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시리아, 요르단, 두바이
[6] 2007년 5월 1일 [화요일] 팔미라 관광, 마룰라 관광, 다마스쿠스 관광 오늘은 코트렛 정한 ‘7대불가사의’인 팔미라로 향했으며, 오래 전부터 클라크데 슈발리에와 함께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던 곳이라 기대가 되었다. 홈스를 출발하여 1시간 정도를 달리자 점점 사막지대로 들어섰는데 홈스가 바람이 심한 것은 남쪽의 사막성 기후와 북쪽의 대륙성 중간에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가도 가도 사방은 끝없이 넓은 광활하였으며, 베드윈 조차도 보이지 않았고, 다만 가끔은 군인이 거주하는 군사시설만 보이는데 빠른 길로 간다며 포장길에서 비포장도로로 들어섰다. 조금 지나자 산등성에 성채가 보여 팔미라에 도착한 것을 알았는데 집들이 반파된 것처럼 보이는 유적이 팔미라의 무덤이라고 하며, 차를 세우자 물건 파는 사람들이 접근했으나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조금 가까이 가다가 모두들 사진만 찍고 돌아왔으며, 차는 변소사용을 위해 호텔로 들어섰다. 호텔 안으로 들어가자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바닥을 수놓았으며, 후에 안 일이지만 기둥은 팔미라의 것을 본떠서 만들었고, 천장은 팔미라의 하늘을 옮겨 놓은 듯하여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너무 아름다운 호텔이라 일보기도 조금 미안한 생각마저 들었지만 호텔을 나와 팔미라 유적 안으로 들어가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지만 대부분 잊어버려 옮길 수가 없는 것이 아쉽다.
<팔미라 유적지>
[팔미라(Palmyra) 관광] 먼저 엄청난 규모에 말문이 막힐 정도이고, 이 거대한 유적을 남긴 팔미라인들이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며, 왜? 이들은 이런 척박한 사막에 터전을 삼은 것도 궁금하다. 먼저 거대한 유적이 파괴된 채로 방치되어 있는 광장 끝에 팔미라인들이 섬겼다는 신전 안으로 들어가 설명을 듣고 밖으로 나와 파괴된 유적을 구경하였다. 옛날에 3개의 거대한 출입구는 지금은 막아 놓았으며, 옆에 있는 작은 출입문을 통해 밖으로 나와 조금 걸어가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개선문 앞에서 만날 시간을 정하고 헤어졌다.
황제의 개선문을 통과 하여 안으로 들어가 너무 아름답고 완벽하게 보존 되었다는 원형극장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행사를 준비 중이라며 못 들어가게 하였다. 멀리 산 위에 아랍성채가 보이는 쪽으로 이동하며 유적을 돌아보았으며, 기념품을 파는 사람들도 보인다. 팔미라의 중심지에 해당하는 사거리 ‘테트라 펠리온’에 있는 4각 탑이 4개가 있는 곳에서 바라보면 당시 고대도시의 도로가 명확히 드러나며, 동서로 뻗은 중심가에는 기념문 등이 있다. 남쪽은 광장, 원로원, 극장이 있고, 부서진 열주가 장관이며 기둥에 달린 사각대는 등불과 화분을 놓기 위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로컬 가이드는 사람의 두상을 놓았던 것이라 했는데 그렇게 많은 두상이 있었는지 이해가 잘 안되었다. 개선문 쪽으로 내려오다 건물 입구가 있어 들어갔는데 입장하지 못하는 원형극장의 무대가 보여 살짝 들어가 얼른 사진을 찍고 도망치듯 나왔는데 원형극장을 그렇게라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솔로몬 시대에 팔미라는 타드몰이라고 하였다고 하며, 벨 아들의 라보신전, 지혜광장, 로마시대 목욕탕, 이집트의 카로로스 카스무스 거리, 아고라 등을 보았지만 어디가 어디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아름답다는 제노비아 모습이나 유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낙타를 타고 먼 곳에 있는 유적지를 돌아보는 관광객도 있었고, 그렇게 천천히 여행을 해야 하는 것인데 바람같이 왔다가 총알같이 떠나는 우리 여행은 로컬 가이드 말대로 ‘미친 여행’ 인지 모르겠다.
<황제의 개선문에서 본 장엄한 열주 거리 사진>
[팔미라 역사와 볼거리] 역사: AD129년경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방문으로 자유시가 되었으며, 카라칼라(211-217 재위) 황제시대에 식민도시의 지위를 얻어 세금이 면제된 후 3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AD227년 이란의 사산 왕조가 들어서자 곧 팔미라의 교역로인 페르시아 만으로 가는 길이 폐쇄되었다. 270년 팔미라의 오다이나투스(아데나투스) 2세와 부인 제노비아가 아나톨리아(소아시아) 지역을 대부분 정복하여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했으며, 272년 아우렐리아누스(270-275 재위) 황제가 팔미라를 정복하고 파괴하였다. 634년 초대 이슬람 칼리프인 아부바크르(632-634 재위)의 명을 받은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에게 정복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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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미라인들은 페르시아 만을 거쳐 인도와 교역했으며 나일 강의 콥토스, 로마 같은 도시들과도 거래했다. 지금의 시리아 힘스 주에 있었으며, 약 16만평의 광대한 시리아사막 심장부에 솟아 있는 사막의 궁전은 오아시스에 유적이 펼쳐지는 환상과 신비의 고대 시리아의 도시로 인구 3.6만(1994)이다. ‘스트라타디 오클레시아나’라는 도로는 다마스쿠스의 로마식아취와 열주가 있는 ‘하미디예’시장 끝에서 시작하여 팔미라를 지나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데 한 때는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도 이곳까지 영향을 끼쳤다. 희랍과 로마시대가 전성기였으며, 이 때 타드몰에서 팔미라로 이름을 바꾸고 독자적인 군대를 가진 강력한 도시국가로 발전하기에 이르고, 오늘날 남아 있는 유적들의 대부분은 1-3세기의 로마시대에 건축한 것이다. 예로부터 수량이 풍부한 오아시스 도시로 사막을 왕래하던 상인들의 교역장소로 번성하다가 국제교역에 능한 거상들이 생겨나면서 도시는 부유하게 되었으며, 페트라가 로마에 함락당한 후 더 큰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AD250년 거리의 열주가 375개나 되었다고 하는 유적을 보면 당시에 누렸던 부귀영화를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팔미라의 서쪽 시외에 북시리아의 황야가 펼치지는 묘지의 계곡에 팔미라 시민의 묘가 있으며, 공동묘지와 유력한 일족의 가족묘를 가지고 있었고, 묘 형식은 탑묘, 주택형묘, 지하분묘 등이 있다. 고대 팔미라 유적지에 세워져 있는 지금의 타드무르 시는 시리아 사막을 가로지르는 도로 교차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란의 키르쿠크와 레바논의 트리폴리를 잇는 송유관이 지나 간다.
볼거리: 다른 유적으로는 '디오클레시아누스의 진지'라고 하는 거대한 복합 건물과 벨, 야르히볼, 아글리볼을 모신 건축은 거의 아칸서스 잎 모양이 있는 코린트식 건축양식이다. 메소포타미아와의 영향도 발견되며, 이 거대한 유적은 주변 구릉에 풍부한 석회암이 덕택이며, 1950년까지 모래 속에 묻혀 있었으며, AD32년 셈족이 숭배하던 태양신 벨 신전은 길이 200m 사각형태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벨 사원만 유로이고, 페르세폴리스보다 장대하다고 하며, 검은 빛나는 돌은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으로 1930년대 들어서 발굴이 시작되어 지금도 복원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제노비아(Zenobia, AD267-272 재위)]
아버지는 아라비아 집시, 어머니는 이집트인 인데 빼어난 미모, 지모지략까지 뛰어나 장군들이 복종하였고, 어릴 때부터 탁월한 낙타몰이로 어린 나이에 아버지 대신 집시의 지도자였다고 한다. 성 밖에서 로마군을 물리칠 군대를 양성하는 오다이나투스 2세가 낙타몰이를 하는 그녀를 만나 사랑에 빠져 그의 2번째 부인이 되었으며, 267년 남편이 전처 아들과 암살당했을 때 그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녀는 어린 아들 바발라투스의 섭정이 되어 로마 속왕으로 만족하지 않으며, 269년 병사 7만을 이끌고 이집트를 점령했고, 그 뒤 소아시아 대부분을 정복해 로마에 독립을 선포하며, 아들은 황제로 자신은 여왕이라 자칭했다. 272년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270-275 재위)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에메사(홈스)에 본거지로 삼고 팔미라를 포위하였는데 그녀는 바발라투스와 함께 성을 빠져나갔으나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기 전 로마 기병대에 붙잡혀 로마로 압송되었으며, 팔미라는 곧 항복했다. 273년 그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는 식민지도시의 본보기로 팔미라를 파괴했으며, 더욱이 1089년 이 지역을 강타한 지진으로 나머지 유적마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274년 제노비아와 두 아들은 로마에서 거행된 아우렐리아누스의 개선식 때 굴욕적인 행진을 해야만 했지만 로마의 원로원 의원과 결혼해 티부르(현 이탈리아 티볼리) 근처에 있던 남편의 별장에서 274년에 죽은 것을 정설로 여긴다. 다른 이야기로는 팔미라의 파괴 소식을 듣고 단식 끝에 죽었다는 이야기와 로마 황제 개선 행진 때 마차에 묶어 끌고 다녀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한 여성으로 직접 전투에 참여 하여 야영도 하며 승리하여 많은 영토를 늘린 예는 전무후무하다고 한다. 2차 대전 전 여기에 주둔한 프랑스 외인부대의 시리아인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그녀의 망령이 나타나 ‘로마군을 물리쳐 달라’고 한다는 전설 때문에 팔미라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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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카페] 황량한 사막을 달리다 보면 ‘바그다드 카페’라는 영화를 촬영했다고 하여 유명해진 바그다드 카페는 몇 개가 있는데 서로 자기가 진짜 바그다드 카페라고 하지만 실제는 모른다고 한다. 그 중에 가장 비슷하다는 카페에 들어가 변소도 이용하고 기념품도 사고 사진도 찍었다. 이곳 카페 앞에는 영화 ‘자이언트’에서 본 풍향계 같이 생긴 바람개비가 돌고 있으며, 자세히 살펴보니 지하에서 물을
퍼 올리는 펌프였는데 모터식이 아니고 상하로 움직이는 작키식이다. 이곳을 떠나 마룰라로 향하였는데 조금씩 지대가 높아지면서 커다란 바위가 성채처럼 병풍을 두른 곳이 나오며, 차는 계속하여 산을 오르다가 식당 앞에 멈추었는데 이곳이 마룰라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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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룰라(Maalula) 관광]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수도원으로 향했는데 무슨 행사가 있는지 이슬람사원 앞에 이르자 몹시 혼잡하여 시간이 지체 되었으며, 바위산 위에 하얀 성모 마리아 상이 있다고 하여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가파른 언덕 위에 있는 수도원에 내려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 문도 베들레헴의 탄생교회 문처럼 낮고 작아 머리를 숙이고 한 사람만 들어간다. 수도원에서 여자가 아람어로 ‘주기도문’을 들러주었으며, 기념품 가게에서는 여기서 판매하는 포도주를 맛볼 수 있으며, 가게 안에 있는 곡식 저장소를 둘러보고 더 볼 것이 없어 밖으로 나와 개인집의 지붕 위에 올라가 주위를 구경하였다. 입구 위에 있는 간판을 보니 성 테클라 수도원이 아니고 성 세르기우스 성당이었다. 가이드에게 테클라 수도원이 있는 곳을 물었으며, 건너 편 바위산에 있다고 하는데 보이지는 않았다.
[마룰라 이야기] 마룰라는 주민 대부분이 기독교들이고, 예수님 당시 중동에서 사용하던 말이 아람어로 예수님도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성경학자들도 아람어를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이미 사라진 아람어가 이곳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또 사도바울을 따라다니던 성녀 타클라의 무덤이 있어서 유명하다. 성 테클라 수도원(Chapel of ST. Thecla): 바위산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으며, 테클라는 터어키 이고니온(현 콘야) 출신으로 바울의 복음을 접하고 터어키 남해안의 실리프케에 세계 최초의 여자 수도원을 창설했던 인물인데 지금은 수도원이 이미 사라진지 오래 되었으나, 그분의 유해가 이곳에 안장되어 있다. 성 세르기우스 성당(Chapel of ST. Sergius): 그는 시리아 북부 헤사파 출신으로 그곳 로마군 수비 대장으로 있을 때 유프라테스 강변 요새지에 순시하러 갔다가 몰래 기도를 하던 중 이것이 발각되어 헤사파로 호송된다. 249-251년 사이 테키우스가 황제는 기독교인들을 색출하여 혹형을 가했는데 세르기우스 호송병들은 그를 못 박힌 군화를 신고 걷게 했으며, 헤사파에 도착해서는 입술에 로프를 꿰어 달고 칼로 난자하는 혹형을 가하였지만 그는 끝내 믿음을 부인하지 않고 순교하였다. 그 후 그의 믿음을 추앙하여 시리아 크리스천의 수호 성자로 모시게 되는데, 그 기념 교회가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 교회(Church of ST. Mary): 시리아 교회에서 가장 신성시하는 성모 마리아의 허리띠를 보관해둔 교회로 현재 이 교회에는 아람어로 예배를 보고, 사제들도 아람어 교육을 받으며, 아람어 성경 필사본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다마스쿠스(Damascus) 관광] 평상시 성경에 많이 등장해서 궁금해 하던 다마스쿠스(성경: 다메섹)로 향했으며, 도시 안으로 들어서니 도시가 회색도시라는 인상을 준다. 오래된 도시라 그런지 가난하여 페인트칠을 안 해서 그런지 알 수는 없었지만 성벽 앞 살라딘 동상이 있는 곳에서 내려 걸어서 하미디에(하마디예) 수크(souk,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많은 인파 속에 가이드를 안 놓치려고 애를 쓰며 따라가는데 ‘안녕하세요?’라고 하며, 우리를 알아보는 아이들도 있었고, 장난감을 파는 아이들도 보인다.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니 커다란 로마의 코린트식 기둥이 보이는 곳에서 시장은 끝나고 우마이야 대사원 앞의 광장이 나타나며, 이곳에서 여자들은 우비 같이 생긴 옷을 받아 입고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들린 곳은 모스크의 북쪽 벽 바깥 정원에 있으며, 1193년에 지어진 살라딘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나무관이 본래의 살라딘관이고 대리석관은 독일 카이저(황제)가 선물로 보낸 것이라고 한다. 가장 강력했고 가장 관대했던 살라딘은 자신의 무덤을 만들 돈마저도 충분히 남겨 놓지 않았다고 하더니 그래서 묻히지 못하고 이렇게 있는가 보다. [3장 중동역사 십자군전쟁의 살라딘 이야기 참조] 1920년 7월 프랑스의 알리 구로 장군이 다마스쿠스에 입성해 처음 한 것은 살라딘의 무덤을 방문하여 부동자세로 서서 ‘살라딘이여, 우리는 돌아왔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이슬람 전체를 기독교가 지배한다는 의미다.’라고 하여 전 아랍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고 한다.
<다마서커스 성벽 앞 살라딘 장군의 동상>
우리는 신발을 벗어 들고 사원 안으로 들어가면 대리석으로 만든 넓은 공간이 나오고 이곳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많은 인파가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메카 쪽으로는 남자가 기도하고 그 뒤로 여자들이 있는데 남자들보다 훨씬 많았으며, 머리에 꽃을 꼽고 있는 여인들은 터키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하며, 꽃은 다마스쿠스를 상징하는 꽃이라고 한다. 대사원 안에 터키의 소피아 성당을 본떠 만들었다는 작은 돔이 보이는데 이 건물이 635년 이슬람들이 입성하기 전까지 세례요한의 무덤이 있는 세례요한 교회라고 한다. 대사원은 세례요한 교회 위에 지은 것이라고 하며, 초록색 유리 안으로 들어다 보아도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으며, 대사원 안에 교회가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 하였다.
세례요한교회에서 1번 기도가 다른 곳에서 1만 번 하는 것과 같다하는데 사실여부는 하나님만 알 수 있다.
<파란유리의 작은 건물이 세례요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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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원은 현재도 로마, 원시기독교, 비잔틴양식, 우마이야의 유적들이 산재해 있으며, 현재 시리아에서 가장 큰 이슬람 사원이며, 아랍권을 통틀어서도 가장 아름다운 사원 중의 하나이다. 정문입구의 천정과 양쪽 벽에 그리고 육각형의 기둥 위에 있는 육각형 건물에 그려진 모자이크는 대단히 아름답고, 사방의 회랑과 기도실도 대단하여 몇 명이 들어갈 수 있을지 짐작도 안 될 정도로 크다. 많은 인파로 출입구가 번잡하였는데 뒤주머니가 이상하여 만져보니 열려 있어 지갑이 있는가를 확인하고 지퍼를 잠그면서 뒤를 돌아보니 바로 뒤에 있는 차도르 입은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보고 손으로 먼저 가라는 시늉을 하기에 먼저 나와 일행들과 사진도 찍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부산에서 오신 사장님이 지갑과 여권을 잃어 버렸다고 하였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였는데 현지가이드는 사원에서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없으며,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고 하며, 분실로 여겼으나 내가 당한 일을 이야기하자 소매치기로 생각했다. 마침 우리를 마중 나온 현지여행사 사장님과 직원도 있어 조금은 안심이 되었으며, 습득물취급소에 전화번호를 남기고, 모든 조치를 간구한 후에 우리는 차로 이동하였다. 차에 오르려고 할 때 연락이 와서 사장님과 사모님은 여행사직원과 경찰서로 가고 우리만 호텔로 향했으며, 호텔을 배정받고 목사님과 함께 가까운 거리를 구경하한 후 호텔로 돌아와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들이 돌아와 들려준 이야기는 돈은 모두 가져가고 여권만 찾았다고 하는데 그 많은 돈을 잃어버렸는데도 두 분은 여권을 찾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웃는 모습을 보고 대단한 분들이라고 생각했다. 식당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TC의 이야기는 단체로 비자를 받았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여권이 없으면 출국을 할 수 없었는데 다행이라고 말하여 정말 큰일 날 뻔 했다. 저녁식사로 찾아 간 식당은 여행사 사장님이 3일 전에 결혼하고 피로연을 한 곳이라고 하며, 특별히 대접을 하고 싶어 이곳으로 왔다고 하여 우리를 감탄하게 했다. 저녁상이 차려 진 후 전등이 꺼지고 불꽃이 터지며 생일 축하곡이 나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였는데 일행 중에 서울서 혼자 오신 여사님의 생일이라고 한다. 케이크를 자르며, 생일 축하곡을 같이 불러 주었는데 사실 돌아오는 일요일은 나도 생일이지만 음력으로 되어 있어 축하 받기는 틀렸다는 생각을 했다. 저녁을 먹고 사장님이 선물을 나누어 주며, 특별히 야경을 시켜주겠다고 하여 우리들을 즐겁게 했으며, 다마스쿠스의 야경은 한번쯤은 볼만했는데 바빴던 하루도 이렇게 저물었다.
<우마이야 대사원의 대리석 공간>
[다마스커스 역사, 볼거리, 성경] 역사: 시차는 -7시간, 시리아 남쪽 고원(700m)에 위치하며, 옛날부터 '동양의 진주' 또는 ‘神이 입 맞춘 땅‘이라 불릴 만큼 지상낙원이며, 아름다운 고대도시이다. 지속적으로 사람이 살고 있는 하란, 여리고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유명하고, BC3000년 경 아람왕국의 수도였으며, BC1470년 이집트 상형 문자에 도시 이름이 최초로 언급되었다. BC723년 아시리아에게 북 이스라엘과 함께 망한 후에 쇠퇴하다가 BC332년 알렉산더 대왕 정복하였으며, BC 85년 직후 나바테아의 아레타스 3세가 다마스쿠스와 코엘레시리아 (레바논)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로마의 봉신(封臣)로 있던 나바테아의 아레다(아레타스)왕 4세 때 바울이 광주리를 타고 도망한 것 같다. 이후 BC66년 로마 제국에서 중요한 교두보로 번영하였으며, 그 후 AD661-750년 아랍제국의 우마이야왕조 수도였으나 아바스왕조(750-1258)는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겼다. AD1076년에 셀죽투르크가 점령하였고, 그 후 십자군의 원정을 여러 번 물리쳤다. 1300년 바그다드를 수도로 하는 일한국(칸국)의 가잔 칸은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여 30만 시민이 학살하고 파괴하여 폐허가 되었으며, 1303년에 시리아를 침공했으나 실패하여 중동 정복은 마지막이 되었다. 1516년 오스만제국이 다시 건설하였고, 1차 대전 후에 프랑스식민지로 있었으며, 1946년에 독립하였으며, 1979년 도시는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목록에 수록되었다. 도시의 중심에 바라다 강이 흘러 도시는 동서로 나누어지고, 남쪽에는 구 시가지로 옛 성채, 대 사원, 시장이 있고, 유대교인의 거주지이며, 관청은 서쪽에 흩어져 있으나 마자르 광장에 많고, 남쪽의 교외 땅은 회교인의 거주지이다. 북쪽은 근래에 발전하여 고급상점, 관청, 호텔, 병원이 있으며, 서쪽은 시리아대학이 있다. 바라다 강이 주는 농산물이 풍부하고, 견직물, 융단, 가죽세공, 화학, 유리, 시멘트 등의 근대공업도 성하다고 한다.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의 통로로 교통과 상품교역이 성행하였고, 순례지로도 유명하며 회교의 4대 성지이다. 기독인은 영국인이 선교하여 6만쯤 되고, 정치, 경제, 문화에 유력한 집단이며, 전체 인구는 약150만(1994)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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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 강의 남쪽 구 시가지의 성채, 대사원, 대상들의 여관, 시장이 있으며, 가장 잘 알려진 곳은 705경 시작한 우마이야 왕조의 대사원은 고대 로마신전과 기독교 성당자리에 세워졌다. 구시가는 로마시대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2000년의 오랜 시간이 지난 만큼 성벽의 각 부분이 다른 시대에 재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게이트 오브 세이프티(Gate of Safety)와 토마스 게이트(Thomas Gate) 사이의 성벽이 가장 잘 보존되고 있는 부분이고, 또 한곳은 로마시대 유적으로 서쪽 관문에 자리 잡고 있는 쥬피터 신전인데 이 커다란 구조물은 BC 3세기경에 지여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서 500m에 달하는 이슬람 최대 규모의 하미디에(하마디예) 현재도 북새통인 시장, 8개의 성문이 있는 메디나, 126개의 보호건물, 중세에 지은 병원(목욕탕) 비마리스탄 누르 아 딘, 메드레세 자히리에, 살라딘 무덤이 있으며, 메디나에는 바브투마 문 등 8개의 성문이 있다. 구 도시는 타원형 성벽 안에 있는데, 동서로 1,3km 뻗은(직가, 直街) 로마식대로(大路)가 있으며, 이름은 현재도 그대로 남았지만 모습은 남아있지 않고, 몇 개의 석주와 로마 건축물의 일부만 남아 있다. 성경: 성경에서는 다메섹이라고 기록되었으며,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러 이 성의 좌편에 있는 호바까지 쫓아가 구했으며, 또 종 엘리에셀이 이 성의 사람이다.(창14:15-16, 15: 2) 다윗, 솔로몬이 이 성을 점령하였다.(삼하8:5-6, 왕상11:24-25) 이사야는 '이 성이 무너진다.'라고 하였고, 예레미아는 '이 성이 불탈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아모스는 '벌을 내릴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는데 (사17:1, 렘49:27, 암1:3) 예언은 역사대로 이루어졌다. 사도행전 9장 1절에서 30절까지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이 장소로 초대교인들이 핍박을 피해 이방인의 도시이고, 유대인이 적게 사는 다마스쿠스로 피신하였다. 기독교를 핍박하던 바울이 그들을 체포하려고 이곳으로 가다가 강한 빛을 보고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강한 빛 속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변화 받았다. 직가에 있는 유다 집에서 아나니아에게 세례 받고 눈을 뜨고 예수님을 전파하니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성문을 지키자 밤에 성벽에서 광주리를 타고 도망했다.
이 성에는 신자가 많았으며, 네로가 이곳의 1만 신자를 학살하였다고 하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교황의 교구처가 되었다.
<성벽 동문에서 바라본 직가(直街- 직선의 거리)>
[7] 2007년 5월 2일 [수요일] 아나니아와 사도 바울교회, 보스라 관광, 요르단입국, 암만 이동 [아나니아 교회 관광] 여행사 사장님과 함께 호텔을 출발하여 찾아간 곳은 아나니아 교회인데 어제저녁을 먹으로 간 곳에 있었는데 아주 작은 교회로 그리스 정교회 소속이라고 한다. 정원에 아나니아가 찾아와 바울에게 세례를 주는 모습의 동상이 있으며, 바울이 세례를 받고 눈을 뜬 유다의 집은 2층이라고 하고, 일층은 현재는 기념가게로 쓰이고 있다.
교회는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지하에 있었으며, 몇 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있고, 교회 안에는 바울이 강한 빛을 보고 낙마하는 모습에서 세계로 전도 여행하는 그림과 3차까지 전도여행 지도가 있었다. 바울이 낙마한 장소는 ‘카오캄'이라고 하며, 그 곳에도 교회가 있다고 한다. 이곳은 사도행전 9장 1절에서 30절에 있는 사건이 기록된 기독교 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이 있었던 장소라 감회가 컸는데 이 사건으로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복음이 전해지는 동기가 된 위대한 장소이다. 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말살시키기 위해 그들을 체포하려고 이 먼 곳까지 왔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평생 복음을 위해 목숨까지 버린 바울이 변화한 장소이기에 우리에겐 매우 소중했으며, 복음을 위해 그렇게 변화되기를 기도해 본다. 역사적인 장소를 떠나 나오다가 주인의 허락을 얻어 개인집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도 가졌는데 이 집 앞의 작은 도로가 성경에 나오는 직가(스트레이트 거리, Straight St. 행 9:11)이라고 한다. 지금은 형태만 남은 게이트 오브 세이프티에서 시작되는 1,3km를 직선으로 뻗어 있었다는 직가는 지진으로 내려 앉아 지하 8m 아래에 있다고 하며, 차를 타고 사도바울교회로 향했다.
<아나니아 교회와 중앙 그림(왼쪽부터 1.바구니를 타고 성벽을 내려가는 바울 2. 아나니아에게 세레받는 바울
3. 바울이 카오캄에서 낙마하는 모습>
![](https://t1.daumcdn.net/cfile/cafe/1232DE194C88A028A4)
[사도 바울교회 관광] 사도 바울교회는 사도행전 9장 25절의 사건이 기록된 장소로 바울이 광주리에 실려 성벽을 내려갔다는 지점에 세운 교회인데 직가의 끝 동문을 나와 남쪽으로 300m 쯤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한다. 걸어가려면 동문에서 성벽을 따라 가다보면 큰 성문과 만나며, 성문 뒤쪽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한다. 복원된 성벽에 십자가와 광주리 표시가 있으며, 계단을 따라 오르면 성벽 안에 돌로 지은 작은 예배소가 기념교회인데 대나무로 만든 광주리도 전시되어 있으며, 당시에 있었던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 놓았다. 작은 기념품 가게도 있었으며, 의자는 예배용이 아니 일반의자들이 놓여 있는 것이 이채롭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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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교회를 떠나오면서 현재에도 사람이 살고 있는 성벽에 붙어 있는 일반인들의 주거지들을 볼 수 있었는데 이것을 보고 바울이 어떻게 성벽을 타고 내려갔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인 상식적으로는 성벽과 주거지는 따로 분리되어 있고, 성벽은 군사들이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면
바울은 군사들 모르게 성벽을 접근하여 성벽에 올라가 다시 바구니를 타고 내려간 것처럼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곳은 주거지의 벽이 성벽이어서 그냥 집에서 바구니를 타고 내려가면 되는 구조이다. 일정에 있는 시리아 민속 박물관은 보지 못하고 성벽 가까이에 있는 아름다운 로터리를 돌아 시리아의 마지막 유적지 보스라로 향했는데 끝없는 대평원의 초원만 보였다.
<입구 위에 있는 4각 벽돌이 바구니를 상징하는 사도 바울 교회>
[보스라(Busra) 관광] 보스라에 들어서자 검은 현무암 때문인지 아니면 화재로 인한 것인지 잿빛도시라는 인상이 들었다. 차에서 내려 찾아간 곳은 AD 2세기경에 만들었다는 사방 120m에 깊이 120m인 당시 상수도원으로 사용하던 저수탱크인데 지금은 깊이가 10m도 되지 않아 당시 120m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이런 거대한 물탱크를 만들었다는 것에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현재는 물이 없었다. 가이드를 다라 가면서 로마 열주가 있는 회랑, 로마 사람들이 먹고, 토하고 또 먹었다는 냉탕과 온탕이 있었다는 목욕탕을 지나 해자와 성벽으로 싸인 다리를 건너 원형극장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원형극장은 세계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극장이라고 하며, 1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규모로 무대도 보존이 잘 되어 있었고, 아름답지만 검은 현무암 약간의 흠이다. 마침무대는 흥겨운 음악과 함께 레바논부터 요르단까지 널리 퍼진 열정적인 민속무용 답케(dabke)를 10명의 남자들이 손을 잡고 추고 있었으며, 무대 앞좌석에는 젊고 예쁜 남녀 무리가 음악에 맞추어 손 벽을 치고 있어 한 참을 구경했다. 설명을 듣고 밖으로 나아가려고 하는데 이름표를 가슴에 단 잘 차려 입은 흑인들이 안으로 들어오며 우리에게도 인사를 하였으며, 일행들은 이들과 사진도 찍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들은 수단에서 온 장관들이라고 하며, 무대에서 담케 춤을 춘 것도 이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원형극장 옥상에 전시해 놓은 유물을 돌아보고 다시 무대 앞으로 나아가 사진을 찍었는데 아직도 음악이 계속되고 있어 남자들이 추던 춤을 이방인이 우리가 따라했더니 박수치던 무리가 환호하며, 박수소리가 커져 계속하라는 뜻 같았으나 더 출 수 있는 능력도 없어 도망치듯 나왔다.
<거대한 보스라의 원형극장>
식당 앞에서 만날 시간을 정하고, 각자 흩어졌으며, 항상 교수님과 여사님이 한조인데 그들을 따라 갔다. 가이드를 따라 왔던 길을 거꾸로 되밟아 가면서 보고 싶었던 곳을 들어다 보면서 가다가 택시에서 내리는 아랍노인의 가족을 만났는데 노인이 영어로 일본인이지 물어 오면서 대화가 시작되어 친하게 되었다. 노인은 자기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구경도 시켜 주고 어떤 차를 마실 것인지 묻기도 했으며, 같이 사진도 찍으면서 농담도 잘하고 나보고 권투도 하자고 하였고, 기운이 센 것을 자랑도 했다. 할머니는 자리를 펴고 앉으라고 권유도 하였고, 예쁜 딸은 차를 끊이는 것 같았는데 시간이 없어 차를 먹지 못한다고 사정이야기를 하였더니 흔쾌히 보내 주었다. 비록 로마시대에 만든 그 때 그 유적 안에 살고 있지만 여유롭고 착하며, 인정이 많아 보였다. 이곳은 유적에 가계를 낸 곳도 있고, 문을 달고 방을 만들어 사는 것도 많았으며, 거기에 열쇠까지 채우고 있어 우리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곳이 진정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이다. 식당은 여행사 사장님의 집이라고 하며, 어릴 때 사진도 있고, 기념품도 파는 가계였는데 시리아의 막걸리 같은 전통술을 대접하여 맛 볼 수 기회를 가졌지만 술에는 무뢰한이라 맛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점심을 먹고 원형극장으로 다시 들어가 좌석 아래에 있는 요새화된 성벽 통로를 구경했다. 보스라 관광으로 시리아 관광은 끝나고 멀지 않는 곳에 있는 요르단국경으로 향했다.
<거대한 보스라의 목욕탕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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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라 상식] 보스라는 다마스커스 남쪽 140km 위치하며, 한때 아라비아와 로마행정구의 수도였고, 나바테아 왕국이 커지면서 수도를 페트라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메카로 이동하는 고대 상인의 중요한 이동통로 중의 하나였다. 원형극장과 거리가 잘 보존된 시리아 거대한 유적지 중에 하나로 AD 2세기말에 세워졌으며, 성채와 극장주변으로는 히포드롬, 목욕탕 등이 있다. 그밖에도 서쪽게이트는 세계에서 3번째로 오래된 우마르 수도원이 있고, 서쪽 게이트에는 개선문과 지하창고가 있으며, 후에 아랍인들이 성벽을 더 쌓고 해자도 만들어 요새화 시켰다. 성경: 사해 남동쪽 약 32km 페트라 북쪽 56km 지점에 있으며, 사해의 남서 30㎞ 지점에 있는 부세이라와 동일한 곳으로 여기고, 창36:33, 사34:6, 63:1, 렘49:13, 암1:12에 도시 이름이 등장한다. 성경에는 에돔의 성으로 난공불락의 성이었으며, 특히 사 63:1에는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라고 기록되어 있어 염색 공업으로 알려져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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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007년 5월 2일 [수요일] 요르단 입국 [요르단 입국] AD636년 아랍군대가 비잔틴군대를 전멸시키고 시리아를 점령한 야르무크 강 전투가 있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때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다라(Dara)도시를 지나갔다. 다라는 인구 5만의 작은 도시로 암만, 예루살렘, 하이파, 다마스쿠스를 연결하는 교통 중심지이며, 또 밀과 보리를 주로 재배하는 곡창지대의 중심지인데 10㎞ 정도만 가면 요르단국경이다. 요르단을 현지 사람들은 죠르단이라고 하고, 국경 검문소가 3개가 있다고 하며, 우리는 그 중 람타(가이드는 남싸라고
함) 검문소를 통과 한다고 한다. 시리아 국경에서 그동안 정들었던 로컬가이드 리달와 이별을 하고, 우리는 요르단 국경인 람타에 들어서는데 놀랄만한 것은 끝도 없이 늘어선 차량들의 행렬이다. 어떻게 저 많은 차량을 보내고 우리차례가 될까 걱정을 하고 있는데 우리차량은 늘어선 차량 뒤가 아닌 따로 마련된 곳으로 들어가 입국수속을 밟았다. 현지가이드와 같은 소속에서 근무하며, 이집트에서 온지 얼마 되지 않는 다는 키가 작고 통통한 몸매에 예쁜 아가씨가 마중 나와 있어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와 함께 먼저 우리는 짐을 가지고 X-레이 검사대를 형식적으로 통과 한 후 차에 싫고 비자가 나오기를 기다렸는데 도무지 가이드와 TC가 나타나지 않아 차에 내려와 이곳저곳을 구경하였다. 검문소 경찰이 근무하는 곳을 들어갔는데 경찰은 친절하게도 들어와서 쉬라며, 의자도 만들어 주었고, 에어컨도 켜주며, 한국 LG제품이라고 자랑한다. 경찰 한사람과 방금 여행자를 시리아로 보내고 우리 차를 타고 암만으로 갈 것이라는 요르단가이드 2사람과 학원원장과 이야기가 시작되어 서로 웃으며,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다. 경찰이 대단히 재미있는 사람으로 2명이 근무하는데 자기는 졸병이라고 하며, 라니아 왕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국왕이 꼼짝 못한다고 하며, 여자들 대우는 다른 아랍국가 하고는 다르다고 한다. 경찰서를 나와 요르단 입국자들이 받는 검사를 구경하였는데 모든 짐들은 차 밖으로 꺼내 놓고, 차량들은 본넷트, 주유구, 차 밑, 좌석, 짐칸은 드라이버로 일일이 분해하면서 검사를 했다. 처음에는 운전자 양발 속에서 담배도 나오며, 꼭 범죄자처럼 다루기에 범법자인 줄로 알았는데 대부분의 차량을 그렇게 검사하고 있어 아까 본 긴 차량의 행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짐은 시리아에서 구입한 농산물과 잡화들이었는데 분해된 차의 조립은 운전자가 하고 짐도 운전자가 알아서 실었는데 자국민을 이렇게 대접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행복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더디어 3시간을 기다리고 비자가 나왔으며, 어느 검문소에서나 있었던 여권을 들고 비자 도장 있는 곳과 사진 있는 곳을 펼쳐 실물과 대조를 마친 뒤 암만으로 향했다.
[요르단 하심 왕국(Hashemite Kingdom of Jordan)] [요르단 지도] 인구: 554만(팔레스타인 난민 172.5만), 면적: 89,342㎢(충남보다 조금 큼), 수도: 암만 정치: 입헌군주제, 양원제, 국왕 언어: 아랍어, 독립일: 1946. 5. 25, 종교: 90% 이슬람(수니파), 5% 그리스도교, 화폐: 요르단디나르(Jordan dinar/JD) 상식: 요르단은 요르단(요단) 강 동쪽에 있으며, 남북 약 460km, 동서 약 355km로 북쪽은 시리아, 북동쪽은 이라크, 남동쪽과 남쪽은 사우디아라비아, 서쪽은 이스라엘을 경계로 하고, 아카바 만에 19km의 해안선을 끼고 있다. 요르단 강 서쪽 웨스트뱅크 지역은 1949년부터 요르단의 영토였으나 1967년 이스라엘에게 점령당하여 제외되었다. 국토의 4/5를 동쪽 시리아 사막이 차지하고, 요르단 강 동쪽의 이스트뱅크 고원지대는 평균고도 600-900m이며, 대지구대인 요르단 계곡 지역에 사해가 있는데 해수면 아래 약 400m로 세계에서 가장 낮고, 물 부족이 심각하다. 모든 난민은 요르단 시민권을 갖고 있는 한편 난민구제 혜택을 받기 위해 난민의 신분도 유지하고 있다. 5% 경작지가 있고, 서비스업, 무역, 건설, 제조업 등에 종사하고, 목초지가 거의 없으며, 목축을 위해 우물을 판다. 남북으로 암만과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잇는 국영 철도가 있으며, 도로망은 약 3/4이 포장되어 있다. 제라시와 페트라의 유적, 사해 주변의 온천과 광천 등으로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며, 세계에서 가장 따뜻하게 손님을 환대하는 국민들 중에 2위를 한 나라라고며, 다른 회교국 달리 위압적인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도 없으며, 장기간 짐을 놔두어도 안전한 나라이라고 한다. 역사: [3장 교회사의 요르단 역사 참조] [암만(Amman)으로 이동] 서쪽으로 이동할수록 비옥해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시리아나 요르단도 동쪽은 대부눈 사막이고, 서쪽은 대신 대부분 비옥하다고 한다. 암만으로 들어가는 중에 높은 산지가 있었으며, 이 산지가 성경에 길르앗산지(신 3:12)라고 기록된 곳이라고 하며, 야곱 때문에 반가운 얍복강도 보였는데 얍복 강은 내일 다시 볼 수 있다고 한다. 암만 들어서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국왕 압둘라의 거대한 사진이나 그림이었는데 중동에 들어와 느낀 것으로 우리가 모르는 통치자나 지도자의 초상화가 많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시리아는 사회주의에서 흔히 보는 동상이 많았는데 하페즈 알 아사드 전 대통령 것이거나 전 대통령의 둘째아들 바샤르 알 아사드 현 대통령의 동상이 많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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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은 경찰들의 복장으로 영국식 모자를 쓰고 있으며, 복장도 영국식이라 어디서 본 것으로 전해 오는 얘기로 요르단의 동부의 울퉁불퉁한 국경은 처칠이 질퍽한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 정했다고 하는데 요르단은 유일하게 영국식민지로 있었던 것을 생각게 한다. 이곳도 경찰 앞에서 법규를 위반할 정도로 교통질서가 나쁘다고 하며, 신호등이나 횡단보도가 적어 요령껏 건너야 하고 운전자도 요령껏 운전한다고 한다. 이곳도 우리나라 중고차가 많이 수입되었다고 한다. 가이드가 자기 집을 지나간다며, 힘이 난다고 하였는데 암만은 암만 보아도 볼 것이 없으니 시내에 나아가지 말고 일찍 주무시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한다. 암만에 있는 대학교가 보였으며, 호텔과 가까이에 있다고 가이드가 말하자 교수님과 여사님이 대학교에 가보자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했다. 호텔에 도착하여 방을 배정 받고 저녁시간까지 많이 남아 약속대로 나아가려고 하니 너무 피곤하여 발자국도 띠기 싫었으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따라 가는데 너무 힘이 들었다. 대학교를 구경하고 돌아오려고 할 때 모두가 힘들었는지 택시를 타자고 하였으나 쉽지가 않아 다시 걸어서 호텔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을 때 입맛도 떨어져 평소보다 적게 먹었다. 저녁을 먹고 TC는 가이드는 집으로 떠나고 우리만 남았으며, 서울서 오신 법무사님이 커피를 사서 우리에게 대접을 하였고, 오래간만에 좀 늦게 담소를 나눈 후에 헤어졌다. [암만의 상식과 볼거리] 상식: 우리니라와 시차는 -7시간(서머타임은 -6시간)으로 옛 이름은 랍바, 고대국가 암몬의 수도로 인구 150만이며, 요르단 수도로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주요 도시 중 하나다. 산은 없고 구릉만 있는 평지에 현대화된 휴양지처럼 평화롭고 조용하며, 예루살렘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구약성서에 언급되고 있는 고대도시 중 하나이다. 1차 세계대전 영국이 점령하기 전 1918년까지 터키의 전진기지로 사용되었으며, 한국대사관은 7명의 주재원과 국내 상사직원, 유학생, 선교사 약 290명 있고, 한국 차를 쉽게 볼 수 있다. 볼거리: 시내의 중심가에 있는 로마식 원형 극장은 현재도 가끔 연극과 음악회 등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으며, BC 3세기 이후의 유적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8] 2007년 5월 3일 [목요일] 사막의 궁전(하라나, 암므라, 아즈락) 관광, 제라시 관광, 얍복강 구경 어제저녁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리며 속이 불편했는데 새벽부터는 설사까지 하여 걱정이 되었고, 아침도 먹으러 가지 않고 누워 있었다. 남들은 건강한 것을 보면 식중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지사제 대신에 목사님이 주시는 한약을 먹고 회복되기를 기도했으나 좀처럼 아픈 것이 사라지지를 않는다. 차를 타니 모두들 걱정을 해주었고, 부산사모님은 정성들여 며칠을 넣은 밥을 준비하여 주시는데 눈물 겹도록 감사했다. 그것 마저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 먹는 시늉만 내고 눈을 감았는데 이 넓은 광야에 변소마저 없을 것인데 설사를 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되었으나 다행히도 그런 증상이 없어 감사기도를 드렸다. 요르단은 돈 되는 것은 귀족들이 다 차지하였고, 버스도 국영이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고 한다. 아프리카 케냐의 암보셀리 같은 사막이 계속되는 곳에 놓여있는 좋지도 않는 도로를 달렸으며, 사막 가운데 작은 집 하나가 보였는데 이 집이 사막의 궁전에 하나인 하라나 성채이라고 한다. [알 하라나(Harrana Qasr) 성채 관광] ‘카스르(Qasr, Qusayr) 알 하라나’의 사막이 검은 것은 터키의 화산재가 날아와서 그렇고 하며, 물을 공급하던 검은 PVC 파이프가 어지럽게 있는 곳을 지나 사각형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대상들이 묵었던 숙소이었으며, 우마이야(Umayyad, 우마이드) 왕조 때 건설한 것이라고 하고, 옥상에 올라가 무너진 건물과 주변의 사막 그리고 조금 멀리 있는 변전소를 살펴보고 내려왔다. 대단한 유적이 있는 것도 아니며, 대상들이 어떤 곳에서 어떻게 휴식을 취했는지 엿볼 수 있는 곳인데 모래 속에 잠들었을 대상들의 고달픔이 느껴지는 듯 했다. 이곳을 떠나 또 사막 가운데 있는 암므라 성채로 갔다. [암므라 성채(Amra Qusayr) 관광] 카스르 암므라는 하라나보다 규모는 작지만 볼 것은 많은 곳으로 밖에 있는 우물을 어떻게 물을 퍼 올렸는지를 잘 보여 주는 기구가 있는데 글로 설명을 하면 이해가 될 런지 모르지만 옮겨본다. 우물가에 있는 십자가 기둥의 양 날개가 타래박 줄이 감겨 있는 수평의 기둥 끝에 톱니바퀴 역할 하는 6개로 구성된 것과 맞물려 돌리면 타래박 줄이 감기는 기둥이 돌게 되어 있는 원리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우물에서 퍼 올린 물로 냉탕과 온탕을 할 수 있게 한 목욕탕이 있으며, 목욕하는 나부의 그림도 있고, 사냥할 때 잡던 동물 그림의 프레스코화가 있다. 암므라는 7세기 우마이야 왕의 바람둥이 아들이 별궁으로 지은 것이라고 하며, 사냥 때 쓰이던 휴식처(오두막집)로 쓰이던 곳이라고 한다. 이곳을 떠나 암만에서 100km 떨어진 오아시스 마을 아즈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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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므라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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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락((Azraq Qasr, 아트라크) 관광] 카스르 아즈락를 아즈락 불루(blue, 청색)라고도 부르는 것은 오아시스 색깔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로마의 성채로 시작하여 우마이야(옴미아드, Omeyad) 성채가 되었다고 한다.
성채는 검은 현무암으로 되어 있으며, 서쪽은 시리아로, 동쪽은 사우디와 이라크로 가는 기점으로 대상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였으며, 아라비아 로렌스가 겨울한철을 보냈다고 하여 더 유명해졌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육중한 돌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유명한 이 돌문은 2개로 되었고, 하나의 크기가 170cm × 80cm 정도 되며, 어떻게 그렇게 큰 돌문이 움직이는 것도 신기했지만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더 신기했다. 당시 그들의 기술이 대단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성채를 살라딘이 재건하였으나 지진으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 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광장이 있으며, 광장 모서리에 있는 우물과 그 옆에 있는 욕실을 본 후 성채 안으로 들어가면 로마시대의 작은 유적이 있다. 입구 2층에 있는 영화에서 로렌스가 손을 흔들었다는 작은 창은 사진 찍는 명소가 된 곳에서 우리일행도 로렌스의 흉내를 내면서 사진을 찍었다. 이제는 제라시로 향했으며, 제라시는 암만 북쪽 48km 지점에 있어 2시간 정도는 가야하는데 아마도 점심은 늦게 먹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가는 길에 많은 대형유조차가 늘어선 것이 보였는데 이라크에서 석유를 수입하는 차량이라고 하였고, 사막에 탱크와 군인부대도 보였으며, 공사 중인 곳도 보였다. 제라시에 도착하여 식당으로 향하는 건물에는 TV에서 보던 병 속의 모래 그림도 보였으며, 우리를 보고 손가락으로 욕을 하는 모양을 보이는 이이도 있었다. 옛날 못살던 시절 적대감정으로 외국인에게나 불특정 사람들에게 욕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소년도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불쌍한 생각이 들었는데 소년보다 통치자가 더 반성해야 할 몫이다. 남문인 하드리아누스(하드리안, 117-138): 개선문을 통과하여 유적지 안에 있는 식당에 앉았으나 입맛도 없었지만 풍성하게만 보였지 먹을 것도 별로 없어 채소와 과일로 대충 먹었다. 점심을 먹고 빵 굽는 것을 구경하였는데 남은 빵 조각을 모아 다시 구우니 새것처럼 되는 기술이 신기했다. 식당을 나와 제라시(제라쉬, 제라슈) 유적지로 향했다.
<아즈락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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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시(Jerash) 관광] 먼저 보이는 것은 거대한 타원형 대광장(oval plaza, 오발 프라자) 이 탄성을 자아내개 하였으며, TV에서 이 장소를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소개 하는 중에 다른 나라에서 촬영 중에 있던 흰옷 입은 예수님이 기둥 사이로 나오는 것이 함께 방영된 적이 있었다.
그 장소에 가운데 있다는 것이 더욱 감격하게 하였으며, 우리는 유적을 한 눈에 보기 위해 높은 곳으로 이동하여 바라 본 유적은 아름답고 거대하다는 말로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이런 유적을 남긴 로마가 위대하다는 생각이 또 들었으며, 바로 옆에 있는 원형극장 안으로 들어가자 악대의 연주가 진행되고 있어 관중석에 앉아 연주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극장은 보스라처럼 커지도 않고 아담했으며, 무대도 소박하고 아름다웠으며, 악대는 우리를 위해 다시 연주한다고 하여 기다렸는데 악대는 요르단의 사막경찰대라고 하며, 큰북, 작은북, 그리고 백파이브로 3명으로 구성된 비록 작은 악단이지만 음악은 경쾌하고 듣기 좋았다. 그들과 사진 찍을 기회도 가졌는데 그들이 영어로 친구여! 하며 어깨동무 할 때 정답다는 생각이 든다. 극장을 떠나 남과 북으로 노여 있는 카르도스(거리)는 따라 걸어갔다. 이 열주 거리는 상가가 있었다고 하며, 도로는 가운데는 마차가 다니고 곁에는 인도가 따로 되어있는 처음 보는 도로이고, 4각주 위에 지붕이 있는 트리폴리에서 동서로 있는 ‘데쿠마노스 거리’를 보았다. 영화 검투사(글래디에이터, gladiator)의 장군 ‘막시무스 거리’도 있고, ‘님프 샘’ 아래에 접시처럼 생긴 대형분수가 있다. 유적 중앙에는 성의식을 행하였다는 중동에서 유일한 아르미테스신전이 있으며, 신전에 받치던 제물을 잡던 물탱크가 있고, 행운의 숫자 7자를 맞추어 만든 7계단씩 7층의 계단으로 되어있다. 언덕을 오르면 평지에 제우스신전의 거대한 기둥과 신전 일부가 남아 있고, 이곳에서 다시 내려가 오발광장으로 가든지 뒤편으로 가든지 해야 하는데 안 본 것을 생각하여 뒤편을 택하였지만 아무 것도 볼 것이 없어 후회가 되었다. 제라시 유적은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계곡건너편에도 있었으나 주민들 때문에 발굴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당시에 계곡을 건너던 도로와 다리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날씨가 더워 아르미테스 신전까지 간 사람도 몇 명 되지 않았으며, 대부분 사람들이 점심을 먹은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때 식당 앞에 전시된 라니아 왕비와 가족들의 사진이 있어 볼 수 있었다. 일행이 다 모여 하드리아누스 개선문으로 가다가 왼편에 마차경기장 히포드롬(Hippodrome)이 있는데 매일 오전에 11시에 마차경기를 재현한다고 하며, 남문을 나와 차에 올랐다.
<대단한 제라시 유적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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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시 역사, 볼거리, 성경] 역사: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으며, 로마시대에 '제라사'라 불렸고, BC332년쯤 알렉산더 대왕이 기초를 세운 도시로서 BC63년에 폼페이우스 장군이 점령하여 로마 위성도시인 ※데카폴리스의 하나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왕들이 사용했던 ‘왕의 대로’의 중요한 통로이었고, 이스라엘의 하스몬 왕가에 의해 통치(BC 103-BC 76)을 받기도 했으며, 보석, 비단, 상아 등의 교역이 이루어지던 사막 대상의 교통 요지와 근처에 좋은 철광이 있어 로마시대와 셀레우코스 왕조(BC312-64) 시대에 부유한 도시로 발전했다. 4세기 이후 비잔틴시대에 기독교가 전파되어 많은 교회가 세워졌으며, AD614년 페르시아와 635년 아랍의 침입으로 파괴되었으며, 이때 제라쉬로 명칭이 바뀌었다. 747년 대규모 지진으로 웅대한 석조건물들이 대부분 무너졌으며, 9세기 아랍인들이 살았고 11세기에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으나 1122년 십자군의 볼드윈 3세에 의해 파괴된 것을 1806년 독일인 시젠이 발견하여 1920년부터 10%만 발굴되었으며, 도시전체가 원형을 유지한 유일한 유적지이다. ※데카폴리스(Decapolis)는 3장 교회사의 유대 |
![](file:///D:/in-history/img7/07-26-08.jpg) <사막 경찰 군악대와 함께> |
볼거리: 20만평(당시2배)이 넘는 넓은 해발 600m 언덕에 웅장한 유적이 펼쳐져 있으며, 성벽에는 모두 101개 탑이 17-22m 간격으로 설치되었고, 3m 두께의 성벽은 6개(남북2개, 동서4개)의 성문이 있었다. 남쪽 성문으로부터 400m 가량 떨어진 곳에 AD129년 하드리아누스 방문 기념으로 건축한 개선문, 1.5만 명을 수용하는 고대 대형 경마장은 길이가 2백60m, 폭이 80m에 이른다. 제우스신전 옆 1세기경에 세워졌으며, 5천명을 수용하는 원형극장의 객석 꼭대기에 올라 오른쪽의 중앙에 가장 큰 아르테미스 신전 쪽을 바라보며 장관이다. 길이 800m 카르도스는 도시 중앙에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동서로는 2개의 거리가 수직으로 나있으며, 동서남북 교차로에는 돌기둥으로 둘러싸인 타원형 광장이 펼쳐져 있으며, 광장에는 신상이 세워져 있었다. 중심도로인 막시무스 길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3층 높이 정도의 2단으로 된 거대한 모습의 님파윰(분수탑)이 보이며, 계속가면 왼쪽 멀리 언덕 위에 제우스신전이 보인다. 조금 더 가면 오른쪽 언덕 위로 거라사의 수호 여신을 위한 아르미테스(아데미 신전)이 반파된 채 남아있으며, 언덕 위에는 술과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 신전을 교회로 전환시킨 비잔틴 시대의 대표적인 대성당이 있다. 대성당 뒤의 성 테오도르 교회와 529년에 세워진 성 조지 교회, 531년의 성 요한 교회, 533년에 세워진 성 코스마스와 다미안 교회를 비롯해 15개 이상의 비잔틴 교회 터도 발굴되어 있다. 성경: 성경에 제라시는 '거라사(Gerasa)인의 땅'(눅 8:26), '거라사인의 지방'(막 5:1) 또 ‘가다라 지방’ (마 8:28)로 기록되었는데 이 지역은 예수께서 군대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사건이 기록된 곳이다. 현재지명은 가이드는 ‘움 카이스’이라고 하였으며, 이 지명은 12세기 이전에는 ‘움 케이스’로 불렀는데
갈릴리호수 남쪽10km지점 해발360m 산상에 있는 마을이라고 한다. 다른 자료에는 갈릴리호수(오병이어교회 맞은편) 북동쪽 골란고원 바로 밑 쿠르시(Kursi)라는 곳도 있다. 본래 아모리 족이 살았으나 모세가 정복하여 므낫세 장남 마길의 자손에게 기업으로 준 길르앗 땅이다.
<제라시 유적지>
[얍복강 구경] 암만으로 돌아오는 길에 ‘제라키’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얍복강을 다리 위에서 구경할 수 있었는데 조그마한 도랑 같았으며, 조금 더 흐르다가 댐을 설치하여 농업용수로 사용되면 수명을 다 한다고 한다. 거품과 함께 검게 흐르는 모습이 많이 오염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성경의 역사적인 강이라 조금은 서글픈 생각마저 들게 하였으며, 현지어로 ‘와디 자르’라고 한다. 얍복 강은 성경 창세기 32장 22-32절에 기록된 강으로 하란에서 돌아오는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이겨 나라의 국명이 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천사가 씨름할 때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환도 뼈)이 어긋났더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때문에 유대인은 지금도 환도 뼈를 먹지 않으며, 식육점도 종교적인 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야곱은 이 사건으로 인본주의적 삶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된 사건이 일어난 강으로 전체 길이 96㎞이며, 대부분 협곡을 이루어 길르앗 산지를 남북으로 나누어 자연경계가 되고 있다. 오늘은 이른 시간에 도착하여 주위를 돌아다니다가 저녁에 먹기 위해 교수님이 수박을 한 통을 샀는데 TC와 가이드도 수박을 준비했다고 하여 그것은 내일 여행 중에 먹기로 했다.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잔 얍복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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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2007년 5월 4일 [금요일] 느보산과 페트라 관광 오늘은 페트라에서 잠을 자기에 짐을 가지고 호텔을 나섰고, 느보산으로 향하면서 왕하 3:4절 이하에 기록된 BC9세기의
모압 왕 메사의 비문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는데 너무 복잡하여 간단히 적는다. 베드윈이 가지고 있던 메사의 비문을 발견한 고고학자가 거금을 주고 샀으나 다른 베드윈들이 돈을 요구하며, 반출하기를 거부하여 돈을 더 가지고 오기기 위하여 떠나 기전 탁본을 해 두었다고 한다. 베드윈들은 돈을 많이 받기 위하여 비문을 조각내었다고 하며, 그 조각을 다 모을 수는 없었지만 있는 것으로 겨우 원상복구는 하였고, 비문은 탁본을 해석했다. [2장 이스라엘 역사, 북왕국과 남왕국, 여호람의 고고학적 자료 참조] 그리고 가나안에 대하여 설명이 있었으며, 가나안 사람들이 자색(붉은 색)염색의 기술이 유명하여 ‘붉다’의 뜻이라고 하고, 좁은 의미로 가나안 정복 때 요단 서쪽의 땅을 의미하며, 넓은 의미로는 시리아 지역의 일부를 말한다고 한다. 또 암만에서 남서쪽 32km 떨어진 이 지역에 있는 ‘마다바(마데바)’는 성경에 '메드바(민21:30, 수13:9, 16))`라 기록된 곳으로 AD6세기 때 성행한 모자이크 예술이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성 게오르그 성당 바닥에 그려진 `모자이크 지도`는 세계적인 고대문화유산으로 꼽힌다고 하며, 여기서 10km 떨어진 느보산 모세 기념 교회에도 일부분 남아 있다고 한다. [느보산(Mount Nebo) 관광] 해발 835m의 느보산에 도착하여 입구에는 있는 ‘예언자들의 조각’을 볼 수 있으며, 이 탑은 성경 모양에 선지자들의 모습이 새겨 놓았는데 2000년에 교황 바오로 2세가 방문한 기념탑이라고 한다. '시야가' 산 정상에 세워진 모세기념 교회로 향하면 가장 눈에 띈 것은 정원에 있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조각가 지오바니 판토니의 작품 ‘모세의 지팡이’이다.
이것은 민수기 21장 6-10절에 기록된 사건으로 시내광야에서 뱀에 물린 사람들이 쳐다보면 살아났다는 모세가 만든 놋뱀과, 구원의 상징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복합시킨 의미 깊은 작품이며, 바로 우측에는 교황 바오로 2세가 모세처럼 가나안 땅을 바라볼 때 사용했던 철재로 만든 자리가 아직 그대로 있다.
<오바니 판토니의 작품 ‘모세의 지팡이’와 교황 바오로 2세의 철재 자리(사람이 선 곳)> 가이드는 철재자리 우측이 모세가 죽었다는 ‘배부 올’ 골짜기라고 하며, 키 작은 밀밭도 보인다. AD4세기 말엽 비잔틴 시대에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졌다는 모세기념 교회 안으로 들어가면 등받이가 없는 기다란
의자 몇 개가 노여 있어 옛날 우리의 작은 시골교회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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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예배소가 되기 전 ‘로마 법전’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한 무너진 기둥들이 있고, 그 앞 벽에 있는 3개의 작은 창 스테인 글라스가 있으며, 각종 새와 동물들이 새겨진 모자이크가 있다. 12년 전 1995년 4월 24일 사해 서편에서 느보산을 바라보면 언제 저 산에 갈 수 있을 가 생각했는데 오늘 이곳에서 다시 서편을 바라보며, 또 가 볼 수 있을 가? 하는 욕심스러운 생각을 해본다. 오늘은 안개로 모압 골짜기와 여리고 지역만 내려다 볼 수 있으며, 맑은 날에는 사해와 유대산악지대 그리고 감람산 지역까지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느보산에 바라 본 모압 골짜기와 오른편 끝은 모세가 죽었다는 ‘배부 올’ 골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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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보산의 이야기] 느보산은 많이 알려진 성경 민33:47, 신32:49, 34:1-4절에 기록된 사건이 있는 곳으로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죽은 산으로 또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생활 40년을 마친 마지막 기착지이다. 느보의 뜻은 아랍어 '네보'로 높은 곳을 의미하며, '비스가'는 히브리어로 '꼭대기'라는 의미하여 느보산과 비스가산은 동일한 장소로 여리고 맞은편으로 기록되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의 한 지점일 것만은 분명하고, 르우벤 지파에게 분배되었으며, 또 다른 ‘느보’로는 바벨론이 믿는 신도 있다. 아모리 족속이 이스라엘에게 정복된 이곳은 BC9세기 모압왕 메사의 비문에는 느보읍이 이스라엘의 도시였다고 기록하였으나 성경에는 모압의 도시였다고 기록되었다.(사15:2 렘48:1,22) 모세의 무덤 위에 세워진 뒤 6세기에 새 예배당이 첨가 되었으나 파괴된 후 597-8년경에 새로운 침례소가 건설됐으며, 현재 교회가 복원되어 있고, 1932년에 세워진 프란체스칸 수도원도 같이 있다. 2000년 교황 바오로 2세가 방문하여 이곳이 성지로 인정받았다. [페트라 이동] 페트라로 가는 도중에 마다바 지역에 있는 ‘카타리나 휴게소’에 들려 어제 준비한 수박을 먹고, 사해에서 생산되는 소금비누, 머드비누, 핸드크림, 기념품 등을 구입하였으며, 또 통로나 벽에는 이곳에서 성행한 모자이크들의 사진이나 그림 등이 걸려있다. 신명기 2장 14절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이 삼십팔 년 동안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데스 바네아를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 이곳까지 온 여정을 우리는 반대(남쪽)로 가게 된다. 험한 지형이 점차 평지로 바뀌면 신명기 2장 14절에 ‘이제 너희는 일어나서 세렛 시내를 건너가라’라고 한 세렛 다리 위에 차가 멈추었는데 시내는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는 아주 작은 와디(Wadi)였다. 시냇가에 웬 아랍인 남자가 앉아 있어 기도하는 사람으로 생각했으나 그는 소변을 보는 사람이었는데 아랍남자들이 앉아서 오줌 눈다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한 셈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초원길을 가려고 했으나 에돔 족속의 방해(민20:14-21, 21: 4)로 험난하고 고달픈 광야 길, 성경에는 대로로 기록된 ‘왕의 대로(king's way)’ 따라 북쪽으로 왔다. 암만에서 왕의 대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84㎞ 되는 지점에 모압과 아모리인의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되었던 아르논(Arnon) 골짜기를 지나게 된다. 계곡에 있는 작은 마을에 차가 멈추었는데 이곳이 전승으로 전해지는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을 내었다는 '와디무사(Wadi Msa)‘라는 곳으로 가이드는 ’오윤무사‘라고 했다. [사진 참조]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물이 흐르는 바위에는 생각보다는 많은 물이 솟아나고 있었으며, 물을 맛 볼 수 있으나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난다고 하여 지금까지 속이 불편한 것 때문에 포기하였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여행에서 가장 하이라이트이며, 세계의 신(新) 7대 불가사의 뽑기 위한 인터넷 뉴 세븐 원더스 닷컴(new7wonders.com)에서 한 표를 보탠 페트라로 향했다. 언덕에 오르자 페트라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관망 좋은 곳에서 내려 아름답게 펼쳐진 붉은 바위산과 작은 도시를 바라보면서 저 속에 있을 유적들을 상상해보았다. [페트라(Petra) 관광] 페트라에 도착하여 우리는 2달러를 주고 800m 정도를 말을 타고 내려갔는데 발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약간 들면 충격이 덜 하여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으며, 또 하나의 기억될만한 새로운 체험을 했다. 가이드를 따라 거대한 아랍어로 시크(sik, 협곡)에 압도당했으며, 협곡은 2km 정도 된다고 하였고, 왼쪽에 바위를 파서 물을 공급하였다는 상수도는 모래가 들어가지 않도록 커버로 덮었다고 한다. 상수도는 TV에서 방영된 것을 본적이 있었으나 오른 쪽에 있는 하수도는 이곳에서 처음 알았다. TV에서 보면서 어떻게 바위에 뿌리를 내렸을까? 의문을 가졌던 무화과나무를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으며, 억척같은 생명의 신비를 보는 듯 했는데 이 무화과는 먹지 못한다고 한다. 협곡 사이에는 신 ‘알우자’와 여행자(항해자)와 모험가의 신으로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 카스토르(Castor)와 폴룩스 (Pollux),절벽을 깎아 만든 나바테아의 신 ‘두샤라(독수리)' 등을 볼 수 있다. 갑자기 협곡사이로 유명한 '알카즈네 신전'이 보였으나 돌아오는 길에 자세히 보기로 하고 이곳에 있는 500여개의 무덤 중에 가장 규모가 크다는 로얄 무덤(Royal Tombs)으로 향했다. 이 무덤은 아레타스 4세의 무덤이라고 하며, 옆에 있는 무덤 속으로 들어가자 붉은 색과 여러 색이 혼합된 물결치듯 아름다운 무늬를 연출하는 곳에서 구멍을 통하여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는 아름다운 색깔이 생각만큼 나오지는 안했는데 어린아이가 이런 아름다운 돌들을 팔고 있으며, 이곳을 나오면 광장처럼 넓은 곳에 있는데 이곳에서 각자 보고 싶은 곳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거주하던 유적지가 보이지 않아 가이드에게 불었더니 일부는 동굴에도 살았고, 일부는 바위 위에 텐트를 치고 살았다고 한다. |
<멀리 보이는 산이 페트라 계곡> |
교수님과 한조가 되어 로컬가이드 알리를 따라 오른 쪽 산에 '알카즈네 신전'처럼 만들어진 무덤 쪽으로 향했으며, 교수님은 알리가 무덤을 지적하면서 불러주는 대로 적는 것을 따라 적었는데 The Urn Tomb, The Silk Tomb, The Palace tomb 그리고 하나는 못 적었는데 아레타스 무덤이라고 교수님이 말했다. [사진 참조] 자료에는 The Corinthian Tomb, Sextius Florentinus Tomb 등이 있다지만 어딘지는 모른다. 이곳에서는 멀리 아름다운 바위산도 보이고, 그 아래는 로마식 기둥 4개도 보이며, 왼편으로 가면 원형극장도 있는데 관중석은 파손되어 그런지는 모르나 정교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든다. 교수님과 알리는 무덤으로 올라갔으나 건강이 안 좋은 상태라 포기하고, '알카즈네 신전'으로 향하여, TV에서 방영하던 것을 생각하면서 지하까지 살펴보았는데 자세한 내용은 [3장 교회사의 요르단 역사
<알카즈네 신전>> ![](https://t1.daumcdn.net/cfile/cafe/1922D4104C899D840D)
페트라는 1980년대까지 이곳에 살던 베두인은 강제이주가 내려졌으며, 하루 3000명 찾아오는 관광객과 빈번한 마차 때문에 명상적인 관광은 힘들다고 하는데 오늘은 조용한 편이다. 걸어서 가도 될 만큼 가까이에 있는 에돔(Edom)호텔로 향했는데 페트라에 가면 아이들 눈 섶도 꼭 보고 사진도 찍어 와야겠다고 생각했으나여행기를 쓰면서 잊고 왔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페트라와 나바테아왕국의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 3장 교회사 유대 중에 (2) 헤롯1세
[10] 2007년 5월 5일 [토요일] 와디 럼(jeep 투어), 사해에서 수영 및 진흙 마사지 체험 배 아픈 것이 차도가 없어 받은 약들은 돌려주고 가지고 온 지사제만 먹기로 했으며, 호텔을 떠나 높은 곳에 이르니 멀리 산 정상에 흰색의 회교 사원이 아론이 죽었다는 호르산이라고 한다. ‘왕의 대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니 예쁜 산들과 바위, 모래사막이 보여 와디 럼이 가까웠다는 생각을 들게 하였고, 아마도 이스라엘 민족도 이곳을 통과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와디럼의 경이로운 경관>
[와디 럼(Wadi Rum) 투어] 사막 가운데 더 아름다운 산들이 있는 입구에 내렸는데 주위가 환상적이며,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는데 이곳을 '요르단의 그랜드 캐년'이라고 표현하지만 미국의 그랜드 캐년이 웅장하다면 이곳은 전혀 다른 기이한 풍경과 아기자기한 분위기이가 어느 면에서는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타고 갈 지프(jeep) 들이 주차장에 있는 것을 보니 어디서 그런 구닥다리만 모아 놓았는지 전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아 보였는데 그 중에 우리나라 기아의 스포테지도 1대 보인다. 4명씩 한조가 되어 차에 올랐으며, 남들은 실내가 있는 차량을 선택하였고, 가이드는 모래를 뒤 짚어 쓴다고 했지만 짐칸에 포장 친 트럭을 선택하였다. 나이어린 기사가 차를 운전하는데 속도계는 움직이지 않았고, 핸들은 유격이 심해 갈지(之) 자로 달리다가 그것도 얼마가지 않아 타이어가 펑크가 난 것이 아니라 아예 파손되었으며, 제품이 금강타이어이다. 기사가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니 차가 한대 달려오는데 아까 것보다는 좀 더 좋은 차량이다. 붉은 모래가 쌓여 있는 동네를 지나자 도로도 없는 모래 위를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으며, 얼마쯤 가다가 성경 언약궤의 조각목으로 쓰인 싯딤 나무 한그루와 베드윈 천막이 있는 곳에서 내렸다.
이곳은 바위에 새겨 있는 문자를 보기 위함이었고, 다시 차를 타고 내린 곳은 골짜기에 왕의 무덤이 있다는 카자린
마운틴에 도착하였다. 골짜기를 따라 조금은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었는데 이곳에는 그 귀한 물이 파인 바위에 고여 있으며, 입구에는 바위에 틈에 뿌리 내린 무화과나무가 있었고, 짐승의 똥 같이 생긴 열매도 떨어져 있다. 이곳에서 베드윈 천막에 들어가 남자마담이 끓여 주는 싸이 차도 맛보고 그들이 판매하는 차들도 구경하고, 그들 방식대로 앉아서 모델과 함께 사진도 찍었다.
이런 체험은 여행 중에 하나의 묘미를 느끼게 하여 좋았으며, 누가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미화 달러 맛을 알면 순진성을 잃는다.’고 했는데 그들은 어떻지 모르겠다. 천막을 떠나 차로 오는 중에 낙타를 타고 여행하는 젊은 서구인들이 오늘따라 더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는 다른 곳보다 유독 더 붉은 색깔을 가진 모래 언덕(제벨, Jebel)에서 어린이처럼 뒹굴기도 하고 뛰어 보기도 하며, 잠시 놀았으나 이런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 다시 휴게소가 있는 곳으로 나와 와디 럼의 체험을 마쳤는데 로렌스의 우물과 나바테아 왕조가 세운 사원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해 서운하였으나 우리 일정이 그리하니 어찌하라. 와디 럼은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아랍혁명 중 이곳에서 오랫동안 머물었고, 영화 장면 중 상당부분도 이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하며,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도 비행기 추락한 장소가 이런 장소지만 여기서 촬영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와디는 영문으로 wadi 또는 wady로 표기하며, 아랍어로 골짜기 또는 사막지방의 우기(雨期) 외에는 말라 있는 강이나 개울을 말하며, 럼은 영어로 rum 인데 우리는 술로 더 잘 알고 있으나 기묘한(queer), 이상한, 괴상한(odd) 뜻이다. 다시 북쪽으로 향하여 어제 수박 먹던 카타리나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어디가나 흔한 한국관광객을 처음 만나 반가웠고, 이 팀은 성지순례를 하는 중이었다. 다시 북쪽으로 이동하여 사해로 내려가는 길에 씨 레벨(sea level) 제로(Zero) 지점에 내려 기념사진을 찍고 지금부터는 바다 아래로 차를 타고 내려가는 형국이 되었다.
<와디 럼(기묘한 골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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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 체험] 사해 북쪽에 위치한 요르단 휴양소에 도착하여 옷을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사해 속으로 들어갔으나 12년 전애 이미 체험한 적이 있어 포기하고 사해 주변을 구경하였다.
사해 바닥에서 채취한 머드를 얼굴과 몸에 바르고 어린이처럼 즐거워하는 하였는데 물이 이스라엘보다 혼탁하여 기름띠처럼 보이는 것도 관찰할 수 없었으며, 관리도 허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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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 여학생들이 지나 가면서 신기한 듯 바라보기에 그들에게 과자를 권하였더니 하나씩만 집어 갔다. 로컬가이드가 마련해준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데 옆에서 그 학생들이 시리아 민속 무용인 답케 춤을 음악에 맞추어 추고 있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가이드는 이 나라 사람들은 함께 춤을 추지 않고 한 사람씩 따로 춘다는 설명을 듣고 있는데 한 학생이 내게로 다가와 같이 춤을 추자고 하였으며, 로컬가이드가 내 사진기를 받아들고 같이 추라고 권했다. 가이드 알리가 그들은 고등학생이라고 했는데 모르는 남자들과는 사진도 안 찍고 얼굴도 안 보여 주는 아랍학생인 그들이 손잡고 춤을 춘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3명의 학생과 함께 그들을 따라 엉터리로 춤을 추는데 알리는 열심히 따라 다니며 사진을 찍어 주어 색다른 체험을 하게 되었으며, 내 생애에 이런 일도 있다는 것이 매우 기뻤다. 오늘은 색다른 체험도 많이 했으며, 이런 여행도 일정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사해에서 들어간 사람 중에 제일 나이를 먹은 할머니가 가장 즐거워하며 수영복 입은 모습을 부끄러워 했는데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본 사해가 그렇게 가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지순례 여정에만 있어 오지 못하다가 이번에 오게 되었다며 오로지 이번 여행은 사해 때문에 온 여행이라고 하였는데 저돌적인 할머니에게 그런 면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해는 12년 전에 해저 -392m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412m라고 하여 그동안 20m나 더 줄었으며, 2050년쯤 완전히 없어질 것으로 유엔 및 환경단체들이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남아프리카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지구정상회의에서 홍해의 물을 사해로 끌어 들이는 10억 달러짜리 공동 사업계획을 발표했다고 한다. 중동의 마지막 코스인 사해를 떠나 암만으로 향해 전에 묵었던 호텔로 들어갔으며, 지사제 덕분에 배 아픈 고통도 사라지고, 저녁도 먹을 수 있어 진작 먹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요르단에서 본 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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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2007년 5월 6일 [일요일] 두바이 관광, 인천 향발 언제나 여행 때는 마지막 날이 되면 시원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기도 하지만 비행기를 타는 것이 부담이 되어 이왕 나온 것 좀 더 길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있는데 오늘은 일요일이자 생일날이다. 아침을 먹고 목사님 인도 아래 잠시 예배를 본 후 짐을 가지고 공항으로 향하였으며, 정들었던 미스터 최와 이별을
하고 비행기에 올라 3시간 정도 걸려 두바이 공항에 도착하였다. [아랍에미리트 연합국(The United Arab Emirates)] [아랍에미리트 지도] 면적: 83,600㎢(남한의 4/5), 인구: 400만명(2003) 아랍인 약 30% 나머지 70%는 인도, 아프칸 및 파키스탄 등 노동인력, 위치: 페르시아(걸프) 만 출구인 남동쪽의 호르무즈 해협연안, 사우디, 카타르 및 오만과 접경, 기후: 고온다습, 기온차가 큰 아열대성 사막기후(기온: 4,5월 30℃), 수도: 아부다비(Abu Dhabi), 주요도시: 두바이, 알아인, 샤자, 아즈만, 언어: 공용-아랍, 통용-영어, 종교: 수니 80%, 시아 20%, 정치: 7개 에미리트(토후국)로 구성된 연방대통령중심제로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며, 정부수반은 총리이고, 7개 Emirate의 Ruler로 구성, 독립: 1971.12.2, 화폐: 디람 환율은 US$ 1= 3.67 (고정환율), 두바이 교민: 약 470명, 역사: 1892-1952 영국과 각 토후국간 배타협정체결로 7개 토후국 위원회 구성 1958 아부다비에서 석유발견, 1968 영국정부가 1971년까지 영국군 철수 성명발표 1968.2.28 카타르 및 바레인 포함 9개 토후국, 연합최고 회의 결성에 합의 1970.6 카타르 및 바레인, 연합결성 안에 반대, 독자노선 채택, 1971.12 아랍연맹 및 UN 132번째 가입 1976.11 Zayed 대통령 취임, 2004.11.3 Sheikh Khalifa 대통령으로 선출됨. 아랍에미리트 대부분의 지역을 차지하는 아부다비를 비롯해 두바이, 아지만, 앗샤리카, 움알카이와인, 라스알카이마, 알푸자이라로 이루어져 있다. [두바이(Dubai) 관광] 우리나라와 시차는 -5시간으로 아랍에미리트나 수도 아부다비는 몰라도 두바이는 대분 알고 있는 곳으로 날씨가 매우 더웠으며, 가이드 최여사를 만나 7성급 호텔로 향하면서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 물가는 커피가 5만원, 식사가 12만원, 저녁은 15만원, 방은 1200만원에서 3.000만원정도라고 한다. 두바이 주민들이 잘 사는 이유는 ‘스폰서 제도’라고 하는데 이 제도는 이곳에서 사업을 하고 싶은 사업자는 주민을 스폰서로 계약을 맺어 허가를 얻어야 한다. 허가 때 스폰서에게 매달 지급할 금액이 정해지는데 주민은 적고 사업자는 많아 자연이 주민은 여러 개의 스폰서가 될 수 있어 일하지 않아도 많은 수입이 보장되기 때문에 주민들은 다들 잘산다고 한다. 또 이 나라는 모래 색깔도 다양하여 7가지 모래 색은 7개의 토호 국을 상징한다고 하며, 사막인 이곳에 실내 스키장이 있다고 하여 놀랐는데 이곳에 갈 것이라고 한다. 현지인들의 인사법은 ‘앗쌀라무 알라이쿰’으로 중동의 ‘살랴 마리큼’ 하고는 조금 차이가 있다. [버즈 알 아랍(Burj Al Arab) 관광] 부자들이 산다는 주메라 지역에 있는 해수욕장에서 내려 해변에서 돛단배 모양의 ‘부르즈(버즈) 알 아랍’ 호텔을 바라보며, 과연 7성급 호텔이라고 할 만하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빛을 안고 있어 사진에 아름다운 호텔이 안 나오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으며, 차를 타고 400m 길이의 다리를 건너 정문에서 내리어 정면을 구경하였다. 인상적인 것은 접시 안테나 같이 생긴 헬기착륙장으로 착륙장 위에서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가 나이키 선전을 위해 드라이버 샷을 날리는 영상을 촬영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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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호텔을 구경하려면 전에는 입장료 200디람(한화로 약 7만원)을 내야 했으나 지금은 식당 등의 예약권이 있어야 입장할 수 있다고 한다. 참고로 버즈(Burj)는 영어로 타워(Tower) 뜻이라고 하며, 아랍어로는 '부르즈'라고 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별 개수로 호텔등급을 매기는 것은 나라마다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별이 호텔등급을 표시하는 것은 공인된 것은 아니라고 하며, 별 개수로 표시되는 호텔등급은 5개가 최고라고 한다. 다만 6성급, 7성급이라고 부르는 것은 해당 호텔이 마케팅 차원에서 쓰는 표현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특1급, 특2급은 금색바탕에 금색무궁화로 표기하고, 1급 2급 3급은 초록색바탕에 금색무궁화로 표기하여 5개가 제일 높은 등급이지만 얼마 전에 유일하게 무궁화 6개짜리 호텔도 생겼다. [수크 메디나트 주메라(Souk Madinat Jumeirah) 관광] 이곳을 떠나 주메라 비치에 있는 수크 메디나트 주메라(Souk Madinat Jumeirah)라는 아랍식 상가가 밀집되어 있는 곳에서 내려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주며, 주위를 구경하라고 한다. 안 그래도 짧은 일정에 여기서 시간을 다 허비하면 다른 곳은 언제 보려는지 걱정이 됐으나 주어진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하여 교수님과 함께 열심히 움직였다. 상가는 생각보다 넓었고, 골목이 많았으며, 중앙에는 아름다운 인공호수가 있었고, 오른편에는 왕궁같이 큰 건물이 있었으며, 왼편에는 ‘부르즈 알 아랍’ 호텔이 크게 보인다.
상가 밖으로 나아가 어디인지도 모르지만 인공호 주변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가니 호텔도 있고 다리도 있어 다리를 건너 해변 쪽으로 나아가다가 수영장, 어린이 놀이터도 있었다. 인공으로 만들어진 길과 화단에는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고 새들의 소리도 들을 수 있었고, 해변에 도착하니 ‘부르즈 알 아랍’ 호텔이 아주 잘 보이고, 햇빛도 뒤에 있어 사진 찍기에 좋았다. 어디인지도 모르지만 계속해서 가자 바다 가운데 유리벽체로 되어있는 둥근 건물이 나무다리로 연결된 곳이 있어 다리 위를 중간 쯤 가보았는데 이 건물이 주메이라 카페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다리 위에서 페르시아(걸프) 만의 맑은 바다도 보았으며, 왼편을 바라보니 멀리 그 유명한 팜 아일랜드의 공사현장을 볼 수 있었던 것이 큰 행운이었다. 불모지인 사막에 인간의 힘으로 나무도 심고 꽃도 피워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도 만들고, 그 많은 초고층 빌딩에 사는 사람들의 식수는 어떻게 하는지? 인간의 힘도 위대하지만 돈의 힘도 위대했다. 수크는 낮에는 조용한 상가이지만 밤엔 옆에 있는 무도회장에 젊은 남녀가 모여 소란스러운 모습이라고 하며, 술집 종업원이나 매춘에도 중국 여성이 많다고 하고, 요즈음엔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로 중국 사람과 중국 상품이 두바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다시 차를 타고 민속박물관으로 가는 도중에 많이 막혔으며, 가는 도중에 우리나라 삼성물산이 건설하는 버즈 두바이도 보였고, 이 타워는 ‘사막의 꽃’을 형상화 했다고 하였다. 아마도 ‘사막의 꽃’은 ‘사막의 장미’라고도 하는 사막에 모래가 만든 꽃을 말하는 것 같았으며, 모로코에 갔을 때 한개 구입 한 적이 있어 모양을 알고 있는데 실제 타워의 모양도 ‘사막의 꽃’을 연상케 한다. 이 타워는 두바이 이야기에서 좀 더 이야기하기로 한다. 또 국내 건설사로는 최초로 두바이에 진출하여 건설한 305m의 에미리트 타워호텔과 옆에 있는 두바이 그랜드 하얏트 호텔도 볼 수 있었으며, 고층건물 유리창 전체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것도 볼 수 있다. 인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의 건설 노동자들이 퇴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며, 그들의 고달픈 삶에 대한 이야기도 들으며, 처음엔 처녀로 알았던 최여사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뒤에 보이는 흰 건물이 '부르즈(버즈) 알 아랍’ 호텔이고, '수크 메디나트 주메라'의 아름다운 인공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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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박물관 관광] 박물관에 도착하니 이미 캄캄한 밤인데도 입장이 가능했고, 조명 때문인지 하늘엔 새들도 많았다.
박물관은 1800년대에 바다암석과 석고로 건축된 ‘알파히다 요새’로 지상에는 당시에 사용하던 배와 천을 이용하여 시원한 바람이 실내로 들어오게 하는 장치는 비록 원시적이지만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지하에는 그들의 조상이 살았던 모습과 환경, 그리고 배 만드는 모습 등을 현대 기술을 도입한 조명과 음향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는 작은 박물관으로 한 쪽엔 기념품을 파는 곳도 있다. 박물관을 나와 이번 여행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식으로 저녁을 먹었는데 참으로 감격적이었으며, 생일상으로도 이만하면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식당주인은 대우기술자로 왔다가 이곳에서 정착한 사람인데 작년에 이 나라 수도인 아부다비의 45만 명의 1인당 수입이 얼마인줄 아느냐고 물었으며, 무려 170억이라고 하여 우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크릭해의 아브라 탑승과 금시장(Gold Souk)] 강 같이 생긴 크릭해가 브루 두바이와 데이라 지역으로 나누며, 두 지역을 오가는 배가 아브라이며, 아브라를 일명 수상택시라고 하는데 우리가 탄 배는 어선을 개조하여 만든 어설픈 유람선이다. 간판에 앉아 20분 정도 두바이 야경을 구경하면서 노래도 불렀는데 물에 비친 도시 야경이 아름답다. 제일 큰 금시장은 문을 닫았다고 하여 두 번째로 크다는 금시장을 찾았는데 한 청년이 대추야자에 대하여 설명을 하였지만 이미 페트라에서 다 구입한 관계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없었다. 살 것도 구경할 것도 없어 쇼핑이 끝나기만 기다렸다가 실내 스키장으로 향했다. |
![](file:///D:/in-history/img7/07-26-23.jpg) <수크 메디나이트 주메라에서 바라본 전경>> |
[스키 두바이(ski dubai)] 쇼핑몰과 음식점 등의 부대시설이 함께 있으며, 실내 스키장은 들어가지 못하고 유리창으로 들어다 보니 리프트와 어린이를 위한 놀이터도 보였다. 스키복도 렌탈도 가능하다. 슬로프도 상당히 좋고, 점프대도 있다고 하지만, 이런 곳에서 즐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더 부러웠으며, 가게는 대부분 문을 닫았고, 열려 있는 곳도 가격이 비싸다. 마지막 관광을 마치고 공항으로 향했다. [두바이 이야기] 두바이 아랍어로 메뚜기라는 뜻으로 삼다(三多)와 삼무(三無)가 있다고 하며, 삼다는 타워크레인, 고층건물, 외국인이며, 삼무는 세금, 비자, 범죄가 없는 나라라고 한다. 두바이에서 유명한 사람 셰이크 모하메드가 계획한 버즈 알 아랍, 버즈 두바이, 두바이 팜 아일랜드, 세계의 섬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로 한다. (셰이크 모하메드, Sheikh Mohammad) 그는 아버지 셰이크 라시드의 4형제 중 3번째로 1951년 탄생하였고, 1955왕세자가 되었으며, 영국의 명문학교에서 어학공부를 하였고, 혹독하기로 이름난 몬스사관학교에서 영국식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 때 우수한 점수를 받아 외국사관생도에 수여되는 ‘영예의 검’을 받기도 했으며, 귀국하여 1971년 20살에 국방장관을 지냈고, 경찰총수에서 건식도크와 국제공항운영의 중책을 맡았다. 그는 석유가 고갈되는 때를 대비하여 세계최고의 항공, 관광, 금융, 물류의 허브로 개발하여 2020년부터 매년 1억 명의 관광객을 유치한다는 일반인이 생각지 못한 상상력으로 창조적인 계획을 이루어갔다. 그 업적으로 2005년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를 변화시킨 지도자 100명’에 선정되었으며, 사재 100억 달러를 중동지역 교육 사업에 쾌척하기도 했다. 그는 대단한 승마 광으로 1.500밀의 명마를 소유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2006년 1월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이복형의 뒤를 이어 총리 겸 부통령에 올랐으며, 2007년 5월 21일 1박 2일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버즈 알 아랍 호텔) 두바이남쪽 15㎞ 주메이라 해변에 위치하는 이 호텔은 자칭 ‘세계 유일의 7성급 호텔’이라 자랑함께 그 높이도 자랑하는데 높이 321m로 에펠탑보다 높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보다 60m 낮다. 2년 동안 공사를 해서 만든 인공 섬 위에 지어진 27층에 202개의 방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일반실 1일 2인 150만원(1인당 700$정도) 정도이고, 주방과 거실 등이 있는 스위트룸은 1,500만원이며, 가장 비싼 로얄 스위트룸의 경우 3500만원에 이른다고 한다. (버즈 두바이) 07년 5월15일 대만의 450m보다 2m 더 높은 ‘452m 콘크리트 쏘아 올리기’ 세계신기록 수립하여 세계 초고층 건물 시공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 삼성물산의 광고 문구가 '역사가 솟아오른다.(History Rising)’이라고 한다. 회사 측은 한강에서 남산 서울타워의 꼭대기까지 콘크리트를 쏘아 올리기 위해서는 콘크리트의 점성도를 물처럼 묽게 해야 한다고 하며, 4500여명의 기술인력이 50도를 넘는 한낮에는 작업을 못하게 돼 있어 해가 진 뒤 작업하는 밤에도 35도 수준인데 3일만에 1층씩 올리는 독창적인 공법으로 126층을 완공했다고 한다. 이 타워는 2009년 완공 시 세계 최고층 건물로 160층에 높이는 700m이상라고 하지만 이것은 잠정수치라고 하며, 정확한 높이를 발표하면 다른 곳에서 더 높은 건물을 발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층인 대만 TFC 101빌딩(508m)보다 200∼300m 높아 당분간 최고층 자리를 고수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본래 버즈 이 땅은 국왕 친위대가 근무하던 자리로 개발계획이 수립되자 친위대도 신속히 이전하여 셰이크 모하메드 정부의 개발의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타워는 40층까지는 호텔, 100층까지는 아파트, 160층까지는 고급 사무실로 사용할 예정이라고 하며, 삼성물산은 9000억 원에 공사를 하였으나 분양가 금액은 8조원이 되리라고 한다.
<우리나라 삼성물산이 건설 중인 세계 최고의 건물 버즈 두바이>
(두바이 팜 아일랜드, Dubai Palm Island) '야자수(Palm) 모양의 섬' 뜻인 이곳은 해안에서 8㎞ 떨어진 바다 위에 3개의 인공 섬으로 구성되는 팜 주메이라 (Palm Jumeira), 팜 제벨알리(Palm Jebel Ali), 팜 데이라(Palm Deira)이다. 달에서도 식별이 가능하다는 이 섬은 17개의 야자수 잎과 줄기, 초승달 모양의 방파제로 이뤄졌고, 지름 7.5km, 둘레 24㎞, 면적 2.5k㎡으로 2006년 1월에 시작하여 2008년 말에 완성 예정이라고 한다.
<두바이의 팜 아일랜드 모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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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 해안선의 길이를 4배로 늘리겠다는 황당한 발상이 실제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이곳은 공사비만 140억 달러가 된다고 하며, 팜 제벨알리의 해상교량 공사 2개소를 삼성물산 3.5억 달러에 수주했다고 한다. (세계의 섬, The World Islands) 약300개의 인공 섬으로 세계지도 모양을 만든 것으로 2008년 완공 예정이며, 4개로 구성된 개인 집, 부동산, 꿈의 리조트, 골프 장등 공동체 섬을 오가는 교통수단은 보트와 항공기라고 한다. 셰이크 모하메드의 꿈과 상상력도 위대하지만 한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는 이렇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 더 감명 받았으며, 작년 5월 우리 대통령도 그곳에 갔었는데 무엇을 배웠는지 궁금하다.
[12] 2007년 5월 7일 [월요일] 두바이 출발 인천공항 도착 두바이 공항에는 쇼핑할 수 있는 시설이 잘 되어 있었지만 물건 값은 비싸서 살 것이 없었지만 두바이를 기념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 대리석으로 만든 작은 낙타하나를 샀다. 지루하고 길었던 비행기를 탑승하여 갈 때보다는 1시간 정도 적게 9시간을 타고 인천에 도착했다. 서로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지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기다렸다가 생일 때문에 가족이 기다리는 충주로 향하면서 언제 또 어디를 여행 할 것인지 생각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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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림 감사합니다
정말 멋진 풍경......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