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봄! 엘루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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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음을.(3)
내 귀가 어떻게 된 게 아니라면,
지금 이 녀석이 나한테.. 한 말이....
"너, 너. 무슨 농담을 그렇게 살벌하게 하니."
애써 웃음 지으며 녀석의 말을 흘리고 눈치를 살피면,
잠시 나에게 향했던 시선조차도 거두어내는 녀석.
내 말을 기점으로,
"....."
"........"
석고마냥 굳은 나와,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는 녀석의 사이에서 생겨난 정적.
끝이 없는 정적이 계속 되고,
끝이 없는 침묵이 계속 되고.
순간 접착제라도 바른 것처럼 굳은 내 발은 떨어질 지를 모르고.
.....
무슨 말이라도 해서 분위기를 띄워야 해.
아무 말이나 생각해봐, 한봄.
이 어색한 분위기를 잠재울 수 있는.
"방금 들은 건. 못 들은 걸로 할게."
"....."
무슨 말을 꺼내야 어색하지 않을까.
무슨 말을 해야 녀석과의 거리가 좁혀질까.
고민하던 그때.
반쯤 마른 짙은 현담의 다갈색의 머리가 내 눈에 비치고,
"니 머리 염색한거니?"
라고 비교적 발랄한 목소리로 녀석에게 물으면,
창문 밖을 향해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내게로 옮기는 녀석.
기분 탓인지 아까보다 더 차가워진 것 같은 녀석의 눈동자.
그리고 그대로 행동하는 녀석의 입.
"나한테 신경 꺼줘."
라고.
신경 꺼달라고?
지금 그러니까 니가 나한테 나가달라는 거 맞지?
"그렇게 무섭게 굴지 말고......."
한참을 고민해서 겨우 내뱉은 말이 겨우 이거라니.
한대 칠 기세에 한봄이 무너져 내리는구나.
녀석과 나 사이에 있는 보이지 않는 벽.
그 안과 밖의 너무나도 다른 세계.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데, 손대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는 녀석인데.
느껴지는 심리적인 거리감.
쉽게 다가갈 수 없게 만드는 이 녀석의 벽.
두꺼운 벽...
그리고 그 벽을 깰 수 있는 누군가의 등장.
"왕자님, 술래잡기 안할거야?"
귀여운 목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빼꼼히 고개만 들이미는 세라.
그리고 망부석처럼 굳어버린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방 안으로 종종 들어오는 세라.
하지만 나를 향해.
"왕자님, 내 거야."
라며 나를 문 밖으로 내쫓는다.
쾅.
하고 닫히는 문을 마지막으로 생긴 녀석과 나의 벽.
문이라는 벽을 사이에 두고 물리적인 힘에 의해 밖으로 쫓겨난 나.
7살 여자 아이의 힘이 세면 얼마나 세겠냐만은,
못 이기는 척, 나는 어느새 제 발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
진짜로.
유유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아직 장현담이라는 녀석은 내게 너무나도 두려운 존재였기에.
저러다가 저 녀석이 화나서 나를 때리기라도 하면 어쩔거야.
쪽팔리게 울거야, 어쩔거야.
됐어.
내가 조금 비굴해지더라도 녀석을 구슬리는 방향을 택하자.
자유와 평화를 존중하는 사회에서는 솔로몬도 나같은 선택을 했을거야.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시키고,
내 방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세라와 장현담이 있는 방 안이 궁금해진다.
악마같은 녀석.
무슨 수로 우리 세라를 꼬셔낸건지.
세라를 닮은 종종 걸음으로, 방을 향해 살금살금.
도둑놈처럼 살금살금.
그리고 문 앞에 귀를 살짝 가져다대면.
오오. 들린다, 들려. 작게 나마 들린다.
재수없는 장현담의 목소리.
뭐가 좋은지 깔깔거리며 웃는 세라의 웃음소리.
하지만 그것도 잠시
"왕자님 우리 술래잡기 놀이 해."
라는 세라의 목소리와 함께
문을 확 열어재끼는 힘에 의해 앞으로 고꾸라져 버린 나.
덕분에 쪽팔리게 어정쩡한 포즈로 녀석의 방 안으로 슛,
골인~!
골인을 축하하며, 피날레라도 해야할 판국에
"봄이 언니, 뭐하는거야?"
라는 세라의 목소리.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어보면,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 세라와 무표정의 장현담.
'또 너냐.'
하는 표정의 장현담.
눈동자만 살그머니 피하고, 할 수 있는 건 그저 웃는 것 뿐.
쪽팔려서 한번 웃고,
민망해서 한번 웃고.
"이렇게, 이렇게 문에 납작하게 붙어있으면 이게 그렇게 좋다네?"
"......."
영 반응이 없는 둘.
안쓰럽게 쳐다보기 바쁘다.
"진짜야."
"......"
"이게 그렇게 건강에 좋다네?"
그리고 피티 체조를 해보이며 내 방으로 뒷걸음질 친다.
스텝이 꼬여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 한 걸음으로
겨우겨우 내 방에 도착해서야 한숨 돌린다.
장현담.
너는 유딩이라서 유딩 세라랑 노는걸 좋아하잖아?
하지만 내가 누구겠어.
천하의 한봄 아니시겠냐구.
그리고 앞으로는 사회복지사가 될 몸이고 말이야.
내 방 안에 틀어 박혀 어떻게하면 장현담과 친해질 수 있을까
생각하던 저녁 식사 시간.
생각보다 조용한 식사 분위기.
이모부, 이모, 세라. 그리고 눈엣 가시인 장현담 녀석.
물론 세라의 웃음 소리와
옹알이에 지나지 않는 우물거림을 제외하곤.
숫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분위기를 유지하다가
어색한 분위기에 이모부가 먼저 입을 여신다.
"우리 봄이는 그새 더 이뻐지고, 아주 숙녀가 다 됐네.
얌전해지고."
칭찬에 미소로 답하며,
무심코 장현담 녀석에게 시선을 향했을 때.
나를 보고는 또 입꼬리를 올려 버릇없게 비웃는 녀석. 저 이중 인격자.
장현담이 아까 내게 꺼낸 말이 아직도 마음에 걸려서,
녀석의 눈치만 살피느라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정신 없는 나와는 아주 다르게.
순한 양이 되어 식사를 하는 저 자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는 선인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삼고,
사회 복지사의 자질을 걸고,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으마.
"아, 맞다. 이 근처에 아르바이트 할 만한 곳 없을까요?"
인천에 실습 오기 위해,
피자 가게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어서인지
언젠가 아르바이트 하나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중.
물론 그런 것은 변명일 뿐.
진심은.
학교 끝나면 동해번쩍 서해번쩍 이모네 집에 들이닥칠
장현담 녀석과 맞딱뜨리고 싶지가 않아서.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구, 더러워서 피하지.
"아르바이트 찾아다닐 게 뭐 있니?"
숫가락까지 식탁에 내려놓고 말씀하시는 이모.
그리고 이모부를 향해,
"당신 비디오 가게 인력 부족하다고 했잖아요.
봄이 시켜요. 가깝고 좋겠네."
이모가 이모부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
"그래, 멀리 찾아다니지 말고,
이모부 비디오 가게 아르바이트를 하는 거 어떻게 생각하니?"
라고 물음을 주시는 이모부였다.
"네, 할게요. 당연히 봐드려야죠.
아르바이트 하면서, 남는 시간 세라도 보구요."
오케이, 좋았어.
이로써 장현담 녀석의 얼굴을 자주 보지 않아도 되니
참말로 좋구나.
"현담이는 요즘 사고치고 다니지 않지?
집에는 별 문제 없고?"
이번엔 묵묵히 밥만 떠 먹고 있던 장현담에게로
화제가 옮겨졌고,
오늘도 장현담의 소매치기 현장을 목격한 바가 있으니,
양심이 있다면 거짓말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입가에 미소가 돌던 장현담에게서 튀어 나온 그 말은.
"그럼요. 당연하죠!"
였다.
그럼요. 당연하죠.
그럼요. 당연하죠.
그럼요. 당연하죠. 였다.
양심에 털난 놈 같으니라구.
내가 두 눈 새파랗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아주 당당히도 거짓말을 하는구나?
"봄아, 여기 적응은 잘 되니?
물론 현담이가 착해서 잘 대해주겠지만."
이모의 물음.
내가 여간 걱정되었나 보다.
"저 적응 못하겠어요.
장현담이 착한 세라까지 꼬드겨서 저를 괴롭히는데,
못살겠어요.!!!!!!!!! 저 녀석을 내쫓아주세요!!!!!!"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아까부터 나를 향하는 장현담 녀석의 시선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는 약자.
힘없는 약자.
붕어처럼 입만 뻐끔뻐끔 거리는
나는 힘없는 약자.
아아, 약자라네.
...
"엄마, 고기 줘. 꼬기! 꼬기!"
이모의 소매를 붙잡고 늘어지는 세라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가 들리는 목소리에 깜짝.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장현담의 목소리.
먼저 자리를 뜨는 장현담. 드디어 숨 좀 쉬고 밥을 먹겠구나.
도 잠시,
"봄아, 밥 먹고 이모랑 얘기 좀 하자."
장현담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모.
나 역시나 밥을 숨가쁘게 먹고 나면,
이모는 내 팔을 잡아 이끌고 베란다로 향했다.
"현담이 얘긴데..."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이모.
그리고 보니까 나는 장현담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 녀석의 이름 장현담 세글자만 알 뿐.
나머지는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아는 것도 없었을 뿐더러,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 녀석이 나에게 강한 벽을 만들어버려서, 알 수도 없었다.
.......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상처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석의 이야기.
..
"사정 때문에 학교를 2년이나 쉬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지금 너랑 같은 나이인데도 고등학교 2학년이야.
학교 안다니겠다는 거 겨우겨우 설득해서 복학 시켜놨는데,
언제 갑자기 학교를 그만두게 될지 모르거든.
그래도 착한 편이라서 내 말은 고분고분 잘 듣는데......"
잠시 망설이는 이모.
"오늘도 낮에 사고를 친 모양이더라고.
현담이가 사고를 치면 이 쪽으로 전화오게 해놨는데...
아무래도 봄이 네가 도와줘야겠어."
그리고 이모의 부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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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한봄! 엘루를 부탁해.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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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2.21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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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현담이 나오는부분 읽을때마다 두근두근거려~~ ♡
이모가 뭐라고 부탁할지.... 왠지 기막힌 부탁을 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