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Ⅱ
사사기 19장 1-3절
영적적용:심령전쟁 원인 -2
요약
계속하여 심령의 전쟁은 범죄의 환경에 거할 때, 탐욕을 따를 때, 질서의 파괴에서,
사명을 깨닫지 못할 때, 믿음과 소망을 잃었을 때, 의의 책망없을 때 나타납니다.
강해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마음의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번에 마음의 전쟁의 원인으로 두 가지 즉 성령의 도움을 구하지 않을 때와 진리가
부족할 때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자고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본문 19장을 보면 인간의 비리를 마치 쏟아 부어 놓은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합니다. 이것들이 모두 이스라엘의 큰 전쟁을 유발케한 원인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을 숨은 그림을 찾듯이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우리의 신앙의 경계로
삼고자 합니다. 이미 둘째는 했고
3.범죄의 환경에 거할 때 심령의 내전이 일어납니다.
다시 1절의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우거하는" 이란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범죄하기 쉬운 환경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구석 외딴 곳
이라 아무도 보지 않으니 범죄를 유발하기 쉬운 곳입니다.
저의 첫목회지인 신안지방 교회 위 어느 외딴 곳에 빈집터가 있고 그 터에 무덤이 있었
는데 거기에 얽힌 사연을 들어보니까 어떤 사람이 여러 여자들을 거느리고 살려고 그 곳
외딴 곳에 집을 짓고 살았답니다. 이런 악인의 말로는 대개 좋지 않습니다. 그 결과 그가
심판을 받아 헛간에서 목메어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하도 끔찍해서 다른 곳에
장사를 지내지도 못하고 그 헛간 밑에다 시체를 놓고 흙을 덮어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여기 레위인이 그런 환경이었습니다.
성도도 죄짓지 않고 살려면 최대한 범죄의 환경을 피해야 합니다. 롯을 보세요. 그 의인
롯이 소돔성에 살다가 자기 영혼 다 상하고 아내도 세속에 빼앗기고 딸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이 날마다 보고 들은 것은 세상이었습니다. 일부러 최악의 환경에 거하면서 온전하
기를 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래서 벧후2:8에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
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했습니다. 이런 의인도 그랬는데 자라나는 자녀들은 어
떻게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 다 빼앗겨 버렸습니다.
이 환경의 교훈은 역설적으로는 우리에게 교회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해 줍니다. 성도에
게 가장 좋은 신앙의 환경은 교회입니다. 성도는 아뭏튼 교회를 가까이하여 늘 말씀듣고
배우고 기도하고 성도들과 교제하고 신앙의 환경 속에서 살아야지 이 환경을 벗어나면
죄악의 시험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4.마음의 갈등은 탐욕을 따를 때 찾아옵니다.
삿19:01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더니" 했습니다.
레위인은 자신의 본처를 두고서 정욕을 못이겨 다른 여자를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
하시는 가정제도는 일부일처제입니다. 이 세속화가 심령의 평안을 앗아갑니다. 사48:22
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불안하고 슬플 때는 회개하십
시오. 그러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입니다.
5.가정의 질서의 파괴에서 옵니다.
방금 첩을 취한 말씀의 또 다른 의미입니다. 마음의 평안이 있으려면 가정이 편해야 합
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여종으로 첩을 삼았을 때 가정에 얼마나 큰 불화가 있었습니
까? 그 내전이 지금의 중동전쟁에 이르기까지 수천년동안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대의 위기는 가정의 위기입니다. 많은 가정이 이혼을 경험했습니다. 거기서 자라나는
자녀들이 큰 불행입니다. 그들에게 다른 교육은 가능할지는 몰라도 신앙교육은 어렵습니
다. 이 가정이 불안하면 가정에만 오면 은혜를 다 쏟아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바르고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가정에 충실하고 가정을 위해서 기도를 빼지 않아야 합니다.
가정화목의 비결은 기도입니다.
6.사명을 깨닫지 못할 때 내전이 찾아옵니다.
본문 1절에 "레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레위 사람이면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이란 얼마나 귀한 직책입니까? 말2:6에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
니라" 하신 말씀처럼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살리는 직책입니다. 그리고 말2:7에 "제사장
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또 이 레위족이 잘해야 온 민족이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런 귀한 자기 직책의 사명을 망각했습니다.
우리도 자기의 사명을 망각할 때 문제가 일어납니다. 요나가 탄 배가 광풍에 휩싸였습
니다. 이와같이 사명에 소홀할 때 마음에 광풍이 일어납니다. 가정에 광풍이 붑니다. 그
래서 모든 짐을 다 버렸듯이 돈도 헛된 곳에 다 던집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기 사명,
자기 달란트, 자기 은사 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선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세
상의 귀한 직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7.믿음과 소망을 잃었을 때입니다.
다시 1절의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더니"의 다른 의미입니다.
여러분 유다 베들레헴이면 어떤 곳입니까? 인류를 구원하실 구세주 메시야 그리스도가
탄생할 곳이 아닙니까? 먼저 유다의 의미를 보면, 창49:10에 실로가 유다지파를 통해서
오신다고 했는데 주석을 보면 이 실로는 오실 메시야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귀
한 곳입니다.
또 베들레헴 역시 그렇습니다. 미5:2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
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
에니라" 했습니다. 사사시대와 시대적인 차이가 있으나 성경해석이란 시대를 초월하여
여러 시대에 기록된 성경을 하나로 압축할 줄 알아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압축된 예언
을 여러 시대로 분산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예언의 특징인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본문의 베들레헴이란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곳은 신성불가침 지역이란 점입니다. 우리 나라 왕조시대에 왕후를 간택할 때
는 온 나라에 금혼령을 내렸습니다. 왕후가 될 신부감을 다른 사람들이 취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왕후 한 사람 간택하려고 온 나라에 금혼령을 내린 것입니다.
이처럼 베들레헴이란 메시야가 임하실 동네입니다. 언제 어느 집에 누구에게 오실지 그
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헤롯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베들레헴 아이들을 모두
죽인 것과도 흡사합니다. 어느 집에 오실지 몰라요. 그래서 그 곳은 신성불가침 지역이요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레위인이 신성불가침 지역에 들어가서 첩
을 취했다는 것은 자신의 소망을 삼키는 악한 행위였습니다.
이와같이 성도에게도 소망이 있어야 믿음의 근신을 하게 됩니다. 구약시대의 소망은 메
시야의 초림이지만 이 시대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아울러 재림시에 우리 성도의 부활입니다. 요일2-3에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
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
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8.의의 책망없을 때 나타납니다.
2-3절에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 아비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
서 넉달의 날을 보내매 그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히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
인 하나와 나귀 두 필을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비의 집에 들어
가니 그 여자의 아비가 그를 보고 환영하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다정히 말하고"와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와 "환영하니라" 는 용어를 살펴 볼
때 그들의 불륜과 행동이 책함을 받는 곳은 아무 데도 없슴을 뜻합니다. 남편도 그렇고
여자도 그렇고 장인도 그렇고, 교육이란 무엇이 옳은가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잘해
도 잘했다 못해도 잘했다 그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고전13:6에 "불의를 기뻐하
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그랬습니다.
요16:8에 성령이 오시면 책망하신다 하셨는데 이 책망을 받아야 가슴치며 애통하면서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마음의 죄가 다 청소되고 심령의 내전이 사라집니다. 엣
말에 후레자식이란 말이 있습니다. 부모없이 자란 자식이 후레자식입니다. 그들은 부모의
책망을 모르고 자라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결론>
오늘은 이만 드리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평안치 못하다면 왜 그런지 깨닫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여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원인을 해결할 때 우리의 마음에는 참된 평안
이 흐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