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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극단적인 예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인데
이렇게 하느님과 관련된 성당에서만 하느님과 함께 하고
이렇게 세상으로 나오게 되면 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고
이런 태도를 세상을 이분하는 태도라고 그럽니다.
세상을 구분하는 태도.
거룩한 자리 거룩하지 않은 자리를 구분하는 태도라는 겁니다
영적인 자리 세속의 자리를 구분하는 태도.
그럼 우리 주님께서는 구분을 했을까?
주님께서 이 세상을 살아가실 때 영적인 자리와 세속의 자리를 구분 했을까?
아닙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요한 8,29)
여기서 중요한 건 '언제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갔을 때 아니면 기도할 때
그때만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을 한 게 아닙니다.
'언제나' 였습니다
세속의 자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십시오." (1코린 10;31)
바오로 사도, 아까도 봤지만~
먹든지 마시든지에요.
바오로 사도가 이런 식으로 얘기 안 했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든지 기도하든지 그리고 그 밖에 어떤 영적인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x)
이렇게 얘기 안 했습니다.
< 먹든지 마시든지>
그러니까
세속의 자리와 영적인 자리가 따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하는 얘기입니다.
어떤 자매님 아까 얘기했었는데 이번엔 구체적으로 이름을 얘기할게요.
세실리 로즈마리 할락!
"냄비와 밥그릇의 주님, 저는
당신과 함께 철야 기도를 하고, 착한 일을 하고 동이 트는 시간 새벽기도를 하며
하늘 문을 두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 식사 준비와 설거지를 통해서 성인이 되게 하소서. (중략)
제가 정성 담긴 식탁을 차리면서 기도할 수 있도록
제게 필요한 일들을 깨닫게 해 주소서! "(세실리 로즈마리 할락 1898-1938)
제가 밑줄을 그어 났지만요
정성 담긴 식탁을 바쁘게 준비하면서 기도할 수 있도록
어떻게 기도할 수 있어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식탁을 차리는 게 기도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과 속을 구분하지 않게 되면
무엇을 하든 그분과 함께 한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면 이게 기도입니다.
정성을 담긴 식탁을 차리는 데, 그게 기도란 겁니다.
바로 끊임없이 기도하는 거죠.
제가 이제 이해를 돕기 위해서 반복 반복 또 하는 것이죠.
아까 했던 걸 잊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아직 치매 걸릴 나이는 아니거든요. 똑같은 얘기를 하는 거죠.
프라이 팬 위에 달걀을 뒤집을 때도 이게 기도라는 겁니다
좀 전에 제가 로즈마리 할락을 얘기했고요
지금 다시금 또 로렌스 수사님을 얘기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거룩한 자리와 세속의 자리를 구분할 수 없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히려 장소가 거룩한 자리와 세속의 자리를 구분 하진 않습니다.
우리 태도가 구분합니다. 예를 들어 볼게요.
성당은 거룩한 자리죠.
근데 어떤 형제가 정말 성당 가기 싫었어요.
근데 신자 된 의무 때문에 할 수 없이 왔는데요~
그럼 할 수 없이 오면 좀 기쁘게 와야죠.
그냥 할 수 없이 온 거예요. 할 수 없이.
그러니까 벌써 불만이 가득 차 있어요.
신자가 아니면 안 올 텐데 뭐 이런 거 있는 거죠.
그런데 사회자가 이제 시작 성가를 부르자고 하는데
평생 1절만 하던 놈이 2절이 아니라 3절까지 하제?
그러니까 화가 올라와요. 입을 벌리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그냥 억지로 성당 와서 빨리 미사 때우고 가고 싶었는데,
그래서 속으로 저 자식 무슨 3절까지 해?
근데 그다음에 또 봉헌송 5절까지 해?
어떤 자식이 5절까지 작사 작곡 해 가지고!
저절로 그런 욕이 나가요?
자 이사람 거룩한 자리에 있어요, 성당.
근데 전혀 거룩하지 않아요.
우리 마음이 구분하는 겁니다.
상암 월드컵 축구 경기장.
어떻게 보면 세속적인 자리죠.
근데 한 가장이 이제 축구 시합이 있는데 국제전인데,
가족들과 모두 함께 갔어요.
월드컵 경기장에 앉아 있는데 막 눈물까지 나오려고 해요.
왜냐면 가족들이 모두가 건강하고
아직까지 직장을 잘 다니니까 경제적으로 그렇게 쪼들리지 않고
그래서 이렇게 가족과 함께 응원하러 왔다는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운 거예요.
말은 안 하지만 하느님께 저절로 감사한 거야.
거룩한 자리죠!
우리 태도가 그렇게 만들 뿐이지,
실제로 어떤 장소가 거룩한 자리와 거룩하지 않은 자리를 구분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 현존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모든 자리가 거룩한 자리죠.
"구도자가 술집에 들어가면 그 술집은 곧 그의 구도장이 될 것이며
주정뱅이가 구도장에 들어가면 그 구도장은 곧 그의 술집이 될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이 주정뱅이라면 우리는 어딜 가든 술을 마시겠죠.
그런데 우리의 정체성이 하느님 현존을 연습하는 자라면
우리는 어떤 자리에 가든지 그 분과 일치되어 있겠죠.
정체성이라는 것은 내가 누구인가?
내가 누구를 섬기는 사람인가?
내가 어떤 목적으로 사는 사람인가?
내가 어떻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
이런 내 안에 신념을 가리키잖아요.
정체성 이런 것들과 연결되어 있거든요.
누군가가 나에게 물어봐요 여러분에게 물어봐요.
그럴 때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맥락에 따라 좀 다를 겁니다.
아파트 단지에서 어떤 사람이 어디 사세요? 하고 물어본다면
몇 동 몇 호에 산다고 얘기할 겁니다.
학교에 갔을 때
학부모로서 학교에 갔을 때 선생님이 누구세요? 하고 물어보면
여러분 자녀의 이름을 댈겁니다.
누구의 엄마입니다. 아빠입니다. 이렇게 댈 거예요.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어떤 맥락에서 어떤 질문을 받든 지, 누구냐고?
항상 대답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야.'라고 항상!
근거를 제시힐께요.
"나 바오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로마 1,1)
"하느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나는,,," (1코린 1,1}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와,,, (2코린 1,1)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에페 1,1)
다 처음입니다. 다~로마서 1장 1절, 고린도서 1장 1절 다 처음입니다.
정체성입니다
바오로는 자신의 누구인가?
우리도 이제는~
물론 학교에 가서 누구냐고 물어보면 자녀의 이름을 댈 수밖엔 없지만
적어도 내 밑바닥에는, 첫 번째 정체성은 바로 그분의 사람이야.
그분의 사람이죠.
이 정체성이 우리한테 확고할 때, 우리는 거기에 맞갖게 행동을 하게 됩니다.
좀 전에 소개했던 로즈마리 할락의 글을 다시 볼게요.
"정성을 다해 식사를 준비하면서
저와 함께 하는 당신에게 지향을 둘 수 있도록
저에게 필요한 은총을 주소서!" (세실리 로즈마리 할락)
쟝포엘 신부님이라고 시카고 대학에서 심리학 교수였던 분이~
이제 천국 가셨죠.
이분이 독일에서 박사과정을 할 때에 수녀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분이 머물던 손님방을 담당했던 수녀님은 84세 된 할머니 수녀님이에요.
고령의 나이죠.
그런데 이 수녀님이 매일같이 이 손님방을 청소하는데
얼마나 광이 날 정도로 반짝반짝할 정도로 정성을 다해서 청소하는지 모릅니다.
근데 이제 이 30대 젊은 신부로써
수녀님이 이렇게 청소를 할 때 보면 조금 마음이 안 좋아요.
자기가 해도 되는데.
근데 이제 수녀님은 자신의 몫이니까 자신이 하는 건데,
한 번은 쟝포엘 신부님께서
그렇게 걸레질을 열심히 하고 있는 수녀님을 보면서 그랬습니다.
수녀님 좀 대충대충 하면 안 돼요?
그랬더니 수녀님이 걸레질을 하다 말고 멈추고는 일어나더니 정색을 하고
"신부님 하늘나라 건설은 대충대충 하는 거 아니에요."
이 수녀님께 걸레질은 하늘나라 건설이에요. 하느님 섬김이에요.
여러분들이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거 하느님 섬김이에요.
여러분들이 사무실에서 일터에서 수고하는 것. 하느님 섬김이에요.
그러니까 대충대충 할 수 없다 라는 거죠.
이 수녀님은 젊은 날 현장에서 일할 때에도 그렇게 했겠지요.
그러니까 84세가 돼서도
여전히 매일같이 그렇게 윤이 날 정도로 청소를 하는 것이죠.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행위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무시해도 좋을 만큼 하찮은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을 집중하지 않아도 괜찮을 만큼 시시한 일이란 없다." - 헨리 자일스
토마스 머튼은 금세기에 가장 탁월한 영성가라고 얘기하죠.
토마스 머튼 이런 말을 해요.
"여러 가지 말을 듣는 것보다
그 수도자가 빗자루 질 하는 모습을 보면 그 수도자에 대해서 더 잘 알 수 있다."
(토마스 머튼)
지극히 사소한 일을 그가 어떻게 하는가를 통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죠.
사소 하기 때문에 무시해도 좋다. 그런 사람들이 있죠
사소하기에 무시해도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요~
마치 중요한 시합을 앞두지 않는 한은 연습을 하지 않는
그런 선수들과 똑같을 거예요.
중요한 시합이 있으면 그전에 연습을 많이 하잖아요?
근데 그런 시합이 없으면 연습을 안 해요.
그럼 어떻게 될까요?
매일같이 연습을 해야 되는데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아무리 사소하고 때로는 미천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 정체성 때문에 그 일은 사소하고 미천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죠.
모든 것은 우리 정체성에서 출발하니까.
바오로 사도가 한 말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하든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일하듯이 마음을 다 해 하시오.
여러분은 주님으로부터 그 갚음으로 상속을 받으리라는 것을 알아두시오."
(콜로 3,23-24)
보통 우리가 인간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까?
그래서 상사가 바라다볼 때는 열심히 일하고 안바라다 보면 좀 농땡이 치고요.
그렇죠?
근데 지금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거거든요.
주님을 위해서 일하듯이 하라. 정성을 다하라.
그래서 여기서 여러분이 누구죠?
콜로새서 3장 22절에 보면 나옵니다.
"노예인 여러분,
(신자들 중에 노예들이 있어요. 그 노예인 신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바오로가요.)
노예로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하든 주인이 시켜서 할 수 없이 그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듯이 마음을 다 하십시오."
노예의 신분이면서도 최선을 다해서 기쁘게 하면 어떻습니까?
아름답게 보이겠죠. 그렇게 되면 주인의 눈에 들 수가 있을 거예요.
바로 성조 요셉이 그랬어요.
이집트에 노예를 끌러갔던 요셉.
그 요셉이 주인이 보든 말든 최선을 다해서 기쁘게 일했죠.
그게 이렇게 눈에 들어옵니다.
그는 나중에 그 집안 경호대장 집안에 청지기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는 노예 삶의 자기가 갖게 된 그 비극적인 운명에 사로잡혀서
형들을 원망하고 자기 신세를 탓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
이미 벌어진 일이니까
그 노예로서의 자기 삶을 최선을 다해서 했던 것이죠.
그런데 완전히 인생 역전이 벌어진 것이죠.
오래전에 인물이라 실감이 좀 안납니까?
성조 요셉!
그러면 좀 가까운 인물을 좀 소개할게요.
평북 정주 오산이라는 곳에 한 머슴살이하는 젊은이가 있었어요.
근데 요셉과 똑같아요. 신자입니다.
요셉과 똑같아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적이 없습니다.
머슴살이를 부끄러워한 적도 없고요.
열심히 머슴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가 하루 제일 먼저 해야 되는 일이 뭐냐 하면
주인님의 요강을 닦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수세식 이런 게 아니었으니까 방안에 요강을 두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 아침에 제일 먼저 주님의 요강을 닦는데
얼마나 정성을 다해서 깔끔하게 닦는지 어느 순간 주인의 눈에 들어온 겁니다.
그렇게 주인의 눈에 들어오면서 보니까
이 젊은이가 성실할 뿐만 아니라 굉장히 똑똑해요.
그래서 그들은 머슴살이를 시키기는 너무 아까우니까
자신의 양자를 삼아서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래서 숭실학교에 유학을 가서 공부를 했죠.
그리고 나서 나중에 이분은, 독립운동가 조만식 선생님입니다.
요강 잘 닦아서 닦아서 인생역전되었어요.
지극히 비천한 일인데 비천한 일이라고 한 번 생각 안 한거죠.
먹든지 마시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요강을 닦든 밭일을 하든 하느님 영광을 위해서!
그럴 때 또 이런 축복이 오네요.
그걸 기대하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요,
순리가 그래요. 순리가!
어떤 사람이 늘 평온하게 통합되게 최선을 다해서 하면
옆에서 그게 눈에 들어오면 그걸 키워 주고 싶은 거거든요.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한다는 것.
그분과 함께 그분이 기뻐하는 일을 한다는 거.
이것이 이제 우리의 주제지요.
이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가 지향을 하는 겁니다. 지향!
그러니까 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할 때는
우리가 주님을 집중해서 쳐다볼 수 있죠. 집중해서!
그런데
세상 한복판에서 일할 때는 주님을 집중해서 쳐다볼 수는 없어요.
하지만 적어도
우리 마음만큼은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지향을 둘 수 있어요.
단어를 보면서 설명할게요.
성당에서는 우리가 '주목'합니다. Attention 이죠.
하지만 세상 한복판에서는 '지향(Intention)'을 둡니다.
그분 현존 안에서 함께한다는 '지향'이죠.
이 지향을 우리가 계속해서 갖고 살아가는 게 하느님 현존의 연습입니다.
사실 우리들 대다수는 주목하는 시간, Attention 하는 시간은 많지 않을 겁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 중에 2% 밖에 안 됩니다.
Attention 하는 시간은요.
근데요 이 2%의 시간은
순전히 나머지 98% - 지향을 갖고 살아가는 시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제 강의 마무리를 위해서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히루 종일 기도에만 전념하는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이 수도자야 말로 바오로 사도가 얘기한 것처럼
끊임없이 기도하려고 하는 사람이었죠.
그는 하루 종일 기도 생활을 하면서
자기만큼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결국은 물어봅니다.
"하느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너라고 답이 올 줄 알고 물어본 거예요.
근데 엉뚱하게 하느님이
언덕 넘어 오두막집에 살고 있는 나무꾼이다. 그런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너무 놀랬습니다.
그래서 항의를 헸죠.
세상에, 그 나무꾼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숲 속에서 계속 일만 하는데
어떻게 그가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하죠?
그랬더니 하느님이 뭐라고 응답하냐면
"내가 지금 세상 일을 돌보느라 너무 바쁘니까
너가 기름, 지금 기름이 가득 담긴 이 그릇을 들고 마을 한 바퀴 돌고 오렴.
그러면 내가 답을 줄게.
근데 기름 한 방울도 흘리면 안 된다.
그거를 들고서 갔다 오렴. 그러면 내가 답을 줄게."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 수도자가, 하느님의 명이잖아요?
기름을 한 방울도 흘리면 안돼요.
그러니까 온갖 집중을 해서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왔어요.
그리고는
"하느님, 어떻게 그 나무꾼이 당신을 가장 기쁘게 하지요? 답을 주세요."
그랬더니 하느님의 그래요.
"너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나를 몇 번 생각했니?"
한번도 생각 안 했거든요.
이거 흘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을 뿐이거든요.
그랬더니
"그래, 너는 마을 한 바퀴 돌라고 하는데 한 번도 내 생각을 안 하는데
그 나무꾼은 매일같이 세 번 나를 생각한단다."
이 세 번은 Attention이에요. 주목이에요.
"그 나무꾼은 아침에 일어나면
나 앞에서 봉헌의 기도를 바치고
오전 생활이 끝날 때 잠깐 10분 15분 성찰의 기도를 하고
밤에 하루를 마무리할 때, 다시금 10분 15분 성찰 기도를 한단다."
그 말을 해요.
저는 이걸 항상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지금 요 말을요.
왜냐하면 저의 삶이 그렇죠.
아침에 기도 생활을 하고 사실 더 이상 성당에 못 들어가거든요.
계속 학교에서 가리키랴 뭐 하랴 바쁘니까요.
하지만 무엇이 그 분과 함께하는 삶인가를 알기 때문에,
하루 종일 지향을 둡니다.
근데 하루 종일 지향을 두는 것이 이제 흐미하게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이제 중간중간에 그분을 주목하는 건데, 주목!
그게 이제 아침 기도가 있었고, 낮에 성찰 있었고, 밤에 성찰이 있었던 거죠.
이것이 하느님 현존의 연습을 하게 하는 아마 핵심 기둥이 될 겁니다.
우리는 평신도로서 하루 종일 기도 못합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기도하는 비법은 있습니다.
주목의 시간이 있고요. 그다음에 나머지 98% 지향의 시간이 있는 거죠.
영광송으로 끝내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첫댓글
무화.보조작성자 21.03.08 10:49
< 천상의 책
14-31,2
"딸아, 행위에는 선행적인 것과 현행적인 것이 있다.
선행적인 행위는
날이 밝아오는 첫 순간에
영혼 자신의 뜻을 나의 뜻 안에 고정시키고, 오로지
내 의지 안에서 살며 움직이겠다고 결심을 굳힐 때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자신의 모든 행위를
앞질러 내 뜻 안에 미리 흘러들게 하는 것이다.
3 이 선행적인 의지로 그의 모든 행위들이 하나의 행위처럼 되고,
그 안에 내 태양이 떠오르며 내 생명이 배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현행적 행위들을 보완한다.
4 이 선행적인 행위는,
인간적인 방식이나 영혼 자신의 뜻, 자만심. 태만이나
다른 요인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질 수 있다.
그런 것이
태양을 가리는 구름같이 그빛을 약화시키며 지면을 비추게 한다.
5 이와 반대로,
현행적인 행위는 구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구름을 몰아내는 힘이 있다.
좀이라도 구름이 끼어 있으면 더 많은 태양이 떠오르게 하는데
여기에는 내 생명이 배가되어 있어서 빛과 열이 매우 강렬하기 때문에
먼저 있던 것보다 더 아름다운 새 태양들을 그만큼 많이 떠오르게 할 수 있다.
6 하지만 둘 다 필요한 행위들이다.
선행적인 행위는
현행적인 행위를 보조하며 현행적인 행위가 이루어질 기반을 닦고
현행적인 행위는
선행적인 행위의 기반을 보존하며 확장하기 때문이다." >
@테바
<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려는 이들이라면,
하느님과 관계되는 그 어떤 하찮은 것이라도 있다면
어디 그 하찮은 하나를 그냥 내버려두겠습니까
하느님과 관계되는 것이라면
"하느님과 관계되는 하찮은 것"이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느님과 관계되는 하찮은 것"이 있더라도
그 하나하나를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혓 바닥으로 핥아서까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먼지 부스러기라도 삼킬 것입니다. > 위무위
< 19-35 5
너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어라.
극히 사소한 행위 속에서도 내 뜻이 너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내 뜻은 아주 작은 일에서도
그 자신의 신적 생명과 시작과 끝을 가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니,
내 뜻의 나라에 인간의 뜻이 약간이라도 나타나는 것을 참고 보아주지 못하는 것이다.
6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네 뜻의 나라로 자주 나감으로써 너의 품위를 떨어뜨릴 것이고,
이는 내 뜻의 나라에서 살기로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가당찮은 짓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