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충절 기리는 ‘정충문화제’
구분
자치행정(김수정 기자)
등록일
2015-06-01 오후 5:24:38 [0219 ]
헤드라인) 병자호란 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웠던 수백 명의 장병을 기리기 위한 행사가 오는 30일 창원에서 열립니다.
앵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웠던 수백 명의 장병을 기리기 위한 행사가 오는 30일 창원에서 열립니다.
특히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5호인 문창제 놀이도 선보인다고 하는데요.
자세한 내용, 김수정 기자가 보도합니다.
좌상단>호국충절 기리는 ‘정충문화제’
리포트)
공원 옆 자리 잡은 청정비.
백성들은 그 은혜를 되새기고,
선비들은 그 죽음을 슬퍼하노라.
조선 중기 창원부사를 지낸 무신인
백선남 부사를 기리기 위해
그의 제자들이 세운 빕니다.
부녀자들이 추는 살풀이 춤인 추도무와
황시헌이 순절하는 과정을 담은 무언극인
군노 놀이.
충신 황시헌을 추모하기 위한 행사로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 5호로도 지정 돼 있습니다.
백선남 부사와 황시헌 공,
그리고 창원지역 수 백명의 근왕병은
병자호란 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싸우다
경기도 광주 대쌍령 전투에서 모두 순절했습니다.
int) 조정호 / (사)정충문화진흥회 회장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희생된
그 분들을 추모하기 위한 행사로 정충문화제를 개최해오고 있습니다.
올해로 3회째를 맞는 정충문화제.
조선 후기 창원 지역에 설치 됐던 행정구역인
창원 대도호부에서는
순절한 호국영령의 혼을 달래기 위해
위령 추모제를 해마다 거행했습니다.
이후 충절의 고장 창원에서
애국, 애향 정신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정충문화제로 2013년부터 열리게 됐습니다.
int) 조정호 / (사)정충문화진흥회 회장
시민 여러분께서는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 싸우다 돌아가신 그 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행사니까 많은 참석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s/u) 충의절사들의 호국충절을 기리기 위한
제3회 정충문화제는
오는 30일, 이 곳 창원용지문화공원에서 열립니다.
헬로티비뉴스 김수정입니다.
2011.09.07. 15:31
http://eyoone.blog.me/150118275637
오늘 신문(경남도민일보 2011.09.07자)에
“충신 황시헌을 창원의 문화콘텐츠로”라는 제목 아래
‘황시헌공 연구회 창립 … 문창제 놀이 활성화 목표’라는 작은 제목이 있는 기사가 실렸다.
그런데 어디에도 “황시헌”이 어떤 인물인지 써 놓은 것은 없었다.
지난 시절의 사진첩을 뒤지고 내가 찾아 본 “황시헌”에 대한 자료를 올려 본다.
충 신 황 시 헌 공
(黃是憲 1606~1636)
자는 도부(道夫), 본관은 창원으로 예 창원읍(昌原邑)의 정계인(井界人)이다.
인조 14년(1636) 청나라 태종의 침입으로 인조대왕이 피신해 있던 남한산성이 포위되어 전국에 의병을 구할 즈음 창원부사 백선남(白善男)이 부병(府兵)을 인솔하고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할 때 그는 부리(府吏)로서 백부사를 수행하였다.
1637년 1월 3일 남한산성을 30리 앞 둔 경기도 광주군 쌍산령(雙山嶺) 아래의 남한 강변에서 적병의 기습공격을 받아 부사와 수행관리들이 모두 장렬히 전사하고, 순국당시 부사가 패용하고 있던 관인(官印)을 적이 탈취하려함에 관인(官印)을 받은 그는 창원부인(昌原府印)을 끝까지 지키려다 적의 팔에 양팔이 잘리고도 입으로까지 부인(府印)을 지키려다 순절한 구국정신이 투철한 분이었다. 이 때 나이가 31세였으며 조정에서 공조정랑의 벼슬을 영전에 내렸다. 현종조(顯宗朝)에 이르러 공조수부정랑(工曺水府正郞)을 추증하고 정려(旌閭)를 명함에 충신(忠臣)의 반열에 올랐다. 묘(墓)는 창원시 서상동 남산 임자에 있으며, 후손들이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충절각(忠節閣)이 서상동에 있었으나 남산으로 옮겨 이곳에 세웠다.
또한 경상남도 무형문화제 제5호인 “문창제놀이”는 창원시 서상동에서 음력 1월 3일에 이루어지는데 이는 공을 제향하고 추모하는 놀이이다.
창 원 시 장
문창제놀이 개략 사실기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당시, 청태종 홍다시(洪多時)가 청병 20만을 거느리고 침략할 때 국왕이 남한산성에 포위당하여 항복을 강요당하고 있을 때 의분이 끓는 창원대도호부사 백선남은 부리(府吏) 황시헌(黃是憲) 휘하 관병과 의병 등 수백 명을 인솔하여 경기도 광주 초월 쌍령 근처에서 잠복하고 있던 청군의 기습을 받아 용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본 고장의 관병과 의병이 전멸에 이르렀고 드디어 백선남 부사도 순국하였다.
순국당시 패용(佩用)하고 있던 관인을 적이 전리품으로 탈취하려함에 황시헌은 관인을 받아 쥐니 적장이 오른팔을 절단하였다. 다시 왼팔로 잡아 쥐니 왼팔마저 절단하여도 끝까지 관인을 뺏기지 않으려고 입으로 받아 물고 있으니 목까지 절단하여 순사(殉死)하였다.
후일 조정에서는 이 일을 가상(嘉賞)히 여기시어 현종(顯宗) 때에 그 충절(忠節)을 기리어 황시헌에게 공조수부정랑의 벼슬을 추서하고, 충절각(忠節閣)의 현판까지 하사(下賜)하시니 창원의 관속, 서민 모두가 비각(碑閣)을 세우고 순국 장졸의 제향을 올리고 추도무, 군노놀이, 매귀굿으로 그 충의(忠義)를 숭상하고 연례행사로 문창제놀이를 하고 있다.
이 문창제놀이는 창원 유일의 무형문화재이며, 1976년에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창원문화원장
숙종 15년 기사(1689,강희 28) / 5월25일 (경신)
창원부리 황시헌을 정려하다
창원부리(昌原府吏) 황시헌(黃是憲)을 정려(旌閭)하였다. 황시헌은 병자(丙子)의 난(亂)에 부사(府使) 백선남(白善男)을 따라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달려가다가 광주(廣州) 쌍령(雙嶺)에 이르러 싸움에 패하자, 황시헌이 부인(府印)을 허리에 매고 백선남의 주검 곁에서 죽었는데, 이에 이르러 그 아들 황우룡(黃羽龍)이 조정에 상언(上言)하였다. 도신(道臣)이 부중(府中)의 고로(故老)에게 물으니, 모두 그때의 일을 말하는 것이 황우룡의 말과 같았다. 그래서 이 명이 있었다.
【원전】 39 집 189 면
【분류】 *인물(人物) / *윤리-강상(綱常)
肅宗 21卷, 15年(1689己巳/청 강희(康熙)28年) 5月25日(庚申) 1번째 기사
창원부리 황시헌을 정려하다
○庚申/旌昌原府吏黃是憲之閭, 是憲於丙子之亂, 隨府使白善男, 帥兵西赴, 至廣州雙嶺戰敗。 是憲繫府印於腰間, 死於善男屍傍, 至是其子羽龍, 上言于朝, 道臣訪于府中故老, 則皆言其時事, 如羽龍言, 故有是命。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9책 189면
【분류】 *인물(人物) / *윤리-강상(綱常)
국역승정원일기 > 고종 4년 정묘(1867, 동치 6) > 9월15일 (을축) 맑음
병자년 등에 전사한 사람의 성명과 사연을 일일이 조사하여 들인다는 홍문관의 계
○ 홍문관이 아뢰기를,
“병자년ㆍ정묘년에 전사한 사람들을 홍문관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들이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삼가 성상의 하교대로 《병자록(丙子錄)》 및 《존주휘편(尊周彙編)》의 배신전(陪臣傳) 등 책을 조사하였습니다.
(중략)
쌍령(雙嶺)의 싸움에서 경상도 병마절도사 허완(許完), 우병사 민영(閔栐), 충청 병사 이의배(李義培)가 들어가 구원하다가 쌍령에 이르러 전사하였습니다. 허완은 병조 판서를 추증하고 충장(忠莊)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민영은 병조 판서를 추증하고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이의배는 영의정을 추증하고 충장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이들 모두를 정려하였습니다. 안동(安東)의 영장 선세강(宣世綱)은 구원하러 들어가 힘껏 싸우다가 죽었는데, 병조 참의를 추증하였습니다. 상주(尙州)의 영장 윤여임(尹汝任)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근왕(勤王)하여 앞장서서 적을 향해 총을 쏘아 세 손가락이 다 해졌으며, 오랑캐가 이르자 죽고 말았는데, 배에 꼽힌 화살촉을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병조 판서를 추증하고 영원군(鈴原君)에 봉하였습니다. 창원 부사(昌原府使) 백선남(白善男)은 삼영(三營)의 군사가 모두 궤산되자 오랑캐 진영으로 달려가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는데, 그를 따르다가 죽은 자가 1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창원의 아전 황시헌(黃是憲)은 흩어진 졸개들을 불러 모아 힘껏 싸우다가 백선남의 곁에서 죽었는데, 그에게 병조 좌랑을 추증하였습니다. 현감 손종로(孫宗老)는 허완의 군대를 따랐다가 군대가 궤산되자 꼿꼿하게 선 채로 죽었는데, 훈련원 정을 추증하고 정려하였습니다. 그의 노복 억부(億夫)도 그를 따라 죽었습니다. 강운서(姜雲瑞)는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다는 말을 듣자 ‘군부(君父)가 곤란한 지경에 빠졌는데 감히 집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조카 기업(起業)ㆍ기군(起軍)과 함께 힘껏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경상도 중군 우성적(禹成績)이 쌍령에서 전사하자 그의 노복 귀동(貴同)이 따라서 죽었는데, 사복시 정을 추증하고 노복과 아울러 정려하였습니다.
(중략)
전사한 사람의 성명과 사연을 일일이 조사하여 들입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임술년의 예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梅山先生文集卷之三十三 / 神道碑
贈兵曹參判鈴原君尹公神道碑銘 幷序 a_296_144b
[洪直弼]
崇禎丙子。建虜入冦。仁祖播遷于南漢。時變出倉卒。國勢危急。坡平尹公汝任。以尙州討捕使。聞亂痛哭。矢心殉國。以紫綃纏兩脛。將爲收骨之驗也。遂領鎭兵倍道兼進。始白公善男。與公居同郡生同年。是歲莅昌原。帥府兵至。公與白公灑涕共誓曰。此主辱臣死之日也。偕造廣州之雙嶺。時虜已分兵四出。截諸路勤王之師。公見賊氛甚惡。而我勢甚弱。乃解鞍縱馬。示不旋踵。遂挺身步戰。彎弧射賊。矢不停弦。殪賊甚夥。以至决拾磨盡。五指俱墮。公自割衣裾。咋指血書。許身殉國。不得終孝八字。付家僮曰而歸告我老母。遂不移步而絶。卽丁丑正月三日也。去其生戊子。爲四十八歲。是日白公亦手劍走虜陣。力竭而死。陪吏黃是憲又爲之從死。公家僮歸告母夫人。夫人見公血書。泣謂其婦曰吾兒死矣。死得其所也。後人收公屍於戰塲。賊矢蝟集。洞其胷腹。見者壯而悲之。事聞上震悼。追封公爲鈴原君。與白公幷贈兵曹參判。分告身一道而半之。分賜公與白公。肅廟嘗輦過雙嶺。親題詩云義魄歸何處。悲風嶺上吹。停車日欲暮。回首益凄其。朝家幷施貤㫌於黃是憲。而公與白公獨闕焉。純宗癸酉。宗伯因道啓奏曰。丙丁死義。莫盛於雙嶺。而今此兩臣。俱在分憂之列。聞變勤王。同日殉身。當時事功。咸有公私可據之蹟。其所崇奬。反不及從死之陪吏。不但爲朝家之闕典。宜有士林之餘憾。請施以綽楔之典。上親閱南漢日記及公事。大加嘉奬特許之。於是始旌公與白公閭曰忠臣之門。先是建祠于靑谷。幷享公父子及白公。世以比睢陽之雙廟焉。春曹又請公俎豆之所。香燭祭需。壹遵賜額院例。幷蠲公子孫徭役。(후략)
(2011.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