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半島의 古代 人造池沼
못은 天然 또는 人工的으로 넓고 깊게 파인 땅에 늘 물이 고여 있는 곳을 말한다. 넓은 意味의 못으로 湖, 沼, 澤, 瀉 等을 들 수가 있는데 보통 못이라 하면 自然的인 것이라기보다 人工的인 것이 많다. 즉 自然的인 작은 늪(沼)에 약간의 人工을 가해 못을 만들기도 하지만 大部分은 自然地形을 利用하여 人工的으로 물을 가두는 못을 만들어 利用하는 便이다.
全體를 人工的으로 만든 못은 그 築造技法이나 形態, 用途 等에 따라 여러 가지로 分類할 수 있다. 築造技法에 따라서는 ① 흙이나 석비레층을 파서 벽을 만든 境遇, ② 돌로 벽을 쌓은 境遇, ③ 나무 等 有機物로 壁을 만든 境遇 等로 나눌 수가 있다. 形態에 따라서는 흔히 曲池와 方池로 大別하나 嚴密히 ① 正方形⋅長方形⋅圓形 等 一定한 形態를 지닌 것 ② 護岸 一部는 直線으로 나머지는 複雜한 曲線으로 屈曲 處理한 것, ③ 百濟 夢村土城, 新羅 半月城과 高句麗의 安鶴宮 等에서처럼 城 둘레에 守備를 위해 파놓은 垓子 等로 區分하는 것이 더 妥當하다. 使用 用途에 따라서는 ① 農耕地의 灌水를 위해 만든 灌漑池, ② 軍事上 必要에 의해 만든 軍用池 ③ 宮園 또는 邸宅에 觀賞을 위해 만든 蓮池(塘)과 같이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外 工業用水나 食用水를 貯藏하기 위해 만든 貯水池, 治水를 위해 만든 것 等이 있는데 比較的 大規模인 이들은 後代에 自然地形을 利用하고 一部分만 人工的으로 만든 것이 大部分이다. 따라서 古代의 못을 分類하는데는 앞의 세 가지 用途로 局限하여 分類하여도 別 無理가 없다. 여기서는 이러한 分類에 따라 韓半島에서 發見된 古代 人造池沼를 살펴보겠다.
韓半島에서 現在까지 發見된 人造池沼 中 雁鴨池나 宮南池 等 一部 宮園池는 短篇的인 記錄이 남아 있지만 大部分의 못들은 언제, 누가, 어떤 目的으로 築造하였는지에 대한 記錄이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現在까지 發見된 古代의 못들을 앞에서 用途에 따라 分類한 것처럼 灌漑池, 軍用池, 蓮池(塘)로 나누어 설명 드리겠다.
가. 灌漑池
우리나라에서는 稻作이 本格的으로 普及되면서 農耕地의 灌水를 위해 많은 灌漑 施設物이 設置되었다. 쌀을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生育에 適合한 用水條件이 自然的으로 주어진 델타와 같은 곳에서는 品種의 選別이 重要하지만 用水가 自然的으로 具備되어 있지 않은 곳 - 例를 들면 山間部나 扇狀地 -에서는 멀리서 물을 끌어오기 위해, 또는 天水를 모으기 위해, 또 이렇게 確保한 用水의 管理를 위해 많은 勞動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農民들은 導水溝를 뚫고, 揚水裝置를 設置하고, 둑을 쌓아 냇물을 막고, 혹은 貯水를 위해 貯水池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勞力을 기울였다는 것은 古代 文獻에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間間이 發見된 金石文을 통하여, 또 口傳 資料들을 통하여 찾아 볼 수가 있다.
高句麗의 境遇, 灌漑遺蹟이 文獻에 나타나지 않지만 百濟와 新羅의 灌漑遺蹟은 더러 있다. 그 中 代表的인 灌漑遺蹟으로는 堤川 義林池, 尙州 恭檢池, 密陽 守山堤, 金堤 碧骨堤를 들 수가 있는데 大部分 現存하고 있다. 金石文이 發見되어 灌漑 遺蹟의 存在를 알게 해 준 것도 있는데 大邱 大安洞 發見 塢作碑, 永川 菁堤碑 等이 그것이다.
나. 軍用池
軍事上 必要에 따라 만든 軍用池는 먼저 百濟의 夢村土城, 新羅의 半月城과 高句麗의 安鶴宮 等에서와 같이 守備를 위해 파놓은 垓子를 들 수 있고, 또 山城 內部에 用水를 供給하기 위해 築造한 못도 있다. 특히 山城을 많이 築造한 우리나라의 境遇 大部分의 古代 山城 內部에 못이나 우물 等 用水를 供給할 수 있는 場所가 마련되었을 것이라고 推定된다. 여기서는 古代 山城에 用水 供給을 위해 人工的으로 築造한 遺構 中 못을 中心으로 살펴보겠다.
北韓地方의 境遇, 現在까지 報告된 山城의 못 中 代表的인 것으로 遼寧 桓因 五女山城⋅平壤 大聖山城⋅吉林 尉那巖城⋅龍潭山城의 池 等을 들 수 있다. 그 外 南浦市 龍崗의 黃龍山城과 黃海道 黃州의 黃州山城, 平北 東林의 通州城, 黃海道 新院의 長壽山城, 黃海道 瑞興의 大峴山城, 黃海道 平山의 太白山城, 黃海道 海州의 首陽山城에도 못이 遺存하고 있다.
南韓地方에서는 약 680餘個의 城址가 確認되었다. 그 중 百濟 版圖 안에만 대개 522個의 城址가 있는 것으로 成周鐸은 報告하고 있다. 그것은 文化財管理局의 <全國遺蹟目錄>에 紹介된 것을 합한 것인데 行政道別로는 京畿道에 105個所, 忠淸南道에 195個所, 忠淸北道 西部 一部 地域에 35個所, 全羅南⋅北道 一圓에 187個所로 區分된다. 新羅 圈域에는 大略 160個所의 城址가 있다고 推算되는데 이 숫자는 李元根의 <三國時代城郭硏究>에 紹介된 148個所에다 朴方龍이 調査한 것 等을 더한 숫자이다.
이 城址들의 大部分은 山城址이며 그 內部에 못이 남아 있었다는 記錄이 여러 곳에 나타난다. 井上秀雄은 南韓地方의 山城址와 이 곳의 여러 施設物들을 整理한 資料를 펴낸 바 있는데 이 資料에서 못의 存在를 쉽게 確認할 수가 있다. 이는 文化財管理局의 <文化遺蹟總覽>을 기본資料로 삼고 <東國輿地勝覽> 等과 같은 古文獻을 찾아 發表한 것이라 한다.
井上秀雄 資料에서 山城池를 確認할 수 있는 곳으로는 慶尙道의 境遇, 大邱의 達城, 英陽郡의 城隍堂 山城, 迎日郡의 南彌秩夫城⋅北彌秩夫城⋅城黃洞城, 慶州의 富山城과 下西知木柵, 淸道郡의 烏禮山城, 漆谷郡의 天生山城, 金陵郡의 俗門山城, 醴泉郡의 黑鷹山城, 晋州城, 咸安郡의 代山面山城, 昌寧郡의 火旺山城, 密陽郡의 推火山城, 梁山郡의 新基里山城과 梁山邑城, 釜山의 東平懸城, 蔚州郡의 川前里城, 金海郡의 北山城, 固城郡의 固城城, 山淸郡의 白馬山城과 江山城, 陜川郡의 美崇山城 等이 있다. 서울시와 京畿道의 境遇, 冠岳區의 永郞城(三聖山古城)과 虎巖山古城, 華城郡의 禿山城, 坡州郡의 七重城, 廣州郡의 南漢山城, 安城郡의 無限城, 江華郡의 華蓋山城이 있고 忠淸南北道의 境遇, 淸原郡의 上黨山城과 壤城山城, 報恩郡의 三年山城, 沃川郡의 環山城, 公州郡의 公山城, 保寧郡의 保寧城, 牙山郡의 岐山里城, 天原郡의 慰禮山城과 黑城山城이 있다. 江原道와 濟州道의 古代 山城 중 못이 있다는 記錄은 찾을 수가 없으며, 全羅道의 境遇도 淳昌郡의 大母山城, 潭陽郡의 金城山城, 咸平郡의 箕山城 3例에 不過하다. 물론 못이 있었다고 記錄이 있는 城址도 더러 있으나 이 境遇, 後百濟와 關聯된 山城이거나 朝鮮時代의 邑城, 그리고 壬辰倭亂을 前後하여 築造한 城들이다.
그 外 山城을 地表調査하다 確認된 山城池를 비교적 자세히 소개해 둔 境遇도 있다. 代表的인 곳으로 慶州 富山城, 慶州 明活山城, 迎日 南彌秩夫城, 星州 禿用山城, 淸州 上黨山城, 昌寧 火旺山城 等을 들 수가 있다.
또 山城을 發掘하다 못이 確認된 곳도 있다. 서울의 夢村土城과 虎巖山城, 河南의 二聖山城, 報恩의 三年山城 等이 이 境遇인데 發掘調査 結果에 따른 正確한 資料가 發表되었다.
發掘이나 地表調査의 報告書에는 調査者에 따라 그 名稱은 다르게 나타나 있다. 서울 夢村土城의 境遇, ‘연못지’로, 서울 虎巖山城의 境遇, ‘한우물’, ‘제2우물지’ 等과 같이 우물지로, 河南 二聖山城의 境遇, ‘貯水池’로, 報恩 三年山城의 境遇, 蓮池’라는 名稱으로 불려 졌다. 北韓 報告書에는 主로 ‘못자리’라고 紹介하고 있으나 ‘물주머니 자리’라는 名稱도 使用된다1). 嚴密히 말해서 ‘샘’, ‘우물’, ‘貯水池’, ‘연못(지)’, ‘못자리’ 等은 差異가 나며 이에 대한 약간의 考察은 앞에서 한 바 있다. 追後 別途의 考察이 必要하다.
다. 蓮塘
우리나라의 古代 蓮塘은 築造 場所에 따라 宮苑池와 寺院池로 크게 나눌 수 있고 또 平面形態에 따라 曲池와 方池로 大別시킬 수 있다. 曲池는 주로 넓은 자리에 造成된 데 비하여 方池는 狹小한 자리에 꾸밀 때 많이 擇하여 졌다. 이러한 方池는 高麗時代에 一般人의 邸宅에 盛行하며, 高麗時代의 方池에는 섬이 없다가 朝鮮時代에 접어들면서 둥근 섬을 만드는 技法이 나타나는데 이를 方池圓島形이라 부른다.
宮苑池에 대한 最初의 記錄은 <三國史記> 辰斯王 7年(391) 1月條의 “ 宮闕을 重修하고,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奇異한 짐승과 꽃을 길렀다”는 것이다. 그 以後 宮南池와 月池(雁鴨池)를 造成하였다는 記錄이 나타나는데 現存하는 우리나라 代表的인 宮苑池로 平壤의 安鶴宮과 夫餘의 宮南池⋅官北里 傳 百濟王宮址의 蓮池, 그리고 慶州의 雁鴨池를 꼽을 수가 있다. 그 外에도 公山城에서 發見된 2個의 蓮池를 들 수 있다. 이 들은 山城 內部에서, 또 山城과 隣接한 地點에서 發見되었기 때문에 軍用池로도 分類 可能하나 公山城은 熊津時代의 有力한 王宮址로 推定되기 때문에 宮苑池에 包含시키는 것이 妥當할 것이라고 前述한 바가 있다. 또 新羅王宮址로 確實示되는 月城에는 20餘年 前 까지만 해도 小池 2個所가 있었으나 지금은 埋沒되어 없다고 한다 .
古代 寺院 中에는 境內에 못을 파고 그 속에 연꽃을 심어 感賞하는 자리를 꾸민 곳이 많았다. 특히 佛敎가 國敎로서 盛行된 高麗時代에는 都城 안팎에 수많은 寺刹이 지어졌고 寺刹 마다 蓮池를 普遍的으로 꾸몄다고 한다. 즉 蓮池를 꾸미고 물가에 茅亭을 지어 焚香煎茶하며 參禪을 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는데 연못 속에 피어 있는 연꽃은 識善의 方途가 되었다. 또 寺刹에서의 이러한 風習은 一般人에게도 電波되어 隱逸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집에 연못을 꾸미는 일이 많아 졌다. 그러나 現存하는 연못 중 高麗時代의 것으로 斷定할 만한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古代 寺院池에 대해 記錄이나 實物을 찾아 볼 수 있는 곳은 慶州 佛國寺의 九品蓮池와 梁山 通道寺의 九龍池 等 몇 例에 不過하다. 또 池와 關聯된 記錄이 남아있는 彌勒寺址의 境遇, 整備를 위한 發掘 調査가 實施되었지만 發掘 調査는 主로 金堂을 비롯한 塔址 等 回廊 內部를 優先 調査하였기 때문에, 또 最近 蓮池 調査가 實施되었다고 하지만 아직 報告書가 刊行되지 않아 正確한 資料를 구할 수 없다. 따라서 現在 實見할 수 있는 蓮池로는 通道寺의 九龍池와 南原 實相寺의 蓮池 等 2例에 不過하다. 물론 다른 寺院에서도 많은 蓮池가 만들어 졌으리라 推定할 수 있지만 大部分 埋沒되어 남아있지 않거나 설사 남아 있다 하더라도 報告된 것이 없어서 確認하지 못하였다. 그 外 慶州 皇龍寺에서는 梁山 通道寺와 益山 彌勒寺 境遇처럼 못을 메우고 그 자리에 寺刹을 建立하였음을 發掘 調査를 通해 確認하였다고 하는데 人工的인 못을 메운 것이 아니라 自然的으로 形成된 못을 메운 것이다.
사진은 2007년 3월 실상사 연지모습 - 처음 조사시보다 원형이 많이 훼손되어버렸다.
이상과 같이 韓半島의 古代 人造池沼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 글은 필자가 대구시지지구 문화유적 발굴조사단 책임연구원으로 있던 1995년에 발표한 글을 일반인들이 알기 쉽게 전공용어를 쉬운 말로 고치고 脚註 일부를 생략하여 소개하는 글이다.
이처럼 韓半島의 古代 人造池沼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소개한 글은 이 이후 발표되지 않았으며, 일본 학자들과의 답사시에도 좋은 안내서가 된 바 있다.
이글의 참고자료
朴 方龍 1985 “都城⋅城址” <韓國史論15 - 韓國의 考古學> pp 337∼390
成 周鐸 1985 “都城” <韓國史論15 - 韓國의 考古學> pp 159∼200
社會科學院 考古學硏究所 1975 <高句麗文化>
朝鮮遺蹟遺物圖鑑編纂委員會 1993 <前揭書> 圖書出版 民族文化
李 元根 1980 <三國時代城郭硏究> 檀國大學校大學院博士學位論文 p 7
井上秀雄은 1982⋅1983年 “朝鮮城郭一覽”이란 資料를 發表하였다. “慶尙南北道編”은 <朝鮮學報103> pp 127∼191에, “京畿道⋅忠淸南北道編”은 <朝鮮學報104> pp 105∼174 에 “江原道⋅全羅南北道⋅濟州道編”은 <朝鮮學報107> pp 161∼210에 紹介되어 있다.
* 순 한글로 고쳤습니다.
못은 천연 또는 인공적으로 넓고 깊게 파인 땅에 늘 물이 고여 있는 곳을 말한다. 넓은 의미의 못으로 호, 소, 택, 사 등을 들 수가 있는데 보통 못이라 하면 자연적인 것이라기보다 인공적인 것이 많다. 즉 자연적인 작은 늪(소)에 약간의 인공을 가해 못을 만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물을 가두는 못을 만들어 이용하는 편이다.
전체를 인공적으로 만든 못은 그 축조기법이나 형태, 용도 등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축조기법에 따라서는 ① 흙이나 석비레층을 파서 벽을 만든 경우, ② 돌로 벽을 쌓은 경우, ③ 나무 등 유기물로 벽을 만든 경우 등로 나눌 수가 있다. 형태에 따라서는 흔히 곡지와 방지로 대별하나 엄밀히 ① 정방형⋅장방형⋅원형 등 일정한 형태를 지닌 것 ② 호안 일부는 직선으로 나머지는 복잡한 곡선으로 굴곡 처리한 것, ③ 백제 몽촌토성, 신라 반월성과 고구려의 안학궁 등에서처럼 성 둘레에 수비를 위해 파놓은 해자 등로 구분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사용 용도에 따라서는 ① 농경지의 관수를 위해 만든 관개지, ② 군사상 필요에 의해 만든 군용지 ③ 궁원 또는 저택에 관상을 위해 만든 연지(당)과 같이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외 공업용수나 식용수를 저장하기 위해 만든 저수지, 치수를 위해 만든 것 등이 있는데 비교적 대규모인 이들은 후대에 자연지형을 이용하고 일부분만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고대의 못을 분류하는데는 앞의 세 가지 용도로 국한하여 분류하여도 별 무리가 없다. 여기서는 이러한 분류에 따라 한반도에서 발견된 고대 인조지소를 살펴보겠다.
한반도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인조지소 중 안압지나 궁남지 등 일부 궁원지는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만 대부분의 못들은 언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축조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현재까지 발견된 고대의 못들을 앞에서 용도에 따라 분류한 것처럼 관개지, 군용지, 연지(당)로 나누어 설명 드리겠다.
가. 관개지
우리나라에서는 도작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농경지의 관수를 위해 많은 관개 시설물이 설치되었다. 쌀을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생육에 적합한 용수조건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델타와 같은 곳에서는 품종의 선별이 중요하지만 용수가 자연적으로 구비되어 있지 않은 곳 - 예를 들면 산간부나 선상지 -에서는 멀리서 물을 끌어오기 위해, 또는 천수를 모으기 위해, 또 이렇게 확보한 용수의 관리를 위해 많은 노동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농민들은 도수구를 뚫고, 양수장치를 설치하고, 둑을 쌓아 냇물을 막고, 혹은 저수를 위해 저수지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은 고대 문헌에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간간이 발견된 금석문을 통하여, 또 구전 자료들을 통하여 찾아 볼 수가 있다.
고구려의 경우, 관개유적이 문헌에 나타나지 않지만 백제와 신라의 관개유적은 더러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관개유적으로는 제천 의림지, 상주 공검지, 밀양 수산제, 김제 벽골제를 들 수가 있는데 대부분 현존하고 있다. 금석문이 발견되어 관개 유적의 존재를 알게 해 준 것도 있는데 대구 대안동 발견 오작비, 영천 청제비 등이 그것이다.
나. 군용지
군사상 필요에 따라 만든 군용지는 먼저 백제의 몽촌토성, 신라의 반월성과 고구려의 안학궁 등에서와 같이 수비를 위해 파놓은 해자를 들 수 있고, 또 산성 내부에 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축조한 못도 있다. 특히 산성을 많이 축조한 우리나라의 경우 대부분의 고대 산성 내부에 못이나 우물 등 용수를 공급할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여기서는 고대 산성에 용수 공급을 위해 인공적으로 축조한 유구 중 못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북한지방의 경우, 현재까지 보고된 산성의 못 중 대표적인 것으로 요녕 환인 오녀산성⋅평양 대성산성⋅길림 위나암성⋅용담산성의 지 등을 들 수 있다. 그 외 남포시 용강의 황용산성과 황해도 황주의 황주산성, 평북 동림의 통주성, 황해도 신원의 장수산성, 황해도 서흥의 대현산성, 황해도 평산의 태백산성, 황해도 해주의 수양산성에도 못이 유존하고 있다.
남한지방에서는 약 680여개의 성지가 확인되었다. 그 중 백제 판도 안에만 대개 522개의 성지가 있는 것으로 성주탁은 보고하고 있다. 그것은 문화재관리국의 <전국유적목록>에 소개된 것을 합한 것인데 행정도별로는 경기도에 105개소, 충청남도에 195개소, 충청북도 서부 일부 지역에 35개소, 전라남⋅북도 일원에 187개소로 구분된다. 신라 권역에는 대략 160개소의 성지가 있다고 추산되는데 이 숫자는 이원근의 <삼국시대성곽연구>에 소개된 148개소에다 박방용이 조사한 것 등을 더한 숫자이다.
이 성지들의 대부분은 산성지이며 그 내부에 못이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나타난다. 정상수웅은 남한지방의 산성지와 이곳의 여러 시설물들을 정리한 자료를 펴낸 바 있는데 이 자료에서 못의 존재를 쉽게 확인할 수가 있다. 이는 문화재관리국의 <문화유적총람>을 기본자료로 삼고 <동국여지승람> 등과 같은 고문헌을 찾아 발표한 것이라 한다.
정상수웅 자료에서 산성지를 확인할 수 있는 곳으로는 경상도의 경우, 대구의 달성, 영양군의 성황당 산성, 영일군의 남미질부성⋅북미질부성⋅성황동성, 경주의 부산성과 하서지목책, 청도군의 오례산성, 칠곡군의 천생산성, 금릉군의 속문산성, 예천군의 흑응산성, 진주성, 함안군의 대산면산성, 창녕군의 화왕산성, 밀양군의 추화산성, 양산군의 신기리산성과 양산읍성, 부산의 동평현성, 울주군의 천전리성, 김해군의 북산성, 고성군의 고성성, 산청군의 백마산성과 강산성, 합천군의 미숭산성 등이 있다. 서울시와 경기도의 경우, 관악구의 영랑성(삼성산고성)과 호암산고성, 화성군의 독산성, 파주군의 칠중성, 광주군의 남한산성, 안성군의 무한성, 강화군의 화개산성이 있고 충청남북도의 경우, 청원군의 상당산성과 양성산성, 보은군의 삼년산성, 옥천군의 환산성, 공주군의 공산성, 보령군의 보령성, 아산군의 기산리성, 천원군의 위례산성과 흑성산성이 있다. 강원도와 제주도의 고대 산성 중 못이 있다는 기록은 찾을 수가 없으며, 전라도의 경우도 순창군의 대모산성, 담양군의 금성산성, 함평군의 기산성 3례에 불과하다. 물론 못이 있었다고 기록이 있는 성지도 더러 있으나 이 경우, 후백제와 관련된 산성이거나 조선시대의 읍성, 그리고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축조한 성들이다.
그 외 산성을 지표조사하다 확인된 산성지를 비교적 자세히 소개해 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곳으로 경주 부산성, 경주 명활산성, 영일 남미질부성, 성주 독용산성, 청주 상당산성, 창녕 화왕산성 등을 들 수가 있다.
또 산성을 발굴하다 못이 확인된 곳도 있다. 서울의 몽촌토성과 호암산성, 하남의 이성산성, 보은의 삼년산성 등이 이 경우인데 발굴조사 결과에 따른 정확한 자료가 발표되었다.
발굴이나 지표조사의 보고서에는 조사자에 따라 그 명칭은 다르게 나타나 있다. 서울 몽촌토성의 경우, ‘연못지’로, 서울 호암산성의 경우, ‘한우물’, ‘제2우물지’ 등과 같이 우물지로, 하남 이성산성의 경우, ‘저수지’로, 보은 삼년산성의 경우, 연지’라는 명칭으로 불려 졌다. 북한 보고서에는 주로 ‘못자리’라고 소개하고 있으나 ‘물주머니 자리’라는 명칭도 사용된다1). 엄밀히 말해서 ‘샘’, ‘우물’, ‘저수지’, ‘연못(지)’, ‘못자리’ 등은 차이가 나며 이에 대한 약간의 고찰은 앞에서 한 바 있다. 추후 별도의 고찰이 필요하다.
다. 연당
우리나라의 고대 연당은 축조 장소에 따라 궁원지와 사원지로 크게 나눌 수 있고 또 평면형태에 따라 곡지와 방지로 대별시킬 수 있다. 곡지는 주로 넓은 자리에 조성된 데 비하여 방지는 협소한 자리에 꾸밀 때 많이 택하여 졌다. 이러한 방지는 고려시대에 일반인의 저택에 성행하며, 고려시대의 방지에는 섬이 없다가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둥근 섬을 만드는 기법이 나타나는데 이를 방지원도형이라 부른다.
궁원지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진사왕 7년(391) 1월조의 “ 궁궐을 중수하고,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기이한 짐승과 꽃을 길렀다”는 것이다. 그 이후 궁남지와 월지(안압지)를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나는데 현존하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궁원지로 평양의 안학궁과 부여의 궁남지⋅관북리 전 백제왕궁지의 연지, 그리고 경주의 안압지를 꼽을 수가 있다. 그 외에도 공산성에서 발견된 2개의 연지를 들 수 있다. 이 들은 산성 내부에서, 또 산성과 인접한 지점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군용지로도 분류 가능하나 공산성은 웅진시대의 유력한 왕궁지로 추정되기 때문에 궁원지에 포함시키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전술한 바가 있다. 또 신라왕궁지로 확실시되는 월성에는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소지 2개소가 있었으나 지금은 매몰되어 없다고 한다 .
고대 사원 중에는 경내에 못을 파고 그 속에 연꽃을 심어 감상하는 자리를 꾸민 곳이 많았다. 특히 불교가 국교로서 성행된 고려시대에는 도성 안팎에 수많은 사찰이 지어졌고 사찰 마다 연지를 보편적으로 꾸몄다고 한다. 즉 연지를 꾸미고 물가에 모정을 지어 분향전차하며 참선을 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는데 연못 속에 피어 있는 연꽃은 식선의 방도가 되었다. 또 사찰에서의 이러한 풍습은 일반인에게도 전파되어 은일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집에 연못을 꾸미는 일이 많아 졌다. 그러나 현존하는 연못 중 고려시대의 것으로 단정할 만한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고대 사원지에 대해 기록이나 실물을 찾아 볼 수 있는 곳은 경주 불국사의 구품연지와 양산 통도사의 구룡지 등 몇 례에 불과하다. 또 지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있는 미륵사지의 경우, 정비를 위한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지만 발굴 조사는 주로 금당을 비롯한 탑지 등 회랑 내부를 우선 조사하였기 때문에, 또 최근 연지 조사가 실시되었다고 하지만 아직 보고서가 간행되지 않아 정확한 자료를 구할 수 없다. 따라서 현재 실견할 수 있는 연지로는 통도사의 구룡지와 남원 실상사의 연지 등 2례에 불과하다. 물론 다른 사원에서도 많은 연지가 만들어 졌으리라 추정할 수 있지만 대부분 매몰되어 남아있지 않거나 설사 남아 있다 하더라도 보고된 것이 없어서 확인하지 못하였다. 그 외 경주 황룡사에서는 양산 통도사와 익산 미륵사 경우처럼 못을 메우고 그 자리에 사찰을 건립하였음을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하였다고 하는데 인공적인 못을 메운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형성된 못을 메운 것이다.
이상과 같이 한반도의 고대 인조지소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 글은 필자가 대구시지지구 문화유적 발굴조사단 책임연구원으로 있던 1995년에 발표한 글을 일반인들이 알기 쉽게 전공용어를 쉬운 말로 고치고 각주 일부를 생략하여 소개하는 글이다.
이처럼 한반도의 고대 인조지소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소개한 글은 이 이후 발표되지 않았으며, 일본 학자들과의 답사시에도 좋은 안내서가 된 바 있다.
이글의 참고자료
박 방용 1985 “도성⋅성지” <한국사론15 - 한국의 고고학> pp 337∼390
성 주탁 1985 “도성” <한국사론15 - 한국의 고고학> pp 159∼200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1975 <고구려문화>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3 <전게서> 도서출판 민족문화
이 원근 1980 <삼국시대성곽연구> 단국대학교대학원박사학위론문 p 7
정상수웅은 1982⋅1983년 “조선성곽일람”이란 자료를 발표하였다. “경상남북도편”은 <조선학보103> pp 127∼191에, “경기도⋅충청남북도편”은 <조선학보104> pp 105∼174에, “강원도⋅전라남북도⋅제주도편”은 <조선학보107> pp 161∼210에 소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