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이제는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창29:31-35)
오늘은 야곱의 자녀들 중의 네 번째인 ‘유다’에 대해서 묵상하게 됩니다. 창세기29장의 마지막 부분을 정리요약하고 있는 셈입니다. 왜 29장과 30장을 분리시키고 있는 것일까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유다’의 이름이 붙여지는 내력을 알게 되면, 우리는 바로 이 사건과 이 이름 속에 우리들 신앙의 본질이 들어있고, 복음의 실체가 새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입니다.
르우벤은 ‘보라 아들이로다’, 시므온은 ‘들으셨다’, 레위는 ‘연합’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각각의 상황을 통해서 그 부인 레아의 마음과 신앙이 표현되어 있고, 또한 구원의 역사를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자, 레아가 아들을 몇 명쯤 나았습니까? 벌써 세 명을 낳았습니다. 몇 년쯤 지났을까요? 최소한 5-6년은 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혼생활에 있어서 5-6년은 그렇게 긴 것 같지가 않습니다. 저희 교회에 자녀 가진 부부들이 늘어가는데, 이 결혼 후 5-6년의 기간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꿈같이 지나셨습니까? 그런데, 레아는 참으로 불행하게 보냈습니다. 야곱과 부부관계를 가지는 것도 기계와도 같았을 것입니다. 사랑이 없고, 정이 없이, 그저 육체적인 관계를 통해서 자녀를 생산하는 도구라면 여겨졌다면, 레아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인격적으로 모독을 당하고 무시를 당한 셈입니다. 그게 여자의 인생인 걸 포기하며 살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아빠가 남편을 속여서 자신이 겨우 결혼이라도 한 것이 다행이었다고 여기며 살았다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바로 35절에 나옵니다. 곧 ‘유다’를 낳고는 그 이름을 붙이면서 말하기를, “이제는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이라고 한 것입니다. 무엇을 암시하고 있습니까? “지금까지는” 어떻게 했다는 이야기입니까? “여호와를 찬양할 수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하겠노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왜 그렇게 할 수 없었을까요? “르우벤”을 낳아주면서 “보라 아들이로다”고 하였지만 남편 야곱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시므온”을 낳아주면서 이 아들은 “하나님이 들어주신 것이야”면서 은근히 하나님을 들먹이면서 협박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레위”를 낳아주면서, 이제는 남편과 “연합”하게 되었다고 기뻐했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반응은 별로 신통치가 않은 것 같습니다. 기뻐하였다면 단지 아들 낳아준 것 그것만으로 기쁜 것이지, 그렇게 낳아준 자기에 대해서는 영 마음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부로서 살아가면서, 그 파트너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동기들을 간파하게 됩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주는가? 자식 때문에 살아가는가? 돈 때문인가? 나의 어떤 실력이나 능력 때문인가? 그런 것들도 물론 필요하지만, 그것만이라고 한다면, 불행한 부부입니다. 레아처럼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행복한 것 같아도, 참된 부부의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마음이 “이제는”이라는 표현 속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부부들 모두가, 레아처럼 ‘이제는’이라고 하는 말을 하는 신앙에 “이제는” 도달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제는”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넷째 아들의 이름을 ‘찬송’이라는 뜻을 가진 ‘유다’라고 붙이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찬송’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가 ‘할랄’이 있는데,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야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할랄’은 ‘환하게 비친다’는 뜻으로서, 찬양의 대상이 갖는 가치와 존귀함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할렐루야”가 그런 뜻입니다. “야훼”가 그렇게 ‘환하게 비취는 존재’입니다는 것을 선언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다’라는 말의 찬양은 그 강조점이 조금 다릅니다. ‘야다’라는 말은 ‘깊이 안다’,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할랄’이 찬양의 대상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야다’는 찬양의 태도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곧, 레아의 이 말은, “이제는 내가 여호와를 인정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이 무엇을 암시하고 있습니까? 지금까지는 남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남편의 잘못된 그 태도를 고쳐보려고 애를 쓰고 근심했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도 안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을 믿어도 소용없더라, 교회당 다녀보아도 소용없더라는 식으로 바뀔 수 있지요. 그것과 비교하면, 레아의 태도는 바로 신앙이 무엇인지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근심하고, 염려하며, 무언가 남편을 고쳐보려고 했던 것에서 자신의 욕심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주장하려고 했던 모습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자신이 하나님을 인정하겠습니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여기 “이제는”이라는 말, “파암”이란 말인데, ‘발’, “발로 밟음”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이제는”이란 뜻을 갖게 되는 것일까요? 바로 “결심하는 태도”를 “발로 땅을 치면서”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주먹을 불끈 쥐면서” 하는 말이 “이제는”이라고 하는 셈입니다. 확실하게 결심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뜻대로 해 주시지 않아도,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꼭 부부관계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지요. 우리들의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는 때로 하나님과 흥정을 하려고 합니다. 때로는, 내가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것 자체가 흥정일 수도 있습니다. 제 인생에 가장 어리석었던 흥정을 하나 말씀드려 볼까요? 서울대학원을 다니던 중 심리학이란 과목에 대해서 지금까지 기대를 걸어왔던 그 기대가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혼란스러운 정국에 대해서 심리학과교수들의 태도가 참으로 무기력하게 보이기도 했었습니다. 하던 공부를 그만 두고 신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도원을 찾았습니다. 기도를 하면서 일종의 흥정을 한 것입니다. 내가 서울대학원까지도 포기를 하고 신학대학원을 가겠으니, 하나님 좀 당신 좀 보여달라는 식이었습니다. 신학대학원생활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저에게 보이시지 않으셨다는 것은 저의 회심과정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흥정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흥정하는 것조차도 포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씨름을 포기하고, 항복하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과 싸울 수조차도 없습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평하고 원망하는 모든 것이 그렇게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 아닙니까? 신앙생활에 좀 더 열심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실은 그렇게 하나님과 다투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까?
내 뜻대로 아니하실지라도, “이제는 내가 여호와를 인정하리로다” 이것이 기독교신앙의 핵심이요, 십자가복음의 본질입니다. “유다”의 후손으로 오셨던 예수님께서 이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 앞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면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기도의 결국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레아의 말과 똑 같습니다: “이제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런 고백은 참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된 자의 고백입니다. 너무나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나를 지금 당장 지옥에 보내셔도 하나님께는 잘못이 없음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바로 그런 자들에게 참된 중생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늘의 신령한 은혜들로 충만하게 되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기대하였던 일에 실패를 하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결코 원망하지 아니하리라 “이제는” “손을 불끈 쥐고” 결심하실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결심”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지 하는 기대도 포기하고, 그렇게 흥정하는 것 없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인정하리라고 결심하게 된다면, 혹시라도, 나를 시험하시기 위해서 나의 기대하는 바를 이뤄지지 않도록 진짜로 실패하게 해 버리시면 어떻게 하나 하고 불안한 마음이 있습니까? 오, 주여, 저들에게 실패하게 하셔서, 주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자들이 먼저 되게 하옵소서!
송명희라는 뇌성마비장애시인을 기억하는지요? “공평하신 주님”(혹은 “나”)이라는 복음송가사를 지은 자매인데, 최근 동향이 궁금해서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이제는 전신마비가 된 채로 10여년동안 전혀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답니다. 지금은 44살정도가 되는데, 부모님도 노쇠하셔서 간병의 손길을 부탁하는 호소의 글도 보았습니다. 그 자매가 20여살 정도될 때 간증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휠체어에서 앉은 채로 회중들을 향해서 힘겹게 힘겹게 한 마디를 뱉아 놓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저런 불구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나는 무엇이 그리도 불평이 많은가 하는 생각으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물론, 그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너무 불평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상대방을 고치려고 안달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그 모든 것에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레아처럼, “이제는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고 하는 고백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