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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걷는 한남정맥 마루금 중
극동기상연구소부터 ▶ 한남정맥(붉은 글씨) 마루금 ▶ WonJin오테캐리어 원삼센터까지 이어진 마루금을 담아 보았습니다
가현치에서 -1.0km- 346.6봉 -2.4km- 달기봉 -2.0km- 구봉산 정상 -4.2km-
두창리고개(318번도로) -6.0km- 농촌테마파크까지 도상거리 15.6km를 걷습니다
한남정맥 2구간 3부에서는
삼환테크 제1공장 앞에서 ㅡ 연안김씨합동제단 ㅡ 57번도로 사암삼거리 ㅡ 농촌테마파크 앞까지
삼환테크 제1공장 앞에서 문수봉까지 3.7km 남겨두었다는 이정표가 세워진 앞을 지납니다
위 이정표와 동일 합니다
방금 지나온 곳을 뒤돌아 보고~
다음 구간에 걷게될 문수봉 입니다
뒤돌아 보고~
비포장길을 걷는데 많은 리본들이 숲길로 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비포장길에서 숲길로 진입한 곳을 뒤돌아 보고~
석재공장 야적장을 지나고 있습니다
한남정맥 마루금을 따라 걷는데 진행 방향 왼쪽에 크고 높다란 비석이 있어 어떤 비석일까 하고 다가가보았더니
<연안김씨 합동제단>이라 합니다
연안김씨는 어떤 가문일까 하는 괜한 호기심에의 자료를 찾아 보았더니~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깜짝놀라 나자빠졌습니다
연안김씨(延安金氏)는 김섬한(金暹漢)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연안(황해도 연백군 일원의 옛 지명)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는 22개 파(派)로서
2015년 통계청의 인구 조사 자료에 따르면전국적으로 93,382명이 거주하고 있는 자손이 크게 번창하여
조선 시대에 정승 6명, 대제학 1명,
왕비(조선 14대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 1명, 문과 급제자 163명을 배출하였다 합니다
중종과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와 사이에 태어난 효혜공주는
연안김씨(延安金氏) 김안로의 아들 金禧와 결혼하므로서 중종과 김안로는 사돈 관계가 됩니다
중종(1506~1544) 왕릉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정릉(선정릉)에 안치되어 있으며, 단경왕후 신씨(폐비)는
양주 온릉에 단릉으로, 장경왕후 윤씨는 서삼릉에 희릉에 단릉으로,
문정왕후 윤씨는 노원구 공릉동 태릉에 단릉으로 있으며~(강릉은 조선 제13대왕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의 릉)
창빈 안씨는 양주군 장흥리에 있다가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하였다.
창빈 안씨(昌嬪 安氏 1499년 ~ 1549년)는 중종의 후궁으로, 덕흥대원군의 생모이자 선조의 할머니(조모:祖母)이다
덕흥군은 중종과 창빈 안씨 사이에 태어난 중종의 9번째 아들이며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 조선 제14대왕 선조이다
12대 인종(1544~1545)은 고양 서삼릉에 있는 효릉에 인성왕후 박씨와 함께 쌍릉으로 안장되어 있습니다.
13대 명종(1545~1567)은 인순왕후 심씨와 함께 태릉.강릉에 있는 강릉에 쌍릉으로 있고,
순회세자는 공회빈 윤씨와 함께 고양 서오릉의 순창원에 합장묘로 있습니다.
14대 선조(1567~1608)는 의인왕후 박씨, 인목왕후 김씨와 함께 동구릉의 목릉에 동원이강릉으로 있습니다.
공빈김씨(광해군의 생모)는 남양주시 진건읍에 성묘로 안장되어 있고,
인빈김씨(원종의 생모)는 남양주시 진접읍에 순강원으로 안장되어 있습니다
중종 때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 등을 역임하였던 김안로(金安老, 1481년 ~ 1537년)는
연안김씨 문중의 한이 되어 버린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延安(延安, 지금의 황해도 연백))이며, 외척 입니다
김안로의 할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우신(金友臣)이며
아버지는 김전의 형인 공조참의(工曹參議) 김흔(金訢)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윤지(尹墀)의 딸 입니다
중종(제1계비 장경왕후)의 딸인 딸 효혜공주(孝惠公主)의
남편이 연성위(延城尉는 이칭별칭으로 달리 부르는 이름) 김희(金禧)는 김안로의 아들 입니다.
장경왕후(1491~1515)는 성은 윤씨(尹氏) 영돈령부사 여필(汝弼)의 딸로, 세자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7일만에 죽습니다
김안로는 중종1년 1506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 : 조선
청환직(淸宦職 :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에게 내리는 관직)을 역임하고
1519년 기묘사화로 신진사류들이 숙청당한 뒤 이조판서에 오르게 되지요.
그 후 아들 김희가 효혜공주와 혼인해 중종의 부마(駙
남곤, 이항 등의 탄핵을 받고 유배됐다. 1527년 남곤이 죽고 풀려나와 다시 벼슬길에 올랐으며
대사간, 이조판서, 도총관, 대제학, 우의정을 거처 좌의정 땐
정적(政敵)에 대해서는 종친(宗親), 공경(公卿)이라 할지라도 뜻에 맞지 않는 자를 축출하는 옥사(獄事 : 반역이
왕실의 외척인 윤원로(尹元老), 윤원형(尹元衡)도 실각당하였다
1537년 정적이었던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文貞王后 : 중종(中宗) 제이계비(第二繼妃) 윤씨(尹氏)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중종의 밀령을 받은 외척 윤안임(尹安任)과 대사헌 양연(梁淵)에 의해 체포되어
전라남도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곧이어 사사(賜死 : 독약
연안김씨 문중의 한이된 인물이 김안로라 합니다
중종반정으로 중종이 왕위에
세자 인종(조선 제
연안김씨(延安金氏)의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명종(明宗 : 제19대 왕, 재위기간 : 1170∼1197) 때
국자감의 사문박사(四門博士)를 지낸 김섬한(金暹漢)이다.
중종9년(1514)에 간행된 김안로(金安老)편저 초주갑인자본(初鑄甲寅字本) 안락당집(顔樂堂集)에 따르면 신라시대 김씨왕족의
종성(宗姓)으로서 후손인 형제가 형제 두 분이 왕에게 직간을 하였다가 도리어 왕의 미움을 사서 형(兄)은
북빈경(北濱京 : 지금의 강릉)에, 아우는 시염성( 鹽城 : 연안의 옛 지명)으로 유배되었는데 아우의 후손이 바로 김섬한(金暹漢)이라고 한다
연안김씨의 후손들이 훌륭한 인물(人物)을 많이 배출하여 조선 중기(朝鮮中期)에 명문대가(名門大家)로 일컬어졌다
시조 김섬한(金暹漢)의 5대손 김도(金濤)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올라 밀직제학을 지냈으며
김도의 아들 4 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세도가문으로써의 기틀을 다졌는데
맏아들 김자지(金自知)는 조선 태종(太宗) 때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거쳐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으며
둘째 김여지(金汝知)는 1389년(창왕 1 : 고려
역임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판관(判官), 헌납(獻納)을 거쳐 태종(太宗)때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러 1416년(태종 16)에는
공조(工曹)와 예조(禮曹)의 판서(判書)로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을 겸직했고~
셋째 김치지(金致知)는 예빈시윤(禮賓寺尹)을 지냈으며~
막내 김학지(金學知)는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연안김씨 김우신(金友臣)은 성종(成宗)의 잠저(潛邸)때 사부(師傅)였던 인연으로 그가(성종:成宗) 즉위하자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발탁되어 1490년(성종 21) 단양군수(丹陽郡守)로 부임하여 선정(善政)을 베출었고 뒤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우신(金友臣)의 아들 김심(金諶), 김흔(金緖), 김전(金詮) 3 형제가 크게 명성을 떨쳐 명문(名門)의 지위를 굳혔는데,
1479년(성종 10)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한 김심(金諶)은
사관(史官)과 부제학(副提學 : 홍문관의 정3품 당상관 벼슬)을 거쳐 연산군(燕山君) 때 좌의정(左議政)에 임명되었으나
어지러운 정국을 개탄하여 불취하고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올랐으며~
김흔(金緖)은 어려서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성종(成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 부교리(副校理), 직제학(直提學) 등을 거쳐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이르렀다.
1489년(성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한 김전(金詮)은 호당(湖當)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연산군(燕山君) 때 예안 현감(禮安縣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고, 무오사화(戊午史禍)에 연루되어 남해(南海)로 유배당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다시 등용되어
대사헌(大司憲), 좌찬성(左贊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1520년(중종 15)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청백리(淸白吏 : 청렴결백한 벼슬아치)에 뽑혔다.
부사(府使) 김면(金勉)의 아들 김근사(金謹思)는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고~
김감(金勘)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하여
정국이등공신(靖國二等功臣)으로 연창부원군(延昌府院君)에 봉해지고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었으며~
김석철(金錫哲)은 중종(中宗) 때 무과(武科)에 장원하여 병조 참판(兵曹參判)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한 수 궤장( 杖)을 하사(下賜)받아 문무(文武)를 겸비한 명장(名將)으로 이름이 높았다.
중종(中宗) 때의 명신(名臣) 희락당(希樂堂) 김안로(金安老)는 가문의 중흥을 가져온 중추적인 인물로서 1506년(중종 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當)에 뽑혔고 대사간(大司諫), 부제학(副提學), 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김안로의 아들 김희(김禧)가 중종의 2번째 왕비인 장경왕후 윤씨 사이에 태어난 효혜공주(孝惠公主)와 혼인한 뒤부터 권력 남용이
잦아 당시 권신(權臣),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의 탄핵을 받아 경기도 풍덕(豊德)에 유배되었으나
1529년(중종 24) 풀려나와 도총관(都摠管), 판서(判書), 우의정(右議政),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조선 말기(朝鮮末期)에 와서는 정조(正祖) 때 김익(金益)은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김익의 아들 김재찬(金載贊 : 순조 때 영의정을 역임), 김유연(金有淵 : 김재찬의 손자) 고종 때 우의정을 역임을)~
통덕랑(通德郞) 김재혁(金載奕)의 아들 김후(金厚)는 순조 때 대사간(大司諫)에~
김재칠(金載七)의 아들 김준(金睿)는 정조 때 좌참찬과 좌부승지를 지냄~
정조 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한 김선(金銑)은 순조(純祖) 때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을 지내고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날린
김위와 함께 명문(名門)의 전통(傳統)을 이어 가문을 빛내므로
정언(正言) : 1.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 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하던 조선시대 최고의 행정기관의 정2품 벼슬
사문박사(四門博士) : 국자감 안에 두었던 교육기간의 정 8 품 벼슬
원종공신(原`從功臣) : 조선
연안김씨합동제단을 지나 57번도로에 이르니 도로 이정표와 한남정맥 마루금 이정표가 있군요
이젠 용인농촌테마파크까지 1.3km 남겨두었군요
아하~
한남정맥 마루금에서 사암삼거리와 SK주유소가 가까운(60m) 거리에 있군요
농촌테마파크 정문 앞에서 용인버스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오후 5시에 있으며, 그다음 차는 오후 6시 30분에 있습니다.
5시 차를 타기 위해선 빨리 서둘러 걸어야겠습니다
57번도로를 무단횡단하여 장수농원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진입로 따라 나무터널로 진행하게 됩니다
장수농원 표지석
57번도로를 무단횡단하고선 뒤돌아 보고~
장수농원 진입로
장수농원 표지석이 있는 진입로 입구를 뒤돌아 보고~
장수농원 진입로 나무터널이 환상적 입니다
옛 장수농원 바로 코앞 삼거리에서 한남정맥 마루금으로 이제는 진행할 수가 없군요
마루금이 지나는 곳이 사유지로서 모(某) 회사에서 외부인 출입을 못하도록 철문을 굳게 닿아 두었기에 진행하기에 난감 합니다
삼거리에서 한미칼라팩으론 마루금에 접근할 수 있을까 긴가민가 하면서
부딪쳐 봅니다
옛 장수농원 대문 바로 코앞 삼거리에서 한미칼라팩으로 진행하여 보았지만
이번에도 헛탕 입니다
한미칼라팩 주변을 샅샅히 뒤저봐도 마루금에 접근힐 수 있는 곧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잡풀과 잡나무로 우거저 있는 여름에는 진행하기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옛 장수농원은 (주)만텍으로 바뀌어 철문이 닫혀있을 땐 진행이 불가능 합니다
옛 장수농원 자리엔 (모某) 회사 사유지로 대문 철문이 굳게 닫혀 있어 어쩔수 없이
옛 장수농원 표지석이 있는 진입로 입구로 되돌아 왔습니다
이제는 장수농원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사암삼거리로 이동하여 도로따라 <농업기술센터입구 삼거리>를 지나
문수봉 들머리(농업기술센터)가 있는 곳으로 진행하여야 합니다
57번도로상에 장수농원 표지석 ▶ 사암삼거리(SK주유소) ▶ 농업기술센터입구 삼거리 ▶ 농촌테마파크 0.7km(한남정맥 : 이정표) ▶ 농업기술센터 ▶ 문수봉 들머리
넓다란 들녘에는 농부들이 씨앗뿌려 피땀흘려 가꾼 오곡들이 알알이 영글어 황금물결 일렁이는 들판을 이루고 있습니다
농촌테마파크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하는데 14분이면 오후 5시 입니다
갑지기 마음이 조급해 집니다
오후 5시 차를 놓치면 다음차는 오후 6시 30분 입니다
소형 승용차가 나를 추월하드니 멈춰서서 여스님이 운전석에서 내려 넓다란 들판에 알알이 영글어 있는 황금들판이
펼처진 곳을 휴대폰에 담고 있었습니다. 나는 염치불구하고 예를 갖추고 이렇쿵저렇쿵 얘기를 하니 타라고 합니다
문수봉 들머리를 거처 농촌테마파크 정문 앞 버스정류장까지 1.0km 걸어서 왔다면 15분 정도 소요되을텐데 2분도 안걸려 왔습니다
오후 5시가될려면 12분 정도 여유가 있습니다. 옷을 갈아 입어야 하는데 장소가 마당치 않습니다
버스정류장엔 버스를 기다리시는 한분이 계셨습니다. 농부의 안해로서 70대 후반쯤이였습니다
농부의 안해에게 예를 갖춰 용인버스터미널로 가는 버스 시간대를 여쭤보았습니다
농부의 안해는 버스 시간대를 꿰뚫고 있는듯 망설임없이 오후 6시 30분에 있다고 합니다.
헉~
뭐라고, 오후 5시가 아니고 6시 30분이라고~
(오후 5시의 버스 시간표는 뒤늦게 알고 보니 7년전인 2012년 1월 30일 버스 운행 시간표였습니다. 아구~ 7년전 시간표를~)
농부의 안해는 곧 도착하게 되는 버스를 타고 원삼으로 간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버스가 종점인 백암까지 갔다가 원삼과 이곳을 거처 용인버스터미널로 가는데~
농촌테마파크 앞 정류소 이곳을 지나는 시간이 오후 6시 30분이라 합니다. 오후 5시 시간표는 까마득하게 먼옛날 호랑이 담배 피울적 얘기라 합니다.
이게 뭔미까, 뭐냐구요. 여짓껏 오후 5시 버스 시간에 맞춰 산행하였는데~ 아구
백암종점에서 18시 15분에 출발하여 원삼과 법륜사 정류장을 거처 농촌테마파크 정류장엔 18시 30분에 도착하는가봐요.
그르니까 백암종점에서 농촌테마파크까지 15분 소요된답니다
(아래 버스 운행 시간표는 2018년 9월 30일 기준 입니다. 용인버스터미널에서 촬영 )
출발지점에서 법륜사를 처음 가신다는 여스님의 승용차(KIA, morning)를 타고 900m를 달려 <문수봉 들머리>까지
왔다가 또 농촌테마파크 정문 앞 버스정류소 앞까지 150m를 이동하였습니다
농부의 안해는 큰길(거리 690m)로 나가면 용인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더러 있다고 일러 주십니다
농촌테마파크 정문 앞에서 농부의 안해가 일러준데로 큰길로 가기 위해 내동마을연꽃단지를 지나 내동마을회관까지 왔습니다
내동마을회관 앞에서 농부의 안해가 가리켜주던 큰길로 가는 길은
외지에서 온 나는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에라도 여쭤보는게 상책인데, 길거리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리저리 헤매는데 <내동마를연꽃단지>에 핀 연꽃
구경하려온 사람인지, 내동마을사람인지 불쑥 나타나던군요.
염치 불구하고 그분에게 여쭤봤습니다
왜 내동마을회관 앞에서 큰길로 갈 수 있는 최단거리 300m~
지름길을 헌고무신짝 버리듯 내팽게 치고 엉뚱하게 1,2km를 걷게하는 길을 알려 주었을까요
화딱지가 납니다
아까 여스님 승용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보았던 한남정맥 이정표가 있는 곳에 왔습니다
여기서 농촌테마파크까지 거리가 700m이군요
위 이정표와 동일한 위치
위 이정표와 동일 합니다
위 이정표와 동일한 위치이며, 현재 시간 오후 4시 54분 입니다
농촌테마파크까지 700m라는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농업기술센터입구삼거리를 거처
버스정류장(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사암리 752-2 )까지 600m 또 도롯길 따라 걸어 갑니다
(2018년 9월 30일 기준. 용인버스터미널)
10-4번과 16번 버스 운행 시간표는 2018년. 9월 30일 기준
오후 5시 13분부터 지루하게 30여 분을 기다렸다가
오후 5시 45분에 10-4번 버스를 타고 용인버스터미널로 이동 합니다
한남정맥 2구간 1~4부는 여기서 끝을 맺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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