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아우구스투스의 동상
기원전 27년부터 기원후15세 중엽까지 무려 천 오백년이란 긴 세월동안 맥을 이으며 전 세계를 전차 말발굽아래 굴북-호령하였던 로마제국의 터전을 처음 닦은 황제는 아우구스투스 (Augustus) 라고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아우구스투스는 사실 황제란 칭호를 자신이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온 세계인이 두려워하고 경외하였던 로마제국의 실질적인 첫 황제였다. 그는 자신의 큰 삼촌이며 나중엔 양부가 되었던 로마의 패권자 줄리어스 시저 (Julius Caesar) 가 암살된 후의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때에 권력의 표면에 등장하면서 로마가 공화국 (Republic) 에서 제국 (Empire) 으로 재탄생하는 중차대한 변화기를 주도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강력한 군사력과 (military might), 탁월한 기관군축력 (institution-building) , 또한 뛰어난 법정립력 (law-making) 을 지혜롭고 적절하게 합하여서 로마의 유일한 지도자가 되는데 사용하였으며, 이후 200년간 지속되었던 ‘팍스 로마나’ (Pax Romana) 의 기반을 닦고, 더 나아가서 로마 제국이 천오백년이나 지탱할 수 있었던 터전의 본질을 체계적으로 마련하였던 장본인이 되었다.
독자들은 필자가 왜 아우구스투스와 로마제국의 이름을 거론하는지 궁금해 하실 것이다. 우리 안동문중에 있어서, 더 나아가서 우리 대파인 문양공파에 있어서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같은 중요한 인물이 한 분 계셨으니 바로 이 글의 주인공인 휘 맹진 판중추공 이신 것이다. 판중추공은 목은 선생의 열다섯 손자님들 중 한 분으로 한산이씨 15대파들의 하나인 판중추공파의 파조가 되시는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엔 판중추공은 우리 문중 초창기 역사중 그것도 아주 절박하고 존재와 생존에 있어 위협적이었던 여말선초 격동기에 태어나 활동하시는 가운데, 우리 문중의 안위를 보존하시고 지키시며 나중 후손들이 번성하고 크게 융성하는데 필요한 절대적인 터전과 자리를 마련해 주셨던 고맙고도 불가피하였던 인물이셨다.
행장요약
[참고: '큰 뫼' 에 실린 행장과 기타 자료에서 내용 발췌]
판중추공은 문양공 휘 종덕 선조와 모친되신 정경부인 진주류씨의 네 아들중 막내아들로 1374년 (고려 공민왕 23년) 에 태어나셨다. 자는 계양 (季穰) 이며, 호는 청허재 (淸虛齋) 이다.
공은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럽고 조용하며, 도량이 넓고 소통 (疏通) 했다. 공부를 하기 시작하자 재예 (才藝) 가 특별히 뛰어나고, 문필과 행동이 다 함께 구비했다. 음사로 벼슬에 나가 고려말에 비서랑 (祕書郞) 이 되었다.
15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 문양공이 비명에 돌아가시자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렀는데 사람들은 공의 행동을 보고 성인 (成人) 과 다름없다고 칭송하였다. 4년뒤인 1392년, 공께서 19세되실 때에는 숙부 휘 종학 인재공 (둘째집) 께서도 비참하게 최후를 마쳐 돌아가시니 나라가 망하는 통에 집안이 풍비박산나면서 집안 사정이 이 때 얼마나 비통했는가는 쉽게 짐작이 갈 수 있다.
이듬해 1393년 (태조2) 5월 22일 (혹은 28일), 어머님 정경부인 진주유씨가 남편 문양공을 비명에 잃고 생고생만 하시다 한 많은 세상을 떠나신다. 정경부인 진주유씨의 나이 이때 45세였다.
공은 이렇게해서 15세일때 아버님을 여의고 20세에 어머님마저 잃게 된다.
또 이듬해 1394년 8월 1일, 두 아드님들을 먼저 보내시고 맘고생하시던 할머님 안동권씨가 돌아가신다. 그리고, 1396년 공께서 23세되실 때 5월 7일, 할아버님인 목은께서 파란만장한
그 대생애에 작별을 고하신다. 고려말-조선왕조건국 시기는 이렇게 해서 한산이씨 집안에게 풍전등화같은 아슬아슬한 때였다.
목은의 1남 문양공이 비명에 사망하는것을 시작으로 4년후엔 2남 인재공이 또한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고 맏 며느리-할머님 사망이 잇따랐고, 모든 집안 식구들이 온갖 고생과 풍파세월을 거치며 손자가족 중 일부는 멀리 (현 이북지역으로) 피난을 가기도 한 것이다.
결국 집안의 정신적 지주고 버팀목이셨던 목은께서 최후에 또 비명에 사망하시니 집안의 안정과 생존이 급선무로 대두되었다.
집안에 유일하게 남았던 목은의 3남 양경공이 아버님의 유언과 빙장되는 양촌선생의 권유를
물리 칠 수 없는 절박한 때였고, 뒷 날 태종이 목은을 복권시키며 그 충절을 현양하게하자 양경공이 조선의 벼슬을 받아들여 재상반열에 오르며 새 왕조에 입조하게 된다. 집안을 살리고 가문을 다시 일으켜야했다.
판중추공 자신은 조선이 건국하자 일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태조 말년에는 시직을 제수 받았다. 그리고 문과 (文科) 에 급제하였다.
이후 성균악정 (成均樂正) 을 거쳐 김포군수 (金浦郡守) 로 임명되어 나가셨는데 공무에 있어서 상벌을 밝히는 것이 몹시 엄하고 분명하여 고질이 되었던 그 지방의 병통을 바로 고쳐 잡으니 그 지방 인사들이 읍지를 만들어 그 사실을 기록했다.
조정으로 다시 돌아와서 한림, 검상, 성균관 직강, 사헌부 지평을 거쳐 통정품계에 올랐고, 다시 외직으로 진주에 나갔다.
진주는 고울이 크고 인심이 사나왔던 곳이었는데 공께서는 우선 그 풍속을 바로잡고 토호들의 교활한 모습을 바로잡는 일에 힘써서 백성들의 괴로와하는 바를 고쳐주고, 선비들이 학문에 힘쓰도록 권장하였다. 이렇게 3년을 지나자 정치가 잘 되고, 백성들의 생활이 편안해졌다 한다.
또 공께서는 틈틈히 풍월을 노래하며 시작도 하셔서 천수의 시를 남겼으나 애석하게도 병화로 타서 몇 편만이 전한다.
태종 10년 (1410) 에는 형조좌랑 (刑曹佐郞) 의 직에 올랐다. 그러나 이해 6월에는 예문관제학 (藝文館提學) 변계랑 (卞季良) 의 제를 잘못 처리하였다 하여 원주 (原州) 에 유배되었으나 얼마 후 풀려 나왔고, 태종 14년 (1414) 에는 사헌부지평 (司憲府地坪) 이 되었다. 이때 공은 이양우 (李良祐) 와 방간 (芳幹) 의 죄를 논하여 이들을 처벌하도록 건의하였다가 도리어 죄를 입어 충주 (忠州) 에 안치되었다.
이후 풀려나셔서 조정으로 다시 돌아 오셔서 추밀직 우대언 (樞密職右代言) 에 임명되었는데 높은 이론으로 임금의 총명을 돕고, 진현관 제학 (進賢館提學) 에 제수되어서는 당대의 경술에 능한 선비들을 뽑아 국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명나라에서 정당문학 지서연 한성부판사를 제수받고 경창군에 봉해졌다. 이 때에 명 (明) 나라 예학사 겸 (=倪謙) 이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는데 공은 명령을 받고 접반사가 되어 잔치하고 대접하는것이 예수가 법도에 맞게하니 예학사 겸 (謙)이 공을 매우 공경하였다 한다.
태종 15년에는 의금부도사 (義禁莩事) 가 되었는데, 다음해 정월에는 왕명을 받들어 원주에 가서 이곳에 유배되어 있던 민무회 (閔無悔) 와 민무휼 (閔無恤) 을 도망가지 못하게 굳게 지키도록 목사 (牧使) 권우 (權遇) 에게 전언하였다.
세종 9년 (1427) 에는 동부대언 (同副代言) 에 제수되었고, 세종 11년 (1429) 에는 우부대언 (右府代言) 이 되었다. 이어 우대언 (右代言) 을 거쳐세종 12년 윤 12월에는 호조참판 (戶曺參判) 이 되었다. 다음해 2월에는 하례사 (賀禮使) 가 되어 명 (明) 에 갔으며, 세종 13년 5월에는 형조참판 (刑曺參判) 이 되었다.
이후 경창부윤 (慶昌府尹) 과 한성부윤 (漢城府尹) 을 지내고, 세종 15년 (1433) 에는 중추원부사 (中樞院府使) 가 되어 진헌사 (進獻使) 로 명 (明) 에 갔다. 세종 19년 (1437) 에는 판의주목사 (判義州牧使) 로 출보하였으며, 세종 21년 (1439) 에는 동지중추원사 (同知中樞院事) 가 되었고, 얼마후 호조참판 (戶曺參判)이 되었다. 다음해 5월에는 개성부부유수 (開城府副留守) 가 되었고, 세종 24년(1442) 에는 다시 경창부윤 (慶昌府尹) 에 배수되어 진위사 (陳慰史) 로 명 (明) 에 다녀왔다.
다음해에 전라도 도관찰사 (全羅道都觀察使) 로 출보하였고, 세종 26년 7월에는 지중추원사 (知中樞院事) 가 되었으며 이해 10월에는 판한성부사 (判漢城府事) 를 제수받았다. 다음해에는 함길도 도관찰사 (咸吉道 都觀察使) 로 출보하였고, 세종 30년 (1448) 에는 다시 판한성부사 (判漢城府事) 가 되었다.
판한성부사 혹은 한성부판윤 (漢城府判尹) 은 조선 시대 한성부를 다스리던 정2품의 관직으로서, 품계는 자헌대부 이상의 품계에 해당되었다. 행정과 사법 업무를 겸하였다. 육조의 판서, 좌참찬, 우참찬과 함께 9경으로도 부른다. 한성부의 관할구역상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 서울중앙지방법원장, 서울중앙지방검찰청검사장에 해당한다. 그 직책의 중요성때문에 임금은 아무에게나 이 직책을 맡기지 않았으며,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관리에게만 이 직이 임명되었다. 또한 임직기간도 오래 가지 못하는게 관례였었다.
형님되신 휘 맹균 문혜공 또한 두 번에 걸쳐 판한성부사직에 임직하신 일이 있다.
다음해에는 의금부제조 (義禁府提調) 가 되었고, 단종 즉위년 (1452) 에는 판중추원사 (判中樞院使) 를 제수 받았다.
이렇듯 판중추공은 격동기인 여말선초를 무사히 넘기며 새왕조인 조선조에 들어와 여러 중차대한 요직에 오르며 관료생활을 오랜 세월 하는 동안에 조정의 신뢰와 믿음을 얻고, 선대에 잠시 내려 않았던 집안을 다시 일으키고 나중 후손들이 기댈수 있는 확고한 터전과 기반을 마련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되다
그런데 1456년, 공의 나이 83세되던 해 6월 2일에 사육신의 난이 터진다.
이 때 6촌형인 사육신 휘 개 (塏) 백옥헌공 (白玉軒公) 과 함께 뜻을 같이 했던 공의 2남 휘 유기 (裕基) 도총진무 (都摠鎭撫) 가 비참하게 형장의 이슬로 최후를 마치며 순절하는데, 박팽년 (朴耆年) 의 아우 박대년 (朴大年) 과 성삼문 (成三問) 의 아우들인 성삼성 ((成三省), 성삼고 (成三顧) 등과 함께 6월 21일에 거열 (車裂)로 능지처참되어 3일동안 저자에 그 머리가 효수된다. 아버지의 심정으로 자식의 살이 갈갈이 찢어지는 것을 경험하였으니 그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고 피눈물나는 비통한 순간이 아니었겠는가?
도총진무공과 사육신공 및 그 아들들은 모두 부친들과 함께 죽음을 당했고 아내와 딸들, 그리고 누이들까지도 관비가 되어대신들에게 나누어지게 된다. [참고: 도총진무공의 아들 중 한 명이 살아 남았음. 족보에 휘 은산 (銀山) 으로 올라가 있으며 대가 끊이지 않고 후세까지 이어졌음]
집안의 며느리들은 모두 당대 명문 사대부집안의 따님들로 귀하게 자라며 만년까지 복을 누렸는데 하루 아침에 노비가 된것이다.
[참고: 훗날 도총진무공의 부인과 따님들은 모두 풀려났고 따님들은 나중에 벼슬한 사대부
집안으로 출가하여 자손들을 남기며 복을 다 누렸음]
다행히 민심을 고려한 세조의 특명으로 판중추공은 부자연좌죄에서 풀려나 목슴을 건지나
아들과 손자가 비참하게 죽고 출가한 딸들과 며느리, 손녀딸들이 노비가 되는 비참한 광경을 목격한 공은, 결국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7월 2일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신다. 단종복위사건이 터지고 나서 딱 한달후에 공이 목숨을 잃으신 것이다.
결론
판중추공은 한산이씨 집안의 파란만장했던 고려말과 조선등극시기에 태어나 성년으로 자라며 개인적으로 뼈에 사무치는 많은 시련을 겪었고, 학문과 인품을 인정받아 조선조에 등제하여서는 함경감사, 이조참판, 한성부윤, 제학, 정당문학, 좌찬성 등등의 두루 내외 요직과 많은 문한을 거치며 결국엔 지위가 태보 (太保)의 숭정대부 판중추원사 (崇政大夫 判中樞院事) 에 이르렀다.
말년엔 단종복위거사로 인하여 개인적으로 비참한 체험도 하시고 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으셨지만, 공께선 83세라는 긴 향수를 사시며 후손들이 나중 기댈수 있는 탄탄한 터전을 이룩하셨다. 이후 공의 후손들은 판중추공파란 주류파를 이루며 조선조에서 크게 번성하고 현달하였는데 훌륭하고 출중한 인물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으니, 이 어찌 이루어진 것이 공의 덕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 현대에 이르기까지 공의 후손들은 각지와 각처에서 각각 맡은 자리에서 성실한 사회의 일원으로 그 맥을 이어 가며 문중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공의 부인은 지안성군사 (知安城郡事) 를 지낸 윤충보 (尹忠輔)의 따님이요, 사헌부지평 (司憲府持平) 을 지낸 윤식 (尹湜) 의 손녀요, 문간공 (文簡公) 광양 (光陽) 이무방( 李茂芳) 의 외손녀인 정경부인 무송윤씨 (貞敬夫人 茂松尹氏, 1375~1437) 이다. 슬하에 4남을 두셨는데, 1남은 휘 연기 (衍基) 판제용감사공 (判濟用 監事公) 이요, 2남 휘 유기 (裕基) 도총진무공 (都摠鎭撫公) 은 맏형 휘 맹유 사윤공 (司尹公)에게 3남 휘 보기 (保基) 부정공 (副正公)은 중형 (仲兄) 휘 맹균 문혜공 (文惠公) 께 각각 출계 (出系) 하였다. 4남은 휘 순기 (保基) 참봉공 (參奉公) 이다. 안동 수은공파 (해산공파) 및 창곡공파는 공의 1남인 휘 연기 판제용감사공에서 파생하였다.
판중추공의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소남면 홍화리 오리능(吳李陵) 부인의 묘하 (墓下)에 곤좌 (坤坐) 하였다. 남북 분단으로 갈 수 없는 곳이기에 기산면 영모리 산 2-2에 공과 배위 정경부인 무송윤씨 두분을 위한 제단 (祭壇) 을 마련하였다.
서울시 수송동에 있는 한산이씨 대종회 건물. 이 건물과 대지는 원래 판중추공파 후손들에게 상속되어 내려오던 문중의 땅이었다.
수송동에 건립되어 있는 목은 선생 영당
판중추공 제단
첫댓글 얼마전 다시 읽은 판중추공 행장전과 이십년전쯤 써 놓았던 글을 토대로 판중추공의 후손으로서 공의 삶을 잠시 다시 살펴 보았습니다.
수고하셨군요.차분히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부분적으로 희미하게 알던 것을 소상히 알 수 있어 마음이 흐뭇합니다. 한산이문 카페에서 퍼갔습니다. 충주 孝遠
부족한데 감사히 읽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좀 더 신경썼어야하는데 앞으로 더 노력하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