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대 세조(世祖)
능호 : 광릉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부평리 산100-1
지정번호 : 사적 제197호
조성시기 : 1468년(예종 1)
능의구성
광릉은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봉안하고 두 능의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형식인 동원이강(同原異岡)릉으로서, 이러한 형태의 능으로는 최초로 조영되었다.
좌측 능선의 봉분이 세조의 능이며 오른쪽의 봉분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광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간소하게 조영되었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세조의 유언에 따라 이전까지 석실로 되어 있던 능을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부역 인원을 반으로 줄이고 비용을 절감하였다.
또한 봉분 주위에 둘렀던 병풍석을 없애면서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신상은 난간의 동자석주에 옮겨 새기는 등의 상설 제도를 개혁하였다.
능하구역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참도가 생략되어 있다. 이렇게 간소하게 개혁된 상설제도는 이후의 왕릉 조성에 모범이 되었다.
능의역사 세조의 능은 서울로부터 다소 떨어지고 골이 깊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다.
광릉자리는 원래 다른 이의 묘자리였으나 풍수상 길지라 하여 묘자리의 주인이 세조에게 바쳤다고 전해지며 일부 풍수가들은 세조의 광릉 자리가 좋아 조선 500여 년을 세조의 후손들이 통치하였다고 전하기도 한다.
1468년(예종 즉위) 11월 28일 주엽산 아래 세조를 예장하고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483년(성종 14) 3월 30일 정희왕후가 승하하자 같은 해 6월 12일 광릉 동쪽 언덕에 예장하였다.
세조
생몰년도 : 1417년 ~ 1468년
재위기간 : 1455년 ~ 1468년
생애이야기
세조는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1417년(태종 17) 9월 29일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대군 시절, 세종의 명을 받아 불교 서적 번역을 관장하고, 향악의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으며, 1452년(문종 2) 관습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문종이 승하하고 나이어린 조카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측근인 권람, 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1453년(단종 1)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선 7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왕권의 강화를 위하여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전제왕권제에 가까운 육조직계제를 단행했으며, 집현전을 폐지하고 경연을 없앴다.
왕명 출납 기능이 있는 승정원을 강화시키고, 호패법을 복원하였으며, 군제 정비에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세조는 이와 같은 많은 치적을 세워 조선 초기 왕권 확립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사육신으로 불리는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이 단종 복위를 계획한 사건이 발각되자 이들을 모두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선왕이자 조카인 단종을 유배지에서 죽이는 등 수많은 정적의 피를 보았다.
일화
계유정난은 1453년(단종 1) 단종 보위 세력의 정치 주도에 불만을 품은 수양대군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1453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홍달손을 집으로 불러 자신이 직접 반대파 세력인 김종서를 제거할 것임을 알렸다.
그리고는 미리 권람을 시켜 김종서의 집을 엿보게 한 후 향정, 유소, 종 임운과 함께 바로 김종서의 집으로 향하였고, 수양대군의 명을 받은 임운은 철퇴를 내리쳐 김종서를 살해하였다.
다음날 새벽, 수양대군은 단종이 있는 시좌소로 가서 환관을 통해 현재의 상황에 대하여 단종에게 형식적인 보고를 하였다.
그리고 궐 안이 좁다는 이유를 내세워 재상들이 시종을 두고 혼자 들어오게 하여 그들을 순서대로 죽이는 방법으로 미리 작성된 살생부에 오른 인물들에 대한 살육을 시작하였다. 수양대군은 이러한 절차를 거쳐 영의정, 이조판서, 병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 등을 겸임하며 실제 정권과 군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난 1455년 6월 2일 단종으로부터 옥새를 건네받고 6월 11일 7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
생몰년도 : 1418년 ~ 1483년
생애이야기
정희왕후는 판중추원사 윤번의 딸로 1418년(태종 18)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1428년(세종 10) 수양대군과 혼인하여 낙랑부대부인에 봉해졌으며, 세조가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남편인 세조가 먼저 승하한 뒤 그녀의 둘째 아들인 예종이 즉위하였는데, 선천적으로 병약하였던지라 재위 1년 2개월만에 예종 역시 승하하였다.
당시 선왕이 누구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할 것인가를 정하지 않고 승하하게 되면, 그 권한은 대비에게 주어졌다.
정희왕후는 이 권한을 통해, 젊은 나이에 요절한 자신의 첫째 아들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을 왕으로 지목하여 대통을 잇게 했다.
그리고는 예종대의 섭정을 이어 7년이라는 기간 동안 수렴청정을 행하게 되었다.
이는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이었다.
1483년(성종 14) 3월 30일 66세의 나이로 온양행궁에서 승하하여 같은 해 6월 12일 광릉 동쪽 언덕에 예장되었다.
일화 조선 선조 때의 이조판서 이기가 쓴 글들을 모은 문집『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정희왕후 윤씨가 수양대군의 부인이 된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왕실의 혼사를 알아보던 중, 궁궐의 감찰 상궁과 보모상궁이 윤씨 집안에 수양대군에게 적합한 배후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는데, 사실 이때 후보자는 정희왕후의 언니였다고 한다.
그런데 궁중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말에 정희왕후가 어머니 이씨 뒤에 숨어서 어른들 이야기를 듣다가 감찰상궁의 눈에 띄고 만 것이다.
언니보다 정희왕후의 자태가 더 비범하다고 대궐에 알려지면서 그녀는 언니 대신 왕실에서 가례를 올리고 낙랑부대부인으로 봉해졌다.
그 후 그녀는 계유정난 당시 사전 정보가 누설되어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그에게 용병을 결행하게 할 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였다.
1468년 그의 아들 예종이 19세에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을 하고, 이후 손자 성종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기도 하였다.
광릉과 사람들
왕실의 장례를 치르고 왕릉을 조영, 관리하는 일은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며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과정이었으므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따라서 능의 입지 선정, 조영된 능의 관리감독, 천장 등 왕릉과 관련된 사항에는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같이 했다.
‘능 수호군’으로 이속된 광릉 인근 마을 주민 『예종실록』 1469년(예종 1) 8월 13일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일찍이 경기의 광주, 지평, 양근, 가평, 포천, 영평, 양주, 적성, 마전, 삭녕, 장단 등 여러 고을에서 유이(流移)한 백성들을 본 고을로 돌려보낸 뒤에 복호(復戶)하되, 포천현(抱川縣)의 백성은 광릉(光陵)의 수호군(守護軍)으로 이속시키고 경작하는 땅에 대한 공부(貢賦)를 감해 줄 것을 의논하여 아뢰라고 명하셨습니다.
청컨대, 제도 관찰사로 하여금 쇄환(刷還)하고 계문(啓聞)하게 한 뒤에 3년 동안 복호하고, 그 전지(田地)는 연한(年限)에 구애하지 말고 도로 주어서 생업에 안정되게 하소서. 포천 백성으로서 지금 광릉의 수호군으로 소속된 자 28인에게는, 청컨대 경작하는 땅의 공부(貢賦)를 감해 주소서. 양주 백성으로서 수호군으로 소속된 자 42인의 공부도 포천의 예(例)에 따라 견감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위의 기록처럼 조선시대 왕릉 인근 마을의 사람들에게는 왕릉을 관리하는 책무가 부여되었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왕릉의 수호군이 되어 매일 조를 짜서 왕릉 주위를 순찰하였다.
왕릉을 둘러싼 산림의 병충해 피해가 심각하면 인근 주민들이 능 부근의 20리 까지 직접 손으로 벌레를 잡아 없앴다.
이들을 총괄 감독하는 것은 종9품 관리인 능참봉이었다.
광릉 수목원 이야기
광릉 옆 수목원 이야기 조선 7대 임금 세조의 능인 광릉의 주위로는 다양한 생물들이 자생하고 있는 울창한 숲이 형성되어 있다.
이 숲은 산림청의 연구기관에서 꾸준히 관리하다가 1984년 광릉 수목원으로 조성되었으며, 1999년에는 국립 수목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운영하고 있다.
광릉뿐만 아니라 서울과 서울 근교의 조선 왕릉 부근에는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항상 푸른 숲이 조성되어 있어 도심 속의 쉼터로 기능하고 있다.
산으로 겹겹이 에워싸인 능지 왜 조선 왕릉 부근에는 이렇게 항상 숲이 있을까? 우선 왕릉의 입지를 선정할 때에는 항상 풍수지리상의 길지를 고려하였기 때문이다. 풍수지리적 길지의 요건으로서는 여러 기능을 하는 산자락이 능침의 후면은 물론이고 좌우를 감싸는 지세가 필요하다.
따라서 능역의 대부분이 자연 산림 공간으로 겹겹이 에워싸인 곳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에 더하여 능역에는 다양한 나무를 인공적으로 심어 조경을 하였다. 능침 공간과 제향 공간에는 잔디를 깔아 사초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동선을 따라 진달래 등의 꽃나무를 심고 연못 주변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다.
특히 봉분의 좌우 및 후면에는 소나무를 심고, 전면의 낮은 지대에는 오리나무를 심는 것이 능침 공간의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광릉 조영 당시 심은 진달래와 잣나무 광릉을 조영할 때, 능 조성의 전 과정에 대한 기록을 엮어 만든 『광릉지(光陵志)』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금천교를 지나 향로를 따라 좌우에 진달래를 수 백 그루 식재하고 재헌(재실) 북쪽 창문에까지 두견화를 수 백 그루 식재하였다.
또 서 동구 십리의 길에는 수많은 전나무와 측백나무 혹은 잣나무가 있으며 동 동구 5리 정도의 길에는 전나무, 잣나무와 더불어 진달래를 서로 맞대어 심어 놓았다. 또 서쪽 담장 밑에 화훼류를 심어 무성하게 하였다.
위의 기록은 조선 왕릉의 산림이 얼마나 철저히 조성 및 관리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휘경원,순강원 이야기
능, 원, 묘의 차이릉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園)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墓)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휘경원(徽慶園)
휘경원은 조선 22대 정조의 후궁 수빈(綬嬪) 박씨의 능이다.
1770년 좌찬성 준원의 딸로 태어난 수빈 박씨는 1787년(정조 11) 2월 18일 삼간택을 거쳐 빈으로 결정되었으며, 같은 해 2월 11일 수빈의 빈호를 하사받고 입궁하였다. 1790년에는 득남을 하였는데 그가 곧 조선 23대 임금인 순조가 된다.
평소 성품이 온화하고 예절이 바르며, 검소한 생활을 하여 현빈 (賢嬪)이라 일컬었다.
아들이 왕위에 오른 지 22년만인 1822년(순조 22) 12월 22일 세상을 떠나 지금의 이곳에 묻혔다.
그러나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1855년(철종 6)에 순조의 무덤인 인릉을 다른 자리로 옮기면서 휘경원을 순강원으로 옮겼다가 1863년(철종 14)에 순강원의 자리가 풍수지리학 상 좋지 못하다고 하여 지금의 자리로 또다시 옮겨졌다.
순강원(順康園)
순강원은 조선 14대 선조의 후궁 인빈(仁嬪) 김씨의 능이다. 인빈 김씨는 1555년 김한우의 딸로 태어나 14세에 선조의 후궁이 되었다.
선조가 무척 총애하였으며 정원군(원종)을 포함해 4남 5녀를 두었다. 1613년(광해군 5) 10월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쳐 이곳 순강원에 잠들었으며, 위패는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칠궁에 봉안되었다.
순강원은 봉분 주위로 곡담이 둘려있으며, 묘비석을 비롯하여 여러 석조물이 있다. 순강원 묘역 내에는 인빈 김씨의 넷째 아들 의창군(義昌君, 1589~1645)과 부인 허씨의 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