻습니다. 1973년에 만들어진 <빠삐용>이란 영화의 내용입니다. 빠삐용이란 영화는 인간이 가진 자유는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빠삐용이 많습니다. 답답한 현실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여기 더 있으면 도저히 행복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서 자신을 옭아매는 그 감옥에서 탈출하려고 시도합니다. 기회만 되면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왜 사람들은 기를 쓰고 감옥 밖으로 나가려고 할까요? 몇 해전에도 신창원이라는 사람이 교도소를 탈출해서 신출귀몰한 도피 행각을 보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끔 잊을만 하면 경찰소에서 조사를 받던 범죄인이 수갑을 차고 도망갔다는 뉴스도 접하게 됩니다.
왜 사람들은 감옥에 갇히는 것을 두려워하고, 도망치려고 할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감옥 안에 있으면 불행하고, 감옥 밖에 있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옥 밖에 있는 사람은 웃고,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은 힘들어 웁니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감옥 안에 있으면 불행이고 감옥 밖에 있으면 행복이라는 이 절대적인 공식.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이 당연한 공식이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본문 4절을 보세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바울은 기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슬퍼하지 말고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그냥 쉽게 들을 수 있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이 말씀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가 빌립보서라는 편지를 쓸 때,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가장 악랄하고, 가장 인권이 유린되는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입니다. 게다가 지금 바울은 나이마저 늙어서 기력이 떨어져 매우 힘들어하던 시기였습니다. 젊어서 기력이라도 원기충천하면 몸으로 버텨 나가겠지만, 나이 든 늙은 바울에게는 모든 것이 힘든 상황입니다. 돌바닥의 차가운 냉기가 뼈속까지 치밀고 들어오는 아픔을 느끼고 생활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감옥 안에 있는 바울이 감옥 밖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고 외칩니다. 이런 바울의 행동은 전혀 상식에 맞지 않는 모습입니다. 바울이 바깥 세상의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낙심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이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바울 사도님. 힘들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기쁘게 지내십시오”라고 위로해야 하는 것이 맞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감옥 안의 바울이 감옥 밖의 사람들에게 기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 일반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바울의 마음속에 충만했던 그 기쁨, 그래서 감옥 밖의 사람들에게까지 전하길 원했던 그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우리도 기뻐하라는 바울의 말을 들으면서 놀라움과 감동에 빠집니다만, 이 편지를 받았던 당시의 빌립보 교회 교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의 느낌은 우리가 가진 감동과 놀라움을 뛰어 넘는 충격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빌립보 교회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을까요?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지역에 들어가 전도를 하게 됩니다. 자색 옷감장사였던 루디아라는 여성이 믿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루디아의 집에서 모여 바울의 설교를 듣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빌립보교회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가서 모질게 고문을 당하고 맞습니다. 그런데 그 날밤에 천사가 나타나서 바울과 실라를 구해냅니다. 옥문이 저절로 열리고 바울을 묶었던 착고가 저절로 풀리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이 과정에 등장하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바울을 맡아 관리하였던 감옥의 간수입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가 탈옥한 줄로 알고, 자신에게 돌아오는 문책이 무서워서 자신의 칼로 자살하려고 행동한 사람입니다.
이때에 바울이 이 간수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 유명한 말씀이 행 16:31절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에 이 간수는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집으로 바울을 보셔서 대접하면서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 간수가 바로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신이 겪은 이 놀라운 기적 같은 이야기를 다 말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여러분이 가진 상상력을 동원해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모인 자리로 가 봅시다. 어느 날 바울이 보낸 편지가 빌립보 교회에 도착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빌립보서입니다. 모인 성도들은 바울이 보낸 편지를 귀를 쫑곳 세워 듣습니다.
그러다가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는 이 대목에 와서는 술렁거리기 시작합니다. 바울의 편지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서로를 쳐다 보면서 말합니다. “아니, 바울 선생님은 감옥에서도 우리보고 기뻐하라고 하시는구먼. 당신이나 편히 계실 노릇이지 우리 걱정까지 하시다니”
그 때 누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 선생님은 그런 분입니다. 우리 교회가 어떻게 세워진 교회입니까? 또한 우리 교회에 나왔던 감옥의 간수를 생각해 보세요. 간수가 간증하기를 감옥 문이 열렸어도 바울선생님은 도망가지 않고서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내가 그 찬송과 기도소리를 들었습니다. 바울 선생님은 감옥 안이라고 해도 늘 기뻐하며 찬송하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감옥 안에 있으면서도 기뻐할 줄 알고, 감옥 안에 있으면서도 감사할 줄 알고, 감옥 안에 있으면서도 감옥 밖에 있는 자들보다 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분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창살과 인간이 만든 족쇄가 바울을 옭아 맬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이 본문으로 설교를 준비하면서 참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이 본문으로만 무려 3번이나 설교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적지까지 제가 깨닫지 못하던 또 다른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단순하게 그냥 기뻐하라는 강요가 아닌, 바울의 마음과 심정을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본받고 닮아야 하는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감옥 안에 있으면서도 감옥이 없는 듯이 사는 바울의 믿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비록 제가 목회를 하는 목사이지만, 바울의 이런 모습은 미치도록 닮고 싶은 모습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목회를 하는 저에게는 감옥이 있습니다. 감옥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감옥이 저를 둘러 쌓고 있으며, 저는 그 감옥 안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감옥 밖과 안을 구별하는 담장을 치고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감옥 밖에 있으면 무조건 행복할 것이고, 감옥 안에 있으면 무조건 불행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무서운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깨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방식, 감옥 안은 불행이고 감옥 밖은 행복이라는 생각이 저만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저만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의 이 감옥 안과 밖의 문제로 고민하고 갈등합니다.
목회자들의 감옥 안과 밖을 보시겠습니까? 교회가 커져서 교인이 많이 늘어나면 자신은 감옥 밖에 있다고 판단합니다. 이름이 조금 알려져서 여기저기서 설교하러 오라는 데가 점점 많아지면 감옥 밖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재정이 풍부해져서 부족함이 없이 이 일 저 일 하게 되면 감옥 밖에 있다고 판단합니다. 목회하는 동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면 자신은 감옥 밖에 있는 행복한 목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노력해도 교회가 부흥되지 않을 때, 늘 교회 재정이 쪼들릴 때, 오라는 데도 없을 때, 아무리 애써도 되는 게 없을 때, 자신이 가장 쳐져 있는 목사인 것처럼 여겨질 때, 바로 이 때에 목회자들은 자신이 견디기 힘든 감옥에 갇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목사라고 여깁니다. 다시 태어나면 두 번 다시 목회를 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합니다. 자신이 감옥 안에 갇혀 있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회자들의 예를 들었습니다만, 여러분은 그렇지 않으십니까?
인터넷에서 <행복>이란 단어를 검색해 보십시오. 수 만 가지, 수십 만 가지의 행복들이 나타납니다. 서점 잡지 코너에 가 보십시오. “행복한 우리 집, 해피데이즈, 행복한 동행”등 행복이 들어간 책이 수백수천가지 됩니다. 가게를 보아도 <행복한 가게>라는 말이 들어갑니다. 모두가 다 행복을 외칩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은 감옥 밖에 있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판단하면서 행동합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착가에 빠지고 교묘한 함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아울러 사람들이 갇혀 있는 감옥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건강만 있으면 행복하고, 돈만 넉넉하면 행복하고, 아름다운 주택과 좋은 자동차를 가지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멋진 연인 등이 있으면, 자신은 감옥 밖에 있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나는 건강하지도 않습니다. 가진 돈도 넉넉하지 못하고 늘 부족합니다. 돈을 모으고 버는 것 같은데 늘 수중에는 동전만 딸랑거립니다. 가진 집도 없고, 그나마 있는 집이라고는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별로 성공하지도 못했고, 어디에 내어 놓아도 자랑스러운 애인도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 자랑도 없고, 자식 자랑도 없고, 돈 자랑도 없고, 자랑거리라고는 눈을 뜨고 보아도 없습니다. 자신의 상황이 이렇게 전개 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은 감옥 안에 갇혀 있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판단합니다. 자신은 돈의 감옥에 갇히고, 성공의 감옥에 갇혀 있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이런 기준으로 볼 때,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사람입니까? 감옥 밖에 있는 사람입니까?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보겠습니다. “지금 기쁘십니까? 지금 불행하십니까?” 나의 불행과 나의 행복과 기쁨을 결정하는 것이 “감옥이라는 존재입니까?” 단순하게 감옥 안에 있어서 불행하고, 감옥 밖에 있으면 행복이라고 판단하십니까?
이렇게 감옥 안과 밖의 담장을 쳐놓고 사는 인생은 심각한 문제를 가지게 됩니다. 자신이 감옥 밖에 있다고 여길 때는 행복하다고 생각해서 웃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감옥 안에 있다고 생각될 때는 불행하다고 판단해서 세상을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분은, 결코 바울처럼 감옥 안에서도 기쁨을 노래할 수 없습니다. 일생 중에 진정으로 기쁜 날은 몇 날 없습니다. 대부분의 나날을 한숨으로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완전한 지유를 누리는 시간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시간은 모든 걱정과 근심을 껴 앉고 살아갑니다.
10대에는 공부라는 감옥에 갇혀 있고, 20대는 취직과 결혼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고, 30대는 사회에서 뿌리를 내리면서 자신의 일을 일구어야 하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40대는 인생의 가장 왕성한 시기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각시켜야 하는 감옥에 갇혀 있고, 50대는 자녀를 돌보면서 자신의 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60대와 70대는 건강의 감옥과 늙어가면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잃어가는 감옥에 갇혀 살아갑니다.
이렇게 일생동안 다양한 감옥에 갇혀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물론, 쉽고 간다하게 말해서 “노력하고 성공해서 감옥 밖으로 나가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럴 수 있으면 그렇게 하십시오. 자신이 갇혀 있는 감옥에서 탈출하십시오. 돈이 없어서 감옥에 갇혀 불행하다고 판단하시는 분은 죽자 살자 미친 듯이 돈을 버십시오. 병든 분은 건강을 얻고, 집 없는 분은 좋은 집을 사고, 애인 없는 분은 오늘이라도 선을 보면서 애인을 챙기십시오.
그러나 여기서 제가 던지는 질문에 귀를 귀울여야 합니다. 일단 내가 갇혀 있는 감옥에서 탈출하면, 그냥 행복이 찾아 올까요? 돈 감옥에서 벗어나면 행복해지고, 건강 감옥에서 벗어나면 행복해지는 것일까요? 그리고 한번 벗어났다고 두 번 다시 갇히는 일은 영영 생기지 않을까요? 혹시 다시 예전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면 그 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때 다시 감옥을 탈출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시겠지요? 그러나 영영 감옥을 벗어날 수 없게 될 때가 있음을 아십니까? 연세 들어 노환으로 고생하게 될 때, 어떻게 이십 대 청년의 건강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한 달에 받는 월급이 뻔한 사람이 어떻게 수백 억을 벌 수 있겠습니까? 때로는 아무리 죽도록 노력해도 더 이상 탈출이 불가능할 때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때에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하시겠습니까? 바로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울이 받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되기 위해서 우선 우리는 기본자세와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감옥 안은 불행하고, 감옥 밖은 행복하다는 공식을 버려야 합니다. 돈이 있으면 행복하고 돈이 없으면 불행하다. 좋은 집이 있으면 행복하고 허름한 집이 있으면 불행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인생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감옥 안에서도 기뻐하는 바울이 있고, 감옥 밖에도 한숨짓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난해도 행복한 사람이 있고, 부자여도 불행한 사람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려워도 도전 정신으로 의욕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평안해도 권태 속에서 자신을 불태울 위험한 불장난에 빠진 불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울을 생각하십시오. 감옥 안에 갇혀서도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외치는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바울의 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울은 감옥 담장을 초월해서 살았습니다. 바울은 감옥 안에서도 행복할 수 있고, 감옥 밖에서도 불행할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감옥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감옥 밖으로 나가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감옥 안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어디서든지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가장 소중한 기준”임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생각을 바꾸십시오. 감옥 밖으로 탈출하려고 애쓰시는 대신에 감옥 안에서도 행복하게 되는 비결을 배우십시오. 감옥을 천국으로 바꾸는 능력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어디서나 내 주 예수를 모신 곳이 천국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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