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집, 식물의 집, 맑은 영혼의 집
‘깊 고 따 뜻 한 사 람 의 마 음 을 닮 은 정 원’
정원이라 부르기엔 정원이 품고 있는 세계가 너무 크고 깊다. 그 식물들의 세계에 속속이손길을 주고 일일이 눈 맞춰 주고, 이름 불러 준 사람이 있어서 정원의 꽃과 식물들은 조화와 교감 이상의 나눔을 생각하게 한다. 나이들어간다는 게 꼭 쓸쓸함만은 아니라고, 오히려 아름다워, 너무 아름다워라고 말하는 식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퀼트작가 안홍선씨의 호숫가 집을 찾았다.
“얘들아, 잘 잤느냐? 지난 밤 바람 불고, 비 왔는데…”
그녀가 그렇게 가만히 바라보면 냉큼 꽃들이 대답한다. 어둡고 흐리던 지난밤의 이야기며, 오늘 아침의 햇살에 대해 속속들이 꽃잎마다 담아내는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그것이 예뻐서 또 어쩔 줄을 모른다.
이 꽃과 이 사람 그리고 오래 된 집, 오래 된 정원, 그 오랜 속을 걸어 온 그녀를 보고 있으려니 가슴 속에도 꽃밭이 차려진다. 참 행복하고 놀라운 경험이다.
“다 젖먹이 새끼들 같아, 이 애틋함은 말로 다 못하지”
내년이면 칠십이라는 안연홍 할머니의 손을 잡아보았다. 엄지와 검지가 닿는 곳으로 굳은살이 가득하다. 그 굳은 살 위로 풀에 베인 흔적들도 가득하다. 그야말로 ‘풀과의 전쟁’에서 얻은 상처들이란다. 하지만 한 번도 그 풀들을 이긴 적도 없고, 굳이 이기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욕심 없음으로 풍요로워 지는 것, 그것이 바로 식물이, 꽃들이 가르쳐 준 지혜였으리라.
정원은 바로 그런 삶의 이야기와 지혜로움이 가득한 한 사람의 인생이기도 하다. 노부부가 이 집으로 온 것은 90년도 초니까 10년하고도 한참을 지났다. 바깥일을 하는 남편과 그저 시골 농부로 살며 정원을 가꾸어 온 할머니의 세월은 이 정원을 보면 알 것 같다.
그녀의 정원은 호수에 닿아 있다. 마당 끝이 호수의 시작이다. 비가 오면 빗방울을 담아내고, 맑은 날이면 산과 나무 그림자를 담아내는 호수는 그래서 또 다른 그녀의 정원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여기의 꽃들을 보고 이름을 몰라서 ‘어머 예쁘다’하지만 나는 그냥 ‘애들아’하고 부르지. 그러면 이 녀석들이 얼른 내 쪽을 봐주지. 그럼 한 번 웃어 줄밖에.”
말하지 않아도 저저로 알아지는 마음. 다 젖먹이 새끼들 같아, 그 애틋함은 말로 하기 어렵단다.
할머니의 마음은 그렇게 정원의 식물과 꽃들에 닿아 있다. 아니 반쯤은 언제나 스며있다. 그녀는 물가에 이는 바람에 땀을 식히며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이 저버린 겨울이나 밤에는 조각 천으로 꽃을 만들며, 꽃그림을 누비고 꽃 글을 쓴다. 그렇게 물안개 유난히 자욱한 들꽃정원에서 달팽이처럼 풀밭이슬에 몸을 적시며 집을 떠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리고 언제나 책상위에는 종이와 연필이 그녀의 인생을 그리고, 거친 손에는 호미, 아니면 바늘이 바쁘게 움직인다.
벌레도 한 입, 곤충도 한 입, 그리고 남은 것은 내가 먹지
안홍선씨의 정원은 야생화 정원으로 알려졌지만, 그녀는 야생화보다는 ‘자생화’라고 말하길 좋아한다. 지금은 야생화 키우기에도 전문가가 많지만 70년대 초만해도 야생화에 대해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그때 이미 그녀는 집에서 야생화를 키우기 시작했고, 87년도에는 내무부 주최 가정 조경 대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녀의 정원에는 야생화 천지지만 이제는 ‘우리 꽃’도 중요하지만 ‘우리 땅에서 자라는 꽃’이라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느냐고 한다.
호수에 닿은 채 길게 만들어진 정원에는 대략 500여 종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그네가 매인 버드나무를 비롯해, 호두나무, 자두나무 같은 유실수는 물론이고, 무며, 배추, 밭벼까지 심을 수 있는 텃밭까지가 모두 그녀의 정원이다.
올해 그녀는 ‘야채 꽃밭’을 만들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식탁에서 먹고 있는 파며, 배추를 비롯한 여러 야채들이 피우는 꽃을 보기 위해서다. 사실, 사람들은 야채를 먹을 줄은 알아도 그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얼마나 예쁜지는 잘 모른다. 간혹 이 정원을 찾아오는 아이들에겐 좋은 공부거리가 될 것 같다고 했다.
더불어 밭에는 벼를 심어 메뚜기도 찾아오게 한다. 그녀의 정원에는 어느 한 곳에도 농약 따위는 하지 않는다. 비록 풀 뽑기 때문에 자꾸만 몸은 굽어가고 고되지만, 그녀의 정원에서는 꽃도 풀도, 꽃을 찾아오는 곤충들도 정원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꽃이든 채소든 벌레가 먹고 나면, 난 그 남은 것을 먹으면 되니까. 그것으로도 충분하다니까. 함께 먹고 살아야지 않겠어요?”
그녀의 정원은 계절마다는 물론이고, 매 달 한 번씩 옷을 갈아입는다. 한 무더기의 꽃이 질 때쯤이면 다른 곳에서는 또 다른 꽃무더기가 꽃망울을 맺어간다. 우리 야생화들은 한 달 정도면 꽃이 지는데, 지는 꽃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아쉬움이나 안타까움들이 다시 1년을 기다리게 하는 힘이 된다고 했다.
그녀의 정원에는 낯선 이름의 꽃들도 아주 많다. 붉은 빛이 유난한 꽃양귀비를 비롯해 여우장갑은 물론이고, 지금은 귀하지만 예전엔 시골 논둑에 무더기로 피던 자운영과 물망초, 달맞이꽃, 창포, 붓꽃, 제비꽃, 망울을 맺은 접시꽃까지 이름조차 정다운 꽃들에서 전문가가 아니면 잘 알지 못하는 꽃들도 저마다 그녀의 정원에서 자리 잡고 있다.
자연과 함께 나이들어간다는 것의 축복을 위하여
“외롭지 않으세요?”
“외롭다고? 그럴 틈이 없어. 얘들이 내게 해주는 말만 들어도 하루가 모자라. 할 수만 있다면 먹고자는 것도 안 하고 함께 하고 싶은걸. 그저 이 녀석들이 날 가만히 안 두거든. 자꾸만 불러내는 통에 내가 암 것도 못해. 그리고 난 집을 떠난 본 적이 없지만 꽃들이 자꾸만 사람을 불러들인다니까.”
“그럼, 힘들지 않으세요?”
“힘들다 생각하면 힘든 거고, 행복하다 생각하면 행복하지. 시골에 사는 행복은 몸만 편안하려고 하면 안돼. 살아있는 것들과 끝없이 이야기하고,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나도 살아서 움직여야지. 그건 즐거움이지.”
정원의 가운데쯤에 있는 집도 더없이 식물스럽다. 슬레이트 지붕에 브로크로 지어진 오래된 시골집을 일부 고쳐서 살고 있는데, 외부에 나무 패널을 대고, 넝쿨식물을 올려 그저 정원의 일부 같다. 집안에는 그녀의 퀼트작품들이 곳곳을 장식하고 있다. 이미 한번 개인전시회까지 열었던 퀼트작가이기도 한 그녀의 작품들은 대부분 이곳 자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 스토리퀼트라고도 한다. 이전까지 없었던 그녀만의 독창적 장르인 셈이다. 몇 년 전 ‘당신의 기쁨’, ‘당신께 이 꽃다발을’, ‘꽃 한 송이’, ‘흙에서 사는 화려한 이유’ 등으로 열었던 스토리퀼트 전시회는 그런 면에서 크게 주목받기도 했다.
다시 한 번 할머니의 손이 보고 싶다. 거기에 정원의 꽃들의 이름이 적혀 있을 테고, 꽃들의 향기가 묻어 있을 테고, 식물들의 맑은 영혼 가득할 테니. 하지만 그것은 꽃들에게 할머니의 안부를 물어봐도 알 수 있으리라.
자연과 함께 나이들어간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줄 몰랐다는 그녀의 말에서 이 정원은 그녀에게 더없는 축복임을 알 수 있었다. 정원은 그저 사람이 가꿈으로써 그 대가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가꿈을 주고받는 그래서 서로의 마음을 나누어 갖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아 파 트 정 원 꽃 피 운 공 동 체 문 화’
봄날의 삼성쉐르빌아파트(용인시 상현동 87세대)는 수십 종의 꽃들과 넝쿨식물, 크고 작은 나무들에게 둘러싸여 토실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맘껏 뽐내고 있었다. 디딤돌 하나에서부터 화단과 쉼터, 작은 연못과 키 큰 나무에 이르기까지 단지의 모든 공간이 주민들의 참여와 손맛으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니 이게 무슨 별천지 얘긴가 싶다. 주민들이 직접 가꾼 정원과 마당에서 축제와 만남, 휴식을 일삼으며 그야말로‘살맛나는’ 공동체 문화를 창조하고 향유하고 있는 상현동 삼성쉐르빌아파트 속으로.
5개동 87세대가 살고 있는 아담한 규모의 단지는 푸르름과 화사함으로 눈부시다. 발길 닿는 곳이 모두 숲이고 꽃길이며 휴식처다. 단지 전체에 둘러쳐진 푸른 띠를 펼쳐 놓으면 수천세대가 모여 사는 대단지 못지않은 면적을 자랑할 것이 분명하다. 빈틈없이 심겨져 풍성한 몸매를 자랑하는 화단이며, 군데군데 시선을 사로잡는 소품들의 배치며, 사람 발길이 닿는 곳이면 빠짐없이 오솔길을 낸 솜씨이며, 그 조화로움과 풍요로움을 연출한 실력이 여간내기가 아니다. 시들은 식물 하나, 이 빠진 땅 한 뼘 찾아볼 수 없으니, 이 완벽한 지상낙원을 만들고 가꾸는 여신이라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두리번 거리게 된다. 2001년 입주할 당시에는 형식적인 조경으로 인해 안 그래도 작은 단지가 더욱 황량하고 초라해 보였다며, 주민들은 기억을 더듬는다. 그러나 지금은 ‘아파트정원 벤치마킹 1순위’로 등극하여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고 있다. 오늘의 삼성쉐르빌이 있기까지, 그 비결이 궁금해진다.
주민들이 ‘품앗이’해 만든 아름다운 정원, 재미난 삶터
“다른 아파트 살적에는 이웃들 눈치가 보여서 내 집 앞 현관에 화분 하나를 놓지 못하고 살았어요. 여기서는 단지 전체를 내 집 마당이자, 정원처럼 여기고 살 수 있으니 너무 행복하죠.” 꽃과 나무가 좋아 정원 가꾸는 일이라면 부부가 함께 백방으로 나서 왔다는 이인희씨의 얘기다. “오늘 아침에도 부녀회원들하고 단지를 한 바퀴 돌며 잡초를 솎아내고 벤치에 앉아 차를 마셨어요. 자주 있는 일이죠. 자연스럽게 부녀회 일도 얘기하게 되고, 정원도 돌보게 되니 얼마나 좋아요.” 얼마 전 가을과 겨우내 쌓인 낙엽을 주민들과 나서서 한 트럭이나 걷어냈다는 원복진씨는 아직도 팔뚝이 얼얼하다며 웃는다. 정원소품이나 식물 구입하는 길에도 따라 나선다는 황경희 씨는 이곳에서 사는 게 ‘재미’나다. “봄만 되면 우리 단지 여자들은 꽃바람이 난답니다. 새로운 꽃들을 한 트럭 가득 싣고 와서 심는데, 꽃 잔치가 따로 없어요. 5월에는 연산홍이 만개하고, 6월이면 수국, 불도화가 꽃을 피우죠. 거기에 야생화들까지 더하면 쉴 새 없이 꽃이 피는 거죠.”
단지 내 하늘정원에 모여든 이들처럼, 상현동 삼성쉐르빌아파트의 가장 큰 이슈이자 공동의 관심사는 ‘정원’이다.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주민들의 노동력으로 대부분을 해결했다고 하니, 당연지사로 보인다. “입주 3년차에 시공사가 하자보수를 들어왔는데 주민들 의견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해보자, 우리 실정에 맞게 만들어보자고 뜻을 모으게 된 것이 오늘까지 왔네요. ” 안방선 씨는 지난해 총무를 지내며 새로운 안건이 있을 때마다 주민들의 의견을 묻고 동의를 구하러 뛰어다녔다. 단지 내 클럽하우스를 리모델링하고 건물 옥상의 빈터에 정원을 꾸미면서, 크고 작은 내용의 동의서만 수십차례 작성했다. “주민 동의 없이는 나무 한그루도 옮겨 심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랬기에 주민 모두가 참여하는 정원이 가능했을 것이다. 애초에는 조경회사에 디자인을 맡겼지만, 단지 실정에 전혀 맞지 않는 계획안을 내놓아 주민 동의 아래 과감히 폐기하고 직접 디자인에 나섰다. 단지 구석구석의 일조량이며 식물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주민들이 정보와 지혜를 풀어놓았다. 품앗이 하듯 주민들이 돌아가며 참여해 데크도 직접 만들고 지압길에 색색깔 돌들도 손수 깔았다. 어떤 주민은 파라솔을 내놓기도 했고, 어떤 주민은 의자를, 어떤 주민은 귀한 수석 화분을 기증하기도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에 ‘하늘정원’이라는 팻말을 달고, 정원이 완성된 가을에는 근사한 축제를 열었다. 수확하는 농민들처럼 풍성한 마음으로 온 주민이 함께 한 축제의 현장은 일간지와 방송사의 스포트라이트가 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주민기금으로 아파트 입구에 붙은 산 120여평을 매입해 녹지를 확보하고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꾸몄다.
"아파트가 삭막하다고 하죠? “아파트가 삭막하다고 하죠? 우리 아파트에 와 보세요. 그런 생각 안 드시죠? 생각하고 실천하기 나름이잖아요. 손바닥만한 땅이라도 놀리는 곳이 없게 하자, 여기 한번 머물고 싶다는 기분이 들도록 아기자기하게 꾸며 보자! 그런 소박한 생각이 실천으로 바뀌는 순간, 우리 아파트가 이렇게 행복해 졌답니다.” 네 집 앞 내 집 앞을 가리지 않고 머물고 싶고 만나고 싶은 단지를 만드는 일에 서로 양보하고 함께 기여해 온 상현동 삼성쉐르빌의 주민들. 그 댓가로 김치 한 포기, 상추 한다발 들고 나오면 언제든 모여 앉아 웃고 행복해 할 수 있는 공간을 얻었고, 그보다 더 소중한 이웃을 얻었다고 그들은 자부한다.
물이 빛나는 뜰, 그 안에서 펼쳐지는 꽃들의 향연
“야 생 화 는 제 친 구 이 자, 자 식 과 같 습 니 다”
산 여기저기에서 봄직한 야생화가 한가득인 수빈뜰 마당이다. 투박한 우리 멋이 담겨진옹기와 황토분 안에는 갖은 모양의 꽃들이 소담스럽게 피어 손을 맞이한다. 꽃의 전령사라 불리는 이명희씨는 매일 아침 꽃들과의 인사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2년 전, 풀 한포기 없었던 땅에 그의 정성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정원은 어느새 파주 헤이리의 명소가 되었다
두 번째 찾은 날이다. 꽃샘추위를 이겨낸 야생화들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알록달록 싱그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초봄에 첫인사를 나눈 안주인 이명희씨는 “얘들이 많이 폈죠? 오늘 손님이 온다는 것을 알았는지 노란 칸나가 폈네요”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280여종의 야생화, 하루 평균 9시간씩 땀흘려
수빈뜰은 ‘물이 빛나는 뜰’이라는 의미로 집을 설계해 준 딸이 붙여준 이름이다. 노출콘크리트로 마감된 사각의 집에 유리박스가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헤이리의 여느 집에서 볼 수 있는 현대적 감각의 건축물이지만, 이곳이 더욱 빛나는 까닭은 바로 앞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야생화 때문일 것이다. 각박한 도시생활에서 꽃을 통해 마음의 위안과 삶의 목표를 얻었다는 이명희씨는 하루 평균 9시간 이상씩 정원에서 꽃을 돌보며 생활하고 있다.
“일상에서 오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기도를 했습니다. 좋아하는 식물을 보살피고, 사랑하는 것 또한 기도방식의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죠. 보상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얘들에게 마음을 쏟고나니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화답을 하네요 제 친구이자 자식과 같은 존재가 됐습니다.”
그의 말을 입증하듯, 정원에는 지금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온 몸으로 표현하는 야생화가 여기저기 피어 있다. 현재 수빈뜰에 있는 야생화는 280여종에 이른다. 대부분이 한국 야생화지만, 틈틈이 색이 곱고나 희귀한 서양화도 눈에 뛴다. 인근 개발공사로 인해 잘려질 나무와 주변에 버려지는 폐자재를 이용해 우리꽃과 교·관목을 배치한 것이다.
수로를 파고 주변 지역에서 돌을 가져와 작은 계류와 연못을 만들었다. 꽃봉오리가 올라온 연꽃 사이로 마을 사람들이 키우라며 준 금붕어가 한가롭게 노닐고 있다. 뜰채로 이끼를 건져내던 이명희씨가 돌 뿌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작은 상처가 났다. 걱정과 다르게 매번 있는 일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흙을 털며 야생화를 손보기 시작했다. 동네에서 이명희씨를 부르는 또 다른 명칭은 바로 ‘빨간 장화 아줌마’이다. 정원 일을 할 때마다 신는 빨간 장화 때문인데, 물과 흙을 함께 다루는데 있어서 가장 유용하다. 빨간 장화가 쉴 새 없이 마당 이곳저곳을 다닐 때마다 손톱만큼 작은 야생화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희귀한 황금개구리까지 삶의 터로 삼은 수빈뜰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이명희씨의 손길도 분주해졌다. 볕이 쨍쨍한 날보다 잔손이 많이 가는 날이다. 그의 남편도 부인을 따라 화분을 옮기고, 수로를 살펴본다. 홍익대 건축학과 명예교수인 전명현씨도 이럴 때는 영락없는 일꾼이 된다. 환갑과 고희를 넘긴 노부부가 함께 정원을 가꾸는 모습은 이미 마을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비가 내리면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린다. 정원 안쪽에 위치한 뜰에는 남편이 직접 찍은 야생화와 황금개구리 사진이 걸려있다. 희귀한 황금개구리까지 수빈뜰을 삶의 터로 삼은 것이다.
담장이 없는 헤이리 마을에서 수빈뜰을 찾아 야생화를 구경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생전 처음보는 꽃이 많기 때문에 이것저것 물어보는 사람도 많다. 꽃을 밟지나 않을까 걱정도 될 법한데, 두 부부는 전혀 귀찮은 내색 없이 친절하게 야생화에 대해 설명해준다.
생김새가 소나무인 줄 알았지만 자세히 보니 향나무가 정원 중간 중간에 식재돼 있었다. 키 큰 향나무를 먼저 심은 것은 그 그늘 아래로 다양한 야생화가 자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향나무와 철쭉 밑에 위치한 아직 꽃도 피지 않은 풀을 이명희씨가 가리켰다.
“‘구름채꽃’이라고 하는데 아직 꽃이 피지 않았어요. 제주도에서 자생하는 야생화인데, 지난해 시험 삼아 키웠어요. 연보라 빛으로 6월말에 꽃을 피기 시작해서 첫눈이 내릴 때까지 피는데, 우리 동네 꽃으로 했으면 좋겠어요. 초겨울까지 꽃을 피운다는 것이 파주와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구름채꽃 뿐만 아니다. 그의 정원에 있는 야생화들을 앞쪽 공터에도 똑같이 심고 있었다. 누구의 도움을 받는 것도 아닌데, 자비를 들여 잡초밖에 없는 땅을 가꾸는 것이다. 그의 몸은 고달프지만, 마을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힘이 절로 솟는다.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면 좋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저 땅을 그냥 둘 수는 없잖아요. 우선 힘이 닿는 대로 가꿀 생각입니다. 헤이리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는데, 건축물만 있는 것보다는 사계절마다 어울리는 식물들을 함께 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돌아가는 그들의 마음이 풍요로워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첫댓글 눈이 호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