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성실문화 35호 2003년 성령강림절에 실린 글로서 송병구 목사님과 성실문화의 동의를 얻어 본 카페에 게재합니다.
송병구 목사
본회퍼의 유산
독일 신학교에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세미나를 할 때마다 종종 이런 이야기가 오간다고 합니다. "어떻게 독일사람들 보다 제3세계에서 온 외국인들이 본회퍼에 대해 더 깊은 이해와 애정을 갖는가?" 그것은 쉽게 정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본회퍼는 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실천을 통해 이해할 수 있고, 신학적 논리가 아니라 고난받는 현실을 통해
애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1970년대와 80년대에 진지하게 신학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본회퍼 목사의 저작을 읽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뿐 아니라 불행한 시대를 가슴앓이하며 살았던 이들에게 본회퍼의 생애는 동시대의 공감대였고, 또한 부채의식이었습니다. 사실 본회퍼의 삶은 그가 비록 독일인이고, 또 기독교 목사였지만 국적과 종교를 초월하여 양심의 교과서였고 시대정신이었습니다.
우리 또래의 신학시절 역시 그의 영향권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우리는
본회퍼의 글을 자주 읽고 토론하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학문으로서가 아닌, 행위로서의 신학'을 고민하면서 시대적 책임의식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돌아보면 그 때는 시련의 계절이었습니다. 본회퍼의 삶은 단지 신학의 규범뿐만 아니라 삶의 거울로 작용하였습니다.
독일에서 목회하면서 나는 우리 교회 청소년 입교교육(Konfirmation)을 할
때마다 마지막 수업과정으로 부퍼탈의 바르멘에 있는 바르멘선언 현장을 방문하곤 하였습니다. 어쩌면 본회퍼에게 진 묵은 빚을 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선언의 현장인 바르멘 게마커교회에서는 아무런
기념물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처음에 바르멘선언 기념물을 찾기까지 한참을 소비해야했습니다.
게마커 교회 앞으로 나서면 인파로 붐비는 삼거리 시장통이 나오는데 그곳에 1.5미터 높이의 작은 조형물이 있습니다. 자칫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지나치기 십상이었습니다. 거리의 사람들은 그 얕으막한 기념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무표정하게 지나쳤습니다. 대부분의 군중이 나치를 향해 오른손을 뻗치며 열렬히 충성을 맹세할 때에 맨 뒷줄에 선 지극히 적은 수의 사람만이 뒤돌아선 채 성경을 펴서 함께 읽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영원하리라" 라는 말씀과 함께 말입니다.
바르멘선언까지
1934년 5월 29일-31일, '독일개신교회 형제회'(Der Bruderrat der
Evangelischen Kirche in Deutschland)는 나치즘이 독일교회 성직자들을 앞세워 기독교와 나치즘의 혼합을 추진하던 때에 정면으로 맞서 <바르멘 선언>(Die Barmer Erkl rung)을 발표하였습니다.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뿐"이라고 선언한 6개조의 신앙고백은 독일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운동의 역사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고백교회운동은 19세기적 시대정신에 반대하였고, 이에 기반을 둔 히틀러의 낙관론적 이데올로기에도 반기를 든 것입니다. 사실 이 고백교회의 투쟁은 주로 "히틀러 정권에 반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히틀러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는 교회 안에 있는 파괴적인 힘에 반대한 것"(에드워드 드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차세계대전에서 참패한 후 가난과 실업으로 고통 당하던 사람들은 모든 책임을 바이마르 헌법과 민주주의 체제, 그리고 외국의 압력에 돌렸습니다.
이런 민중의 불만을 앞세워 국수주의와 전제주의 체제를 시도한 국가사회주의노동당과 히틀러는 일약 집권당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힌덴부르그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스스로 총통이 되어 연방제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체제의 최고 주권자로 등장했습니다.
독일개신교회 제1차 고백교회의 바르멘 선언은 교권투쟁의 역사 속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민족적이고 보수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던 독일 민족 특히
루터교인들과 카톨릭교인들은 대부분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Nazismus)에
찬성하였습니다. 그리고 볼셰비즘과 민주주의를 배격하며 히틀러의 깃발아래에서 유토피아를 꿈꾸었습니다.
히틀러의 전체주의에 영합한 독일의 기독교는 '한 국민, 한 공화국, 한 신앙'이라는 원리 아래 국수적이며 민족 중심의 기독교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들의 음모는 교회를 일원화하여 '복음적, 제국적 독일교회'로 통합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프러시아 총회는 '아리안 입법조항'을 교회에서 받아들여 유대인의 피를 받았거나 유대인과 결혼한 사람은 교회에서 공직을 갖지 못하도록 금지했습니다. 심지어 슐츠 주교는 성만찬을 '피와 흙의 의식'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교회는 점차 국가통제 아래에 놓이게 되었고
따라서 예언자의 기능을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독일 기독교는 비판적인 시야와 예언자적 능력을 상실하였습니다. 이러한 민족중심의
지향에 정면으로 맞서 고백교회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1933년 1월 11일에
'알토나 목회자신앙고백', 3월 8일에는 오토 디벨리우스 감독의 '그의 목회자들에게 보낸 편지'가, 6월 25일에는 칼 바르트의 '오늘의 신학적 실존'이, 9월 21일에는 마부르크대학 신학교수들의 '아리안 조항에 관한 성명'이, 그리고 10월 20일에는 '목사 긴급 동맹'이, 11월에는 '베델 신앙고백서'가 그리고 1934년 5월29-31일에는 앞서 언급한 '바르멘선언'이 나왔습니다. 그 중심에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oeller, 1892-1984) 목사와 '젊은 본회퍼들'이 존재합니다.
젊은 본회퍼
세계적인 경제공황으로 파탄과 절망 상태에 빠져 있던 1931년 5월에 본회퍼는 영국에서 독일로 되돌아왔습니다. 교회의 장래는 젊은 목회자들의 교회적, 수도원적 훈련에 달렸다고 판단한 그는 1935년 4월, 고백교회의 다섯
개 신학교 중 하나인 핀켈발데 신학교로 부임합니다. 여기에서 그는 교회의
투쟁에 앞서 사람들의 결단을 촉구하고,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여 즉시 선교적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목사들의 집단을 형성할 것을 시도하였습니다.
본회퍼는 신학교 안에 '형제의 집'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기도와 묵상, 성서연구와 형제의 친교를 내용으로 하는 훈련을 계속하였습니다. 이 신학교
생활을 그대로 담은 책이 <신도의 공동생활>입니다. 게슈타포에게 1937년 9월 신학교가 폐쇄될 때까지 그는 100여명의 젊은 목사 후보생을 훈련시켜
고백교회의 현장으로 내보냈습니다.
시대의 징조를 읽고있던 젊은 본회퍼는 나치즘이야말로 하나님 없이 사람의
힘으로만 역사를 만들겠다는 무모하고 포악한 세력임을 파악하였습니다.
1933년 2월 1일, 본회퍼는 '젊은 세대에 있어서 지도자 개념의 변천'이라는
베를린 라디오 방송을 통해 1차세계대전 후에 극도의 좌절을 경험한 젊은이들이 정치적인 권위를 희구한 나머지 어떤 인간을 정치적 메시야로 보려는
종교적 착각에 빠졌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스스로를 신으로 삼는 지도자는
신과 인간을 조롱하며 손상시키게 될 것이라"고 말했던 그의 발언은 방송도중 외부의 압력으로 중단되었습니다. 이것은 히틀러에 대한 하나의 선전포고였으며 본회퍼가 행한 반나치 저항운동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본회퍼는 말했습니다. "만일 어떤 미친 사람이 자동차를 몰고 사람이 걸어
다니는 보도 위를 달린다면 나는 목사로서 그 자동차에 희생된 사람의 장례나 치르고 그 친족을 위로하는 것으로 내 임무를 다 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나는 그 자동차를 빼앗아 타고, 미친 사람에게서 핸들을 빼앗아야 할
것이다." 그의 비유는 불의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당연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비합법적으로 계속되었던 '형제의 집' 마저 젊은 목사 후보생들에 대한 징병과 게슈타포의 탄압으로 문을 닫게 되자 고백교회를 근거로 한 행동과 발언들은 완전히 폐쇄되고 말았습니다. 본회퍼는 평소에 생각하던 정치행동으로서 반나치운동의 지하조직에 접근할 시기가 왔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1943년 3월 13일로 계획되었던 히틀러 암살음모는 실패로 돌아갔고, 본회퍼는 매부인 한스 도나니, 요셉 뮐러와 함께 4월 5일에 체포됐으며, 18개월간 테겔의 군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의 두 번째 계획 역시 실패로 돌아갔으며 본회퍼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바싹 다가섰습니다. 9월22일 게슈타포는 쵸센에서 발견한 한 서류철에서 암살음모에 가담한 명단을 발견하였고 따라서
베를린의 게슈타포 감옥으로 끌려간 본회퍼는 더 이상 세상과 접촉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연합군의 폭격이 심해지자 부켄발트 수용소로
끌려갔고 거기서 다시 쇤베르그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플로센뷔르그 수용소에서 발가벗긴 채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1945년 4월 9일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뒤늦은 복권과 역사회복
1996년 2월 4일은 본회퍼 목사가 태어난 지 90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독일 전역에서는 나치정권에 저항하다 순교한 지 50주년을 맞은 본회퍼 목사에 대한 대대적인 추모행사가 열렸습니다. 제2공영방송(ZDF)은 순교일을
맞아 본회퍼의 일대기를 다큐멘타리로 엮었습니다. 또 종교개혁일에는 내가
살던 지역인 복흠 크리스투스 교회에서 본회퍼의 생애를 현대 대중음악으로
꾸민 '디트리히 본회퍼: Ein Rock-Musikspiel'를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집 2층에 살고 있는 슈타인-뷔테 목사는 종종 본회퍼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내게 <나는 누구인가?>(Wer bin ich?) 라는 본회퍼의 시를 복사해 주기도 하고, 요즘 젊은이들은 본회퍼를 너무 모른다고 아쉬워하기도
합니다. 여전히 독일사회와 교회는 본회퍼의 유산을 요구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본회퍼 목사는 2차세계대전 이후 50년 동안 법률적으로 미복권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출생 90주년을 맞은 1995년 2월4일, 베를린주 주법원 앞에는
본회퍼에 대한 법률상 복권을 촉구하는 대자보가 내 걸렸습니다. 베를린과
하노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본회퍼를 위한 정의'라는 단체가 본회퍼 복권운동을 주도해 왔는데 여기에는 개신교 신학자들과 구동독 시민권리운동가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이것은 역사청산이 여전히 미흡함을 증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노버대학의 법학자 칼하인쯔 레만교수는 나치 재판의 법적효력을 인정한
연방대법원의 1956년 결정을 비판하고, 국가반역행위를 한 사실이 없는 본회퍼의 복권을 주장하면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베를린주 주법원에 복권탄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탄원서를 접수한 주법원은 검찰이 절차를 밟을 경우
복권이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으며, 결국 복권이 가능해졌습니다.
얼마 전 하노버대학 정치학교수인 페렐스는 본회퍼에게 사형을 선고한 즉결
군사재판이 전후 독일법원에서 합법화되는 과정을 추적하여 공개한 바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본회퍼에게 사형을 선고한 재판 당사자들의 전범혐의는
나치시대 사법 엘리트들의 재등장과 함께 부인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사소한 절차상의 이유를 들어 검사 후펜코텐이 6년형을 받았으나, 재판관 토르백은 무죄확정을 받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1956년 연방대법원(BGH)은 본회퍼에 대한 군사재판의 법적효력을 인정하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전쟁이후
사법부를 장악한 나치 부역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켰고, 따라서
본회퍼는 미복권 상태로 남게 된 것입니다. 역사청산에는 시효가 없음을 본회퍼의 경우에서도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고백과 실천 사이
나치독일에 항거하던 고백교회의 참여자들은 2차세계대전 후에도 당면한 국제정세에 대응하여 새로운 운동을 조직하고 나섰습니다.
그들은 먼저 1945년 10월 19일, <스투트가르트 고백>(Die Stuttgarter Erkl
rung)을 통해 국가사회주의체제 동안 저지른 죄책을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좀더 용기있게 증거하지 못했고, 좀더 신실하게 기도하지 못했으며, 좀더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고, 더 열정적으로 사랑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책망한다". 이러한 죄책은 전체주의 국가의 유혹에 빠졌던 독일개신교회에 대한 자기 비판적인 성찰과 교회의 정치적 책임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독일개신교회가 세계 교회로부터 고립되는 것을 막고 영적, 정치적 혼란에 빠진 독일국민을 향한 발언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냉전이 깊어지던
1947년 8월8일, 독일 개신교형제모임은 독일개신교회가 반공교회로 전락하여 새로운 동ㆍ서간 긴장을 조장하려는 새로운 경향에 대해 <다름슈타트 성명>(Das Darmst dter Wort)을 발표하여 경고하였습니다. 이는 서방을 신성화하고 동방을 마귀시하는 냉전신학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성명은 "우리 독일 국민은 잘못된 길을 걸어갔다"고 반복하면서, "… 과거를
미화하는 환상과 또다시 전쟁이 올 것이라고 망상하는 짓을 버리고, 오히려
좀 더 나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자유와 책임을 투입해야 한다. 그래서 정의와 복지와 사회적 평화에 도움이 되고 이웃 나라들과 화해하는데 봉사해야 한다(6조)"고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참여와 세상을 향한 발언은 분단과 통일시대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동ㆍ서독 사이 장벽이 무너진 후 1990년 1월에 동독개신교연맹(BEK)과
서독개신교회(EKD) 대표자들은 로쿰 아카데미에 모였습니다. 공동으로 발표한 <로쿰 고백>(Die Loccumer Erkl rung)은 "독일 개신교회의 특별한 공동체는 국가의 분단과 교회의 분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명력 있게 살아 있었다. 우리는 이후의 정치적 발전이 어떤 형태를 띠게되든 독일 전체 개신교 신자들의 특별한 공동체를 조직적으로 적절한 형태로 교회 내에 확립하길 원한다"면서, 분단으로 나뉘었던 두 개신교회 조직을 다시 통합한다는
목표로 공동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물론 호네커 정권의 붕괴 이후 급속히 해체되는 동독과 달리, 동독교회는 스스로 파산을 선고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동독 개신교인들의 고유한 역사적 경험과 고난은 존중되어야 마땅하였습니다. 당연히 동독개신교회는 통일이 시간적 압력을 받지 않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준비되어야함을 주장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교회 통일의 마지막
단계로서 독일에서는 변화된 독일개신교회가 세워져야 함이 강조되었습니다. 마침내 1991년 6월 동독 개신교연맹은 해체되었고, 다시 24개 주 교회의 통합체로서 전체 독일개신교회(EKD)를 이루었습니다.
독일개신교회의 국가와 민족의 통일에 대한 자기 성찰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1995년 10월3일, 통일 5주년을 맞아 교회는 <독일개신교회 평의회
담화>를 통해 통일 이후 교회 안에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발전은 아직 완결되지 않았고, 그 평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동독과 서독의 시각이 다르고, 교회 내부에도 이견이 있다. 대화는 계속되어야 하며 그리고 새로 시작되어야 한다".
역사적 순간마다 시대의 고비마다 반성과 성찰을 통한 자기 갱신의 목소리,
그것은 독일교회가 소중히 지켜온 역사적 유산처럼 느껴집니다.
다시 바르멘선언으로
이러한 고백과 발언은 실천으로 이어졌습니다.
역사적으로 돌아 볼 때 40년이 넘는 분단기간 동안 동독개신교연맹과 서독개신교회는 종전 이후 오늘날까지 다른 어떤 단체나 조직들보다 가장 강력하게 독일인의 동질성을 조성해 왔습니다. 그들은 같은 성경을 선택하여 읽었고, 같은 찬송가를 불렀으며, 같은 전통에 따른 교회력을 지켰습니다. 신학적 대화, 세계교회에 대한 공동적 입장, 특히 물질적 교환은 단절되지 않고 계속 이루어 졌습니다.
1991년 7월1일 독일개신교회(EKD)로 재통합하기까지 이 양쪽 교회의 내적
유대를 육성하기 위하여 서독의 주교회들은 동독의 주교회들과 결연관계를
맺고 정기적으로 방문하였습니다. 동ㆍ서독교회는 일차적인 경제적 의존관계인 대부교회로부터 성숙한 단계로서 동반자교회로까지 관계의 확장을 이루었습니다. 물질적 도움을 주고받는 대부교회 관계는 공동과제로서 냉전완화와 사회주의와 기독교의 대화, 평화적인 공존문제, 핵전쟁 반대, 제3세계에 대한 제1, 2세계의 공동과제 그리고 에큐메니칼운동과 같은 동반자교회(Partnergemeinde)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다름 아닌 분단상황이 빚어낸
불행을 치유하고, 앞장서서 대화와 화해 그리고 공존을 통한 평화를 실천하였습니다.
사실 냉전시대든, 분단시대든 그리고 정작 통일시대에도 교회의 역할은 긴요합니다. 동ㆍ서독 통일 이후 갈등의 골이 메워지지 않는 현실은 교회가
'화해와 일치'에 대해 새로운 모색을 하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사실 독일개신교회는 분단 이래로 양 독일 사이에서 화해를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경험 때문에 적절한 중재자로서 역할이 기대되고 있습니다. 물론 통일 이후
봇물처럼 터져 나온 교회 이탈자들 때문에 교회세 수입이 줄었고 교회는 여러 해 동안 구조조정의 진통을 겪고 있는 독일개신교회 자신이 당사자로서
문제의 중심에 서 있기도 합니다.
1980년대 말, 동독의 전환기에 동독교회를 가득 채웠던 사람들은 이전 상태로 급속히 되돌아갔습니다. 동독 정부가 통치하던 기간동안 공산주의의 반종교 선전과 교육은 종교개혁의 유산을 지닌 이 지역의 신앙적 풍토를 극도로 피폐화 하였고, 결국 80%에 이르던 개신교인은 20%로 줄어들었습니다.
동독시절 교회를 지켜 온 한 목회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동독시대 때 교회의 유일한 자산은 믿음 그 자체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통일이후에는 많은 자유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믿음은 적어졌습니다." 그는 통일과 함께 갑작스레 찾아온 자유가 지켜야 할 것까지 휩쓸어 갔음을 슬퍼했습니다. 박해가 사라진 대신 풍족한 물적 지원을 받지만 이와 함께 더욱 마력적인 세속화와 다원화된 물질문화적 풍토가 동독을 휩쓸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환경에서 동독에서든, 서독에서든 독일교회가 독일 내부의 선교야말로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과제임을 눈뜨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바르멘선언의 정신을 회복하는데서부터 출발합니다.
다시 본회퍼를
베를린 주교회의 볼프강 후버 주교는 복권된 순교자 본회퍼의 말을 인용하여 "이 세상에서 신앙이란 교회가 그 사회의 기대가치에 강요됨이 없이 공적인 책임을 신실하게 받아들임에 있다" 라고 하면서, 세속화가 종교가 없는 사회로 발전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있습니다. 다시 본회퍼가 주목받는 것은 그가 개신교 신학에서 교회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로 진지하게 취급하도록 신학적 사고를 회복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본회퍼 서거 50주년을 맞아 네덜란드의 캄펜에서 열린 추모행사에서 콘라드
라이저(WCC 총무)는 이렇게 강조하였습니다. "본회퍼의 삶과 신학을 의미있게 만들고 또한 급변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하나의 모범이
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의 정치적이고 신학적이며 영적인 투쟁의 진실함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 본회퍼가 라틴 아메리카와 남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에서 이와 유사한 투쟁의 상황에 직면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교회에 대한 본회퍼의 관심은 무엇보다 그리스도 예수의 의미를 해석하려는
노력을 통해 다가가게 되었습니다.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 혹은
'이웃을 위한 존재'라는 본회퍼의 교회에 대한 정의는 교회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열어 주었습니다. 오늘날 '제자직으로서 교회론'을 주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본회퍼의 통찰에서 커다란 영감을 받고 있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에 끝까지 충실했던 20세기의 예언자 본회퍼는 현대교회를 향해 신학의 세례만이 아닌 몸으로 광야의 길을 외친 장본인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기도'와 '정의의 실천'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증거 한 본회퍼는 더욱 첨예하게 직면하고 있는 교회의 도전들을 미리 예견했던 것입니다. 20세기의 예언자 본회퍼의 유산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억압과 고난이 계속되는 한 21세기를 넘어서까지 개혁운동을 계속해 나갈 것이 분명합니다. 여전히 독일사회와 교회는 본회퍼의 유산을 요구하고 있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