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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M이 행운의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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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스크랩 가방 - 최연봉(연희)
우아한 침묵 추천 0 조회 17 11.05.22 16: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가방 - 최연봉(연희)
(주제 '가방' /부제 '두 어머니' )



아흔 살의 엄마가 작은 가방을 꾸려 창원의 한 병원에 입원한 것은, 여든 세 살의 시어머니가 거제도의 치매 전문 병원에 입원하고 넉 달 뒤의 일이었다. 그리고 일년이 다 된 지금, 햇빛을 보지 못해 옥양목처럼 흰 얼굴을 한 엄마는 기저귀를 착용하고 젖을 조르는 아이처럼 집에 가자고 울며 보챈다.

엄마가 손자들의 유학을 위하여 창원으로 온 것은 엄마가 일흔 네 살이던 17년 전이었다. 그 사이 아이들은 장성하고 엄마는 쇠락해져서 어느 때부터인가 주객이 전도된 듯 엄마가 손자들의 보살핌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주택에서 사시다가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부터는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리며 고향을 못 견디게 그리워하셨다. "하루에 전화 한 통 받는 날은 시간도 잘가는데..." 손자들이 직장으로 학교로 나가버린 아파트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고향으로 가는 길을 펼쳤다간 접고, 다시 펼치며 전화기의 신호음이 울리기를 기다리셨을까.

다친 허리만 나으면 집으로 오실 거라 생각했던 엄마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워낙 연로하신데다 다친 곳이 허리여서 몇 달을 누워만 계시니 갈수록 거동을 못하게 된 것이었다. 엄마의 병원생활이 장기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 형제 모두가 수긍하게 되고 엄마의 병실은 노인 병동으로 바뀌었다. 나는 두 어머니가 입원하시기 몇달 전부터 대학 입학 자격을 취득하고자 검정고시 학원을 나가고 있었다. 그 일은 오랜 망설임 끝에 결정한 일이는데, 공교롭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어머니의 병원 생활과 겹쳐져 적지 않은 갈등을 느꼈다. 그러나 쉰셋의 나이에 쉽지 않은 결정을 했던 만큼 포기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2007년 두 차례의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12월에 부산의 동의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합격했다. 나도 드디어 대학생이 되었고 초등학교 졸업 이후 40년 만에 책가방을 들고 날마다 학교에 갈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엄마에게 갔을때 "엄마, 저 내년에 대학교 가요." 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엄마는

"응... 학교댕길라꼬? 그라모 자주 몬오겄네. 나는 운제 집에 가겄노. 너그 생이가 날 여기다 갖다 안 넣었나. 나는 여게 오는 줄도 안 몰랐나. 날로 데부다 놓고 뒤도 안 돌아다 보고 가삐릿다. 나가 집에서는 펄펄 걸어 댕?더이라. 나가 집에 있었시몬 이리꺼정은 안 ?일끼다. 나가 집에서는 화장실도 댕기고 오만 거를 다했더이라, 날로 집에 좀 있거로 안 놔두고...그라고 여기서는 배가 고파 몬 살겄다. 나가 여 와서 꼽박 여섯 달을 요만한 종재기에 담아 주는 죽을 묵고 살았더니라. 배도 오지게 곯았다."

크게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수없이 되풀이 했던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엄마는 딸이 공부를 계속하게 된 기쁨보다는공부 때문에 당신에게 소원해질까 두렵고 살갑게 굴던 딸의 관심에서 소외당할까 봐 두려운 거였다.그런 엄마의 모습은 우리가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이 아니었다. 여린 성격에 수줍음 많고 염치 바르고 남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할 줄 모르고 언제나 뒤에서 있는듯 없는듯 있던 엄마였는데, 점점 아이가 되어가듯 매사에 떼를 쓰고 특히 음식에 대한 애착을 진하게 나타냈다. 소식가인 엄마는 음식을 손수 만들어서 조금씩 자주 드셨는데, 병원에서는 세끼 식사 외에 시간 맞춰 나오는 간식이 없었다. 가족이나 문병객들이 사오는 음료와 음식을 두었다가 천천히 필요할 때만 드시면 되는 것을 간병인들이 가지고 간다며 있는 대로 한꺼번에 드시고는 대소변을 자주 보시니 가족들이 문병을 갈 때마다 간병인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어느 날 엄마한테 갔다가 제때 기저귀를 갈지 못해서 소변으로 흠뻑 젖은 시트 위에 누워있는 엄마를 보았다. 여러 가지 약을 복용해서인지 엄마의 소변에서는 유난히 악취가 났다. 얼마나 오래 갈아 주지 않았기에 두 개를 겹쳐서 착용하는 기저귀가 넘쳐 환자복을 적시고 시트까지 적셨을까. 그 축축하고 찝찝한 상태가 얼마나 오래 엄마를 괴롭게 하였을까 생각하니 견딜 수 없는 죄책감으로 엄마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엄마가 우리를 얼마나 귀히 길렀는지는 언니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언니 둘을 낳고 10여 년만에 오빠와 나와 동생을 낳은 엄마는 자식을 씻긴 목욕물조차도 아무 곳에나 버리지 않고 정성을 들이셨다는 것을. 그렇게 기른 자식이 다섯이나 되는데, 세상에 혼자인 듯 황량한 병실의 불결한 침상에 누워있는 엄마의 모습은
외로운 산 속에 버려진 오래된 봉분처럼 낮고 쓸쓸했다.

"내자슥아... 니 차 갖고 왔나? 그라모 잘됐다. 날 집에 좀 싣고 가자. 가방 챙기라. 나가 왜 여게서 죽으끼고? 거제에도 집 있고, 너거 오빠 장사하는 집도 내 집이고 창원집도 내 집이다... 집이 세채다, 왜 나가 여게서 죽으끼고."
"엄마, 그리 집에 가고 싶으면 우리 집에 갑시다. 며칠이 되든지 가서 있다가 옵시다."
"아? 너거 집에? 아이구... 나가 이 꼴을 해갖고 사우 집에 가겄나. 네 말은 고맙다만은 나가 부산까지 가지도 몬한다."
"그러면서 왜 자꾸 집에 간다고 합니까. 집에 가면 누가 똥오줌 받아내며 엄마 시중들어 줄 사람이 있다고요.
젊은 사람도 아프면 병원에 입원하고 어차피 집에 가도 다치거나 아프면 또 병원으로 올낀데. 얼라도 아니고 우째 이리 상황 판단을 몬합니까. 제발, 제발 현실을 받아들이고 병원에 정을 좀 붙이시소. 그래야 서로가 마음이라도 편할 거 아입니까."

내 잣대로 엄마를 재서는 안 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엄마의 증세는 치매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과거에 집착하는 증상이라고 했다. 이미 아이의 심상으로 돌아가 버린 엄마에게 예전의 분별력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엄마를 상대로 화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죄 받을 일이지만 나는 차라리 엄마가 치매에 걸리기를 바랐다. 그래서 저토록 탈출하고자 하는 현실에서 벗어나 편안해지기를 바랐다. 지난 날의 무거웠던 기억을 다 털어내고 백지처럼 새로운 의식으로 살아가는 시어머니에게서 남은 여생의 편안함을 보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내가 그분의 며느리로 살아온 세월 동안 헤아릴 수 없는 짐의 무게와 함께 짓누르던 그 무거운 이름. 30여 년의 세월동안 어머니와 나는 그저 이름만 고부간이었을 뿐, 마음을 열고 이해하는 고부간은 아니라는걸 우린 서로 너무나 잘 알고 살았다. 서로 깊은 사랑을 주고받지는 못했더라도 30년이란 세월에서 얻은 끈끈한 정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불행히도 어머니와 나는 남편의 어머니와 아들의 배필이라는 허울과 책임감뿐인 인연을 이어 왔을 뿐, 손바닥 만한 애틋함도 만들질 못했다. 그렇다고 내가 어머니의 남다른 아픔과 고통스러운 슬픔을 외면하고 살았다는 건아니다. 장성한 자식 셋과 사위까지 가슴에 묻고 살아온 어머니의 세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눈물로 보내던 그 세월들은 맏며느리였던 나도 피할 수 없이 함께해 온 세월이었고, 어머니와 나의 융합하지 못한 갈등의 시작은 그런 불행을 겪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먼저 간 자식들에게 못 다 준 사랑을 남은 자식에게 줄 법도 했건만 어머니는 정을 나누는 일에 인색했다. 무슨 일에든 앞세우고 들어오던 말, "내 자식들은 없는데 너거는 남아 잘 살고나...그것들이 살았으면 나가 이리 살겄나. 자식 중에 그것들이 잘난 것 들이었는데.." 로 시작되는 푸념의 화살은 언제나 맏며느리인 내게로 겨눠졌다. 어머니는 자식 넷을 잃은 슬픔, 아니 책임을 내게 전가 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단 한번도 따스한 말 한마디 해주지 않으셨고 남들 앞에서 나에 대한 좋은 말 한마디 하지 않으셨다. 그 찌푸린 얼굴, 못마땅히 흘기던 눈길. 힘을 주어 '똑똑한 년!이라고 내뱉던 차가운 목소리. 그러면서도 집안의 대소사는 모두 내게 전가했다. 나는 어머니가 기획하고 만들어 내는 모든 일에 돈과 시간과 노동력을 제공하는 철저한 어머니의 하수인이었다. 그것은 어머니 자신이 내 앞에서 인정한 사실이었다.

스물 다섯 살의 어린 새댁이 머리가 희끗희끗한 쉰셋의 초로의 여인이 되었을 때, 그리도 기세등등하던 어머니는 여든셋의나이가 되셨다. 시동생에게서 어머니가 옷이며 이불이며 꺼내서 태우고 자꾸만 불을 놓는다며 아무래도 치매인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어머니가 미웠다. 무엇이 모자라서, 무엇이 부족해서 마지막 까지 이리 무거운 짐을 안겨 주실까. 거대한 파도처럼 나를 덮쳐오는 어머니에 대한 원망을 파도타기 하듯 넘고 또 타고 넘어도, 끝까지 거부할 수 없는 존재로 나를 짓눌러올 어머니의 무게가,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어머니의 존재가 크나큰 두려움으로 해일처럼 덮쳐왔다.

"치매도 여러 가지라 안 카더나, 집 나가고, 음식 탐해서 날마다 밥 굶긴다꼬 며누리 잡고, 베루빡에 똥칠하고, 그란데 저 할매는 하필 온 세상이 바짝 말라 있는 삼동에 불을 놓으꼬? 큰일 내겄따."

치매 병원으로 가야 한다, 그래도 잘사는 자식이 있는데 어마이를 그런데 보낼 수가 있나, 등등, 네 형제와 마을 사람들의 여론은 구구했다.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허둥거리는 새 두 달이 지나고 추위가 더욱 깊어진 이월, 어머니는 시린 손을 녹인다며 더 자주 불을 놓았다. 병원을 물색하고 어머니의 입원이 구체화 될 무렵 엄마의 상황도 나빠지기 시작했지만 고향의 오빠네 가게는 거동이 불편한 엄마를 모실 수 있는 현대식 가옥이 아니었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오빠네가 생업을 접고 엄마의 간병만 할 수가 없는 일이라는 건 우리 다섯 형제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노인 전문 병원을 거론하는 자식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엄마는 눈물을 흘렸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노인 전문 병원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상태이다. 무엇보다 부모님 대다수가 자식들과 함께 살기를 원하고, 요양원으로 가는 일을 자식들로부터 버림당하는 일이라고 괴로워한다. 주변에서도 자식이 있으면서...라고 은연중 자식을 비난하는 공론이 돈다. 그런 편견의 시선 속에서 자식들은 자식들대로 부모를 봉양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빠진다. 그리고 그 편견의 굴레는 누구보다 며느리들이 짊어져야 할 짐이다. 실제로 두 어머니와 가장 밀접한 거리에서 깊은 마음의 갈등을 겪는 두 사람은 양쪽 집의 며느리인 나와, 올케언니였다. 시어머니는 정신만 온전치 못하실 뿐 신체적인 건강 상태는 좋으셨고, 엄마는 거동이 불편 할 뿐 정신이 온전하시니 누군가가 곁에 붙어서 간병하고 보호하면 집에서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맡아서 해야 할 그 누군가는 나와 올케언니였다. 하지만, 두 분을 집에서 모시는 일은 두 며느리의 철저한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나 개인의 모든 생활은 접어두고 한시 반시도 눈을 떼어서는 안 되는 전문 간병인이 되어야 하는 일, 나는 싫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물론 올케언니에게도 엄마의 간병인이 되라고 말할 생각은 없었다.

동갑내기 시누올케인 우리에게 쉰셋의 나이는 마냥 정지해 있는 숫자가 아니었고, 나는, 오랜 기간 나의 생활을 포기한 댓가로 얻게 될 칭송받는 효부의 호칭보다는 나에게 남은 건강한 삶을 소중히 살고 싶었고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올케언니와 나 사이에는 미묘한 감정의 기류가 느껴졌다. 서로가 동병상련의 처지임을 잘 알면서도 나는, 내 시어머니는 치매환자니까 어쩔 수 없다는 당위성을 내세우며 그래도 우리 엄마는 치매는 아닌데 라는 생각을 하고, 올케 언니는 언니대로 내 시어머니의 입원 여부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그런 중에 나 또한 노인전문 병원에 대한 편견에 깊이 빠져있는 사람이란 걸 깨달으면서 "어무이를 그런 곳으로 보내면 남들이 얼마나 우리를 욕 하겄노." 라며 망설이는 오빠에게 "누구라도 아프면 병원으로 가야 하고 우리도 멀지 않아 가게 될 곳이다, 또 응급 사태가 발생할 경우엔 즉각 처치를 받을 수 있으니 오히려 엄마에겐 꼭 필요한 곳이 병원일 수도 있다." 라고 말 할 수 있었다.

이월의 추위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 어머니는 고향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치매 전문 병원으로 가기 위해서 집을 나섰다. 어머니가 꾸려둔 이불 보따리는 간신히 장롱 속으로 밀어 넣었지만 병원에 가서 입을 옷이라며 놓지 않는 배부른 옷 가방은 들고 가야 했다. 집을 돌아보며 어머니는 눈물을 닦았다. 그때만은 맑은 정신으로 "나가 이제 가면 집에 오겄나" 하시며 병원으로 가신 어머니는 날마다 세숫대야를 가방 삼아 옷을 꾸리고 집으로 간다며 하루에도 몇 번씩 병원 문을 나선다고 했다. 간병인이 옷을 감추면 세면도구를 담아서 옆구리에 끼고 병원 밖으로 탈출을 시도 한다는 것이었다. 서너 달 동안 이어지던 간병인과 어머니 사이의 숨바꼭질이 끝나고 병원생활에 적응하면서 어머니에게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잠재된 기억 속에 나는 어떤 존재로 살아 있었던 것일까. 드러내서 표현은 안 했지만 어머니의 가슴에 간직했던 나에 대한 기억들이 모두가 나쁜 것만은 아니었던가 보았다.

"세상에 며느리 보고 싶다고 우는 어른은 이 할머니밖에 없어요. 다른 할머니들은 다 딸보고 싶다고 울고, 손자 보고 싶다고 우는데, 우째 며느리 보고 싶다고 울꼬요. 며느리 자랑이 말도 못해요. 고부가 아주 궁합이 맞는가배요."

어머니는 30여 년동안 나를 미워했던 그 기억들을 꽃잎을 따 내듯 한잎 두잎 따서 망각의 강물에 띄워 보낸 것일까. 조금씩 지난 일을 잊어가는 어머니의 얼굴에서 고난하고 어두웠던 기색도 점점 사라져갔다. 어쩌면 어머니 스스로 자식을 앞세운 그 가혹했던 기억들을 지워 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백지처럼 깨끗한 의식 위에 다복했던 날의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고부의 관계는 어머니의 새로운 의식의 바탕에 다시 그려지는 수묵화였다. 원망과 분노의 색깔이 사라진 흰 종이에 먹물로 그리는 소박한 수묵화. 어머니는 가끔씩의 면회에도 손을 마주 잡고 반겨주고, 내가 사가는 간식이나, 간소한 소지품을 받고서도 어린애처럼 고마워하고 자랑스러워한다. 우리 며느리가 사왔노라며.

이월에 병원으로 간 어머니를 팔월 추석에 집으로 모셔왔다. 삼 일간의 외출이었다. 하루가 채 가기도 전에 어머니는 병원에 가고 싶어 하셨다. "어머니, 병원이 좋습니까?"
"응, 친구들이 많응께 심심찮고 집도 뜨시다. 아푸면 주사 놔주고, 하루 세끼 따신 밥에다가 목욕시키주제, 머리깍아 주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재미있기 논다. 그라고 내 옆에 침대에 있는 아지매 말이다, 너거 외숙모아이가. 우리 올케다. 날 기다릴낀데 가봐야 되겄다. 우짜겋노, 내가 돌봐 주야제. 어뭄아, 니도 아아들 혼인도 시키고 해야 될낀데 인자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살아라. 나는 병원에서 잘 지낸다. 이때꺼정 어뭄 네가 욕?다." 아, 어린 아이 같은 천진한 얼굴로 나를 향해 웃어주는 어머니는 30여 년만에야 마음을 열어 화해를 보내온 것이었다. 어머니는 집에서 이틀 밤을 주무시고 새로 사드린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환자복을 담은 작은 가방을 들고 병원으로 들어가셨다.

지난 3월 13일은 엄마의 91번째 생신이었다. 딸 셋이 의논해서 하루만이라도 집으로 모셔와 함께 밤을 보내기로 약속을 했다. 승용차에도 오르지 못하는 엄마를 휠체어로 모셔온 저녁, 침대에 누운 엄마는 행복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 아이고.. 이뿐 내딸들.. 참 이뿐 내딸들..."

큰 딸이 73살. 작은 딸이 70살 막내 딸이 54살. 91살의 엄마 눈에 이뿐 딸로 비치는 늙은 딸들은 열 살, 일곱 살, 다섯 살 짜리가 되어서 뒹굴며 웃었다. 집에서 생신을 맞는 일이 엄마의 생애 마지막이 되리라는걸 엄마도 딸들도 알고 있었다. 가을철의 나뭇잎처럼 하루가 다르게 쇠락해 가는 엄마, 엄마는 이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을 준비하며 가방을 꾸리는 중일것이다. 엄마의 여행가방에 우리는 단 하룻 밤의 추억을 담아 드리고, 엄마는 그 가방 한켠에 이뿐 세 딸의 모습과 웃음 소리를 곱게 접어 챙겨 넣으셨을까..

엄마의 기저귀가 젖어 있을지도 모르는 오늘, 나는 학교에 가기 위해 책을 챙긴다. 시의 이해, 소설의 이해, 문장연습. 두꺼운 인문학 읽기 책을 가방에 넣는다. 내가 책가방을 챙기는 일은 4년 후면 끝나겠지만 두어머니에 대한 불효와, 죄책감은 내 죽어서도 내려 놓지 못할 무거운 회한의 가방임을 나는 안다. -끝- (2008 여성시대 신춘 편지 쑈. 최우수상)







심사: 소설가 성석재. 시인 나희덕. 시인 안도현.

심사평: 내용의 진실성과 공감대를 우선했다. 그러나 모든 작품은 글로 쓰여지기 때문에 글 을 다룸과 짜임새도 중시했다. (소설가 성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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