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다산초당을 찾아서
정인한의원장
현송 정 영목
평화로운 해남을 떠나,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중의 한분이신 다산 정약용선생의
18년 유배지인 강진에 들렀습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다산은 참으로 위대한
분입니다. 우리 모두가 존경을 드리고 흠숭하여야 할 분입니다.
다산 정약용선생은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서, 1801년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둘째형 정약전(1785년~1821년)은 흑산도로 다산선생은 이곳 강진으로 유배되어 18년 동안
강진에서 유배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유배생활은 강진읍 동문안 주막에서 4년을 거주하고
고성사 보은산방에서 2년, 목리 이청이란 제자집에서 2년등 8년을 읍내에서 지내셨으며,
1801년 봄에 도암면 귤동마을 외족인 윤단(1744~1821)등 해남 윤씨들의 배려로 이곳 초당으로
이거하여 10년 동안 생활하면서 후학을 가르치고 제자 18명과 함께 500여권의 책을 저술하였
습니다.
1818년(당시 나이58세)에 해배되어 귀향한 후, 미완성된 책을 마무리하면서 여생을 보내시다
1836년 당년 75세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 다산 정약용선생 초상화 ]
다산초당은 강진읍으로부터 서쪽으로 약 10km 지점인 만덕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강진만과 서남해의 여러섬이 아울러지면서 화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천혜의 명소
로 일컬어지는 곳입니다.
원래는 다산선생이 10년동안 기거하였던 곳으로 건물이 너무 낡고 폐허화된 곳을1955년
다산유적기념복원사업회 회원들이 뜻을 모아 이듬해인 1956년 현 건물을 재건축하여 1957년
본당을 복원하였고,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 10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1975년~1976년 동암
서암, 천일각을 추가 복원하였으며, 1996년 9월 2일 정다산 유적지 관리사무소를 개소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실학의 산실인 이곳 다산초당은 다산선생께서 많은 책을 저술하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곳으로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길이 보존되어야 하겠으며, 학문적으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한 곳이
기도 합니다.
한편, 다산초당 주변 야산에는 다산선생이 평소 즐겨 마셨던 야생녹차가 산재되어 봄이면 녹차
수확에 많은 인파가 다녀가고 있으며, 인근 산과 바다의 자연환경이 오염되지 않아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탄성이 절로 나오기도 한답니다.
[ 다산이 개발한 거중기로 화성축조하는 광경 ]
다산 정약용(1762~1836)선생은 조선후기의 대학자로 1762년(영조38)6월 16일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마을(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아버지 나주 정씨 재원,
어머니 해남 윤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관명은 약용(若鏞), 자는 미용·송보, 호는 다산·삼미자·사암, 당호는 여유당, 시호는 무도공
입니다. 성호 이익의 유고를 본 이후 민생을 위한 경세치용의 학문에 뜻을 두고 당시의 새로
운 학문인 서학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1785년(정조13)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으나 다음해에 천주교인이라 하여 충청도 혜미로 귀양을 갔다가 10일만에 풀려났습니다.
1792년(정조16)에 홍문관 수찬이 된 후 성제와 기중도설을 지어 거중기와 녹로를 제작해 수원의
화성축조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1794년(정조18)에 경기도 암행어사, 1795년(정조19)에 병조참의
우부승지가 되었으며, 형 약전(若銓)과 함께 중국인 신부 주문모 사건에 연류되어 충청도 금정찰방
으로 좌천되기도 했습니다. 그 후 규영부 교서가 되어 규장각에서 여러 서적을 간행하였으며 우리
나라 처음으로 종두법을 소개한 마과회통 12권을 저술하였습니다.
1801년(순조1) 신유사옥과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어 18년간(1801~1818)의
유배생활을 하면서 실학에 전념하여 학문적 체계를 완성하고, 국가의 재정관리를 제도와 정책면에서
개혁을 촉구하는 내용의 경세유표 40권, 관리의 청백하고 근검하는 목민관의 도리를 적은 내용의
목민심서 48권 등 많은 저술활동을 통해 정치, 경제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습니다.
1818년(순조18)유배지인 강진에서 풀려난 다산은 고향인 경기도 광주 마현
마을에 돌아가 계속하여 흠흠신서 30권과 아언각비 3권 등 저술에 전념하다가, 1836년(헌종2) 2월
22일 75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별세하였습니다. 1710년(순종4) 정2품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에 추증
되었습니다.
[ 다산과 다미안의 만남 ]
학맥으로 이황(李滉)의 제자와 지역적으로 경상좌도의 기반에서 성장한 사림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시비의 분별보다 정파간의 협동에 의한 정국의 안정에 중점을 두는 입장을 지녔으며, 임진왜란
중에 서인·북인 세력과 공존하면서 정국을 주도해 전란 극복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대체로 국왕권의 강화와 소농민의 안정을 추구하는 입장을 지키면서, 국왕보다 사족(士族)의
정치 주도권을 강조하는 서인과 이념적으로 대조되었습니다. 특히 17세기 이후로는 유형원·이익
·정약용으로 대표되는 실학파의 한 흐름을 배출하였습니다.
[ 다산초당 올라 가는 길 ]
[ 다산초당 앞에서 ]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이 18년의 강진 유배생활중 10여년간의 안식처가 되었고 [목민심서]
를 집필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큰길을 지나 귤동마을을 들어서 10분정도 산속 오솔길을 걸어
92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계단의 마지막에 다산초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솔길 초입에서부터
다산의 강직함을 말해주듯 적송(赤松)숲과 하늘을 찌를 듯한 대나무 숲을 만나게 됩니다.
또한 다산에게 세상을 거꾸로 보기를 가르쳐 줬던 민초들의 넋이 살아 있는 듯 제 멋대로 뒤틀린
고목이며 거칠게 앙상한 뿌리를 드러낸 나무숲길을 걷게 되기도 합니다.
[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한 보정산방 ]
[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한 다산초당 ]
다산초당을 처음 방문하면 대부분 “어라! 초당이 왠 기와집?” 하고 의아해 하겠지만 1958년
강진 다산 유적보존회에서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그위에 정면3칸, 측면1칸의 팔작 기와집을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초당에는 ‘다산초당’ 과 ‘보정산방’ 이라는 두점의 현판 글씨가
걸려있는데 둘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한 것입니다. 이곳은 다산초당, 동암, 천일각 등의
건물과 다산사경이라 부르는 정석, 약천, 다조, 연지석가산 등의 유적이 있습니다.
동암은 초당에서 남동쪽으로 약 40여보 거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면3칸, 측면1칸의 기와집
입니다. 다산동암이라 현판에 판각된 글씨는 다산 정약용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것입니다.
서암은 제자들의 유숙처였으며,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하였다고 하여 일명[다성각]
이라고도 부르는데, 1975년에 복원하였습니다.
[ 제자들의 유숙처인 다성각 ]
[ 가족이 그리울 때나, 글쓰기 위하여 사색을 하며 찾던 곳, 천일각 ]
천일각은 동암에서 조금 올라가면 목조 건물인[천일각]이 있는데, 흑산도로 유배간 둘째형 [약전]
을 그리며 심회를 달래던 곳으로 정면과 측면이 한칸씩인 누각입니다. 이곳은 날씨가 좋으면 멀리
완도쪽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다조는 마당앞에 놓여있는 평평한 돌로 ‘차를 끓이는
부뚜막’ 이란 뜻이며 주위에서 자생하는 차잎을 따다 그늘에 말린 후,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끓였던
반석입니다.
약천(藥泉)은 초당 뒤편에 있는 샘으로 다산 선생께서 직접 수맥을 잡아 만들었으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항상 맑은 약수가 솟아 나오고 있습니다. 초당서편 뒤쪽에는 해배(解配)를 앞두고
발자취를 남기는 뜻으로 선생께서 직접[丁石]이란 글씨를 새긴 바위가 있습니다.
[ 정석 (丁石)앞에서 ]
연지석가산(蓮地石假山)이란 초당 옆에 있는 연못은 1808년 봄, 다산 선생께서 이곳으로 이주
하여 바닷가의 돌을 가져다가 만든 연못으로, 연못 가운데 조그만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 하고
나무홈통을 이용하여 산속물을 떨어지게 만들어 ‘비류폭포’ 라 이름하였다. 이 연못에는 잉어를
길렀으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도 잉어가 얼마나 자랐는지를 묻는
구절이 담겨 있어 다산의 섬세함을 엿보게도 합니다.
천일각(天一閣)은 동암에서 조금 위쪽에 있는 목조건물인데, 흑산도로 유배간 둘째형 [약전]을
그리며 심회를 달래던 곳으로 정면과 측면이 한칸씩인 누각입니다. 이곳은 날씨가 좋으면 멀리
완도쪽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고산 윤선도의 후손인 전.강진군수 윤동환씨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