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 |
성씨 |
거주지 |
번호 |
성씨 |
거주지 |
1 |
달성서씨 |
남산 |
16 |
성산여씨 |
무금 |
2 |
인천채씨 |
연경 |
17 |
인천이씨 |
무태 |
3 |
순천박씨 |
묘골 |
18 |
동래정씨 |
연경동 도덕 |
4 |
전의이씨 |
하목정 |
19 |
영천이씨 |
지저 |
5 |
옥천전씨 |
만촌 행정 |
20 |
영동김씨 |
쌍암 |
6 |
단양우씨 |
월촌 |
21 |
문화류씨 |
검사 |
7 |
능성구씨 |
무태 |
22 |
현풍곽씨 |
창동 |
8 |
일직손씨 |
수성 |
23 |
함안조씨 |
원대 |
9 |
성주도씨 |
서재 |
24 |
수성라씨 |
분암 |
10 |
성주배씨 |
연천 |
※ 이상은 대구향교 ‘향안속수록’ 의거 | ||
11 |
수원백씨 |
구시장 | |||
12 |
옥산전씨 |
무태·파잠 |
밀양박씨, 달성하씨, 김해허씨, 안동권씨, 전주이씨, 행주은씨, 남평문씨, 초계주씨 등 ※이상은 기타자료에서 나타나는 경우 | ||
13 |
경주최씨 |
해안·안심 | |||
14 |
중화양씨 |
파잠 | |||
15 |
여주민씨 |
산격 |
서인 학맥의 등장
대구지역은 임난 이전까지는 서인학맥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사계 김장생의 제자인 옥천전씨 ‘전유장(全有章)’이 대구로 옮겨오고, 단양우씨의 후손들이 서인으로 전향하면서 비로소 서인학맥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전유장은 현종 조 예송논쟁 때 남인의 세력권인 대구에서 서인의 입장을 적극 대변했다. 이 일로 전유장 등 16명이 지역의 과장(科場)에서 축출된 일도 있었다. 또한 그는 이이와 성혼의 문묘배향을 촉구하는 상소의 소두(疏頭·상소문의 주동자)가 되기도 했다. 1669년(현종10)에는 성주의 회연서원에 참배 차 내려온 송시열을 전유장이 안내를 했는데, 이 일로 남인에 의해 회연서원 방문록에서 그의 이름이 삭제되기도 했다.
한편 대구지역 서인의 거점이자 핵심적 사우(祠宇·사당)인 ‘상덕사(尙德祠)8)’는 우배선의 증손인 지족당(知足堂) ‘우석규(禹錫珪)’와 전유장의 아들인 ‘전극태(全克泰)’가 주동이 되어 설립한 것이다. 상덕사는 이른바 ‘생사당(生祠堂)’으로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상덕사는 1672년(현종13) 서인계 인물로 경상감사로 부임한 ‘이숙(李䎘)’의 업적을 기린다는 취지로 1682년(숙종8)에 세워졌다. 게다가 이들은 상덕사를 ‘서인계 서원’으로까지 승격시키려다 오히려 서인의 영수 송시열의 만류로 그만둘 정도였다. 이후 상덕사는 유척기, 김희순, 이존수라는 서인계 인물들을 추가로 병향(幷享·서열이 없이 위패를 나란히 봉안함)하면서 명실 공히 대구지역 서인세력의 대표적인 ‘랜드마크’가 되었다.
이후 대구는 단양우씨, 옥천전씨 외에도 달성하씨, 인천이씨, 능성구씨 등이 서인의 입장을 표방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중앙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다수의 남인계 대구유림과 대립이 있었지만, 지역 안의 문제에 있어서는 극단적인 대립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사실은 대구최초로 서인을 표방한 전유장도 자신의 아들인 전극태를 당시 대구의 대표적 남인 가문인 옻골의 최위남의 딸에게 장가를 보냈다는 것과 전유장 자신도 대구의 대표서원인 연경서원을 출입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구지역은 17세기 이후부터 점차 서인세력이 등장했지만 여전히 지역 안에서는 「대구 24문중」을 중심으로 대구유림사회를 이어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대구유림의 현재와 미래
대구지역 유림단체 현황
2014년 현재 대구에는 대구향교를 비롯하여 여러 유림단체들이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 각 단체들은 대구향교를 상징적인 의미에서 대구유림의 중심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향교와는 종속적 관계가 아닌 독립적·병렬적 관계에 있다. 이러한 독특한 관계설정은 개별 유림단체들의 설립목적이나 설립구성원들의 차이에 기인한 바가 크다. 하지만 상징적으로나마 대구향교를 대구유림의 중심으로 보는 이유는 유림에 있어 상징적인 공간인 ‘문묘9)’가 대구향교에 있으며, 그곳에서 ‘삭망분향례10)’와 ‘석전대제11)’ 같은 유교의례가 행해지기 때문이다. 현재 대구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인 유림단체 몇 개를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표2> 대구유림단체 현황
명칭 |
설립 년도 |
주요활동 |
비고 |
대구향교 |
1397년 |
교육·제향 |
‘장의’ 및 ‘대구 24문중’ 중심. |
성균관유도회 대구본부 |
1970년 |
교육·친목 |
중앙회와 17개 지역본부로 구성된 전국조직. 대구본부는 다시 10개의 구·군지부로 조직. ‘여성국’을 둠. |
성균관청년유도회대구본부 |
1978년 |
교육·친목 |
중앙회와 17개 지역본부로 구성된 전국조직. ‘여성부’와 전국유일의 ‘대학생부’를 둠. |
(사)담수회 대구본부 |
1963년 |
교육·친목 |
대구본부와 24개 시지회로 구성된 전국조직. ‘여성위원회’를 둠. |
(사)박약회 대구지회 |
1994년 |
교육·친목 |
서울본부와 24개 시지회 및 1개 중국지회로 구성된 전국조직. ‘여성회’와 ‘청장년회’ |
춘추회 |
|
|
|
영남 유학연구회 |
2009년 |
교육·친목 |
대구 및 인근지역 문중의 후손들 중심 |
이상의 7개의 단체 외에도 대구유림단체로 칭할 수 있는 조직들이 더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각 성씨별로 조직되어 있는 ‘종친회’, ‘화수회’ 등이 있다. 또한 ‘퇴계학회’, ‘한강학회’와 같은 각종 학회와 학계로 통칭되는 ‘서원계’, ‘서당계’ 등도 있다. 한편 각종 전통예절을 교육·보급하는 전통예절단체 역시 유림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여하튼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들 단체의 구성원들은 기본적으로 3-4개 정도의 단체에 이중 삼중으로 중복 가입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들 단체들은 평소에는 각기 설립목적에 따라 개별적인 활동을 하다가, 지역에서 유교관련 의례나 학회 등의 행사가 개최되면 일사분란하게 공동으로 참여한다. 특히 연중 2회 실시하는 ‘석전대제’ 때는 이들 단체들이 모두 ‘대구유림’이라는 이름하에 한 날 한 시 대구향교에 집결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참고로 대구향교 석전대제 때 참례하는 유림의 수는 대략 500-600명 정도가 된다.
대구유림의 미래
얼마 전 유교의 수장이라는 성균관장이 자신의 부정행위로 인해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전국의 많은 유림들이 부끄러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고 개탄을 했다. 이는 유학의 ‘수오지심(羞惡之心)ㆍ예의염치(禮義廉恥)’ 같은 가르침이 몸에 밴 그들이었기에 그 수치스러움의 고통이 더욱 배가 된 탓이다. 그러나 유교의 수장이 무너지는 충격적인 상황에서도 대구유림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진실한 자세로 사문12)의 길을 걷고 있는 수많은 선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상은 그들을 ‘유림’이라 칭한다. 수많은 선비들이 모여 있는 ‘선비의 숲’ 말이다. 울창한 숲에서 보호수로 지정된 고목 한그루 잘려 나간다하여 숲에 무슨 변화가 있겠는가?
이러한 ‘선비의 숲’에 근래 들어 큰 병통이 하나 생겼다. 젊은 세대가 없다보니 유림의 허리 역할을 하는 ‘청장년유림층’이 급속도로 얇아졌고, 이의 파급효과로 나타난 청장년유림의 역할론과 정체성의 혼란이 바로 그것이다. 본 발표자는 이제 40대 중반에 들어 선 전형적인 청장년유림이다. 본인의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대구유림의 미래는 결국 청장년유림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일까 현재 대구지역의 각 유림단체들은 이 문제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조직 내에 ‘대학생회’, ‘청년회’, ‘청장년회’ 나아가서 ‘여성회’ 등의 조직체계를 갖추고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600년 전통을 이어온 우리 대구유림은 잘났거나 못났거나 간에 존재감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 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제는 대구의 청장년유림이 긴 잠에서 깨어나 600년 대구유림사회에 공헌할 때가 된 것 같다. ‘유풍의 흥기(興起)’. 이는 오랜 세월 유림사회가 그토록 바라던 바이다. 주변을 한번 돌아보라. 이 일을 누가 하겠는가? ‘청장년유림’ 밖에는 없다. 대구의 청장년유림이 일어나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대구의 유풍 역시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 확신한다.
대구의 재실13)
재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구는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시지, 지산, 율하, 도동, 무태, 칠곡, 성서, 옥포, 대곡 같은 많은 신도시들이 있다. 대구 도심을 원형으로 감싸고 있는 이 지역들은 아직까지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고 있는 지역이다. 대구시는 2020년 완공을 목표로 이들 신도시 지역을 타원형으로 연결하는 4차 순환로 공사를 진행 중에 있다. 그런데 이 지역에는 대구의 유교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유교문화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다. 70년대 이후 본격적인 도시개발 붐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유교문화와 유적은 뜻있는 몇몇 문중의 보종(保宗·문중을 지킴)사업 덕택에 역사에서 사라지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대구의 유교문화를 담고 있는 건축물 중 수적으로 가장 압도적으로 많은 유형은 당연 ‘재실(齋室)’이다. 재실은 다른 말로 ‘재사(齋舍)’ 또는 ‘재궁(齋宮)’이라고도 불리는데, 용도에 따라 크게 2종류로 나눌 수가 있다.
▖연거(燕居)14) 또는 강학의 용도: 적당한 터에 집을 지어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거나 강학을 위한 건물. 「동재·서재」, 「낙육재」, 「양사재」, 「창포재」, 「무동재」
▖재계15), 제사의 용도: 묘제를 포함한 각종 제사를 앞두고 재계 및 준비를 하는 건물, 또는 제사를 행하는 건물. 「덕산재」, 「경의재」, 「영모재」, 「추원재」
하지만 이 같은 구분은 별 의미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전에 지어진 재실들은 처음 창건 당시에는 ‘연거’ 또는 ‘강학소’의 용도로 이용된 예가 많았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근세에 와서는 연거, 강학의 용도는 소멸되고, 문중의 특정인물을 ‘추모하는 장소’ 또는 ‘문중의 회합장소’ 등으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재실이라고 통칭하는 건물들은 대개가 ‘제사’ 또는 ‘문중의 회합장소’로 사용하는 건물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대구지역 재실현황
그렇다면 우리 대구지역에 과연 얼마만큼의 재실이 남아 있을까? 발표자가 유림들을 대상으로 이 질문을 해본 결과 가장 많이 들을 수 있었던 대답이 대략 30-50개 정도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2014년 현재 발표자가 각종 자료 및 현장 답사를 통해 확인한 대구지역 재실의 수는 무려 350 여개나 된다. 물론 이 중 절반가량은 아직도 전통문화권이라고 할 수 있는 ‘달성군 지역’에 산재해 있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에 해당하는 170여개가 대한민국 제3대 도시라는 대구광역시 도심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21세기 최첨단 정보통신 시대에 우리 대구유림에 의해 유지·운영·관리되고 있는 재실의 수가 이 만큼이나 된다는 것은 분명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까닭 없이 존재하는 사물은 없는 법이다. 따라서 향후 대구지역의 재실과 관련해서는 전문가들에 의한 더 많은 연구가 꼭 필요하다고 본다.
본 발표자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지역은 제외하고 ‘동구·서구·남구·북구·중구·수성구·달서구’ 7개 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재실의 현황을 조사해보았다. 조사는 기존의 기록자료16) 검토 및 현장 확인조사17)를 병행실시 했다. 이를 통해 얻어진 1차 자료를 다시 지역별, 창건 년대별, 성씨별로 분류해본 결과 다음과 같은 2차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참고로 본 발표자는 이 분야를 전공하는 학자는 아니다. 더욱이 대구의 재실에 대한 이 조사는 아직까지 절반 정도만 진행된 상황이다. 따라서 자료의 정확성이나 논리의 전개과정 등 연구방법론적인 측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음을 먼저 밝혀둔다.
<표3> 대구의 재실(지역별)
지역 |
재실수 |
비고 |
동구 |
81 |
경주최씨16, 단양우씨12, 인천채씨9, 경주이씨5, 문화류씨5, 성주배씨4, 달성서씨4, 장수황씨3, 평산신씨2, 김해김씨2, 영양남씨2, 행주은씨1, 경주김씨1, 교하노씨1, 남양홍씨1, (사)담수회1, 대명동14현1, 성산여씨1, 성주이씨1, 옥산전씨1, 월성배씨1, 일직손씨1, 정선전씨1, 진주강씨1, 기타4 |
서구 |
3 |
달성서씨1, 인천채씨1, 안동권씨1 |
남구 |
1 |
달성서씨1 |
북구 |
32 |
인천이씨7, 달성서씨6, 능성구씨5, 인천채씨3, 경주이씨2, 함안조씨2김령김씨1, 달성배씨1, 수원백씨1, 야성송씨1, 영동박씨1, 전주최씨1, 창원황씨1, |
중구 |
5 |
달성서씨1, 대구향교1, 대구시청년유도회1, 대구향교여성유도회1, 대구 노론계1, |
수성구 |
29 |
아산장씨4, 중화양씨4, 달성하씨3, 달성서씨2, 두릉두씨2, 경주김씨2, 일직손씨2, 풍기진씨1, 경주최씨1, 고산서당유림회1, 밀양박씨1, 성산배씨1, 순흥안씨1, 옥산전씨1, 옥천전씨1, 인천채씨1, 청주정씨1 |
달서구 |
23 |
단양우씨9, 밀양손씨2, 순천김씨1, 이락서당계 9문중1, 경주최씨2, 고령김씨1, 김녕김씨1, 김해김씨1, 김해허씨1, 달성서씨1, 밀양박씨1, 성상전씨1, 성주도씨1 |
계 |
174 |
|
<표3>은 대구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재실유적지를 7개 구별로 나누고, 이를 다시 성씨별로 분석을 해본 것이다. 이 표를 통해 알 수 있는 몇 가지 특이점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재실의 수는 동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81개이며 다음은 북구 32개, 수성구 29개, 달서구 23개, 중구 5개, 서구 3개, 남구 1개의 순으로 나타난다.
▖재실의 수가 ‘동구, 북구, 수성구, 달서구’에 편중되어 나타나는 것은 이 지역들이 ‘중구, 서구, 남구’에 비해 대구도심에서 거리가 많이 떨어진 교외지역까지를 끼고 있기 때문으로 해석이 된다. 동시에 17세기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대구 24문중」이 당시 대구부의 외곽지역에 세거지를 마련했다는 기존의 사실과도 일맥상통한다.
▖특이하게도 중구의 경우는 지방정부, 노론계, 대구 토호세력과 관련된 건물만 남아 있다는 점이다. 대구향교, 낙육재, 양사재는 당시 지방정부에서 운영한 공립교육기관이었고, 상덕사는 노론계 핵심사당 그리고 수덕사는 대구 토성인 달성서씨의 유적이라는 점이다.
<표4> 대구의 재실(창건 연대순)
창건시기 |
재실수 |
비고 |
16c 이전 |
7 |
하효자정려문(1327·충숙왕14), 대구향교(1398·태조7), 고산서당(1500중반) ※대구최초 서원인 연경서원(1565)은 현재 존재하지 않으므로 제외 |
16c-19c |
82 |
서원·사우 남설기인 17c-18c에 숫자가 급격하게 증가 |
20c이후·연대미상 |
85 |
초창연도를 알 수 없거나, 20c에 중건사실이 확인된 경우도 포함 |
계 |
174 |
|
위 표는 대구의 재실을 창건연도를 기준으로 하여 3시기로 나누어 분류를 해본 것이다. 실제로 대상 재실 174개 중 기록자료와 현장답사 등으로 ‘초창연도·연대’ 또는 ‘중건연도·연대’가 어느 정도 확인이 가능한 경우는 전체의 2/3 정도이고 나머지는 자료부족 등으로 확인이 힘든 상황이다. 따라서 이 분야 전문가들에 의해 좀 더 체계적인 방법으로 조사가 진행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표5> 대구의 재실(성씨별)
번호 |
성씨 |
재실수 |
번호 |
성씨 |
재실수 |
번호 |
성씨 |
재실수 |
1 |
※단양우씨 |
21 |
21 |
영양남씨 |
2 |
41 |
※옥천전씨 |
1 |
2 |
※경주최씨 |
19 |
22 |
※옥산전씨 |
2 |
42 |
월성배씨 |
1 |
3 |
※달성서씨 |
16 |
23 |
청주정씨 |
2 |
43 |
전주최씨 |
1 |
4 |
※인천채씨 |
14 |
24 |
평산신씨 |
2 |
44 |
정선전씨 |
1 |
5 |
경주이씨 |
7 |
25 |
※함안조씨 |
2 |
45 |
진주강씨 |
1 |
6 |
※인천이씨 |
7 |
26 |
고령김씨 |
1 |
46 |
창원황씨 |
1 |
7 |
※능성구씨 |
5 |
27 |
교하노씨 |
1 |
47 |
풍기진씨 |
1 |
8 |
※문화류씨 |
5 |
28 |
※김해허씨 |
1 |
48 |
하양허씨 |
1 |
9 |
※성주배씨 |
4 |
29 |
남양홍씨 |
1 |
49 |
※행주은씨 |
1 |
10 |
아산장씨 |
4 |
30 |
달성배씨 |
1 |
50 |
※현풍곽씨 |
1 |
11 |
※중화양씨 |
4 |
31 |
성산배씨 |
1 |
51 |
흥해최씨 |
1 |
12 |
경주김씨 |
3 |
32 |
※성산여씨 |
1 |
52 |
※대구향교 |
1 |
13 |
김해김씨 |
3 |
33 |
성산전씨 |
1 |
53 |
담수회 |
1 |
14 |
※달성하씨 |
3 |
34 |
※성주도씨 |
1 |
54 |
※이락서당이락계 |
1 |
15 |
※일직손씨 |
3 |
35 |
성주이씨 |
1 |
55 |
고산서당유림회 |
1 |
16 |
장수황씨 |
3 |
36 |
※수원백씨 |
1 |
56 |
※9인 시회 |
1 |
17 |
김령김씨 |
2 |
37 |
순천김씨 |
1 |
57 |
※대명동 14현 |
1 |
18 |
두릉두씨 |
2 |
38 |
순흥안씨 |
1 |
58 |
※노론계 |
1 |
19 |
※밀양박씨 |
2 |
39 |
야성송씨 |
1 |
59 |
대구시 청년유도회 |
1 |
20 |
밀양손씨 |
2 |
40 |
영동박씨 |
1 |
60 |
대구향교 여성유도회 |
1 |
소계 |
129 |
소계 |
25 |
소계 |
20 |
<표5>는 성씨별로 재실의 수를 조사해본 것이다. 대구지역에는 51개 성씨가 165개의 재실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이 표에서 52번부터 60번까지는 ‘성씨연합체’ 또는 ‘유림단체’에서 운영하고 있는 재실인데 표에는 함께 실었다. 따라서 이들까지 포함하면 대구지역에는 ‘51개 성씨’와 ‘9개의 유림단체’가 소유·운영하고 있는 ‘174개소’의 재실유적을 확인할 수 있다.
<표5>를 10개소 이상의 재실을 소유하고 있는 ‘단양우씨·경주최씨·달성서씨·인천채씨’ 4개 성씨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본다면, 「단양우씨」가 21개소로 가장 많은 재실을 보유하고 있다. 이를 앞에서 나온 <표3>과 함께 비교검토를 해보면, 21개 재실이 모두 동구 평광동을 세거지로 하고 있는 예안군파(12개)와 달서구 상인동을 세거지로 하는 판서공파(9개) 두 문중의 재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경주최씨의 경우는 모두 19개로 확인이 되는데 대부분 동구지역인 ‘도동, 둔산동, 지묘동, 봉무동’ 일원에 소재하고 있다. 기타 달서구 도원동(2개), 수성구 만촌동(1개) 등에서도 확인이 된다. 달성서씨의 경우는 대구 전 지역에 걸쳐 재실이 확인되는 유일한 성씨이다. 재실은 모두 16개인데, 동구(4개), 서구(1개), 남구(1개), 북구(6개), 중구(1개), 수성구(2개), 달서구(1개)로 나타난다. 인천채씨는 14개가 확인이 되는데 팔공산 자락인 동구 지묘동·미대동(9개), 북구 검단동·서변동(3개), 서구 상리동(1개), 수성구 성동(1개) 등이다.
참고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대구 24문중」을 중심으로 한번 살펴보자. <표5>에서 ‘※’ 표시가 붙어 있는 성씨들이 「대구 24문중」에 해당한다. 총 174개의 재실 중 무려 68%에 달하는 118개가 이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근대화 이후 대구로 이거해온 많은 타성(他姓)들의 숫자를 고려해 볼 때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참고로 「대구 24문중」 중 이 표에서 나타나지 않는 ‘순천박씨, 전의이씨, 동래정씨, 남평문씨’ 등은 대구시 달성군 지역에 집중적으로 재실을 소유하고 있는 성씨들이다.
대구 유교문화의 키워드 재실
대구는 70-80년대를 거치면서 눈부신 성장을 이룩했다. 당시 우리지역 전통문화의 보고였던 수많은 동족부락들이 우리가 그 가치를 채 인식하기도 전에 이 땅에서 사라져버렸다. 앞서 <표3>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지역의 전체가 대구의 도심지 안으로 흡수가 된 중구, 서구, 남구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지역에 비해 재실 유적지의 수가 눈에 띄게 적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도시개발이 기존의 전통마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와중에서도 감사하게 생각할 일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대구도심과 교외지역을 함께 물고 있는 동구, 북구, 수성구, 달서구 등지에는 아직도 많은 수의 재실유적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이 유적들 역시 당시에는 도시개발의 벼랑 끝에 몰렸었다. 하지만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대구유림이 있었다. 좀 더 정확히는 「대구 24문중」이 중심이 되어 그들의 수백 년 세거지와 유적들 중 일부만이라도 지켜낸 것이었다. 거대한 도시개발의 물결 속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전통문화와 유적을 보존하기 위한 방편으로는 대략 2가지 정도의 대처방법이 있었다.
▖개발에 따른 보상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전통문화와 유적을 고수한 경우
예) 능성구씨(서변동), 인천이씨(서변동), 아산장씨(시지동)
▖개발에 따른 보상으로 그 지역 또는 인근 지역에 새롭게 유적을 이건·복원한 경우
예) 단양우씨(상인동), 성주도씨(용산동), 달성서씨(산격동)
우리는 유교문화라고 하면 당연하게 안동, 영주 등을 머리에 떠올린다. 가까운 곳이라고 해도 성주, 구미가 떠오른다. 왜? 우리 대구에는 유교문화가 없는가? 물론 안동처럼 수 백 년 된 고택, 종택, 서원 등의 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것을 놓고 대구의 유교문화가 안동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고 보는 것은 분명 착각이다. 세상이 변했다. 지금은 21c 첨단 정보통신 시대이다. 유교 역시 시대의 흐름을 거역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대한민국 제3대 도시 대구의 유교문화를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 된다. 19세기에서 21세기에 이르는 근대시기의 유교문화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왔는지 그 변천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대구의 유교문화이기 때문이다.
대구의 유교문화는 「대구 24문중」을 중심으로 하는 ‘문중(門中)문화’를 빼놓고는 논할 수가 없다. 이러한 「종중·문중문화」는 살펴본바와 같이 재실유적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른바 ‘문중문화’라는 소프트웨어는 ‘재실문화’라는 하드웨어에 담겨질 때 이 둘은 제 기능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대구유림이 ‘재실보존’에 각고의 노력을 다하는 까닭이자, 발표자가 ‘재실문화’에 관심을 갖는 이유인 것이다.
앞서 우리는 대구의 재실유적에 대해 살펴보았다. 무려 174개소에 이르는 많은 수이 재실이 우리 가까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이들 중 절반 가까운 숫자의 재실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의 어느 담장 아래 또는 아파트 단지 안에 있음에도 우리는 그 존재와 가치에 대해 무관심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말이다.
발표자의 조사에 따르면 최근 동구지역 신서혁신지구에 편입된 재실들 중 약 6-7개 정도가 안타깝게도 이 지구상에서 또 사라졌다. 물론 소수 몇 개의 재실은 위에서 제시한 두 가지 방편에 의거 다행히도 살아남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요즘 정치, 경제, 사회 등 다방면에서 스토리텔링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스토리텔링은 ‘이야기꺼리’라는 소프트웨어와 함께 ‘장소’라는 하드웨어가 동시에 갖추어 질 때 감동이라는 힘을 지닐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대구의 재실문화는 그야말로 무한한 ‘스토리텔링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먼저 ‘이야기꺼리’라는 측면에서 한번 살펴보자. 이야기는 사실을 기반으로 할 때 사람들로 하여금 큰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다. ‘재실’에는 그 재실에 얽힌 창건유래는 물론 변천사에 대한 사실적 기록자료가 대부분 남아 있다. 간단한 요약에 해당하는 ‘재실기문’에서부터 ‘문집’, ‘문중자료’ 등 수대에 걸쳐 당시의 관점에서 바라본 무수한 자료들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창건유래,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6·25사변, 일제 강점기, 근대화과정, 학맥, 혼맥’ 등등... 수 백 년 역사를 이어온 재실인 만큼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꺼리를 담고 있겠는가? 한번 상상을 해보라.
다음은 ‘장소’라는 측면이다. ‘이야기꺼리’에 그와 관련된 ‘장소’가 더해지면 그 전달력은 배가 되는 법이다. 그 좋은 예가 우리 대구에 하나 있다. 북구 연경동에 있어야할 대구최초의 서원 ‘연경서원’이 바로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엄청난 ‘이야기꺼리’를 가지고는 있지만 그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장소’가 현재는 없다. 그러한 까닭에 ‘연경서원’은 거저 관련분야의 책에서나 만날 수 있는 고귀한 존재로만 머물고 있다. 그런데 대구의 174개소의 재실유적들은 어떠한가? 모두 자신들만의 공간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 물론 ‘얼마나 긴 역사를 지녔는가?’, ‘그 규모는 어떠한가?’, ‘잘 관리되고 있는가?’ 등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것 역시 그 나름의 이유를 지닌 채 그 ‘장소’에 묵묵히 서 있다.
‘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이라는 이 제안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실례를 한번 들어보겠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가까운 수성구 지역의 몇 군데 재실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고산서당: 수성구 성동. 고산서원유림회. 고산서원의 전신으로 대구시 수성구 ‘고산’이라는 지명유래의 근원지이다. ‘고산’이라는 이름은 퇴계선생이 직접 명명한 것이며, 퇴계선생은 이 서당까지 직접 왕림하여 강회를 열었다. 이 사실을 증명하는 「퇴도이선생우복정선생강학유허비」가 현재까지 고산서당 뒤편에 서 있다. 참고로 우복 정경세, 명나라 제독 이여송, 퇴계 친필 편액인 ‘구인(求仁)’ 등의 이야기꺼리가 있다.
▖덕산재: 수성구 시지동. 아산장씨. 시지에서 600여 년 세거해온 아산장씨 문중의 유적이다. 천을산을 중심으로 덕산재, 덕양단, 계술재, 연호재, 선영, 집성촌 등이 산재해 있어 시지·가천·고모·연호동 일대는 그야말로 ‘아산장씨 문중벨트’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 덕산재에는 덕봉 장자원 선생이 사림의 종장인 점필재 김종직 선생과 주고받은 시를 새긴 시판이 걸려 있다.
▖청호서원: 수성구 황금동. 일직손씨. 서사원과 함께 대구유림의 화려한 르네상스기를 이끈 모당 손처눌 선생을 기린 서원이다. 손처눌은 대학자인 동시에 임난 의병장으로도 이름난 인물이며, 광해군 시절 정권의 2인자였던 래암 정인홍을 배척하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조선 중기에는 연경서원을 구심점으로 하여 대구 서부지역은 서사원의 ‘선사재강학’, 동부지역은 손처눌의 ‘영모당강학’이 유행했는데, 이를 요즘 표현으로 바꿔 말하면 각각 대구 서부와 동부지역 최고의 사립대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덕산서원: 수성구 황금동. 달성서씨. 달성서씨 판서공파의 시조인 남은 서섭을 기리는 서원이다. 이 서원은 서섭은 물론 그의 둘째아들인 서감원에 얽힌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압권이다. 400년 세월 묻혀 있던 서섭과 서감원의 행적이 밝혀지는 기이한 과정. 그리고 성종의 할아버지인 ‘세조’와 서감원의 아버지인 ‘서섭’. 반대로 세조의 손자인 ‘성종’과 서섭의 아들인 ‘서감원’의 대를 이은 악연. 성종실록에 10년 동안 무려 18번이나 그 이름과 행적이 등장하는 서감원 등. 마치 역사극 2편을 보는 듯하다.
▖모명재: 수성구 만촌동. 두릉두씨. 명나라 장수로 임진·정유 양란에 조선으로 원군을 왔다가 조선에 귀화한 특이한 인물. 이순신 장군과 함께 두 집안 후손에 이르기 까지 이어온 교분. 풍수지리가로 활동하여 한반도 전역에 풍수 관련한 일화를 남긴 인물. 대구의 대명동이라는 동명을 명명한 인물. 매달 초하루·보름 명나라를 향해 배례를 올린 인물 등. 하지만 두릉두씨 문중에서는 자신들의 선조가 풍수지리가로서가 아닌 숭정처사로서 평가받기를 바란다는 사실 등.
▖독무재: 수성구 만촌동 달성하씨. 대구의 가장 오래된 토성 중의 하나인 달성하씨의 재실. ‘효자 하광신 정려비’는 경북에서 가장 오래된 효자정려비 중의 하나이다.
▖경현당: 대명동14현 문중(경주최씨·영천이씨·옥천전씨·동래정씨·김해허씨·달성서씨·인천채씨·중화양씨·성주도씨·문화류씨·덕산이씨·풍천임씨). 명나라 말, 청나라 초. 명나라를 사모하여 초야에 은거한 이를 일러 숭정처사라고 한다. 우리 대구에도 여러 명의 숭정처사들이 있지만, 이 경현당에 얽힌 숭정처사는 한꺼번에 무려 14명이나 된다. 이들은 모두 ‘명(明)’자를 넣어 자신들의 호와 시를 각자 지었고, 함께 팔공산 자락으로 들어가 대명동이라는 마을을 개척했다. 지금까지 14개 문중은 회합을 가지고 있다.
에필로그
대구유림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대구유림의 모태가 되는 대구유학의 학맥부터 살펴보았다. 오늘날의 대구유림는 조선 조 지역의 유학자 그룹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들에 의해 배출된 학자그룹이 오랜 세월 ‘학맥’, ‘혼맥’, ‘문중’ 등 지역사회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오늘날과 같은 여러 형태의 대구유림을 탄생시킨 것이었다.
▖대구유림 비조: 서거정, 도하, 양희지 등(16세기 이전)
▖대구유림 1세대(시조): 이숙량, 전경창, 채응린, 정사철 등(16세기 초·중)
▖대구유림 2세대: 서사원, 손처눌, 곽재겸, 이주, 류요신, 정광천(16세기 후-17세기 초)
▖대구유림 3세대: 17세기 이후 대구의 유학자 그룹을 중심으로 「대구 24문중」의 형성.
▖대구유림 현조(顯祖): 정구(16세기 후-17세기 초)
하지만 오늘날의 대구유림은 유학자 그룹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현실을 감안하여 대구유림을 정의해 본다면 ‘대구지역의 유풍(儒風)을 흠모·계승하는 자들의 모임’ 정도로 보면 무난할 것 같다.
한편 대구유림은 대구의 재실유적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른바 ‘유림문화’라는 소프트웨어는 ‘재실문화’라는 하드웨어에 담겨질 때 이 둘은 제 기능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대구유림이 ‘재실보존’에 각고의 노력을 다하는 까닭이자, 발표자가 ‘재실문화’에 관심을 갖는 이유인 것이다.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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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도통(道統): 유학에서 성인의 가르침인 도가 이어져 내려오는 계통. 복희→신농→황제→요→순→우→문·무·주공→공자→안자→증자→자사→맹자→주돈이→정호·정이→주자로 이어진다.
2)비조(鼻祖): ‘시조’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그 계통이 명확하게 밝혀진 최상위의 선조를 말한다. 이에 반해 시조보다 더 상위의 조상임에는 틀림없는데 그와 시조 사이의 계통이 불확실한 경우 그를 일러 ‘비조’라고 한다.
3)학문과 교육이 흥성한 지역을 가리키는 말. 공자가 노나라 사람이고 맹자가 추나라 사람인데서 나온 말이다.
4)대구시사편찬위원회, 대구시사 권1(대구시 1995), 627쪽 참조
5)성주 유생인 ‘박이립’이 ‘정구’가 도에 어긋난 말을 했다고 무고한 사건.
6)1610년(광해군2)에 발생한 성주의 ‘한강 무고 사건’ 및 정인홍의 ‘회퇴변척소’ 사건 때의 대처를 보면 미묘한 차이가 있다. 서사원은 자신을 남명학파로, 손처눌은 퇴계학파로 인식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7)1900년대 중반에 와서 ‘대구 24문중’으로 정리가 되는데 이는 대구향교의 ‘향안속수록’에 근거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대구 27문중’이라고도 했다.
8)대구시 중구 남산동 인쇄골목 안에 현존하고 있다. ‘문우관’ 또는 ‘상덕사’로 불린다.
9)文廟: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
10)朔望焚香禮: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사당의 신위에 향을 사르는 의식.
11)釋奠大祭: 성균관과 향교 등에서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문묘에서 공자를 비롯한 선성,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
12)斯文: 유교·유학 또는 유학자를 지칭하는 용어
13)본 발표에서 사용하는 ‘재실’이라는 용어는 재실은 물론 서원, 서당, 정려 등 유교문화를 담고 있는 유교 건축물 전체를 아우르는 광의의 개념으로 사용됨을 참고해주기 바란다.
14)일 없이 집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는 평상의 일상을 말함. 한거(閒居)라고도 한다.
15)齊戒·齋戒: 제사를 앞두고 행동과 마음가짐을 조심히 하는 절차.
16)대구누정록, 각종 「문중자료·문집·기문·재실자료·현장 안내판」, 인터넷 자료 등.
17)기록자료 검토 후 현장 확인을 실시한다. 현장 확인 시 조사항목은 「명칭, 문중, 주소, 내력, 인물, 창건·중건연대, 보존상태, 유형, 기타」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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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의 유교유적, 유교문화, 문중 등은 기존의 자료가 충분치 못한 관계로 내용 중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신 경우 전화 또는 댓글로 조언을 주시면 적극 경청하고 수정토록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 당부 드립니다.
송은석(유교 칼럼니스트)
☎018-525-8280
첫댓글 유림의 역사~~~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길고 지루한 글인데다... 유교 그것도 대구라는 지역에 국한된 글이라 이해가 쉽지 않은데도 관심가져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격려의 말씀으로 알고 차근차근 공부해 나가겠습니다... 더운 날씨입니다.. 건승하십시오
@풍경 송은석 열심히 사시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좋은자료 감사합니다.유림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네... 선생님^^ 그것도 이 글 하나로 훌륭한 선조를 두신 같은 일족을 만나게 되어 대단히 반갑습니다.. 송공산 선생에 대해서는 부끄럽지만 저도 아직은 잘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예학쪽에 관심이 많아 예전에 육례수략을 열심히 읽은 적은 있습니다.. 조선후기 가장 근세에 나온 예서 중의 하나이다보니 근세 예학의 관점을 탐구하는데는 현재까지 육례수략만한 것이 없다는 평입니다.. 꼭 한번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건승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 잘 보았습니다
아이쿠.. 정선생님^^ 실은 대구시청년유도회 배00 회장님의 닉네임이 '思無邪'입니다.. 그래서 정선생님 닉네임을 보면 지금도 깜짝 깜짝 놀랍니다.. 하하^^ 아참 그리고 전화 한번 드린다는 것이 또 이렇게 늦어졌습니다.. 정선생님과 박선생님 두분 팩스 잘 받았습니다.. 뜻을 함께 해주심에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아직 공부가 여물지 못해 늘 선배님들로 부터 지적만 당하고 있습니다.. 변변치 못한 글에 격려의 말씀을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젊은 혈기에 실수하지 않도록 늘 전전긍긍,, 여리박빙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송은석拜
좋은사실 공부많이하고 감니다 건강하십시요,,
네... 박성남 선생님... 저의 글에 관심 가져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더욱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송은석拜
유림에 대해 많이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유림이라는 조직과 그 문화를 요즘의 생각과 시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참 힘이 듭니다... 그렇다고해서 무시하거나 내버려둘 수도 없고... 마치 '뜨거운 감자' 또는 '계륵' 같은 존재입니다... 우렁각시님^^ 우리 대구유림에 대해 관심 가져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송은석拜
방대한 내용에 깊이있는 이해는 어렵지만 총체적인 대구 유림문화의 역사와 제실 잘 읽어 보았습니다.
유림문화 라는 소프트웨어와 재실문화 라는 하드웨어가 결합할때
스토리 텔링은 완성된다는 .. 공감하구요^^
또한 재실문화는 유림문화를 계승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이유기도 하겠구요..
저의 부족한 소견 이었습니다.^^
진주강씨 제실이 대구 동구에 있었군요.
야^^ 대단히 놀라운 통찰력입니다.. 유학에 대한 소양이 없이는 이해가 쉽잖은 글이거든요...
여하튼.. 정확하게 핵심 주제를 잡아내셨네요..
네.. 대구 동구 평광동에는 '강순항 정려각'이 있습니다..
강순항의 효행에 대해 1816년(순조16)에 포상과 정려가 내려지고..
지금의 정려각은 1835년(헌종1)에 세워졌습니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데 현재도 관리가 잘 되고 있는 정려각으로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긴 글에 관심 가져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송은석拜
아직 꼼꼼히 읽어 버지는 않았지만,
유림에 대해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될 듯 하네요.
소중한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네.. 부족한 저의 글에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반인들에게는 결코 쉬운 내용의 글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대구유교문화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한 번 정도는 읽어볼 만하지 않을까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송은석拜
내가 디디고 있는 땅의 역사문화는
곧 나의 역사문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역사문화의 갈래는 수없이 많겠지만
이 땅의 대표적 역사문화의 갈래중
하나가 유교문화라는 사실을 문득
깨우치게 됩니다.
지금까지 사라진적도 끊어진적도
없었지만 망각의 늪속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나봅니다.
늦게나마 망각에서 깨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