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무기고에 '보관'만 했다
"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는 신무기 조총(鳥銃)은 임진왜란(1592년) 전후 시기에
처음 조선에 선보였다. 일본 침략군에 의해 위력이 입증되면서, 이후 300여년간
조선군의 주력 개인화기로 정착했다.
우리나라의 화승총 도입 - 정착과정에 대해서는 많은 이설(異說)이 존재한다.
야사(野史)와 전래속설 혹은 일방적인 주장을 담은 기록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본질이 왜곡되는 현상마저 나타나고 있다.
강화 화승총동호인회는 조선의 화승총역사를 정사(正史) 왕조실록기록에 입각,
정확한 팩트(fact)만을 추출해 그 역사적 의미 등을 나름대로 분석해보자 한다.
이 기획연재는 임진왜란 직전인 1589년을 출발점삼고 대한제국을 대단원으로,
연대기(年代記)형식의 글 꼭지를 잇댈 예정이다. <필자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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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마도주 타이라 요시모토가 임진왜란 3년전,
일본신무기 '뎃포'를 조선조정에 진상했던 진짜 속뜻은?
조선에 화승총이 전래됐다는 첫 기록은 선조임금22년(1589)에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임금 수정본 7월1일(음력)자 기록엔 이렇게 적혀있다.
義智等獻孔雀一雙、鳥銃數件,
命放孔雀于南陽海島, 藏鳥銃于軍器寺。
我國之有鳥銃, 始此。
직역하면 이런 내용이다.
의지 등이 공작새 1쌍과 조총 몇 자루를 바쳤다.
공작은 남양만의 해도에 방목하라고 하명했으며, 조총은 군기시가 보관하도록 했다.
우리나라가 조총을 보유하게된 것은 이때부터다.
* 필자註; 의지(義智)는 당시 일본의 20대 대마도주(對馬島主)였던
타이라 요시모토(平義智; 1567-1615)를 일컫는다.
조총을 보관한 군기시(軍器寺)는 조선시대 중앙 병기제조창.
일본의 뎃포는, 당시 칼과 활이 주력병기였던 조선에 유출되지 말아야 할 '일급비밀'에 속하는
물건이었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대마도주는 왜 조선조정에 조총을 선물로 바쳤을까.
그 배경을 살피려면, 당시 일본의 국내사정부터 먼저 이해해야만 한다.
당시 일본은 15세기 중반부터 150년간 전국토가 피바람에 휩싸인 전국시대(戰國時代)를
서서히 마감하면서,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 1536 -1598)가 일본통일의 업적을
달성, 에도 바쿠후(江戶幕府) 시대를 굳혀나가는 순간이었다.
일본 전국시대는 1543년 타네가시마(種子島)에 전래된 포르투갈 화승총을 힘겹게 모방복제,
대량생산하는데 성공( * 이 부분은 카페의 '일본의 화승총' 편에 자세히 소개돼 있다. 참조바람)해
그 막강한 화력을 내전에 도입하는 등 '전투혁명'을 경험한 바 있었다. 화승총 위력에 자신감을 얻은
토요토미는 내전으로 분열된 국력을 다시 하나로 결집시키고, 그 힘을 "대륙진출"에 쏟아붓기로
결심하고 치밀한 전쟁준비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당시 대마도는 호족 종씨(宗氏)가 대대로 도주를 맡으면서 조선과 긴밀한 무역창구 역할을
수행했는데, 마치 조선의 한 속지(屬地)처럼 평화로운 선린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국시대 말기 큐슈(九州)정벌에 성공하면서 더욱 막강해진 토요토미히데요시는 무력을 앞세워
대마도주의 '무조건 복속'을 요구했고, 대마도주는 어쩔 수 없이 "바쿠후에 충성할 것을 맹세" 했다.
나아가 대마도주 타이라 요시모토는 일본의 조선정벌 전쟁에 장수로 참전,
앞장서야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됐다.
그런 '극심한 정세변화'의 와중에 대마도주 타이라 요시모토가 조선 선조임금에게 진상한 조총 몇자루,
거기에는 어떤 뜻이 담겨져 있을까. 미루어 짐작컨데 "일본이 이 무시무시한 새로운 무기로 곧 조선을 침략할 것이니,
보내드린 조총을 철저히 분석해 그에 대비하기 바랍니다"라는 메시지가 담겼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당시 대마도주 타이라 요시모토는 조선에 매우 우호적이었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도
일본 장수로 출전은 했지만 전투내내 고니시유키나카(小西行長) 등 일본수뇌부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려 "조선과의 화친, 강화"를 주장하고 유도하는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조정은 일본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소위 '동인과 서인' 당파의 거두였던
김성일(金誠一 ; 호 鶴峯,1538-1593)과 황윤길(黃允吉; 1536-15??)을 일본사신으로 파견했다.
그때 대마도를 다녀온 김성일은 방문기록을 남겼는데, 거기에는 대마도주 타이라 요시모토의
'대조선 공경' 자세가 잘 드러나고 있다.
金鶴峯先生奉使日本,至對馬島.
島主平義智請使臣宴山寺.
使臣己在座,義智乘轎入門,至階方下.
公怒曰,"對馬島乃我國藩臣,使臣奉命至,豈敢慢侮如此?吾不可受此宴."
卽起出,義智歸咎於擔轎者,殺之,奉其首來謝. .
自是,倭人敬憚,待之加禮,望見下馬.
김학봉 선생이 왕명으로 일본사신이 돼 대마도에 이르렀다.
대마도의 우두머리인 평의지가 사신을 산속 사찰의 연회에 초대했다.
사신이 이미 도착해 자리에 앉았는데, 의지는 가마를 타고 문을 지나 계단에 이르러서야 내렸다.
김학봉 선생이 노하여 말하기를, "대마도는 조선 변방 신하에 불과한데, 왕명을 받들어 사신으로 왔거늘,
어찌 감히 이와 같이 깔보는가? 나는 이 잔치를 받아들이지 않겠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버리니, 의지는 가마를 멘 사람의 잘못이라며 그를 죽이고
그 머리를 들고가 학봉선생에게 사죄하였다.
이 때부터, 왜인들은 사신일행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예를 더했으며,
멀리서 보기만 해도 말에서 내렸다.
타이라 요시모토의 '뎃포' 선물을 받은 조선 선조임금과 그 총을 처음 대면한 조선의 중신들.
그들은 한결같이 - 조총을 "군기시 창고에 보관" 했을 뿐, 누구하나 관심을 두지 않았다.
3년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그 뎃포에 조선군이 무참히 살상되자 그때서야
"조총을 모방생산하라" 며 다그치고 닦달하기 시작했다.
참 서글픈 - 우리 역사의 한 장면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27285384F2B60BD37)
▲타이라 요시모토(平義智)의 초상.
소요시토시(宗義智)라고도 불린다.
대마도 종씨(宗氏) 20대 도주이자
에도 바쿠후체제로 바뀌면서 초대
쓰시마섬 영주(藩主)로 임명됐다.
■ 임진왜란 1년전 - 조선조정은 "30만정의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곧 조선에 쳐들어간다"는 믿을만한 첩보를 접했다.
선조임금 24년(1591년) 6월21일.
조선조정은 일본 큐슈의 사쓰마(薩摩州; 현재의 가고시마 鹿児島)에 끌려갔다가 탈출한 중국 명나라 사람
허의후(許義後)가 투서한 "일본의 조선, 중국침략 준비완료" 란 내용이 담긴 진주문(陣奏文; 보고문서)을
입수했고, 그 속에는 일본군이 조총으로 무장한다는 사실도 적혀있었다. 이 보고문서는 조선이 일본에 바쳤다는
조공부분과 실제 일본군출동 병력규모에서 과장이 포함된 것만 제외하면, 나중에 거의 대부분이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다. 허의후의 보고문에서 조선과 관련된 부분을 발췌해보면 다음과 같다.
5월에 조선이 노새를 바쳐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유구국(오키나와)에 부탁했던 말로 다시 부탁하면서
금 1백 냥을 주었는데, 조선이 왜국에 조공을 바친 것은 지난 해부터였습니다. 7월에 광동(廣東)
호경(壕境) 사람이 명나라의 지도를 바쳐왔습니다. 토요토미는 일본전국에 명령하여, 비전(肥前)·
일기(一岐)·대마도(對馬島) 이 세 곳에 성을 쌓아서 관역(官驛; 수송병참기지)을 마련하라고 지시하고
또 대마도 태수에게 명하여 장사꾼으로 변장하고 바다를 건너 조선에 가서 지세를 살펴보고 돌아와
보고하게 하였습니다.
10월에 조선 왕이 군대를 20일 거리로 퇴진하여 토요토미를 기다리고 있다 하였습니다.
금년 신묘년 7월에는 고려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고 볼모를 잡히면서 토요토미에게 속히
결행할 것을 촉구하였다고 합니다. 11월에 토요토미가 문서를 일본전역에 두루 회람시켜, 내년 봄
조선으로 건너가 일본백성을 모두 그곳으로 이주시켜 농사를 경작하게 하고 명나라를 쳐부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려 합니다.
토요토미는 사쓰마주에 명하여 정병 2만, 대장 2인으로 고려에 건너가게 하였습니다. 66국에서
징발한 병사 50여만에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지휘하는 병사 50여 만 도합 1백만, 대장 1백 50명,
전투용 말 5만 필, 대서도(大鋤刀; 대형호미칼) 5만 자루, 참도(斬刀; 목치는 칼) 10만 자루,
장창(長槍; 긴 창) 10만 자루, 파시도(坡柴刀; 장애물제거용 칼) 10만 자루, 조총 30만자루,
장도(長刀; 긴칼) 50만에다 삼척검(三尺劒; 90센티짜리 양날칼)은 사람마다 갖게 했습니다.
- 실록(實錄) 조선군 화승총(1) - 조총과의 첫만남. 끝
* 본문내용은 강화 화승총 동호인회의 소중한 지적재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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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미 지나간 역사라지만, 안타깝네요.
사실은 지금 위정자들도 그때와 의식면에서
별로 달라지지 않은 듯 여겨지네요.^^!
사대주의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네요.. 국민들 손에 총이 쥐어질까봐 벌벌떠는건 지금이 더 심하구요. 전쟁나면 민유총기도 바로 폐총시킨다고 총기담당 경찰이 그러더군요.
암튼 미국형님이 지켜주니 우리나라 참 든든합니다..ㅎㅎ
ㅋㅋㅋ 대한...미국....이라지요?