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향교를 돌아 계림으로 가는길에 요즘 한창 방영중인 역사사극 광개토대왕에서 신라의 상황이 나오죠!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위력에 눌려 사신과 함께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實聖)을 볼모가 되어 광개토대왕
밑에서 일하는것으로 나타나죠..
내물왕은 김씨 성을 가진 두번째 왕이고 신라가 내물 마립간이라는 왕의 호칭을 쓰게된 것이 내물왕
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물왕하면 박제상 이야기가 생각나고 재위 기간에 고대 왕국으로서의 체제를 두루 갖추고
왕권을 강화했으며, 이 무렵에 한자(漢字)가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물왕릉은 경주시 교동143번지 계림월성지대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능은 신라제17대 내물왕(356-402)을 모신 곳으로 대릉원의 남쪽이자 월성지대에서도 가까이 있다. 능 밑둘레 68m , 높이5.8m 지름22m 정도로 흙을 둥글게 쌓은 원형 봉토분이다. 밑둘레에는 조금 큰 돌이 튀어 나와 있고 깍여 나간 봉토 밑으로 돌무지가 조금 드러나 있다.
내물왕은 김씨로 두번째로 왕위에 올랐다. 이후 김씨 성에 의한 독립적 왕위계승이 이루어진다.
내물왕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여러 차례 왜국의 침입을 물리치는 등 외교와국방에 힘써 신라를
고대국가의 체제로 확립하였다.
성은 김씨이다. 각간(角干) 말구(末仇)의 아들이고,어머니는 휴레부인(休禮夫人) 김씨이며,
비(妃)는 미추왕(味鄒王)의 딸인 보반부인(保反夫人) 김씨이다.
흘해왕을 이어 즉위 하였는데, 이로부터 김씨가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마립간이라는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364년 4월에 왜병의 큰 무리가 쳐들어오자 초우인(草偶人;풀로 만든허수아비)수천을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토함산(吐含山) 기슭에 벌여 세우고, 병사 1000명을 따로 부현(斧峴) 동쪽에 매복 시켰다가
왜병을 전멸시켰다.
373년에는 백제의 독산성주(禿山城主)가 남녀 300명을 이끌고 투항하자 이들을 받아들여 6부(部)에
분거(分居)하고, 이들을 돌려 보내라는 백제왕의 요청을 일축하였다.
381년 위두(衛頭)를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에게 보내어 우의(友誼)를 맺은 뒤 중국문물 수입에 힘써,
이때부터 고구려를 거쳐 중국문화가 들어왔고 한자(漢字)도 이때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392년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위력에 눌려 사신과 함께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
을 볼모로 보냈다.
다음해 왜적 침입으로 서울이 포위되었으나 이를 물리쳤고, 395년에는 말갈(靺鞨)이 침입하자 이를
실직(悉直)에서 격파하였다.
397년 흉년이 들자 백성의 세금을 1년 동안 면제하는 등 내외로 많은 치적을 남겼다.
* 내물왕릉 위치는 경주시 교동143번지
* 주변 문화재 둘러 보기:경주계림, 첨성대,경주동부사적지대,경주향교,경주교동 최씨고택
(최부집)월성지구, 석빙고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