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시장은 부산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고 자갈치시장, 부평깡통시장과 함께 부산의 대표적인 전통시장으로 손꼽힌다. 국제시장은 6공구로 나뉘어져 각각 전문화된 물품들을 도소매하고 있으며, 다양하게 특성화된 인근 시장들과 함께 거대한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부산국제시장이 있는 신창동은 조선시대에 초량왜관이 있던 곳으로, 일본과 인연이 깊다. 국제시장의 역사는 해방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는 일본인들이 넘긴 물건과 해외에서 돌아온 동포들이 가져온 물건들이 거래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도떼기시장이라 불렸으며, 1948년에 건물을 세우고 자유시장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국제시장이라는 이름은 1950년 부산에 진주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까지 취급하게 되면서 미국산, 일본산, 한국산 등을 한데 모아 거래한다고 해서 붙은 것이다. 국제시장은 1950~1960년대에 엄청난 번영을 누렸다. 한국전쟁의 구호물자부터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수물자, 여기에 홍콩과 마카오 등지에서 수입되거나 밀수된 물건들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1980~1990년대에는 일본의 전자제품 판매를 중심으로 호황을 누렸다.
한국의 근현대사와 궤적을 같이해 온 국제시장은 오늘날에도 인근의 부평깡통시장을 비롯해 신창동 먹자골목, 아리랑거리, 젊음의 거리, 구제골목 등 다양한 성격의 전통시장들과 함께 쇼핑의 중심지로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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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시장 입구시장은 크게 6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부산국제시장의 어원
국제시장은 처음에는 도떼기시장이라고 불렸다. 도떼기의 유래는 정확하지 않다.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귀국하면서 물건이 든 고리짝을 헐값에 넘기면서 그 물건들이 거래된 것이 국제시장의 시작이라 볼 수 있는데, 이때 일본어의 ‘얻어서’라는 의미인 ‘돗떼’에서 도떼기시장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한편, 따로 나누지 않고 합쳐서 하는 일을 가리키는 우리말 ‘도거리’에서 어원을 찾는 주장도 있다.
1948년 처음 건물이 세워져 문을 열었을 때에는 자유시장이라고 불렸다. 그 이후 점점 규모가 커지고 미군들의 군수물자나 외국의 물건까지 취급하게 되면서 1950년에 국제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부산국제시장의 탄생 및 발달·변천 과정
국제시장이 위치한 신창동은 1678년 숙종 연간에 초량왜관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왜관이 있었던 초량은 ‘풀밭의 길목’이라는 뜻으로 당시 이곳에 풀밭과 갈대밭이 많아 붙은 이름이었다.
왜관은 조선시대에 해안가에 나타나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합법적인 교역 대상으로 삼아,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고 무역을 장려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왜구의 노략질이 줄어들지 않자 쓰시마를 정벌하고 왜관을 폐쇄하기도 했지만 1423년 부산포와 내이포(지금의 진해), 염포(지금의 울산)에 왜관을 두는 삼포제도를 시행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이들 왜관이 폐쇄되었고, 이후 일본의 요청으로 1678년 초량에 왜관을 설치했다.
그 이후 일본과의 교역이 늘어나면서 규모가 커졌다. 1876년에는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에 따라 부산 등이 개항하면서 초량왜관에 일본대사관이 설치되었고, 그 일대에 일본에서 건너온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확대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들면서 신창동은 초량왜관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행정 명칭이 초량에서 서정(西町)이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말기, 일본군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미군의 부산 상륙에 대비해서 오늘날 국제시장이 있는 신창동과 창선동 일대를 모두 소개시켰다. 미군이 상륙할 경우 그곳에서 전투를 치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미군이 상륙하기 전에 항복을 선언했고, 한국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염원하던 해방을 얻었다. 문제는 일제강점기 때 이주했던 많은 일본인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귀국을 선택했고, 잔뜩 짐을 짊어진 일본인들이 부산항으로 밀려들게 되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짐을 배에 다 실을 수 없게 되면서 일본인들은 물건이 든 고리짝을 팔기 시작했다. 귀국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물건을 헐값에 파는 일본인도 많았다. 안에 무엇이 들었건 고리짝 하나에 5원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일본인들의 손을 떠난 고리짝은 한국인들에게 팔려 일본군이 소개시켰던 빈 공터에 쌓였고, 그 자리에서 바로 또 거래되었다. 귀국선 앞에서 5원에 산 고리짝이 신창동 공터로 오면 10원에 팔려나갔다.
국제시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시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터가 있고 거래할 물건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 이후 서로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그곳에서 사고팔았을 뿐이었다.
한편, 부산을 휩쓸었던 일본인들의 귀국과 맞물려 반대로 해외로 나갔던 동포들의 귀환이 시작되었다. 해외에서 돌아오는 동포들 또한 배편을 이용했기 때문에 한동안 부산은 흥분과 기분 좋은 혼란이 지속되었다.
해외에서 돌아온 동포들은 일본인들이 떠난 중구와 동구에 판잣집을 짓고 살아 판자촌을 이루었다. 부산시의 집계에 따르면 이때 부산 전체에 세워진 판잣집이 2만 동에 이른다고 한다. 또한 이들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해외에서 가져온 물건을 내다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도떼기시장이 섰던 공터는 이렇게 한동안 시끌벅적했다.
이렇게 형성된 공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1948년 판자로 된 건물 12동을 짓고 상인들이 입주하면서 도떼기시장은 시장의 형태를 갖추었다. 이때 도떼기시장이라는 부정적인 의미의 이름을 버리고 자유시장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그러다가 1950년 5월에 진주한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물건이 더해져 미국산, 일본산, 국내산 물건이 한데 모여 거래된다고 해서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50년 5월에 시장의 이름을 자유시장에서 국제시장으로 개칭했다.
해방의 분위기를 채 만끽하기도 전에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 초반 미처 대비하지 못한 남한은 북한의 남침을 막지 못하고 순식간에 밀려났다. 그러자 서울을 대신해 임시 수도가 된 부산으로 피란민들이 물밀 듯이 밀려왔고, 부산은 또 다시 혼란에 빠져들었다. 해방 당시 40만 명 정도였던 부산의 인구는 피란민으로 인해 1950년에 88만 명으로 급격하게 증가했다.
이때 많은 피란민들이 먹고살기 위해 길거리에 노점을 차렸고, 부산의 토박이 상인들과 경쟁하면서 생존을 도모했다. 이들은 소중하게 피란 봇짐에 싸가지 온 재봉틀로 옷을 수선하거나 미군 부대 주변에서 담배와 초콜릿 등을 싸게 구입해서 팔기도 했다.
1,000여 명이던 도떼기 상인들은 1․4후퇴 즈음해서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불어났다. 특히 북한 지역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많았다. 국제시장에 유난히 북한 출신 상인들이 많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1953년에 발표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가요인 〈굳세어라 금순아〉에 나오는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중략)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라는 가사는 당시 부산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국제시장은 유난히 화재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대사건으로 기록된 것은 1953년 1월 30일에 일어났던 화재였다. 설을 앞두고 어느 식당에서 일어난 화재는 삽시간에 목조로 된 시장 건물 전체를 불태우고, 남쪽에 있던 창선시장까지 집어삼켰다.
그 뒤에 신창동과 부평동에 있던 기름까지 옮겨 붙으면서 신창동 동아극장 앞을 지나 국제전신전화국, 국군통신대까지 번져나갔다. 필사적으로 불길을 잡으려고 했지만 9시간 동안이나 불길을 잡지 못해 일대는 불바다가 되고 말았다.
결국 국제시장 1,230동, 신창동 230동, 부평동 110동의 시장 건물이 불탔고, 인근 가옥 1,600채 모두 화마에 의해 사라졌다. 발표에 따르면 재산 피해만 14억 300만 원에 이를 정도였고, 이재민이 6,800세대로 2만 2,500명이나 발생했다. 피해 금액은 1952년 정부의 일반 회계 세출 결산액의 약 7%에 달하는 액수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 외에도 크고 작은 불들이 국제시장을 덮쳤지만, 불난 집은 웃돈을 주고 산다는 말이 있듯이 그때마다 국제시장은 새롭게 거듭났다.
한국전쟁 이후 1950년~1960년대에 국제시장은 큰 번영을 누렸다. 당시 국제시장에서는 구하지 못할 물건이 없었다. 미국의 군수물자부터 한국전쟁 이후 외국에서 보내온 구호물자, 홍콩과 마카오, 일본 등지에서 몰래 반입한 화장품, 시계, 옷감, 보석 등이 국제시장에서 거래되고 전국으로 팔려나갔다.
부산항은 일제강점기 때 한반도에서 수탈한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통로의 역할을 맡았다. 한편, 그렇기 때문에 국제시장이 위치한 부산 중구의 부산항 주변에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확대되면서 부산에서 가장 먼저 전기와 수도가 설치되었다. 이런 배경은 해방 이후 부산 중구가 부산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국제시장이 번영을 누리면서 은행과 관공서뿐만 아니라 수많은 노점들이 거리를 메웠고, 밀수품과 군수물자들이 넘쳐나면서 최첨단의 유행을 선도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그래서 국제시장을 중심으로 그 주변 지역은 늘 활기찬 곳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 부산에서 가장 번화하고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이다. 또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국제시장>에서 볼 수 있듯이 국제시장은 부산뿐 아니라 한국의 근대사와 함께해 왔다.
국제시장의 이러한 번영 뒤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국제시장이 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혼란 속에 개설되면서 당국의 시장 허가를 얻지 못했던 것이다.
부산시는 1952년부터 국제시장을 공설시장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국제시장은 이미 1,200개의 점포가 있는 대규모 시장으로 성장한 뒤였다. 그래서 국제시장이 위치한 자리는 시의 소유인데, 건물은 무허가인 애매한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가건물 상태로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한동안 지속되면서 이 문제는 부산시와 국제시장의 갈등 요소가 되었다. 갈등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1958년 8월에는 부산시가 영업세를 올리면서 이에 항의하는 포목상과 잡화상 등 500여 개의 점포가 문을 닫고 철시하기도 했고, 수시로 단속을 통해서 밀수품을 적발해 압수하기도 했다.
결국 1961년 5월 16일 국제시장은 무허가 시장으로 지정되어 해산 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대해 국제시장번영회 창립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오랜 진통 끝에 1965년 5월에 정부로부터 땅을 불하받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이렇게 해서 상가 대지 7,197m2가 불하되어 기존에 있던 1,489개의 점포가 정식으로 등기되었다.
1969년에는 국제시장번영회가, 1977년 8월 6일에는 국제시장이 정식으로 설립 허가를 얻었다. 1948년 건물을 세우고 자유시장의 간판을 내건 이후 무려 30년 만에 국제시장은 무허가에서 벗어났다.
국제시장은 한동안 단절되어 있던 한국과 일본이 다시 수교를 하고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잇는 관부연락선(관부 페리)이 운항을 재개하면서 일명 보따리장수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 일본의 상품들이 밀려오면서 다시 호황을 맞이했다. 그러나 이러한 호황은 1980년대 이후 정부의 해외여행 자율화로 인해 조금씩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국제시장을 주도한 것은 전자상가골목이었다. 워크맨이라 불리던 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와 이어서 시디플레이어가 등장하면서 이를 사기 위해 젊은이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관세가 높았기 때문에 보따리장수들이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들여온 일본의 전자제품은 불티나게 팔렸다. 워크맨과 시디플레이어 등이 젊은이들이 찾는 상품이었다면, 주부들이 사고 싶어 하는 물품은 단연 일본에서 만든 코끼리밥통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많은 물품들이 수입 자유화가 되고, 2000년대가 되면서 소비 패턴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후 국제시장은 전반적으로 쇠퇴일로를 겪게 되었다.
국제시장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2002년 시장 현대화 사업을 실시하고, 2005년까지 6개 공구로 아케이드를 설치, 외벽을 정비했다. 또한 2008년 2월에는 부평깡통시장, 창선상가, 만물의 거리와 함께 상권 활성화를 위해 국제마켓타운을 결성하기도 했다.
2016년 현재 국제시장 주변은 크게 먹자골목과 젊음의 거리, 만물의 거리, 아리랑거리, 구제골목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국제시장 주변의 다른 시장
1) 구제골목
구제골목은 부산의 중구 신창동3가에 위치해 있다. 구제 의류를 주로 거래하는 구제골목은 남포동 구제시장이라고도 불리며, 국제시장의 대표적인 볼거리로 꼽힌다. 구제 의류는 원래 한국전쟁 이후 구호물자로 제공했던 중고 옷과 신발을 가리키는 말인데 오늘날에는 외국이나 국내의 중고 의류를 가리킨다.
구제골목이 형성된 것은 부산이 외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통로에 있는 항구도시이기 때문이다. 1990년 후반 하나둘씩 점포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찾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점포 수가 늘어나 오늘날처럼 골목을 이루게 되었다.
구제골목의 기원을 미국문화원 옆에 있었던 유나백화점(1981~1999년)에서 구입한 옷을 사들여 팔기 시작한 것에서 찾기도 한다.
구제골목에서 팔고 있는 의류와 신발은 미국이나 캐나다, 일본에서 수입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와 관련해 옷을 수선해주는 점포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프리마켓이 있어서 선반과 매대를 대여해주는 곳이 있다는 점이다. 직접 점포를 운영할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이 선반과 매대를 대여해 판매한 후 수익을 나누는 형태이다.
2) 아리랑거리
아리랑거리는 신창동3가에 위치한 전통시장으로 국제시장과 역사를 같이한다. 주로 전통 공예품과 특산품을 파는 상점들이 모여 있는 상가 건물형 시장으로, 2001년 11월에 테마거리로 지정되었다.
아리랑거리는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시장이다. 그래서 아리랑거리에서는 전통 공예품을 비롯해서 한류와 관련된 연예인 관련 상품의 판매도 활발하다.
3) 창선동 먹자골목
창선동 먹자골목 또한 국제시장과 역사를 같이한다. 국제시장이 개설되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이들을 대상으로 먹을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음식점들이 하나둘씩 생기면서 거리가 형성되었다.
창선동 먹자골목에는 다양한 포장마차와 좌판이 위치해 있어서 부산에서도 대표적인 먹자골목으로 성장했고, 소문이 나면서 관광객들도 많이 찾아오고 있다.
창선동 먹자골목은 아리랑거리 입구에서 중구로 30번길을 따라 포장마차가 늘어서 있고 골목의 안쪽에는 좌판이 펼쳐져 있다. 골목 입구에는 TV 예능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호떡집이 있다. 좌판은 오후 내내 골목을 가득 채웠다가 밤이면 모두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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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시장의 팥빙수 골목즉석에서 만든 옛날식 팥빙수를 팔고 있다.
먹자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누구나 떡볶이와 어묵, 파전, 순대, 물국수, 잡채, 부산 어묵, 유부주머니, 비빔당면, 충무김밥 등 다양한 먹을거리에 시선을 빼앗기게 된다.
삶의 단면을 잘 드러내어 보여주는 먹자골목은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하고, 여러 TV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그래서 외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아리랑거리와 함께 즐겨 찾는 명소 중 하나가 되었다.
4) 만물의 거리
만물의 거리는 신창동4가에 있는 전통시장이다. 만물의 거리는 1960년대에 개설된 상가형 상설시장이다. 주로 판매하는 잡화와 침구, 가방, 음향기기 등이다. 그러나 만물의 거리는 이름에서 보여주듯이 온갖 것들이 판매되는 곳이다.
만물의 거리는 2005년 8월에 전통시장으로 인정받았다. 2009년에 내부 시설을 정비하고, 아케이드를 설치해 쇼핑의 편의를 높였다.
부산국제시장은 부산지하철 1호선을 타고 자갈치역에서 내려 남포사거리에서 왼쪽으로 향하면 창선동 먹자골목이 나오고 계속 길을 따라서 가면 시장의 모습이 보인다. 국제시장에서 용두산공원 쪽으로 아리랑거리와 젊음의 거리 등이 위치해 있다.
국제시장은 크게 6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1공구는 가방, 문구, 공예품을 주로 취급하고, 2공구는 주방용품, 칠기, 안경점들이 입점해 있다. 3공구는 침구류, 양품점, 4공구는 포목, 주단, 양단, 주방기구, 5공구와 6공구는 가전제품, 기계공구, 포목점 등을 중심으로 점포들이 입주해 있다.
시장의 지리적 배경과 인근 볼거리
부산 중구는 한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역이다. 강화도조약에 의해 개항을 해야 했고, 뒤이어 일제강점기 때에는 많은 물자들이 부산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되는 통로였다. 특히 국제시장이 자리한 용두산공원 인근은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해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또한 해방과 한국전쟁을 그 중심에서 경험했다. 해방으로 인해 떠나는 일본인과 돌아오는 한국인이 교차했던 지점에서 부산 중구는 침체되었던 경제를 살리는 현장이었다. 또 그 현장을 주도한 것은 국제시장과 부평깡통시장을 중심으로 한 전통시장들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피란민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했던 부산은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면서 농촌을 떠나 부산을 찾는 사람들의 터전이 되기도 했다. 또한 군부독재 시절에는 민주화운동의 현장이었다.
오늘날 광복로와 남포동, 중앙로는 부산의 중심지로 쇼핑과 영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광복로는 과거 일본인들이 많이 살던 곳으로 최고의 패션거리로 꼽히던 곳이었다. 남포동은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BIFF광장이 위치해 있고, 19세기까지 바다였던 곳을 매립한 중앙로는 부산시청을 비롯해 연안 여객부두 등이 있다.
또한 국제시장은 천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국제시장>으로 인해 영화의 무대였던 꽃분이네 가게를 포함해 시장 자체가 하나의 관광상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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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이 히트하며 더욱 유명해진 부산국제시장
영화, 국제시장
첫댓글 제 결혼 양복 기지를 국제시장에서 끊어 남포동 양복점에서 맞추었습니다. 국제시장도 큰 불이 한번 났었죠.
그래요. 옛날에는 양복기지를 사서 양복점에서 사이즈 재고 맞춰 입었지요. 국제시장의 불 소식은 엄청 큰 뉴스였습니다.
"사람이 산다는것"에 대한 살가운 감정을 듬뿍,
느낄수 있는 곳이 국제시장이 아닐까 합니다.
저도 단골집도 있고, 자주 가는 편이며,
시간이 여의치 않으면 택배로도 주문을 하지요.
'부산'하면 국제시장 아입니꺼? 요즘은 외지 관광객들이 많아서 남포동과 광복동이 옛날같지 않아요. 얼마전 용두산공원 부산타워보러 갔다가 인파에 밀려 고생이 많았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