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소씨30세조 휘 자파 유사(贊成公 諱 自坡 遺事)
공(公)의 휘(諱)는 자파(自坡)요, 자는 미수(眉수)이다. 공은 단기 3785년(서기 1452년) 문종(文宗) 임신년(壬申年)에 완주군 이서면 본가에서 부(父) 한성부 판관(漢城府 判官) 휘 효식(效軾)과 모(母) 증 정부인(贈 貞夫人) 전주최씨(全州崔氏)와의 사이에서 3남 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공은 단기 3816년(서기 1483년) 성종(成宗) 계묘년(癸卯年)에 성균생원시험(成均生員試驗 : 司馬試)에 합격하여 많은 유생과 교분을 가지면서 뛰어난 풍채(風彩)와 조리있는 달변(達辯)으로 명성을 높였으나 당시 당파싸움이 치열하고 비리(非理)와 부정(不正)에 야합하지 아니하면 관직에 오를 수 없음을 알면서도 이를 배격하고 지조(志操)를 지킴으로써 등용되지 아니하고 고향에 내려와 부모에게 지극한 효도를 다해가며 자녀들에게 시서례(詩書禮)의 교육을 시키는 한편 대자연과 더불어 쾌락하게 지내고 있었다.
20여년간 이런 생활로 일관하고 있을 때인 단기 3843년(서기 1510년) 중종(中宗) 경오년(庚午年)에 신용개(申用漑)가 인재 등용의 전형(詮衡)을 맡으면서 공을 천거하여 58세의 나이로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의영고 주부(義盈庫 主簿)로 전보되었다.
공은 중앙 관서에 있으면 부모 봉양이 어려워 외직을 요청하여 남평현감(南平縣監)이 되었다. 공은 현감에 부임하여 온화하고 인자하며 정성으로 현민을 다스리게 되어 현민들의 칭송이 많았으며, 다시 중앙관서인 사직서령(社稷暑令)으로 발령되어 떠난 후에 남평현민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그후 부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마친 후 의빈부 도사(義賓府 都事)에 기용되어 재직 중 공은 모친의 봉양을 위하여 다시 외직을 요청하여 구례현남(求禮縣監)에 부임하게 되었다.
이때 둘째아들 대사간(大司諫) 세량(世良), 다섯째아들 참의(參議) 세양(世讓)이 절기마다 문안하여 역마(驛馬)를 타고 중앙에서 구례에 당도할 때 이를 보는 현민들은 공을 지상의 신선이라고 부러워하였다.
공의 자녀들이 다같이 훌륭하게 되고 부러울 것이 없었으나 뜻밖에 병을 얻어 졸하니 이때가 단기 3857년(서기 1524년) 중종(中宗) 갑신년(甲申年) 9월 8일이며 수는 73세이다. 공은 아들 세양(世讓)이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겸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오르자, 가선대부 이조참판(嘉善大夫 吏曹參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증직받았다.
공은 정경부인(貞敬夫人) 개성왕씨(開城王氏)와 혼인하여 아들 여섯과 딸 하나를 두었으니 장남 세온(世溫)은 어모장군 임치진첨절제사(禦侮將軍 臨淄鎭僉節制使)로 진주소씨 첨사공파조(僉使公派祖)이고, 차남 세량(世良)은 승지 대사간(承旨 大司諫)이고 남원현감(南原縣監)이며 곤암공파조(困菴公派祖)이고, 삼남 세공(世恭)은 마량진 수군첨절제사(馬梁鎭 水軍僉節制使)를 역임한 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포정공파조(圃亭公派祖)이다.
사남 세검(世儉)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쌍봉공파조(雙峰公派祖)이며, 오남 세양(世讓)은 육조판서(六曹判書)를 역임한 후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과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이르렀고 양곡공파조(陽谷公派祖)이고 육남 세득(世得)은 조양대부 흥양현감(朝陽大夫 興陽縣監)으로 흥양공파조(興陽公派祖)이다.
그 외 칠남 세신(世臣)은 첨추(僉樞)이다. 만년에 손자, 증손, 현손에 이르기까지 80여명에 이르는 대가족을 이루게 되었고 이후 더욱 번성하여 익산과 전주지방의 대가(大家)를 이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