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 몬스터[樹氷]
李 信子
일본 아키타현에 위치해 있는 핫코다산은 아오모리의 ‘지붕’이라 불린다. 이 산을오르기 위해 정상으로 가는 길 도로 양옆은 6~7m 높이로 쌓인 눈이 눈벽을 이루고 있어, 이정표가 아주 높은 곳에 걸려있는 것이 특색이다.
천오백팔십사미터 높이의 핫코다산 정상은 로프웨이를 이용하여 등정한다. 케이블카를 지탱하는 철탑 전체가 눈에 덮혀 있어 마치 설치 미술품을 감상하는 기분이다. 이곳 핫코다산[八甲田山] 정상의 나무들은 온통 하얗게 뒤덮은 눈과 거대한 얼음 군상으로 그 위용이 대단하여 장관 중에 장관인 풍광을, 무어라 말로는 형용할 수가 없다. 동화 속 세상에 온 듯 감탄의 환호성이 저절로 터진다.
길게 늘어뜨린 고드름은 몽둥이처럼 굵어, 신기하기만 하다. 수십 년 전 배고팠던 어린시절 간식거리가 없어 허기진 배와, 입안에 굴리는 만족감을 위해 씹어 먹던 가난했던 옛 추억이 떠오른다. 그때 먹어 본 후 처음이라서 따먹어 보고 싶은 충동이 일렁거려 와작와작 씹어 본다.
‘고드름 고드름 수정고드름, 고드름 따다가 발을 엮어서, 각시방 영창에, 달아 놓아요’ 해학이 담긴 동요가 떠올라 부르기도 하고. 아이들처럼 대굴대굴 딩굴며 청정한 고지대 정상에서 동심에 젖었다 온 추억이 때때로 기쁨으로 다가온다. 차가운 듯 하면서도 포근한 순백의 자연설은, 때묻지 않은 본래의 내 모습을 볼 수 있는 안도감 때문일까? 엄마의 자궁안처럼, 엄마의 품안에 안긴 아이처럼 지극히 평화롭고 포근하여 행복감을 안겨준다.
세상사에 시달릴 때면 지금도 그해 겨울여행의 잔상들이 떠올라 충만감에 젖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그 청순한 천 만 년 설(千 萬 年 雪)의 마법 때문인지도 모를일이다.
‘스노 몬스터’ 라 불리는 수빙(樹氷)은 눈과 안개가 바람에 날리면서 나무에 얼어 붙은 형상이 마치 에스키모인 같기도 하고, 무리 지은 흰 팽귄처럼도 보인다.
이곳 정상의 자연설을 하얗게 입은 나무들은, 성모마리아상 앞에서 기도하는 성직자의 모습 같아 보여서 마치 신의 성전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 엄숙한 하얀 침묵은, 오염되어 있는 인간군상들을 연민의 정으로 내려다보며 어서 심신의 티끌을 씻어내라는 묵언으로 나를 돌아보게 한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이 어디인가 가늠하기 어려워, 상식적인 일상을 때로는 거부하려는 속진된 나에게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맑은 영혼을 가지려면 명상의 길로 더욱 정진하라는 채칙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일본 아오모리는 세계 제일의 너도밤나무의 원생림이며, 세계 최장의 벗꽃길 가로수와 해저터널(세이관 터널)이 세계 제일이라 한다. 하지만 나는 자연설이 사막의 모래처럼, 평야로 혹은 굴곡을 이루며 쌓여있는 핫코다산의 수빙 군상들을 으뜸으로 꼽고 싶다. 그런 무공해 핫코다산에서 스릴넘치는 몸짓으로 눈꽃 경사면을 따라 흰눈가루를 흩날리는 스키 마니아들의 로맨틱한 율동은 매력 만점. 만점이다.
나에게 젊음이 남아 있었다면, 싱싱한 젊은이들의 흉내라도 내보고 싶으지만, 퇴행성 관절염이 두려워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니,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천연설은 나에게 오감만족을 안겨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스키를 즐기는 마니아들을 관상하고 있노라니 자연은 인간과 공생할 때 신의 작품들이 더 아름답게 빛난다는 것을 재삼 느낀다. 하여 ‘단테’는 신의 예술이 자연이라고 했을까.
고지대의 자연설이라 3, 4월까지도 눈이 녹지않고 그대로 있어, 스키를 즐길 수 있다니 스키를 좋아하는 며느리와 눈밭을 뒹굴며 좋아하던 귀여운 손녀의 모습이 떠올라 눈시울을 적신다.
부조리한 현실과 틀에 박힌 듯 짜여진 일상에 지치거나 힘겨울 때마다, 핫코다산 정상에서 본 스노 몬스터[樹氷]의 형상을 떠올리며 삶에 활력을 불어 넣어야겠다.
칼바람과 눈보라를 한몸에 안고서도 꿋꿋하게 서 있는 강인한 나무의 생명력을 떠올려 지금의 내 모습을 퇴화시키지 않으려는 꿈을 꾸어본다.
내 심신을 꿈으로 디자인할 수 있는 날까지…
- 끝-
첫댓글 이신자 수필가님의 좋은 글을 보여주시고, 읽게 해 주시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에겐 하산은 없다
시: 고광자
언니가 온단다
내 집으로
환한 미소를
온 몸에 담고
우린 해송아래
커피를 마시며
온화히 서로의
얼굴을 볼 것이다
살아가는 인생사
산을 오르는
땀흘림으로
우린
산등성이에 앉아
잠시 쉬어 가는 것이다
언니가 온단다
붉으레한 양지
정상을 향하던
그 날
우린
평생
산을 오른다.
오늘 8월 19일 "詩가 있는 해송의 집"에 오는 멋진 언니께 바치는 마음의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